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12)

9

“국대철 사장 첩마누랍니다. 근로정신대 사업을 하는 여자지요. 그 여자 얼굴 아는 사람은 경성에서 몇 명 되지 않습니다.”

나이 지긋한 중국인 바텐더의 대답이었다. 태익은 오유미의 말을 듣고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던 바의 바텐더를 밖으로 불러내 돈을 꽂아 줬다.

듣는 순간 여자들 중 하나가 강선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누구인지 분명한데, 그 조합이 심상치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같이 있던 여자는 바로 이 근처 원화관의 사장이고요. 두 여자 다 오랜만에 이곳에 들렀습니다. 근자에 몇 년 동안 근로정신대로 데려갈 어린여자애들을 모집하러 다니느라 바빴다더군요. ……이런 말 어떻게 들리실는지 모르지만, 특히나 국대철이 첩마누라 그 여자는 쓰레기지요.”

원화관이라. 원화관이면 유옥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여자가 강선애가 함께 있었다.

태익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내내 미간을 모은 채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렇지만 뚜렷한 결론 대신 무언가 심상치 않은 연결고리가 형성된 것을 알아챘다.

최순임과 유옥문, 유옥문과 강선애, 강선애와 다미로……. 최순임도 강선애도 유옥문과 연결이 되어 있었고, 또 다미로와도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연결점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다미로와 국대철의 첩마누라 강선애.

“도련님, 오셨습니까?”

이환이 거실에서 태익을 맞았다. 태익은 겉옷을 벗어 이환에게 건네며 물었다.

“다미로는?”

“아씨를 부를까요?”

“오늘은 나 몰래 안 내보냈어? 영감?”

며칠 전 그 일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환은 금방 알아들었다. 그날 집에 돌아온 이곽이 조용히 부친 이환에게 물었다.

“아부지, 다미로 왜 내보내 주셨어? 도련님한테 딱 걸렸잖아요!”

태익을 어디에서 만났다는 것인지 곽이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로 태익이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이환은 알고 있었다.

“오늘은 집에 얌전히 붙들어 두었습니다.”

태익이 넥타이를 풀며 거실 문 너머 유리로 별채를 쳐다봤다.

“종일 뭘 하는데?”

“아씨 말씀이십니까?”

“그럼 내가 영감이 뭘 하는지 궁금하겠어? 뭘 할지 뻔히 다 아는데?”

하하하.

태익이 유일하게 편하게 느끼는 말 상대는 이환이었다. 조선 땅에 있는 날보다 중국과 일본, 유럽 등지로 출장을 다니던 부친을 대신해 이환은 늘 그를 보살폈다.

유모보다도 더 살뜰하게 그를 챙겼고 교육을 시켰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한평생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부친 안길준에게 배웠다면, 사내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이환에게 배웠다고 할 수 있었다.

“아씨는 오늘 종일 빨래를 하셨습니다. 이불도 빨고 옷도 빨고요. 오랫동안 서랍장에서 케케묵은 것들이 아닙니까. 그것들을 빨고 정리하셨습니다.”

태익은 이환의 말에 대꾸 없이 서재로 향했다. 아직도 머릿속에는 호텔 승강기에서 본 한조와 그녀의 모습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어리석다고. 한조 혼자만의 감정으로 다미로에게 치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는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 호텔의 방까지 그녀가 한조를 따라갔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서재의 의자에 한참 동안 뒤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태익은 눈을 감고 있었다. 바싹 마른 낙엽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르는 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마른 풀들이 서로 몸을 부대끼는 소리가 이명처럼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머릿속이 온통 다미로로 가득 차서 다른 생각들이 거의 불능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상해에서도…….

6개월을 계획해서 역할에 맡는 동지들을 섭외하는 일까지 9달이 걸린 작전을 그는 마지막에 제 맘대로 변경해 버렸지 않은가.

작전에 실패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일 실패했다면 커다란 책임이 뒤따를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다미로를 함정에 빠트리는 결과를 낳을 가즈시케 저격 작전에서 그녀를 빼내야겠다는 마음을 바꿀 수가 없었다.

이미 그녀를 경무국에서 빼내 온 순간부터 마음 굳힌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처분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유 선생에게 청을 넣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다만, 그 처분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만약 말을 했다면 상해작전은 처음부터 다시 계획해야 될 수도 있었다.

태익은 답답한 가슴에 서재를 내려와 정원으로 나왔다. 초겨울 바람이 스산했다. 사방 1미터 폭으로 만든 작은 연못 속 잉어들도 움직임이 느려져 있었다.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태익이 그 발소리의 주인을 돌아봤을 때에는 이미 그녀가 곁에 와 있었다.

다미로는 팔 안 가득하게 걷은 빨래를 안고 있었다.

물끄러미 연못 속 잉어들을 쳐다보는 태익을 따라 다미로도 잉어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익숙한 침묵이 이어졌다.

무뚝뚝한 다미로와 말수가 적은 태익이 함께 있을 때에는 늘 이런 침묵이 있었다. 하지만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었다.

서로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서로를 기꺼이 신뢰했기에 상대의 침묵이 불안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다미로의 생각을 알 수 없다는 것이 그는 불안하고 싫었다.

“너한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냐? 다미로.”

그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로 연못을 보며 물었다. 다미로가 고개를 들어 태익을 돌아봤다.

“…….”

“나는 될 수 없는 건가?”

“…….”

물끄러미 자신의 옆얼굴을 쳐다보는 다미로의 눈길을 알면서도 태익은 고개를 틀지 않았다.

“네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마음 같아선 그 뚜껑이라도 열고 싶지만…….”

“…….”

“뚜껑을 연다고 알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묻자.”

“…….”

다미로가 태익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는 듯 다시 연못으로 시선을 돌렸다.

“꾸미고 있는 일이 뭐냐? ……아무리 생각해도 난 좀 알아야겠는데.”

이번엔 태익이 고개를 돌려 다미로를 쳐다봤다. 그녀는 시선을 연못에 꽂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

“말씀드렸잖아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할 거라고.”

