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2)

3

“오랜만이에요, 안 대장님.”

“오랜만은 무슨. 바로 한 달 전에 봐 놓고.”

상해의 일본 조계지였다. 태익에게 뺨을 부비는 프랑스식 인사를 건네는 여자는 눈이 돌아갈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태익은 그런 여자에게 익숙한 듯 웃음으로 답했다.

“새벽에 도착하신다기에 마중 나갔었는데, 항구 직원이 배가 3시간 정도 늦게 들어올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빈 차로 돌아왔지 뭐예요.”

“그랬나? 난 또 오유미(おゆみ) 당신이 변심한 줄 알았지.”

“하하. 변심이 쉽기나 한가요? 무려 안 대장님을 상대로요?”

조계지 중심부에 위치한 프랑스식 카페 ‘다이가’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카페 2층에 있는 오유미의 사저였다. 태익은 코트를 벗어 거실 테이블 의자에 걸쳐 놓고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오유미가 그의 담배에 바로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는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든 낯선 사내들의 냄새를 지워 줄 도구였다. 그러나 다미로는 그런 두 사람에게 무심하게 오유미의 집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번엔 친구들을 여럿 모시고 오셨네요?”

오유미가 최창학을 비롯한 사내들, 그리고 프랑스식 발코니 쪽으로 다가간 다미로의 뒷모습을 훑으며 말했다. 태익이 피식 웃으며 최창학에게 시선을 보냈다.

“인사들 하지. 이쪽은 상해에서 활동 중인 여배우 오유미 상, 공식적으로는 일본인이지만 사실은 만주에서 태어난 우리 조선인이다.”

“어쩐디, 낯판데기가 눈에 설디 않다 했시오. 내래 김산입네다.”

“최창학입니다. 유 선생님 휘하에 있습니다.”

김산과 최창학이 차례로 오유미에게 인사를 건넸다. 공진과 제영은 카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보초를 보고 있었다.

오유미가 고개를 까닥여 두 사내와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바로 그녀의 시선은 다미로의 뒷모습을 향했다. 초라하다 싶을 만큼 딱딱하고 소박한 차림이라니.

오유미의 눈에 다미로는 여자답게 치장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어 보였다. 무릎을 덮는 축축한 색깔의 헤링본 코트도 그랬고 안에 입은 낡은 면 블라우스도 그래 보였다.

총잡이 마령이라고 했나?

어디로 보나 ‘돈 귀(鬼)’ 그 이상 이하로 안 보였다. 돈을 받고 사람을 쏴 주는 돈 귀신이 붙은.

“엄 대장을 통해서 대략의 얘기는 들었어요. 저 여잔가요?”

오유미는 다미로가 발코니로 나가자 태익이 앉은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태익이 바깥을 살피는 다미로에게 짧은 눈길을 줬다. 아마도 그녀는 이곳의 지형을 파악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일정은?”

태익은 피지 않은 담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다미로에게서 시선을 뗐다. 오유미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정보를 줄 의향이 없었다.

다미로에 대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그녀가 위험해질 테니까.

“가즈시케가 호텔을 바꿨어요.”

“아하……! 어째서?”

태익은 예상 밖의 첫마디에 아쉬운 미소를 지며 오유미를 돌아봤다. 순간 오유미의 심장이 쿵덕거렸다. 그녀에게 태익의 어떤 모습인들 그렇지 않을까마는.

“이유는 몰라요. 그렇지만 조계지에서 외탄에 있는 샤오밍 호텔로 숙소를 옮긴 건 확실해요.”

“샤오밍 호텔이라. 거 재밌네.”

“재미있다니요? 무슨 소리예요?”

“최창학 동지가 얘기해 보지.”

태익이 테이블 맞은편에서 오유미의 식모가 내온 커피를 홀짝이던 창학에게 손가락을 튕겼다. 창학이 들이켜던 커피를 황급히 내려놓았다.

“예! 그게 마루야마 한조와 같은 호텔입니다. 방금 오유미 양께서 말씀하신 그 호텔이.”

“한조요?”

“예. 여기로 오는 배에서 한조가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창학이 오유미에게 조금 긴 설명을 시작했다. 최창학은 귀가 예민하고 누구보다도 몸이 민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상해로 오는 며칠 동안 다미로의 주변을 배회하는 한조의 근처에 숨어, 여러 가지 얘길 엿들었다.

태익은 비스듬히 상체를 틀어 발코니의 다미로에게 시선을 옮겼다. 지형과 지물을 살피는 다미로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녀가 발코니로 나가 난간에 허리를 기대어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4시. 해가 기울기 시작한 시간의 해의 각도와 그늘을 계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어젯밤에도 잠을 자지 못한 것인지 눈가가 어두웠다.

그날 밤. 그녀의 선실에서 관계를 갖고 난 후, 이틀 동안 다미로는 눈에 뜨이게 말이 없었다. 마치 그날 새벽에 했던 말을 실행에라도 옮기는 것처럼 말이다.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등을 보인 채로 벗은 몸에 얇은 슬립을 끼워 넣으며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유 선생님과 오라버니가 하신 약속도 어긋나지 않게, 시키시는 대로 할게요. 대신 경성으로 돌아가면 딱 일주일만 시간을 주세요.”

옷을 챙겨 입는 다미로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태익은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옷을 완벽하게 갖추어 입은 태익은 의자에 등을 묻어 그런 다미로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오라버니께도 총잡이 마령일 뿐이잖아요. 5년 전 공진이하고 제영이한테 제가 했던 일의 대가는 유 선생님과 오라버니의 약속이 지켜질 수 있도록 제가 협조하는 것으로 마무리해 주세요.”

총잡이 마령일 뿐이라.

“그리고 오라버니가 그때 저 때문에 겪으신 일에 대한 대가는…….”

태익은 다미로가 스무 살이었던 그때 이미 등을 보이는 짙은 패배감에 자신을 던졌었다.

“원하시는 방식으로 치르겠습니다.”

원하는 방식이라.

태익은 입술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피식 웃었다.

“다미로.”

그의 웃음 섞인 부름에 그녀는 수녀처럼 검은 원피스의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 그를 돌아봤다.

“설마 내가 널,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죽일 거라는…… 그런 단순한 계산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녀가 숨기고 있는 진실을 태익은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그녀가 스무 살이던 그 해에 그가 자신의 패배를 뼈아프게 인정하며, 그녀를 받아들였던 그때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일본 아사이 금광 방문 중에 사고를 당해 명을 달리한, 아버지 안길준의 죽음 뒤에 누가 있는지 듣지 못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물론 소문이었다.

최순임. 안길준의 가신이었던 주옥의 아내이자……. 다미로의 생모라고 알려진 여자. 남편 주옥을 생사의 갈림길로 밀어 넣었다던 여자.

하지만 태익은 최순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찾을 수 있었던 최순임이라는 여자의 흔적은 27년 전 다미로가 태어난 직후가 마지막이었다.

“만일 너의 계산이 그런 계산이었다면, 계산을 다시 해라, 다미로.”

태익이 그녀의 생각이 당치도 않은 것이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죽는다고 모든 속죄가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그의 끝말에 다미로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감각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사랑을 나눌 때의 그 황홀경에 빠진 여자의 모습은 또다시 안개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 발코니에서 보이는 저 건물은, 뭔가요?”

최창학의 얘기가 거의 끝나 갈 때쯤이었다. 발코니를 살피던 다미로가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오유미가 고개를 틀어 다미로와 그녀가 가리킨 건물을 확인했다.

“아, 그건. 일본인 소상공인회의소예요. 원수 놈들이지만 얄밉도록 일을 잘하는 인간들이 일본인들이거든요.”

“끝나는 시간은요?”

“5시쯤이요. 그 시간이면 전부들 밖으로 기어 나와 지천에 깔린 카페나 클럽으로들 가죠.”

오유미의 설명에 다미로는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가볍게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일행 모두가 긴장을 했다. 오유미가 문 앞으로 다가가 살짝 문을 여니, 문밖의 사람은 곽이었다.

