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5화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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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학이 객실 바깥쪽을 살피며 빠르고 소리 없이 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김산이 일어나 최창학이 들어온 문 바깥을 객실의 작은 유리창으로 살폈다.

“마령 동지 예상대롭니다.”

“뭔가 눈치챈 거군요.”

“예.”

“누군가요? 꼬릴 잡힌 게.”

다미로는 이마에 식은땀이 솟았지만 닦아 내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태익의 손에 의해 경무국에서 나온 이후로 가장 이성이 맑았다.

부질없이 흔들리던 마음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흔들렸다. 태익의 손에 죽든, 애증의 대상으로 남더라도 그의 곁에 있든…….

다미로는 그에게 끌려가고픈 마음이 컸다. 태익의 품에서 자신이 그의 여자라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마음은 풍랑을 만난 조각배와 같았다.

온몸의 세포가 다 산화하는 것과 같은 쾌락의 끝은…… 허무하기 보다는 그녀의 가슴에 삶을 이어 가고픈 불씨를 지폈으니까. 강선애를 없애고 자신의 삶도 마감하기로 했던 그 결심이 흔들렸었다.

그러나 그제의 일로 다미로는 잠시 동안 흔들렸던 결심을 다시 다잡았다. 그의 곁에 자신이 머무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똑똑하게 확인하지 않았던가.

“뉘기가? 누구래 조 애새끼들한테 꽁대를 잡혔네?”

김산이 최창학을 다그쳤다.

“오유미 동지.”

오유미?

“확실한 거예요?”

다미로는 안경 너머로 차갑게 눈동자를 빛내며 확인을 했다. 최창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특실 열차 칸을 돌아다니며 구두를 닦아 주는 귀머거리 중국인 행세를 했다.

경찰국 놈들이 머무는 기관차 바로 뒤 차량인 특2호실로 들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엿들을 수 있는 얘기는 거의 없었다. 귀머거리 구두닦이 행세를 했어도 그가 객실로 들어선 순간부터 그들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최창학이 그럼에도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보십시오.”

그가 다미로에게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아마 다음 역에서 이 내용을 전보로 보내려고 했을 거요.”

군인으로 위장한 일본 비밀경찰국 놈이 부하에게 건넨 종이쪽지를 최창학이 가로챘던 것이다.

“검거작전 명령이로군요.”

“아래에 오유미 동지 이름이오.”

오유미.

그녀의 검거작전 명령이 내렸다는 것은…… 태익도 함께 위험해졌다는 의미였다. 두 사람의 스캔들 기사가 난 이유가 무엇인가! 가즈시케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던 밤에 오유미와 태익이 함께 있었다는 얘기 때문이 아닌가.

태익의 알리바이를 위해 오유미가 했던 거짓말이 들통 났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할 거요? 안 대장님께 보고해야 하지 않겠소?”

최창학이 초조한 표정을 감추며 다미로에게 물었다. 김산은 담배를 깊숙하게 들이마시며 다리를 떨어 댔다.

“위험해요.”

다미로가 최창학의 물음에 차갑게 대답했다.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최창학을 올려다봤다.

“오히려 심양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차 안에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요.”

“무시기?”

김산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다미로는 대꾸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다가가 바깥 동정을 살폈다. 그녀의 시선이 복도 저 끝머리 태익과 오유미의 객실로 향했다.

“감시당하고 있어요.”

그것은 곧 태익에게 접근해 지금 상황을 제대로 전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또 심양에 도착하기까지는 겨우 한 시간 남짓이었다. 심양에서 다음 역으로 보내질 전보를 막아야만 했다.

“최창학 동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뭐요? 말만 하시오.”

“총을 구해야겠어요.”

“어떤 걸로 말이오?”

“리볼버나 발트, 콜트…….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대신 유효사거리가 50미터는 돼야 해요.”

기차 바깥에서 총을 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내부에서 일어난 총격이란 것이 발각되면 태익이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으니까.

다미로의 빠르고 냉정한 말에 최창학은 잠시 고민을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기차 밖에서 저격이 이루어졌다고 수사기관이 믿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되면 수사에 혼선이 올 테고 기차 안의 사람들은 당연히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정말이지 기막히게 빈틈이 없는 여자가 아닌가! 상해의 그 시장에서도 그녀의 순발력에 최창학도 김산도 놀랐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저 돈 귀(鬼)라고만 여기고 있었는데…….

