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12)

7

“다미로 아씨?”

“네, 아저씨. 저예요.”

이환이 다미로의 손을 잡고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학교는…… 대학교에 간다더니 어떻게 된 겁니까? 상해에서 대학에 가신다고 도련님과 함께 길을 나서신 것 아녔습니까?”

반가우면서도 사뭇 다미로가 대학에 가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지, 이환은 그것부터 물었다.

안국동 태익의 저택은 오랜만에 소란스러웠다. 보름 남짓한 여행길에서 돌아온 주인과 이곽, 다미로까지 세 식구가 함께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분주하게 저녁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식당과 주방 사이를 쉴 틈 없이 오갔다. 다미로는 이환에게 겉옷을 맡기고 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곧 눈을 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불편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에 떠 있었다. 마치 억지로 먹은 밥이 꽉 체한 것처럼 차를 타고 오는 동안 태익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을 한 것은 딱 한 번이었다. 오유미를 종로의 호텔에 내려 주면서였다.

“조만간 선생님을 만나 뵙기 전에, 통화하지.”

오유미는 화려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미로를 향해서는 짧은 눈인사가 전부였다. 곽과는 태익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마쳤다.

경성역에서 태익의 운전기사를 기다리는 동안, 다미로에게 오유미가 비꼬듯 한 말이 있었다.

“남잘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요, 마령 동지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오유미의 말 속에는 마령이 몸을 파는 그렇고 그런 여자와 다를 것 없다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다미로는 그 속뜻을 다 알아들을 수 없기에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오유미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그녀의 세련된 단발머리가 가볍게 찰랑거렸다.

“혹시, 모른다는 뜻으로 묻는 건 아니죠?”

대화는 오유미의 되물음으로 끝이 났다. 태익의 차가 왔기 때문이었다. 다미로는 오유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찜찜함을 가눌 길이 없었다.

오는 내내,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도 말이 없는 태익도 걸렸고 말이다. 그가 설사 다미로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들 예전처럼 다정해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또 다미로 자신이 먼저 한조를 끌어들였다는 사실도 말이다. 하지만 다미로는 태익이 어떤 남자인지 알았다. 다미로의 진심을 읽어 낼 수 있는 세상 유일한 사람이 그였다.

상해에서 그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랐던 다미로의 마음을 알 것이라고 말이다. 태익이 그녀의 계획을 어떻게 알았는지, 함께 기차로 돌아오는 바람에 헛수고가 되었지만.

……그러나 차라리 그가 다미로와 함께 기차를 탄 것은…… 잘한 일이 되어 있었다. 만일 그들 일행끼리만 배를 탔었다면…….

상해 비밀경찰국의 검거작전에 오유미가 걸려들었을 테니까. 그녀가 막아 줄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다미로는 태익이 자신의 방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몸을 돌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가 그녀를 덮쳐 왔다. 3일 동안 단 2~3시간도 잠을 자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쉽게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 *

12월 3일. 장충단 공원.

날씨가 맑았다. 완연한 겨울에 들어선 하늘은 시리도록 파랬다. 아름드리나무는 벌거벗은 채로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었고 개천에는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오랜만이디, 오 동디.”

“네, 유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벤치에 앉은 유 선생에게 오유미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태익은 담배에 불을 붙여 유 선생에게 건네주었다.

“상해에서는 련락이래 왔네?”

태익이 건넨 담배를 한 모금 길게 흡입한 유 선생이 물었다. 태익은 라이터와 담배를 주머니 속으로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예. 새벽에 연락받았습니다.”

“어케 됐네?”

“허혈성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허허. 그 간나래 그래도 오래 버텼구만. 여러 사람 성가시게 하면서리.”

유 선생은 호탕하게 웃으면서도 씁쓸한 말투를 지우지는 못했다. 가즈시케가 죽었다는 소식은 태익에게로 왔다. 상해에 있던 유 선생의 조직원 중 하나가 개성으로 와서 전한 말이었다.

전화국의 공중전화를 이용해 전해 온 소식이었다.

“11월에 먹다 만 일본산 비스킷은 버렸습니다. 오유미 양께 그렇게 전해 주십시오. 혹시나 상해로 돌아오시면 찾으실까 봐 전합니다.”

간단하게 그들끼리 통화는 말로 전해 받은 소식이었다. 일본산 비스킷은 가즈시케였다.

“그나저나, 반가운 소식이 들리던데. 전부 거집뿌리는 아니겠지비?”

유 선생이 화제를 돌리려는 듯 두 사람의 스캔들 기사에 관해 물어 왔다. 사실 유 선생으로서는 반갑기도 했던 이야기였다. 같은 일에 목적을 둔 동지끼리의 결혼은 더없이 이상적인 결합이 아니던가.

“와전입니다.”

그런데 태익이 단호하게 유 선생의 그런 희망을 잘라냈다. 오유미는 내심 다소 놀랐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에게 다른 여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유 선생은 더 이상 두 사람의 얘기를 화제로 삼지 않았다. 그저 당분간은 활동계획이 없다는 얘길 했다.

큰 작전 1개를 성공시키고 났으니 조용히 있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아직, 가즈시케 암살에 대해 민족당의 처단이었다는 사실을 공표할 것인지 정하지 않은 상태이기고 했고 말이다.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태익은 유 선생과 헤어지는 길에 전해 받은 쪽지를 폈다.

<황금정목 26번지 1-4/ 유옥문>

유옥문이라.

