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2)

4

애증은 그림자와 같았다. 한낮의 그림자처럼 짧고도 강렬한 한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서쪽으로 해가 기운 후 나타나는 그림자처럼 길지만 옅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낮과 오후를 반복하는 것이 애증이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미움의 감정. 그래서 사랑했던 크기와 비례할 수밖에 없는 애증.

그러나 애증은 사랑의 부산물일 뿐이었다. 애증은 자신의 본질인 사랑을 넘어설 수 없었다. 태익의 다미로에 대한 마음은 그런 것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맑았다. 초겨울의 청아한 그 볕이 다미로의 청아한 어깨에 닿아 잘게 부서져 태익의 눈을 부시게 했다. 이불을 돌돌 말아 침대에 엎어진 채 깊게 잠든 다미로.

지쳐 잠든 다미로의 얼굴을 태익은 한참 동안 바라만 보았다.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숨소리조차 죽여 눈으로만 그 얼굴을 더듬었다. 아마 그녀는 정오가 되도록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관계를 가진 시간이 새벽 5시였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침대 모서리를 짚은 그녀의 팔에 힘이 빠질 때까지 사랑을 나눴다. 다미로는 거의 탈진 상태일 것이다.

한번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면 태익은 다미로가 탈진 내지, 탈수가 일어날 때까지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다.

그래서 태익은 그녀를 마시고 또 마셨다. 스무 살, 여름의 끝자락에 그녀를 처음으로 안았던 그날도 지금과 같았다. 다미로를 완벽하게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으니까. 보통의 집이었다면 벌써 시집을 가고도 남았을 나이의 다미로였건만, 그는 다미로를 신부로 맞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완벽하게 제 소유임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명확한 방법이 그것이었다. 그녀의 육체를 지배해 제 손길에 사무치도록 떨게 만드는 것.

힘에 부치고 버거워 다리와 팔을 후들거리면서도 자신을 받아 내는 그녀를 꼭 봐야만 했었다. 자신의 남성에 혹사당한 그녀의 은밀한 그곳이 헐어서 부풀더라도.

그래서 안타깝고 미안하더라도.

“소유는 불필요한 욕망이다, 다미로.”

“그래도 전 오라버니한테 소유 되고 싶어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지?”

“그건…….”

첫날 아침이었다. 스무 살 눈부신 다미로가 그의 침대 위 이불 속에서 수줍은 얼굴을 숨기고서 했던 말이었다.

“제가 오라버니를 소유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요.”

스무 살 다미로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태익은 알고 있었다. 태생이 다르다는 신분적 차이 때문이었다. 아직 어린 그녀가 넘기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신분의 굴레.

가진 것이 있고 없음의 차이에 불과한 그 굴레가 스무 살 다미로에게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한계선처럼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최순임과 관계된 이야기 중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거나.

설마…… 그런 것인가?

태익은 조심스럽게 잠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욕실로 들어가 뜨끈한 물줄기에 몸을 내맡겼다.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정말로 다미로가 최순임에 대해서 무엇인가 알고 있다고 해도……. 그녀에 관한 얘기 중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현재로서는 최순임의 생사조차도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또 설사 다미로가 확인한 사실이 있거나 최순임의 상태를 알았다고 해도 어째서, 그토록이나 열망하고 사랑했던 안태익을 배신하고, 그의 동지들의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해야만 했던 것인지. 태익은 여전히 그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일본 조계지 군경의 동태는?”

호텔 리즈 캐슬의 레스토랑 건물 1층에 있는 카페였다. 태익은 신문에 시선을 둔 채 커피 한 모금을 삼켰다.

“말 그대로 우왕좌왕이죠.”

맞은편에 앉아 입에 맞지 않는 빵과 계란프라이로 식사를 하던 이곽이 대답했다.

“공진이하고 제영이는 소주로 출발했나?”

“어젯밤에 바로 보냈어요. 모레쯤이면 도착했다는 연락이 올 거구요. 최창학 동지하고 김산 동지는 북경으로 가서 그곳에서 열차를 타고 경성으로 들어오기로 했습니다.”

“계획대로군.”

“네, 그런데 어쩌면 같은 열차를 탈지도 모르겠어요, 우리하고.”

무릎 위로 얌전하게 펼쳐 두었던 면 냅킨으로 곽은 입술을 깨끗하게 훔쳤다.

“마령…… 아니 다미로는…… 요?”

“응?”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인지. 다미로에 대해 묻는 곽의 말에 태익은 잠시지만 눈을 깜빡였다.

“다미로요. 호텔에 체크인 한 거, 도련님께서 확인하셨는지 궁금해서요.”

곽이 알기로 다미로와 태익은 일부러 같은 호텔에 방을 잡았다. 한조 때문이었다. 꼭 한조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상해라는 거대한 다국적 도시에 다미로를 혼자 둘 태익이 아니다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으니까.

5년 전이라면 몰라도 이번엔 굳이 그녀를 보호하려 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같은 호텔을 잡은 것은 그렇다고 쳐도……. 어젯밤의 그 일은.

“다미로…… 그 녀석 말입니다, 도련님. 혹시 용서하신 거세요?”

곽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5년 전의 그 일 이후로 다미로를 경무국에서 빼오기 전까지. 그는 한 번도 그녀의 이름을 태익 앞에서 들먹인 적이 없었다.

간혹 아무것도 모르는 집안 식솔들 때문에 곽은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다. ‘상해로 공부하러 간 우리 다미로……’ 어쩌고 할 때마다 모골이 송연했다.

그런데도 지금 태익에게 그녀에 대해 묻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어제 태익의 행동.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만 빼고 말이다.

암살자가 바뀌었다는 것. 총잡이 마령이 하기로 했던 일을 태익이 했다는 것. 모든 계획이 철저하게 짜여 있었어도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이었다.

곽은 웨이터가 주전자를 내밀자 커피 잔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 그러면서도 제 주인 태익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태익은 신문에만 눈을 꽂고 있었다.

“……도련님.”

곽이 다시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태익이 그제야 신문에서 눈을 떼더니 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곽 또한 고집스럽게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태익이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커피가 채워진 잔을 들며 소파에 등을 묻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태익이 물었다. 어떤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눈빛이었다.

“어제……. 우리 모두 각자 맡은 역할이 달랐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다 위험한 일이었고요.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일은…… 다미로가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태익이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걸어 가슴 앞에서 손깍지를 꼈다. 일단은 곽의 말을 들어 주겠다는 의미 같았다.

“물론…… 저도 그 녀석한테 그런 일을 시킨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도련님 입장을 생각하면 다른 방도가 없다는 걸 아니까. 다른 말씀 못 드렸고요. 유 선생님께서는 다미로가 주옥 선생님 딸인 걸 모르시지 않습니까.”

