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7)

다섯

BORI 갠소요게X

우뚝 솟은 저 나무에는 함부로 올라선 안 된다고, 자칫 잘못해 떨어지면 크게 다칠거라는 말에 겁도 없이 그 나무를 올려봤다. 너무 높아서 쳐다보기만 해야 한다는 말에 코웃음을 쳤다.

‘쳐다보는 것도 안 된다는 건 억지야.’

그에게 말을 거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높은 나무가 자신을 보고 있을 줄 몰랐다. 그는 대단한 집안의 후계자였고 가질 수 있는 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한테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아. 자기 주제를 아는 거야.’

그녀가 오르지 못할 나무를 보고 있다는 걸 안 사람들이 경고했다. 높은 나무와 어울리는 건 같은 높이의 나무였다. 그때는 몰랐다. 그 나무가 자신을 보고 있을 줄은 거침없이 다가오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날 피해 도망 다닐 생각하고 있다면 꿈 깨요. 내 인생 전부를 걸고 찾아낼 테니까.’

10년 전 장난처럼 말하는 것 같은데 그 말에 심장이 쿵쿵 북소리를 냈다.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숨을 수 있는 곳은 다 숨었는데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그를 잊기 위해, 그가 자신을 포기하기 위해 다른 남자를 만났다.

‘오빠를 영원히 피해 다닐 수는 없어요. 오빠가 언니를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더는 집안에만 있을 수 없어, 인서와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가 먼저 퇴근을 했다.

“다 왔습니다.‘

택시 요금을 치르고 차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입구로 향하는데 그녀의 앞을 누군가 불쑥 막았다.

“늦었네요.”

귓가에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설마? 그녀는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떨어트린 것도 알지 못할 기겁했다. 그가 몸을 굽혀 가방을 줍는 걸 보고 있는데도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언젠가 있었던 일이 또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놀랐나 보네요.”

명백한 빈정거림이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안 들어갈거에요?”

“어떻게 알고 왔어.”

최대한 냉정하게 말했지만 떨림을 감춰지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뒤 묻자 어깨를 으쓱했다.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데 그가 먼저 허리를 굽혀 가방을 집었다.

“안들어가요?”

옆에 선 채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며 아파트 입구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채 버튼을 눌렀다.

“타요.”

“돌아가.”

“강제로 태울 수도 있는데 지금 몸에 손대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참고 있는 거에요.”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힐끔 그를 올려다봤다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번호를 보며 그녀는 자신이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않고 있다는 걸 잊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내려요.”

“이제 ...”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고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거침없이 현관의 비밀 번호를 누르는 걸 보며 신음을 삼켰다. 번호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문을 열더니 불쑥 집안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언제나 이렇게 그는 제멋대로였다.

“앉아요.”

집안을 둘러보지도 않은 채 그는 소파를 손으로 가리켰다. 강압적인 말투였다.

“그냥 내 말대로 해요.”

그제야 그녀는 그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평소 그답지 않게 지나칠 정도로 정중했다. 그녀가 소파에 앉자 그 역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 포기 안해요.”

“뭐?”

“이서경 당신 포기 안한다고.”

말을 잃을 사람처럼 그를 뚫어져라 보고만 있었다. 장난기 가득한 미소였지만 그 웃음속에 날카로운 비수가 느껴졌다.

“왜요? 놀랐어요.”

“당연한 것 아니니. 너하고 나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이잖아.”

“내가 잘못했다는 것 알아요.”

웃음이 나왔다. 잘못했다고? 그럼 그 모든 일들이 없어지는 건가? 웃음밖에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래서.”

“잘못했다고 했잖아요.”

잘못을 인정한 그의 말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사과 받아줄테니까. 이제 그만 가봐.”

“내가 그냥 갈거라고 생각해요.”

“안가면...”

“내가 전에도 그랬을텐데요. 내 인생 전부를 걸고 쫓는다고.”

한숨이 새어나왔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도 그렇지만 자신도 그가 알고 있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잊었나 본데. 우리 이혼했어. 일방적으로 네가 나한테 ...”

“알아. 안다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는게 힘들었다. 갑자기

헛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얼마나 아팠는지 그에게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을 의심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너 정말 당당하다. 그런데 내가 너 싫어.”

거침없는 그녀의 말에 그의 얼굴빛이 변했다. 상처를 입은 일 없는데, 마치 상처입은 사람처럼 보였다.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끔찍해!”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내질렀다.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분노로 인해 붉게 달아 올랐다. 그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난 너한테 항상 성실했어.”

“나도 그랬어요. 지금 까지 다른 여자...”

