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12)

11

“사실인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유 선생이 태익을 돌아보며 짧게 물어 온 말이었다. 하지만 태익은 굳게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사실입니다, 선생님. 제가 마루야마 소위 당사자에게 직접 들었으니까요.”

태익의 묵묵부답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오유미가 대답을 대신했다. 운전석의 곽은 핸들만 움켜쥔 채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하아……!”

유 선생이 깊고 긴 한숨을 쉬었다. 당원들 사이에 벌써 소문이 파다했다. 상해극비작전에 대해 모르는 당원들도 마령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이미 그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당장에 찾아서 없애 버려야 한다는 둥, 진실을 조금 더 파헤쳐 봐야 한다는 둥. 당내의 온건파와 급진파가 첨예한 대립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쨌든 간에, 안 대장이래 자넨 그 에미나이 먼저 날래 찾으라우.”

긴 한숨 뒤에 유 선생이 나직이 하는 말이었다. 모두가 흥분해 있는 지금 그는 수뇌인 자신까지 흥분해서 날뛰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해작전은 분명히 성공했지만 그 성공의 완성은 그 작전에 참여한 인물들의 안전과 신분이 지켜질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대의로 한 일이래, 희생이 어째 안 따르갔어. 그렇디만 그 희생이래 최소한으로 하는 거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갔네? 그러니 일단 찾으라우. 그 무라야만가 뭐시긴가 하는 소위 놈이 그 에미나이를 왜놈들 손에 넘기기 전에, 안 대장 자네가 먼저 찾아.”

유 선생은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하고 있었다. 태익이 전부를 얘기하지 않았어도 일전에 그가 했던 말을 유 선생은 기억하고 있었다.

“저와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는 여잡니다.”

섣부르게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유 선생이 아는 안태익은 절대로 그렇게 서두르고 섣부른 인물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완벽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인물이 유 선생이 보아 온 태익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태익을 나무랄 마음이 없었다. 그의 책임이라 할지라도 그를 나무라기 전에 그가 책임을 짓도록 해야 하는 것이 유 선생 자신이 할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관계도 더 알아보지비. 내래 마루야마 그 아새끼래 한 말을 고디곧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 않간!”

“예, 선생님.”

태익이 유 선생에게 한 말은 알겠다는 대답 딱 한마디였다. 그리고 유 선생의 그 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김산하고 최창학 동지는 수배했나?”

“네, 도련님.”

안국동 집 앞이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 태익은 곽에게 확인을 했다. 그날 기차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만 있다면, 어떤 통로를 이용해서든 알아내야했기 때문이다.

김산과 최창학이 무엇을 알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를 가능성이 크다고 태익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지푸라기라고 잡고 싶은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도련님…….”

안쪽에서 대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운전기사 대신 운전대를 잡았던 곽이 다급하게 차에서 내려 그를 붙잡았다. 태익이 자신을 잡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간 드리지 못했던 말이 있습니다.”

느닷없는 곽의 말에 태익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좋지 않은 예감이었다. 곽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이미 다미로에 대한 일만으로도 그의 머리는 쑤셔 놓은 벌집이었다. 심장은 과부하였다.

오유미가 들이닥치고 난 후 얼마 있지 않아서였다. 이환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교환이 안국동이라고 얘기할 때부터 미친 듯이 뛰고 있던 태익의 심장은 일순 마비가 일어난 것 같았었다.

-도련님……. 다미로 아씨께서 기어이 집을 나가셨나 봅니다. 아가씨께서 입던 옷가지가 전부……. 아궁이에 들어가 있다고 행랑어멈이…….

그때부터 태익은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지금 곽이 하려는 말을……. 그녀가 아궁이에 자신의 옷가지를 태웠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옷을 태운다는 것은 자신의 흔적을 지우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자신의 흔적을 지우겠다는 것의 뜻은 영원히 잊어 달라는 말과 같았다.

“그게 말입니다, 도련님.”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곽의 이마에는 뺨을 세차게 때리는 싸라기눈 속에서도 진땀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태익은 다그치지 않았다. 주머니 속 주먹을 세게 말아 쥘 뿐이었다.

“5년 전에 다미로 그 녀석이 집을 나갔을 때 말입니다. 실은 제가 그 녀석을 방을 뒤지다가 뭐 하나를 발견했는데.”

싸라기눈발이 점점 거세졌다. 곽은 잠시 숨을 고르듯 말을 멈추었지만 태익은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코트 안쪽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곽이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빨갛게 타들어 가는 담배를 손에 든 채 곽을 응시했다. 이제 얘기를 계속하라는 의미였다. 곽이 마른 입술을 적시며 다시 입술을 떼었다.

“그 녀석 책 뒤쪽에 이런 글이 적혀 있더라고요.”

<대물림의 업……. 내가 그 고리를 끊어야겠다.>

곽은 차마 이환에게도 그 얘기를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태익에게 얘길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가 어디까지 가려는 것인지 곽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기에 말이다.

태익이라면 알지도 모르니까. 다미로가 숭배하고 존경하고 따르던 태익이라면 그녀가 가려는 길을 알지도 모른다고 곽은 생각이 들었다.

휘익!

가는 눈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곽의 얘기를 들은 태익이 천천히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길게 숨을 들이마신 그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길게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에야 곽은 담배를 든 태익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무쇠보다 강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던 태익이었다.

미국의 전설 강철왕 카네기처럼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 곽이 지금까지 곁을 지키고 모셔 온 안태익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다미로의 얘기에 손을 떨다니…….

태익이 잠시 두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더니 성큼성큼 대문 안으로 성마르게 들어갔다.

그는 곧장 다미로가 쓰던 별채로 향했다.

벌컥!

그녀의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방 안은 이환의 말대로 말끔했다. 마치 사람이 생활했던 방이 아닌 것처럼 전혀 흔적이 없었다.

그저께 밤 밤새도록, 그녀가 쓰러져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지치게 사랑을 나누었던 그 이부자리마저도 사라져 있었다. 이부자리의 겉껍데기는 사라지고 앙상한 솜뭉치만 덩그러니 개켜 있었다.

여학교 시절 쓰던 책도, 이화여전을 다니며 보던 책과 필기도구까지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태익은 어두운 방에 전기 스위치를 올리고 방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짧고도 짧은 기억 하나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던 일이었다.

“도련님, 뭐를 찾고 계시는 겁니까?”

뒤따라온 곽이 숨을 헐떡이며 물어 왔다. 태익은 구두도 벗지 못한 구둣발로 다미로의 흔적이 완벽하게 사라진 방 안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방금 전, 곽의 말을 들은 다음 왜 그 기억이 떠올랐는지는 태익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책 뒤쪽에 남긴 메모라는 말에 그 기억이 났는지도 몰랐다.

그저께 밤. 태익이 다미로의 방으로 찾아갔던 그때 그녀는 책을 보고 있었다. 노크도 없이 들어선 그를 보고 놀란 그녀가 책을 접으며 일어서던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책 속에서 떨어졌던 그 물건……. 그게 무엇이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궁금해야 할 사항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태익은 본능처럼 그것을 찾기 시작했다.

만약 다미로가 그것마저도 자신의 흔적으로 지워 버렸다면! 하는 두려움 속에서도 태익은 방 안을 구석구석을 뒤졌다.

자신이 선물해 주었던 작은 경대와 그 경대가 놓인 오동나무 경상 아래도, 이불을 놓아두던 오동문갑 아래도, 그리고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화초머릿장 아래에도 말이다.

“도련님! 이거…… 이 여자…… 사진 속 이 여자…….”

곽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에 태익은 후다닥 바람처럼 달려 그의 손에 든 사진을 낚아챘다.

“아니 어째서 이 여자가……. 주옥 선생님하고 함께 사진을……?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환지…….”

곽이 어이가 없고 망연자실함에 말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태익의 눈빛은 그 순간 까맣게 짙어지며 파랗게 빛을 뿜었다.

그가 몸을 돌렸다. 서두르는 그의 발길이 다시 대문 밖의 차를 향했다.

“도 도련님!”

곽이 그를 뒤따라 나오며 소리쳤다.

“이 밤에 어딜 가시려고…….”

“원화관으로 간다.”

태익이 곽의 질문을 잘라내며 대답했다. 곽은 그제야 “아!” 하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어 냈다.

파랗게 얼어붙은 새벽이었다. 술손님들도 하나둘 혀가 꼬여 주정이 잦아들고 계집을 품은 사내들은 이부자리를 파고든 시간이었다.

옥문은 주접이 보통을 훨씬 넘는 일본인 깡패 하나를 상대하다가 진이 빠져 방을 빠져나온 길이었다. 술에 절어 꽐라가 된 지 두 시간이 지났건만 당최 갈 생각도 잠이 들지도 않는 탓에 진땀을 빼고 말았다.

“경선아, 거기 있니? 얘, 양경선아!”