태익은 쪽지를 접어 재킷 안주머니로 갈무리했다. 최순임을 알고 있는 사람을 수소문해 달라던 그의 부탁을 유 선생이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다미로의 부친인 ‘주옥’이 만주에 있었을 때 유 선생과 일면식이 있던 사이라고 했다. 당시 유 선생은 상해에 머물다가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3개월 정도 만주에 머물렀다고 했다.

주옥의 아내인 최순임을 알지는 못해도 주옥의 주변인물 몇몇과는 연락이 끊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태익이 부탁을 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어머…… 두 사람, 데이트인가 봐요?”

오유미를 백화점 앞에서 내려 주기 위해 태익의 차가 멈춘 순간이었다. 그녀의 말에 태익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긴 호텔인데…….”

그녀가 차창 밖의 모습에 정신이 팔린 듯 말을 흘렸다. 거대한 회전문이 달린 건물은 경성 최고의 호텔 조선호텔이었다. 회전문 사이로 다미로와…… 한조가 빨려들듯 사라졌다.

“두 사람 정말로 불붙었나 보네요.”

오유미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태익을 돌아봤다. 그러나 딱딱하게 굳어 버린 태익의 눈동자는 호텔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안 대장님?”

오유미가 그런 태익을 불렀다. 하지만 태익은 그녀의 말은 무시한 채 운전기사에게 지시를 했다.

“차,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가지.”

조수석의 곽이 백미러로 태익을 흘깃 훔쳐봤다. 주인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읽어 낸 것이다. 곽도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지 않았으니 태익도 다르지 않으리라 여겼다.

다미로가 한조와 붙어 다니는 것도 모자라 함께 호텔을 들락거리다니. 당연히 호텔 다방을 이용하는 것인지도 확인해 봐야겠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해에서 돌아오는 기차에서도 다미로는 한조와 찰떡처럼 붙어 있지 않았던가. 5년 전 그녀의 배신이 정말로 배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곽은 한숨이 나왔다.

태익이 가장 먼저 차에서 내려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오유미는 자신이 머무는 호텔이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 내리면서도 머리가 복잡해졌다.

저벅저벅 정확한 걸음걸이로 태익이 호텔로 들어섰다. 웅장한 로비 오른쪽이었다. 태익은 약속이 되어 있던 사업체의 사장과 악수를 나눴다.

그의 약속을 몰랐던 오유미가 허탈하게 웃었다.

대체 무엇을 예상했던 것인가! 설마 그가 마령과 한조가 들어간 방 번호라도 알아내려 했다는 상상을 했던 것인가? 마령이 한조에게 무엇인가를 발설할까 봐?

오유미는 자기의 예상이 전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태익이 마령을 다 믿지 않는다는 것에 관한 한은 말이다.

이따금 한조와 함께인 마령을 좇는 태익의 눈길을 그녀는 그렇게 해석했던 것이다. 태익이 재킷 단추를 풀며 소파에 앉았다.

등받이에 느긋하게 등을 묻어 열심히 설명을 하는 하청업체 사장의 얘기를 들었다. 아니 듣는 척을 했다. 태익의 머릿속은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와 같았다.

상상하기 싫은 것들, 상상해서는 안 될 것들로 머릿속이 점령당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럴수록 태익의 눈빛은 시베리아의 한겨울보다 더 차갑게 식어 갔다.

커다란 소파에 제왕처럼 앉은 태익은 엄지손가락으로 지그시 아랫입술을 눌렀다. 심장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굳이 방으로 올라왔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불길한 예감은 대부분 비켜 가는 법이 없었다. 그 불길한 예감의 법칙은 어렸을 적부터 그녀를 비켜 간 적이 없었다. 다미로는 한조가 등 뒤로 문을 닫은 뒤 그를 돌아봤다.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섭니다.”

딱딱한 군복을 흐트러짐 없이 착용한 한조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를 왜 보호해야 하는 건데요?”

어떤 것을 알아챈 것일까? 상해에서의 일일까, 아니면 기차 안에서의 일일까.

다미로는 얽혀 드는 생각들로 안경 너머로 한조를 응시했다. 한조를 만난 곳은 소공동이었다. 아마 안국동의 집에서부터 따라왔을 것으로 생각이 됐다.

구본을 만나기 위해서 골동점으로 찾아갔지만 점원만 있을 뿐 구본은 자리에 없었다. 일부러 피한 것인지 정말로 나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헛걸음을 했다고 생각하며 골동점을 나와 몇 미터쯤 걸었을 때였다.

따라붙은 한조를 눈치챈 것은 어리석게도 그때부터였다. 12월 29일……. 그날 해야 할 일에 빠져 움직이는 동안 미행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었다.

“가즈시케 특무사령관이 어젯밤 상해병원에서 운명을 달리 했습니다.”

그리고 다미로가 군말 없이 한조를 따라나서게 한 말은 그 한마디였다. 그녀는 소공동에서 이곳 조선호텔까지 한조를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방으로까지 올라올 필요가 있었냐는 다미로의 물음은 한조를 떠보기 위함이었고 말이다. 그가 뭔가를 알고서 이러는 것인지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거짓말을 하더라도 제대로 둘러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한조가 창가로 다가가 호텔 바깥을 내려다봤다. 한조는 군인치고는 상당히 차분한 성격이었다. 그 안에 내재된 잔혹성이 다른 일본군들과 어떻게 다를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가 매우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은 진즉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왜 자신을 보호해야 하느냐는 물음을 던진 다미로는 인내심 있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조가 바깥을 살피던 몸을 돌렸다. 군인장교답게 각이 잡힌 자세로 뒷짐을 지고서 그녀와 마주했다.