속이 터지도록 답답하게 돌아오는 같은 대답, 같은 소리.

태익은 또다시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넘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날 조선호텔에서 한조와 그녀를 봤을 때처럼 말이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서재에서 다미로를 범하듯 안아 버린 이유는 질투도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불안을 해소해야만 했다. 그렇게 범해지듯 굴욕적으로 관계를 맺을 때 다미로가 자신을 밀어낸다면 그녀의 마음이 정말로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의미할 테니까.

사내로써 치졸하고 비신사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태익은 두 번 다시 다미로로 인해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무방비상태로 그녀를 잃은 후 마음이 무너지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다.

그 해야 할 일들은 그에게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의무였다. 조선인으로 태어났기에 물려받은 책임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무너져 버린다면 그 의무와 책임을 제대로 해낼 턱이 없지 않은가.

지금도 계획하고 진행 중인 많은 작전들이 있다. 그것들을 해내기 위해서는 두 번 다시 마음이 무너져 내려서는 안 됐다.

“오라버니.”

다미로가 자신의 대답에 아무런 말없이 연못에만 눈을 둔 태익을 불렀다. 강선애에 관한 일은 결코 말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여전히 안다미로가 안태익을 배신 중이라고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러니 한조와의 호텔에서 일은…….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한조와의 관계에 대해 오해를 하는 편이 그가 안다미로를 버리는 것에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 일은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 안에서의 일에 대해서 말이다. 당시에는 상황이 매우 급박했고, 또 태익이 자신의 계획을 말릴 수도 있다는 우려에 얘기하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오유미가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한조가 어디까지 눈치를 채고 있는지, 혹은 알고 있는지 몰라도 그와 유 선생이 대비를 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드릴 말이 있어요.”

다미로는 얇은 카디건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며 그에게 몸을 돌렸다. 태익이 연못에서 고개를 틀어 그녀를 봤다.

“…….”

“아무래도 오유미 양이…….”

“내가 뭘요?”

다미로의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의 말이 중단됐다. 9시를 넘긴 깊은 밤이건만. 다미로에게 그녀는 불청객과 다름이 없었다. 하필 타이밍이 이리 절묘하다니 말이다.

“설마 내 얘길 하고 있었어요? 두 분?”

오유미의 짙은 미소가 다미로와 태익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따뜻한 커피가 놓여 있었다. 바깥의 쌀쌀한 기운을 몰아내려는 듯 짙은 색의 커피는 향기롭고 따뜻했다.

“며칠만 머물 수 있도록 부탁드려요, 안 사장님.”

“호텔은 왜 나온 건가?”

오유미의 속이 보이는 청에 태익이 눈썹을 밀어 올렸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요. 이놈의 인기란 경성에 와서까지 이어지네요. 이곳에서는 조금 자유로울 수 있을 줄 알았더니요.”

오유미가 커피를 홀짝이며 후후 웃었다. 오유미에게 문을 열어 준 곽은 태익의 눈치를 살피며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다미로가 집에 있다는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 오유미는 다미로가 왜 안국동의 이 집에 있는지 이유를 모르지 않던가.

“마령 동지는 안 보이시네요? 커피 맛 좋은데 함께 드시지 않고…….”

아니나 다를까. 오유미가 다미로를 찾았다. 태익은 다리를 꼬아 앉아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잠시 동안 묘한 침묵이 거실을 가득 매웠다.

이환은 마령이 누구인데 이곳에서 찾는 거지? 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곽은 안절부절못했다. 태연한 사람은 태익과 오유미뿐이었다.

오유미가 태연한 이유를 곽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어떻게 제가 며칠 댁에서 신세 지는 것을 허락해 주실 건가요?”

오유미는 마령에 대한 얘기로 어색해진 공기를 쇄신하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태익이 커피 잔을 이환에게 건넸다.

그가 특유의 감정을 감추는 웃음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경성에 일가친척이 많다고 알고 있는데, 그쪽으로 가지 않고서 왜.”

작정하고 밀어내려는 말인지, 떠보는 말인지 오유미는 태익의 말을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었다.

“일가친척이 많은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아시는 대로 아버지 쪽 6촌 형제들이 계시긴 한데, 그다지 서로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라서.”

오유미는 치맛자락에 식은땀이 솟은 손바닥을 몰래 닦았다. 뻔뻔하게 쳐들어왔지만 태익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자니 저절로 긴장이 됐던 것이다.

호텔로 찾아오는 열혈 팬 따위는 없었다. 그녀를 보자고 줄을 늘어서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 더욱이 경성에 있는 친척은 6촌이 아니라 삼촌과 고모였다.

그렇지만 태익의 이 안국동 집에 며칠이라도 머물기 위해서는 거짓말이 필요했다. 솔직히 늦은 밤에 그를 찾아온 이유는 마령 때문이었다.

태익은 오유미의 말을 믿는지 아닌지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고문 받는 것처럼 그의 허락을 기다리는 것이 미치도록 불안했다.

“그럼 제가 쓸 수 있는 방은 어딘가요?”

그래서 차라리 뻔뻔해진 길에 더 뻔뻔해지는 길을 택했다. 그녀가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거실을 중심으로 긴 복도가 두 개 있었고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보였다.

“영감.”

태익이 이환을 불렀다. 오유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가 자신의 집사에게 뭐라고 지시를 내리는지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원화관에서 강선애를 만났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고 찾아갔지만 상해의 ‘오유미’라고 소개하자 바로 그녀를 불러 주었던 것이다.

강선애는 그녀가 왜 원화관을 찾아왔는지 상당히 신기하다는 표정을 했다. 그녀에게 오유미가 느낀 첫인상은…… 천박함이었다.

근본부터 그렇게 자란 것인지 살아온 과정이 그렇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강선애에 대한 기대 따위는 당연히 갖고 있지 않았다.