공진과 제영에게는 곽이 신신당부를 했었다. 다미로가 ‘경성상회’ 안태익의 집안 식솔이라는 사실은 비밀로 해 달라고 말이다. 태익과 한자리에서 공진과 제영이 총을 맞았다.

그런데 태익은 멀쩡했고 두 사람은 저승길로 갔다가 되돌아오지 않았던가. 그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태익이 밀정으로 오해 받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심지어 곽은 다미로가 일부러 그런 점을 노리고 공진과 제영을 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까지 했었다. 태익도 같은 생각이었고 말이다.

“도련님께서……. 그 녀석 대신 일을 처리하신 이유, 저는 모르겠습니다.”

곽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확신 받고 싶은 것일 수도 있었다. 태익이 다미로를 용서했다고 말이다. 그래야 자신도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다미로에게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소문처럼 친일파 글쟁이 장위건의 꼬임에 넘어갔던 것이 아니라. 피치 못할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믿음이었다.

곽이 아는 다미로는 그런 조급하다 못해 성급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스무 살, 어렸지만 사리분별을 못할 정도로 어리지 않은 나이였다.

하물며 다미로는 이화전문학교에 갈 정도로 똑똑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사내에게 품은연정으로 사람을 쐈다고? 그것도 신처럼 떠받들었던 제 주인의 동지들을?

지나가던 개가 웃을 거라고! 곽은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었다. 그렇지만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5년이란 시간 동안 소문은 진실이 되어 있었다.

이제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 다미로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배에서 예상에 없었던 한조를 만났을 때에도, 어저께 저녁 시장 거리에서도…….

다미로의 총명함과 재치는 곽과 함께 22년을 자라난 그녀가 확실했다.

“도련님.”

곽은 진중한 표정으로 태익을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태익은 말이 없었고 표정에서는 더더욱 아무것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딸랑딸랑 딸랑.

웨이터가 손님을 찾는 벨을 울리며 돌아다녔다. 그때였다. 태익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신문을 말아 곽의 이마를 툭! 쳤다.

“이심전심.”

“예?”

황망한 눈으로 곽은 태익을 올려다봤다. 그렇지만 태익의 대답은 그뿐이었다. 그는 커피 값과 곽의 식사 값을 치르고 카페가 있는 건물을 나갔다.

호텔 2층으로 올라온 태익은 자신의 방에 열쇠를 꽂는 척하면서 주변을 훑었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바로 옆에 위치한 다미로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가 비어 있었다. 그가 화장대 위에 얌전히 개켜 놓은 다미로의 옷은 그대로였다. 욕실 문을 확인했다. 닫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딸깍.

노크 없이 문을 열었다. 태익은 문설주에 비스듬히 기대어 샤워기 아래에서 뜨거운 물을 맞는 다미로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피부가 희고 살성이 여렸었다.

크고 작은 멍도 잦았고 피부가 얇은 곳엔 가느다란 실핏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기도 했었다. 그 때문인지, 그와 사랑을 나누고 난 후 그녀의 몸엔 늘 붉은 꽃이 여기저기 피었다.

탐스러운 새하얀 엉덩이에도 탱글탱글하게 솟은 젖가슴 위에도, 목덜미에도.

태익은 다미로의 엉덩이에 핀 붉은 열꽃과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든 피멍을 보면서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열꽃은 밤새 그가 남긴 키스마크일 것이다.

허벅지 안쪽의 작은 피멍은…… 그녀의 음부를 그의 남성이 꿰뚫을 때, 사타구니가 맞부딪치며 남긴 것이 분명했다. 이른 아침까지 격렬하게 이어진 관계의 흔적이었다. 태익이 다미로가 제 여자임을 새겨 넣은 자국이었다.

머리에 거품을 잔뜩 얹은 다미로의 손이 수도꼭지를 찾아 벽을 더듬었다. 태익은 재킷을 벗어 욕실 바깥으로 던졌다. 구두를 벗고 셔츠 소매를 걷으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 대.”

벽의 샤워기 고정 틀에서 샤워기를 꺼내 그녀의 머리에 대고 물을 틀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마구 흘러내리는 비누 거품을 태익이 걷어 냈다.

“오…… 오라버니!”

뜻밖의 상황에 다미로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당황해했다. 하지만 태익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머리 위 비누 거품을 걷어 냈다.

“비누는 먹으라고 있는 게 아냐, 씻으라고 있는 거지.”

그녀의 입술에 얹힌 거품도 손가락으로 꾹 눌러 닦아 냈다.

“돌아.”

“잠, 잠깐만요. 제가…….”

빙글 다미로의 어깨를 잡아 뒤로 돌려 물을 뿌렸다. 물이 그에게 사정없이 튀지만 태익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상관이 있는 쪽은 다미로였다.

“아니, 저기 제가 할 수 있어요, 오라버니.”

“부끄러워서 이러는 거면……. 그건 좀 우습지 않나?”

다미로의 본심이 들켰다.

“부끄러운 게…… 당연하죠. 오라버니는…….”

비록 젖어 있지만 그는 완벽했다. 호텔 메이드가 잘 다려서 온 하얀 셔츠에 단정한 베스트, 그리고 날카롭게 날을 세워 다린 짙은 색 슈트 바지까지.

함께 알몸으로 있을 때와 달랐다. 거의 대부분 그녀가 먼저 흐트러질 때까지 태익은 별로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

그런데 그가 느닷없이 샤워기 물을 잠갔다. 다미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팔과 손으로 가슴과 밀지를 가리며 황당해했다. 그러나 태익은 샤워기를 든 채, 샤워부스에 여유롭게 어깨를 기대어 섰다.

“그런데 오늘 새벽까지는 전혀 안 부끄러워하던데. 온갖 야한 짓거리들은 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그건!”

큭큭.

태익의 짓궂지만 다정한 목소리에 다미로는 눈을 피하면서 빨갛게 온몸을 붉혔다.

옷을 입고 돌아서니 태익은 소파 팔걸이에 앉아 있었다. 다미로가 머뭇거리며 그를 보자, 태익이 와서 앉으라는 고갯짓을 했다. 그녀가 자못 긴장한 숨을 삼키며 소파에 몸을 앉혔다.

그러자 태익이 두툼한 소파 팔걸이를 넘어와 그녀의 등을 안고 그의 허벅지 사이에 다미로 끼워 넣었다.

“먹자.”

다미로가 욕실에서 물기를 정리하고 나오는 사이에 그는 룸서비스를 불러 놓았다. 상해의 유럽식 호텔이기에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그녀가 어색하게 포크를 집어 들자, 그가 그녀의 머리 위로 수건을 씌웠다.

슥슥슥, 슥슥.

태익이 수건으로 다미로의 머리칼에서 물기를 털어 냈다.

