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7)

여섯

이서경... 그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때론 부드러운 깃털처럼 가볍게 만드는 마녀같은 여자. 그녀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뒤쫓아 다니기를 얼마나 했는지 ... 찾았다, 싶으면 도망쳐 그의 애간장을 녹였다.

“너하고 장난 할 기분 아니야.”

그녀의 싸늘한 말에 그의 눈빛과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난 한번도 이서경하고 관계된 일에 장난이었던 적 없는데.”

결혼 전 서경이 그를 바람둥이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를 좋아하고 관심을 얻기 위해 바람둥이처럼 행동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관심을 가진 만큼 그녀 역시 그에게 관심을 갖기를 원했다.

“사랑해.”

이혼한 뒤 그가 잘못을 인정하고 그녀 앞에서 무릎 꿇고 용서해달라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잘못했다는 말과 사랑하다는 고백에 얼어붙었던 가슴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를 용서하고 저주하고 하루하루가 지옥같았던 날도 이었지만 그녀는 살아남았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야.”

그녀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너하고 다시 시작할 생각 없어. 다른 사람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더니 집안이 울릴 정도로 커다랗게 말했다.

“차라리 죽으라고 그래!”

소리에 놀라기는 했지만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봤다. 죽으라고? 그녀 때문에 죽는다고 헛웃음이 나왔다.

“넌 정말 못됐어. 어떻게 해야 너처럼 당당하고 뻔뻔할까.”

낮은 그녀의 목소리에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결혼한 사람이 바라는게 뭐가 있을까. 가족을 만들어 나만의 집.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죽으라고... 씁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너 뭐든 쉬워 보이는 것 같아. 사랑도 그랬고 죽음까지 말이야.”

“...뭐?”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었는지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권윤수..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

과거형이었다. 그녀의 말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하고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해?”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폭풍처럼 그녀의 고백에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넌 날 그 정도의 여자로 밖에 안봤구나. 그러니까 거짓말에 속은거야.”

맞는 말이었다. 주변에 돈을 보고 달려드는 여자들이 많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철저하게 무시 되엇고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항상 뭔가를 요구했다.

“언제부터 나한테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거야.”

건조한 목소리로 묻는 그의 질문에 바로 답을 할 수 없었다. 사는 세계가 달라서였을 때부터였는지, 아니면 처음 봤을 때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는 다른 높의 나무였으니까. 멀리서 봐야 할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말을 걸지 않았다면 직접 그와 대화를 나눌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게 중요한 일은 아니잖아.”

맞는 말이었다. 이제와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다고 해서 바뀔건 없었다.

“쉴래. 솔직히 많이 피곤해. 시차도 그렇고, 몸도 그렇고.”

자신을 내쫓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이혼하는 이유에 대해 묻지 않았어. 그럼 상황이 ...”

“아니! 네 마음 속 깊은 곳에 나란 사람에 대한 의심이 있었을 거야.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았겠지.‘

그녀에게 무엇이든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그래선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놓아줄수가 없었다. 유학 가 있는 동안에도 그녀에 대한 관심을 털어낼 수 없었다.

“희애가 나중에 얘기해줬어. 네가 나하고 이혼해야 했던 이유.”

“나한테 연락해서 따질 수 있었잖아.”

“내가 왜.”

얼음장 같은 말투에 그가 움찔 거렸다. 한참을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그가 등을 돌렸다.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하지마. 평생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혼자 남은 그녀는 그의 말이 무서웠다. 아니 자신이 더 무서웠다. 자신에게 한 행동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혼자 남은 그녀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휘청거리는 몸으로 침대로 향한 그녀는 한동안 꼼짝않고 가만히 있었다

“안 울어. 내 눈물은 이미 말라 버렸으니까.”

그렇게 한참동안 그녀는 움직이지 않은 채 날이 밝아오도록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아무 느낌이 없었다. 옷을 입은 채 잠이 든 그녀는 볼을 간질이는 느낌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가 다기 감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났다. 누군가 자신에게 얼간이라고, 바보천지, 등신이라고 했다면 주먹이 먼저 날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강훈과 여백, 철희에 상철까지 그를 쓰레기 취급했지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말도 안돼. 이 자식 미친 것 아니야.”

“내가 서경누나라면 너하고 절대 재결합 안한다.”