“이런 얘길 지나가던 누가 뭘 엿듣게 될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누가 엿들으면 안 될 얘기를 우리가 할 게 있을까요?”

“없었으면 좋겠지만…… 저는 장담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루야마 한조.

다미로는 그의 진심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태익 아닌 다른 누구를 의식할 여유도 마음도 없었으니까. 그래서였는지. 다미로는 한조와 함께 있는 이 방이 몹시도 불편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조와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불편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미로는 태익과 아주 닮은 점이 하나가 있었다.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일수록 자기 감정의 통제가 잘 된다는 점.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뚝뚝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두 손을 가운데로 모아 쥐었다. 한조에게 자신이 어떤 이미지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돌리지 말고 얘기하시죠, 마루야마 소위님. 도대체 무슨 얘기인데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되는 얘기가 있나요? 소위님과 저 사이에?”

짧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한조는 뒷짐을 진 채로 다미로를 뚫어져라 내려 보고 있었다. 그는 창백했다. 눈 밑은 거무스름했고 볼은 푹 꺼져 있었다.

통 잠을 자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순간 다미로는 기차에서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녀가 화장실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갔다 돌아왔을 때까지의 시간…… 대략 30분.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이었지만 한조는 잠들어 있지 않았었다.

“오유미 양과 안 사장님.”

그가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그 두 사람이 댄스홀에서 사고가 있던 날 밤에 함께 있었던 것이 맞습니까?”

“그걸 왜 저한테 확인하세요? 당사자들에게 확인해야 할 사실이 아닌가요?”

“다음날 아침에 안 사장님께서 여동생 방에 있으셨으니 묻는 말입니다.”

덜컥.

다미로의 심장이 아래로 떨어졌다. 수사권이 없는 한조가 경찰서에 가서 사건기록을 확인했을 리는 없다. 그 말은 즉, 상해 타임지에 실린 기사를 보고서 그가 묻는 말이라는 뜻이었다.

……망할.

다미로는 속으로만 욕설을 씹어 냈다. 하지만 그녀는 안경을 벗어 날카로운 눈으로 한조를 올려다봤다.

“여동생이 오라버니의 밤 생활까지 일일이 알 거라는 생각은, 일본식인가요?”

굳이 가즈시케와 연결시키지 않고 얘기를 마무리하려는 의도였다. 가즈시케가 죽었다는 말에 군말 없이 한조를 따라왔지만 그에게는 무엇도 말할 이유가 없었다.

“상해에서 함께 계셨던 가즈시케 사령관님께서 운명하셨다는 소식에, 소위님께서 마음을 다치셨을까 봐……. 함께 차라도 한 잔 마셔 드리면 위로가 될까 해서 따라온 길이었는데…….”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미로가 그를 따라나선 상황을 설명해야만 했다.

“방까지 여자를 불러들여서 물으시는 말이 상당히 어이가 없군요! 마루야마 소위님.”

제발 한조가 속아 넘어가 주길……. 다미로는 차가움을 위장한 눈동자와 다르게 속으로 기도했다. 한조가 자신을 방어하듯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마른손으로 마른 얼굴을 문질렀다. 잠시 눈을 감은 그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겠다는 것처럼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한조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가 마른입술로 다시 말을 꺼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말입니다. 다미로 양.”

하지만 그는 바로 말을 망설였다. 입 안에서 묻고 싶은 말이 맴돌았지만 한조는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외탄의 그녀가 머물던 호텔로 찾아간 그날 아침부터였다. 태익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기 화장대 서랍 안에, 속옷 새것으로 사다 놨다. 입던 게 어젯밤에 못 쓰게 된 것 같아서.”

그 말을 할 때의 안태익의 목소리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그랬던 것처럼 여유롭고 느긋했다. 하지만 한조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 말의 내용이었다.

마치 다미로가 제 여자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 일부러 했던 말 같았다. 마치 밤을 함께 보낸 것 같은 방의 흔적들도 그랬다.

여자 혼자서 자고 일어난 침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한조는 생각이 실타래처럼 엉겨들었다. 다미로를 상대로 그런 불순한 상상을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런데…….

가즈시케가 총격을 당했던 그날, 댄스홀에서의 오유미를 한조는 기억했다. 몇 분인가의 정전. 그리고 불이 다시 들어온 다음 벌어진 상황에 모두가 혼비백산할 적에 그녀는 유유히 댄스홀을 빠져나갔다.

어째서 그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남성 휴게실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호각 소리가 무엇인지 궁금해하지도, 누군가에게 묻지도 않았던 것이다.

오유미를 본 직후에 한조와 시선이 마주친 사람은 다미로였다. 파랗게 질려서 한조와 그가 품에 안은 가즈시케를 번갈아 보던 다미로였다.

그렇기에 다미로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유미는 지극히 의심스러웠다.

“오유미 양과 안 사장님의 기사…….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그게 궁금한 겁니다. 정말로 혼인 얘기가 오가는 사이라면 다미로 양이 모를 리 없지 않겠습니까.”

“신문에 난 기사가 모두 사실은 아니지요.”

한조는 누굴 의심하는 것일까! 다미로는 아직 그게 파악되지 않았다. 태익과 오유미의 결혼이라니……. 다시 되새기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냉정해야 했다.

그렇기에 무작정 부정할 수만도 없었다. 태익과 오유미에 대한 얘기를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 어느 것이 더 나은지 판단 불가였다.