새벽녘, 그녀의 내부 깊숙한 곳을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던 태익이 말했었다. 헐떡이며 그를 받아 내던 다미로의 귓가에 그가 속삭였다.

“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다 내 소유다, 다미로……. 그러니 내 허락 없이는…… 어떤 것에도 목숨을 걸지…… 마라…….”

뭉근하게 밀고 들어와 발가락 끝까지 저릿하게 만들던 쾌락 속에서 다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 채였다. 샤워기 아래에서 뜨거운 물을 맞고 정신이 들고서야 그녀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오라버니.”

어색한 포크질을 하던 다미로가 먼저 입술을 열었다.

“경성으로는 어떻게 가실 거예요? 마루야마 소위가 오라버니께서 상해에 다녀간 것을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돌아가는 배에 이엽이란 이름으로 올랐다가, 혹시나 마루야마가 승선명단이라도 확인하려고 든다면…….”

다미로가 잠시 그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 말을 멈췄다. 태익은 여전히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물기를 털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미로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태익의 마음에 대한 섣부른 기대, 이른 아침까지 이어졌던 격렬했던 관계를 잊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진심이었다. 등에 느껴지는 태익의 따뜻한 체온에 마음을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해서 드리는 말인데요. 제 생각엔 차라리 기차로 돌아가는 게 어떤가 싶어서요.”

다시 포크질을 시작하며 다미로는 하려던 말을 마저 흘렸다. 태익이 그제야 그녀의 머리칼을 말리던 수건을 바닥으로 던져 놓았다. 그의 손이 다미로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젖은 머리칼을 올려 그녀의 뒷목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닿은 자리에서부터 아래로 짧고 강렬한 전율이 다미로의 몸을 관통했다.

순간, 그녀의 눈이 침대로 향했다. 매트리스에서 반쯤 벗겨진 침대보가 눈에 들어왔다. 새벽까지 이어진 격렬했던 정사의 흔적이 고스란했다.

정신과 육체가 전부 태익에게 함몰되어 그에게 지배당했던 흔적이었다. 스무 살, 그 이전부터 태익은 다미로의 모든 것이었다. 그 이전, 그의 손이 닿기 전부터 그녀는 이미 그의 노예였었다.

“오라버니…….”

하지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됐다. 태익이 위험해질 것이라는 예감에 다미로는 결심을 굳혔다.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하겠다는 제 속죄의 방식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돌아갈 때는 저와 따로 가는 편이 낫겠어요.”

다미로는 그를 돌아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태익이 그녀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어 천천히 등받이로 기댔다.

“못 미더우시다면 공진이나 제영일 붙여 두셔도 무방해요.”

그녀는 어젯밤의 일들을 아침에 눈을 뜬 직후부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다미로는 자신이 태익의 곁에서 최대한 떨어져 있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는 총잡이 마령을 단죄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오히려 총잡이 마령을 단죄가 아니라 보호해 주고 있는 꼴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보호도 모자라, 그녀가 해야 할 일을 그가 직접 대신하게 만들었다.

“……이유는?”

등 뒤에서 낮게 들려오는 태익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진심으로 이유를 묻고 있다는 뜻이었다.

“오라버니께…… 더 이상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진심 이상의 변명은 그녀가 알기로 없었다. 더욱이 왜곡되어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진심이라면, 지금으로서는 더욱 적절했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말은 그를 위해서라는 말도 되겠지만, 그의 말처럼…….

“이제 와……. 나한테 네가 선을 긋겠다!”

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니까.

“왜?”

다시 묻는 그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미로는 속으로 깊은 숨을 삼키며 역시 무뚝뚝하게 말을 받았다.

“마쳐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와의 관계는 오늘 새벽으로 끝을 내야겠다고 다미로는 마음을 다졌다. 처음 경무국에서 그의 손에 의해 빼내어졌을 때, 그때의 생각이 잘못된 선택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잘못했다고. 오라버니를 배반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묻어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지 말아야 했었다는 것을 다미로는 뒤늦게 알아챘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증오하는 것이 가슴 아파서, 변명처럼 한다고 했던 말이 태익을 위험에 빠트릴 것임을 그땐 미처 몰랐었다.

안태익이 어떤 남자인지. 아무리 그가 안다미로를 증오한다고 해도 그는 절대 자기 손으로 그녀를 사지로 몰아넣을 남자가 아니었다. 한때 제 사람이었던 사람에 대한 그의 의리는 그런 것이었다.

사랑이 애증으로 변질되었다고 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맺은 의리는 절대로 버리지 않는 남자가 안태익이라는 남자였다. 희생이 따르는 많은 일에, 그는 희생되는 동지들의 생명에 늘 죄책감을 느꼈으니까.

그가 하던 일을 다 몰랐던 그 시절에도 다미로는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춰진 그 슬픔을 읽어 낼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안다미로에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우를 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다미로를 사지로 몰아넣는 대신, 그 사지에서 빠져나올 능력이 있는 태익 자신이 그녀 대신 사지로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는 것을 다미로는 알 수가 있었다.

“그 일이…… 누굴 위해 하는 일인지 물으면 대답할 건가?”

그가 다시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천천히 묻는다. 다미로는 여전히 그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당연히 저 자신을 위해서겠죠.”

다미로는 이성을 다잡았다. 그에게서 최대한 멀어져야 했다. 태익을 배반했던 5년 전의 그 일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깨닫게 해 줘야 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야겠다고 다미로는 결심을 굳혔다.

“그래?”

그가 짧게 물었다. 다미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의 다리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태익과 시선을 맞췄다. 여기에서 눈길을 피한다면 그는 의심을 할 것이다.

태익의 강렬한 눈빛이 다미로의 눈동자를 꿰뚫었다.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 걷어 올린 그의 셔츠 소매가 아직 젖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칼에 묻어난 물기로 그의 하얀 셔츠가 얼룩져 있었다.

그럼에도 태익은 완벽했다. 그녀의 속내를 알아내겠다는 깊은 눈동자도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어 생각에 잠긴 얼굴도 그는 언제나처럼 완벽했다.

그런 태익이 자신의 사내라고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감히 열망하는 마음도 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처음 그녀를 안아 주었을 때.

착각을 했었다. 자신의 남자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어쩌면 그를 배신하는 모양새를 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 선택을 했던 이유는.

절망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언제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던 태익에게 겨우 손이 닿았던, 느꼈던 그때에 느낀 그 절망감. 초라한 자신에 비해 너무나도 높았던 제 주인에게 겨우 사랑을 얻었다고 생각했건만.

어렵게 얻은 사랑은 결국 박살이 날 수밖에 없다는 그 깊은 절망. 자신이 그에게 원수의 딸…….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태익이 원수의 딸과 정사를 나눴다는 죄책감을 갖는 것이 싫었다. 두 사람이 열렬히 나눈 사랑까지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과거에 제 사랑이 갈가리 찢기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5년 전, 그녀의 선택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다미로는 태익의 강렬하고도 매서운 눈빛을 받아 내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켜쥐며 손을 뒤로 감췄다. 태익이 천천히 물어 왔다.