오직 마령에 대해 궁금하다는 것이 오유미가 원화관을 찾아간 이유였다. 어쨌든 강선애는 오유미를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오유미의 신분이 확실하다고 여겼기 때문인 듯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물음에 술술 잘도 말을 늘어놓았다.

특히나 지금 막다른 길에 다다른 근로정신대 모집 일에 오유미의 도움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굴리는 것이 훤히 보였다.

“마령 그 애가 필요하시면 말만 하시구랴. 그 애가 내 말이라면 또 껌벅 죽지 않겠수.”

강선애가 큰소리치듯 했던 말이었다.

“내가 그 애 손가락을 잘랐다우. 그래서 그 앤 내가 무서워서 절대 배신 같은 것도 꿈도 못 꾼다는 말이죠. 지난 5년 동안 내가 아주 개처럼 부려먹었는데 단 한 번도 안 하겠다고 뒤로 내뺀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 앨 아신다면 소문을 들어 알겠지만 그 애를 찾는 사람들이 꽤나 되는 편이지요. 그런데도 그 애한테는 언제나 내가 부탁하는 일이 가장 먼저랍니다.”

강선애는 오유미가 만일 마령이 필요하다면 자신을 통해야 일이 성사될 수 있음을 대놓고 어필했던 것이다.

“조만간에 일 두어 건으로 그 애를 부를 예정이에요. 민족당의 그 어린놈들을 다시 없애…….”

강선애는 의도했던 말이 아니라는 듯 말을 하다 말았다. 오유미의 신분이 아무리 확실하다고 해도 자신의 계획을 노출시킬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오늘 살롱 챠플린에 처음 가 봤는데, 발길 하길 잘한 것 같으네요. 여사님 같은 분과 인연이 닿다니요.”

오유미는 능숙하게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끝으로 원화관을 나왔다. 강선애가 마지막으로 하려다가 말았던 얘기.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강선애 같은 여자들은 곧잘 숨겨야 할 진심을 실수로 내뱉는 수가 있었으니까.

상해의 동료 여배우들 중 강선애와 비슷한 캐릭터들은 널려 있었다. 돈 때문에 배우를 하고 그 명성으로 몸을 팔아 호의호식하는 여자들 말이다. 강선애는 그런 부류와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더욱이 오유미는 마령이 그녀의 사주를 받는다면, 분명 그 사주를 들어줄 것 같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히기도 했었다.

그녀가 소문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적이 있었지만, 기차에서 한조와 문을 잠그고 밤을 보낸 일을 확인한 이후로 오유미는 생각이 바뀌었던 것이다.

다미로는 돈 귀(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익이 그녀를 믿지 못해 상해에서의 작전을 자신이 마무리했던 것이라고 그녀는 결론을 지었다.

그러자 마령이 안국동의 이 집에 있는 것도 금방 이해가 됐다. 철저하게 감시를 하려는 목적이라고. 등잔 밑이 어두운 것은 조심성이 없는 사람들의 얘기다.

동지는 멀리 둬도 적은 가까이 두라는 옛말이 있지 않던가!

상해에서의 작전에 대해 마령이 강선애 그 여자에게 말이라도 하는 날엔…… 대책이 없지 않은가. 강선애에게 손가락이 잘릴 정도로 그녀의 노예가 되어 있던 마령이라면,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마령이 강선애와 그런 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상해작전에 쓰려고 했던 이유는 분명히 유 선생과 안태익이 그녀가 마루야마 한조와 그런 관계라는 사실을 안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거였다.

“별채에 방을 내드리지요.”

이환이 오유미에게 말했다. 그녀는 태익이 거실 장식 위에 놓아 둔 담배 케이스를 집는 모습을 보면서 몸을 일으켰다.

태익의 집에 밤이 늦었음에도 찾아온 이유는 그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하는 항일에 관해 알려지지 않았어도 그는 일본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조선경제인으로서 일제의 감시 대상일 것이다.

그렇기에 도청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설사 그것이 지나치게 앞서가는 생각이라고 해도 말이다.

또한 오유미의 그런 생각 안에는, 그와 결혼설이 터진 지금. 그의 집안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 주고 싶다는 욕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부친이나 다름없다던 가신이자 집사인 이환에게 인사를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태익의 확실한 거절 같은 것은 오유미가 뒷걸음질을 칠 이유가 되지 못했다.

천하절색이라 불리는 오유미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원하는 것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한 적이 없었다. 일본의 무용학교 졸업도, 상해에서의 여배우로서의 성공도 이루었다.

조선의 항일 운동가들의 운동을 돕는 일에도 실패를 맛본 적이 없었다. 태익이 자신을 거절하는 이유는 오유미가 부담스러운 것일 뿐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어디를 가나 이목을 끌 수밖에 없는 여배우라는 직업이 부담스러운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오유미는 불안을 느꼈다. 마령에 대해서 태익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이 드는 지금도 그녀는 불안을 느꼈다.

마령이 태익과 다른 동지들을 배신할까 봐 느끼는 불안이 아니라 다른 의미의 불안이었다. 그런 마령이건만. 태익이 문득 문득 마령을 보던 시선이 오유미는 미치도록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그 시간, 안국동 태익의 저택 담장 밖으로 짙은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다. 군복을 벗고 짙은 색 가죽재킷에 짙은 색 바지를 입은 한조였다. 흡사 사람의 눈을 피하려는 옷차림이 분명했다.

태익이 다미로를 내주지 않으려는 이유. 한조는 그 이유를 알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안국동 저택의 경비가 삼엄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간 태익의 집을 몇 번인가 드나들면서 한조는 군인의 본능으로 경비들의 위치를 파악해 두었다. 안국동의 이 집에서 가장 경비가 허술한 곳은 행랑채 뒤쪽 담장이었다.

담장에 바짝 붙어 귀를 댔다. 인기척이 있는지 확인했으나 예상대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담을 넘는 일 따위는 한조에게는 일도 아닌 것은 당연했다.