“도련님.”

곽이 문밖에서 태익을 불렀다. 곽과 눈길을 주고받은 태익이 코트를 챙겨 일어났다.

“잠시 얘기들 나누고 있지.”

김산과 최창학에게 짧게 말한 그가 문을 나섰다. 다미로는 다시 발코니로 나가 유심히 소상공인회의소 건물을 살폈다. 김산이 입맛에 맞지 않는 커피에 오만상을 쓰다 최창학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조 에미나이래 한조 고 간나새끼래하고 종말로 무신 사이래 아니간?”

김산의 말에 최창학이 눈썹을 밀어 올리며 다미로를 흘깃 쳐다봤다.

“안 대장이래 저 에미나이를 대하는 자세로 봐선, 저 에미나이래 온제든 배신 때릴 수 있다 생각카는 거이 같지 않간?”

분명히 속닥댄다고 하는 말이었지만 오유미의 귀에는 다 들리고도 남았다.

“감시가! 감시가! 지기럽하지 않간!”

“글쎄요. 안 대장님이 가장 싫어하는 족속이 돈에 나라 팔아먹는 족속이라는 사실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저 여성 동지는 나라를 팔아먹는 일은 안 했다는…….”

“돈 귀나……”

최창학의 말끝을 오유미가 가로챘다. 놀란 두 사내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그러자 오유미는 해사한 웃음을 머금어 말을 이었다.

“……나랄 팔아먹는 족속이나 안 대장님껜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천상이 배우인 여자였다. 일본에서 무용을 공부했던 오유미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일이 자연스러운 여자였다. 김산의 눈이 휘둥그레져 오유미에게 소리 죽여 물었다.

“동지래, 우리 안 대장님에 대해 어드매만큼 압네까?”

“김산 동지보다는 많이 알겠지요.”

호오.

김산이 소리 없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고는 대뜸 진지한 얼굴로 오유미에게 물었다.

“혹시, 오 동지래 우리 안 대장을 반가라합네까?”

“네?”

김산의 방언을 알아듣지 못한 오유미가 미간을 모았다.

“기리니까, 내 말은 말임다. 오 동지가 우리 안 대장님을 좋아하냐, 모 그런 말임다.”

하하하.

오유미가 소리를 높여 웃었다. 발코니에 등을 보이고 서 있던 다미로의 신경은 벌써부터 그녀에게로 곤두서 있었다.

“진지하게 물으시니 진지하게 답해 드릴게요.”

웃음기가 다 가시지 않은 오유미가 미끈한 다리를 꼬아 앉으며 말했다.

“안 대장님과 제 첫 인연은 말이에요.”

첫 인연은.

“유 선생님께서 안 대장님과 제 중매를 서 주셨던 인연이에요. 제가 일본에서 무용학교를 막 마치고 경성에 잠깐 돌아왔을 때였죠.”

중매.

김산과 최창학이 감탄의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미로의 난간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저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남들이 뭐라 하건 일본말로 ‘독고다이’로 독야청청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다미로는 애초부터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애교 부릴 줄 모르고 남들 비위를 맞춰 가며 살지는 않았어도,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아무렇지 않은 척 가면을 덧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김산을 비롯해 최창학, 그리고 저 여자 오유미. 또…… 이곽까지. 자신을 향한 시선이 어떤지 다미로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요사이 그녀는 안국동 집에 갇혀 있을 때보다 몇 배의 피로를 느껴야만 했다.

벌써 5년 전에 잘린 손가락 마디가 욱신거렸다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금니를 힘주어 물고 있던 그녀가 본능적으로 소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들, 외탄 구경 좀 가 볼까?”

반쯤만 연 문 사이로, 나오라는 고갯짓을 한 사람은…… 태익이었다.

“차는 제가 대기시키죠.”

오유미가 분홍빛 입술을 늘이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김산이 최창학과 어깨동무를 했다. 계단 아래에서 움직임이 부산했다.

* * *

상하이는 20세기에 만개하기 시작한 도시 문화의 중심지였다. 특히나 영화 관련 산업은 구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영화관만 30개가 넘고 세계 곳곳에서 제작되는 영화들이 제작국에 배급되자마자 거의 동시에 상하이에 배급됐다.

전차를 비롯해 도시 곳곳에 영화 포스터와 광고판이 붙어 있었다. 네온사인과 기타 전광판에도 새로운 영화에 대한 홍보가 줄을 이었다.

공공조계지인 외탄에는 노천극장도 있었다. 황푸강변을 따라 조성된 잔디밭에는 외국인 중국인 할 것 없이 모여든 인파로 즐비했다.

“노천극장이라니. 우리 안 대장님 생각을 모르겠네.”

모자에 달린 베일로 얼굴을 가린 오유미가 콧소리로 말했다. 나란히 걷던 최창학이 곽과 함께 앞선 태익의 등에 눈을 두었다. 뒤로 쳐져 혼자 걷던 다미로는 아직 푸름이 남은 잔디밭과 유럽식 건축물이 어우러진 풍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마음이 들뜨지는 않았어도 잡지나 영화에서만 봤던 유럽식 분위기가 신기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여자들의 화려한 모자와 코트, 구두들도 신기했다.

경성에도 멋쟁이들이 많기는 했지만 이곳에 비하면 수적으로 훨씬 모자란 것은 맞았다. 더군다나…… 다미로는 저렇게 큰 스크린을 본 건 난생 처음이었다.

“앉아.”

처음 보는 크기의 스크린에 멍해져 있던 다미로에게 곽이 의자를 밀었다. 그녀가 코트 주머니 속에 갈무리했던 손을 빼 의자를 받았다.

“혹시 여기에서도 영화 같은 걸 상영하는 거니?”

곽이 자리를 잡아 준 의자에 앉으며 다미로가 물었다. 곽은 어깨를 으쓱이며 “당연하지”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오늘 상영할 영화 제목이 <라이드 어게인>이라더라. 서부 코믹 활극이라던데?”

하는 설명도 바로 덧붙였다.

“그래?”

다미로는 곽의 짧은 설명에 목에 두른 머플러를 풀며 다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화 관람이라니.

5년 전 그날 이후로 다미로는 단 한 번도 영화관을 찾은 적이 없었다. 그날 본 영화의 제목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했다. ‘파우스트’ 독일에서 만든 무성영화였다.

그 당시 상영되던 무수한 유성영화들을 두고 왜 하필 무성영화를 보러 갔던 것인지. 아무리 되돌려 생각해 봐도 운명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모레가 돌아가신 우리 사장님 기일이라며?”

“응. 그래서 매년 하루 공짜 휴일이 생겨서 난 좋더라.”

“얜! 남의 기일에 공짜 휴일 생겨서 좋다는 말은 좀 그렇다.”

“그런가?”

무거운 주제를 가진 영화에 몰입하지 못한 제사공장(실공장) 여공들의 수다가 다미로의 바로 뒷좌석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근데……. 이건 내가 공장장님 댁에 일 봐주러 갔다가 살짝 엿들은 얘긴데 말이야.”

“엿들어?”

“응.”

“뭘 엿들었는데?”

“너, 주옥 선생 알지?”

“아, 서로군정서에 돌아가신 그?”

“그래. 그런데 말이지.”

목소리가 갑자기 확 낮아졌다. 하지만 다미로는 ‘주옥’이라는 이름에 오감을 곧추세웠다.

“그 부인이 그 남편도 죽이고, 심지어 돌아가신 우리 전 사장님도 죽였다고 하더라.”

“정말……? 에이…… 소문이겠지…….”

“몰라, 공장장님 사모 동생이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신데, 사모님이랑 그 남동생 두 사람이 하는 얘길 엿들은 거니까.”

“뭐니, 공장장사모 남동생이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어? 왜놈 앞잡이인 거네?”

“쉿!”

그네들의 대화 이후로, 소리가 없던 무성영화는 다미로의 눈에 화면조차도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날의 기억은 다미로에게 깊은 화상을 입혔다.

