# 1화.
#프롤로그. 스물여덟, 여름의 시작
그날은.
어느 여름의 따듯하고 좋은 날이었다. 사실 개인의 모든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니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비는 오지 않았고, 그것만으로도 재이에게는 좋은 날이었다.
“재이 씨, 뭐 하고 서 있어? 안 나가?”
“아, 이제 나가려구요.”
이렇게 여름의 비가 오지 않는 모든 날에, 재이는 볕 쬐는 화분처럼 창가에 서 있고는 했다. 꼭 그날 같은 생각이 들어서, 돌아보면 누군가가 같은 말을 건넬 것만 같아서.
“아우, 여기 교차로부터 얼마나 막히는지. 누가 그렇게 좋아한다고 이 난리야?”
“에이, 과장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월드컵인데.”
“그러니까 그걸 누구 돈으로 다 한다는 거야? 세금 아니냐구, 세금.”
벌써 몇 번은 반복한 이야기에 영미가 재이를 향해 눈을 찡그리며 싫은 티를 냈다. 여기 더 있다가는 자신에게도 같은 이야기가 반복될 것이 분명하다.
“저 진짜 가볼게요. 샘플 전달하고 공장도 들러보고.”
“그래. 가서 말 잘하고. 혹시 그쪽 사람이 좀 마땅찮게 굴더라도 그러려니 해. 알지?”
“네.”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표 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해도 된다는 표현을 그렇게 크게 해줬는데도 김 과장은 당부에 당부를 덧붙였다.
비위 좀 잘 맞추고, 웃어주고, 모른 척도 좀 하라고.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모든 일들도 사회생활에서는 가능해야 했다. 평소라면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소심한 싫은 티 정도는 냈겠지만 오늘은 군말 없이 문을 열었다.
“아.”
벌써부터 공기가 후끈한 것이 여름의 때 이른 전조인지, 코앞으로 다가온 2002월드컵의 기대 심리 덕분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원래 이쯤 되면 늘 이 정도 열기는 녹아 있는 건지도.
“이쪽 길로 가시면 안 돼요. 돌아가세요.”
대로변에서 다음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재이의 앞을 경찰 하나가 막아섰다. 몇몇 사람들은 대놓고 짜증을 내기도 하고 또 몇은 괜한 시간낭비를 하기 싫은지 바로 물러섰다. 그리고 재이는 잠시 멈춰 서서 물끄러미 앞을 보았다.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거 월드컵 개막식 하는 거 미리 맞춰본다고. 30분은 더 있어야 끝나요.”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닌데 한번 넘겨다본 경찰이 일러주었다. 역시 그랬구나, 대단한 행사긴 하구나. 그러고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간이 빠듯하지는 않아도 넉넉한 것도 아니건만 무슨 정신인지 알 수가 없다. 자신과는 영 상관없는 일인데 남들이 신난다니 그런 마음도 공기 중에 옮아오는 모양이다.
그 순간에는, 그냥 그 정도라 생각했다. 화창한 날씨에 아무리 그녀가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고 해도, 도로가 통제되는 흥겨운 행사 하나까지 과거와 결부시키지는 않았다. 기억 속의 그날은 지금보다 훨씬 더 덥고, 멀고, 떨렸으니까.
“재이 씨는 날이 갈수록 예뻐지네.”
“감사합니다.”
여기서 아니네 맞네 겸손을 내세우면 말만 더 길어진다. 뭐든 적당히. 이게 바로 김 과장이 원하는 거였다.
“남자친구 있어?”
“네.”
“에이, 없는 거 다 아는데.”
“있어요.”
뻔한 수작도 모른 척했다. 이 정도는 김 과장 말 없이도 알게 모르게 넘길 수 있었다.
“여기 한번 보시면요, 지난번에 드린 샘플에서 업그레이드 됐는데.”
“그럼 더 비싸다는 거잖아.”
“네. 그렇긴 한데 만져만 봐도 확실히 감이 달라요. 여기 한번 직접 만져보세요.”
“직접 만져? 무슨 그런 야한 소리를 해?”