요정 집에 있지만 얼굴이 얽어 못생겨 손님 접대도 못 하는 28살을 훌쩍 넘긴 계집을 옥문이 불렀다. 피로에 절어 갈라진 그녀의 목소리에 발딱 일어나 나와야 할 계집이건만! 어떻게 된 일인지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얘! 양경선아! 이년아!”

옥문이 더 바락 소리를 질렀다.

“저저기…….”

그런데 어둠 속에서 경선의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린다 싶을 때였다. 그녀의 뒤로 시커먼 그림자 두 개가 동시에 불쑥 나타났다. 술기운에 옥문은 소스라치게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굽니까?”

태익이 상 위로 내민 사진에 옥문은 사색이 되어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방 안은 따뜻했다. 바깥에 몰아치는 동장군의 위세에도 옥문의 온돌방은 따뜻하게 덥혀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시베리아 벌판에 벌거벗겨져 내던져진 짐승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이, 이 사진은 어디에서…….”

옥문이 입술을 떨면서 물었다. 하지만 태익을 바로 보지 못하고 사진만 노려보고 있었다.

“길게 안 묻겠습니다, 유 사장.”

“예?”

“말하지 않으면 다른 수를 써서라도 입을 열게 만들겠다는 협박입니다.”

태익의 파랗게 날 선 협박이었다. 옥문은 식겁한 표정으로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사진 속 여자, 국대철의 첩 마누라라고 알려진 그 여자, 강선앱니까?”

그의 의표를 찔러 오는 물음에 옥문의 눈이 커다래졌다. 태익이 강선애까지 알 줄은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사 사장님께서 어떻게 선애 언니를…… 아시는지.”

“강선앱니까? 그것만 말해요.”

태익이 정좌를 하고 앉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물었지만 옥문은 침만 삼킬 뿐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곁에 앉아 있던 곽이 품속에서 짧은 단도 하나를 꺼냈다.

쾅!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상 위의 사진 옆으로 칼을 올려놓았다. 칼날이 파랗게 서 있고 끝이 버선코처럼 올라간 무게가 3그람에 불과한 칼이었다.

그렇지만 칼날이 짧고 손잡이가 길어 원하는 곳을 정확히 공격할 수 있는 칼이었다. 한 마디로 경동맥을 단칼에 절단할 수 있는 무기였다.

당연히 무기에 관해 알 턱이 없는 옥문이지만 어쨌든 그녀는 범상치 않은 칼 모양에 공포로 물들었다.

“그 그러니까, 사 사진 속 이 분은 최…… 최순임…… 그 언니예요, 사장님.”

오들오들 몸을 떨면서 옥문이 한 말에 곽은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태익은 미간조차 움직이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강선애가 최순임과 동일인물인 겁니까?”

옥문이 처음으로 사진에서 눈을 떼어 태익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동자에 일고 있는 혼란과 두려움의 파도가 태익에게도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리고 바싹 말라서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는 목으로 침을 넘기며 입술을 떼었다.

“쌍둥이여요. 순임 언니가 동생이고 선애 언니가 언니였지요.”

경성 시내 전체를 꽁꽁 얼려 버린 동장군의 위세에 방문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휘이 휘이 황소바람이 소의 울음소리를 내며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옥문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그때부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두 언니는 참 많이 달랐어요. 그 척박하고 추운 만주 땅에서 다들 고생스럽게 살기야 살았지요. 고생 안 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포문이 열린 옥문의 이야기는 짧다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긴 이야기였다. 스물일곱 해 전, 다미로가 태어나기 전과 태어난 직후에 걸친 쌍둥이 자매 최순임과 강선애의 이야기였다.

“선애 언니 본래 이름은 최순애예요.”

불행은 만주로 관동군이 들이닥치면서 시작되었다. 순애는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다. 그러나 동생 최순임은 당시 만주에 터를 잡은 대한독립군과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최순애가 관동군 장교의 숙소에 잡일을 하려 들어가면서 일이 벌어졌다. 야차 같은 관동군 장교가 순애에게 접근했다. 그는 순애와 순임이 쌍둥이 자매라는 사실을 이용하려 들었다.

대한독립군과 일하는 순임을 납치해 가둬 놓고 순애를 그곳으로 잠입시켜 기밀사항인 독립군의 거점을 알아내려 했던 것이다. 그 대가로 관동군 장교는 순애에게 미화 100달러와 일본으로의 도일을 약속했다.

그렇지만 독립군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었다. 순임도 마찬가지였다. 납치되어 있던 장교의 집에서 빠져나온 순임은 순애가 독립군단의 거점에 다녀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어떤 정보를 빼왔는지도 말이다. 당시(1915년) 독립군단이 동지연선(東支沿線)을 따라 하얼빈으로 진군하려는 장기적 계획과 관련된 정보였다.

“그래서 순애 언니가 순임 언니를 죽였지요. 순임 언니는 일단 남편인 주옥선생께 얘길 했던 모양이에요. 바로 윗선에 알릴 수가 없었던 거지요. 관동군 앞잡이더라도 순애 언니는 쌍둥이 언니잖아요.”

옥문은 상 위에 놓아두었던 물 주전자에서 물을 따랐다. 물을 따르는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그때 순애(강선애)가 순임을 죽이는 것을 목격했고 그것을 말리지 못했다는 것은 말할 수가 없었다.

독립군단 소속이었던 순임이 순애에게 쉽게 당한 이유는 아기 때문이었다. 태어난 지 20일도 안 된 다미로를 지키기 위해서 온몸으로 순애의 칼부림을 막아 냈던 것이다. 순임이 자신이 소속된 독립군단에 순애가 정보를 빼돌리려 했다는 사실을 알리려 들자 벌어진 일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쌍둥이 자매였지만 순임은 독립군단의 수백 용사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순애를 설득시키든 일시적으로 감금을 시키든 조취를 취해야 한다고 냉철한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자칫 총살형이 내려질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순임은 그것만은 자신이 반드시 막아 내겠다는 결심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순애는 순임을 믿지 않았다. 불행은 그렇게 막이 오른 것이었다.

주옥은 사건 당일 만주의 동녕현에 있는 독립군단 본부로 떠나 있었다. 자신들의 장기적 계획 일부가 관동군의 손에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돌아온 주옥 선생 앞에서 순애 언니는 자기가 순임 언니인 척 연기를 했지요. 그리고 주옥 선생이 자신이 최순임이 아니고 순애라는 걸 눈치챈 것 같다는 낌새를 느끼고선 그날 밤, 선생이 습관처럼 드시는 반주에 독을 탔어요. 그다음엔 먼저 죽인 순임 언니가 주옥선생을 독살하고 자신도 자살한 것처럼 꾸몄고요.”

“하…… 젠장맞을! 진짜로 악질 중에 저런 악질이 없네요, 도련님!”

곽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낮게 소리쳤다. 옥문이 물을 따라놓은 잔을 태익이 거칠게 가로챘다. 벌컥벌컥, 단숨에 물을 목으로 넘겼다.

“강선애는 조카가 지금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압니까?”

현재 시점에서 파악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다. 강선애가 총잡이 마령이 자신의 조카인지 아는지 모르는지가 말이다.

하지만 강선애는 그 사실을 모를 확률이 십중팔구로 크기는 했다. 그러니 마령이 제 손가락까지 잘라 가면서 그녀에게 접근하려 했던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겠지.

“아뇨, 몰라요. 찾지도 않았는걸요.”

“조카의 부모 둘을 다 죽이고, 거기서 살아남은 조카를 찾지 않았다니……. 배짱이 두둑한 거요? 아니면 멍청한 거요.”

“그게 죽었으니까요. 어미아비도 없이 이 집으로 저 집으로 젖동냥 다니면서 한 달 남짓 살다가 애가 가 버렸으니까요.”

곽도 태익도 옥문의 대답에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다미로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것 말이다.

제 어미 최순임이 남편을 죽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죽은 척 위장해서 경성으로 돌아와 태익의 부친 안길준을 아사이금광에서 폭사시켰다는 이야기.

두 가지 사실 보두 진실이기는 했지만 그 두 사건의 주체가 친모 최순임이 아니라 쌍둥이 이모인 최순애라는 진실을 그녀는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이모인 동시에 그녀가 제 어미라고 알고 있는 강선애가 최순애라는 사실도!

태익은 오늘에서야 다미로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그녀가 강선애를 죽이기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쳐야만 했던 이유. 제 아비를 죽이고 아비처럼 여겼던 안길준까지 죽인 강선애를 다미로가 용서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제 어미로 알고 있는 그녀에게 손가락을 잘렸지 않은가. 태익은 자신보다 몇십 배는 더 괴로웠을 다미로의 고통이 느껴졌다.

“강선애에게 전하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태익이 옥문의 방을 나서기 직전에 남긴 말이었다.