“난 아니야. 이혼하고 다른 남자하고 ...”

“그만!”

커다란 목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살기를 가득 담은 눈동자가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대로 정말 자신을 죽일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느꼈지만 침착하게 그를 쳐다봤다.

“이제 알겠지. 너하고 내가 안되는 이유.”

“상관없어. 당신은 처음부터 내것이었으니까.”

“야!”

호통 소리에도 그는 태연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그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은 그는 너무나 달랐다. 같은 사람인데, 전혀 다른사람인 것 같았다.

‘권윤수 ... 무서운 사람이야. 네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그에게 대한 자신의 마음이 점점 깊어져가는 두려웠다.

“장난하는 거라면 이쯤에서 ...”

“내가 그렇게 할 일 없는 놈으로 보여요?”

재미있다는 듯 묻고 있었다. 바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가족 회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걸 알지만, 권회장이 무슨 속셈으로 그를 가만 두는지 궁금했다. 의아한 듯 그를 보고 있는데 의자에서 일어섰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고 말았다.

“미안한데, 네 수준에 맞는 사람을 만나. 집안에서 고른 참하고 예쁜 여자 많잖아.”

“늦었어. 이서경 당신이 아니면 안돼.”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무리 태연한 척 노력했지만 그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네 몸 구석구석 아는 사람 나 뿐이잖아.”

“까불지마.”

그의 당당함이 거침없음이, 자신감이 너무나 싫었다. 정중하고 신사답게 행동하던 권윤수의 가면이 깨어졌다. 그가 자신에 대해 아는 것 만큼 그녀 역시 그의 몸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었다.

“야! 이서경, 내가 지금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 널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거야.”

버럭 내지른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고 말았다. 그를 마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자 부셔 버릴 것처럼 턱을 세게 붙잡았다.

“널 찾으러 미친놈이 되어버렸어.”

“자업자득이야.”

“알아! 질투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어. 네가 그 녀석을 만난 걸 보고 ... ”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떻게 그녀에게 자신의 느꼈던 절망과 패배감을 설명할 수 있을까.

“언제나 널 사랑한 것은 나였어.”

그의 말에 놀란 듯 쳐다봤다.

“... 그게 무슨 ...”

“너는 날 사랑하지 않았잖아.”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어이가 없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사랑하지 않으려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는 몰랐다.

“이제 이서경 널 내 품에 가둘거야. 영원히.”

이 자식 진심이다.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그녀를 활활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마른 침을 삼키는 걸 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마!”

얼굴을 뒤로 빼자 그의 팔이 허리를 휘감더니 바짝 끌어당겼다.

“내가 원하는 것만큼 당신도 날 원하잖아.‘

“누가 널 원해. 아니야!”

최대한 냉정하게 말했는데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꼭 붙들고 있던 턱을 놓아주었다.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 같았다.

“나 피하지 말라고 했지!”

전신을 찌를 것 같은 눈을 보며 거칠게 쳐냈다.

“피한적 없는데. 그리고 반말 하지마. 다시 한번 말하는데 너하고 나 남남이야.”

그가 웃었다. 온 몸을 뒤트는 듯한 잔인한 웃음이었다.

“네가 어떤 놈인지 잘 알잖아. 당신을 영원히 내 여자로 만들겠다고 내 스스로 가슴과 머리에 맹세했거든.”

“너 미쳤어!”

“미쳐야 진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걸 가질 수 있다는 것 알고 있잖아. 이서경 너하고 나 겨우 세 살 차이야. 어른 흉내는 다른데 가서 내.”

“권윤수!”

화간 난 그녀에게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환하게 활짝 웃었다. 턱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더니 품으로 끌어당겼다. 넓다. 따스했다. 든든했고 기대고 싶은 가슴이었다.

“좋네. 그렇게 내 이름 불러.”

“너 내가 우습지. 그러지 않고서야...”

말을 끝맺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말 그대로 그가 입술을 부딪쳤다. 천천히 달래는 입맞춤에 저절로 입술을 벌리고 말았다. 전신을 휘감아 오는 전율에 몸이 떨렸다. 무너지려는 그녀를 부축하는 그이 손길에 본능처럼 목에 팔을 둘렀다. 어느새 그의 키스에 응답하고 있었다. 점점 더 깊게 매달리는 그녀를 그가 거칠게 밀어냈다.

“이래도 날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묻는 그의 목소리는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던 그녀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나...”

“변명 하지마! 난 당신을 위해서라면 다 버릴 수 있어.”

“권윤수.”

그녀는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분노로 이글거리던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래. 그렇게 불러.”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마치 포식을 마친 야생의 맹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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