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12)

10

한조는 손에 든 전단지를 찢어발길 듯 쏘아보고 있었다. 지나간 현상수배 전단지였다. 부친 마루야마 지로의 사무실 책상에서 찾아낸 물건이었다.

얼마 전 보고도 별생각 없이 지나친 전단지였다. 그날 안국동 저택을 빠져나온 직후 한조는 그길로 부친의 사무실로 향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청력이 사라진 귀에 예리한 이명이 들려와 그를 더 한계로 몰아쳤다.

그런데 어제 새벽에 상해에서 전화 한 통을 받은 직후 그는 확신을 했다. 부친 마루야마 지로와 안태익의 요 근래의 거래. 그 내용은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안다미로는 안태익의 사람이었으니까. 명확하게 안다미로는 안태익의 여자였으니까. 안태익이 부친에게 어떤 것을 원했는지. 지로가 태익에게 받은 것의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녀에게 이용을 당한 자신이 미치도록 한심해서 돌아 버리기 직전까지 갔지만.

오늘 아침의 한조는 눈동자가 새파랗게 얼어 소름이 돋도록 차가워져 있었다.

<살인 수배범 마령. 현상금 10만원>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수건으로 땀을 닦아 내며 한조는 전단지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뒷마당에서 검도 연습을 마치고 집 안으로 들어온 길이었다.

배신감으로 분노에 떠는 심장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지독하게 몸을 혹사시키는 일. 전쟁터에서 그가 미쳐 돌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렇게 혹독하게 자기 몸을 다뤘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잔혹하다는 평을 얻기는 했지만 한조는 오히려 그런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성을 앗아가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는 말이지 않은가.

배신의 분노에 치를 떨면서도 그는 자신이 냉정해질 수 있는 이유가, 전쟁터에서 단련된 정신력 때문이라고 여겼다.

비록, 잠시나마 여색에 홀려 현실을 외면하려고 했었다. 부정하려고도 했었지만 이제는 아닌 것이다.

상해에서 돌아오던 기차 안에서 한조는 군인의 본능으로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안태익의 동생 다미로가 그녀의 정체의 전부가 아닐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저께 그 광경을 목격했다. 보지 말았어야 할 광경인지 아닌지 그것까지 아직 한조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만일 보지 못했다면!

다미로가, 아니 마령이 안태익의 몸 아래에서 헐떡이는 광경을 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기도 싫다.

만일 몰랐다면 한조는 자신이 그녀에 관해 알고도 눈을 감으려고 들었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안다미로 그녀를 가져야 했으니까. 이유? 이유 따위는 몰랐다. 안식을 주는 것 같았던 다미로의 말투, 표정, 몸짓 그런 것 때문이었나? 안식을 갖고 싶었던 것인가? 진정?

한조는 이틀 밤을 그렇게 갈등하고 자신에게 되묻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오늘 새벽에 전화 한 통을 받는 순간 그의 갈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상해 비밀경찰국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얘기를 듣는 순간에 한조의 머릿속엔 섬광이 지나갔던 것이다.

비밀경찰국 요원 두 명이 자신과 다미로가 탔던 기차에서 피살된 사건의 전말을 알 것 같아서였다.

설마하고 생각했었다. 다미로가 한참을 객실 화장실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던 일이 떠올라서 그는 불안했다.

“부탁한 것은, 알아봤나?”

-네, 소위님.

“어떻게 된 건가.”

-마령이라는 여자가 잡혔던 것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잡히고 3일쯤 지나서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혐의 없음이었다는 건가?”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다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석방 명령 최종인가는 누가 내렸나?”

-그것이…….

통화 중인 사람은 경무국에 있는 한조의 군대 후임이었다. 그는 군 제대 후에 경무국의 경찰로 재직 중이었다.

-마루야마 경무국장님께서 최종석방 인가를 내려 주셨습니다.

역시 아버지……!

“알았네. 알겠지만 오늘 부탁은 자네와 나만의 비밀일세.”

-하이! 여부가 있겠습니까!

수화기를 내려놓은 한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철저하게 다미로에게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인정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행동은 그 다음에 해야만 했다. 그녀에게 자신이 어리석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후에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래야 실수가 없을 테니까.