한쪽 청력을 잃고 한동안 평형감각 이상으로 고생을 한 적은 있었지만 극복은 금방이었다. 전장을 누비던 잔혹성은 그를 자신에게도 혹독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평형감각을 잃고서 쓰러지길 반복하면서도 그는 걷는 일을 쉬지 않았다. 심지어 1분도 채 달리지 못하고 구토와 어지럼증을 반복하면서도 그는 매일 한 시간씩을 달렸던 인물이었다.

태익의 반대 따위로 다미로를 쉽사리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안태익이 다미로를 싸고돌면 돌수록 한조는 더 오기가 발동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집착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집착이 나쁠 것이 뭐가 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만일에……. 그녀가…….

한조의 눈빛이 까맣게 짙어졌다. 제가 상상하는 대로라면, 며칠 전 그날 그녀의 행동이 만일 그 피살 사건과 어떤 관계라도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다미로를 태익에게서 뺏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태익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라면, 혹시나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애정은커녕 눈엣가시 같은 이복 여동생을 테러에 이용해 먹으려는 수작이라면 더더욱 다미로를 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어떤 물증도 증거도 없었지만 한조는 상해에서부터 태익에 대한 의심을 풀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물며 대일본제국을 상대로 뭔가를 하려는 수작에 다미로를 이용하겠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조는 가볍게 담장을 뛰어넘었다. 제법 높이가 되는 담장이라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순간 소리가 났지만 다행히도 주변을 순찰하는 경비 인력이 없는 타이밍이었다.

집안은 여느 때처럼 고즈넉했다. 거느린 식솔들이 수십 명에 이르는데도 불구하고 행랑마저도 이미 잠자리를 준비하는 듯 보였다.

행랑을 빠져나오니 정원이 보였다. 그리고 정원 끝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키와 체격, 그리고 옷차림으로 보아 한조는 그림자가 태익임을 직감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태익은 한조가 익숙하게 드나들던 본채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터벅터벅 계단석을 올라가는 그림자를 따라 한조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움직였다.

태익은 오유미가 별채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의 표정은 성말라 있었다. 오유미 앞에서 내내 느긋하고 여유로운 척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다미로로 들어차 있었다.

느낌이 싸한 그 연결고리.

태익은 담배를 성마르게 비벼 껐다. 다미로의 방이 보이는 별채로 눈을 던졌다. 별채는 본디 그의 모친이 쓰던 곳이었다. 그가 5살도 되기 전에 모친이 돌아가셨다.

부친 안길준은 다미로가 13살 되던 해에 비워 두었던 별채를 손봤다. 온전히 그녀를 위해서 거실을 만들고 씻을 곳을 만들었다.

본채에 달린 현대식 욕실처럼 샤워 시설이 된 곳은 아니지만 아궁이에서 물을 데워 바로 목욕을 할 수 있었다. 깨끗하게 타일도 깔아 두고 말이다.

순전히 다미로를 위해 손을 본 곳이 그녀가 쓰는 별채였다. 오유미가 쓰는 곳은 별채에서 기역 자로 꺾인 곳의 손님용 온돌방이었다.

똑똑.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에 시선을 두고 있던 다미로가 고개를 들었다.

이환이거나 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태익일 수도 있었기에 그녀는 잠시 문을 열길 망설였다. 그러다가 책을 놓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태익이 팔짱을 끼고 문설주에 어깨를 기대어 서 있었다.

툭.

다미로가 들고 있던 책에서 무엇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다미로도 태익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얘기 좀 할까?”

놀라지 않았지만 뻘쭘하게 선 다미로에게 태익이 말했다. 그녀가 굳은 얼굴로 그를 올려 봤다. 그녀의 손 크기로 한 뼘 이상이나 큰 태익이었다.

그와 이렇게 정면으로 가까이 마주 서면 그의 체격에 늘 다미로는 압도되고는 했다. 넓은 어깨와 가슴, 기다란 팔과 단단한 허리…….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균형이 잘 잡힌 태익은 살집이 없어도 항상 다른 사내들보다 힘이 세 보였다. 키로 보자면 곽이 그보다 더 클 것이다.

그러나 곽은 한 번도 태익과의 팔씨름이나 운동경기에서 이겨 본 적이 없었다. 곽이 18~19살 시절에 태익이 일부러 져 준 것들을 빼면 다미로의 기억에는 결코 없었다.

일평생 태익이 누군가에게 쓰라린 패배를 당했다는 기억은 다미로 하나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태익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더는 드릴 얘기 없어요, 오라버니.”

“너한테 하라고는 안 한다. 넌 듣고 대답만 하면 되니까.”

“대답할 말도 없어요.”

다미로가 잘라 말했지만 태익은 그녀를 밀고 그녀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문은 닫지 않았다. 다미로 혼자서만 쓰는 독채이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유미가 쓰는 별채와는 중문으로 구분이 되어 있었다.

“종일 빨래하고 정리를 했다더니……. 전보다 더 휑하구먼.”

태익은 이부자리를 얌전하게 펴 놓은 방을 둘러봤다. 이화여전에 입학하던 때에 화장대를 하나 사 주겠다고 했었지만 그녀는 작은 경대 하나를 골랐다.

꽃당초 무늬를 자개로 장식한 나전서랍 경대였다. 아마도 태익이 그녀에게 선물한 유일한 물건이지 싶었다.

그토록이나 사랑했건만.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느라 변변한 선물조차 주지 못했던 것이 태익은 이제야 생각이 났다. 그녀가 어리다는 핑계였다.

그는 창가에 놓인 경대로 다가가 작은 서랍을 열었다. 이곳에 그녀가 무엇을 넣어 두는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서랍 안에 낡은 용머리 편지칼이 하나 있었다. 편지를 뜯을 때 그가 사용하던 칼이었다. 길이와 폭이 비녀만 한 크기의 이 편지칼은 그가 스물두 살 때에 마지막으로 본 물건이었다.

태익이 서랍 안에서 편지칼을 꺼내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다미로가 차갑게 칼을 낚아챘다.

“주세요. 버리신 거잖아요.”