“코미디 영화래.”

“코미디 영화?”

“왜 그런 거 있잖아. 잘 걸어가다가 과일 껍질 밟고 넘어지고 뭐 그러는 영화.”

“과일 껍질을 밟고 왜 넘어지면…… 그게 웃긴 거니?”

다미로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다. 곽은 조금 어이가 없으면서도 문득 그녀답다는 생각에 혼자서 웃고 말았다.

곽과 다미로보다 뒤로 앉은 오유미가 그런 두 사람을 유심히 관찰했다. 오유미와 함께 앉은 태익은 바람에 머리카락 몇 올이 뺨을 간질이는 다미로의 옆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스무 살의 다미로. 티 없었다. 말수가 적고 때론 당돌하며, 그 당돌함 뒤에 순수함이 가득했던 그녀는 그림자가 없었다. 이화 전문학교에 합격하던 날 다미로는 학교 배지를 그에게 내밀었었다.

“직접 달아 주실 수 있으세요?”

입술 끝을 엷은 미소로 올린 채였다. 단정하게 머리를 묶고 단정한 교복 저고리를 입은 그녀는 해사했다.

“혹시 아세요? 안 대장님?”

영화가 시작되었다. 오유미가 태익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영화감독이 말이에요, 지금 이 영화로, B급 영화감독 신세를 처분했다고 하더라고요. 미국이란 나라는 정말이지 대단한 것 같아요. 저렇게 예산이 아주 형편없게 적은 영화로도 세계를 제패할 수 있게 하잖아요.”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해가 저물 때를 기다렸다 시작한 영화는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유쾌한 영화였다.

““李曄 你是老板?(이엽 사장님 되십니까?)”

사람들이 정신없이 영화에 빠져 배꼽이 빠져라 웃어 댈 무렵이었다. 캄캄한 객석 사이로 소리 없이 들어선 사내 하나가 태익이 표를 사 비워 둔 뒷자리로 슬며시 앉았다. 사내는 중국말로 묻고 있었다. 태익이 상체를 틀어 뒤를 돌아봤다.

“I'm sorry, I do not know Chinese.(미안하지만, 난 중국어를 모릅니다.)”

암호였다. 서로 얼굴을 모르는 두 사람이 주고받기로 되어 있던 암호. 사내가 태익의 암호를 확인하자 화과자가 담긴 종이봉투를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놓고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새 공진이 그 자리를 메웠다.

“대장님, 여기.”

공진이 봉투를 들고 일어서며 태익이 의자 뒤로 뻗은 손에 작은 쪽지 하나를 전했다.

으하하하. 하하하. 하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태익도 영화의 익살스런 장면에 함께 웃으며 받은 쪽지를 코트 주머니 속에 갈무리했다. 그의 눈은 스크린에서 어느새 다미로의 비스름한 뒷모습에 닿았다.

희미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머물러 있었다. 박장대소를 하는 관객들 사이에서 그녀는 바람처럼 웃고 있었다.

“뭐래? 저 에미나이래 웃을 줄도 아네?”

영화가 끝나갈 무렵 김산이 최창학에게 쑥덕였다. 1시간이 조금 넘는 영화는 7시가 못 되어 끝이 났다. 인파에 섞여 노천극장을 빠져나왔다.

모두가 함께 길을 걷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서 걷는 오유미와 태익의 뒤를 따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느닷없는 영화 관람의 이유가 무엇인지 다미로는 묻지 않았다.

시장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과일 가게들이 즐비했다. 국수집과 꼬치를 파는 가게, 소매가 기다린 두루마기를 입은 중국인들이 바글거렸다. 거지가 건물과 건물 사이 비좁은 골목에 웅크려 있고 그 머리 위로 핏물이 떨어지는 돼지껍데기가 가게 처마에 매달려 있었다.

향신료 가게의 지붕 처마에는 금방이라도 터질듯 뚱뚱하게 부푼 향신료 가루 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아마도 어느새 조계지를 벗어나 중국인 서민 지역으로 넘어온 듯싶었다.

초저녁 시간이라서인지 장사치들의 아이들도 많았다. 거리를 놀이 공간 삼고 생선 대가리를 공으로 삼아 차고 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야, 확실히 떼놈들은 다르구나, 야! 도시 귀퉁이 시장이래 인간이 며터디는 거이, 종로 바닥보다 훨씬 크디 않간!”

오가는 사람들끼리 어깨가 닿을 정도로 많은 인파들을 보며 김산이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들이 향하던 방향 저 앞에서부터 갑자기 홍해처럼 사람들이 양옆으로 갈라서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다고 느끼던 찰나였다.

“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일본경찰대가 탄 말들이 질주해 오는데 바로 몇 미터 앞에 돼지 오줌보를 차고 놀던 아이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기지를 펼친 사람은 태익이었다.

그가 자신 앞에 세워져 있던 빈 수레를 발로 차자, 경사가 기운 반대쪽 방향으로 수레가 밀려갔다. 일본경찰대가 내달리는 시장 골목을 수레가 가로질렀던 것이다. 그때 김산이 뛰어들었다. 아이들 셋을 한꺼번에 두 팔 안에 담아 그대로 몸을 날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말들이 날뛰었다. 뒤따르던 말 위의 경찰들이 총을 뽑아 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다미로의 눈이 멈춰 섰던 중국인 사내의 주머니에 꽂힌 사냥용 새총을 발견한 것은 찰나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새총이 향신료 가게 처마에 매달린 향신료 포대를 향해 돌멩이를 날렸다.

퍽! 퍽퍽! 퍽!

소리 없이 날아간 돌멩이에 폭발하듯 공중에서 터진 가루들이 화산재처럼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꺄아!”

혼비백산한 사람들의 비명이 혼란을 부추겼다. 말 위의 일본경찰대들이 갈피를 잡지 못해 말들이 갈지자로 춤을 췄다.

콜록콜록 콜록.

코와 입을 틀어막은 사람들이 뿌옇게 시야가 흐려진 시장 골목을 빠져나가느라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다미로와 태익의 일행도 그 틈에 시장을 벗어났다.

“눈사람이 되셨네요. 자요, 갈아입으세요. 지금 꼴로는 빅토리아 호텔 댄스홀 근처도 못 가요.”

오유미가 김산에게 양복 한 벌을 내밀었다. 김산이 머리칼을 털어 내며 오유미가 내민 양복을 불만스런 눈으로 내려다보다, 결국 받아들었다.

그때 공진과 제영이 테이블 위로 가방과 도면을 세팅해 놓았다.

“모두 여기 좀 볼까?”

태익이 짧게 잡은 단장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미로는 오유미의 방에서 그녀가 빌려준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중이었다.

자줏빛 벨벳 원피스였다. 가슴부터 강조해 허리와 힙까지 딱 들러붙는 원피스는 허벅지 아래로 내려와 프릴이 넓게 퍼져 무릎 바로 아래를 덮었다.

거실에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선명한 자줏빛 원피스 위로 드러난 다미로의 봉긋한 가슴골과 기다랗고 하얀 목덜미가 대조를 이루었다.

그녀의 투명한 피부에 자줏빛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아…….”

곽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다미로에게 무감각을 가장한 시선을 꽂고 있던 태익의 날카로운 시선이 곽을 나무라듯 쳐다봤다.

곽이 재빨리 입술을 다물어 표정을 굳혔다. 태익은 더는 다미로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도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빅토리아 호텔 도면이다.”

하지만 시선을 돌린 태익의 등줄로 식은땀이 흘렀다. 오유미의 방을 나온 다미로를 본 순간 뒷머리가 뭔가에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미 그녀를 안은 그 순간에 다미로가 성숙해져 있음을 알았건만.

지금의 다미로는 농염했고 요염했다. 어떤 사내가 보더라도 단번에 정신을 놓게 만들 정도로 그녀는 한껏 무르익어 있었다. 그의 몸 아래에서 엉덩이를 휘돌리며 가쁜 숨을 내뱉던 그 순간과 같았다.