한조의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 갔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자신의 생각과 달리 제어하지 못한 분노로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내려놓은 수화기를 움켜쥔 채 한조는 번쩍 눈을 떴다. 이제 자신과 말을 맞춘 오유미가 계획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이용하고 기만한 안다미로가 그 대가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 * *

미나카이 백화점 태익의 사무실이었다.

“그 여자가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다고?”

“예. 12월 29일 조선호텔에서 열리는 전비내선문답 기자회견에서 할 거랍니다.”

“전비내선문답이라면.”

태익은 곽의 보고에 의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다 생각이 정리가 되었다는 듯 곽을 쳐다보며 물었다.

“전쟁 상황 보고를 공개적으로 하겠다는 말인가?”

“그러지 싶습니다. 요새 주간지를 통해서 공개적으로 떠들어 대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군을 상대하는 대일본의 무기가 고사포총이 16종이네, 소총이 31종이네, 비행기가 30종이네 하면서요.”

곽이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태익은 그런 내용보다 강선애가 그런 자리의 기자회견에 왜 서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국대철이 첩 마누라가 그런 자리에서 연설을 한다. 연설 내용은? 혹시 알아봤나?”

“그게, 아마도 근로정신대 모집을 위한 선전연설일 거라더군요.”

곽의 말에 태익의 입가에 기막히다는 웃음이 번졌다.

“그 여자가 근로정신대 모집을 하는 사업자라는 소린가?”

“예. 국대철 사장이 초기 사업자금을 지원했다고 하던데요.”

곽의 짧은 설명에 태익은 눈을 번뜩였다.

“어떤 여자인지 얘기해 보지 않아도 알겠군.”

그렇다면 다미로가 그 여자를 노리는 이유가……. 그런 이유라는 말인가? 아니다. 부족하다. 민족의 반역자이며 죽어 마땅한 인물은 맞지만 목숨을 걸어야 할 가치는 없는 여자였다.

똑똑똑.

정확하게 세 번 울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생각에 빠져 있던 태익은 노크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곽의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오유미 양!”

“드릴 말씀이 있어요.”

다짜고짜 그녀가 하는 말이었다. 노크는 했지만 안에서 들어오라는 대답도 듣지 않고 들이닥친 그녀의 표정은 몹시 단호했다. 태익은 불시에 들이닥친 불청객을 향해 의자를 돌렸다. 느긋이 책상 위로 손을 뻗어 담배를 집어 들었다.

“얼굴을 보니 급한 일인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이렇게 불쑥 쳐들어오는 건 반갑지 않군, 오유미.”

그가 라이터를 손에 쥐며 말했다. 오유미가 성마른 몸짓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반가워하시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제 얘길 들으시면 제가 반갑고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게 될 테니까요.”

너무나도 자신만만한 말투와 표정에 태익은 슬쩍 표정을 굳혔다.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안한 마음을 익숙하게 감추며 의자에 등을 묻고 얘기를 해 보라는 눈짓을 했다.

“상해에 있는 요원 한 사람한테 연락을 받았어요.”

“……내용은?”

“우리가 탔던 기차에서 일본 비밀경찰국 요원 두 명이 피살을 당했대요.”

비밀경찰국 요원 둘이?

“그들이 왜 그 기차에 탑승했던 것인지, 이유는?”

“그건 몰라요.”

태익이 정곡을 찌르자 오유미는 일순 전투적인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곧 단단히 결심을 한 듯 시선을 똑바로 맞추며 다시 입술을 떼었다.

“그렇지만 그 둘이 피살된 이유와 범인은 알 것 같아요.”

범인과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오유미의 말에 태익은 피려던 담배를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피살된 요원 중 한 사람이…… 가즈시케의 보좌관이었대요.”

빌어먹을!

태익은 불길한 예감의 적중에 속으로만 욕을 삼켰다. 곽의 표정도 경직되어 빳빳하게 어깨를 굳혔다.

“그렇다면 우릴 쫓고 있었겠군.”

태익이 오유미를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들이 피살된 이유를 알 것 같다는 말을 드리는 거예요, 안 대장님.”