달랐다. 배에서 마루야마 한조를 맞닥트렸던 때에도, 또 시장에서의 그 재치도 그랬고 특히나 지금 하려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최창학은 마령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상해로 가는 배에서 마루야마 한조를 재치 있게 유인한 그 순간부터 그는 마령에게 신뢰가 갔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판단에 의해 자신의 활동이 필요한 상황이면 기꺼이 뛰어들지 않던가!

순수 자신의 의지로 동지들을 배려하는 여자. 총잡이 돈 귀(鬼) 마령이라고들 그녀를 알고 있지만 최창학은 그것이 다가 아님을 꿰뚫고 있었다.

“난, 일단 내가 머물던 객실로 돌아갈 겁니다. 거긴 특실이라서 화장실이 따로 있는데 거길 통해서 기차 지붕 위로 올라갈 거예요. 게다가 마루야마 소위와 함께 쓰는 객실이라서……. 나중에 의심도 피해갈 수 있을 거고요.”

“하! 에미나이래! 니, 미쳤네?”

김산이 기가 막힌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김산이 총잡이 마령을 다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총을 잡은 지 9년이었다. 처음에 총을 잡게 된 이유는 단순히 호신용이었다. 태익과 상해 근교의 그곳 ‘우전’을 다녀온 직후였다.

태익에게 사격을 배웠다. 아마 자신으로 인해 다미로가 곤경에 빠질 확률을 염두에 두고 가르쳤던 것 같았다. 그때 배운 사격과 호신술이 그녀가 태익을 떠난 이후로 그녀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무기가 되어 주었다.

또 그러면서도 그녀는 사내아이처럼 자라기도 했다. 그녀가 여자의 모습을 보이는 곳은 오로지 한 군데. 안태익 앞에서만이었다. 겁이 없던 다미로가 그를 먼저 유혹했다는 것이 맞는 얘기였다.

누가 먼저 사랑했는지는 몰라도 육체적으로 그를 먼저 유혹한 쪽은 확실히 다미로였다. 그 무더운 여름날……. 단둘이 안국동의 집에 남겨졌던 그날에 다미로는 의도적으로 몸이 훤히 드러나는 얇은 원피스를 입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으니까.

“일단 심양에서 전보가 가는 것을 막는 게 급선무예요.”

검거작전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함께 특실에 타고 있는 경찰국 요원 2명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 밖에 기차에 상시 배치된 일본 군인들이 있지만 그들은 검거작전의 내용을 모를 가능성이 컸다.

대체로 이런 작전들은 작전이 시행될 때까지 비밀 유지를 엄수하니까.

“실제 검거작전은 심양 다음 역에서 이루어질 확률이 높을 겁니다. ……심양 다음 역이 어디죠?”

다미로가 최창학과 김산을 번갈아 보았다. 김산이 뻑뻑 연기를 품어 대던 담배 파이프에서 입술을 떼어 대답했다.

“단둥.”

“단둥이면 압록강 접경지역이네요.”

“그렇디.”

다미로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했다. 계산이 필요했던 것이다. 2명. 동시에 해치워야 할 최소 인원 2명.

빠-앙. 칙칙 폭폭 칙칙 폭 칙 폭…….

기차가 길게 경적을 울렸다.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린 굴속으로 기차가 들어갔다. 다미로와 김산, 최창학 세 사람사이에 무겁고도 날카로운 침묵이 흘렀다.

다미로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심심하지 않으세요?”

12시간째였다. 바깥 풍경은 여전히 단조로웠다. 단조롭지 않더라도 이미 밤이었기에 볼 수 있는 풍경도 없었지만 말이다. 오유미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며 태익에게 물었다.

의자이자 침대인 좌석 위에서 길게 다리를 뻗어 책을 보던 태익이 고개를 들었다.

“마루야마 소위를 부를까요?”

“……왜?”

오유미의 뜬금없는 제안에 태익이 짧게 되물었다. 그녀가 빨간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긴요. 마령 동지가 걱정이 돼서죠. 대장님 동생 흉내를 잘 내고 있는지 그것도 그렇고 또 마루야마 소위가 마령 동지를 보던 눈이 심상치가 않았으니까.”

여자의 직감이었다. 솔직히 직감 같은 것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마루야마의 감정은 누구나 눈치채고도 남을 정도였지만 말이다.

“마령한테 단단히 빠져 있잖아요. 안 대장님도 그걸 아시고서 댄스홀에서 그 점을 이용하신 거 아녔어요?”