“그렇지만 신문에 난 기사가 현실이 되지 말란 법도 없는 것 같더군요. 세상일이란 것이.”

다미로의 모호한 대답에 한조가 다시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안 사장님께서 오유미 양을 보호하기 위해……. 그날 밤 거짓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신 것이라면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오유미! 결국 한조에게도 그 여자가 꼬리를 잡혔다는 것인가!

다미로는 눈빛이 흔들렸지만 벗어 두었던 안경을 쓰며 한조의 시선을 피했다.

“대체 오라버니께서 오유미 양을 무엇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것인지, 저는 도통 짐작을 할 수가 없네요.”

흔들렸던 눈동자를 다시 단단하게 굳혀 그녀는 한조를 올려 보았다. 그가 대답이 없다. 다미로는 잠시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척하다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곧게 뻗은 다리를 가지런히 옆으로 모아 일어섰다. 한조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몸을 경직시켰다. 그녀의 곧게 뻗은 늘씬한 다리가 제 허리를 감는 상상이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펼쳐졌던 것이다.

다미로의 겉모습은 소박했다. 안태익의 친동생이든 이복동생이든, 혹은 동생처럼 자란 사이든 뭐든…… 그는 상관이 없었다.

이환에게 그녀가 태익의 동생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가 알기로 태익의 호적에는 형제남매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상해로 가던 배에서부터 그는 다미로가 태익의 친동생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다미로에게 적극적일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한조는 태익을 경계했다. 부친 마루야마 지로에게 커다란 정치적 후원자였다.

그러나 태익은 지로가 담기에는 지나치게 큰 그릇이었다. 지로는 모르는 것 같지만. 그래서 차라리 다미로가 그의 친동생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여겼다.

비록 외탄의 호텔에서, 그리고 기차의 식당 칸에서 태익과 마주쳤을 때……. 이상한 느낌을 받았었지만 말이다.

이복이든 아니든, 혈족이든 아니든, 태익이 여동생에게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래서 더 다미로가 탐이 나는지도 몰랐다.

안태익이 소유한 우아하고 순결한 조선백자를 한조는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들을 얘기 다 들은 것 같은데요, 소위님. 이만 먼저 실례할게요.”

다미로가 먼저 문으로 향했다. 이제 한조를 이용하는 일은 그만둬야 할 때라고 그녀는 판단했던 것이다. 명확한 이유는 당장 생각나지 않지만 다미로의 오감이 그렇게 얘길 하고 있었다.

방을 나와 다미로는 뒤돌아보지 않고 승강기로 향했다. 7층에서 내려온 승강기에 올라 1층 버튼을 누를 때였다.

닫히는 문 사이를 비집은 한조가 승강기에 탔다. 다미로는 놀랐지만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서며 그와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한조가 다미로의 손목을 잡아 거리를 좁힌 순간엔 그녀가 저항할 틈이 없었다. 벽으로 밀쳐져 두 뺨이 그의 두 손에 억지로 잡혔다. 한조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순식간에 덮쳤던 것이다.

띵.

승강기 문의 벨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것은 지독하게도 운이 없는 일이었다. 다미로가 소공동에서 한조를 맞닥트린 순간부터 느낀 그 불길함의 정체 중 가장 커다란 것이었다.

호텔 다방을 나서던 태익과 시선이 얽혔다. 한조의 어깨 너머로 다미로는 태익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 사이에 승강기 문이 다시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다미로의 손이 한조의 어깨를 치고 그의 가슴을 있는 힘껏 떠밀었다.

철썩!

그의 턱이 왼쪽으로 돌아갔다. 다미로는 움켜쥔 주먹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후려친 것인지 한조의 입술이 터져 피가 보였다.

그가 피 맛이 나는 입술을 혀로 핥더니 피식 웃어 보였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며 다미로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제가 꽃을 너무 함부로 꺾으려 들었군요.”

씁쓸한 웃음과 함께 그가 중얼거렸다. 다미로는 립스틱이 번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그리고 방금 사내에게 억지로 입맞춤을 당한 여인답지 않게 차갑게 식어 말했다.

“앞으로는 개인적으로 서로 보는 일은 없겠네요, 소위님…… 그럼.”

3층에서 열린 승강기 문을 통해 다미로는 싸늘하게 한조의 곁을 지나쳐 내렸다. 그녀가 내리고 승강기에 오른 사람들이 등을 보인 채 굳어 선 한조를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한조는 피가 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 * *

황금정목 26번지 1통 4반.

태익은 쪽지 속 주소지 앞이었다. 머릿속은 아까보다 훨씬 더 뒤죽박죽이었지만 오늘 꼭 확인해야 할 일이 이 집에 있었다. 다미로……. 한조와 그녀가 눈앞을 어른거렸다.

태익은 지그시 힘을 주어 눈을 감고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하지만 바로 주먹에서 힘을 빼고 눈앞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유옥문.

다미로의 모친 최순임과 만주에 함께 있었다던 여자였다. 만주에서는 무엇을 했는지 몰라도, 지금은 일본 군인들과 경찰을 상대하는 요정을 운영하고 있는 여자였다.

황금정목 26번지 1통 4반은 제법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지은 요정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기루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일종의 매춘과 술 접대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요정이 유옥문의 소유는 아닌 듯 보였다. 알아본 바로 주인은 따로 있는데 유옥문이 바지사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요정의 이름은 ‘원화관’이었다.

“경성상회 젊은 사장님께서 이 늙은 년을 어찌 찾으십니까?”

