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태익은 책상 너머로 한조와 마주 앉아 있었다. 거의 20일 만에 출근한 미나카이 백화점의 사장실이었다. 태익은 책상 위에 모아 깍지 낀 손 위로 가만히 턱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한조의 머릿속을 꿰뚫겠다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한조의 얼굴은 딱딱했다. 부동의 자세로 앉아 태익의 오만한 시선을 받아 내고 있었다.
어느덧 10분째였다. 한조의 말에 대답 없이 태익이 이렇게 그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는 시간이 말이다. 하지만 한조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도발이 분명한 태익의 시선에 먼저 입을 떼거나 시선을 피할 인물이 아니었다. 태익은 그런 한조를 조금 더 뚫어지게 쳐다보다 턱을 올려놓았던 손에서 얼굴을 뗐다.
“싫습니다, 마루야마 소위.”
그리고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그가 책상 뒤의 의자로 깊게 등을 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한조의 미간이 깊게 모아졌다.
“이유가 뭡니까?”
한조는 거절의 이유를 물었다. 자신은 일본군 특무대 소위다. 거기에 부친은 경성경무국의 경무국장인 마루야마 지로였다.
그런데 거절을 하겠다고?
그가 알기로 안태익이 주인인 경성상회는 친일기업이었다.
“제가 다미로 양에게 모자란 상대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만. 안 사장님께서 제 청혼을 단칼에 거절하시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군요.”
한조는 언성을 높이는 대신 싸늘하게 식힌 이성으로 태익에게 따져 물었다. 태익이 피식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저의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청혼을 거절하는 데에.”
그가 책상 위의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 한조에게 권했다. 한조가 눈만 내려 담배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손을 뻗어 받았다. 태익이 라이터를 들어 한조의 담배에 불을 붙여 줬다.
“저의가 없다면 뭡니까?”
한조가 물었다. 태익은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기 위해 책상을 짚었던 허리를 일으키며 웃었다.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 아니겠습니까.”
“어울리고 아니고의 판단은 다미로 양과 제가 해야 하는 것이라고 판단됩니다만.”
한조의 말에 태익은 제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잠시 대화에 시간차를 두었다. 당연히 한조는 그답게 소름끼치는 참을성으로 태익의 대답을 또 기다리고 있었다.
태익이 길게 담배를 빨았다. 그리고 가볍게 내쉬며 한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담배 연기가 짧고 직선으로 위를 향해 뻗쳤다.
“아니. 내가 합니다.”
“……!”
“다미로는 내 소유니까.”
태익의 말에 한조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다미로 양이 안 사장님의 소유라니……. 설마 그 댁 종이라도 된다는 겁니까?”
어쩌면 한조가 다미로에게 청혼까지 결심하게 된 이유는 그것에 있을지도 몰랐다. 다미로를 속박에서 풀어 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다미로. 그녀의 첫인상은 매우 당돌했다. 볼품없는 옷을 입고, 화장기 없는 얼굴을 하고서도 일본군 장교 앞에서 처음부터 당당했다.
그런 그녀가 태익 앞에서만 작아진다는 사실을 그는 알아챘던 것이다. 그래서 이복동생, 혹은 그 집의 군식구로 자랐을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던 것 같다.
한조는 각을 잡아 앉은 어깨를 경직시키며 태익에게 답을 요구했다. 창가에 등을 기대어 섰던 태익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우리 조선에서 노비문서가 소각된 지 백 년이 지났습니다. 종 같은 건 있을 턱이 없죠. 뭐……. 일본 본토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본토에는 여전히 천황폐하도 계시고 수백의 귀족들도 있다니까.”
비꼬는 말이 분명하다는 것을 한조는 알았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의 불충한 발언을 왈가왈부할 상황은 아니라고 한조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무슨 뜻입니까? 다미로 양이 안 사장님의 소유라는 말이!”
한조의 언성이 올라갔다. 부친 지로가 알아본 바로, 다미로에게는 미나카이 백화점의 지분 0.8퍼센트가 있었다.
그 밖에 미나카이 백화점의 본체인 경성상회에도 그녀의 지분은 2퍼센트가 되었다. 전부 안태익의 부친 故안길준이 물려준 재산이었다.