“내가 모든 사실을 알았으니, 앞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몸을 사려야 할 것이라고 말이오.”

아마도 아버지 안길준은 주옥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었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반년 전쯤에 안길준은 만주로 한 달간의 다소 긴 출장을 다녀왔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불과 1년 전이었다. 그때에도 만주는 관동군의 출현으로 전운이 감돌고 있던 곳이었다. 부친이 왜 그런 위험 지역에서 한 달이나 있었는지 태익은 그때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 만주 여행에서 안길준은 주옥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길준이 만주를 다녀와 갑자기 아사이의 금광에 지분을 투자해 최대주주가 되었던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분명히 강선애, 즉 최순애가 아사이금광의 책임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 것이다. 국대철이 1대주주인 아사이금광을 당시 그의 애첩이었던 강선애(최순애)가 맡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강선애가 안길준을 사고로 위장해 폭사시킨 이유는 분명 그 이유일 테고. 아마도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안길준이 자신을 단죄할 것이라는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있었을 것이다.

“곽아.”

태익이 발목까지 쌓인 싸라기눈을 밞으며 곽을 불렀다. 그의 기다란 코트 자락이 바람에 아무렇게나 펄럭거렸다. 그는 펄럭이는 코트의 단추를 단단히 잠그고 여미며 말했다.

“강선애의 앞으로 한 달간 스케줄이 어떤지 다 알아 와라. 아마 조만간에 다미로가 그 여자 앞에 나타날 거다.”

“예! 도련님!”

동쪽 산등성이로 동이 트고 있었다. 새벽에 그친 눈발 위로 푸르스름한 여명이 스며들었다. 태익과 곽이 내쉬는 뜨거운 숨결이 하얀 입김으로 피어올랐다.

* * *

객실의 화장실에서 나온 다미로에게서는 희미하게 화약 냄새가 났다. 만약 한조가 전쟁터에 다녀온 군인이 아니라 일반인이었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조의 예민한 후각은 그녀의 코트 깃에 남은 화약 냄새를 미세하게 감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미로의 몸에서 왜 화약 냄새가 나는지 이유는 몰랐었다.

그러다가 상해로부터 소식을 듣고야 비로소 깨달았다. 경성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 상해비밀경찰국 요원들이 함께 탔었고, 그들이 기차 안에서 저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말이다.

그리고 피살된 요원들이 오유미를 쫓고 있었다는 사실에 한조는 일련의 사건들을 머릿속으로 엮기 시작했다.

“마령 그 여잘 잡으면, 오유미와 관련된 무리들 모두 일망타진할 수 있을 겁니다.”

한조는 어젯밤 경성에 도착한 비밀경찰국의 요원에게 말했다. 꼼꼼하게 군복 단추를 점검하며 거울로 요원의 얼굴을 확인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소위.”

“마령은 제게 맡기십시오.”

“알겠습니다.”

요원의 대답에 한조는 다시 거울 속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오유미에게 시킨 이야기는 모두 그가 쓴 시나리오였다. 총잡이 마령이 태익의 여동생으로 둔갑해 그의 집에 머물렀고, 그 총잡이 마령을 데리고 상해까지 태익이 왔다면 예삿일은 아니었을 거라는 짐작으로 시작했다.

그날 댄스홀에 마령과 태익, 오유미가 함께 나타났고 때마침 가즈시케 암살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상해 비밀경찰국은 그중 오유미를 쫓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종합해 볼 때…….

그 모든 것들이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너무 큰 무리가 따르지 않은가! 오유미는 자신과 안태익을 어떻게든 보호하려 들 것임을 한조는 예상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하자는 대로 오유미가 따라올 것을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실제로 오유미는 그 미끼를 덥석 물었고 말이다.

“이제 안태익만 잘 감시하면 됩니다. 그자는 벌써 마령을 찾아 나섰을 테니까요.”

“하지만…… 과연 믿을까요? 그 마령이라는 여자가 자신들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 기차 안에서 저격을 일으킨 것을요?”

“…….”

한조는 한참 동안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창밖을 향해 뒷짐을 진 채였다. 몇 분쯤 지났을까? 그가 뒤를 돌아 책상 위의 현상수배 전단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

“믿든 안 믿든 상관없습니다.”

진심이었다. 태익이 믿든 믿지 않든 그는 상관이 없었다. 태익이 안 믿는다고 해도 그의 조직은 다를 테니까. 잘만 되면 조직에선 태익까지 함께 배신자로 오인해 처리를 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민족당의 뿌리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태익과 다미로가 그들에게 처리되는 과정에서 그 조직의 뿌리까지 찾아낼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한조는 염두에 두고 있었다. 뼛속까지 스며든 분노가 자신을 치졸하게 만들었지만 한조는 깨닫지 못했다.

다미로의 벌거벗은 육신이 태익과 얽혀 있었던 장면만 머릿속에서 셀 수 없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녀가 청했던 도움이……. 사실은 가즈시케 암살과 기차 안에서 비밀경찰국 요원을 저격하기 위한 위장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머리를 돌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조는 다미로가 자신을 기만하고 배신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민족당과 그 수뇌부에게 그녀가 처단을 당하고, 그녀를 처단하러 나선 민족당원들을 전부 체포해, 민족당을 뿌리 뽑아 버리리라고 말이다.

“마령…….”

한조는 다미로의 또 다른 이름인 마령을 읊조리며 새까맣게 타 버린 눈동자를 희뜩였다. 엄습한 동장군이 대지와 하늘을 모두 꽁꽁 얼려 버린 날이었다.

* * *

“눈에 띄는 다른 일정들은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내일모레 조선호텔에서 열리는 그 기자회견 말입니다. 강선애가 참석하는.”

곽은 운전석에서 한마디 한마디 신중하게 태익에게 보고를 올렸다. 백미로 초췌해진 태익의 얼굴을 살피면서였다.

“역시 그날인가…….”

태익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목을 뒤로 젖혔다. 차가운 차량 시트에 뒷머리를 댔다. 지독하게 몰려오는 피로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두 가지였다.

다미로를 영원히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녀를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아이러니한 현실이었다.

한때 그녀의 배신을 확신한 적이 있었다. 그녀를 경무국에서 빼내 와 장위건을 찾아 두 사람의 관계를 확인하기 전까지 말이다.

들려오는 소문을 믿지는 않았었다. 장위건이란 사내의 꼬임에 빠져서 다미로가 그런 큰일을 쳤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인가.

그럼에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인간의 속성을 알고 있었으니까. 수많은 동지들이 변절을 했다. 변절한 동지들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대도, 자신이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다미로의 배신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현재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김산하고 최창학 동지는 연락이 된 건가?”

“아니요, 일단 김산 동지와 연락이 닿는 지인에게 말을 넣어 놨습니다만 아직 회신이 없었습니다.”

“그럼 다시 전해.”

“예?”

두 사람과 연락이 닿길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또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만약에 다미로의 생각이 지금 자신의 생각과 같다면. 그녀가 12월 29일 조선호텔 기자회견장에서 강선애를 쏠 생각이라면…….

“29일…….”

태익은 잠시 말문을 닫았다. 목이 깔깔하고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다미로의 배신이라고 인정하길 거부하는 마음과, 그가 알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서로 반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결과를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뭐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그는 해야만 했다. 그가 천천히 가슴을 펴며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을 다시 떼었다.

“조선호텔에서 보자고 전해라. 적어도 기자회견 3시간 전에는.”

“알겠습니다, 도련님.”

곽이 운전석에서 내려 종로2가 길을 가로질러 전신국으로 뛰어갔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태익은 눈길을 던졌다.

다미로의 벗은 몸에서 뜨끈하게 뿜어져 나오던 열기와 그녀의 땀 냄새가 여전히 코끝에 아련했다.

* * *

“려기요. 최창학 동지!”

김산이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최창학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날쌘돌이 최창학은 시장 어귀의 인파를 요리조리 피해 김산에게 빠르게 걸어왔다.

“그렇게 불러내도 안 나오겠다고 뻗대더니, 뭡니까? 날 먼저 불러내고.”

최창학이 국밥집 나무 걸상에 앉은 김산 옆으로 붙어 앉으며 퉁명스레 물었다. 김산이 허허 너털웃음을 웃더니,

“이모, 료기 국밥 하나 추가하기오!”

하고 기차 화통 같은 목소리로 최창학의 국밥을 주문했다.

“거, 동지끼리 국밥이나 나누어 먹자 불렀는데, 잔소리는……!”

그러고는 머쓱했는지 그답지 않게 변명 아닌 변명을 둘러댔다. 최창학은 피식 코웃음을 치며 어느새 아낙이 건네는 국밥그릇을 받았다.

후루룩, 후룩.

두 사내는 한동안 별 대화 없이 뜨끈한 국밥을 푹푹 떠먹었다. 국밥 그릇이 거의 다 비워져 갈 즈음이었다. 김산이 입에 밥을 떠 넣으며 말했다.