“그 일이 어떻게 해서…… 너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인지, 나는 통 모르겠는데.”

“……?”

그가 하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 듯 말 듯, 다미로는 순간 머릿속을 헤집어 드는 생각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말씀…….”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의 말끝이 잘렸다.

똑똑똑.

재차 두드리는 문소리에 태익이 다미로와 마주했던 시선을 거뒀다. 그가 몸을 일으켜 문가로 다가갔다. 방문에 작게 난 외시경에 눈을 댔다.

마루야마 한조.

허리를 세운 태익이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았다. 그리고 다미로를 돌아봤다. 도대체 누가 찾아왔다는 것인지, 조금은 놀란 다미로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조가 다미로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벌써부터 태익은 눈치를 채고 있었다. 솔직히 몰랐다면 바보로 보일 지경이지 않던가. 한조는 자기 속내를 능숙하게 속일 수 있는 사내가 아니었다. 경찰 집안에서 태어나 군인으로 자라난 사내였다.

그러면서도 정치에는 관심 없이 오직 군인의 의무에만 충실했던 사내. 군인의 충실함으로 전쟁터에서 더 잔인할 수밖에 없었던. 하지만 사업가적 재질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태익은 그런 한조와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속내를 감추는 일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어디 속내만 감춘다 뿐인가, 감정을 위장하고 상대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일에도 능란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필요한 만큼 드러내는 일에도 능했다.

달칵.

“소위.”

소위라면!

그가 문을 열면서 낮게 뱉어 낸 이름에 다미로는 순간 발이 얼어붙었다.

“아……! 안 사장님…….”

한조!

“걱정이 되어 오셨나 봅니다? ……그 걱정, 해 주시지 않아도 될 뻔했는데.”

태익의 여유로운 목소리에 다미로는 배스 가운의 허리띠를 재빨리 다시 한 번 단정하게 묶었다. 그가 문을 가로막은 몸을 비스듬히 틀어 옆으로 비켜섰다.

한조가 조심스럽게 태익을 스쳐 방으로 발을 들였다.

태익은 안으로 들어선 한조의 어깨 너머로 다미로와 시선을 맞췄다. 그의 입술은 늘 그랬던 것처럼 여유롭게 반호를 그려 웃고 있었다. 그렇지만 눈빛은 매서웠다.

제 암컷에 대한 소유를 주장하는 수컷의 눈이었다. 위험스럽게 빛을 내고 있었다. 한조가 다미로에게 어색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어젯밤엔… 경황이 없어…… 미처 바래다 드리지 못했군요. 미안했습니다.”

한조의 눈은 다미로에게 박혀 있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는 다미로를 보는 순간 등 뒤의 태익을 잊었다. 태익이 문을 열어 준 순간 당황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여동생의 방에 있는 오라비를 이상하게 여길 것만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한조는 다미로와 마주 서는 순간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상황이 그땐 그랬으니까요. 그보다 소위님은…… 괜찮으신 건가요? 안색이…….”

다미로는 아주 잠시 어색해했다. 그러나 곧 태익에게서 눈을 떼어 한조와 눈을 맞추며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아마도 한조가 어젯밤 가즈시케가 총을 맞은 현장에서 마주쳤던 자신을 걸려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까지 찾아올 정도로 마음에 걸렸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하면 어떨까?

다미로는 번뜩이는 생각에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지그시 물었다. 경성으로 돌아가 다시 태익에게 붙들리더라도 일단은 그의 곁에서 최대한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또한 태익과 한조가 한 배에 타지 않게 할 방법이 생각났던 것이기도 했다. 태익은 상해에 이엽으로 들어왔으니 이엽으로 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괜찮습니다. 걱정해 줘서 고맙습니다, 다미로 양.”

한조가 차갑게만 느껴지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드리웠다. 다미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시다면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부탁…… 제게 말입니까?”

한조가 반색을 했다. 벽에 비스듬하게 어깨를 기대있던 태익이 주머니 속으로 갈무리한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겉으로는 평온했다.

“오라버니,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어요? 소위님과 단둘이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한조가 눈썹을 밀어 올렸다. 태익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주머니에 갈무리했던 손을 빼 가슴 앞으로 단단하게 팔짱을 꼈다. 걷은 소매 위 팔뚝에 근육과 힘줄이 솟았다.

화가 났다. 웬만한 일로는 미간을 찡그리는 일조차 없는 안태익이 화가 난 것 같았다. 다미로의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그렇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라버니?”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다미로는 태익을 재촉했다. 그가 벽에 기대었던 어깨를 천천히 떼어 냈다. 오만한 걸음으로 의자에 다가왔다. 그리고 걸쳐 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대로 방을 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다미로의 착각이었다. 그가 방문을 열고 그 앞에 멈춰 섰다.

“아……!”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다는 듯 그가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다미로.”

싸늘하다 못해 파랗게 얼려 버린 눈빛과 다르게 그는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

“저기 화장대 서랍 안에, 속옷 새것으로 사다 놨다. 입던 게 어젯밤에 못 쓰게 된 것 같아서.”

그가 웃었다. 순간 다미로는 온몸에 시뻘건 열이 올랐다. 그가 의도적으로 어젯밤을 상기시키려 하는 말임을 알아서였다. 한조의 미간이 움츠러들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가 뒤를 돌아봤을 때는 벌써 태익이 방을 나간 후였다. 다미로는 손가락을 지그시 말아 쥐었다. 태익의 입술에 물리고 빨린 배스 가운 안쪽의 유두에 쓰라린 통증이 들었다.

* * *

“경성으로 돌아가시면 난감해지시겠지만…… 당분간은 이대로 놔두시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상해를 출발하는 기차 안이었다. 특5호실.

오유미와 태익, 이곽과 오유미의 식모. 그리고 김산과 최창학. 5호실의 인원은 총 6명이었다.

“이렇게 기사까지 나갈 줄은 미처 생각 못 하고 했던 말인데…… 아무튼 죄송해요, 안 대장님. 그래도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것만은 꼭 알아주세요.”

“우리 도련님께서 알아주신다고 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유미양.”

곽이 부루퉁하게 입술이 부어서 말했다. 기차 벽에 고정된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상해판 ‘타임지’에 실린 기사 때문이었다.

오유미가 예상한 대로 떠들기 좋아하는 경찰대장이 경찰서에 출입하는 기자들에게 말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빨간 입술 양끝을 올려 환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안 대장님하고 이곽 씨는 그렇겠네요. 그렇지만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한테 오르내리면 내릴수록, 대장님의 알리바이가 확실해지는 거니까…… 너무 우울하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우울해요? 누가 말입니까?”