설마 그 재산 때문에 이러는 것인가?
돈으로 가치를 환산한다면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안태익이 갖고 있는 지분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한조가 일어서자 태익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책상을 돌아 나왔다. 유유히 사장실을 가로질러 문 앞으로 간 그가 손잡이를 돌렸다.
“이 비서, 손님 배웅해 드리지.”
밖에 있던 곽에게 하는 말이었다.
“안 사장님!”
한조가 목소리에 한껏 힘을 주어 그를 불렀다. 하지만 태익은 바지 주머니에 손 하나를 찔러 넣으며 말했다.
“궁금하면 재주껏…… 이제부터라도 공들여 알아보면 되겠군요. 소위. 내 말뜻이 뭔지.”
그가 이미 열어 놓은 문을 향해 한조에게 이만 나가 달라는 제스처를 했다. 한조가 힘주어 어금니를 물었다.
감정의 기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늘 노력하던 그였지만 이번엔 그 노력이 부질없었다. 군모를 사납게 움켜쥔 한조가 세차게 몸을 틀었다.
저벅저벅 큰 걸음으로 태익에게 인사도 없이 사장실을 나갔다. 곽이 위태로운 두 사람의 분위기에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태익이 문을 닫았다. 쾅! 소리를 내며 세차게 문이 닫혔다. 한조 앞에서 여유를 가장해 웃던 그의 얼굴에 웃음은 흔적도 없었다.
다시 한 번 쾅! 문이 닫히던 소리보다 더 요란한 충격음이 났다.
태익의 주먹이 닫힌 문을 사정없이 쳤던 것이다. 찌릿하면서도 둔탁한 통증이 주먹을 타고 팔까지 전달됐다. 태익이 몸을 돌려 문에 등을 기대섰다.
움켜쥔 두 주먹으로 눈두덩을 눌렀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청혼? 그것도 왜놈이 감히 다미로에게?
설사 왜놈이 아니라고 해도, 태익은 그녀를 다른 어떤 사내에게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며칠 전 그 밤. 다미로의 몸에 자신을 박아 넣을 때 다짐했었다.
어떤 의미로든 다미로를 다른 사내에게 빼앗기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라고. 그런 생각조차 하게 되는 일을 막을 것이라고 말이다.
한데 마루야마 한조가 뭐라고 했는가! 결혼을 하겠다고? 다미로와 그가 알게 된 지는 얼추 한 달에서 한 달 보름 그 사이였다.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 직후였으니.
태익은 눈두덩을 억세게 눌렀던 손을 떼 문에 고갤 기댔다. 눈을 감고 이성이 되돌아오길 기다렸다.
다미로가 한조를 어디까지 이용하려는 것일까? 결혼이라도 해서 그를 확실하게 이용하겠다는 의도에 한조가 속아 넘어간 것인가?
태익은 또다시 자신답지 않게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에게 세상 모든 일들은 대체로 명료했다. 고민하지 않고 결정할 일은 없었지만, 결정의 기준은 늘 명료했다.
조선독립에 이익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그 단 하나의 기준에 모든 것을 맞춰 넣었으니까. 상대를 파악할 때에도 그는 거의 혼란을 느끼는 일이 없었다.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상대와 자신이 어떤 이익관계로 얽혀 있는지만 안다면 그쪽의 의도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미로만은 위의 두 가지 모두 절대적인 예외였다. 5년 전 그 이후로 다미로는 그를 혼란에 빠트렸다. 태익이 세운 결정의 기준에서 그녀는 예외였다.
그녀의 행동과 생각에 대해 그 의사와 의도를 파악하는 것 역시 어렵고도 어려웠다. 왜? 왜! 어째서? 어째서! 하는 의문과 감탄사를 태익은 그녀에게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똑똑똑.
그의 등 뒤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도련님, 7시에 약속 있으십니다, 준비하시지요.”
태익은 문에서 등을 떼어 두 손을 바지 주머니로 갈무리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혼란스럽던 태익의 눈동자에 서서히 무디지만 단단한 날이 서고 있었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세요?”
황금 1정목의 살롱이었다. 마작룸과 댄스홀이 있는 살롱 ‘챠플린’.