화가 난 것인가? 할 말이 없다는데 굳이 찾아와 이렇게 귀찮게 구는 것에 대해……. 아니면 숨기기에 급급했던 그 시절의 사랑에 새삼스럽게 회의가 든 것인가.

태익은 미간을 깊이 접으며 등 뒤로 가 버린 다미로에게 몸을 돌렸다. 미치도록 사랑했던 순간들만 존재했었을 줄 알았다.

그녀의 배신이 용서받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는 해도 그가 더 고통을 받았던 이유는 그 미치게 사랑했던 순간들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사이 금광에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뜯었던 칼이야……. 그래서 버린 물건이다.”

“알아요.”

“어떻게? 그때 넌 학교에 있었을 텐데?”

태익이 창가에 한 손을 짚어 비스듬히 섰다. 얌전한 분홍색 블라우스에 무릎을 덮는 편안한 플레어스커트를 입은 다미로는 수수하지만 예뻤다.

아직 벗지 않은 하얀 발목 양말을 신은 발목도 가늘고 아름다웠다. 저 가녀린 발목을 움켜쥐고서 그녀의 중심에 수없이 제 남성을 박아 넣지 않았던가.

“그날은…… 일본 천황의 생일이었어요. 그래서 학교는 쉬었고요.”

“……그랬군.”

이환이 전보를 받아 들어가는 것을 다미로는 태익이 서 있는 저 창가에서 보고 있었다. 전보. 그 전보란 것이 그렇지 않던가.

다급한 소식을 전해 오는 편지. 주로 그 다급한 편지의 내용은 비극일 때가 더 많으며 불길한 예감은 늘 적중하는 법이 아니던가.

다미로는 불안한 마음으로 별채를 나와 태익의 서재로 올라갔었다. 올라가는 계단 중간쯤에 그녀가 다다랐을 때 그가 달려 나갔다.

“영감! 영감!”

큰 소리를 거의 내는 법 없이 어른스럽기만 하던 태익이 이환을 부르는 목소리는 울부짖음에 가까웠었다. 다미로는 바지와 한 벌도 아닌 슈트 재킷을 들고서 마당을 가로지르는 태익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가 헛바퀴 소리를 내며 거칠게 출발할 때까지 그녀는 멍하니 서 있는 게 다였다. 저렇게 허둥대는 태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의 차가 집을 떠난 후 그녀는 서재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방금 이환이 가져온 전보가 있었다. 바닥에는 전보를 뜯는 데 썼던 은으로 만든 편지칼이 떨어져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안길준의 장례가 끝이 났다. 태익과 태익의 사촌 남동생 셋이 상주를 맡았다. 상을 치르는 그 5일 동안 태익은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그는 차마 눈 뜨고 봐 줄 수 없을 정도로 초췌했다. 하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후에 그의 서재 안 휴지통에서 편지칼은 버려진 채 발견됐다.

그 편지칼은 다미로의 아버지 주옥의 것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후일 이환에게 들어 알게 되었다. 아마도 태익은 그때부터 안길준의 사고에 누가 개입되어 있었는지 알고 있었을 것으로 그녀는 추측했다.

“전 말이에요, 오라버니.”

그럼에도 그는 다미로를 원했던 것이고 말이다.

“오라버니가 절 사랑했든 좋아했든, 제 몸을 욕망했던 것이든 상관없어요. 왜인 줄 아세요? ……절 끌어올려 줄 동아줄이 누가 되었든 상관하지 않으니까요.”

전자는 진심이었고 후자는 거짓이었다.

“오라버니가 저를 복수의 도구로 이용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에도 그래서 괜찮았어요. 제게도 오라버니는 그저 보잘 것 없이 미천한 저를 신분상승 시켜 줄 도구에 불과 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앞의 말은 진심이었다. 고작 스무 살, 막 성인이 된 최순임의 딸. 그 딸의 순결을 짓밟아 놓고 헌신짝보다 못하게 다리 밑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었다고 하더라도 다미로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었다. 죄의 대가는 누가 치르든 치러야 했다.

더욱이 그녀는 태익의 사랑에 의구심을 품은 적이 없었다. 좋아했든, 사랑했든, 욕망했든 형태만 다를 뿐이라고 여겼으니까.

설사 그 생각이 틀린다고 해도 다미로는 결코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후회는 그녀의 짧지만 뜨거웠던 삶 전부를 부정하는 것이 되므로.

“제 일은 맡겨 두세요.”

다미로는 편지칼을 서랍 속으로 되돌려 넣으며 말했다. 낮에 구본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오라비니와 저…… 서로 엮이지 않는 게 제 유일한 바람이에요.”

강선애가 구본을 찾아와 마령을 찾았다는 얘기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잘된 일이었다. 그렇게나 엿봤던 기회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를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니 제 일에 상관하지 마세요.”

다미로는 식은땀이 솟는 차가운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요사이 식은땀이 자꾸만 몸을 적셨다. 태익이 기가 막힌다는 듯 비틀리게 웃었다.

“어떤 일을 말하는 건지, 그거라도 똑바로 가르쳐 주지, 안다미로.”

“오라버니.”

그의 꼬인 말에 다미로는 얼굴을 굳혔다.

“네가 말하는 네 일이라는 거, 한조와의 사이를 가만두라는 건지 네가 꼭 해야만 한다고 우기는 그 일인 건지. 아니면 둘 다를 말하는 건지 정확하게 해야 하지 않겠나, 다미로.”

“둘 다라면요?”

이곳에서 태익에게 밀려서는 안 됐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태익이 다미로의 짧은 되물음에 하하하 어이가 없다는 것처럼 웃었다. 하지만 곧 싸늘하게 웃음을 지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둘 다라?”

“네, 둘 다 저한테는 절박한 거니까요.”

그가 어떤 의미로 알아듣든 다미로의 말은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강선애를 죽이는 일은 5년 동안 그녀가 숙명처럼 끌고 온 일이었고, 한조는…… 태익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해진 존재였다.