“어머! 안 우울하세요? 당대 상해 최고의 여배우가 결혼설이 났는데?”

컥!

이곽은 오유미의 뻔뻔스러움에 말문이 막혔다. 사실 상해 타임지의 오유미 결혼설 보도 이유는 따로 있어 보였다. 일본 조계지 경찰서장의 꼼수 같았다.

가즈시케의 암살 기도에 여론몰이를 당하지 않기 위한 발악이었을 것이다. 겨우 여배우의 스캔들 따위로 막아지지 않을 얘기지만 말이다. 그나마 경찰서장에게 다행인 사항은, 가즈시케가 즉사하지 않고 혼수상태라는 사실이었다.

총알이 왼쪽 가슴으로 들어가 심장으로 이어지는 대동맥을 스친 탓에 출혈이 컸지만 아깝게도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더없이 잘된 일이겠지만, 약속보다 1분가량 일찍 정전이 된 탓이 컸다.

태익이 미처 가즈시케의 위치를 다 파악하기 전에 불이 나갔다. 눈이 어둠에 익기도 전에 태익은 가즈시케가 앉아 있던 위치를 기억해 둔 것만으로 일을 처리해야만 했던 것이다.

조선인과 중국인을 막론하고 가즈시케가 죽음으로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할 일이었지만, 아깝게도 성공 여부는 불투명하게 된 상황이었다.

“어디 가세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태익에게 오유미가 물었다. 단장을 챙겨 일어선 태익이 그녀를 돌아봤다. 그의 눈빛이 무감했다. 애써 감정을 누르고 있음을 곽만은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당신한테 일일이 다 보고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오유미.”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현이었다.

스캔들도 아니고 결혼설이라니. 태익은 사생활이 깨끗하기로 유명한 저명인사가 아닌가. 조선뿐 아니라 일본과 북경에서도 그는 사생활이 깨끗한 1등 신랑감으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이환을 통해 조선과 일본의 여러 가문에서 중매가 들어오지만, 태익은 대부분 거의 거절을 했었다. 곽이 알기로 단 2번. 차마 거절하지 못했던 자리가 있었는데.

그중 한 번이 유 선생이 주선했던 오유미와의 자리였다. 그리고 한 번은 5년 전이었다. 정낙균 남작의 장녀와의 혼담이었다. 딱 잘라 거절할 수 없던 자리였다.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정낙균과 ‘미나카이 백화점’의 지분 싸움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분 싸움에서 승리를 한 태익은 바로 그 혼담을 없던 일로 해 버렸다. 혼담이 오가던 3개월 동안 태익은 정낙균의 장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도련님……! 저, 저기……!”

그들이 있던 열차 앞 차량은 식당 칸이었다. 식당 칸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곽이 말을 더듬었다. 태익의 눈동자가 파랗게 얼어붙었다.

“혹시 아셨어요? 그래서 배편 취소하고 기차로 돌아가시기로 한 거셨어요?”

놀란 곽이 묻지만 태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식당 칸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다미로와 한조는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곡선 구간을 지나는지 기차가 덜컹거렸다.

다미로의 물 잔이 그녀의 치마폭으로 기울었다. 한조가 팔을 뻗었지만 태익이 먼저였다.

“우연치고는 아주 억지스러운 풍경입니다, 마루야마 소위.”

그가 다미로의 물 잔을 한조를 향해 들어 보이며 눈을 찡긋거렸다. 태익을 등지고 있던 다미로는 빳빳하게 어깨를 경직시켰다.

“배편으로 경성에 돌아가실 거라, 얘길 들었는데. 같은 기차에 탔을 줄을 예상 못 했습니다.”

한조가 자리에서 일어나 태익을 맞았다.

“그러게요. 하필 이 녀석이 설사병이 생겨서는. 속이 불편해서 뱃멀미는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하지 뭡니까.”

그가 곁에 서 있던 곽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순간 곽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으로 한조를 향해 비실비실 웃어 보였다. 시시때때로 태익에게 거짓말이 필요한 순간에 곽은 적절하게 무너져 줘야만 했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 다미로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곽의 눈에 들어왔지만, 한조는 알아채지 못했다.

“식사가 아직 다 안 끝난 것 같은데. 함께 마저 할까요?”

태익이 천연덕스럽게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 위의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곽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알아서 주문해.”

말은 곽에게 하지만 시선은 한조에게 둔 채였다. 설사병에 걸렸다던 곽에게 음식 주문을 시키면서 말이다. 거짓말임이 분명한 거짓말이 탄로가 나도 상관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럼 이쪽으로…….”

한조가 좌석 안쪽으로 몸을 비켰다. 태익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그러나 태익은 보란 듯이 다미로 옆으로 몸을 앉혔다. 잘빠진 슈트 재킷의 단추를 풀며 그녀에게 꼭 몸을 붙여 앉았다. 한조의 눈동자에 날카롭게 날이 섰다.

“우린 평양에서 내릴 겁니다. 마루야마 소위는 경성역이 도착역입니까?”

“네. 다미로 양께서는 경성에서 내리실 예정이시라니. 제가 그 일정에 제 일정을 맞췄습니다.”

한조가 경직된 표정으로 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제 호텔에서 다미로가 말하길, 오라비 태익이 그녀를 억지로 상해의 대학에 보내려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자신은 대학 공부를 더 하길 원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그저께 외탄의 호텔에서 겪은 일 때문에 상해가 싫다고 했다. 그리고 세상 어디에도 완벽하게 안전한 곳은 없지만, 인종박람회장 같은 상해는 너무나 싫다고.

그러니 오라비 몰래 경성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만일 한조가 경성으로 돌아갈 계획이 자신과 맞는다면 함께 가고 싶다고 다미로는 그에게 말했다.

아양을 떨듯 살포시 웃지도 않았다. 홀리듯 웃음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저 그에게 차를 따라 주며 그녀 특유의 무표정함으로 말했었다. 그런데도 한조는 그녀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인지 자신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 안에 자신을 감춘 모습. 타인에게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자기 자신의 본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다미로의 표정이 한조가 보기에는 그랬다.

“이걸 어쩌나……?”

그런데 맞은편 다미로의 옆으로 앉은 태익이 서비스 된 음식에서 고개를 들어 만면에 웃음을 띤다. 그러나 그의 웃음 뒤에 도사린 공격성을 한조는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난, 마루야마 소위를 내 집안사람으로 들이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는데.”

태익이 무릎에 펼쳐진 냅킨으로 입술을 대충 닦아 내며 하는 말 때문이었다.

“앞서 간다고 욕을 한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마루야마 소위. 내 느낌이 그래서 하는 말이니까.”