그가 오유미의 말에 미간을 가운데로 힘주어 모았다. 오유미는 마치 거대한 음모라도 알아낸 것처럼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우린 함정에 빠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

“마루야마 한조와 마령 동지의 합작품에 빠진 거라고요.”

감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도록 오유미는 단언했다. 어차피 그녀는 태익이나 곽이 다미로를 변명하려는 말 같은 것은 절대 들을 생각이 없었다.

“놈들이 피살당한 시간을 보면 분명히 맞아떨어져요. 심양역을 바로 앞두면서부터 그 두 사람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했어요. 생각해 보세요. 마루야마하고 마령 동지가 자기네 객실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근 시간도 딱 그 시간대하고 일치해요.”

태익과 곽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심증이 부족했다. 태익은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책상 앞으로 나와 위로 몸을 기대어 앞으로 손깍지를 꼈다. 오유미의 말을 더 정확하게 들어야만 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오유미.”

더 정확한 증거를 대라는 그의 말이었다. 그녀가 초조함에 붉은 입술을 적셨다.

“피살당한 요원들이요. 두 사람 모두 정확하게 총알에 간뇌를 관통했다고 했어요. 그렇게 쏘는 사람이 그날 그 기차 안에 두 명 탔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지 않나요?”

오유미의 명확한 지적에 곽은 저도 모르게 힘주어 눈을 감아 버렸다. 대체 다미로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것이라는 말인가!

“마령이 우릴 함정에 빠트리려는 의도였다는 증거는?”

하지만 태익은 섣부르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가 오유미에게 물었다. 다미로를 살리기 위해서 그는 상해의 작전이 잘못될 가능성을 배제 못 한 채 자신이 총을 쥐었다. 그런데 또다시 그녀가 배신을 했다고?

“마루야마 소위요.”

태익의 물음에 다소 뜸을 들인 오유미가 대답을 했다.

“마루야마 한조를 당신이 만났나?”

“아뇨, 그 사람이 제게 연락을 해 왔더군요.”

마루야마가 연락을 해 왔다니. 태익은 잠시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힘없이 웃고 말았다.

그제 밤 다미로를 안았다. 전혀 자신답지 않게 충동에 휩싸여 다미로를 안았었다. 지금도 여전히 뜨겁고 미끄덩한 그녀 내부의 감촉이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마음의 고통과 쾌락에 몸부림치며 그를 받아들였던 그녀를 태익은 똑똑하게 기억했다.

몸으로 그녀가 자신을 배신했을 거라고 믿은 적은 없었다. 무엇을 위해서든 그녀가 한조와 몸을 섞으리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었다. 다미로는 그런 창부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질투를 억누르지 못했던 이유는 있었다. 태익 자신이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지는 못했어도 한조와 그녀가 한 배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다미로가 감추려는 그것. 강선애를 죽이려는 이유. 그녀는 단 한 번도 강선애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결코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불안했었다. 그녀가 제 목적을 위해서 한조와 한 배를 타려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런데…… 한조와 함께 민족당을 위험에 빠트리려 했다고? 그녀가?

“마령과 거래를 했다더군요. 상해로 가던 그 배에서부터 말이에요.”

“무슨 거래를 했다는 말이지?”

“자신이 민족당에 볼모로 잡혀 있다고 했대요. 만일 마루야마 소위가 자유를 찾아 준다면 민족당을 해체시키는 일을 도와주겠다고요. 자긴 꼭 할 일이 있어서 그걸 해야 한다고요.”

“그래서 결과는?”

결과, 그것이 중요했다. 만약 지금의 상황으로 정말 민족당이 위협을 받고 있다면 오유미의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낱 심증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상해에서…….”

“이미 저와 안 대장님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래요. 곧 여기 경성으로 사람이 올 거고요.”

“그 얘긴 마루야마의 얘기인가, 상해에서 직접 전해 들은 얘기인가?”

“……상해에서요.”

오유미는 분하다는 듯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마령, 그 여잘 믿고 싶었지만 모든 정황이 그 여잘 믿을 수 없게 만들고 있어요! 안 대장님! 그 여잘 그렇게 계속 댁에 데리고만 계실 거예요? 유 선생님께 당장 보고 드리고 처리를 해야…….”