“진 토닉 한 잔.”
강선애가 바에 앉자마자 장갑을 벗으며 주문을 넣었다. 유옥문이 제 물음을 무시하며 술부터 받아 드는 강선애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
VIP마작룸이었다.
“여긴 5년 전하고는 많이 변했네.”
강선애가 웨이터가 가져온 진 토닉 잔을 들며 중얼거렸다. 유옥문은 룸 밖의 홀로 시선을 돌리며 대꾸했다.
“조선 팔도강산 중에 안 변한 곳이 몇 군데가 있겠어요. 사람들이 변했는데…….”
그녀 역시 웅얼거렸다.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안태익이 자신을 찾아 최순임에 관해 물었던 것을 얘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옥문은 지난 며칠 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망설임을 접지 못했다. 방조에 대한 자신의 책임도 무서웠지만 그녀는 안태익이란 인물이 더 두려웠다.
“그나저나 나흘 동안이나 소리도 없이 어딜 다녀오신 거유?”
당장 결론을 못 낼 생각일랑 집어치우자 싶어서 유옥문은 다시 물었다. 강선애가 뾰족한 턱에 힘을 주며 눈동자를 싸늘하게 부릅떴다.
“이번 한 번만 더 모집해서 중국으로 보내면 약속한 금액의 3배를 받을 수가 있는데!”
억울하다는 표정과 말투가 역력했다.
“아!”
옥문은 그제야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럽지도 놀랍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술잔으로 시선을 옮겨 버렸다.
“그놈들이 뿌려 대는 삐라가 문제야.”
강선애가 입술을 짓이겨 씹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5년 전에도 그렇게 훼방을 놓더니! 총알이 머리에 박혀 보고도 정신을 못 차려!”
“언니야말로. 저번에 남중국으로 보낸 애들이 마지막일 거라면서요. 언니야말로 왜 끝을 몰라요? 언제까지 공장으로 가는 거라고 사람들을 속일 수가 있겠어요? 어린 계집애들을 전장으로 보내면서.”
“전장으로 가면 공짜로 가니?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돈까지 준다는데 뭐가 문제야? 가서 총 들고 싸워야 될 것도 아니고.”
“언니도 참……!”
“언니도 참이 아니라, 너도 좀 알아봐라. 이제 열한 명만 더 채우면 되는 거거든? 오백 명 거의 다 채워 놓고서 겨우 열한 명 모자라 몇 년 쌓은 탑을 무너트릴 수는 없잖니!”
“언니!”
“전장에 간다고 전쟁터에 나가니 걔네들이? 후방 안전한 곳에서 남자들만 받으면 되는 거야!”
강선애는 잔뜩 격양되어 진 토닉을 들이켰다.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녀가 5년 전부터 시작한 근로정신대 모집 사업. 그 사업이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처음에는 유옥문도 그녀의 사업을 도왔다.
정말로 일본의 무기 공장으로 가서 일을 해 주고 돈을 받는 줄 알고서 도운 일이었다. 그런데 3년 전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모집한 여자아이들을 일본이 아니라 중국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본격화되면서부터였다.
유옥문은 그때부터 발을 뺐다. 수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벌써 5년 전부터였다. 강선애가 마령이라는 총잡이를 사서 민족당의 당원인 하공진, 박제영을 죽이려 했던 이유도 그것에 있었다.
그들이 모집 대상이 되는 소녀들을 상대로 전단지를 돌리고 교육을 다녔던 것이다. 근로정신대란 순수한 노동이 아닌 사기이고 납치이며 인신매매라고 말이다.
하지만 강선애가 이 뻔뻔하고 악질적인 일제의 사기극에 동참한 것이 유옥문에게는 의외의 일이 아니었다. ……강선애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으로 이미 이십여 년 전에 변해 버렸으니까.
“어떻게든 인원을 맞춰야 해……! 어떻게든!”