사타구니를 맞부딪칠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났던, 짙은 정액 냄새와 그녀의 체액 향취가 뒤섞여 있던 그 선실에서처럼 다미로는 색정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오늘은 한조. 마루야마 한조에게 다시 접근을 시켜야 했다.

“공진이하고……. 제영이는 승강기 동력실 위치부터 파악하도록. 그리고 최창학 동지.”

태익은 테이블을 짚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였다.

“예, 대장님.”

“최 동지는 옥상 댄스홀에서 바로 아래층 스카이라운지로 이어지는 계단 문을 맡는다. 2~3분 정도 정전이 될 거다. 정전이 되는 순간에 문을 바깥에서 고정시킨다. 그리고 계단 창문을 통해 옥상정원으로 다시 복귀. 알겠나?”

최창학의 빠른 몸을 이용하자는 의도였다.

“예.”

“그리고 김산 동지는, 마령 옆에 붙어 항시 대기한다.”

“무시기요?”

김산이 눈을 치떴다. 다미로와 다른 이들도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을 한 것이 사실이었다. 김산은 힘이 장사다. 거기에 무거운 화기를 다룰 줄 아는 유일한 팀원이었다.

그런데 그런 김산을 다미로 옆에 붙여 놓고 대기를 시킨다는 것이 모두들 바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태익은 그런 반응을 무시했다.

“이곽.”

“네.”

“자네도 김산 동지와 함께 대기한다.”

어라? 곽을 자신 곁에 두지 않고 김산에게 붙여 두겠다고? 아니면 마령 옆에 붙여 두겠다는 것인가?

오유미는 순간 재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태익은 테이블에 숙였던 허리를 세우며 자신에게 모인 시선들과 눈길을 맞췄다.

“이상, 질문.”

일순 테이블 주위에 모인 모두가 조용했다. 하지만 곧 최창학이 물었다.

“아까 극장에서 입수한 총은 누가 호텔로 갖고 들어가는 겁니까?”

표적은 가즈시케였고 그 표적을 쏠 사람은 총잡이 마령이 아니던가. 그런데 마령이 직접 총을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을 테고, 그녀에게 총을 전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태익이 오유미를 쳐다봤다.

“오유미 양이 갖고 들어갈 거다. 유명인이니, 검문을 당할 위험이 가장 적으니까.”

태익의 답이 끝나자마자 김산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었다.

“고럼, 우리래 마령 동디는 계속 모르는 사이래 되는 검매까?”

태익이 눈꼬리를 접어 씩 웃었다. 그리고 접혀 있던 셔츠 소매를 내려 커프스단추를 채우며 대답했다.

“마령 동지뿐 아니라, 나와 곽, 그리고 오유미상과도 김산 동지는 모르는 사이여야 한다. 그리고 최창학 동지와 공진, 제영 동지까지 가능한 우리 모두 서로 연계성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자고. 그래야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떤 의심이든 최대한 피해 갈 수 있을 테니까.”

김산을 비롯한 모두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유미 역시 김산과 이곽을 마령에게 붙여 두는 것은 그녀를 감시하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언제 변심할지 모르는 청부업자이지 않은가. 아까 초저녁 시장에서의 마령의 행동은 전혀 예상 밖의 행동이었지만 말이다. 그녀가 끼어들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더욱이 그렇게 재빠르고 적재적소의 판단력이라니. 하긴, 심성이야 어떻든 머리가 좋아야 그런 일로 먹고살 수 있는 법이니. 오유미는 여전히 그녀를 완벽하게 신뢰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능력만은 믿을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상스레 신경이 쓰이는 다미로를 슬쩍 돌아봤다. 다미로는 자줏빛 원피스 위로 벌써 코트를 걸치고 도면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안경이 오유미의 눈에 거슬렸다.

저 예쁜 얼굴을 안경 따위로 다 망가트렸네. 쯧.

“마령 동지, 잠깐 저 좀 보시겠어요?”

아무리 한조가 이미 반은 넘어와 있다고 해도 가즈시케를 접대하러 온 한조를 이용하려면, 다미로는 치장이 더 필요할 듯싶었다. 배우의 직업 정신인지 몰라도 예쁜 얼굴을 스스로 망치는 다미로를 그녀는 두고 보지 못했다.

“꼭…… 이렇게 해야 하나요?”

오유미의 침실이었다. 배우의 방답게 화려했고 무엇보다도 화장대에 달린 조명들이 신기했다. 그러나 속눈썹을 붙이고 마스카라를 바르고 뺨에 홍조까지 띠우는 화장법이 다미로는 답답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묻는 말에 오유미는 거울 속으로 시선을 맞추며 새빨간 입꼬리를 고혹적으로 당겨 웃었다.

“여자의 자신감은 미모에서 나오는 법이에요. 아무리 머리가 좋아 대학 공부를 하고 부자 남편을 만난 여자라고 해도, 자기보다 예쁜 여자 앞에서는 기가 죽기 마련이죠.”

“땅에 묻히면 다 똑같아져요. 예쁘나 못생기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다미로가 맞받아쳤다. 오유미가 눈썹을 밀어 올렸다. 거울을 통해 맞부딪친 시선을 두 여자 모두 피하지 않았다. 커다랗고 맑은 눈. 피하지 않는 담담한 시선. 차갑고 냉소적인 얼굴이라 생각했었건만.

오유미는 다미로의 깊고 담담한 눈빛에 덜컥 심장이 반응했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렇지만…….”

그녀는 멈추었던 빗질을 다시 시작하며 어개를 으쓱였다.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을 머리통 아래에 동그랗게 말아 고정시켰다.

“우린 아직 죽지 않았잖아요.”

괜한 말도, 농담도 아니었다. 단지 다미로가 항상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자, 됐어요. 상하이 여배우들과 나란히 견주어도 이 정도면 묻히진 않겠어요. 여기, 거울.”

오유미는 느닷없이 드는 감상적인 생각을 밀어냈다. 다미로에게 머리 뒷모양을 확인할 손거울을 주었다. 어색하게 손거울을 받아든 다미로가 익숙하지 않은 눈길로 거울을 확인했다.

“…….”

생전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자신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사내들과 어울려 자랐고, 총잡이 마령으로 사는 동안 그녀의 삶에 치장은 사치에 불과했다.

다미로가 자신을 여자라고 느끼는 순간은 태익의 품에 있을 때뿐이었다. 그에게 탐닉당할 때, 그에게 육체와 정신이 전부 지배당할 때 말이다.

화장품 냄새가 짙은 오유미의 화장대가 그녀에겐 너무도 낯선 풍경이었다. 화려한 보석과 액세서리가 가득한 그녀의 서랍장은 다미로에게 너무나도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 * *

“리번에도 잘 해 보자야!”

차에서 내리기 직전 김산이 최창학과 공진, 제영에게 속닥인 말이었다.

“최창학 동지와 김산 동지는 일을 마치는 즉시 프랑스 조계지로 들어가, 엄 대장을 만난다. 그리고 공진이하고 제영이, 곽은 상해를 벗어나 소주의 민족당 본부에 가 있어라. 오유미 당신은 평소대로 당신 집으로 돌아가고, 마령 동지는 한조에게 외탄에 있는 리즈 캐슬 호텔에 머문다고 말을 흘린 뒤, 그곳으로 가면 된다.”

절대로 한곳에 모여 있으면 안 된다는 태익의 작전 때문이었다. 서로 어떤 연계점도 갖지 않는 것으로 보여야 한다는 계획의 연장선이었다.

민간인은 그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하고 깔끔하고 깨끗하게 목표물인 가즈시케만 제거하고 끝을 맺어야 할 일이었다. 김산은 이 모든 일이 계획대로 잘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초저녁 시장에서 있었던 일들, 손발이 그렇게 척척 맞아 들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느냐마는! 계획이 없이도 그렇게 되었는데, 계획이 짜인 일은 그보다 더 잘되지 않겠느냐는 기대였다.