“마루야마가 당신한테 그런 얘길 떠벌린 이유는?”

“……네?”

“그걸 듣지 못했는데.”

다미로에 대한 믿음을 흔들지 않으려는 태익의 마음을 오유미는 그제야 보고 말았다. 이환에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갑작스레 들었을 때 그녀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이며 그것도 상당히 오랜 시간 연인으로 지내 왔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감쪽같이 연기를 했던 두 사람이지 않은가!

마령이 한조에게 했다는 말 그대로, 그녀는 민족당의 유 선생과 태익에게 잡힌 볼모 노릇을 했고, 태익은 철저히 그녀를 총잡이 마령으로 대했었다.

그래서 이환에게 얘길 들은 후, 두 사람의 전후사정 따위는 관심도 들지 않고 그저 속았다는 분노가 전부였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서 든 생각은 다른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안태익의 연인이라는 저 마령이라는 여자가, 이환이 아씨라고 부르는 마령이……. 살인청부업자일 수가 있는지 말이다.

그때부터였다. 오유미는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데 마치 운명처럼 한조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녀가 머물던 조선호텔로 찾아갔던 그가 프런트에 메모를 남겼던 것이다. 연락을 요망한다고.

혼란스런 머리로 안국동 태익의 집을 나와 호텔로 갔던 오유미는 한조의 메모를 바로 전달 받을 수 있었다.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임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전혀 연락을 해 올 것이라는 예상도 없었던 한조로부터의 메모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상해에서 오유미 양에 대해 수배령이 떨어졌더군요. 아십니까?

그녀의 전화를 받은 한조가 했던 첫마디였다.

-아직 경성 경찰이나 군 당국에서는 당신이 경성으로 입국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조와의 거래였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안 사장에게 전해요. 그럼 당신이 조선을 빠져나갈 시간적 여유를 내가 벌어 주겠소.

그렇지만 오유미는 그의 제안을 적극 수락할 의사는 없었다. 적어도 그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당신만 살아남으라는 기회는 아니라는 걸 알길 바랍니다. 내 생각에 분명히 당신은 꼬리일 거요. 물론 나도 아직은 당신 몸통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꼬리가 잡히면 몸통이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그 말은 곧 오유미가 잡히면 태익과 민족당의 수뇌부 전체가 일제에게 노출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솔직히 오유미는 일제에 잡혀 모진 고문을 이겨 낼 자신이 없었다.

오유미가 항일을 돕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배운 자로서의 양심을 지켜야 한다는 우월감에 취해서였다. 독립과 민족을 위해서?

웃기지 말라고 해라. 폭탄 몇 개 투척하고 만주전선에서 관동군과 전쟁 몇 번을 한다고 해서 조선이 독립을 이룰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기대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녀였다. 하지만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조선인들로부터 주목 받는 몸이 되어 있었으니까. 하다못해 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던 것이다.

친일 아니면 항일인 조선의 지식인들 틈바구니에 껴 있던 그녀가 아니던가. 지식인들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항일을 도왔었다. 그게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친일, 항일인 사람보다 그녀처럼 어정쩡하게 하는 척만 하다가 변심하는 지식인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렇기에 그녀는 고문을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한조가 입만 벙긋하면 상해에서 성공한 여배우 오유미의 화려한 삶도 마감을 하게 될 테니까.

“안 대장님과 같이 저보고 경성을 떠나라더군요.”

“왜?”

“자긴 마령, 그 여잘 살리고 싶다고.”

오유미가 천천히 굳은 몸을 소파로 앉히며 나지막이 말했다. 모든 얘길 한조가 시킨 대로 털어놓은 그녀였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그녀도 알 길이 없었다.

한조가 했던 말 중 그녀가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은……. 자신을 상해 일본 조계지의 경찰국에서 찾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결정은 안 대장님께서 내리세요. 그렇지만 더 이상은 마령 그 여자한테 속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이환이 마령에 관해 했던 얘기들을 오유미는 머릿속 저 안쪽 깊숙한 곳에 처박아 두기로 했다. 과거에 태익과 마령의 관계가 어떠했든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진실조차도 알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됐든. 오유미는 잃은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한조의 제안을 거절하면 그녀는 분명히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잃을 것들 중에는 태익도 포함이 되어 있었고 말이다. 애초부터 창부들과 일하던 여자를 믿은 태익이 실수였다고 오유미는 생각했던 것이다.