오유미가 확신하듯 말했지만 사실 그녀의 생각은 맞지 않았다. 태익이 다미로를 한조 곁에 두었던 목적은 다른 것에 있었다. 그녀가 용의선상에서 최대한 멀어지게 하려는 수였다.

한조가 보호하려 들 테니까. 다미로가 머물렀던 호텔과 룸을 알고서 한조가 찾아온 것만 봐도 그랬다. 그는 분명 경찰국에 다미로의 신분을 보장해 줬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한조와 단둘이 이 기차의 객실에 있는 것은 못마땅했다. 그것이 그녀의 안전이 보장되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에…… 다미로의 계획을 눈치채고도 말리지 않았었지만.

태익을 포함한 일행과 따로 움직이려는 다미로의 계획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엽’이란 이름으로 상해에 들어온 그가 한조와 한 배로 돌아가는 사태를 그녀가 막고 싶어 했던 것을 말이다.

그녀는 태익의 위장신분이 한조에게 들킬 가능성을 싹부터 자르고 싶었던 것이 분명했다.

“심심하면 복도 산책이라도 다녀오지.”

태익은 오유미의 얘길 가볍게 무시하며 그녀에게 산책을 권했다. 상해에서부터 한조와 다미로를 엮으려는 오유미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오유미는 오히려 침대에서 발을 내려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한 가지만 여쭤요, 안 대장님.”

태익이 눈썹을 이마로 밀어 올렸다.

“마령. 그 여자 말이에요. 사격 실력이 굉장하다면서요. 정확하게 간뇌에 총알 박아 넣는다고 하던데요……. 김산 동지도 들은 말이라지만요. 그거 고통 없이 즉사시키려고 쓰는 방법이라고 들었어요. 총잡이라도 룰은 있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유미가 사람을 보는 눈이 썩 나쁘지 않다는 것은 태익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게다가 아름답잖아요. 옷을 입는 센스가 좀 그렇기는 해도, 남자라면 누구나 관심 가질 만큼 예쁘고 또 관능적이죠.”

도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당신이.”

태익은 오유미의 다미로에 대한 관심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언젠가 다미로가 누구이며 태익과 어떤 관계인지 일부가 드러나기는 할 것이다. 적어도 오유미가 경성에 머무는 동안만은 그렇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지만 그건 그때 가서의 일이었다. 마령이 실제 누구라는 사실을 그녀가 안들 태익에겐 달라질 일이 아무것도 없었고 말이다.

다만, 아직……유 선생과 그녀의 신변처리에 대한 사항이 완벽하게 협의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뭐 그냥요. 특별히 무슨 목적이 있는 얘길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마령 동지가 돈 귀든 아니든, 인격과 상관없이 남자를 끄는 마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여자가 왜 돈을 벌자고 총을 잡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남자 후리는 재주가 뛰어나 보이는데 다른 여자들 같았으면 아마 몸으로 돈을 벌었을걸…… 하는 생각도 들어서.”

오유미는 다미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솔직하게 말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몸을 파는 게 낫잖아요.”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을 하던 오유미는 태익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은 몸을 파나?”

그의 무거운 입술이 지독하게 낮은 소리로 묻는 말을 듣고서야 그녀는 상황을 깨달았다.

“안 대장님…….”

망연해진 오유미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나 태익은 보던 책을 접어 테이블 위로 올려놓으며 일어났다. 재킷도 챙기지 않고 객실을 나왔다.

왼쪽으로 가면 다미로와 한조가 있는 객실이 있었지만 그는 오른쪽으로 발을 돌렸다. 두 사람이 함께인 그곳으로 가서 도둑고양이처럼 문에 귀를 대고 싶지 않아서였다.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겼다. 왁자지껄했던 복도는 조용해졌고 순찰을 도는 일본군들과 역무원들 몇 명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곽과 오유미의 식모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태익은 복도 차창에 기대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간간이 별빛이 보였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보던 태익이 눈을 감고 머리를 털어 냈다.

한조가 다미로의 몸을 더듬는 상상이라니. 태익은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어이가 없었다. 한조의 입술이 다미로의 풍만한 젖가슴을 물어뜯는 상상.

핏빛으로 농익은 유두를 쭉쭉 빨아 당기고 꿀물이 흐르는 검붉은 꽃잎을 유린하는 광경을 상상하다니! 헐떡이는 다미로의 숨결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한조의 품에서 빨갛게 정염에 타오른 표정의 다미로가……. 미친 듯이 엉덩이를 흔드는 그녀가 시커먼 차창에 보이는 것 같았다. 한조의 남경을 물고서 흡입하고 조이는 그녀의 밀지가 태익의 머릿속을 쑤셔 놓았다.

