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7)

일곱

어디선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 상대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

“좀처럼 열이 안떨어져. 이대로 뒀도 되는거야. 병원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조금은 화가 난 말투에 상대방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약 언제 먹였어?”

뒤이어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눈을 뜨고 싶은데 눈이 떠지지가 않았다. 현실과 꿈을 오락가락 하는 것 같았고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전신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쿡쿡 쑤셨다.

“괜찮아. 나 여기있어.”

부드러운 목소리, 목마른 입안으로 들어오는 물이 꿀처럼 달았다.

“... 아파... 더워.”

그럴 때면 차가운 수건이 몸을 닦았다. 뒤이어 한기가 느껴졌다.

“언제까지 이러는 거야.”

“뭐가 그렇게 조급해.”

철희의 짜증스러운 말에 자신도 모르게 노려보자, 어이 없는지 웃어버렸다.

“조급한 것 알겠는데, 많이 좋아지고 있어. 그동안 네가 생각하는것보다 훨씬 힘들었나 보지. 긴장의 끈이 끊어졌다고 보면 될 것 같아. 걱정하자말고 기다려.”

다른 사람이 아팠다면 이렇게까지 발을 동동구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어.”

가는 팔에 꽂힌 주사를 볼때마다, 힘없이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처음으로 대신 아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네 마음 이해해.”

철희의 말에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도 얼마전에야 희애가 암에 걸렸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알아차렸을 텐데...

“미안하다.”

“네가 왜.”

자신보다, 철희가 훨씬 괴로워한다는 걸 알았다. 철희의 어깨를 쳐주자 웃으며 말했따.

“안정이 최고야.”

“고맙다. 바쁠텐데.”

철희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 서경의 안부를 물어왔다. 처음에는 신경써주는게 고마웠지만 너무 지나쳐 아예 무음으로 해놔버렸다. 회사일은 신호가 알아서 해주고 있었고 서경의 일이 해결될때까지 쉴 생각이었다.

“그만 가봐.”

철희가 가고 혼자 남은 그는 침실로 돌아왔다. 그녀가 쓰러진 그날 이후로 그녀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침대로 향한 그의 눈에 눈을 뜬 채 뚫어져라 보고 자신을 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물었다.

“정신이 들어?”

가끔 의식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잠깐 이었고 그대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다른 때와 다르다는 걸 알고 침을 삼켰다. 한참을 움직이지 않는 그녀를 보며 이름을 부르자 미간을 찌푸렸다. 전신에 안도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서경.”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데 눈물이 나오려고 하자 꾹 참았다.

“... 물.”

꽤 오랫동안 말을 안한것처럼 목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자신의 눈앞에 그가 있는 게 이상하고 어색했다.

“물 달라고?”

눈으로 대답하자 컵에 물을 따라 빨대를 꽂았다. 누워있는 그녀의 등에 팔을 뻗어 일으켜 세웠다.

“천천히 마셔.”

물을 마시고 나자 그제야 건조함이 사라지면서 윤수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했다.

“묻고 싶은게 많을거야. 천천히 설명해 줄게.”

“... 어떻게 된 거야?”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더니 그가 말했다.

“몸살.”

그리고 그의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삼일동안 정신을 못 차렸어.”

“그랬구나.”

윤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한참을 보기만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언제부터 있었는지 묻고 싶은데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옷차림과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계속 옆에 있었던 것 같은데.

“조금 더 쉴래? 아니면 미음이라도 가져다줄까?”

“나중에 먹을게.”

그녀의 대답에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너무나 뚫어져라 보고 있어 민망할 정도였다. 그는 한동안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내가 계속 있었던 거야?”

“응.”

“고마워.”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기분 나쁘다는 듯 일그러졌다.

“이제 괜찮으니까. 너도 ...”

“그런다고 내가 사라지지 않아. 쉬도록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목을 덮고 있던 이불을 내렸다.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는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안심했다는 걸 알았다.

‘잘못했다가 사과하면 받아줘. 평생 종처럼 부리면서 살아. 돈도 많지. 솔직히 그만한 인물에 재산, 너 밖에 모른다고 하잖아.’