“일 마치고 무사히 봅시다, 김 동지.”

최창학도 그런 김산의 어깨를 움켜쥐며 차에서 나섰다. 저녁 9시 정각. 상해의 초호화 호텔 빅토리아는 화려한 조명으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아!”

다미로를 본 한조의 첫 반응이었다. 호텔 이름처럼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재현해 놓은 호텔은 옥외 정원의 댄스홀 역시 빅토리아풍으로 아기자기한 장식 소품들과 복고풍의 가구와 조명 기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시내 중심부의 저급한 댄스홀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눈이 돌아가게 고급스런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남녀 중국인, 일본인, 서구 열강의 사람들과 미국인들까지.

중국에서 생활하는 부자들과 유명 인사들은 죄다 모인 사교클럽 같은 장소였다.

“오유미예요. 마루야마 소위님?”

“처음 뵙습니다, 오유미 양. 마루야마 한조입니다. 약속대로 다미로 양과 다시 뵙는군요, 안 사장님.”

오유미가 먼저 한조에게 능숙한 일본말로 인사를 건넸다. 한조가 군인다운 어조로 오유미의 인사를 받았다. 한조에게 오유미는 낯선 얼굴은 아니었다. 상해 길거리 곳곳에 그녀가 모델을 하는 광고들이 붙어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의 눈에는 오유미보다 다미로가 먼저 들어왔다. 그녀는 차갑지만 향기로운 꽃이 아닌가. 마치 홋카이도의 지독한 추위와 눈 속에 핀 동백꽃 같았다.

특히나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자줏빛 벨벳 원피스 때문에, 한조는 활짝 핀 겨울 동백꽃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곡이 나오는군요, 다미로 양과 춤을 춰도 되겠습니까?”

한조는 다미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태익에게 물었다. 태익이 입술을 비릿하게 끌어올렸다.

“저보다 제 동생에게 직접 허락을 구하셔야 할 일 같습니다만, 마루야마 소위.”

눈꼬리를 접어 웃는 여유로운 미소에 한조와 오유미는 그의 본심을 읽어 내지 못했다. 한조가 다미로에게 팔을 내밀었다.

다미로는 익숙하게 그의 팔에 손을 얹어 홀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로 파묻히자마자, 태익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었다.

“가즈시케는 찾았나?”

지나가던 웨이터의 쟁반에서 샴페인 두 잔을 들어 올린 태익이 오유미에게 잔을 건네며 물었다. 오유미의 눈이 가즈시케를 찾기 시작한 지 불과 몇 초 만이었다.

“2시 방향에 있네요.”

“같이 있는 사람은?”

“도모라고 일본 조계지 경찰서장이에요.”

가즈시케는 연미복 차림이었다. 키가 작고 마른 체격에 콧수염이 짙었다. 그와 함께 있는 경찰서장 역시 작은 키에 다소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재작년 일본의 상해 폭격 이후로 일본 조계지 밖으로 나오는 일본인의 숫자가 주춤했지만, 요사이 원점으로 돌아왔는지 홀 안에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태익이 손에 든 샴페인을 단숨에 비웠다. 뜨겁고 톡 쏘는 액체를 목 뒤로 넘긴 그는 회중시계를 확인하며 다미로를 찾았다. 오유미에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 왔다.

자연스럽게 태익은 그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 사이로 다미로와 한조를 응시했다. 춤이 서툰 다미로를 한조가 익숙하게 리드하고 있었다.

“경성으로는 언제 돌아가실 예정입니까?”

한조가 시선을 맞추지 않는 다미로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글쎄요, 모르겠네요. 오라버니께서 하시는 사업 일정을 제가 알고 있는 게 아니라서.”

“순전히 상해에 관광을 오셨다는 말씀처럼 들리는군요.”

“관광 말고 제가 할 일이 없으니까요.”

“요샌, 일본이고 조선이고 여자들도 사업체를 꾸리는 경우가 많던데.”

“그런가요? 전, 통 관심이 없어서요.”

한조는 기본적으로 깍듯한 사람이었다. 일본인이며 군인이라는 점은 치가 떨리도록 싫지만, 그가 다미로 자신에게 예를 갖춰 대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조가 어떤 사람이 되었든, 그와의 인연은 오늘로 끝일 것은 분명했다. 오늘 그녀는 가즈시케를 쏴야 하니까. 그리고 내일부터 일제가 첫 번째로 쫓는 현상 수배범이 될 것이다.

총잡이 마령으로 말이다. 하지만 태익은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다미로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이 그대로 드러나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그녀가 5년 전 집을 나간, 집안 식솔 중 하나였다는 사실과 그녀의 어미 최순임이 태익의 부친 안길준 옹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일들을 밝히면, 그는 의심을 피할 수가 있었다.

“경성으로 돌아가면 말입니다. 다미로 양.”

한조가 그녀의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미로는 본능적으로 한조의 얼굴을 올려 봤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재빠르게 감을 잡았던 것이다.

“그 기자 간담이란 거 말이에요.”

다미로가 한조의 말을 막기 위해 물었다.

“총독부의 총독께서 말씀하신 조선에 대한 포부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상하지 못했던 다미로의 질문에 한조는 일순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눈썹을 밀어 올렸다. 하지만 곧 그는 입을 열었다.

“우리 황국의 대륙 진출을 위한 전진병참기지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러니 반도인의 충실한 정신수양을 위해서 창씨개명, 신사참배의 의무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세계는 바야흐로 대변혁 유신의 시대이니까요. 조선이 그 변혁을 따라갈 능력이 없으니, 우리가 도와야 하는 건 내선일체를 위해서라도 꼭 해야 할 일이지요.”

기가 막히고 억지스러운 주장이었지만 한조 역시 일본인이므로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만주의 그 더러운 전쟁터에서 지휘관을 했으니 어련할까마는.

다미로는 절로 나오는 비릿한 웃음을 애써 삼키지 않았다. 한조의 눈썹이 다시 밀려 올라갔다.

“내가 일본인이라 싫은 겁니까?”

아무리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어도 소용없던 것일까. 한조의 물음에 다미로는 비로소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뇨.”

한조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래요? 날 경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다미로의 경계심을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아뇨.”

그녀의 대답에 한조는 미간을 찌푸렸다. 연이은 부정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경계한 건 맞지만, 싫어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예요.”

“싫어하지 않았다고요?”

“좋고, 싫고. 소위님과 저는 그런 감정을 느낄 사이가 아니지 않나요?”

차가운 얼음꽃. 한조는 그녀가 동백꽃처럼 아름답지만 실은 차가운 얼음꽃임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소녀처럼 청순하다가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농염한 여인인 그녀의 진짜 모습을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한조는 전쟁의 광기에 쑥대밭이 돼 버린 제 심장을 그녀라면 식혀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렬했다. 차가운 얼음꽃이 불덩이가 된 심장을 식혀 주고 잠을 이루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경성으로 돌아가면 말입니다, 다미로 양.”

다미로는 불시에 귓가로 다가온 한조의 입술에 상체를 젖혔다. 허리를 쥐고 있던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받쳤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청혼을 넣어도 되겠습니까?”

다미로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아무것도 모르는 한조의 부질없는 말보다 그의 등 너머로 시선이 마주친 태익이 먼저 보였다.

샴페인 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태익의 표정은…… 싸늘했다. 그의 눈길이 그녀의 등을 받치고 있는 한조의 손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얼마나 그 손에 그의 시선이 꽂혀 있었을까?

다시 다미로와 시선을 맞춘 태익은 단숨에 샴페인을 목에 털어 넣었다. 싸늘했던 그의 눈빛에 한순간 광기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미로는 입 안이 말랐다.

자신에게는 그를 사랑할 자격도 없고 그의 여자가 될 자격도 없다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오해 받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다른 남자와 엮여서는 말이다.

이미 장위건과의 위장결혼까지 아는 태익이지만, 여전히 다른 남자와 엮인 것만으로도 태익은 불쾌했다.

“……소위님?”

그렇지만…….