강선애가 다짐을 하듯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중얼거렸다. 유옥문은 길게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릿속에 딱따구리 한 마리가 사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그때 강선애 옆으로 여자 하나가 앉았다. 자그마한 키에 늘씬한 다리를 가진 여자는 아름다웠다. 유옥문의 눈이 저절로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런 옥문의 귓등으로 들려오는 말이 있었으니,
“옥문아, 마령 그 애는 네가 좀 찾아봐야겠다.”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힘주어 문 강선애의 말이었다. 옥문이 놀라 여자에게서 눈을 떼어 강선애를 돌아봤다.
“네?”
“소공동으로 가 봐.”
“거긴 왜…….”
“장위건 그놈이 예전에 그랬어. 마령이 그 애를 좀 써야겠다니까, 소공동 골동상에 잠깐 갔는데 바로 연락해 본다고. 그러니까 소공동 골동품점에 친척이 됐든 친구가 됐든 뭐가 있는 거지.”
“아. 그래요?”
“그래.”
“그런데 거기에 대체 골동품 점포가 몇 개가 되는데요?”
옥문은 귀찮은 마음에 성의 없이 물었다. 그러자 강선애가 팩 쏘아붙였다.
“그걸 나한테 묻니? 직접 가서 보면 알 일을!”
“언니! 요새 원화관 일은 나 혼자 다 하는 거, 모르우? 그런데 나보고 얼굴도 모르는 마령이 그 애까지 찾아다니라는 말이에요?”
옥문은 어이가 없어 눈을 부릅떴다. 강선애가 표독스럽게 그녀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럼 그 자리 내놓고 빈털터리로 만주로 돌아가든가!”
어머나! 세상에……!
옥문이 입술만 벙긋거렸다. 대꾸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그녀는 결국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해 봐야 따귀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말 못하고 숨기는 사실까지 있으니…….
하기야! 자신이 어디 말 못하고 숨기는 사실이 강선애에게만 있으랴!
사실 안태익에게도 말해 줘야 할 사실들이 있었지만 옥문은 강선애의 보복이 두려웠다. 최순임을 누가 죽였는지. 최순임에게 쌍둥이 언니가 있었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또 그 쌍둥이 언니가 왜 안길준을 죽여야만 했었는지…….
그 모든 것이 만주에서 일어난 단 하나의 비극이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숨겨야 할지. 옥문은 눈앞이 깜깜했다. 어쩌면 안태익이 이미 많은 사실들을 알고서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한숨이 깊어졌다.
같은 시간이었다. 마작 룸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약속이 잡혀 있는 마작놀음이 있는 날이었던 것이다. 살롱 챠플린엔 늘 그렇듯 사람들이 넘쳐났다.
태익은 이미 져 버린 마작을 테이블 가운데로 밀어 넣고 항복을 선언했다.
“오호! 웬일로 안 사장이 연신 패밴가?”
나이 지긋한 게임의 멤버 하나가 반색을 하면서 좋아했다. 태익은 의자 뒤로 등을 기대며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가끔은 져 드리는 게 어린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까.”
“어허! 역시 부친께 제대로 배워 성장한 사람은 이리 기본부터 다르지! 암!”
“송구하신 말씀입니다. 백 사장님.”
태익과 몇 마디 칭찬을 설왕설래한 멤버가 기분 좋게 일어났다. 다른 멤버 둘을 데리고 홀에서 거하게 술을 사겠다면서였다. 마작 룸은 조용해졌다.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마작패들만 조금 전 이곳에서 게임이 있었음을 보여 줄 뿐이었다. 태익이 의자 뒤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욱신거리며 피로를 호소하는 눈을 감았다.
“한 잔 드세요.”
곽이 태익 앞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태익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곽을 올려 봤다. 곽이 무안한 듯 헛기침 두어 번을 하더니 태익과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형제처럼 자라지는 않았어도 형제에 가깝게 자란 사이었다. 안길준은 곽을 아들처럼 대했다. 하지만 이환은 곽을 태익의 형제처럼 키우지 않았다.
곽이 태익을 다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태익의 그늘 밑에 있는 것이 아들의 삶에 더 좋은 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을 알아봤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고 아버지 손에 자란 두 사람이었다. 다미로와 함께 어울리며 자랄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닮은 환경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곽은 태익의 기분만은 기가 막히도록 정확하게 파악했다. 단순히 그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가 아니라. 머리가 복잡한 것인지, 마음이 복잡한 것인지까지 알 수가 있었다.