조선인을 경멸하는 일본 군인까지도 꼬여 낸 마령이 아닌가. 태익이 그런 마령에게 빠졌었다고 해도 흠이 될 일은 아니었다.

“일단 29일 출항하는 오사카행 배편 두 장을 예약했어요. 그곳에서 다시 인도로 갈 거고요. 거긴 영국령이니까 경성이나 대만보다는 훨씬 안전하겠죠.”

오유미는 떨리는 손으로 모자를 집어 소파에서 일어났다. 태익이 자신과 함께 경성을 떠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태익은 해야 할 일이 많은 남자였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잘못되어서는 안 되는 신분이라는 것을 그 자신도 알 것이라고 말이다. 아무리 마령과 좋아하는 사이였고 몸을 섞는 사이라고 해도……. 조국과 민족, 동지들을 배신한 여자를 그가 두둔하리라고 오유미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은 태익이 미동도 없이 사무실을 나가는 오유미의 뒷모습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흐린 우윳빛 하늘에서 싸라기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빨리했다.

* * *

안국동 집의 정원을 지키는 경비 인력의 숫자는 여전했다. 그렇지만 다미로는 이제 집의 어느 곳이 경비가 허술한지 알 수 있었다. 행랑채의 동쪽 담장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그곳을 지키던 경비 인력 하나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행랑에는 늘 사람이 있었고 그곳으로 드나드는 외부인이 있다면 행랑식구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강선애가 당신을 찾아요. 그 여자의 하수인쯤 되는 유옥문이라는 여자가 몇 번이나 날 찾아왔었어요. 당신한테 연락 넣어 달라고.

“그래서요? 뭐라고 그랬어요?”

소공동의 구본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연락이 될 거라고 그랬지요.”

은 한숨 뒤로 구본이 대답을 했다. 다미로는 짧은 순간 잔뜩 졸였던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잘했어요. 고마워요. 구 작가님.”

-잘했다니……. 난 전혀 잘한 짓 아닌 것 같아요. 당신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이 과연 잘한 일 맞아요?

이 일을 계획하는 내내 전혀 내켜 하지 않던 구본이었다.

“날 사지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구 작가님 동생 대신 복수를 하고, 앞으로 제2, 제3의 구 작가님 동생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후…… 마령!

구본에게 얘기했듯 순수하게 그런 대의(大義)만을 생각한 일은 분명히 아니었다. 대의보다 개인적인 원한이 앞선 순위였고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떳떳해지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는 태익에 대한 사랑의 부작용일지도 몰랐다. 열등감과 출생에 대한 짙은 패배감. 그것이 다미로를 이곳까지 몰고 온 것일 수도 있었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조선호텔에서 열리는 기자회견장 한가운데에서 강선애를 쏘고 다미로가 살아나올 확률은 여전히 단 1퍼센트도 되지 않았으니까.

다만 생각보다 일이 쉬워진 것은 강선애가 직접 총잡이 마령을 찾았다는 일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강선애는 죽은 가즈시케를 상해로 만나러 갔었다고 했다.

-그일 때문에 잔뜩 겁을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강선애가 마령을 다급하게 찾는 이유에 대해 구본이 말했다.

-바로 전날 만났던 가즈시켄가 뭔가가 그렇게 암살을 당하고 나니까, 무서웠던 거죠.

“근로정신대 모집사업 때문에 가즈시케를 만났던 거로군요?”

-아마도요. 그자가 차기 총독이라는 소문이 떠들썩했으니까 그랬겠지요.

구본에게 그 얘기를 드는 순간, 다미로는 어쩌면 하늘이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즈시케를 만나고 왔는데 바로 그 다음날 그가 죽임을 당했으니까.

더군다나 자신이 탔던 경성행 기차에서의 피살 사건까지 그녀가 알고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강선애가 잔뜩 겁을 집어먹을 수도 있지 않은가.