거래처의 남자 직원 몇몇이 키득거렸다. 저 사람들도 사회생활 하는 중이니 저렇게 웃기다 표시를 해줘야 상사 면이 선다는 것을 잘 알았다. 진짜 이게 웃겨서 그런다고 생각하면 괜히 저만 서글퍼진다.
“샘플은 여기 놔두고 갈게요. 김 과장님이 오후에 전화 드린다고 하셨는데 그 전에 한번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 안 일어서면 곤란한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그건 직장생활 7년차인 그녀의 감으로, 그 곤란한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줄 만한 사람도 없다. 기껏해야 모른 척하는 정도겠지.
“벌써 가?”
“네. 전화가 와서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 와중에도 인사는 깍듯이 하고 나왔다. 허겁지겁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속도를 늦추었다. 애초에 전화는 온 적도 없다.
내가 너무 피곤하게 사나, 아니면 그냥 평범한 건가?
시계를 보니 공장까지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그나마 이쯤에서 끊고 나온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방향을 바꿨다. 1년에 택시를 타는 건 서너 번도 안 됐는데 오늘이 그 날이었다. 아무래도 도로 통제하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던 탓이 컸겠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월드컵 그깟 게 뭐라고.
재이가 작게 웃었다. 남 탓 하는 거 싫어했는데 어리석게 굴었다. 정작 정신 팔고 있었던 것은 자신이면서 꼭 누가 억지로 그곳에 붙들어놓은 것처럼 투덜댔다. 어깨 한번 털고 큰 도로로 곧장 나왔더니 아직도 꽉 막혀 있다. 이쯤 되면 월드컵이라 짜증 내는 김 과장 마음도 억지는 아니다 싶어 그녀도 급한 대로 샛길을 찾았다.
“여기요!”
안 타던 걸 타겠다 마음을 먹어 그런지 오늘따라 택시도 안 잡혔다. 기껏 잡은 택시도 목적지를 듣고는 바로 창문을 올려버렸고, 그렇게 서너 대를 더 지나보냈다.
“신림동이요.”
“이 시간에 먼데.”
그러고도 가지 않길래 혹시나 타라는 건가 싶어 희망을 가졌다. 한 발 더 도로로 나서 뒷좌석 문을 열려고 했다가 기사 아저씨의 눈이 다른 데 가 있는 것을 알았다.
“어디?”
내가 아니구나. 민망함에 도로 걸음을 물려 몸을 돌리는데 장신인 남자의 가슴께에서 눈이 멎었다.
“손님, 어디 가시냐고?”
“아닙니다.”
투덜대던 택시 기사가 곧바로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목적지를 말조차 하지 않은 남자에게 궁금증이 생겼지만 제가 물을 일도 아니다. 하지만 빨리 장소라도 옮겨 제 급한 볼일부터 봐야 할 그녀의 앞이 두 번이나 가로막혔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그 남자가 자신에게 볼일이 있다는 뜻이다.
“이재이.”
고개를 들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제 이름 불리는데 확인하지 않을 여자는 없다.
“이재이 너 맞네.”
아, 오늘 이러려고 그랬구나. 그때 생각이 많이 난다 했더니 이런 날도 다 있구나.
“너 나 몰라?”
잘 알았다. 다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오랜만이야.”
너무 반갑거나 들뜬 듯 들리지 않게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것 역시 사회생활 꽤 해봤으니 적절히 조절이 가능했다.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재이가 고개의 위치를 바꿔봤다. 이름이라도 말해줘야 할까?
그는 여전히 잘생겼다. 제 키가 줄어든 것이 아닌 이상 그의 키는 확실히 더 커졌고 얼굴은 조금 그을었다.
길게 서늘한 눈은 남자다운 매력을 더했고 날카로운 턱선이나 현실감 없는 콧날은 진짜가 맞는지 만져보고 싶어졌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머리였는데 확실히 그 길이가 전과 비할 바 아니었다. 눈을 덮기 전의 앞머리가 바람에 흩날리자 일자의 진한 눈썹이 보였다 마는 모양새가 감질 난다.