“요새, 리상한 얘기가 떠돌던데. 최 동지도 들었수까?”

“……!”

김산이 지나가는 말이지만 뼈를 담아서 묻는 말에 최창학의 숟갈질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

“대체 그 말 같디도 않은 소리가 어드매서 난 것인디…….”

“그 이야기의 출처가 어디요?”

내내 국밥에 숟가락질만 하던 최창학이 물었다. 김산은 국물을 깨끗하게 비우고 손등으로 슥 입술을 훔친 뒤 최창학을 돌아봤다.

“들기는 말로는 오유미 양이라 안 했수.”

“하! 거 참!”

김산의 대답에 최창학이 기가 막힌다는 듯 짧게 웃었다.

“꼬리를 잡힌 사람이 누군데, 누가 누구한테 죄를 덮어씌운 거요?”

“기러게 말이오.”

북적이는 시장통 한가운데 국밥집에서 김산과 최창학은 빈 밥그릇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최창학이었다.

“마령 동지가 그런 생각으로다 그놈들을 없앴다면 우리가 그걸 도운 꼴이 되는데. 우린 그 상황을 다 지켜보지 않았느냐 말이오. 거기다 우리 셋이서 결정을 내렸지 마령 동지 혼자서 결정을 내린 것도 아니고……. 그 상황을 파악해서 정보를 준 것도 나요.”

어느 모로 보나 그날 기차 안에서 함께 일을 도모했던 김산과 최창학이 보기에 지금 당원들 사이에 돌고 있는 이야기는 날조가 확실했다.

그날 일을 날조해 마령을 음해하려는 음모나 다름없게 들렸던 것이다.

“우리래 이대로 입 다물고 기냥 있으면 안 되지 않간?”

국밥을 먹고 이를 쑤시던 김산이 지나치듯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최창학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두문불출하던 사람이 갑자기 나온 거요?”

그가 새삼스럽게 김산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물었다.

“마령 그 에미나이래, 배신자래 아니지 않간. 그거이 최 동지도 알고 나도 알고 있는 니야긴데. 리대로 입 다물고 있는 거이 비겁해서리.”

김산다운 이야기였다. 최창학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기차에서 피살한 비밀경찰국 두 놈의 시신이 발견되는 것은 정해진 결과였다.

다만 그 결과에 다미로나 최창학, 김산. 혹은 태익이나 다른 동지들이 엮이지 않기만을 바랐었다. 그녀의 계획대로 기차 밖에 있던 제3의 인물에게 저격을 당한 것이라 사람들이 믿길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이 어떻게 꼬였던 것인지 원인은 모르겠지만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만은 두 사내가 보기에 확실했다.

함께 상해까지 갔던 동지들을 위험에 빠트리기 위해 한조와 일을 공모했다니 말이다.

“……오늘은 하늘이 참으로 맑네 그려.”

최창학이 뻥 뚫린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김산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해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며칠 동안 쉼 없이 내리던 싸라기눈이 그친 뒤, 하늘은 가을하늘보다 더 높고 공활했다. 동장군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눈마저도 몰아내는 듯 보였다.

* * *

날이 맑았다.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뚝뚝 아래로 하강했는데 하늘은 그제와도 어제와도 같이 짙푸른 색을 띄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다미로는 낡은 코트를 챙겨 입었다. 경성 변두리에 있는 작은 여관이었다. 이불 한 채와 세숫대야 하나, 그리고 수건 한 장이 전부인 곳이었다.

이곳에서 칩거하며 지낸 이틀 동안 상해에서의 그 호텔이 생각이 났다. 태익과 함께 밤을 보낸 호텔…….

빅토리아 양식의 어여쁜 건물에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던 그 방이 말이다. 포근했던 침대, 나른했던 오후까지의 잠. 뜨거운 샤워. 그리고 등을 따스하고 든든하게 품어 줬던 태익의 품과 그의 체취.

다미로는 일부러 기억을 세심하게 더듬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그 따스하고 아름다웠던 시간들을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더 이상 자신이 숨을 쉬지 않더라도, 생각하고 말할 수 없게 되더라도 세포 속 깊이 각인된 그 추억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다미로는 기도했다. 얼마나 부질없는 기도인지 잘 알면서도 그녀는 그렇게 기도를 했다.

코트의 단추를 잠그고 안경을 바로 썼다. 스무 살에 이화여전 입학식을 이틀 앞둔 날 태익이 선물했던 안경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백화점을 갔었다. 태익이 미나카이 백화점 인수사업을 마무리 짓고 한 달 남짓 지난 날 그가 왜 자신을 데리고 나갔는지도 모른 채로 다미로는 그를 따라나섰던 길이었다. 감히 태익의 손도 잡을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녔다.

그런데 그가 다미로를 안경점으로 데리고 갔다. 어째서 그가 안경점을 온 것일까?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눈이 나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저기 오라버니, 안경점은 왜 오신 거예요? 혹시 벌써 책을 보는 게 어려우신 거예요?”

다미로는 태익의 눈에 문제가 있다고만 생각을 했던 것이다. 태익이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아무 대답 없이 광학사에게 손가락을 튕겼다.

광학사가 두터운 붉은색 쿠션에 안경테 여러 개를 일렬로 놓아 가지고 나왔다. 다미로가 앉은 의자 앞 테이블 위로 안경테가 놓인 쿠션이 놓였다.

“고르시죠. 전부 여성들이 쓸 수 있는 사이즈만 모아 보았습니다.”

“……저요?”

영문을 모르던 다미로는 곁에 서 있던 태익을 올려 봤다. 태익이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잡았다.

“전에 보니까……. 나를 멀리서 볼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더군.”

“……제가요?”

다미로는 먼 곳을 볼 때면 다들 그렇게 보이는 줄 알고 지냈었다. 본디가 감수성이 아주 예민하지도 않았고 특히 제 몸에도 별로 관심이 없는 탓에 그녀는 자신이 그러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

“멀리 보는 건 원래가 누구든 잘 안 보이는 거 아녔어요?”

“멀리도 멀리 나름이니까.”

“아……?”

다미로는 태익의 설명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그녀는 묵묵히 안경테를 고르고 시력을 측정했다.

그리고 이틀인가 지났다. 휴일이었는데 태익은 일을 나갔고 다미로는 집에서 책을 보는 중이었다. 이환이 그녀의 방문 앞에서 헛기침을 했다.

“예, 아저씨.”

발딱 일어나 다미로는 방문을 열었다. 이환이 자글자글한 눈가 주름을 보기 좋게 잡으며 그녀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예쁘게 포장된 작은 상자가 있었다.

다미로는 직감적으로 기다리던 안경이라는 것을 알았다. 영화나 잡지에서만 봤던 분홍색 리본을 풀었다.

가죽케이스가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는 며칠 전 그녀가 골랐던 안경테에 렌즈가 끼워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안경을 끼고 습관처럼 본채의 태익의 방 창문으로 시선을 맞췄다. 짙은 녹음을 띄던 나뭇잎이 가을 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안경 너머로 다미로는 태익을 보았다.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들어오는 햇빛에 책을 보고 있는 그가 있었다. 다미로가 항상 나무그림자라고 생각했던 그 모양이었다.

그의 방 앞에 있던 커다란 능금나무가 만들어 낸 그림자라고 여겼었는데. 늘 태익의 방 창가에 한 모습으로 있던 그림자는 나무그림자가 아니라 그였던 것이다.

그녀가 눈이 나빠 알아보지 못했을 뿐, 태익은 휴식을 취할 때면 언제나 다미로의 방을 향해 서 있었던 것이다.

다미로는 창가에 매달려 한참 동안 안경 너머로 태익을 응시했다. 사랑하는 그의 얼굴을 이렇게 멀리서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마냥 기쁘게 했다.

다미로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신을 더 잘 알고 있는 태익이 그녀는 뿌듯했다.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퐁퐁 솟아오르는 기쁨과 든든함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어떤 폭풍이 휘몰아쳐도 단단한 울타리로 막아 줄 태익의 사랑에 다미로는 깊은 안도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다미로는 장갑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관 앞의 현관이었다. 주인이 들어오는 길에 얼어붙은 눈을 치우고 바스러진 낙엽들을 태우고 있었다. 낙엽이 타는 냄새가 다미로의 코끝을 짙게 스쳤다.

슥슥, 삭삭, 슥삭 슥삭.

비질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아련하게 두드렸다. 변함없는 일상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평온함이 다미로의 가슴 깊은 곳으로 들어와 박혔다.

삶의 마지막을 인식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은 늘 그렇듯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닌지라, 다미로는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을 다잡아야만 했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턱까지 목도리를 둘둘 말아 두르고 그녀는 앞을 노려보았다. 주머니 속에 장갑을 낀 손을 갈무리하고 성큼성큼 그녀는 긴 다리를 앞을 향해 뻗었다.