한조가 물 잔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아뇨, 느끼신 대로 앞서 가시진 않으셨습니다.”

한조의 대답에 태익이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앞서 가지 않았다’라니. 대체 마루야마 한조가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인지. 태익은 재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드는 생각은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한조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큰 인물이었다. 그제 밤…… 전쟁과 다름없던 일을 또 겪었으니 상해가 지긋지긋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더군다나 태익은 한조가 다미로를 보는 눈빛을 알고 있었다. 처음 안국동의 집에서 다미로와 만났던 그날의 한조도…… 태익이 예전에 알던 한조와 달랐으니까.

무엇에도 무관심하기만 했던 한조의 눈빛이 고양이를 죽인다던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었다. 다미로를 향한 한조의 눈빛은 그날 그런 눈이었었다.

태익이 피식 웃었다. 다미로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한조의 목을 비틀어 버려야겠지만 그는 가벼운 한숨으로 살인충동을 억눌렀다. 주인을 지켜보는 곽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고 하니, 거 대단히 유감입니다, 소위.”

태익이 비뚜름한 웃음을 섞어 말했다.

“하지만. 그 느낌은 느낌으로만 끝내는 게 좋을 거요. 느낌을 현실로 만들려는 노력은 시작도 하지 말라는 게 내 진심 어린 충곱니다.”

협박이었다. 웃음을 섞어 태연하게 상대를 협박하는 방식은 태익이 곧잘 쓰는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업에 관련해서였다.

개인적으로 상대하는 인물에게 태익이 협박을 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태익이…… 무려 경무국장의 아들 한조를 상대로 경고성 협박을 날렸다.

곽의 눈이 절로 다미로를 흘깃거렸다.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다미로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다미로를 사이에 두고 한조와 태익이 불편해진 것이 맞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싸한 공기가 맴돌았다. 그때 때마침 기차를 돌아다니는 중국인 구두닦이가 곽의 발아래로 앉으며, 구두를 닦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신사복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곽이 돈이 있어 보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곽이 손을 내젓자 구두닦이는 미련 없이 가 버렸다. 다미로는 그 틈을 타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깐 실례할게요, 화장실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요.”

다미로가 벗어 두었던 낡은 헤링본 코트를 챙겨 들었다. 그러나 태익이 다리를 비켜 주지 않았다. 한조와의 눈싸움에서 그는 먼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오라버니.”

다미로가 단호한 어조로 태익을 불렀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다미로가 태익에게 저런 태도를 보인 것은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태익이 한조에게서 눈을 떼어 그녀를 올려 봤다.

무서운 눈빛이었다. 다미로의 심장이 아래로 떨어졌다. 곽의 미간은 점점 더 가운데로 모아졌다. 한조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주변의 공기가 냉랭하다 못해 살얼음판 같았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다릴 좀 비켜 주세요.”

다미로는 방금 전의 무례했던 말투를 고쳐 다시 태익에게 부탁조로 말을 했다. 그제야 그가 천천히 엉덩이를 뒤로 당겨 앉아 다리를 비켜 주었다.

곽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다미로는 그런 곽과 정면으로 눈길을 맞췄다. 숨기고 피하고 외면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가 도움을 청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 상대가 곽이 되리란 것은 매우 자명했으니까. 끝까지 태익의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해 다미로를 도와줄 사람은 이곽뿐이었다.

그녀는 식당 칸 문을 열어 밖으로 나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5년 전에 잘려 나간 손가락 마디 끝이 쿡쿡 쑤셔 왔다. 헐렁한 면 블라우스 안쪽의 유두가 쓰라렸다.

안경을 고쳐 쓰고 잠시 동안 기차 내벽에 머리를 기댔다. 기차를 순찰하는 일본 군인들이 그녀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지나쳤다. 다미로는 벽에서 머리를 떼어 냈다.

괜스레 일본군의 눈길을 자청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잠깐만…….

다미로는 방금 자신을 지나친 군인의 뒷모습에 미간을 가운데로 모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군인의 앞쪽으로 낯이 익은 얼굴이 보였다.

화려한 모자를 쓰고 강렬한 적자주색 투피스 위에 새까만 모피를 두르고 있는 요염하지만 나이대가 있어 보이는 여자……! 다미로의 눈이 여자에게 빨려 들어간 찰나였다.

“어이! ……어이!”

여자의 뒤에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내가 보였다.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휘익, 휘익’ 휘파람까지 불어 가며 팔을 높이 들어 흔드는 사내는. 허름한 옷차림을 한 김산이었다.

그때 여자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손을 흔들어 대는 김산 때문이었다. 다미로는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며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팔이 잡혔다.

“보자.”

반대편의 식당 칸에서 나온 태익이었다. 반항을 하거나 큰 소리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 다미로는 태익의 손에 이끌려 빈 특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녀의 안경 속의 눈동자는 매섭게 빛을 내며 여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드르르. 덜컥.

특실의 문이 닫히고 안에서 잠겼다. 다미로는 잡힌 팔을 태익의 손에서 비틀어 빼냈다. 태익이 슬며시 뒤로 물러나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갈무리했다.

화가 났지만 그녀를 다그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의도가 뭐야?”

그 대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미로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어떤 의도를 물으시는 건데요?”

“어떤 의도?”

“네.”

“나한테 의도를 갖고서 했던 행동이 상당히 여러 가지인 모양이구나.”

“당연하죠. 어렸을 때부터 아닌 적이 없었을걸요? 지금껏 그걸 모르셨어요?”

다미로가 도발하듯 되물었다. 태익이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려 피식 웃었다. 하지만 다미로는 여기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태익을 제게서 떨어뜨려야 했다.

솔직히, 그녀는 태익이 이 기차에 동승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한조와 함께 경성으로 돌아가겠다는 얘기는 했지만, 기차로 갈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태익은 그녀가 했던 기차 얘기를 염두에 두고 그녀가 자신과 함께 가지 않기 위해 기차로 움직일 것을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오라버니께서 제게 하시는 행동…… 집착으로 보여요.”

집착.

아닐 것이다. 다미로는 태익의 마음이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코웃음을 쳤다.

“집착?”

“기사 봤어요. 상해역에서요.”

태익이 다미로에게 갖는 책임감, 의무…… 그것에서 그를 자유롭게 해 줘야 하는 것이 옳았다. 동생으로 여기기 때문이건, 자신을 첫 남자로 받아들인 여자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건 간에 말이다.

“두 분. 잘 어울리세요.”

무슨 엿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만 해야만 했다. 태익이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하게 틀어 다미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순식간에 다미로는 목이 말라붙었다. 태익이 그 기사에 대해 변명 같은 것을 하리라고 예상하지는 않았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는 변명 같은 것을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가 하는 일이라면 이유와 명분이 있을 것이다. 결혼 상대가 필요했을 수도 있고 결혼을 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을 수도 있었다. 오유미는 그에 꼭 맞는 상대일 수도 있었고 말이다.

