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7)

서울에서 맞는 첫 아침이었다. 아침 일찍 잠이 깬 그는 집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뒤 침실로 들어왔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그의 눈자위가 가늘어졌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탁자위에 찻잔을 내려놓는 걸 그는 무심하게 바라봤다.

“일찍 일어났구나.”

“네.”

“오늘 시간 있지?”

“없습니다.”

테이블에 놓인 차를 보며 의자에 앉았다. 무뚝뚝한 말투와 감출 수 없는 냉기에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 밖에서 ...”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요. 쓸데없는 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찻잔을 다시 책상위에 내려놓으며 짜증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드리는 부탁입니다. 괜한 헛수고 하지마세요. 저 여자한테 관심 없습니다.”

“... 윤수야.”

웃고 싶었다. 제발! 그만 하라고 고상한척, 품위 있는 척 애쓰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바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제 그만 하면 될 때도 되지 않았니.”

그때까지 태연해 보이던 유여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뭘 말입니까?”

묻는 그의 어조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호흡을 고르려 눈을 감은 유여사의 얼굴에서 눈을 뗀 그는 외출 준비를 했다.

“난 널 생각해...”

“압니다.”

서류를 가방에 집어넣던 손의 움직임에 분노를 숨길 수 없었다.

“어머님 인생이 아니고 제 인생이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한테 어떤 마음이었는지...”

“난 몰랐다.”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어떻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권윤수가 이서경을 좋아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걸 저한테 믿으라는 말씀은 아니실테지요.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제가 그 사람을 사랑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거친 말투에 유여사의 얼굴에 창백해졌다.

“저한테 관심이 없으셨던 거겠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 사생활까지 간섭할 권리가 어머님한테는 없으셨습니다.”

가방을 다 챙긴 그는 목도리를 챙기고 유여사의 곁으로 지나쳤다.

“그냥 가만히 계시지 그러셨어요. 그럼 할아버지가 그런 결정을 하실 일도 없으셨을 겁니다.”

유여사는 그의 친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가 초등학교 때 권사장이 재혼했다. 그리고 배다른 동생 윤국이 태어났다. 친자식을 사랑하는 건 어쩜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유여사에를 원망하거나 바라는 것 없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유여사의 행동과 몸에서 그를 밀어내려 하는 걸 알았다. 속마음을 감췄으면 좋알을걸. 유 여사의 행동을 그냥 넘어갈 권회장이 아니었다. 배다른 동생인 윤국을 완전히 화경그룹에서 제외해 버렸다. 권회장의 결정에 화가 난 유여사가 그에 대한 미움을 가장 사랑한 서경에게 화살을 돌렸다. 의심의 싹은 불행을 자초했고 유여사의 바람대로 서경과 이혼을 했다.

“저는 할아버지의 결정을 뒤엎을 능력은 제게 없습니다. 차라리 아버지를 설득해 보세요.”

“네 아버지는 할아버지보다, 더 하다는 걸 알잖니.”

“저한테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데... 솔직히 저 결혼할 생각도 없고, 여자를 만날 생각도 없습니다. 한번이면 족하고, 한 여자면 족합니다.”

그에 대한 미움으로 서경에 대한 말도 안되는 루머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조작된 사진들... 그때는 분노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다. 윤국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믿었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데 서경이 돈을 보고 그와 결혼했다는 말을 믿어버렸다. 의심은 확신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결혼하기전 그녀가 만나는 남자를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그 남자하고 안 어울려요.’

그의 말에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그녀의 가족들은 집안일을 그만두고 시골에 내려가 과수원을 시작해 그녀 혼자 원룸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

‘네가 뭔데 내가 사귀는 사람에 대해...’

‘내가 좋아한다는 것 알고 있었잖아요.’

얼굴이 창백해졌다. 뒤로 주춤 거리며 물러선 그녀를 보며 손목을 잡았다. 친구들과 유학중에 그녀가 사귀는 남자가 있다는 걸 알고 귀국했다. 실제로 그녀는 남자를 만나고 있었고 서로 안고 키스하는 장면까지 모조리 봤던 그였다. 남자친구가 군대에 갔는데도 면회까지 오고가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았다. 나중에 그녀가 그 남자하고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말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일부러 그를 밀어내려 한 행동이었다는 걸 결혼해서까지 몰랐다.