“미친 새끼.”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욕설을 퍼부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거야. 알다시피 그 누나 성격 보통 아니잖아.”

“뭘 어떻게 포기해야지.”

여백의 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포기 안해. 죽으면 죽었지.”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등을 그의 결정에 등을 두드렸다. 말은 험악하게 했지만 모두가 그를 응원하고 있었다.

“여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강훈의 말에 모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걸 알면서 왜 시험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일부러 헤어지자고 해서 잡나 안잡나 확인하기도 한다는데.”

소위 연애 박사로 통하는 상철의 말에 설마하는 표정을 짓자, 상철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도 알지. 내가 누나가 자그마치 다섯이야.”

누나들 틈에서 자란 상철의 말이니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며 모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철은 누나들 등살에 못이겨 연애를 못하겠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난 여자라면 지긋지긋하다.”

몸서리까지 치면서 말하는 상철의 말에 큰 소리로 웃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철이 여자로 큰 상처를 입었다는 모두 알았다. 자신들도 그렇지만 상철 역시 꽤 있는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것도 위로 여자만 낳다가 그를 낳았으니 ... 말 그대로 왕자 대우를 받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에 선봤다는 것 어떻게 됐어?”

“좋았어.”

대답은 항상 두루뭉술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이제 결혼 해야하잖아.”

“해야지.”

상철의 대답이 모두 놀란 듯 바라보자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단숨에 비웠다.

“서경누나 설득할 자신있어.”

갑자기 화제를 돌리는 걸 보니 말하기 싫은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연애만큼은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주의였다.

“할거야.”

“자신있나 보다.”

“자신... ”

그의 말에 시선이 모두 그를 향했다.

“하나 밖에 없어.”

“그게 뭐야?”

철희의 질문에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도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었다.

“사랑.”

어이없다는 듯이 보고 있는 철희의 상철과 달리, 여백과 강훈은 수긍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보다, 강력한 것은 없지.”

강훈의 말에 상철이 비웃음을 지었다. 하나 둘 자리를 뜨는 동안에도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 원래 술을 즐겨 마시는 편도 아니었지만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집으로 가야 하는데 그는 도로변에 선 채 가만히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30분 뒤 눈앞에 선 차에서 신호가 내렸다.

“실장님.”

“쉬고 있는데 불러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차로 향한 그를 위해 신호가 뒷좌석을 열어주었지만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조수석에 타지.”

차에 오르자마자 눈을 감았다. 집으로 가자는 그의 말에 신호가 독립해 있는 그의 아파트로 향했다 집에 돌아왔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두 시간을 자고 일어난 그는 곧장 집을 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해 집에 있는 것보다, 그녀와 직접 만나서 해결하고 싶었다. 평생이 걸려도 좋았다. 그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이상하게 마음이 초조했다. 그녀의 집에 도착해 벨을 눌렀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벌써 나갔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비밀번호를 누른뒤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침실문을 연 그의 눈사위가 가늘어졌다.

“이서경!”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이 이상했다. 가쁜 숨소리, 땀으로 젖어있는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젠장!”

빠른 걸음으로 방안을 서성거리며 휴대폰의 버튼을 누르는 그의 손이 떨렸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침착하고 냉정하게 말했다.

“이리로 와 줘야겠다. 서경이 아무래도 이상한데. 바로 데려갈 수가 없어. 응급차보다, 네가 더 빠를 것 같아서.”

통화를 끝낸 그는 이불을 걷어내고 입고 있는 옷을 갈아입혔다. 수건을 적셔 얼굴을 닦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철희였다. 문을 열어주자 철희가 들어오더니 그녀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몸살인 것 같다.”

진찰을 끝낸 철희의 말에 떨리는 몸을 두 팔로 꼭 감쌌다. 긴장감이 일시에 빠져나가면서 몸이 휘청거리자 철희가 팔을 잡았다.

“걱정많이 했나보네.”

웃는 얼굴로 가방을 정리하는 철희의 말에 어색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가쁜 숨소리를 들었을 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잠깐이었지만 그녀가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사람 보내. 처방전 써줄테니까.”

“고맙다.”

“나중에 다시 들리게.”

철희가 돌아가고 그는 무너지듯 그녀 옆에 앉았다. 조금씩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마음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BORI 갠소요게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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