얼마전 인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평생 종처럼이라...”

나쁘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건 모르는 일이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의식을 차린 그녀를 보자 안도감이 전신을 에워쌌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고 그녀가 먹을 수 이는 것을 주문했다. 어제 권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1년 정도 쉴거라고 말씀드렸다. 뭘 할거냐는 물음에, 서경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겠다는 말에 어이가 없는지 아무말씀이 없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불쑥 물었다.

‘그렇게 그 아이가 좋으냐.’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팔불출이라는 말부터 시작해, 저능아란 말까지 들었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약점이 잡혔으니, 평생 큰 소리 치지 못하고 살거라는 말에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얼마지나지 않아 유 여사에게 전화가 왔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굳어버렸다. 사과를 하고 싶다는 말에 그는 자신에게 할게 아니라, 서경에게 해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뭐하는거야!”

침실로 들어간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를 보고 놀라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의 호통에 노려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상황판단이 된 그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안아 올리며 말했다.

“소리쳐서 미안해. 화장실 가고 싶어?”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그대로 앉고 화장실로 향했다

“밖에서 기다릴게. 문은 열어놓을거야.”

뭔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볼일을 마친 그녀를 안아 침대에 내려놓자 인상을 찡그린 채 그를 봤다.

“씻고 싶어.”

“나중에. 아직은 안돼.”

“냄새나는 것 같아.”

불평과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워낙 깔끔한 성격인데다, 며칠동안 아파서 씻지 못했으니 짜증이 날만도 했다.

“내가 씻겨줘도 괜찮아?”

입을 벌린 채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6개월동안 매일 같이 목욕했잖아.”

“야!”

“그리고 요 며칠 내가 땀에 젖은 옷 갈아입히고 닦아 줬는데.”

눈한번 깜빡이지 않고 말하는 그를 보며 숨을 삼켰다. 태연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모습에 할말이 없었다.

“나가.”

“그렇지 않아도 나갈거야. 이서경... 아직도 넌 날 흥분시켜. 아마 늙어 주름이 가득해져도 넌 날 유혹할 수 있을거야.”

눈앞에서 폭탄이 터졌다고 해도 이렇게 놀랄 것 같지 않았다. 원래 노골적이고 직설적이라는 건 알았지만 너무 심했다. 문이 닫히고 혼자 남자 그녀는 자신의 몸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내려다봤다.

“어이없어.”

피식 소리내어 웃으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욕실에 들어가 씻고 싶었지만 후에 일어날 일에 책임을 질 자신이 없었다. 그의 말에 자신의 여성이 흠뻑 젖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쁜 놈.”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가만히 누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몸이 지쳤는지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왜 깨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깼네.”

희애의 목소리였다.

“왔어.”

잠긴 목소리에 눈을 뜨고 일어났다. 옆에 있던 그가 일어난 그녀를 위해 등뒤에 베개를 놓아주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웃음을 지은 채 보고 있었다. 그답지 않은 능글스러운 모습에 몸서리를치자 희애가 웃으며 말했다.

“서경 언니하고 있으면 우리 오빠가 이런 모습이었구나.”

“두 사람 얘기해. 나가 있을 테니까. 너무 오래는 안돼.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문이 닫히고 그가 나가자 그녀는 희애를 보며 말했다.

“왜 저런다니.”

“보기만 좋구만. 오빠가 언니 정말 사랑하나봐.”

“사랑같은 소리 하지도마. 소름돋는다.”

그녀의 말에 희애가 옆에 앉더니 손을 잡았다.

“언니 ...”

심각한 어조로 자신을 부르는 말에 의아한 듯 쳐다봤다. 분명 얼굴을 웃고 있는데 눈빛이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 평소의 희애답지 않아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애가 던진 소식이 너무나 커 말문이 막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나 너무 주책맞다.”

흘러내린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억지로 웃었다.

“사람이 오래 살 것 같은데 ... 사실 오늘만 사는 거잖아. 내일은, 숫자로만 있는 거고. 결국은 오늘이잖아.”