미친놈……! 어떻게 그런 상상을……!

태익은 자신의 어리석고도 유치한 질투심에 쓴웃음을 삼켰다. 이제 더 이상은 그런 상상으로 자신을 괴롭힐 일은 없다고 믿었었다. 장위건과 위장결혼을 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부터는 굳이 그런 망상을 하지 않았었으니까.

그런데…… 한조. 마루야마 한조라니.

그날도 비가 왔었다.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을 재촉하던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었다. 서재에서 다미로와 아슬아슬했던 전희가 있고 한 달 반이 지나서였다.

태익이 길었던 미국 출장길에서 돌아온 날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 집으로 들어왔기에 문을 열어 준 행랑아범을 제외하고 그는 아무도 깨우지 않았다.

어두운 빈 거실에 들어서 재킷만 대충 벗어 놓았다. 그리고 집 안 구석구석 다미로의 흔적을 찾으려 저도 모르게 두리번거릴 때였다. 집의 본채 옆 행랑채 쪽에서 약한 불빛이 새 나오고 있었다.

혹시……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태익은 우산도 없이 마당을 가로질러 불빛으로 걸어갔다. 예전에 행랑의 부엌으로 쓰던 곳이었다. 지금은 간단한 욕간 시설을 갖추어 놓고 있었다.

물소리가 들렸다. 욕간 통에서 누군가 몸을 씻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의 주인은 누구도 아닌 다미로였다. 자정이 다 된 시간. 행랑의 식구들이 늦게까지 집안일을 마치고 모두 잠자리에 든 시간.

다미로가 목욕을 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태익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문틈으로 손을 밀어 넣어 조용히 문을 열었다. 다미로의 벗은 어깨가 보였다. 늘씬하게 빠진 등이 보였고 기다란 뒷목이 보였다.

몇 분쯤인가, 태익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물소리만 내는 다미로의 벗은 뒷모습을 지켜만 보고 서 있었다. 서재에서의 기억……. 여름날의 어둑어둑해지던 초저녁의 그날……. 다미로의 떨리던 숨소리와 바르작거리던 작은 발, 손가락이 맛본 처녀의 밀지 속 그 안의 그 축축함과 뜨거움.

수줍어하는 다미로의 다리를 활짝 벌려 맛본…….

태익은 그 날카롭고도 강렬했던 자극을 떠올리며 굵은 숨을 삼켰다. 그 순간이었다. 다미로가 욕간 통에서 일어나 뒤를 돌았다.

“……오라버 ……니!”

태익을 알아본 다미로의 표정이 그녀의 마음을 전부 대변하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그리움과 반가움, 설렘과 그리고 기대와 흥분……. 태익을 향한 모든 감정이 한 번에 쏟아져 나온 얼굴이었다.

가슴에 꼭 달라붙은 다미로의 어린 젖가슴은 풍만하면서도 탱탱했다. 이미 한 번 남자의 손을 맛본 다미로였다. 태익의 시선만으로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수건으로 가린 풍만한 가슴이 기대에 찬 숨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이리와, 다미로.”

태익은 부뚜막에 앉아 그녀를 불렀다. 욕간 통에서 나온 알몸의 다미로가 작은 수건으로 중요 부위만 가린 채 그에게로 다가왔다. 아궁이에서 나오는 불빛에 다미로의 젖은 몸이 번들거렸다.

마치 호수에서 금방 건져 올린 싱싱한 물고기처럼 느껴졌다.

“앉아.”

“……옷, 젖어요. 오라버니.”

태익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당겨 무릎 위로 앉혔다. 그녀가 가슴께에서 쥐고 있던 수건을 그는 망설임 없이 잡아당겼다. 한 손에 다 쥐어지지 않는 풍만한 젖가슴을 쥐어짜듯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착 감겨드는 젖가슴의 감촉에 그는 등 뒤로 전율을 느꼈다. 얼마나 그리웠었는지 몰랐다. 다미로의 가녀린 등을 가슴에 품었던 서재에서의 기억이 출장 내내 그를 고통스럽게 했었다.

“만져 보자, 얼마나 더 성숙해졌는지.”

“하…… 아…….”