다미로는 태익의 곁에 서서 그의 팔에 살포시 얹은 손을 한 번도 떼지 않는 오유미의 손에 머물렀다.

중매를 봤던 사이라.

인정하기 싫지만 매우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 아니던가! 유명 여배우와 경성 최고의 갑부인 두 남녀는 누가 봐도 천생연분으로 보일 한 쌍이었다.

총잡이 마령 따위와는 감히 비교조차 해선 안 될 여자가 오유미였으니까. 더욱이 가즈시케를 쏘고 나면 그녀는……. 어쩌면 영영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구본에게 부탁했던 일을 마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 일에 5년을 바쳤고 삶의 전부와 맞바꾸었는데도 말이다. 다미로의 부름에 한조는 눈을 빛냈다.

“죄송한 말씀인데, 구두가 조금 불편하군요. 앉을 곳을 좀 마련해 주시겠어요?”

다미로는 립스틱을 바른 입꼬리를 요염하게 올려 웃었다. 이제부터 시작될 그녀가 해야 할 일 중, 첫 번째 목표는. 가즈시케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일단 한조와 함께 착석하는 일이었다.

두 번째는…….

“소위님? 와인 좀 한 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한조가 다미로의 부탁으로 가져오던 와인을 그녀와 가즈시케에게 쏟게 만드는 일이었다. 한조가 음료가 있는 테이블에서 와인 두 잔을 들고 왔다.

그가 가즈시케 옆으로 앉은 다미로에게 와인 잔을 건네려던 순간이었다. 다미로의 곁을 맴돌던 곽이 한조의 뒤로 지나가며 발을 걸었다.

한조가 휘청거렸다. 그 순간 김산이 “哎呀! 小心!(이런! 조심하십시오!)” 하고 중국인을 가장해 한조의 팔을 잡아 주는 척, 잔을 든 그의 팔을 가즈시케 쪽으로 기울였다.

계획대로 와인이 다미로의 옷에 먼저 쏟아지고, 다음으로 가즈시케의 셔츠 위로 쏟아졌다.

“あ! 大丈夫ですか? 司令官? すみません! 私が足を踏み外しました。(아! 괜찮으십니까? 사령관님! 죄송합니다. 제가 발을 헛디뎠습니다.)”

당황한 한조가 가즈시케의 옷을 털어 내려 해 봤지만 셔츠는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미로는 오유미가 쥐어 준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사령관님.”

가즈시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제야 한조가 다미로를 돌아봤다.

“저는 옷을 좀…… 실례할게요, 소위님.”

오유미의 말에 의하면 이 댄스홀에는 여성용과 남성용이 따로 분리된 휴게실이 있다고 했다. 그녀가 먼저 테이블에서 빠져나왔다. 이제 휴게실로 가서 오유미에게 총을 받아, 마찬가지로 옷을 갈아입기 위해 휴게실로 들어갈 가즈시케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뿌연 담배 연기와 달콤 쌉싸래한 술 냄새 그리고 댄스홀을 가득 채운 남녀 인파를 뚫고 다미로는 휴게실로 향했다.

달칵.

문을 등 뒤로 닫아, 잠시 등을 기댔다. 오유미가 있는지 방 안을 둘러봤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팟!

전기가 나갔다.

“꺅!”

“司令官! 司令官! (사령관님! 사령관님)!”

“司令官様! 司令官様!(경찰! 경찰!)”

말 그대로 찰나였고 순식간이었다. 비명 소리와 경찰을 찾는 소리가 어둠 속에 가득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난장이 되어 다미로는 휴게실을 뛰쳐나왔다. 불과 1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

팟!

나갔던 전기가 들어왔다. 혼비백산해서 비상구를 향해 내달리는 사람들이 느릿하게 보였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남자 휴게실에서 뛰쳐나온 경찰들이 그녀의 눈앞으로 총을 든 채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다미로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홀을 나가기 위해 문을 향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거슬러 벽을 짚고 걸었다. 사람들의 소리치는 소리가 나는 방 앞에 섰다.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넘어져 너부러진 사내 옆으로 한조가 앉아 있었다. 연미복 상의를 벗어 바닥에 너부러진 사내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너부러진 사내는 콧수염이 있었다. 50대 중반쯤이었고 키가 작았으며 다부진 체형이었다.

가즈시케…….

다미로의 멍한 눈과 한조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하지만 다미로는 의식하지 못하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했다. 한조가 “위험하니까, 어서 여길 나가요!” 하고 소리쳤지만 다미로에게는 소리 없는 외침으로만 들렸다.

잘못되었다.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 확실했다. 분명히 오유미에게 총을 받아 가즈시케를 쏘기로 한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거늘.

총은 그녀 손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심지어 일은 그녀가 총을 받기로 한 휴게실로 들어가자마자 벌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오라버니는.

오라버니는 어디에 있는 거지? 김산 동지와 곽이는?

서서히 벌어진 상황이 파악된 다미로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거의 다 빠져나가고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태익과 김산, 곽…… 오유미를 찾았다.

그런데 속이 울렁거린다. 피. 피 때문이었다. 진동하는 피 냄새에 다미로는 정신이 아찔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그랬다. 총을 쏘고 난 후에는 죄책감과 함께 구토와 오심, 현기증이 그녀를 덮쳤다.

세상에 없어져 마땅한 인간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그들이 없어져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살기 편해진다면 괜찮다 여기려 애썼다.

강선애의 신임을 얻기 위해 했던 일이지만, 그녀의 총에 맞은 인간들은 깡패 아니면, 그녀와 경쟁 구도에 있는 악덕 기업인, 혹은 그들의 하수인들이었다.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러시아인 가릴 것 없이 말이다. 다미로는 입을 틀어막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추적추적 외탄의 뒷골목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호텔 ‘리즈 캐슬’은 일을 마친 후 다미로가 가 있을 곳이었다.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역시 빅토리아풍 외관에 2층 규모의 아담한 호텔이었다. 담쟁이넝쿨이 벽을 휘감고 감탕나무로 화단 울타리를 친 석조건물이었다.

오라버니…….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는 바깥과 달리 따스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호텔을 다미로는 한참 동안 바라만 보고 있었다. 30분쯤 지났을까? 그녀는 자그마하지만 예쁜 장식이 달린 호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预约的名字…… 李曄。(이엽…… 이란 이름으로 예약했는데요.)”

흠뻑 젖어 빗물이 떨어지는 코트를 입은 그녀를 프런트 직원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곧 예약 장부를 확인한 영국인 직원은 그녀에게 예약된 방의 호수가 적힌 열쇠를 건넸다.

방은 2층 남쪽 가장 끝 방이었다. 호텔의 레스토랑 건물과 마주 보는 방향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서 잠시 문을 닫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깨끗한 침구, 깨끗한 카펫, 깨끗한 커튼이었다. 모두가 포근해 보이는 풍경이었다. 춥고 지치고, 두려운 그녀를 위해 태익이 신경 써 골라 둔 호텔이 분명했다.

하지만.

가즈시케는 그녀가 쏘지 않았다. 쏠 기회조차 없었고 그녀는 그곳에 있던 누구에게도 총격 사건과 관계가 있으리란 의심조차 받지 않게 되어 있었다.

대체…….

달칵. 다미로는 문을 닫고 천천히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다들 무사한 걸까? 계획대로 일이 되기는 했던 것일까? 홀 안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 모두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계획대로 다 그곳을 잘 빠져나갔기 때문인 건가?

다미로는 오유미가 정성 들여 만져 준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엉망이 된 것도 모르는 채였다. 자줏빛 원피스에 맞추어 신은 하얀 스타킹이 빗물에 젖어 엉망이 된 것도 몰랐다. 그런데…….

딸깍.

핫!

놀란 다미로가 뒤를 돌았다. 그녀 뒤에 있던 등이 켜진 것이다. 문 옆에 있는 작은 테이블 위의 스탠드 등이 그녀의 손에 닿지도 않았는데 불이 들어왔다.