“도련님 지금 상태가 아주 말도 아닌 것 같아서 그러는 겁니다. 독한 술이라도 한 잔 드시고 머리도 마음도 다 비우시라고 말입니다.”
곽은 술잔을 조금 더 제 주인 앞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태익이 웃지 않았다. 가끔 곽이 이렇게 건방을 떨며 형처럼 굴 때면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머리도, 심장도 뒤죽박죽인 게…… 보이나?”
“예.”
“그럼 밖의 저 노인네들한테도 읽혔겠군.”
“그건 아닐 겁니다. 저니까 도련님 상태를 알아보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도련님 속을 절대로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그래?”
“네.”
“짜식. 누가 들으면 네가 독심술이라도 익힌 줄 알겠다.”
“독심술이 별겁니까? 상대한테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절로 터득하게 되는 거지.”
곽이 짐짓 잘난 체를 하며 거들먹거렸다. 태익이 피식 싱겁게 웃었다.
“나한테 관심 끄는 게 좋을 거다, 이곽.”
“하이고, 도련님을 안에서나 밖에서나 모시는 제가 관심을 어떻게 끌갑쇼! 말씀이 되는 말씀을 하십시오, 도련님.”
곽이 태익의 농을 농으로 받아쳤다. 태익의 얼굴에 그나마 옅게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져 갔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을 한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넌 내일부터 당분간 날 따라다니지 마라, 이곽. 운전은 양 기사한테 계속 맡기면 되니까. 집사는 새 운전사를 구해 주고.”
“……예?”
갑작스러운 태익의 지시에 곽은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네가 따로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제가요?”
곽은 직감적으로 민족당의 일이 아닐까 순간 생각을 했다. 그러나 태익이 하는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다미로 뒤를 밟아라.”
“예에?”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그는 얼른 제 입을 틀어막으며 주변을 살피다 바로 태익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를 가든 누굴 만나든, 전화 통화를 한다면 전신국에 가서 어디와 통화를 했는지까지 알아봐야 할 거다. 그리고 국대철이 첩 마누라라는 그 강선애. 그 여자에 대해서도 알아봐라.”
태익이 다미로를 미행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이 정도로 철저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는 원래가 철두철미한 사람이지 않은가.
더불어 다미로에 관한 일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고 곽은 추측했다. 유 선생과의 타협점을 찾기 위해서 다미로를 상해로 데려갔던 그였다.
애초부터 다미로를 경무국에서 빼내기로 했을 때, 그는 유 선생과 거래를 했었으니까. 그녀를 가즈시케를 처단하는 일에 쓰는 것으로 제영과 공진을 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한 것 말이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그 뒤에 따라오기로 되어 있던 그녀에 대한 처분은 아직 소식이 없었다. 그것에 관해 곽이 짐작하는 바는 있지만 말이다.
아마도 태익이 유 선생과 그녀의 처분에 관한 또 다른 거래를 했을 것 같았다. 그러니 당연히 다미로는 적극 감시의 대상이 되는 것아 옳았다.
“마루야마 한조를 만나는 것까지 말입니까? 한조는 금방 눈치를 채지 않을까요? 제가 다미로를 미행한다면.”
“눈치채도 상관은 없을 거다.”
태익이 곽이 가져다준 술잔을 집으며 말했다. 오늘의 태익은 말끔함보다 피곤함이 더 짙게 묻어나고 있었다. 대충 둘둘 말아서 걷은 셔츠 소매를 보니 그렇게 보였다.
“어째서 말입니까? 한조가 다미로에게 말해 버리면 다미로는 의심 받을 만한 행적은 전혀 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 솔직히 둘이 호텔방까지 들락거릴 정도면…….”
오유미에게서 그 얘기를 듣는 순간에 곽은 허탈함으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대체 다미로가 어디까지 타락할 것인지 끝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특히 태익이 느꼈을 실망감을 생각하면 곽은 다미로를 데려다 다그치고 혼내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총명하고 어른스러웠던 다미로였는데.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얼핏 알 것 같기는 했어도……. 과거에 얽매여 인생을 포기한 것처럼 타락해 가는 다미로를 곽은 용서하기 어려웠다.