발칙하게 고개가 빳빳해진 유두를 태익이 사납게 삼켰다. 동시에 손은 그녀의 매끄럽고 늘씬하게 뻗은 허리를 쓸고 내려가 허벅지 사이로 곧바로 파고들었다.

풍성한 음모를 한 번 손가락에 감아쥐었다. 오돌토돌 발기한 클리토리스를 단번에 중지와 약지 사이에 끼워 자극을 가했다.

“하읏!”

생각지도 못한 자극에 다미로가 그의 다리 위에서 허리를 재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바들바들 떨며 어찌할 바 몰라 하지 않았다. 대신 물에 젖은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쥐며 격하게 입술을 포갰다.

허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엉덩이의 오목한 부분을 바지 위 태익의 남성에 교합시켰다. 무시무시한 욕망의 파도가 태익을 덮쳤다. 하지만 다미로의 서툰 몸짓에 그는 이성을 상실하지 않았다. 그녀를 지배해야 하는 사내가 태익이었다.

다미로의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지배해 완벽하게 제 여자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더 컸던 것이다. 여체를 정복하고 싶은 정욕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다미로가 완벽한 제 여자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팽팽하게 부푼 젖가슴이 태익의 커다란 손아귀에서 마구잡이로 주물렸다. 수건은 벌써 바닥으로 떨어져 아무렇게나 너부러져 있지만 상관없었다.

태익은 다미로를 그대로 안아서 들었다. 그녀는 놀라지도 바동거리지도 않고 태익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독한 그리움과 설렘, 갈증이 해갈되길 열망했다.

태익의 방에서는 옅은 머스크 향이 났다. 그가 사용하는 이탈리아 퍼퓸 향기였다. 침대 위의 이불은 포근하고 청결했다. 그곳에도 태익의 체취가 가득했다.

입술이 사납게 포개어졌다. 마치 몇 날 며칠을 굶주린 맹수처럼 태익의 입술이 다미로의 입술을 삼켰다. 탱탱하게 부풀어 터질 것처럼 빵빵해진 젖가슴을 그가 억세게 주물렀다.

서로의 타액을 삼키고 입술이 짓무르도록 입맞춤을 나누던 태익의 입술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의 두 손이 다미로의 두 다리를 잡아 제 어깨 위로 걸쳐 놓았다.

매끄러운 셔츠의 감촉이 다미로의 발목을 예민하게 자극했다. 반쯤 나가 버렸던 이성의 작은 조각이 그녀에게 돌아왔다. 발가벗은 무방비 상태인 자신과 비교해 태익은 여전히 완벽했다.

흐트러짐 없는 머리, 넥타이를 풀었지만 베스트까지 완벽하게 갖추어 입은 태익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맞춘 채로 태익은 다미로의 다리를 넓게 벌렸다.

그녀의 까만 음모가 비 오는 정원을 밝힌 하얀 형광등 불빛에 파랗게 반짝거렸다.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밀지를 쓰다듬었다. 축축한 물기가 손에 묻어났다.

다미로가 호흡을 떨었다. 기대에 찬 그녀의 음부가 말랑말랑하게 부풀어 졸깃해져 가는 중이었다. 그의 손길을 경험해 본 몸이었다. 그의 손길에 어떤 쾌락이 있는지 그녀는 또렷이 기억했다.

불과 1달 하고 보름 전의 일이 아니던가. 다미로는 출장을 떠난 그를 기다리는 동안…… 그날만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그의 입술이 진분홍 유두에 닿던 순간의 그 짜릿함.

그가 유두를 삼켜 물고 빨아 당기는 순간 느낀 그 아득하고 통쾌했던 쾌감. 그의 눈앞에서 음부를 활짝 열어 보였던 부끄럽고도 에로틱했던 순간들.

그의 손가락이 졸깃하게 부푼 음순을 벌릴 때마다 느꼈던 낱낱한 손가락의 감촉과 그의 흥분된 숨소리. 다미로는 그녀답게 담담한 표정으로 그 모든 흥분들을 감췄지만 날마다 되새기고 되새겼었다.

내려다보는 태익의 얼굴이 어두워 다미로에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는 손길에서 굳은 결심이 느껴졌다. 그의 바지 지퍼 내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다미로의 다리가 더 높이 들려 올라갔다. 태익은 그녀의 등과 허리가 침대 헤드에 기대게 만들었다. 그녀의 발목을 다시 제 어깨 위로 올려놓았다.