“이제와 말씀 드리는 겁니다. 목숨 같은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전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얼음보다, 차가운 그의 말투에 유여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잠시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자 숨을 길게 호흡을 토해냈다. “이서경!”

잘 갈아놓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입밖으로 터져나왔다. 젠장! 망할! 욕설을 퍼부었다. 그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그가 처음이었다. 그때의 만족감이란... 결혼을 서둘렀다. 결혼하고 나서 그녀가 전 남자친구를 만나고 있다는 걸 질투에 눈이 멀고 말았다. 그때 이혼을 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을 죽여버릴 것 같았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수많은 증거들이 그의 앞에 들이밀어졌다.

‘내가 그랬잖니. 그 애는 네 돈을 보고 결혼했다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서경이 널 사랑한다고 생각하니?’

결정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심장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그런데... 다 자신의 오해였다. 그것도 유여사가 뒤에서 부린 수작 이라는 걸 그녀의 전 남자친구에게 들었다.

‘돈을 받고 ...’

미치는 줄 알았다. 이혼하고 3개월 뒤 그 자식을 호텔에서 보지 못했다면 ... 다른 여자를 안고 호텔 로비로 들어서는 걸 보고 말 그대로 머리꼭지가 돌아버렸다. 주먹이 먼저 날라 갔다. 서경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거라 생각했다.

“등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그의 눈자위가 살기가 피어올랐다. 유여사가 침실 밖으로 나가고 바로 나갈 볼 생각이었다. 그런 처음 생각과 달리 전혀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움직여야 했다. 여기서 나가 자신이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련님, 회장님이 건너오시랍니다.”

노크 소리조차 듣지 못할 정도로 그는 멍한채로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네.”

간신히 대답하고 빠르게 자신의 감정을 진정시켰다. 옷을 다시 갈아입은 그는 완벽한 모습으로 권 회장에게 향했다. 문 앞에 서자 목을 죄는 갑갑증이 몰려왔다.

“윤수입니다.”

“들어오너라.”

안으로 들어가자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권회장의 전신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송곳처럼 날카로운 시선에 오금이 저릴 법도 한데, 무심하게 그 시선을 받아냈다.

“언제까지 이리 정처 없이 돌아다니면 살거냐.”

호통은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은 권회장의 음성에 몸을 떨었지만 큰 손자인 권윤수는 그렇지 않았다.

“저 잘 살고 있다는 것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윤수야!”

곁에 있던 권사장의 나직한 목소리에 눈치 없는 것 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그에게선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여유와 함께 범접할 수 있는 묘한 힘이 있었다.

“회사에 이제 그만 들어와서...”

“갑갑해서 싫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전 지금이 좋아요.”

“네 마음대로 해 봤으니, 이제 그만 하고 돌아와야지.”

그때까지 여유가 넘치던 느슨함은 사라졌다.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한 기색이 드러났다.

“떠돌이 생활이 좋다는 거냐?”

“네.”

그의 대답이 못마땅한 권사장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전 회사로 안돌아갑니다.”

“네가 싫어서 이혼하자고 했잖니.”

권회장의 거침없는 공격에 순간 그는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때 이혼을 말렸었다.”

권회장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그는 가만히 있었다. 자신이 좋아 결혼했고 이혼했다. 그녀가 아니면 죽을 것 같았기에. 이혼하면 벗어날 줄 알았는데 더 죽을 거 삭ㅌ았다.

“이유도 없이 이혼하자는 놈한테 정이 떨어졌겠지.”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 안하셔도 제 잘못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놈, 그 애가 가진 것이라고는 자존심 하나라는 걸 왜 몰라!”

결국 참지 못하고 권회장이 호통을 쳤다. 순간 그는 몸을 떨었다. 자신의 아내를 찾기 위해 그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모두 내려놓았다.

“네가 이런다고 해서 그 애가 돌아올거라 생각했다면 넌 아직도 그애를 모르는 거야.”

“도대체 할아버지는 누구 편이세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더니 혀를 찼다. 얼마나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권회장이 그를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

“나는 내 손자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우리 수준에 맞지 않아도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족하다 생각해서 네 놈 결혼도 허락한거야.”

솔직히 너무나 쉽게 결혼 승낙을 받았을 때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재결합을 하고 싶은 것이냐?”