제 어미가 저지른 죄에 왜 딸이 삶을 포기하려는 것인지! 아비를 죽인 어미의 원죄에 자신이 더렵혀졌다고 믿는 게 말이나 된다는 것인가!
곽은 다미로가 집을 나간 후 그녀의 짐을 뒤지다 발견한 책 뒤의 메모를 떠올렸다. 차마 태익에게는 말을 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하필이면 그런 왜놈 장교 놈하고……! 차라리 친일파 장위건이 낫지…….”
후!
곽은 혼잣말로 웅얼거린 뒤에 깊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술잔을 비운 태익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차가워지는 것도 모르고서 말이다.
“그놈한테도 이렇게 벌려 줬나?”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다미로를 상처 주기 위해 물었던 말이었지만……. 태익은 완벽하게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다미로의 우직한 성정과 총명함을 곽이나 이환보다 훨씬 더 잘 알아도, 상황은 자꾸만 그녀가 변했다고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그녀가 한조를 이용하려는 것뿐이라고 해도…….
태익은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분노로 일순 눈을 감았다. 기차에서 왜 그녀와 한조가 단둘이 있던 객실의 문이 아침까지 잠겨 있었는지.
조선호텔에서 자신이 본 광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설사 다미로가 하려던 변명을 다 듣는다고 해도 그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역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가 5년 전에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푸는 것이다.
강선애.
그 여자를 죽이기 위해 어째서 공진과 제영을 쏘고, 제 손가락까지 잘라 내야 했었다는 장위건의 얘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이 필요했다. 그리고 만일 사실이라면 그 이유도 함께. 다미로는 절대로 스스로 고백하지 않을 테니까.
태익은 잔을 내려놓으며 흥겨운 음악으로 곡이 바뀐 댄스 홀로 눈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대각선 방향의 VIP마작 룸에 있던 여자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디서 봤더라……?
태익이 눈머리를 모았다. 눈매가 가늘어지며 그는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화려한 화장에 화려한 모피를 걸친 여자는 마흔 후반 이쪽저쪽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저…… 그런데 말입니다. 도련님.”
곽이 잠시 여자를 쳐다보던 태익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태익이 고개를 돌리자 그가 눈짓으로 댄스 홀 저쪽을 가리켰다.
“오유미 양이네요…….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오유미를 향했다. 상해에서 활동하는 여배우이지만 외모만으로 눈에 띄는 여자이므로 사람들의 시선은 당연했다.
“정말 여기 계셨네요.”
그녀가 은빛 털이 풍성한 모직 코트를 벗어 내며 태익이 있는 마작 룸으로 들어섰다. 뭇 남성들의 시선을 즐기는 듯 그녀는 다른 때보다 교태가 섞인 몸짓으로 태익의 옆으로 앉았다.
“이 동지 말이, 안 사장님께서 오늘 밤에 마작 모임이 있다고 그러기에……. 그런 것도 하시나 했더니, 사실이었나 봐요?”
오유미는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마작패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화사한 화장에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나른한 표정을 한 그녀는 곽에게 눈인사까지 건넸다.
곽이 아닌 척 어색하게 연기를 했지만 태익의 저녁 일정을 알려 준 사람이 그였던 것이다.
“아……. 저는 그럼 이만 밖에 나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두 분.”
태익의 반응이 어떨지 모르지만 일단 곽은 꽁무니를 빼기로 했다. 주인의 개인 일정을 허락도 없이 다른 이에게 발설했으니 잔소리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럴 것을 예상했으면서도 곽은 전화로 태익의 일정을 묻는 오유미에게 모르쇠로 일관하고 싶지 않았다.
태익의 나이가 벌써 서른둘이었다. 내년이면 서른셋인데. 만나는 여자조차 없고 이제는 들어오는 선 자리까지 마다하니……. 오유미라도 어떻게 안 될까 생각했던 것이다.