“두 분이 잘되시길 바랄게요.”

어쩌면 태익의 애증이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되돌아선 이유가, 다미로는 자신에게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녀가 그에게 갖고 있는 사랑과 존경, 미련이 그를 잡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태익의 바지 앞쪽이 타이트해졌다. 바지 주머니로 갈무리한 손이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움켜쥔 것이었다. 완벽하게 말끔한 그의 슈트 조끼 위로 단단한 복근이 느껴졌다.

뒤에서 조직원들을 움직이고 자금만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시 직접 몸을 바쳐 움직이고 있음을 증명하는 모습이었다. 위험에 단련된 몸, 체력, 그보다 더 강하게 단련된 정신력까지.

다미로는 살짝 드러난 그의 허리벨트에서 그 아래로 쭉 뻗은 긴 다리로 시선을 내렸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뛰어 대고 있었다.

다미로가 태익이 총을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된 시기는 그가 스물여섯 살 때였다. 그를 따라서 상해에서 3시간 거리의 ‘우전’에 갔을 때였다. 초기 청나라 때 건물이 그대로인 우전은 물의 도시였다.

400여 년의 세월을 지낸 청나라 건물들 사이에 위치한 작은 호텔에 머물렀었다. 그녀는 저녁에 잠이 들었다가 자정이 다 되어 잠에서 깨었다.

태익의 방과 그녀의 방은 욕실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었다. 한데 그의 방에서 두런두런한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아침 6시입니다. 야루아치 그놈과 강 선생 그 새끼가 드디어 접선을 한답니다.”

낯선 목소리였다. 그러나 뒤이어 바로 들린 목소리는 태익이었다.

“김 동지는 다리 아래에 배를 세우고 그 위에서 대기하도록. 방 동지는 국수집 1층에서 날 엄호하고.”

“네.”

“기관소총 확인해 보십시오. 30구경 캘리버입니다. M1919 A6 미국산. 부대장께서 러시아를 통해 주문하신 그 물건이 맞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기관소총?

살짝 열린 욕실 문틈 사이로 얘길 엿듣던 다미로는 놀란 숨을 삼켜야만 했다. 태익이 무엇을 하는지 다 알지 못했다. 그러나 느낌만은 있었다.

그가 오직 사업상의 일로만 중국과 일본, 미국, 러시아 등지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척추를 따라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위험하고 무서운 일이 아니던가! 스무 살의 다미로에게 태익이 하려는 일이란 아직은 그런 의미였다.

새벽 4시 반. 어스름한 동도 트기 전에 태익과 그들이 움직였다. 다미로는 방 안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성마르게 서성였다. 국숫집과 다리라. 엿들은 말로 장소를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전날 낮에 태익과 수로의 다리가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국수집에서 점심을 먹었으니까. 그들이 나가고 10분 뒤쯤 다미로는 결국 방문을 향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녀의 방문이 바깥에서 잠가져 있었다. 태익의 방과 통하던 욕실 문도 문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황망함에 다미로는 멍하게 서 있었다.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여명이 밝아올 때였다.

투다다다다다다다 다다. 탕탕. 탕탕!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였지만 총소리가 분명했다. 시간은 정확하게 오전 6시였다. 그로부터 1시간 후……. 태익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미로는 욕실 문 앞으로 달려가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심장이 폭발할 것처럼 뛰었다. 방으로 돌아온 사람이 태익이 아닐까 봐 불안한 심장박동은 시한폭탄의 초침처럼 소리를 냈다.

철컥.

안에서 잠겼던 그녀의 방 쪽 욕실 문이 열렸다. 순간 다미로는 얼음기둥처럼 얼어붙었다. 문이 활짝 열리고 그 문 뒤에는 태익이 서 있었다.

둘둘 말은 신문을 들고서 한 자락의 흐트러짐도 없이 다미로를 향해 서 있었다. 말끔한 슈트 차림 그대로……. 새하얀 셔츠에 꼼꼼하게 매듭진 넥타이까지.

그가 문간에 기대어 서서 여유롭게 담뱃불을 붙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미로를 향해 그는 입술 끝을 올리며 말했다.

“그렇게 두들겨서 어디 문이 부서지겠냐? 다미로.”

하얀 담배 연기가 아침 햇살에 하얗게 부서졌다. 태익의 몸에서는 희미하게 화약 냄새가 나고 있었다.

태익은 그렇게 강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마음이 불지옥에 타고 있어도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다미로를 다시 만났던 첫날…… 그가 보였던 광폭함이 그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그는 자기 감정을 누구보다도 잘 감추고 있었다.

방금도 한조와 신경전을 벌였지만 그는 자기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았다. 분명히 그는 화가 나 있었다. 그렇지만 한조를 상대하는 태익은 느긋함을 가장했다.

비록 한조와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기는 했지만, 안태익다운 처사고 행동이었다. 아무리 다미로의 부탁이 있었다고 해도, 보호자인 태익에게 일언반구 없이 그녀를 데리고 상해를 뜬 한조에게는 당연한 처사였다.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머니에 갈무리했던 손을 빼 재킷 안주머니를 뒤져 무엇인가를 꺼냈다.

“받아.”

“…….”

다미로는 그의 손에 들린 종이쪽지로 시선을 내렸다.

“……뭐예요?”

“뭔지는, 보면 알 거고.”

태익이 인내심 있게 들고 있는 쪽지로 다미로는 손가락을 뻗었다. 쪽지를 잡는 순간 기차가 또 심하게 덜커덩거렸다. 다미로가 중심을 잃었다. 태익이 다미로의 팔을 잡았지만 연이은 기차의 덜컹거림에 그녀의 등이 벽에 부딪쳤다.

그러나 태익의 손이 더 빨랐다. 다미로의 등 뒤로 그의 손과 팔이 들어와 쿠션 역할을 했다. 그의 가슴에 다미로의 가슴이 짓눌렸다. 태익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등에 닿는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의 감촉이 낱낱하게 느껴졌다. 젖가슴을 짓누르는 단단한 그의 근육들에 가슴 끝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질척였던 그 밤과 새벽의 광경들이 다미로의 머릿속에 찰나로 떠올랐다.

그의 남성을 머금고 숨을 몰아쉬던 그 순간이 적나라하게 생각이 났다. 동시에 오유미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와도 그가 그런 밤을 보냈던 날이 있지 않았을까.