유옥문은 화려한 눈꽃 무늬 기모노 차림이었다. 요란하게 화장한 눈을 깜빡이며 태익의 맞은편으로 앉은 유옥문은 마흔 줄이 넘어 보였다.

“그것도 혼자서 술상을 받으시면서요. 이왕 혼자서 술을 드시러 오셨으면 젊고 예쁜 것들을 부를 만도 하신데 말씀이죠.”

그녀는 앉자마자 태익의 잔에 술을 채웠다. 태익이 그녀가 따른 술을 입가로 가져가며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젊은 여자들은 말상대가 아니라 몸 상대 아닙니까. 난 오늘 말 상대가 필요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웃고 있지만 술잔을 입술에 대며 유옥문을 마주한 눈빛은 날카로웠다. 유옥문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고 말이다. 안태익. 조선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마는.

그녀는 안태익에 대해 알 만큼은 아는 사람이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안태익보다 그의 부친인 故안길준 사장에 대해 안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어떻게 잊겠는가. 아사이 금광에서의 그 일을…….

그렇기에 유옥문은 안태익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손발이 다 떨렸다. 한 번도 안태익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소문이 자자한 젊은 기업가가 아니던가.

“말, 말 상대라니요?”

그녀는 급기야 말을 더듬고 말았다. 안태익은 젊지만 절대로 애젊은이가 아니라던 말. 그 말인즉 젊지만 나이 먹은 사업가들처럼 구렁이를 수백 마리는 삼킨 능구렁이라는 말이었다.

젊은 갑부인 데다가 수려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잘생기고 체격까지 훌륭한 사내의 유일한 단점. 어떤 일에 한해서는 포악하리만치 잔인하다는 얘기였다.

“저, 젊으신 사장님께서 어째서 저같이 나이 먹은 여자와 얘길 하고 싶으신 것인지 모, 모르겠습니다. ……유행하는 노래를 알아도 젊은 것들이 더 잘 꿰고 있을 테고, 농담을 해도 젊은 것들이 더 재미있게 해 드릴 텐데.”

그렇기 때문에 유옥문에게 지금 자리는 절대로 피하고 싶은 자리였다. 그리고 태익은 안절부절못하는 유옥문의 행동을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만난 것처럼 웃음으로 감상하고 있는 듯 보였다.

“글쎄요, 다른 사내들은 어떤지 몰라도, 난 유옥문 사장님과 나눌 얘기가 더 기대가 되는데요.”

무엇을 알고서 온 것일까?

태익이 시원스레 술을 넘기며 하는 말에 유옥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최순임.”

그리고 태익의 입술에서 그 이름이 나온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털썩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말았다. 무릎을 꿇고 앉았던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지며 엉덩이가 바닥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유옥문은 그가 강선애에 대해 물을 줄로 알았었다. 아사이 금광에서의 그 사고에 대해 알고서 찾아온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최순임이라니! 도대체 그가 어디까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 것인지……. 그녀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죽…… 죽은 사람 얘긴 해서 뭐 하시려고.”

흐트러진 자세를 간신히 다잡으며 그녀는 태익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가 유옥문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죽은 사람이라고……?

“죽은 사람을 추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들어오면서 하늘을 봤더니 곧 첫눈이 내릴 것 같더군요. 눈이 내리는 이런 밤에 옛 사람을 추억하는 일…….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생각보다 훨씬 마음이 나약한 유옥문에게 태익은 유도신문을 하고 있었다. 유옥문이 제 앞의 술잔을 손에 쥐었다. 그가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손을 보며 다시 입술을 열었다.

“정확하게 언제 돌아가셨는지 날짜를 알 수 있을까요?”

죽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하는 것보다 이렇게 묻는 것이 그녀에게 유도신문하기 수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유옥문이 태익과 눈을 마주했다. 순식간에 목이 깔깔하고 혓바닥이 바싹 말랐다.

“날짜는…… 왜……?”

그녀가 물었다. 태익은 자신의 손으로 술잔을 채우며 웃었다.

“새삼 기일이라도 챙길까 싶어서 그런 달까……. 아시겠지만 주옥 선생께선 만주로 가시기 전까지 부친의 오른팔이셨습니다. 만주에서 일을 당하셨을 때 시신 수습은커녕 어떻게 가셨는지도 지금껏 모르고……, 뭐 그러던 와중이었는데. 얼마 전에 우연히 상해에 출장을 갔다가 주옥 선생께서 만주에서 최순임이라는 여성분과 결혼을 하셨던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분마저도 돌아가셨고…….”

태익이 제 잔을 채운 술병으로 다시 유옥문의 잔을 채워 줬다. 옥문은 술잔으로 눈을 내리며 깊게 숨을 들이 내쉬었다. 태익은 옥문에게서 잠시 시선을 떼어 일부러 그녀의 손으로 눈을 내리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그런 사정을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할 도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옥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부친께서도 분명히 그러길 바라실 거고요.”

최순임이 도대체 언제 죽었다는 것인지. 태익에게는 그 날짜가 중요했다. 만주에서 다미로를 낳은 후 최순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10년 전 아사이 금광사고 때 그녀를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말이다.

만주에서 다미로의 모친 최순임이 남편 주옥을 총으로 쏴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안길준은 그녀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다.

그러나 14~15년 동안 단 한 번도 누가 그녀를 지나치다가 봤다는 소식조차 없었다. 그런 최순임이, 안길준이 사고를 당한 아사이 금광에 10년 전 느닷없이 나타났다니…….

거기에 안길준이 금광 안의 시설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광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가 기폭장치를 누르는 것을 봤다는 증언까지 있었으니.