“쉬!”

그가 조용히 하란 손짓을 했다. 놀랄 것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

그다. 태익이었다. 빅토리아 호텔 댄스홀에 입고 갔던 잘빠진 연미복 상의가 없는 채였다. 희미했지만 얼굴에 핏자국도 남아 있었다. 흩뿌려지듯 점점이 튄 혈흔이 분명했다.

“총은 내가 전달하지.”

“대장님께서요? 직접?”

“아무래도 오유미 당신은 이곳에서 인기가 너무 많아 보여서 말이야.”

태익이 농담처럼 웃으며 하는 말에 오유미도 동감한다는 의미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여자 휴게실로 어떻게 들어가려고 그러세요. 차라리 주변의 시선이나 좀 따돌려 주세요, 계획대로 제가 들어가게요.”

하지만 오유미는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려고 했다. 태익이 잠깐 주변을 살피듯 돌아봤다. 그러나 그는 곧 깊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됐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오유미는 순간 의문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태익의 생각을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는 이 계획의 책임자였다. 그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와인 테이블 아래에 있어요. 창가 쪽 방향으로.”

그녀가 기다란 파우치 속에 숨겨 들어온 독일제 소형 월터였다. 소음기는 곽이 갖고 있었다.

오유미가 불안한 눈으로 태익을 쳐다봤다. 태익은 오유미에게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토닥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가 와인 테이블로 다가가자, 벌써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처럼 곽이 그의 주머니 속으로 소음기를 넣어 주었다.

마치 서로 완전히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 지나치면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와인 테이블 주변은 사람들이 서로 몸이 부딪쳐야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번잡했다.

그가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승강기 동력실에서 대기 중인 공진과 제영, 그리고 최창학과 시계 분침을 맞추어 놓은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정전의 시작은 10시 5분. 다시 불이 들어오기까지 3분의 시간. 하지만 그 어둠의 3분 안에 태익이 다미로에게 총을 전달하고, 다미로는 그 총을 받아 소음기를 장착시켜 가즈시케가 있는 남자 휴게실로 들어가 일을 마쳐야만 했다.

그녀의 얼굴이 들키고 말고는 순전히 하늘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호텔 안은 정전 이라고 해도 바깥에서 들어오는 불빛에 그녀의 얼굴이 들킬 확률이 반 이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태익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맞추어 놓은 시계의 분침이 10시 5분을 가리키기 불과 30초 전이었는데도 말이다.

팟!

약속된 시간에 정확하게 불이 나갔다. 낯설지만은 않은 정전 사고에 직원들이 등불을 찾으러 가는 딱 그 시간이 여유였다. 어둠 속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고, 고함 소리가 들렸다.

댄스 홀 내에서 가즈시케를 경호하던 순사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했고……. 오유미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이 혼란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정신을 차려 계획대로 댄스홀을 나와 자신의 카페로 향했다. 혼비백산한 인파에 떠밀려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보지 말고. 일단 앉아라, 다미로.”

태익이 얼이 나가 자신을 바라보는 다미로의 어깨를 잡아 침대 위로 앉혔다. 그리고 무릎 한쪽을 바닥에 대고 그녀의 발 아래로 몸을 낮췄다.

“미련하게 걸어온 건가? 인력거라도 탈 것이지.”

발치에 앉은 그가 다미로의 발목을 잡았다. 젖어서 발을 옥죄는 가죽 구두를 먼저 벗겼다. 그녀가 태익이 하는 양에 멍한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소음기를 굳이 왜 써야 하나 했어요.”

“호텔 바깥의 경찰이 모여드는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구두를 벗겨 준 그가 다미로의 자줏빛 원피스를 위로 말아 올렸다. 빗물에 젖은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태익은 젖어서 차갑게 식었지만 보드라운 그녀의 피부 감촉을 느끼며 스타킹을 고정시킨 가터벨트를 먼저 풀었다.

“공진이하고 제영이가 승강기 동력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도요?”

그가 흙탕물이 튀겨 엉망이 된 다미로의 스타킹을 벗겼다.

“아래층의 호텔 경비 인력이 위로 올라가는 걸 늦출 수가 있으니까.”

“최창학 동지가 계단 문을 잠그고 호텔 외벽을 타고 내려와야 했던 이유는요?”

“총잡이가 그 계단으로 빠져나온 후에, 쫓아올 병력들을 막아 달아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였지.”

태익의 대답은 그녀의 스타킹 양쪽을 모두 벗기는 손길처럼 서두름이 없었다. 그러나 다미로의 목은 타들어 갔다. 태익의 얼굴에 남은 혈흔은 분명히 가즈시케의 것일 테니까.

“그렇게까지…… 마령의 도주로를 다 확보해 놓으시고서……. 왜 총은…… 오라버니가 쏘셨는데요?”

다미로의 스타킹을 다 벗겨 낸 태익이 그녀와 눈길을 맞췄다. 그녀의 집요하게 묻는 눈길을 그는 잠시 동안 말없이 응시했다. 그러나 그가 곧 그녀의 발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미로의 더욱 집요해진 시선이 그를 좇았다. 그러자 태익이 그녀의 시선을 피해 테이블 위의 담배 케이스를 집어 들며 말했다.

“여잘 혼자 사지에 몰아넣고 나만 유유히 빠져나오는 거……. 모양 빠지지 않나? 난 그렇게 살아 본 적이 없어서 그게 영 안 되던데. 동지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들 찜찜해했고. 아무리 퇴로를 확보하느라 각자의 역할을 다한다고는 해도, 사실상 뒤로 빠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안 그런가?”

피식, 웃으며 농담처럼 하는 말에 그가 진심을 숨기려 한다는 것을 다미로는 알 수 있었다. 유순해 보이는 웃음 뒤로 날카로운 지성과 뜨거운 열정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 태익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잘 포장해 적진 한가운데서 일당백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금을 조달해 주는 든든한 지원자인 동시에 유 선생이 이끄는 민족당의 수뇌였다.

그런데 그런 안태익이 자신의 손에 직접 피를 묻혔다. 더군다나 얼굴이 드러날 수도 있는 상황에 말이다. 다미로는 태익의 판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연민? 결코 그런 이유는 아닐 것이다. 태익은 연민 따위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다. 동생이자 연인으로 사랑했던 안다미로에 대한 미련?

“이유가 뭔지 말씀해 주세요.”

설마 그런 걸까?

담배에 불만 붙인지 혼자 타들어 가는 태익의 담배에서 다미로는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태익은 빤히 자신을 응시하는 다미로의 시선에 순간이지만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이내 피식 웃더니, 길게 타들어 간 담뱃재를 테이블 위의 재떨이에 털며 말했다.

“내 손으로 널 죽이겠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또 잊었나 보군.”

“그것과 이게 무슨!”

“마루야마가 함께 있었다, 오늘 가즈시케는. 그리고 무장한 가즈시케의 보좌관이 있었고, 경호하는 순사는 둘이나 있었지. 총잡이 마령이 그곳에서 가즈시케를 쏘고 살아 나올 확률은 높지 않았어.”

“그럼, 제가 오라버니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을까 봐, 오라버니 손에 직접 피를 묻히셨다는 말씀이세요?”

“뭐 대충.”

그가 더는 얘기하기 싫다는 듯 말을 얼버무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이 전화기에 머물렀다.

“시장한데, 뭣 좀 먹을까? 내내 긴장해서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배가 아주 등가죽에 붙어 버렸거든.”

그가 다미로의 의견을 묻듯 수화기를 든 채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다미로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런 태익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맨발에 닿는 카펫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따뜻했고 안락했다. 벗은 발로 태익과 마주 서니 정수리가 그의 코 근처밖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다미로는 다시금 깨달았다.

그의 광대에 희미하게 남은 혈흔을 다미로의 축축하고 차가운 손가락이 살며시 닦아 냈다. 태익의 잘생긴 입술에서 얕은 한숨이 새 나왔다.