기차에서의 피살사건을 작게 생각하면, 가즈시케와 연결된 사람들이 암살을 당했다고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확대해석해 보면 근로정신대 사업과 관련된 사람들의 죽음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강선애는 지금 그렇게 확대해석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나 마령을 찾아 헤매는 것이겠지.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이순석을 빼돌리지 않아도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마령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남편도 모자라 남편의 주인까지 죽인 여자가……. 제 목숨은 그리도 귀하다니. 다미로는 허탈하게 웃으며 행랑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는 싸라기눈발로 시야는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이 집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29일에 맞춰 놓은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어려워질 것은 자명한 현실이었다.

다미로는 아직도 온기가 그대로인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얌전히 정리가 된 이부자리에 눈길이 멈췄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태익의 등을 껴안고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려 안간힘을 다했던 순간들이 보였다. 그와 다시 만나고서 그제 밤에야 비로소 다미로는 태익이 주는 쾌락에 몸과 마음을 다 내맡길 수가 있었다.

“하으읏! ……오라버니……. 으읏! 태익 오라버니…… 하읏!”

가슴이 터질 것 같던 밤이었다. 온몸을 열고서 태익을 받아들이니 쾌락을 갈구하는 그곳뿐 아니라, 마음까지 다미로는 터질 것 같은 전율에 아득하게 휩싸일 수 있었다.

그에게 안길 때마다 더해지는 죄책감에 그녀는 움츠러들어야만 했다. 5년 전에 모든 사실을 알기 이전처럼 그에게 안길 수가 없었다.

마음과 몸을 온전하게 태익에게 내던져 그가 주는 쾌락의 극치를 다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와 몸을 섞을 때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그제 밤은 아니었다. 일부러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단단히 결심을 세웠었다. 비록 태익이 고통스럽고 참담한 마음으로 자신을 범하듯 안기 시작했지만, 다미로는 그마저도 미치도록 좋았다.

질투에 사로잡혀 자신을 미친 듯이 갈구하고 범하는 태익의 허리 짓에 얼어붙었던 뇌수가 쩡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전율이 솟구쳤었다.

진즉에 태익에게 범해져야 했을 자신이라고 다미로는 생각했다. 그에게 굴욕적으로 범해져 치욕을 느끼는 일이 조금이라도 죄를 더는 길이라고 말이다.

“하윽!”

태익이 그녀의 몸을 옆으로 눕혀 서로의 음부를 X자로 교합시켰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은 교합이 이루어졌다. 자궁 안쪽까지 그의 남성에 뚫린 기분이었다.

퍽퍽퍽. 퍽퍽.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소리는 태익의 사타구니가 다미로의 음부에 세차게 부딪치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가 교합한 채로 다시 다미로를 엎어 놓았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이부자리 위에 그녀를 짐승처럼 엎드리게 해 놓고 뒤에서 허리를 쳐올렸다.

철썩 철썩.

차진 다미로의 엉덩이와 그의 사타구니가 차진 교합음을 냈다. 그때마다 다미로의 탱글탱글한 엉덩이 살이 흔들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에서 투명한 땀방울이 몽골몽골 솟구쳤다.

퍽 철썩, 퍽퍽퍽 철썩 철썩.

태익의 허리 짓이 급격하게 빨라졌다. 그녀의 엉덩이 살이 파이도록 손톱을 박아 넣은 채로 그는 폭발할 것 같은 제 남성을 그녀의 질구에 미친 듯이 박아 넣었다.

검붉은 속살들이 파르르 진동하는 모습에 전율했다. 다미로가 이를 악물면서도 숨을 헐떡이며 빙글빙글 엉덩이를 돌리는 허리 짓에 그는 뇌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대로 그녀가 먼저 폭발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그는 터질 것처럼 차오른 방사욕을 억눌러 제 남성을 빼냈다. 그리고 다미로를 앞으로 돌려 눕혔다.

급작스런 그의 행동에 그녀가 놀랄 틈도 주지 않았다. 눕힌 채로 그녀의 다리를 잡고 끈적이는 체액으로 젖은 치모 속 클리토리스를 입술에 물었다.