어차피 두 사람의 결혼설까지 도는 마당이 아닌가. 상해에서 터진 기사지만 며칠 안으로 경성까지 올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경성 최고 갑부 중에서 유일한 젊은 갑부이며 미혼인 사람이 태익이었다. 찧고 까기 좋아하는 기자들이 그런 소식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사실 오유미 정도면 그래도 태익의 상대로 많이 모자라지는 않는 상대가 아닐까, 곽은 생각했다. 백작이나 공작 작위를 받은 가문의 여식들도 있지만, 태익이 나라를 팔아먹을 친일파와 사업은 해도……. 결혼까지는 절대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오유미는 유 선생이 신뢰하는 여자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러니 이번 기회에 슬쩍 밀어 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 곽의 오지랖 넓은 계산이었다.
“여긴, 상해 클럽의 축소판이네요. 크기만 작지 화려하고 악단의 연주 솜씨도 훌륭하고……. 어떻게 이런 델 다 꿰고 계세요? 만날 사업과 일에만 파묻혀 사시는 것 같은 분께서?”
오유미의 호기심이 듬뿍한 물음에 태익은 손에 든 술잔을 기울이며 피식 웃기만 했다.
“제가 안 사장님을 너무 드문드문 알았던 걸까요?”
그렇지만 그녀는 태익의 대답을 유도했다. 오유미의 등장이 싫거나 하지는 않았어도 반갑지도 않은 그였다.
태익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옅어졌다. 그가 손가락을 튕겨 지나가던 웨이터를 불러 술을 주문했다. 그리고 등받이에 묻고 있던 등을 떼어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가끔은 상대를 지나치게 속속들이 알면…… 상처 받는 수가 있지, 오유미 양.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당신이 날 속속들이 알지 않기 바라는 사람이고.”
그녀의 마음을 모른다면 바보였다. 또 그렇게 알면서도 모르는 척 오유미의 마음을 회피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었다. 태익의 결론은 그랬다.
“서로 맺고 있는 관계마다 적당한 거리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요, 오유미. 그래야 서로 편한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으니까.”
명백한 거절의 말이었다. 오유미는 잠시 표정을 굳혔다. 그렇지만 곧 어깨를 으쓱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상체를 테이블 위로 당겨 태익과 가까이 얼굴을 마주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편안한 관계. 그거 상당히 재미없는 관계인 거. 모르세요?”
“…….”
“난 안 사장님과 편안한 관계 같은 건 바라지 않아요. 폭풍우 같은 감정이 몰아치는 관계로 발전하길 원하죠. 그 폭풍우가 지나면 어차피 안 사장님이 원하시는 평온이 찾아올 테니까요.”
오유미의 발칙하고도 직설적인 말에 태익은 허탈하게 웃으며 상체를 의자 등받이로 기댔다. 그녀가 아무리 진지하게 나와도 태익은 그녀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의사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난, 이미 폭풍 속 한가운데에 들어앉아 있는 지 오랜데……. 당신이 몰아온 폭풍이 아니라서 그렇지.”
하지만 쐐기는 박아야겠다고 여겼다. 이미 스물 몇 살 이후로 태익은 안다미로라는 폭풍 속 그 한가운데에 들어앉아 있지 않던가 말이다!
정복하지 못한 그 폭풍을 태익은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정복하리라. 그 안에서 헤매다 지치는 고통스러운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계획에 그녀를 혼자 남겨 두고는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
오유미가 태익의 말에 완전히 표정을 굳혔다. 웃고 싶었지만 광대 근육이 굳어져 웃을 수가 없던 것이다.
‘여자가 있으세요?’
차마 그럴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태익을 알고 지낸 세월이 6년이었다. 처음 유 선생에게 그를 소개 받은 그때부터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에게 여자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와의 염문설도 없었고 주변을 얼씬거리는 여자가 있다는 말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여자가 있었다면, 유 선생이 왜 소개를 시켰겠는가. 그리고 오늘도 태익의 가신이자 손발인 이곽이 왜 그의 개인적 스케줄을 알려 줬겠는가!
오유미는 태익의 말을 전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밀어내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가 있었다. 그런다고 해서 바로 포기해 버릴 그녀가 아니었지만.
“그러세요? 뭐 그럼…… 우리 얘긴 여기서 접고 다른 얘길 하기로 하죠.”