“에구머니!”

옥문이 놀라 기절할 듯 짧은 비명을 질렀다. 일요일의 이른 아침, 목욕을 위해 길을 나서던 그녀는 별안간 눈앞으로 불쑥 튀어 들어온 곽 때문에 기절을 할 뻔했던 것이다.

“왜…… 왜……!”

놀란 가슴을 누르며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던 곽의 뒤에서 태익이 나왔다. 그는 초췌했다. 비싸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며칠이나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인지, 옥문이 두 번이나 보았던 그 안태익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데

“마령, 그 여자하고 당신. 어떻게 연락을 하는 겁니까?”

길게 담배를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뱉어 내며 태익이 묻는 말에 옥문을 두 눈을 껌뻑거렸다.

마령을 이 사내가 어떻게 아는 거지?

“내가 그 여잘 어떻게 아는지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시고.”

거기에 마치 옥문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태익이 정곡을 찌르는 말에 옥문은 또 딸꾹질을 해야만 했다.

“연락, 누굴 통해서 합니까?”

“그, 그 그게…….”

찰나였지만 옥문은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리가 뒤죽박죽 엉겨들었다. 하지만 태익의 표정을 보는 순간 그녀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공동……. 골동품점에 주인인 구본이라고……. 그, 그 남자를 통해서…….”

꼴깍. 순식간에 말라붙은 목 뒤로 옥문은 침을 삼키며 더듬더듬 얘기했다. 태익이 그녀로부터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얼마 피지 않은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고 성큼성큼 커다란 보폭으로 세워 둔 차를 향했다.

그런데 그의 뒤를 다급하게 따르려던 곽이 갑자기 발길을 멈추어 그녀를 돌아봤다.

“만약 거짓말을 한 거면 미리 여길 떠나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뭐 어디로 달아난들 우리 도련님이 찾아내면 끝이지만.”

누가 들어도 분명한 겁박이었다. 옥문은 빳빳하게 굳은 목을 간신히 끄덕였다. 결코 거짓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녀의 대답을 확인한 곽이 달리듯 차로 걸어갔다. 태익이 이미 뒷좌석 문을 열고 몸을 실었다. 운전석에 날듯이 오른 곽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만날 수 있을까요?”

“…….”

불안한 눈길로 곽이 태익에게 물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다미로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지도 모를 상황이 아닌가.

오늘은 12월 29일. 일요일. 조선호텔에서 중일전쟁에 대한 보고와 기자간담회, 그리고 강선애의 근로정신대 지원 호소연설이 예정된 날이었다.

지난 이틀 동안 아무도 다미로를 찾아내지 못했다. 한조 역시 태익과 민족당원들이 배신자로 낙인찍은 그녀를 찾아내리라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어 가고 있었다.

“꼭 알려 줘야 하는데. 다미로 그 녀석이 일을 치더라도 알고서 쳐야 하는 거잖아요.”

곽은 운전대를 손으로 치며 이를 악물었다. 안타깝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어느새 3일 밤낮을 꼬박 지새운 태익을 보면서 그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다미로에 대한 태익의 책임감, 의무감, 그리고 정확하게 종류는 단정할 수 없지만 깊은 애정. 그런 것들이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5년 전에 모두를 배신한 다미로가 경무국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무섭게 태익은 경무국장을 만났었다. 그리고 불과 만 하루도 되지 않아 그녀를 빼내 집으로 데려왔다.

그날부터 곽은 내내 불안했었다. 민족당이 다미로에게 내릴 처벌이 어떤 것일지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태익이 그것을 막아 줄 줄은 몰랐다.

다미로를 그가 보호해 줄 것이라는 희망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그녀를 지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상해에서 그녀 대신 태익이 가즈시케를 쏠 줄은 정말이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다미로를 동생처럼 키웠으니까, 나중에 마령의 정체가 알려졌을 때를 대비해 그가 그렇게 했던 것일 수도 있다고 곽은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 며칠 동안 태익을 보면서 곽은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비록 잘못 알려져 있던 사실이지만, 다미로의 모친 최순임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도 그가 다미로를 가슴에 품었다는 사실은…….

하…… 어렵지만 곽은 얼핏 알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는 다미로에게 반드시 진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강선애는 죽어 마땅한 인물이지만, 다미로의 손에 그녀의 피를 묻히기보다는 다른 누군가가 해 주기를 간절하게 곽은 바라고 있었다. 그에게도 다미로는 소중한 여동생이었으니까. 아버지 이환이 딸처럼, 아기씨처럼 귀하게 키운.

“문이 닫혔습니다.”

그래서 절망과 실망은 더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소공동 구본의 골동점 앞에서 곽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임시 폐업>

이라는 쪽지만 달랑 유리문에 붙여 두고 가게 문은 꽁꽁 걸어 잠가져 있었다. 태익이 벽에 뒷머리를 대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시간은 벌써 8시다. 조선호텔의 기자간담회는 11시부터 시작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태익이 유 선생에게 단단히 부탁을 해 놓기는 했었다.

그녀를 찾는 일도 잡는 일도 반드시 자신이 하게 지켜봐 달라는 부탁이었다. 한조와 오유미의 말만으로 모든 상황을 판단할 수 없지 않느냐고 유 선생에게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었다.

“유 선생님께서 기다려 주시겠지요? 도련님?”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곽이 불안한 눈동자로 물어 왔다. 태익은 천천히 눈을 떠 무심한 하늘을 응시했다.

“이제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 것 같다, 곽아.”

“도련님하고 저하고 둘이요?”

“아마도.”

“몇 명이 될지, 누가 왔을지도 모르는데 다 막아 낼 수 있을까요?”

곽이 주머니 안쪽에서 총을 꺼냈다. 탄창의 총알을 확인하며 안전핀을 당겨 풀어 놓았다. 곽이 총을 써 본 것은 몇 년 전이었다. 그만큼 웬만한 일에는 총을 들지 않는 이가 곽이었다.

태익과 함께 일을 했지만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은 항일의 최전선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있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든든한 자금줄이자 수뇌부인 태익 때문이었지만, 언제나 최전선에서 싸우는 동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만 했었다.

그래서 총을 쓰는 일을 자주 하지도 않았고 위험 부담도 덜 안고 살아왔지만…….

“그건 최후의 방법이다, 이곽.”

태익이 피식 힘없이 웃으며 차가운 벽에서 등을 떼었다.

“그렇게 미련한 방법으로 하지는 말자고, 우리.”

그가 한숨과 같은 웃음으로 곽의 어깨를 두드렸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럽게 밀려드는 불안감을 그는 여유를 가장해 밀어내고 있던 것이다.

“챠플린에서 오유미가 했던 말로 미뤄 생각해 보면, 간담회 연설에 강선애가 강단에 서기 전에 다미로는 그 여자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일찍 챠플린에서 오유미가 강선애와 유옥문이 했다던 말을 떠올렸더라면! 그 여자 둘이서 마령의 얘기를 했었다면 오유미의 말을 태익은 오늘 새벽에야 떠올렸다. 강선애가 마령을 찾는 이유도 그제야 생각이 났고 말이다.

“장위건 그 새끼가 조금만 더 자세히 얘길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곽은 미련이 남는 아쉬움에 욕지기를 중얼거렸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도련님.”

“어쩌긴, 일단 무식하게라도 그냥 상황에 부딪쳐 봐야지.”

곽의 물음에 태익은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연기처럼 사라졌다. 태익의 눈빛에 남은 것은 불안과 두려움이었다. 다미로를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한 번 더……. 미로 그 녀석을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도련님?”

곽이 물었다. 태익이 마른 눈동자로 곽을 돌아봤다.

“용서는 무슨……. 일단 그 녀석을 살려야, 뭐든 할 수가 있지 지금 상황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파삭하게 말라서 곧 부서질 것 같은 웃음으로 태익은 그렇게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하지만 곧 그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가자, 이곽.”

코트 주머니에서 빼어 든 그의 날카로운 단장이 길게 펴졌다. 꽁꽁 얼어붙은 소공동 길을 태익의 차가 차갑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조선 호텔로 움직입니다.

“그래요?”

-그런데 소위님 예상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숫자가 적습니다. 안 사장 그자와 그의 수하 둘뿐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갈 겁니다.”

-소위님, 심증뿐입니다. 심증만으로 가셔서 뭘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안 사장하고 그 수하 말고도 그들의 조직원들이 같이 움직여야 엮어 넣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대로라면 우리가 무엇을 어쩔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혹시나 오유미가 옆에 붙어 있다면 모를까!

상해 비밀경찰국에서 파견된 요원이 한조를 말리고 나섰다. 하지만 한조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수화기를 일방적으로 내려놓고, 날카롭게 날을 세워 다려 입은 군복에 군모를 깊숙하게 눌러썼다.