“하읏!”

다미로가 허리를 뒤틀었다. 그는 바로 손가락을 질구에 밀어 넣었다. 이미 그의 남성이 마찰시킨 다미로의 동굴은 미끄덩거리는 애액으로 가득했다. 클리토리스를 자극하던 입술을 내려 손가락을 쑤셔 넣은 질구를 삼켰다.

다미로의 체액을 음미하며 뾰족하게 혀를 세워 질구를 쑤시고 들어갔다. 핏빛 속살들을 혀로 핥고 입술로 빨았다. 그녀를 이대로 갈아서 마셔 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떠나지 못하게. 안태익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그녀를 제 안에 흡수하고 싶은 욕망과 충동이 그를 화염처럼 휩싸 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를 마셔도 해갈되지 않는 갈망에 태익은 다시 그녀의 질구에 제 남성을 박아 넣었다. 그녀의 양쪽 사타구니를 두 손으로 억눌러 절대 오므리지 못하도록 만들어 남성을 깊숙하게 쑤셔 넣었다.

“하! 으으으읏!”

너무나도 깊숙하게 세차게 박혀 든 남성에 그녀가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태익의 손이 출렁이는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쉴 새 없는 허리 짓으로 자신을 박아 넣으며 고통스러울 정도의 쾌락으로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손가락을 빨고 조였다.

아래로는 태익의 남성을 빨고 조이면서 입술로는 그의 손가락을 빨고 삼켰다.

“하악!”

절정에 오른 그녀가 숨을 삼켰다. 호흡을 멈추고 뒤로 젖힌 고개를 떨어뜨렸다. 태익이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밤새 3번이나 이어진 관계로 그녀의 질구가 헐어서 부풀어 있었다. 태익이 깨끗한 수건으로 사타구니 전체를 적신 체액과 정액을 닦아 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그의 혀가 다시 다미로의 음부를 애무했다. 클리토리스를 혀로 자극하고 조갯살처럼 차진 음순을 입술로 빨아 당겼다.

그의 남성에 또다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쳐서 반쯤 넋이 나간 다미로의 질구로 그는 제 것을 또 밀어 넣었다.

“으읍!”

다미로의 아름다운 미간이 구겨졌다. 태익의 그녀의 두 다리를 위로 모아 올려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조가비처럼, 질구가 꽉 조여진 그녀가 그의 남성을 숨 막히도록 탄력적으로 조여 왔다.

“으윽…….”

그의 입술에서 처음으로 참지 못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태익이 천천히 허리 짓을 시작했다. 지쳐서 너부러졌던 다미로가 힘없이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다미로의 탄력적인 질이 그를 고통스럽도록 지독한 쾌락으로 몰고 들어갔다.

다미로는 담장을 넘었다. 진즉에 이 담장을 넘을 수 있었음에도 그녀는 지난 2달 남짓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태익의 품에 안주하고픈 욕심이 그녀에게 양심을 져버리라는 유혹을 가했다.

양심.

그깟 것이 뭔데 행복과 맞바꿔야 한다는 말인가? 하면서 수없이 그녀로 하여금 자문하게 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당신이 알지 말아야 할 걸 안 것은 아니에요, 마령.”

“알아요.”

소공동 구본의 골동품점은 언제나 그랬듯 고즈넉하게 그녀의 시린 마음을 감싸 안아 주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 진실에 대해 마령한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구본은 그녀의 손에 뜨끈한 엽차가 담긴 컵을 쥐어 주며 맞은편으로 앉았다. 난로 위에서는 까맣게 그은 양철 주전자가 뜨거운 김을 올리고 있었다.

“제가 있잖아요.”

다미로는 구본이 자신을 설득하려는 말에 조용히 대답했다.

“제가 저 자신한테 끊임없이 책임을 묻고 있잖아요. 저는 저를 피해갈 수 없어요.”

“마령.”

“구 작가님은 이제 아무것도 해 주실 것 없습니다. 이곳 골동점을 정리하는 일은 뒤로 미루시고 내일 당장 여길 떠나세요.”