태익의 눈빛에 한순간 광기가 돈다고 다미로가 느낀 건 그때였다. 허리 뒤로 창틀을 짚어 창가에 기대서 있던 그의 눈동자가 새까맣게 짙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루야마한테도 나한테 했던 것처럼 네 다리를 벌려 줬다는 말인가? 경성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도 며칠 전 그 조선호텔에서도?”

기차 안? ……역시 그랬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놈한테도 이렇게 다릴 벌려 줬나?”

범하듯 그가 억지로 뒤로 들어왔던 날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녀는 기억했다. 그리고 그 말이 그저 호텔 승강기에서 그가 목격한 광경에 근거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미로는 이제야 깨달았다.

마음이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홧홧했다. 이런 오해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려 애쓰지만 그에게 자신이 창녀나 다름없어졌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그게……. 그렇게 중요하세요? 제가 누구랑 잠을 잤는지가? 오라버니든 한조 소위든 남자인 건 마찬가지예요. 남자랑 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확실하게 못을 박아야 했다. 이제 12월 29일에 강선애를 쏘고 나면 마령은 그 자리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태익이 자신에게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다미로는 벌써부터 결론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 한조를 만나 그 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아야만 한다고 그녀는 생각을 했다.

“피곤해요, 오라버니. 돌아가서 주무세요.”

다미로는 매몰차게 태익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서라, 다미로.”

하지만 전신의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낮고 음험한 태익의 명령에 그녀는 다리가 얼어붙었다.

“네 입으로 말했어. 누구한테 다리를 벌리든 상관없는 여자가 너라고 말이야.”

다미로는 정수리 머리털이 두려움으로 곧추서는 것을 느끼며 태익에게로 천천히 상체를 돌렸다.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그의 단단한 가슴은 이미 다미로의 턱 앞에 와 있었다.

쿵!

순식간에 팔이 사납게 잡혀 창가 벽에 그녀의 몸이 부딪쳤다. 그가 다미로의 등을 창틀에 누르고 허리 앞쪽으로 팔을 둘러 엉덩이를 뒤로 잡아 뺐다.

“오라버……!”

고요한 밤이었다. 누가 들을까 소리를 낮췄지만 다미로는 절로 비명이 나왔다. 치마가 허리 위로 단숨에 들춰졌다. 잡아 뜯기는 팬티에 허벅지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내 집에서 내 앞에 설 때에는 속옷 따위 입지 말라고 가르쳤을 텐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지간히도 말은 안 듣는군!”

다미로의 탱글탱글한 엉덩이가 창가로 들어오는 달빛에 하얗게 드러났다. 하지만 다미로가 몸부림을 쳤다.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럴수록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태익의 손에는 괴력의 힘이 들어갔다. 다미로는 어깨가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보다 더한 통증이 찾아들었다.

“아악! ……흐으으읏!”

그곳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 짓이겨 찢어져 난자당하는 것 같은 고통이 다미로를 덮쳤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밀지 속으로 태익이 제 것을 쑤셔 넣었기 때문이었다. 불시에 닥쳐든 고통으로 그녀의 새하얀 엉덩이가 파르르 경련을 하듯 떨렸다.

“내 걸 기억하는 게 좋을 거야, 다미로.”

그가 이를 악물어 속삭였다. 다미로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창틀을 움켜쥐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태익의 손이 그녀의 뒷머리를 억세게 눌렀다. 그리고 동시에 있는 힘껏 허리를 세차게 쳐올렸다.

“흐으읏!”

뻑뻑하다. 너무나 뻑뻑해서 아팠다. 그렇지만 역시나 태익에게 길든 다미로의 그곳은 본능처럼 그의 남성을 강하게 조여들었다.

“힘 빼, 다미로.”

그가 명령했다. 그러나 다미로가 힘을 빼지 않자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위로 향하게 만들어, 메마른 음순과 질구를 손가락으로 벌렸다.

그리고 제 남성을 박아 넣은 그녀의 질구에 손가락을 같이 쑤셔 넣었다.

“하읏!”

다미로의 허리가 둥글게 말렸다. 고통과 섬광처럼 강렬한 쾌감이 동시에 그녀를 후려쳤다. 그가 또다시 허리를 세차게 튕겨 올리며 손가락으로 내벽을 긁었다.

“하으읏!”

그녀의 허리에 경련이 일었다.

찰싹 찰싹 찰싹.

태익이 쉬지 않고 사납게 다미로를 몰아쳤다. 제 것을 쑤셔 넣고 박아 넣었다. 다미로의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쓰라리고 따갑고 아프던 그곳에서도 왈칵 뜨겁고 미끄덩한 체액이 솟구쳤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의 몸은 태익에게 반응했다.

어쩌면 그를 오해하고 질투하게 만든 것은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태익처럼 강하고 이성적인 사람을 한순간이지만 자신이 무너트렸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지도 몰랐다.

그가 손가락을 뾰족하게 세워 다미로의 엉덩이 골을 훑어 내렸다. 경직되어 있던 그녀의 허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러자 그제야 어깨를 짓이기고 있던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자신을 받아들인 다미로를 태익은 바로 알아챘던 것이다. 그녀가 고통을 느끼도록 범하고 싶었다. 다미로의 음부가 찢어져서 한조든 누가 되었던 어떤 남자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욕망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냉철하고 완벽하게 이성적인 안태익은 다미로에게 무너져 버렸다.

“하으…… 읏.”

하지만 무너져 내린 태익의 이성에 다미로는 심장을 관통하는 쾌락을 느꼈다. 그의 남성이 뿌리까지 박혀 들 때마다 쾌락과 고통이 그녀를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가슴은 메말라서 비틀어져 갔지만 육체는 사랑하는 남자가 주는 쾌락으로 인해 전율이 솟구쳤다.

왜 이렇게밖에 될 수 없었던 것인지. 어떻게 이렇게 잔인한 운명에 자신이 내던져져야만 했던 것인지. 강선애가 왜 제 모친이어야만 했는지.