태익을 따라 움직인다면 다미로를 찾아낼 수 있음은 분명했다. 한조의 예상과 다르게 민족당이 다미로를 처단하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은 포착하지 못했지만, 그의 본디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지 않은가.

다미로를……. 마령을 찾아서 체포해 들일 것이다. 체포해서 온갖 고문으로 그녀가 접촉했던 민족당원들을 불게 하고 그녀가 다시는 안태익에게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리라! 그런 다음 안다미로를 제 노리개로 삼겠다고!

하잘 것 없는 조선 계집 주제에 감히 대일본제국의 장교를 갖고 논 대가를 처절하게 치르게 해 주겠다고 그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것이다.

꽁꽁 얼어붙은 길 위에 세워 둔 군용 자동차에 한조가 올랐다. 희뿌연 매연을 내뿜으며 그가 탄 자동차가 조선호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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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호텔의 간판이 커다랗게 보였다. 정각 9시. 다미로는 기자간담회가 열릴 호텔 2층 연회장을 가로질러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실 문 앞에서 이순석이 잠시 그녀를 막아섰다.

“원화관 사장님께서 제게 연락을 하셨습니다.”

“아가씨 이름이 뭔데?”

이순석이 위아래로 다미로를 훑어보며 거칠게 물었다. 다미로는 이순석을 잘 알지만 그는 마령의 얼굴을 실제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령이라고 전해 주시면 될 텐데.”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차갑게 말했다. 마령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이순석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는 등지고 있던 문을 열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다미로는 기자간담회가 한창 마무리 준비 중인 홀을 눈으로 한 바퀴 훑어보았다. 강단과 대기실의 거리는 대략 20미터 정도였다.

강단의 높이는 1.3미터 폭은 8미터쯤으로 보였다. 그리고 강단 뒤로 휘장이 보이지만 그 뒤로는 뭐가 있는지 파악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강선애를 언제 쏴야 할까. 정확하게 간뇌를 관통시키기 위해서는 그녀의 머리 위에서 쏘든지 턱보다 약간 아래 위치에서 쏘는 것이 편했다.

달칵.

안에서 이순석이 다시 나왔다. 다미로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던 그가,

“손…… 좀.”

이라고 말하면서 쭈뼛거렸다. 누구인지 모르고 그녀를 막아설 때에는 용기 백배 했었지만 마령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니 얼어붙어 버린 것이다.

다미로가 두 손을 모두 코트 주머니에서 빼내 어깨 위로 들어 보였다. 이순석이 고갯짓으로 대기실 안을 가리켰다. 들어가도 좋다는 말이었다.

“……마령?”

바깥의 추위에 아랑곳없이 어깨를 반쯤 드러낸 드레스 차림의 강선애가 거울 속에서 다미로와 눈을 맞췄다. 강선애에게도 마령의 얼굴을 드러낸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화장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창백한 얼굴에 안경. 대충 뒤로 돌려서 묶은 긴 머리채를 강선애의 눈이 재빠르게 훑어 지났다.

“우리가 초면인가?”

그녀가 다미로에게 물었지만 다미로는 대답 없이 대기실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봤다. 오늘 이곳을 지킬 군경 인력이 얼마나 되는지 체크하려던 것이다.

“이상하게 낯이 익네. 이름이래도 알고 지낸 지가 오래돼서 그런가?”

묘하게 낯이 설지 않은 다미로의 얼굴을 보면서 강선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다미로는 아버지 주옥을 닮기도 했지만 모친 최순임의 눈매와 입술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강선애가 늘 거울을 통해서 보던 자신과 그녀가 닮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다미로는 코트 안쪽에서 총을 꺼내 총신과 탄창을 살피며 짧고 차갑게 대꾸했다.

“제 손가락을 가져가셨잖아요. 낯설 리가 없죠.”

“어머! 그랬지, 그랬구나. 깜빡 잊고 있었네.”

잊을 리가 없다는 것을 다미로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선애는 마령인 다미로에게 얕잡혀 보이지 않기 위해 그녀의 손가락을 자른 일을 대수롭지 않게 기억하는 체했다.

그런 강선애의 허영을 모를 리 없는 다미로는 대기실 안을 세세하게 살피며 성의 없는 대꾸를 계속했다.

“잊으실 게 따로 있지. 남의 손가락을 잘라간 일을 잊으시나요.”

“그러게. 내가 좀 바빠야지.”

“저도 한가한 사람은 아닙니다.”

“알지!”

불안으로 좌불안석하던 강선애는 다미로가 나타나자 눈에 띄게 표정이 환해졌다. 쉰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새빨간 드레스로 자신을 포장한 그녀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목숨이 위협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강선애는 오늘 강연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제 몇 명만 더 채우면 되는 근로정신대 지원을 전국적으로 독려할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녀가 독려연설문을 발표하고 나면, 국대철은 그 공을 인정받아 본지의 천황으로부터 훈장을 받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들려오는 상황이었다.

국대철의 본처가 죽은 지 2년이 지났다. 국대철의 첩마누라 소리를 벗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제 덕으로 국대철이 천황으로부터 훈장을 받는다면 그 공을 인정해 본처 자리를 주겠다는 약속이 그녀를 이 일에 더 매달리도록 만들었다. 처음에는 본처도 못 되는 국대철의 첩마누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을 했지만 이제는 반대가 되었던 것이다.

“강단 말이에요.”

다미로가 거울 속 강선애와 정면으로 시선을 맞추어 물어 왔다.

“강단? 거기가 왜?”

“휘장 뒤쪽엔 뭐가 있어요?”

“휘장 뒤?”

강선애는 미간을 모으며 다미로를 올려다보았다. 화장을 해 주던 여자가 살며시 그녀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밀어 펴냈다.

그제야 제가 인상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강선애는 표정을 바꾸어 다미로에게 입술을 올려 보였다.

“거긴 빈 공간일 거야. 원래 노래나 연극 같은 공연장으로도 쓰이는 곳이라서 넓다고 들었어.”

“그래요? 잘됐네요.”

다미는 오늘 새벽에야 구본에게 건네받은 총을 코트 안쪽으로 다시 갈무리했다.

“잘돼? 뭐가 잘됐다는 말이야?”

강선애가 마지막으로 머리 모양을 점검하면서 물었다. 다미로는,

“저는 휘장 뒤쪽에 있을 거예요. 거기라면 무대 위라서 간담회장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테니까,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하기가 좋은 자리거든요.”

거짓과 사실을 교묘하게 섞어 말했다.

“아! 그런 거야?”

강선애는 다행히 다미로의 말을 전부 믿는 눈치였다.

“밖의 이순석 동지는 곁에 두세요. 총이 아니라 몸으로 달려드는 사람까지는 제가 막을 수 없으니까요.”

다미로는 이순석이 자신과 마주 서 있는 것보다는 강선애 옆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편이 낫다고 판단 내린 것이다.

강선애의 간뇌를 한 번에 명중시키려면 방해자는 최소한이어야 했다. 간담회장 끝을 지키고 설 경비들과 마주 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멀리 있었고 이순석은 강선애의 곁의 어디가 되었든 그녀와 가까이에 있을 테니, 차라리 등잔 밑이 어둡게 두는 쪽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다미로는 강연장 휘장 뒤쪽 자리를 살피기 위해 대기실을 나섰다. 그러나 그녀가 문을 열기 바로 전이었다.

“잠깐. 마령.”

강선애가 거울을 통해 그녀를 불렀다. 다미로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무리 봐도, 마령과 나 초면이 아닌데. 사실대로 얘기하지? 우리가 어디에서 봤는지?”

그녀가 다미로를 똑바로 쏘아보며 묻는 말이었다. 다미로의 가슴속으로 싸한 찬바람이 불어들었다. 심장 속으로 황소바람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글쎄요, 저는 초면이 확실한데요. 이렇게 직접 뵙는 거 처음이니까요. 그래도 흔히들 하는 말로 말을 하자면…….”

“말을 하자면?”

다미로가 잠시 말을 멈추자 강선애가 성마르게 되물었다. 그녀에게도 어떤 느낌이 있었는지는 다미로도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만일에 있었다면 죽는 그 순간에라도 그녀가 뉘우치길 간절하게 바랐다.

함께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그곳에서라도 미워하지 말게…….

“말을 하자면, 그러더군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차갑고 짧게 대답을 마친 다미로가 천천히 강선애에게서 몸을 돌렸다. 거울을 통해 다미가 대기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는 강선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시계바늘은 어느덧 10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간담회장에 사람들과 기자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경찰과 군인들이 뒷좌석을 채웠고 기자들과 유명 언론인과 문인들이 앞자리를 메웠다.