열린 지퍼 사이로 그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미로는 “흡!” 하고 숨을 삼켰다. 질구에 닿은 그의 남성은 뜨거웠다. 단단하고 매끄러웠다. 그녀의 밀지 깊은 곳에서 뜨거운 액체가 솟았다.

태익의 귀두가 막고 있는 질구 사이로 질액이 흘러내렸다. 그가 귀두를 잡은 채로 질액이 흘러 미끄러워진 입구를 문질렀다.

“하……. 으…… 읏!”

다미로는 저도 모르게 한껏 벌어진 입술을 혀로 핥았다. 질구가 조여지고 엉덩이에도 힘이 들어갔다. 태익의 남성에 자극당한 질구가 움찔거렸다.

어서 빨리 그에게 꿰뚫리고 싶었다. 날카롭고 강렬하게 몸을 뚫고 들어올 그를 맛보고 싶어 다미로의 질구는 안달을 해 댔다. 사랑하고 열망하는 사내를 향한 순수하고 어린 다미로의 갈망이 온몸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태익이 제 어깨 위에 놓은 다미로의 발목을 억세게 움켜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귀두만 닿았던 질구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입구는 젖어 있었지만 뻑뻑했다.

하지만 귀두가 들어가자 순식간에 그의 남성이 미끄러져 빨려 들어갔다.

“하으윽!”

빨려 들어감과 동시에 다미로가 고통에 찬 신음을 이를 악물어 참아 냈다. 그녀의 엉덩이가 들썩이고 허리가 뒤틀렸다. 하지만 꼼짝할 수가 없었다.

태익이 그녀가 엉덩이를 빼지 못하도록 다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 하…… 하.”

사타구니와 사타구니를 완벽하게 맞물린 채로, 이불을 움켜쥔 다미로의 손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처녀막이 찢긴 날카로운 통증에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그녀는 태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격렬하고도 날카로웠던 통증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다미로의 입술은 어둠 속에서도 새빨간 색이었다. 태익이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렸다.

다미로의 음부를 콱 틀어막은 제 것을 확인했다. 뜨거운 뭔가가 또 맞물린 남성과 여성 사이로 흘러내렸다. 태익이 손가락으로 제 것을 조이고 있는 다미로의 질구를 훑었다.

끈적끈적하고 뜨거운 액체의 정체는 애액이 아닌, 그것과 섞인 피였다. 다미로의 처녀막이 찢겨 나갔다는 증거였다. 태익이 고개를 들었다. 다미로의 뺨과 감싸 쥐었다.

천천히 허리를 쳐올렸다. 다미로의 몸도 같이 튕겨져 올라갔다.

“하읏!”

그녀가 신음을 삼켰다. 한 번 더, 이번엔 조금 더 세차게 허리를 튕겼다.

“하윽!”

다미로의 묵지근한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아직은 쾌감보다 미진하게 남은 통증이 더 깊었다. 그러나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이 곧 그녀를 덮쳤다.

태익이 다미로의 뒷목으로 손을 옮겨 그녀의 상체를 더 바짝 일으켰다. 그리고 뒷목을 잡아당겨 아래를 보게 만들었다.

하!

놀란 그녀가 눈을 감았다.

“눈 떠…… 다미로.”

태익의 요구였다. 그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다미로는 눈을 떴다. 그곳에는 그가 있었다. 활짝 벌어진 음부에 꽂힌 태익의 남성이 보였다. 손가락이 아니라 그의 남성이 그녀의 은밀한 그곳을 천천히 들락날락거리고 있었다.

“하읏……. 하읏……. 하…….”

밀고 들어왔다가 그의 남성이 빠져나갈 때마다 서서히 짜릿한 전율이 시작되었다. 그가 다시 들어와 힘껏 사타구니가 부딪칠 때마다 다미로는 몸이 폭발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아, 하아, 하아.

누구의 숨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태익이 세차게 들어와 박혔다. 다미로는 그곳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힘차게 쑤시고 들어와 자신을 박아 넣는 태익의 몸짓이 죽을 만큼 좋았다.

까만 어둠이 하얗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서서히 찾아드는 중심을 관통당하는 쾌락에 다미로는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문이 잠겨 있어요.”

복도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온 오유미의 말에 태익은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불필요하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간신히 접고 객실로 돌아온 태익이었다.

불을 붙인 담배도 피다 말고서 심호흡을 몇 번 하고서야 고개를 돌릴 수가 있었다. 다미로와 한조가 단둘이 있던 객실로부터 억지로 시선을 잡아뗐었다.