강선애가 어째서 안길준을 죽여야만 했었는지. 다미로는 답을 얻을 수 없는 많은 질문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점점 달아오르는 쾌감 속으로 아득하게 빨려 들어갔다.

태익이 무자비한 손길로 다미로의 블라우스를 양옆으로 찢어 버렸다. 이부자리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다미로의 두 발목을 붙잡았다. 새하얀 나신이 된 그녀의 무릎을 힘으로 굽혀 배에 밀착시켰다.

“으윽!”

다미로는 저항하지 않았지만, 그의 힘이 너무 강했다. 허벅지가 배에 밀착되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음부를 적나라하게 태익에게 드러냈지만 저항할 의사가 없었다.

“우우욱!”

그렇지만 아랫입술이 터져라 이를 악물고 악물었다. 그가 다미로의 굽혀진 무릎을 억세게 옆으로 밀며 제 남성을 쑤셔 넣었기 때문이었다.

배려가 없었다. 거칠게 질구에 제 것을 쑤셔 넣어 음경의 뿌리 끝까지 깊숙하게 박아 넣었다. 지나치게 깊었다. 여린 다미로의 붉은 속살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그의 남성은 달궈져 있었다. 불에 달군 쇠막대기보다 더 뜨겁고 크고 강렬하고 날카로웠다.

“핫……! 으으…….”

태익이 다미로의 뒷머리채를 억세게 움켜쥐었다. 본능적으로 버티려는 그녀의 고개를 아래로 꺾어 똑똑히 보게 했다.

힘줄이 터질듯 불거지 쇠막대기보다 더 단단히 태익의 남성이 그녀의 중심부를 거칠고 사납게 꿰뚫었다. 졸깃한 음순과 질구의 예민한 살들이 그의 남성에 말려 들어갔다가 딸려 나오길 반복했다.

“으응……. 하!”

다미로는 그 적나라하게 음탕한 광경에 전율했다.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참을 수 없는 교성이 입술 밖으로 흘러 나왔다.

고통스럽고 괴로웠던 마음의 상처들이 몸을 달구는 전율과 쾌락에 하나둘씩 휘발되는 것 같았다.

“흐윽! 흐윽! 흐윽……. 아아 오라버니…….”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처연했다. 동장군이 얼려 버린 새벽 공기를 뚫고 내려오는 하얀 달빛은 얼어 버린 고드름처럼 날카롭게 다미로의 심장에 꽂혔다.

같은 순간 한조의 눈동자는 얼음이 되어 버렸다. 귀가 먼저 반응했던 것도 같았다. 태익이라고 생각되는 그림자를 따라 들어온 곳은 본채와 낮은 담장으로 가로막혀 있었던 별채였던 것이다.

안국동의 이 집에 올 때마다 궁금했던 곳이었다. 저곳엔 누가 있는 것일까? 항상 인기척은 없는데도 늘 정갈하게 정원이 관리되고 정리가 되어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한조는 태익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다. 시집 가지 않은 누나나 여동생도 없다고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미로를 만난 직후에 혹시 저 비밀스러운 공간이 그녀가 머무는 곳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하윽! 응응…….”

쾌락에 몸부림치는 여자의 교성이 들려왔다. 빈 공간인 줄로 생각했었다. 주인이 없는 공간일 것이라 여겼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다미로가 머물지도 모르는 공간이라고 여겼었는데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한조는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한쪽만 남은 청력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까치발로 발가락 곧추세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다미로를 처음 만났던 날 경비가 유난히 삼엄했던 이곳의 경비가 지금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아챘다. 그러자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소리가 새어 나오는 방은 별채의 동쪽 방이었다. 태익이 머무는 본채와 마주 보는 방이었다. 전체적 외관은 조의 전통 방식으로 지어진 기와집이었지만, 내부에는 질 좋은 유리가 달린 문과 창으로 완벽하게 보온시설이 된 곳이었다.

한조는 숨을 죽이고 마루 위로 발을 올렸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문 앞으로 갔다. 네 짝 미세기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조차 조심스럽게 움직여 문틈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검지에 힘을 주어 문을 밀었다. 여자의 교성에 파묻혀 문이 밀리는 소리가 다행히도 들리지 않았다. 남자가 보였다. 바지를 벗지 않은 채였지만 아래에 깔린 여자의 하의는 벌거벗겨져 있었다.

새하얗고 곧게 뻗은 다리가 천장을 향해 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발이 허공에서 무참히 흔들리면서 사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으윽! 하아!”

사내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여자의 젖가슴이 탄력적으로 흔들렸다. 마치 달빛을 머금은 호수의 표면 같았다. 작은 물방울 하나에 파동이 치는 호수의 표면 말이다.

그렇게 탄력적이면서도 매끄럽고 고요하게 여자의 젖가슴이 출렁이고 있었다. ……바지를 벗지 않은 사내가 허리를 힘껏 튕길 때마다.

그러데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오는 정원의 불빛이 있었지만, 커다란 사내의 그림자에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조는 본능처럼 여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문틈으로 눈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하악!……”

그 순간이었다. 쾌락을 이기지 못한 여자가 교성을 내지르며 허리를 뒤틀었다. 땀에 젖은 번들거리는 여자의 요염한 육체가 고스란히 빛을 받았다.

“오라버니…….”

그리고 여자가 사내를 부르는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오뚝한 콧방울을 따라 반짝거리는 땀방울이 여자의 얼굴로 흘러내렸다. 밭은 숨을 뱉어 내는 붉은 입술이 낯설지가 않았다.

사내의 허리를 감은 미끈하고 기다란 다리, 사내의 어깨를 움켜쥔 새하얀 손가락……. 엄지의 한 마디가 없는.

그녀. 다미로.

한조의 호흡이 멈추었다. 그의 심장이 뻐근하게 조여들었다. 심장에서 한순간에 밀어낸 피가 머릿속으로 몰려들어 뇌가 폭발해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시뻘건 불꽃이 일었다. 분노와 모멸감이 그의 심장을 태웠다.

* * *

“잠이 안 오십니까? 오유미 양?”