“네.”

거짓말로 이 상황을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이혼을 결정 했을 때,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무서울 정도로 정리했다. 실제로는 심장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칼날처럼 자신을 후벼팠다. 이혼하고 나서 그는 미친 듯 사진에 몰두했고 실력도 인정받았다. 자신의 앞에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렇게 방황하게 된것도 순전히 그의 선택이었다.

“네가 선택한 결혼이니 아무 말 안했다. 하지만 이혼을 했을 때...”

“그럴 거라 예상하신 것 아니었어요?”

어쩌지 못한 빈정거림이었다.

“그래. 그랬지. 그리고 염려했던 대로 네 녀석은 이혼을 했고.”

권회장은 거기서 말을 끊었지만 더 말하고 싶은 걸 참고 있었다. 끈질긴 면도 있었고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아는 결단력과 무서울 정도로 냉혹한 면도 지니고 있었다.

“아직도 네 어미를 원망하고 있는 거냐.”

“네.”

“네 믿음이 그것 밖에 안된걸 탓하는 게 아니고.”

가슴에 칼을 맞은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그 애를 쫓아가기 위해 취미였던 사진을 직업으로 삼은 거잖니.”

상상이상으로 권 회장은 그의 모든 것을 꿰뚫어 봤다.

“나가 보거라.”

더는 할 얘기가 없어 보였다. 어떻게 방을 나왔는지 기억에 없었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침실로 돌아온 그는 그대로 주저 앉아버렸다. 꾹꾹 누르고 있던 화를 터트리지 않은 것은 순전히 교육 때문이었다.

“돌아오지 말걸.”

이제와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집안과 거리를 두기 위해 그는 일절 연락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그늘을 피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걸었고 성공을 했다. 물론 경영자로서의 능력보다는 사진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오빠.”

나직하게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희애였다. 최근 철희와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다행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많이 힘들다면면서.”

희애의 말에 그는 멋쩍게 웃었다. 사실 그가 본가로 돌아온 것은 작은 아버지 내외의 제사 때문이었다. 제사만 끝나면 아무도 모르게 도망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잡힌 것 같았다.

“서경언니, 연락 돼?”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행방을 가장 알고 싶은 건 그였다. 보이지 않게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화르르 올라오는 열기를 눌렀다. 숨바꼭질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는 계속 놓치고 말았다.

“아니.”

“오빠... 서경 언니 ... 서울에 있어.”

망설이는 듯 하더니 희애가 말했다. 그는 순간 말을 잃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다.

“뭐? 아... 아니지. 지금 너 뭐라고 했어?”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 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열리더니 신호가 들어왔다.

“실장님, 유럽가시는 것 취소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집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보고를 하는 신호의 말에도 그는 멍한 채였다.

“다시 한 번 말해봐.”

“유럽에...”

그는 유럽에 있어야 할 신호가 왜 서울에 있는지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아니. 희애 말이야.”

“말했잖아.”

제대로 들었나 보다.

“어디야.”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부들거리며 떨렸다.

“서울에 계십니다.”

대답은 희애가 아니라 신호가 했다. 그제야 유럽에 있어야 할 신호가 서울에 온 것을 알아차렸다. 미간을 찌푸리며 신호를 보며 물었다.

“... 너 언제 ...”

“지금 막 공항에서 오는 길입니다. 사모님, 서울에 계십니다.”

한동안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니 움직여야 하는데 몸에 힘이 빠져버렸다.

“무슨 소리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는 신호를 향해 물었다.

“유럽에서 귀국하셨답니다.”

서울로 돌아왔다고? 절대 오지 않을 줄 알았다. 행방을 찾아 가보면 어느 순간 떠나고 없었다. 그런데 서울에 있다니... 현실 같지 않았다. 숨을 고르며 물었다.

“어디야?”

“댁으로 들어가신 것 같습니다.”

“차 대기시켜.”

“네? 네.”

주소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더는 그녀의 뒤를 쫓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함께 왜 돌아왔는지에 의구심이 생겼다.

“차는 놓고 가. 그리고 집 사람 차 정비 제대로 됐는지 확인하고.”

“네.”

집 명의가 그녀의 집으로 되어 있다는 걸 알고 안 받는다고 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건 뭔가 마음의 변화가 있었다는 뜻으로 밖에 해석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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