오유미가 어깨에 걸쳤던 숄을 벗으며 침대 위로 앉았다. 얼굴에는 호기심과 재미있다는 표정이 역력한 채였다.

“마루야마 소위하고 마령 동지가 있는 객실 말이에요. 안에서 문이 잠겼더라고요.”

태익의 입매가 빳빳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오유미는 자기만의 상상에 빠진 듯 태익의 반응을 알아보지 못했다.

“만일, 마루야마 소위가 마령 동지와 오늘 밤 무슨 일이라도 치른다면……. 앞으로 정말이지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건, 저뿐인가요?”

새벽 1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14시간을 넘겨 가는 지루하고 지루한 기차 여행길에 오유미의 호기심이 지나쳤던 것이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발동한 연적에 대한 경계심일 수도 있었다.

“안 대장님, 제 생각엔 말이죠. 이번 기회에 마령 동지를 제대로 활용할 계획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일 것 같아요.”

상해의 댄스홀에서 태익이 다미로를 대신해 남성 휴게실로 들어간 것을 아는 사람은 오유미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곽이나 김산이 입을 닫고 있는 것과 달리 오유미는 뭐든 알아내고 싶었다.

“그저께 일에서…… 마령 동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으신 이유는 몰라도, 유 선생님께서 아시면 대장님이 곤란하실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어쩜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태익은 일순 머릿속이 지옥 불에 담가졌다가 꺼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능숙하게 감정을 감추고 오유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무슨 소리지?”

그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는 그 어떤 때보다도 차가웠다. 여유를 가장한 나른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얼음송곳처럼 싸늘하고 날카로웠다.

“총을 쏘기로 한 사람……. 마령 동지였잖아요. 그래서 우리 동지들과 합류한 거고요. 그런데 정작 안 대장님께서 그날 마무리를 하셨어요.”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

태익의 차가운 미소 속에 돋친 가시를 오유미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대략 그녀가 짐작하길, 마령이 이번 일에 적절하지 않았다고 태익이 판단을 내렸거나 마령을 신임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녀를 작전에 합류시키긴 했어도 막판에 그런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즈시케를 처벌할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을 테니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안태익의 동생이라는 거짓말로 일본군 소위에게 붙는 여자를 어떻게 완벽히 신임한다는 말인가.

그녀가 마루야마와 함께 경성으로 돌아가는 일은 그들의 작전 일부가 아니라고도 했는데.

“어쨌든…….”

오유미가 벗어 둔 숄을 차곡차곡 개어 무릎 위로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유 선생님께는 그렇게 보고 드릴게요. 마령 동지를 댄스홀 작전에서 활용하지 않은 이유는 마루야마 한조 소위 때문이라고요. 그 방향으로 활용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요. 또 그날 마루야마가 마령 동지 곁에 너무 들러붙어 있는 바람에 마령 동지의 동선이 움직이기 불편했다고도요.”

그녀가 자신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듯 고개를 야멸치게 끄덕거렸다. 자신의 짐작이 거의 확실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마루야마 소위가 마령 동지에게 아주 푹 빠져 있단 것은 사실이니까요. 마령 동지는 마루야마 소위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고요. 그러니…… 단둘이 있는 객실 안에서 문을 잠갔겠죠? 안 그래요?”

오유미의 확인사살에 태익은 희미하게 조소를 띄웠다. 심장이 불쏘시개가 된 것 같았지만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릎 위로 내려놓았던 책을 다시 든 태익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하얗게 뼈가 도드라지도록, 손등과 팔뚝에 시퍼런 힘줄이 불거지도록…….

기차는 심양역 도착을 불과 30분 남겨 두고 있었다. 마루야마는 다미로가 들어간 화장실을 흘끔거리다가 다시 지도로 눈을 내렸다. 그녀는 한조에게 아마도 배탈이 난 것 같다고 얘기했다.

다미로는 화장실 문이 잠긴 것을 다시 확인하고 창문을 살폈다. 혹시 몰라 객실의 문도 한조 몰래 안에서 잠가 놓은 상태였다.

상해 경찰국 놈들이 오유미 외에 누구 선까지 의심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마루야마가 보던 대륙 철도 지도를 다미로는 빠른 시간 안에 유심히 관찰해 놓았다.

천진에서 심양까지의 선로 중…… 기차의 속도가 줄어들 만한 지점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럴 만한 곳이 한 곳 남아 있었다.