안길준의 금광 시찰 일정에 맞춰 일부러 광을 뚫는 일정을 그날로 잡았다는 소문도 나돌았었다. 그래서 화약폭파 장치가 그날 광산 안에 설치되었고, 표면상으로 시찰 후에 폭파가 이루어지기로 되었었다고.

하지만 그런 얘기들이 모두, 광산노동자 한 명에게서 나온 이야기이기에 경찰에 진술조차 되지 못한 이야기였다.

학대와 굶주림으로 지친 조선인 노동자의 진술을 일본 경찰이 들어 줄 리도 없었고 말이다.

“언제입니까?”

태익이 나지막이 물었다. 유옥문은 덜덜 떨리던 손가락을 다잡듯 술잔을 꼭 움켜쥐었다.

“겨울이었을 거예요. 아마 12월쯤. 애가 태어나고 겨우 보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으니까.”

역시.

그렇다면 아사이 금광에서 봤다던 최순임은 누구란 말인가!

태익은 혼란스러웠지만 빳빳해진 입매를 금방 누그러뜨리며 웃었다. 유옥문에게 잔을 들어 보이며 단숨에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옥문이 태익의 반응을 살피려는 듯 그를 흘끔거렸다. 잔뜩 어깨가 움츠러들어 고개마저도 자라목처럼 안으로 숨어 있었다.

숨길 것이 많은 사람의 특징적 행동이었다. 특히나 자기의 얘기가 아니라 남의 얘길 숨겨 줘야만 할 상황일 때 말이다.

만일 그녀가 자신의 비밀을 숨기려 했다면 오히려 당당하려고 애를 써야 했을 테니까. 저렇게 잔뜩 겁을 먹어 눈치를 살피는 태도 대신 말이다.

“깊은 얘기, 재미있었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을 기약하기로 하겠습니다.”

“네?”

태익이 미련 없이 재킷을 챙겨 들며 일어났다. 놀란 유옥문이 그를 따라 일어섰다.

“아, 그리고.”

문을 나서던 그가 유옥문을 돌아봤다.

“오늘 나와 나눈 얘기는 당분간 우리끼리의 비밀로 하시는 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옥문 여사.”

협박이었다. 그녀는 분명 누군가를 보호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오늘 일을 몰라야 한다고 태익은 판단 내렸던 것이다.

유옥문이 자신과 그 보호하려는 대상 중에 누굴 더 두려워할지는 모르겠지만.

끄덕끄덕.

유옥문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익은 피식 그녀를 향해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몸이 돌아선 순간 태익의 미간은 서서히 모아졌다. 입매가 단단하게 굳어지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걸음걸이가 성말랐다.

다미로는 저녁을 거의 먹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이환과 함께 먹었지만 밥은 모래를 씹는 맛이었다. 별채의 방으로 돌아와 이부자리에 누웠지만 잠 같은 게 올 리가 없었다.

왜 하필이면…… 태익이 그 호텔에 있었던 것일까. 어째서 하필이면 그때 그 로비에 있었던 것일까. 왜 승강기 문이 열린 순간에 그가 뒤를 돌아본 것일까.

‘왜?’ 하는 의문과 ‘하필이면!’ 하는 원망이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

그렇지만 상황이 꼬인 것에 태익의 잘못은 없었다. 한조에게 뒤를 밟힌 자신의 탓이 오히려 더 컸다는 것을 다미로는 잘 알고 있었다. 미행을 당하다니.

태익의 이 안국동 집으로 돌아오기 전의 그녀였다면 어림없을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예시하는 바는 그녀가 현재, 마령이 아니라 완벽하게 안다미로로 돌아와 있다는 의미였다.

지나간 5년 동안 살아남기 위해 고슴도치처럼 세웠던 오감의 칼날이 무뎌졌다는 말이었다. 태익의 보호 아래에서…….

그렇지만 다미로의 그 안도가 일을 만들고야 말았다. 아무리 한조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지만, 태익에게 변명을 할 수는 없었다.

한조에게 여지를 줬던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한조를 이용하기 위해서 주었던 여지라고 해도. 또 태익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그와 멀어지려 했던 의도라고 해도…….

결국엔 지금 이렇게 태익의 집에 또 들어와 있지 않은가! 결과는 전혀 그녀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후우…….”

다미로는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원피스 위에 두꺼운 숄만 걸쳤다. 태익의 서재에 가서 책이라도 한 권 뽑아 올 요량이었다.

저녁나절 이환이 곽에게 연락을 받았었다. 태익이 오늘은 많이 늦을 것이라고 말이다. 시각은 이제 10시가 약간 넘어 있었다.

본채에서 태익과 유일하게 함께 기거하는 사람은 이환이었다. 그런데 이환은 9시쯤에 취미로 하는 마작놀음이 있다며 외출을 나갔다. 종로의 다방 어딘가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나머지 본채의 일을 담당하는 식솔들도 행랑으로 돌아가 제 일들을 볼 시간이었다. 다미로는 마당을 가로질러 본채로 향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낀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떨어졌다. 손바닥을 펼쳐 진눈깨비를 담았다.

모친 최순임의 사진을 처음으로 봤던 날이 이렇게 첫눈이 오던 날이었다.

“생일 때 보여드리려 했는데, 나이가 먹으니 자꾸 건망증이 심해져서 이제야 드리네요, 아씨.”

낡고 오래된 사진이었다. 열여덟 번째 다미로의 생일이 일주일쯤 지난 뒤였다.