코앞에서 당한 거절에 오유미는 무안했지만 무안한 태를 내지 않기 위해 바로 웃음을 지었다. 상대는 안태익이지 않은가. 자신에 비해 그가 얼마나 더 대단한 인물인지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평범한 만석꾼의 집안에서 태어나 남들보다 조금 더 배우고 누리고는 살았다. 그러나 뼛속부터 정승판서를 지낸 가문의 안태익과는 차이가 크다는 것을 오유미는 알았다.
그러니 그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는 것도 우스운 일이리라. 안태익의 안사람 자리를 넘볼 여자라면 가문이 일본 본토의 귀족쯤은 되어야 할 테니까. 비록 그런 여자는 그가 싫어라 할 테지만 말이다.
“여기로 자릴 옮기기 전에 바깥 바에 잠깐 앉았었는데 말이죠.”
오유미는 방긋 어느 때보다도 화사하게 웃으며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태익이 원하지 않는 얘기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든 자신을 밀어내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든 우선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제 옆으로 나이가 지긋한 여자 둘이 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마작 룸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댄스홀을 가득 채운 사람들 사이로 여자들을 찾았다. 그러나 여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유미는 고개를 돌려 태익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그 여자들 입에서 마령 동지 이름이 나오더군요. 겉으로 보기엔 화류계 쪽에 종사하는 여자들 같아 보이던데. 마루야마 소위가 마령 동지한테 괜히 넘어간 게 아닌 것 같아요.”
조금 더 여자들을 잘 봐 둘걸 하는 미련을 그녀는 생각 끝에 남긴 채 태익과 눈을 맞췄다.
누가……. 마령의 이름을 들먹여?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유미에게 무감한 얼굴을 했던 태익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가 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오유미의 눈이 커졌다.
“여자들은……. 없어요. 10분 전쯤엔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변명처럼 말을 하고 말았다. 태익의 반응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뒤로 한껏 틀어 홀을 보던 태익이 다급한 몸짓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은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오유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뭘까? 도대체 왜 마령 이야기에 저렇게까지……?
“원화관이라고 황금정목 26번지라던데. 혹시 아세요?”
인력거꾼에게 오유미가 물었다. 벙거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인력거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기로 가 주세요.”
그녀가 인력거에 오르자마자 바로 인력거가 달렸다. 오유미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밤거리에 눈을 두었지만 머릿속은 한 가지였다.
안태익이 왜 그렇게 마령의 일에 다급하게 나간 것일까. 돈이라면 누구든 죽여 준다는 마령이 그런 쪽 여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새삼스러울 일도 아닐 텐데. 어째서.
오유미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곤두세울 일이 아니라고 다독이면서도 기어이 ‘원화관’을 찾아가려는 자신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태익이 그렇게 일어나는 바람에 마저 얘기할 수 없었다. 여자들이 ‘원화관’ 어쩌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마령에 대해서 뭔가 알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속속들이 알아 봐야 서로 불편하기밖에 더하겠느냐고 태익이 말했지만 오유미는 달랐다.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것이 비록 자기합리화일지라도 말이다. 상해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던 마령이었다.
무심한 표정에 외모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던 여자였다. 거기에 살인청부업자라니. 출신이 비루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여자가 아닌가.
오죽 먹고 살기가 어려웠으면 여자 몸으로 그런 일을 택했을까.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화류계 여자들 입에 버젓이 오르내렸다.
어쩌면 화류계에서 몸을 팔다가, 살인청부업자로 전업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어느 모로 보나 오유미 자신과는 감히 비교도 안 될 여자가 마령이었다.
한데 도대체 왜 이렇게나 신경이 쓰이는 걸까. 멍청하고 답답한 일본군 소위가 그녀에게 목매는 광경을 봐서일까?
살롱 챠플린에서 태익이 그렇게 급하게 나가 버린 이유는 분명히 마령을 의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분명히.
오유미는 그렇게 태익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언제 도착했는지 멈추어 선 인력거 안에서 그녀는 원화관의 대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으리으리한 문이었다. 그리고 그 문 안쪽으로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이 웃음을 파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홍등이 흔들거리고 술에 취한 사내들의 걸음걸이가 갈지자로 꼬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