다미로는 단호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에는 감정이 출렁이고 있었지만 말하는 입술도 표정도 그녀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지극히 차갑고 이성적이었다.

“마령 당신이 하지 않아도 누군가 그 여잘 처단할 겁니다.”

마지막.

마지막 설득이라고 생각하면서 구본은 입을 열었다.

“소문이 돌고 있어요. 강선애 그 여자가 상해로 만나러 갔던 총독 후임자란 놈이 암살을 당했답니다. 왜놈들은 중국과의 전쟁 통에 사람들이 동요할까 봐 쉬쉬하고 있지만, 소문은 벌써 그렇게 퍼졌습니다. 게다가 얼마 전 경성으로 들어오려던 상해 조계지의 비밀경찰국 놈들이 기차에서 총을 맞았다는 얘기도 있어요. 강선애가 엿새 뒤 행사에 벌벌 떠는 이유가 그 때문이고요.”

생각대로였구나!

다미로는 구본의 말에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것을 보지 못한 구본은 그녀에게 애걸을 했다.

“그러니까 몇 달만 더 기다려 봅시다. 분명히 그 안에 강선애 그 여자는 죽을 거요!”

아마도 구본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다미로는 생각이 들었다. 일련의 암살 사건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다미로는 정해진 날 강선애를 없애야만 했다. 그들에게 악행을 저지른 인간들의 말로가 반드시 똑같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져 가고 있었다.

거창한 항일의 의미 같은 것은 아직 다미로는 잘 몰랐다. 태익에게 얘기 들었고 배웠으며 그의 행보를 조금이나마 지켜봤지만, 그 끝이 없는 희생의 길을 아직 그녀는 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이제 하려는 일이 태익이 앞으로 가려는 행보에 아주 약간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갈게요. 어디에 있을지는 얘기 안 해요, 구 작가님.”

그렇게 하는 것이 구본의 안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다미로의 판단이었다.

“마령!”

그가 골동점 뒷문으로 나가는 다미로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제가 하지 않으면…….”

다미로는 뒤를 돌아 구본을 단단한 눈동자로 응시하며 말했다.

“강선애 그 여자는 벽에 똥칠할 때까지 호의호식하면서 잘 살지도 모르잖아요. 일어날지 말지 모를 요행에 구 작가님 여동생 같은 아이들의 앞날을 맡기지 말자고요, 우리.”

그녀의 결심처럼 단단하게 묶은 머리칼이 찬바람에 휘날렸다.

“총이나 구해 줘요, 유효사격거리 25미터 내외로요. 더블액션이면 더 좋고, 자동 8연발이면 더 고맙고요. 그리고 그런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독일식 발터 권총이면 되겠죠?”

다미로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구해 줘요. 어렵지 않죠?”

다그치듯 약속을 받아 내려는 다미로의 물음에 구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이렇게나 그녀를 말리지만 결국엔 총을 구해 줄 것을 다미로는 알고 있었다.

구본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그녀가 총을 구하려 든다면 오히려 그녀가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알았어요. 알겠는데…… 왜 사격 거리가 그렇게 짧은 걸로 구해 달라는 거예요?”

하지만 그는 이해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유효사격거리가 길면 다미로는 자신을 덜 드러내고 강선애를 저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째서 50미터는커녕 30미터도 안 되는 독일식 발트를 구해 달라는 것인지 그는 의문이었다.

다미로가 그런 구본을 보면서 시리도록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제가 눈이 나쁘잖아요. ……사격 거리가 길어지면 명중률이 반으로 떨어져요. 그럼 곤란하죠. 두 번은 없을 기회인데.”

안경 안쪽 다미로의 눈동자가 결연했던 이유를 구본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마령…….”

“물건은 구하면 늘 두던 장소에 두세요. 모레 안으로 경성을 떠나시는 거 잊지 말고요.”

다미로는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그렇게 당부만 남기고 뒤를 돌았다. 며칠 동안 내리다 말다 내리다 말다 반복하던 싸라기눈이 다시 날리기 시작했다.

다미로의 쓸쓸한 등 뒤로 눈바람이 휘몰아쳤다. 추위에 인적이 드물어진 소공동의 뒷골목으로 그녀의 모습이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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