“아씨 가족사진입니다. 돌도 안 돼서 아씨가 돌아가신 나리 품으로 왔을 때 포대기 속에 사진이 같이 있었지요. 나리께서 아씨가 크고 나면 그때 보여 주라고 제게 맡겨 놓으셨습니다.”

아마도 안길준은 최순임이 남편 주옥을 쐈다는 소문에 대해 그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에는 군복을 입은 젊은 남녀가 있었고, 그중 남자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진눈깨비가 금세 굵어졌다. 다미로는 손바닥에 닿자마자 녹아 버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다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떼었다.

차라리 그 사진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때, 강선애는 죽었을 것을…….

멍청하게 강선애의 얼굴을 보고 꼼짝없이 얼어붙어 동료들을 죽게 만들지도! 죽어야 할 사람 대신 동료들이 희생당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불을 켜지 않고 캄캄한 계단을 올랐다. 서재는 문이 열려 있었다. 창문 밖으로 펄펄 날리는 탐스런 눈송이가 보였다.

비어 있는 태익의 책상 곁으로 가서 스탠드 등을 켰다. 오렌지색 주황 등에 실내는 따뜻한 색으로 물들었다.

다미로는 숄을 여미며 그의 책상 뒤쪽 서가로 다가섰다. 무슨 책을 읽을까. 책을 손에 들어 본 일이 까마득했다.

이화여전을 그만두고 안국동의 이 집을 나간 이후로는 일부러 한 번도 책을 손에 잡지 않았었다. 돌아가고 싶어질지도 몰라서였다. 태익의 곁으로…….

그의 안온함과 열기에 자신을 묻고 싶어서 말이다. 태어나는 순간 죄인의 자식이 된 자신의 처지를 숨기고서 뻔뻔스럽게도 태익의 곁을 지킬까 봐.

감히 소망해서는 안 될 그를 남편으로 원하게 될까 봐서였다. 주제도 모르고 처지도 망각한 채 태익의 아내 자리를 탐낼까 봐.

다미로는 서가에 정갈하게 정돈된 책들에 눈을 둔 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책이라…….”

그런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핫!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서재의 문기둥에 기대어 선 태익이 보였다.

“오라버니.”

그를 부르는 다미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떨리고 있었다. 태익의 표정은 싸늘하다 못해 동장군이 얼려 버린 계곡물 같았다.

그럼에도 눈동자에는 이글이글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다미로가 그를 향해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온다고 느낌과 동시에 아프게 턱을 잡혔다.

거칠게 입술이 겹쳐졌다. 윗입술이 피멍이 들 정도로 빨렸다. 그가 거침없이 그녀의 입 안으로 침투해 혀를 목구멍까지 쑤셔 넣었다.

본능적으로 방어에 나선 다미로의 혀를 그의 혀가 강하게 감아 당겨 고통스럽게 빨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태익의 입술이 포악하고 사나워 숨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다미로의 두 팔이 태익의 가슴을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다미로의 힘으로 그를 밀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순간이다. 태익의 입술이 느닷없이 떨어져 나갔다. 대신 그녀의 팔을 억세게 잡아 서가로 몸을 돌려세웠다.

“오라버……!”

태익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챌 시간도 없었다. 그녀가 두르고 있던 숄은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앞단추로 여민 원피스 앞자락이 투두둑 거칠게 뜯어졌다.

치마가 단번에 그녀의 허리 위로 올라갔고 속옷이 억지로 무릎까지 벗겨져 내려갔다. 태익의 팔이 그녀의 아랫배에 둘러져 그녀를 뒤로 잡아당겼다.

다미로는 서가에 손을 짚은 채 벌거벗겨진 엉덩이를 태익을 향해 쳐든 꼴이 되어 있었다. 태익의 남성이 젖지 않은 다미로의 질구를 한 번에 쑤시고 들어왔다.

“하으윽!”

그녀의 허리가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다미로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가 왜 이러는지 모르지 않았으니까.

“오라버니…… 흐읏…… 얘길…….”

“시끄럽다, 다미로.”

태익의 목소리가 음험하고도 위험스럽게 낮았다. 그의 손이 제 남성이 쑤시고 들어간 다미로의 질구를 양옆으로 벌렸다.

그리고 제 남성을 조인 질구의 양옆 음순 사이로 손가락을 끼워 넣어 자극을 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허리를 세차게 쳐올렸다.

“흐윽!”

다미로가 고통에 찬 신음을 삼켰다. 질 속이 찢어지고 타오르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지만 그와 함께 시큰한 욕망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범해지듯 당하고 있는데도 스무 살 때부터 그에게 길든 그녀의 음부는 제 남자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본능적으로 다미로의 질구가 움찔움찔 태익의 남성을 조였다. 태익이 다시 방금 전보다 더 세차게 허리를 튕겨 올렸다.

“하으읏!”

다미로의 몸 전체가 격랑을 만난 배처럼 출렁거렸다. 벌써 땡땡하게 부풀어 젖꼭지가 발딱 일어난 그녀의 젖가슴은 격랑 치는 파도처럼 울렁거렸다.

“그놈한테도…… 이렇게 벌려 줬나?”

태익이 감정을 잔뜩 억누른 목소리로 물었다. 이를 악물어 소리를 죽인 채였다. 다미로는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오라버니, 그 사람과는 그런 사이가…… 하윽!”

그녀는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태익이 그녀의 엉덩이를 더 높이 치켜들어 더 깊숙하게 남성을 박아 넣었기 때문이었다. 채 젖지 못한 뻑뻑한 그녀의 내부를 그의 남성이 거칠게 자극했다.