“아! 어르신.”

“새벽 공기가 아주 쌀쌀합니다. 그만 방으로 들어가 쉬십시오.”

“네. 고맙습니다, 걱정해 주셔서요.”

오유미는 정원에서 만난 이환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환이 구부정한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해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오유미가 그를 망설이듯 불렀다.

“저기 어르신.”

“……예. 오유미 양. 어디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평생을 한 가문의 가신으로 충성을 다한 노인은 확실히 기품이 넘쳤다. 웅장하고 기품이 있는 안국동의 이 안태익의 저택에 그야말로 잘 어울리는 사람 중 하나가 이환이었다.

“궁금해서 여쭐 게 있어서요.”

“예, 오유미 양, 얘기하십시오.”

이환이 사람 좋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태익에게 말하는 것처럼 오유미에게 극존칭을 하지 않았지만 예를 갖추어 얘길 하고 있었다.

아마도 주인과 주인이 아닌 사람을 구분 짓는 것 같았다.

“저쪽 제가 머무는 건물 옆으로 보이는 예쁜 건물은 뭔가요?”

오유미의 물음에 이환이 별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연히 보일 리가 없지만 그는 희미하게 보이는 그림자의 음영으로 방향을 가늠했던 것이다.

“그곳 역시 별채입죠.”

“그런데 왜 제가 머무는 곳하고 구별되어 있나요?”

그녀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 순간 이환의 얼굴에 그리움이 가득한 미소가 번졌다. 하얀 눈을 머리에 이은 노옹의 목소리는 따스했다.

“오유미 양께서 머무시는 별채는 손님을 모시기 위한 건물이랍니다.”

“어머! 그런가요? 그럼 제가 말씀드린 저곳은요? 저곳도 별채라면서요.”

유난히 하얀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새벽이었다.

“예. 별채입죠. 별채입니다만 저곳은 돌아가신 나리께서 마님을 위해서 직접 지으시고 후일에는 우리 아씨를 위해서 정성 들여 손을 본 곳입니다.”

아씨?

“아씨라니요? 안 사장님께 누이가 계셨습니까?”

정말이지 처음으로 듣게 된 말에 오유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환은 대답 없이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물을 뿐이었다.

오유미는 더 이상 태익의 형제 관계에 대해 물어 봤자 답을 듣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저 혹시, 마령 양이라고……. 아까 들어올 때 그분을 뵈었는데. 어디에 머물고 계시는지…….”

알려 주실 수 있느냐는 말을 하기가 왜 이리 힘든 것인지. 오유미는 괜스레 제 발이 저린 도둑이 된 기분이 들어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녀를 경계하는 마음을 이환에게 들킬까 봐서였다. 첫인상인데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경계하고 얕보는 모습이 좋아 보일 리 없지 않은가.

이환은 이 집의 집사 직분이지만, 개경 안씨 가문의 가신이며 중심이라고 했다. 태익에게는 부친과 다름없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환은 이 새벽에 왜 마령을 찾느냐는 얼굴을 해 보였다. 이환 자신이야 늙어서 잠이 없는 데다가, 집사의 직분으로 새벽까지 집 안을 살피느라 깨어 있다 쳐도, 다른 이들은 모두 깊이 잠들어 있지 않은가.

“아 그러니까 그게…….”

오유미는 왠지 뭔가를 들킨 것 같아서 잠시 당황해했다. 이깟 일로 당황할 그녀가 아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오유미는 자신답지 못했다.

“잠이, 잠이 통 안 와서 여자들끼리 수다라도 떨까 해서 여쭸는데…….”

결국에는 대답도 듣지 못하면서 괜히 이미지만 나빠졌다는 생각에 그녀는 말을 흐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환이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

“우리 아씨께선 별채에 계실 겁니다.”

뭐라는……?

우리 아씨라니?

대체 누가?

“어, 어르신. 제가 여쭌 사람은 이 댁의 아씨가 아니라 마령 동지라고…….”

“이 노인네, 눈은 흐려졌지만 아직 정신은 흐리지 않습니다, 오유미 양.”

이환이 오유미의 말끝을 점잖게 가로채 말했다.

“아씨께서는 지금 별채에서 도련님과 함께 계실 겁니다. 두 분이 워낙 운우지정이 좋으셔서 함께 계시길 좋아하시지요.”

운우지정(雲雨之情: 남녀 간에 나누는 육체적 사랑)이라면!

그녀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이환은 마저 알려 줘야 할 것을 알려 주려는 것처럼 묻지 않은 얘기를 했다.

“아이고……. 그나저나 아씨하고 도련님께서 하루 빨리 혼사를 치르셔야 할 터인데. 언제까지 저리 무산지몽(巫山之夢: 남녀 간의 은밀한 사랑)을 하셔야 하는지. 우리 아씨도 그러시고, 우리 도련님도 그러시고. 두 분 모두 나랏일에 바쁘시다 보니. 쯧쯧쯧.”

“……!”

오유미는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 바람에 발목이 꺾여 바닥에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환의 얼굴에 안됐다는 미소가 스치듯 올랐다가 사라졌다.

“밤이 깊었습니다, 그만 들어가 쉬십시오, 오유미 양.”

이환이 따스한 목소리로 그녀를 어르듯 말하며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발길을 돌려 본채로 향했다. 별빛이 차가운 바람에 아스라이 흔들리던 깊은 밤이었다.

오유미는 이환이 사라진 짙은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엇인가 잘못 들은 것이리라. 노망난 노인네가 미친 소리를 지껄인 것이리라!

믿을 수도 없었고 믿기지도 않는 얘기를 들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확인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오유미는 고개를 들었다. 안국동 저택의 가장 깊숙한 그곳…….

자신에게 내준 방의 옆으로 있던 그 건물. 누구도 섣불리 출입할 수 없게 닫힌 그곳으로 가 봐야겠다고 말이다. 새까만 그림자가 이미 스며든 다미로의 별채로 오유미의 빠른 걸음이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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