다미로는 휘장 안쪽에서 바깥의 상황을 살폈다. 단상 위에는 일본 본토에서 바다를 건너온 언론인과 내각의원들 다섯이 앉아 간담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선애의 근로정신대 지원독려 연설문 낭독은 11시 40분쯤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단상 아래 가장 앞에 줄에 국대철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일제에게 작위를 받거나 내의원직을 맡은 사람들이 줄줄이 줄지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벌써부터 곳곳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거렸다.

하아.

하아.

하아.

다미로는 간담회장 안의 잡음들보다 자신의 숨소리가 점점 더 커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그래야만 했지만 머리도 함께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끈적끈적하게 고였다. 총을 쥔 손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식의 시작을 알리는 마이크 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바람소리로 들려왔다.

휘장에서 단상에 올라온 강선애의 머리를 쏘는 순간, 그녀는 벌집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최후를 상상해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상상과 실제는 엄연히 달랐다.

미련과 아쉬움. 안타까움과 애틋함……. 말로 다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다미로의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오라버니……. 용기를 주세요.”

다미로는 가만히 눈을 감고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어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제발 이곳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평범한 삶에 안주하고 싶은 욕심에 양심을 져버리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 달라고 기도했다.

삐-.

날카로운 마이크 소리가 다시 그녀의 예민한 귀를 울렸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다미로는 손목에 찬 낡은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35분.

“이로써 간담회는 마치겠습니다.”

강단의 우측에 있던 사회자가 말했다.

“에, 이제 다음 순서로는. 삼성인력개발의 사장님이신 강선애 여사께서 나와 황국신민들에게 드리는 독려의 연설을 하시겠습니다. 박수로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휘장 뒤쪽의 다미로에게 점차 또렷하게 들려왔다. 강선애가 설 단상 가운데. 단상의 양쪽에서 커튼처럼 닫힌 휘장의 그 가운데로 다미로는 총구를 겨눴다.

강선애의 키는 약 156센티 정도. 다미로의 키는 163센티였다. 키 차이를 감안해 그녀의 간뇌를 정확하게 쏘기 위해서 다미로는 지그시 무릎을 낮췄다.

저벅저벅.

강선애가 단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는 소리가 망치로 못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커다랗게 그녀의 머리를 울렸다.

지난 5년이란 시간 동안 계속된 마음의 고통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25년 전에 남편 주옥을 죽이면서 시작된 최순임의 악행이 끝이 날 때가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 같았던 안길준을 죽게 한 죄의 대가. 순진하고 눈처럼 깨끗했던 조선의 소녀들을 들짐승과도 같은 일본군의 노리개로 팔아넘긴 죄의 대가.

다미로는, 강선애 혹은 다른 이름으로는 최순임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상기시키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아 갔다.

끼릭.

안전장치를 풀어 방아쇠에 검지를 댔다. 차가운 쇠의 감촉에 새삼스럽게 머리털이 곤두섰다. 핏줄에 대한 애착, 혈연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지 않거늘.

제 손으로 어미를 죽이는 것에 총구가 망설이는 것인지, 총을 쏜 후 자신에게 날아들 군경들의 총탄이 두려운 것인지 다미로는 알 수가 없었다.

짝짝짝짝 짝짝짝 짝짝짝.

박수 소리가 그녀의 심장에까지 쿵쿵쿵 울려 왔다. 휘장으로 내려진 붉은 커튼을 살며시 걷어 그 사이로 강선애의 뒤통수를 조준했다.

“우리에게 황국신민으로서의 자격을 내려 주신 천황폐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우리가 일중 전쟁에서 승리를 다져 그 승리의 기쁨을…….”

강선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강연장으로 퍼져나가던 순간이었다.

“다미로…… 쉬잇!”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막아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는 목소리……. 방아쇠를 당기려던 다미로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총을 빼내는 손길.

헉!

다미로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태익이라는 것을 그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있었다.

“저 여자는 네가 목숨을 내놓고서 죽일 가치도 없는 인간이야.”

그가 어르듯이 속삭였다. 그녀의 입을 틀어막아 그녀의 어깨를 품에 안은 채로 한 발 한 발 휘장 뒤로 발을 물리면서였다.

“사진.”

그가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다미로의 눈앞으로 들어 보여 줬다.

“왼쪽이 너의 생모 최순임. 오른쪽이 네 모친의 쌍둥이 언니 최순애, 즉 지금의 강선애다.”

다미로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주옥 선생과 네 생모 최순임, 그리고 우리 아버님을 해친 사람은 네가 알고 있는 대로 오른쪽 강선애가 맞고.”

그리고 가운데에는 어린 유옥문이 쌍둥이 자매 사이에 앉아 있었다.

태익이 그녀의 귓가에 숨소리마저도 억눌러 하는 말에 다미로는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 빡빡한 눈을 지그시 힘을 주어 감았다.

태익이 하는 말이 전부 머리에서 정리가 되지는 않았어도 무슨 말인지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렇지만……. 다미로는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입술을 막은 태익의 손을 잡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그녀의 손과는 다르게 그의 손은 뜨겁게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미로가 손에 힘을 주어 태익의 손을 제 입에서 떼어 냈다.

“오라버니, 그래도 저는 꼭 갚아야 할 빚이 남아 있어요.”

강선애를 벌하기 위해 구본과 그의 동료들이 나섰던 5년 전 그날, 그녀가 강선애를 사진 속 최순임으로 믿고 머뭇거리지 않았다면…… 아깝게 목숨을 잃지 않았을 야간학교 동지들의 이야기였다.

그날의 계획 자체가 아무리 무모하고 철저히 준비되지 않았던 계획이었다고 해도, 그래서 그런 실수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다미로의 실수가 더해지지 않았다면 그날의 기억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다미로는 이제 와서 5년 동안 기회를 만들기 위해 참고 기다렸던 시간들을 버릴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

다미로는 간절함을 담은 목소리로 등 뒤의 태익을 불렀다.

“그 빚은…….”

그러나 태익이 그녀가 하려는 말을 잘랐다.

“너와 살면서 내가 갚을 거다, 다미로. 내가 차차 갚아 나가면 될 빚이다. 내가 널 보살피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니까.”

왈칵.

다미로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태익의 사랑이 너무나도 커서 심장에 그의 사랑을 다 담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오라버니.”

하지만 다미로는 몸을 돌려 태익의 가슴을 밀어냈다. 강선애는 없어져야 할 여자였다. 부모님의 원한을 피로 갚지 않는다고 해도 강선애는 사라져야 할 친일 악인이었으니까.

땅에 묻힌 야학동지들과 굳건하게 했던 약속이었다. 이제 지켜봐 줄 사람은 구본과 그의 약혼녀 두 사람뿐이지만 말이다.

“제가 해요. 약속은 제가 했으니까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다미로!”

태익의 손에 반만 내주었던 총을 다미로가 재빨리 빼어 냈다. 그리고 몸을 돌려 휘장을 향해 달려가려던 순간이었다.

꺅! 끼아악!

탕!

탕!

탕!

비명 소리가 들리고 세 번의 총성이 휘장 바깥의 간담회장을 울렸다. 다미로가 그대로 달려 나갔다. 휘장을 젖히자 매캐한 최루액과 안개보다 더 짙은 연막탄의 연기가 회장에 짙게 깔려 있었다.

사람들이 코와 입을 틀어막고 보이지 않는 출구를 찾아 이리저리 뒤엉켰다. 그리고 단상 위로는 연막탄의 뿌연 연기 사이로 새빨간 드레스……. 자락 끝이 보였다.

아니다. 새빨간 드레스 끝자락이 아니라 새빨간 색으로 바닥에 흥건하게 흘러내리는 피였다. 다미로의 눈이 피를 따라 그 근원지를 찾았다. 뿌옇게 흐려진 연막탄의 연기 사이로 눈도 감지 못한 강선애의 창백한 얼굴이 흐릿하게 드러나 있었다.

설마……!

망연하게 굳어져 버린 다미로의 팔목을 태익이 앞으로 뛰어나오며 낚아챘다. 간담회장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 사이로 태익은 다미로의 손을 잡고 섞여 들어갔다.

호흡이 고통스러웠다. 연막탄과 함께 던져진 최루가스 때문에 숨을 쉬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눈을 뜨는 것조차도 힘겨웠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시야를 가리던 연막이 썰물처럼 한곳으로 빠져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콧속을 훑어 지남과 동시에 다미로와 태익의 몸을 휘감았다.

끼릭……. 철컥!

다미로는 뒤통수에서 들리는 차가운 소리에 제자리에 멈춰 섰다. 후두부 바로 아래쪽 뒷목덜미에 섬뜩하게 차가운 쇳덩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소뇌가 위치한 자리였다. 소뇌를 관통해 간뇌로 총알이 파고들 수 있는 자리.

“항상 이곳을 정조준해서 총격을 한다지? ……마령.”

뒷덜미에 박힌 총구처럼 소름끼치게 차가운 한조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버린 다미로 때문에 함께 자리에 멈춰 선 태익의 두 발이 얼어붙었다.