심양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도시 다롄을 지나는 철로에 다리가 하나 있었다. 기차의 하중을 조심해야 하기에 다리를 건널 때에는 열차의 속도가 줄 수밖에 없었다.

다미로는 여자의 몸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크기의 화장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밤이라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지만 다행히 달빛이 밝은 날이었다. 저 멀리 300미터쯤 앞에 달빛을 반사한 수면의 반짝임이 눈에 들어왔다.

거추장스런 코트는 객실에 벗어 두었다. 하지만 통이 넓지 않은 치마가 거추장스러웠다. 다미로는 창밖을 살피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치맛단 옆 솔기를 뜯어 버렸다.

곧 다리가 나올 것이다. 다리 길이는 대략 180미터 가량 되는 것으로 지도에 표기가 되어 있었다. 치마 허리 속에 숨겨 두었던 총을 꺼냈다.

최창학이 구해 준 총은 일본군의 총이었다. 숙직실에 잠든 기차에 배치된 장교의 총을 하나 슬쩍해 왔다는 것이다.

토레가프 TT33. 러시아산 권총이었다. 총 8발의 총탄이 장착되어 있었다. 무게만 900g에 가까운 총에 소음기를 끼워 놓으니 더 무거웠다. 그러나 다미로는 총을 단단히 쥐고 차창 밖으로 머리부터 내밀었다.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다. 그러나 이젠 100미터쯤 앞으로 다리가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다미로는 잡을 수 있는 것을 단단히 잡고 몸을 끌어올렸다.

5년 동안 그녀의 총에 암살당한 사람은 6~7명 정도다. 1년에 많아야 1번에서 2번 암살을 목적으로 총을 쐈다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 1번을 위해 그녀가 해야 했던 일은 수십 가지였다. 대상의 활동 범위를 파악하고 그 주변을 탐색해야 했다.

담장을 넘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처음엔 손톱에 피멍이 들고 온몸에 멍이 빠질 날이 없었다. 총을 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암살의 시간과 장소만 잘 선택하면 되었으니까.

저격이라면 총을 쏘는 특별한 기술이 더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미로는 많은 훈련이 필요한 저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방식은 권총을 사용한 근거리 암살이었다.

총을 쏘는 일은 쉽다. 잘 조준하고 방아쇠만 당기면 되니까.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심리적 고통을 극복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공진과 제영을 쏴야만 했던 날.

그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두 사람 전부 빗맞게 쏘았지만, 다미로의 실력으로 비켜 맞추기가 쉬운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꼬박 한 달을 공포에 떨었다.

이제는 죽여야 할 사람을 쏘는 것뿐이라는 위로로 방아쇠를 당기는 일에 무감해져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일의 성패에 한해서는 언제나 두려움이 있었다.

내가 죽느냐, 상대를 제압하느냐. 두 가지 결과밖에 없었으니까. 특히나 지금 일은…… 경찰국 놈들 2명을 다리 위에서 처리하지 못한다면 태익이 위험해질 상황이었으니, 긴장감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창문에 발을 딛고 몇 초쯤 있었을까. 느려졌던 기차의 속도가 더 확실하게 줄었다. 다미로는 다리를 기차 지붕 위로 먼저 올려 몸을 끌어올렸다.

덜컹 덜컹 덜컹.

확연하게 느려진 속도에 지붕 위로 올라선 그녀가 뛰었다. 기관차 바로 뒤 칸 차량의 두 번째 객실. 지붕 바로 아래에 나 있는 환기구에 손을 끼워 넣었다.

덜컹 덜컹.

다리 위로 진입한 기차가 더 속도를 늦췄다. 타이밍을 맞춘 다미로가 환기구를 잡고 차창의 바깥 돌기에 발을 디뎠다. 머리칼이 바람에 날렸다.

총구를 유리창에 박았다. 차창 바로 옆에 붙어 테이블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놈의 머릴 먼저 쐈다.

풋슝! 챙!

소음기를 뚫고 날아가는 총알 소리와 유리창에 구멍이 나는 소리와 동시에 경찰국 요원이 쓰러졌다. 그리고 창 바깥에 붙은 그녀를 알아본 가즈시케의 경호원이 총을 뽑아드는 순간, 다미로의 총이 그의 이마를 쐈다.

유리창이 피로 얼룩졌다. 기차는 서서히 다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리 아래 시커먼 강물이 달빛에 반짝이며 일렁이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다미로의 다리가 위태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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