그의 남성을 머금은 오유미가 거친 숨을 뿜어내며 태익의 몸 아래에서 몸부림을 치는 상상이 순식간에 다미로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얼떨결에 태익과 마주했던 시선을 다미로는 황급히 피했다. 어떻게 이렇게 머릿속이 음란하고 더러운 상상으로 가득한 것인지! 설사 태익이 오유미와 그런 밤을 보냈다고 해서……. 나무랄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지 다미로는 스스로 자책을 해야만 했다. 태익을 배신한 헤어진 연인. 그리고 연인인 동안에도 숨겨진 연인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그녀는 상기시켰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줄도 몰랐던 태익에 대한 부질없는 욕심의 싹을 잘라 버려야만 했다. 반드시 해야 할 그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욕심이 생기지 않아야 했으니까.

“화장실 좀…… 갈게요, 오라버니.”

다미로는 태익의 뜨거운 몸을 팔로 밀어내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그는 그런 다미로를 눈만 내리깔아 볼 뿐 몸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목덜미에 남은 붉은 꽃잎을 응시했다.

잠그지 않은 첫 번째 단추 사이로 가녀린 쇄골 위에도 붉은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태익이 손을 올려 다미로의 뺨을 감싸 쥐었다.

뺨을 감싸 쥔 손에는 힘이 가득했다.

“널 이렇게 움켜쥐고서 영원히 놓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문득 생각이 났다는 것처럼 얘기하는 태익의 눈동자는 강렬했다.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지만 말투에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처럼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사라지고서 깨달았지. 영원히 움켜쥘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말이야.”

“알아요.”

다미로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고갤 끄덕였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깨달았던 사실이 아니던가. 태익은 그녀의 사람이 될 수 없는 남자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을 때 느꼈던 그 절망감이란.

“알지 마라.”

태익이 비스름히 입술을 끌어올려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다미로는 그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태익의 손이 주머니로 돌아갔다.

그가 고집스럽게 다미로에게 붙이고 있던 몸을 떼었다.

“넌 아무것도 알 것 없고 생각할 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녀가 왜 강선애를 죽이려고 하는지 이유는 몰라도, 태익은 그녀가 진심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무슨…….”

하지만 도무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다 헤아릴 수 없어 다미로는 미간을 모았다. 그러나 태익은 다미로의 정수리에 커다란 손을 올려 그녀의 가지런한 머리칼을 흩트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기차는 어느덧 천진역에서 한 번 머물러 다시 출발을 했다.

태익이 먼저 그녀와 있던 빈 객실을 나갔다. 다미로는 조금 더 빈 객실에서 시간을 보낸 후 천천히 그곳을 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태익과 오유미의 일은 도무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장은 머릿속을 비우고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녀는 20분 전쯤 김산을 본 차실을 찾아 객차 뒤쪽으로 걸어갔다. 기다란 복도 한쪽은 차창이고 다른 한쪽은 객실이 있었다.

침대 칸 5량과 일반좌석 칸 10량을 매단 기차는 석탄 연기를 내뿜으며 9시간째 대륙을 달리는 중이었다.

“김산 동지.”

“여어! 간만이외다. 마령 동디.”

파이프에 담뱃잎을 넣어 기분 좋게 뻐끔거리며 김산이 손을 들어 보였다. 산은 상해 시장에서의 일 이후로 다미로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김산은 30대 초반에 애가 셋이나 있는 가정의 가장이었다.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함경남도에서 자랐다고 했다.

“한 가지 여쭤요, 김산 동지.”

“무시기?”

다미로는 차창에 팔을 대고 기대 선 김산에게로 바짝 다가가 자연스럽게 옆으로 섰다. 김산이 다가온 다미로 때문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이라네?”

“기억 좀 더듬어 보세요.”

“내래 더듬뱅이도 아이고 무시기 더듬네?”

“댄스홀에서 말이에요.”

다미로는 괜스레 어색함을 달래려 허튼소리를 하는 김산을 무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김산은 마누라 이외 어떤 여자와도 단둘이 밥 한 끼 먹어 본 적 없다던 인물이었다.

“가즈시케…… 그자 옆에 붙어 있었던 경호경찰 기억해요?”

잔뜩 목소리를 낮춰 창밖의 검은 숲을 응시한 다미로의 물음에 김산은 파이프 입질을 멈췄다.

“그날 분명히 경찰제복을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틀린가요?”

“아니, 틀리디 않디…….”

김산이 주변을 경계하듯 재빠르게 훑으며 다미로에게 어깨를 기울였다. 다미로는 빠르게 지나가는 검은 풍경에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가장해 몸을 돌렸다. 차창 벽에 비스듬히 기대 김산을 마주 봤다.

안경 너머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을 냈다.

“그러면 대체 왜, 그자가 이 기차에…… 군복을 입고서 탄 걸까요……?”

“무시기?”

김산이 속삭였지만 그는 모자 아래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뒤가 밟힌 건지도 모르겠어요.”

“뒤를 밟혔다면, 누긔?”

“알아봐야죠. 우리 중 하나만 아니라면 일단은 상관없겠지만. 만일에 우리 중 하나라면 머리 아파진 것은 확실해요.”

“나는 아니갔디?”

김산이 그답지 않게 겁먹은 눈으로 물었다. 다미로는 의외의 반응에 안경너머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사건건 그녀에게 시비만 붙이던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이니 의아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매번 같은 모습일 수가 있을까. 다미로는 김산의 어깨 너머로 순찰을 도는 역무원을 살피며 대답했다.

“김 동지를 쫓든 우릴 쫓든 마찬가지 아니에요. 김 동지를 의심했다면 그날 가즈시케 옆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저를 비롯해서 안 대장님, 오유미 양, 이곽 동지 전부가 다 의심의 대상일 텐데.”

그녀가 말을 마치고 다시 김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김산이 미간을 구겨 진지한 눈빛으로 고갤 끄덕였다.

“최창학 동지는 어디 계신가요?”

“최 동지래……. 우리 객실래 있디.”

“가죠, 그럼.”

“어드맬?”

김산이 몸을 돌리는 다미로의 꼭뒤에 대고 물었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를 돌아봤다. 김산은 덩치는 산만 한 데다 도적같이 생겨서는 생긴 대로 눈치가 없었다.

“김 동지 객실이요.”

“아……!”

시간이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는 상해의 일본 비밀경찰국이 태익을 의심하는 일이었다. 그날 그가 총을 쐈고, 지금 열차에 탄 가즈시케의 경호원이 그를 봤을지도 몰랐으니까.

시간이 없었다. 기차는 곧 요령성의 성도 심양에 도착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뭔가를 알아냈다면 그곳에서 다음 도착역으로 전보를 보낼 수도 있었다.

다음 도착역에서 체포 작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몸이 빠르고 변장에 능한 최창학이 가즈시케의 경호원에게 붙어,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다미로가 복도를 따라 김산과 최창학의 방으로 먼저 발을 옮겼다. 열차가 길게 경적을 울렸다. 저녁때가 가까워진 기차 안이 분주해졌다.

<2권에서 계속>

가시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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