“고통이 없이 한 방에 끝낼 수 있게 말이야. 간뇌란 것이 고통을 관장하는 곳이라서.”

처음으로 듣는 한조의 조선말이었다. 다미로는 피식 입술을 끌어올렸다. 제 손을 꽉 움켜쥔 태익의 손에서 힘주어 손을 빼내면서였다.

“한 방에 끝낼 수는 있지만…….”

그녀가 한조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대신 얼굴을 박살내는 자리이기도 하죠. 그래야 두고두고 꿈자리가 사납지 않을 테니까.”

“설마 내 꿈자리를 걱정해 주는 건가?”

한조가 입술 가득 비웃음을 물고서 되물었다. 다미로를 이 자리에서 죽이려던 계획은 없었다. 총잡이 마령으로 체포해서 그녀의 입으로 안태익을 민족당의 수괴로 불게 만들 작정이었건만.

배신자로 민족당과 안태익의 손에 위협 받았으면 했던 그녀가 태익의 손에 이끌려 나가는 것을 본 순간! 한조는 그 모든 것이 소용없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안태익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권력을 이용해서 그녀를 다시 빼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말이다.

“내가 미쳤다고 당신 꿈자리까지 걱정하겠어요.”

다미로가 차갑게 대답했다. 한조는 그녀의 뒷덜미에 겨눈 총구에 힘을 주며 되물었다.

“그럼?”

“오라버니한테 보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오라버니는 내보낸 후에 날 쏘더라도 쏴요.”

“何?(뭐라고?)”

조선말을 하던 한조의 입에서 짧은 일본어가 나왔다. 다미로는 그 순간 천천히 뒤를 돌아본 태익에게 눈짓을 보냈다.

한조가 흥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다미로가 일부러 그를 자극할 만한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안다미로가 마령이라는 사실을 한조가 알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녀는 재빠르게 간파했다.

그가 자신이 다미로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는 의미였다.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으리라. 마루야마 한조는 자존심이 강한 남자였으므로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용납하기 힘들 것이라 말이다.

“갑자기 조선말이 중국말로 들이기라도 한 건가요? 난 내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험한 꼴로 죽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ハ!愛?(하! 사랑?)”

한조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다미로가 그 순간 태익에게 빠른 중국어로 말했다.

“大哥,拍攝。(오라버니, 쏴요.)”

찰나였다. 다미로가 어깨를 비스듬히 틈과 동시에 태익의 총구가 한조의 어깨를 겨누었다.

탕!

삑! 삑삑처!

일본 군경들이 불어 대는 호루라기 소리가 아프게 세 사람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피로 얼룩진 한조의 얼굴이 다미로의 눈앞에서 흐릿하게 어른거렸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한조의 모습이 느릿하게 보였다.

태익이 낚아챈 손목이 아팠다. 강단 위에 널브러져 있는 강선애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를 할퀴듯 스치고 지나갔다.

파랗게 펼쳐진 하늘이 보인다 싶은 순간, 다미로는 이미 차 안에 올라타 있었다. 곽이 운전하는 차가 거칠게 조선호텔 주차장을 벗어났다.

* * *

뭉게구름이 수평선 너머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북태평양의 바다답게 약간은 더웠지만 습기가 적어 공기는 한없이 쾌적했다. 저 멀리 수평선 가까이로 항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박한 배들이 수십 척은 될 만큼 커다란 항구였다.

“무슨 전봅니까? 도련님.”

배로 들어온 전보를 받아 나온 태익에게 곽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태익은 그런 곽의 이마를 전보 봉투 모서리로 콕 찍으며 피식 웃어 주었다. 그리고 봉투를 뜯어 내용을 살폈다.

<인도로 가던 배가 해적에게 공격을 당했음. 그 배에 타고 있던 오유미 양의 생사는 불투명함.>

경성에 남아 있는 민족당의 동지가 보낸 소식이었다. 태익이 보던 전보에 코를 박고 함께 내용을 확인하던 곽이 쯧쯧 혀를 찼다.

“……살아라도 있어야 할 텐데요.”

괘씸한 마음도 많았다. 오유미에 대해서 말이다. 다미로를 어떻게 그렇게 배신자로 모함할 생각을 했던 것인지. 아무리 오유미가 자기 자신의 안전을 한조로부터 보장받기 위해 그랬다고 해도, 쉽게 용납이 될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람의 생사 앞에서는 그렇게 괘씸한 마음도 작아지게 마련이었다. 그래도 함께 일을 했던 동지가 아니던가. 서로의 생사를 챙겨 주던 때가 있었기에 곽은 전보로 들려온 소식이 안타까웠다.

“영국 해군이 수색중이라니까, 조만간 소식이 있겠지. 없으면 죽은 걸 테고.”

태익이 곽의 심란한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나지막이 말했다. 육지가 가까워진 바다에서 선선한 바람이 배로 불어 들었다. 태익은 받은 전보를 대충 찢어 바다에 던져 뿌려 버렸다.

종이가 훨훨 날아 달리는 배의 뒷전으로 흩어졌다. 하얗게 포말이 부서지는 뱃전의 저쪽에서 태익과 곽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어이, 안 대장님!”

덩치가 커다란 사내가 모자를 흔들었다. 옆의 날쌘돌이처럼 생긴 사내는 그런 덩치에게 한심하다는 눈길을 보내며 함께 걸어왔다.

“뭡네까? 우린 빼놓고 기렇게 둘이서만 속닥거릴기요?”

김산이 농담이랍시고 던지는 말이었다. 곽이 그런 김산에게 눈꼬리를 접어 살살 웃었다.

“에이 설마요! 형님들을 두고서 우리가 왜 속닥거립니까!”

“기럼 뭐네? 와 둘이서만 나와서 이케 함께 있는 거네? 좋아서 죽고 못 사는 그 에미나이래 어따 혼자 두고!”

하하하.

곽이 슬금슬금 태익의 눈치를 살폈다. 김산이 태익을 점점 만만하게 대하는 것에 태익이 혹여 화라도 낼까 봐 곽은 겁을 먹었던 것이다.

배를 타고 이곳 하와이를 향해 오는 여행길 내내 김산은 거들먹거리기 일쑤였다. 당연히 그가 거들먹거릴 만도 하다는 것을 태익도 곽도 인정했지만 슬슬 선을 넘어서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좋아서 죽고 못 사는 에미나이라니!

“우리가 그 에미나이를 어케 살렸는데! 무려 목숨을 거러서! 민족당의 뛰어난 항일전사 두 명이, 목숨을 걸었단 말이디!”

새삼스레 한 달 전의 일을 되새기며 김산이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곁의 최창학이 김산의 귀를 잡아 가까운 선실로 질질 끌고 들어갔다.

더 이상은 거들먹거리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어서였다. 곽이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헤헤” 객쩍게 태익을 향해 웃었다. 그러나 태익은 그사이에 꽤나 익숙해진 김산의 갑질을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길 수가 있었다.

“전보 내용은 일단 우리만 아는 걸로……. 알겠나?”

태익이 선실을 향해 몸을 돌리면서 곽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곽은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리며 등을 돌린 태익의 뒷모습을 확인했다.

한 달에 걸친 긴 항해에 미로 같은 선체 복도에 익숙해진 태익이 망설임 없는 발길로 걸었다. 2등실 복도를 지나 1등실 선실이 배치된 복도로 들어서서 다시 한 번 귀퉁이를 돌면 그의 선실이 있었다.

침대 하나와 작은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작은 화장대가 하나 달린 선실이었다. 노크 없이 태익이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태익이 미간을 찌푸렸다. 또 선체 저 아래 4등 선실에 그녀가 내려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태익이 서둘러 아래 선실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짙은 땀 냄새와 사람 냄새가 훅 콧속으로 침범했다.

빽빽하게 들어찬 2층 침대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용하는 말들도 각국의 말들이었다. 중국말을 쓰는 사람들이 제일 많았고, 다음으로는 인도말과 영어였다.

아마도 그녀는 중국인들 사이에 끼어 있을 것이다. 태익은 익숙하게 그곳을 찾아 침대와 침대 사이를 헤치고 들어갔다.

“좋아요, 그 포즈예요. 그대로 계세요. 하나, 둘, 셋!”

팡!

플래시가 번쩍이고 사람들은 눈을 깜빡였다. 카메라 렌즈에서 눈을 뗀 그녀가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다시 손짓으로 사람들을 줄 세우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오늘은 이쯤 하지?”

그녀의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덥석 허리를 안으며 태익이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가 만개한 목련보다 더 환한 웃음으로 그를 돌아봤다.

“곧 항구다, 다미로…….”

태익이 전하는 반가운 소식에 다미로의 얼굴에 또다시 웃음이 만개했다. 몸을 돌려 그의 목을 껴안는 다미로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밤하늘의 별보다 더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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