윤제희, 오랜만이야. 이제 확실히 기억하는 거 맞지?
이렇게 이야기하면 만족하려나. 하기야 그는 누구에게도 잊힐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희야. 뭐 해? 안 가고.”
해를 등지고 다가온 여자가 그의 이름을 먼저 불렀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마주 서 있던 재이는 바로 보았다. 눈이 부셔서 음영만 간신한데도 상당한 미인의 태를 갖췄다.
“이재이.”
친한 척 이름 안 부르길 잘했구나 싶었다. 할 말이 없어 잠깐 웃었더니 그가 해를 가렸다.
“진짜 나 몰라?”
이 정도면 뭐라도 대답을 해야 했다. 들고 있던 짐이 무거운 것도 모르다가 손에 땀이 나 미끄러지고야 바꿔 들었다.
“알지, 반장.”
자연스러운 대답에 제희가 눈을 찌푸렸다. 자신을 아는 것은 확실해졌는데 어쩐지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었다.
#chapter 01. 2002년, 너와 나
빠르게 달려온다 싶던 차가 등 뒤를 스치며 빵빵 클랙슨을 울렸다. 한 칸 위 인도에 서 있던 그가 얼른 재이를 끌어당겼다. 키가 왜 저렇게 큰가 했는데 시멘트 한 뼘이 보태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 고마워.”
잡혀 있던 팔을 뺐다. 그의 팔이 무겁게 떨어졌지만 잠깐 잡혔던 자국이 남는 것은 아닐까, 순간 바짝 마른 목처럼 팔도 졸려왔다.
“일해?”
“응.”
직장인이냐, 지금 일을 하는 중이냐, 의미가 모호했지만 둘 다 그녀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저기, 내가 지금 바로 가야 해서.”
사람이 말을 했으면 대답 좀 해주지, 제희는 방금 전처럼 비켜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좀 멀리 가야 해서.”
나도 가고 싶어 가는 건 아니야. 그런데 먹고사는 게 꼭 마음 같지는 않네.
“신림동까지 가야 하거든.”
시간차를 두고 말했는데도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보란 듯 들고 있던 가방을 껑충 위로 들었다. 가방만 보여주려고 했는데 제희가 받아들었다.
“나 이 앞에 차 있어. 데려다줄게.”
“아니야. 괜찮아.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실례를 하면…….”
“네가 그런 말 하니까 좀 웃긴다.”
얘는 거절하는 방법도 변함이 없다. 두어 발 떨어져 그들을 가늠하던 여자가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았다.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았던 걸 흉내라도 내듯.
“제희야, 너 뭐 하는 거냐고. 우리도 들어가야지.”
“너 먼저 가.”
“뭐? ……친구야? 친구 만나서 그래?”
여자가 감춰둔 궁금증을 그제야 드러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누군데?”
그가 가만히 있는데 재이가 나서 인사를 하는 것은 웃겼다. 눈을 내려 그녀를 담던 제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반장.”
어른이 되었다 느끼는 가장 확연한 것은 미성년자가 못 하는 일을 할 때였다. 옆에서 운전하는 제희를 보는 게 영 어색하다. 그는 보통 버스를 탔고, 자신은 종종 옆자리에 타곤 했다.
“운전 안 해?”
“응. 차가 없어서.”
“없는 게 편해.”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듣는 사람은 기분이 묘해진다.
“……아까 그 여자분 서운해할 것 같은데.”
“너도 확실히 컸네.”
“응?”
“말 돌릴 줄도 알고.”
그가 웃는 모습이 낯설다. 별로 안 웃긴 것 같은데. 재이가 운전하는 제희를 보고 어른이구나 느끼는 것처럼 그는 다른 포인트에 어른의 기준을 두었다.
“신림동에는 무슨 볼일이야?”
“아, 저기, 공장이 있거든. 원단 공장인데.”
말해놓고 보니 뭔가 부족하다. 몇 초 더 있다가 보충을 해봤다.
“나 의류회사 다니거든. 유니폼 제작하는 데.”
“그렇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