다미로의 손은 어느새 바닥 가까이를 짚고 있었다. 치마가 브래지어가 끌려 내려간 가슴 아래까지 거꾸로 뒤집혀 말려 있었다. 태익이 그녀의 골반 양쪽을 잡아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때부터였다. 그가 제 것을 박아 넣은 다미로의 음부를 제멋대로 쑤셔 대기 시작했다.

찰싹찰싹.

그의 사타구니와 다미로의 차진 엉덩이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탁! 탁! 탁!

근육과 뼈가 맞부딪쳐 소리가 날 정도로 그는 다미로의 음부에 제 남성을 온 힘을 다해 쑤셔 박았다.

“흐윽! 흐윽! 흐으읍!”

다미로는 밀려나지 않기 위해 서가를 짚은 손가락이 부러져라 힘을 주었다. 질 내벽이 그의 음경에 거칠고 아프게 쓸리는 통증은 짧았다.

태익의 손이 음순 사이를 벌려 교합된 그곳을 확인하는 것을 본 순간, 다미로는 어마어마한 전율에 휩싸였다.

태익이 안다미로가 자신의 여자임을 얼마나 확인하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것을 삼킨 다미로의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녀의 이성은 아직 맑았다. 아무리 하기 싫은 변명이라고 해도 그녀는 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5년 전의 배신에 대해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조와 그런 관계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만은 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다미로가 고개를 간신히 돌려 태익을 보았다.

태익의 시선이 제 것을 물고 빠는 다미로의 음란한 음부에서 그녀의 눈으로 향했다.

“오라버니……. 아까 호텔에선…… 흐읍! 하아…… 악!”

그러나 그는 다미로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대신 아래를 교합시킨 그대로 그녀의 몸을 앞으로 돌렸던 것이다.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들어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무릎을 접어 그녀의 발이 책상을 딛게 하자, 태익의 남성을 먹은 다미로의 음부가 활짝 벌어졌다. 그가 갑자기 넥타이를 풀었다.

그곳을 교합한 채로 그는 다미로의 두 팔을 그녀의 허리 뒤로 모아 넥타이로 결박했다. 그리고 벌어진 그녀의 양 무릎을 단단히 손으로 움켜쥐었다.

천천히 제 남성을 귀두까지 뺐다. 그러더니 지금까지와는 강도 자체가 다르게 그녀의 질구에 남성을 쑤셔 넣었다.

“하으읏!”

다리도 팔도 다미로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다시 천천히 제 것을 빼냈다. 그리고 이번엔 뭉근하게 밀고 들어와 음경의 뿌리까지 박아 넣었다.

“하……. 으읏!”

눈을 똑바로 맞춘 채였다. 서로의 은밀한 곳을 교합한 채로 서로의 눈동자 속에 담긴 욕정을 탐닉하듯 그랬다.

또다시 그가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번엔 그가 빠져나가는 그 순간에도 다미로는 전율에 떨었다. 빠져나가는 그의 남성에 쓸린 질 내벽의 자극은…….

그가 다시 안으로 남성을 밀어 넣었다. 축축하게 흘러내린 애액에 다미로의 질 속으로 그의 굵은 남성은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갔다. 태익의 턱이 들리며 어금니 쪽이 불거졌다.

그는 참고 있었다. 제 것에 착 들러붙어 조이고 빨아 당기는 다미로를 견뎌 내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점점 그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다미로도 역시 그를 견뎌 내려 입술을 앙다물었다. 폭발할 것 같은 전율에 함락되지 않기 위해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 으으읏!”

하지만 도저히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고개가 저절로 뒤로 젖혀지고 허리가 위로 솟구쳤다. 허리 뒤로 손목이 묶여 그를 밀어낼 수도, 끌어안을 수도 없는 무방비상태였다. 부글거리는 욕망을 견뎌 낼 수가 없었다.

“하응…… 으응…… 응…… 응.”

그렇지만!

그가 빠져나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아!

다미로는 시뻘게진 얼굴을 뒤로 늘어뜨린 채 숨만 몰아쉬었다. 골반을 움켜잡고 있던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 봤다.

태익은 어느새 옷매무새를 완벽하게 가다듬은 상태였다. 그에 반해 다미로는 반 벗겨진 것이나 다름없이 엉망진창인 채였다. 굴욕감과 수치감이 밀물처럼 그녀를 덮쳤다.

손이 결박당한 채 허벅지를 한껏 벌린 굴욕적인 자신과 태익은 지나치게 대조적이지 않은가!

그가 손을 결박한 목적은 그녀에게 이런 수치심을 주기 위한 데에 있었을 테지만. 벌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마음을 멋대로 휘젓고 고통스럽게 만든 대가를 치르게 할 셈이었던 것이 확실했다. 다미로는 입술을 깨물고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한데 태익이의 손이 부드럽게 다가와 그녀의 뒷머리를 안았다. 그리고 정수리에 뜨겁고 아주 깊숙하게 입술을 맞췄다.

“……나이가 먹어도……사내는 가끔 이렇게 어리석다, 다미로. 그러니까 내가 질투하게 만들지 마라. 앞으론. 잘못하면 그 자식을 내 손으로 묻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 밤 태익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다미로의 손을 결박했던 넥타이를 풀어 조용히 서재를 나갔다.

오해, 질투.

둘 중에서 어떤 것도 그 밤에 풀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그 오해가 더 깊어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다미로의 몸은 차갑게 식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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