원래 어른스러웠는데 부쩍 더 그런 것 같았다.

“사랑할때보다, 받을 때 행복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내가 막상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철희의 얘기를 해주었다. 청혼을 받았다는 것도, 암 선고를 받았을 때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행복하다며 그녀도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며 했다.

“나한테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기회가 생겨서 너무 좋아요.”

“넌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어.”

“왜 나만 그래요. 언니도 그렇죠.”

그녀와 자신은 입장이 많은 점에서 달랐다.

“언니, 살아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많은 것을 누릴 권리가 있어요. 자존심 때문에 언니가 진짜 갖고 싶은 걸 잃어버리면 억울하잖아요.”

희애의 말이 명치를 때렸다. 살아있는자... 그와 헤어진뒤로 그녀는 자신이 한번도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살아가려고만 했다. 일에 대한 만족은 있었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한참을 희애는 아무말 없이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는지 시간의 흐름조차 그녀는 잊어버렸다. 희애가 방을 나갔다는 것도 알지 못할 정도로 멍한 상태였다.

“뭐 좀 먹을래”

무의시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음을 먹고 난뒤 그는 욕조에 물을 받아놨다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혼자 할거야.”

“안돼.”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니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널 미치게 갖고 싶지만, 아픈 사람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난 짐승이 아니야.”

욕조에 알몸으로 들어간 그녀를 정성스럽게 씻어줄 뿐 그는 약속대로 그런짓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참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젖은 몸을 닦고 머리를 말려 주었다.

“답답해. 밖에 있을래.”

그녀의 말에 그는 조심스럽게 안아 거실 소파에 내려놓았다.

“뭐 좀 먹을래?”

앉아있는 동안 그의 집요한 시선을 느꼈지만 모른 척 했다. 넋을 잃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다. 몸은 피곤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강하게 느꼈다. 갑자기 윤수가 소리를 버럭 지르는 소리에 놀라 쳐다봤다.

“희애가 무슨 말을 했기에 정신을 못차려.”

“너 평생 내 종으로 살 수 있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른다. 주위가 정적이 감싸인 듯 조용했다. 놀란 듯 쳐다보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그렇게는 할 수 없나보다. 주인으로만 살아 온 그였다.

“평생 네 곁에만 있을 수만 있다면. 종이 아니라 노예라도 상관없어.”

그냥 이 순간을 넘기기 위한 답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말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지는 성격이란 걸 알았다.

“나에 대해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돌아도 내 옆에 있을거야.”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왜 그때는 그랬어.”

“사랑만 하면 되는 줄 알았거든. 그럼 누구도 망가트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사랑 안에 질투가 있다는 걸 몰랐어.”

“질투해어?”

“미치게. 그 자식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그가 느끼는 감정을 자신도 느꼈다. 그에게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가 있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이혼하고 다른 남자...”

“네 몸에 나 아닌 다른 놈이 손을 대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자식을 죽이고 싶어.”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사랑이 가득 차 있었다. 다른 남자 따윈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확실하게 말할게. 나 이서경 당신 외에는 다른 여자한테 관심없어.”

그리고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앉더니 얼굴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 심장 소리 들려?”

“...응.”

“네가 날 사랑하지 않으면 ... 이 심장은 멈춰버릴 거야. 하지만 너를 사랑하고 있는 내 심장은 널 위해서만 뛸 거야.”

말에 약간 모순이 있었지만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확신이 들었다.

“널 사랑해.”

그녀의 고백에 얼굴을 감싸고 있는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 부셔버리는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너하고 다시 부부로 사는 것은 생각해 볼 거야.”

“상관없어. 너와 함께 네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입술을 겹쳤다. 부드럽게 달콤하게 그러나 지독한 소유욕이 느껴지는 짜릿한 키스였다. 얼굴을 맞잡은 채 입술을 떼더니 사랑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희애가 뭐라고 한거야.”

“사랑은 ...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거래.”

몸을 감싼 채 가만히 있더니 말했다.

“명언이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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