먼저 입술을 포갠 사람은 다미로였다. 그의 목을 두 팔로 휘감았다. 풍만한 가슴을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딱 붙여 그를 밀어붙였다. 태익의 손에 있던 수화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태익의 두 손이 다미로의 허리를 세차게 옥죄었다. 입술과 입술이 격렬하게 서로를 갈망했다.

“거짓말…… 쟁이…….”

겹쳐진 입술 사이로 타액과 함께 흘러나온 다미로의 말소리를 태익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흡입했다. 그녀의 작은 턱을 움켜쥐고 깊게 더 깊게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그녀의 몸을 무겁게 옥죄는 벨벳 원피스를 엉덩이에서부터 들춰 올렸다. 허리 위로 치맛단을 완전히 밀어올린 태익은 불시에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었다.

헉!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 순간 태익이 그녀의 몸을 홱 돌려 테이블의 의자 등받이를 잡고 서도록 만들었다. 오유미가 준 가느다란 끈 팬티가 거칠게 뜯겨 나갔다.

그럼에도 다미로는 두렵지 않았다.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의자 등받이를 억세게 움켜쥐고 그를 돌아본 다미로의 눈에는 열망이 가득했다.

태익이 동그랗고 탐스러운 다미로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농익은 사과처럼 깊게 골이 파인 엉덩이 골을 쓰다듬어 내려오는가 싶더니 그녀의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밀어 넣었다.

“흐읏!”

그녀의 열망이 답을 얻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의 음경이 다미로의 다리 사이를 거세게 밀고 들어왔다. 아직 채 젖지 않은 그녀의 음부로 쿡 쑤시듯 박혀 들었다. 그리고 곧 제 마음껏 내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달궈진 쇳덩이 같았다. 푹 쑤시고 들어와 천천히 뒤로 빠져나가는 그의 것은 불쏘시개 같았다. 아직 그가 허리 짓을 시작하지도 않았건만.

다미로는 질 입구가 홧홧하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억눌려 있었던 그의 두려움, 공포, 긴장감,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사나워진 욕망이 느껴졌다.

“하…… 아…….”

다미로가 작지만 탄성을 뱉어 냈다. 천천히 뒤로 빠져 음경의 머리만 들어와 있던 그의 것이 묵직하게 다시 그녀의 음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달궈진 쇳덩이를 게걸스럽게 삼킨 질구에서 뿌연 액체가 주르르 허벅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태익은 제 것을 물고 빨며 놓아주지 않는 다미로의 밀지에 눈을 꽂은 채 다시 천천히 뒤로 엉덩이를 뺐다. 그녀의 허리가 한껏 수축했다.

빠져나가는 그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입구를 옥죄어 그의 것을 물었다. 달아오른 붉고 여린 속살들이 파르르 진동했다. 새까만 음모가 희멀건 애액으로 젖어 들었다. 검붉은 속살이 진동하며 그를 갈구하는 모양에 태익의 전신에 전율이 솟구쳤다.

지독하게도 색정적이고 지독하게도 음란했다. 시끄럽게 웃지도, 수다를 떨지도 않는 다미로는 자존심 강한 집고양이 같았다. 그러나 태익의 손길에 전율하는 그녀의 음부는…… 길 고양처럼 앙큼하고 음란했다.

음란해서 더 아름다웠다. 꿀꺽꿀꺽 사내의 음경을 삼키고 옥죄는 그녀의 붉은 밀지는 만개를 준비하는 자목련처럼 탱탱하고 졸깃했다.

잊은 적이 없었다. 잊히지가 않았다. 이런 다미로를.

“흐으 읏!”

귀두만 걸쳐 놓고 있던 그곳으로 태익이 다시 천천히 자신을 밀어 넣었다. 다미로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소리를 삼켰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녀의 교성이 미치도록 듣고 싶었다.

다미로의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제 음경을 그가 힘껏 쳐올렸다.

“하윽!”

그녀의 엉덩이가 요염하게 요동쳤다. 의자 등받이를 쥔 팔에 한껏 힘이 들어가 힘껏 밀고 들어간 그를 다미로는 힘을 다해 견뎌냈다. 태익의 손이 그녀의 팔을 어루만져 올라갔다. 아직 벨벳 원피스 안에 갇힌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쳐올리자, 그녀가 등을 젖혔다. 까만 머리채가 등으로 쏟아져 내렸다. 고양이처럼 유연한 곡선을 그린 허리가 아래로 한껏 내려갔다. 그 때문에 엉덩이는 태익을 향해 한껏 들려 올라가 있었다.

태익의 손이 제 것을 물고 옥죈 그녀의 붉은 속살을 양옆으로 당겨 벌렸다. 겹겹이 싸인 검자주색 꽃잎이 활짝 벌어졌다. 자줏빛 꽃잎이 애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모습이 낱낱하게 보였다.

사내의 음경을 물고서 꿀떡이는 모양이 낱낱하게 보였다. 또다시 전율이 뇌수를 찡하니 울렸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녀의 밀지를 드나든 사내가 자신뿐임은 물을 것도, 확답 받을 것도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욕망을 제어할 수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다미로의 음부에 제 것을 쑤셔 넣었다. 달궈진 쇠막대기로 그녀의 내부를 휘돌렸다.

짝! 짝! 짝!

단단한 태익의 사타구니와 차진 그녀의 엉덩이가 내는 마찰음이 작은 방에 적나라하게 울렸다.

“하윽! 오라버니!”

격랑에 떠밀려 가는 다미로는 등받이를 안은 두 팔에 이마를 묻고 그를 불렀다. 엉덩이를 잡고 있던 태익의 손 하나가 앞으로 돌아왔다. 한껏 발기해 통증을 호소하는 클리토리스를 그가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학!”

그녀의 고개가 완전히 뒤로 젖혀졌다. 벌어진 입술이 경련을 하듯 떨며 교성을 토해 냈다.

“흐으! 흐읏! 하으읏! 하읏! ……하읏!”

태익이 뒤에서 허리를 쳐올림과 동시에 통증이 들도록 발기한 클리토리스를 함께 자극한 탓이었다. 그 순간 태익은 새빨간 정염에 휩싸인 다미로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봐야만 했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얼굴이 아니던가.

태익이 자신의 남성을 그녀의 밀지에서 빼내었다. 엎드려 있던 그녀를 일으켜 빙글 돌려세웠다.

“하아,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쉬는 그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미로를 다시 의자 위로 바르게 앉혔다. 그녀의 양 무릎을 굽혀 의자 위로 올려놓았다.

다미로는 의자 위로 쪼그려 앉은 모양새가 됐다. 조금 전까지 그가 드나들던, 시뻘겋게 달아오른 음부를 또다시 적나라하게 드러낸 꼴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부끄럽지도 수치스럽지도 않았다.

태익을 원하는 갈망이 뇌를 삼키고 심장을 집어삼켜서 다미로는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눈빛만으로, 내쉬는 숨소리 한 자락만으로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다미로에게는 태익이었다. 다가오는 태익을 다미로는 빨갛게 열기 오른 눈동자로 올려 봤다. 물기를 먹어 더 붉어진 자줏빛 원피스에 휩싸인 그녀의 새하얀 젖가슴이 기대와 흥분으로 커다랗게 부풀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다미로의 밀지가 그를 향해 열려 있었다. 태익이 드나들었던 흔적이 고스란한 음란한 음부가 활짝 벌어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의 거친 음모에 휩쓸려 예민하게 부푼 그녀의 음순이 그를 욕정에 떨게 만들었다. 욕망에 함락된 태익을 다미로는 입술을 벌린 채 올려다보았다.

그가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벌어진 입술에 깊게 입을 맞췄다. 탱탱하게 솟은 엉덩이 뒤쪽으로 손을 넣었다. 그녀의 만개한 붉은 속살이 약간 위를 향하게 했다.

교합하기 딱 좋은 자세로 그녀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태익이 제 무릎 한쪽을 그녀의 엉덩이 옆으로 디뎠다.

“하……!”

다미로의 열기 띤 입술이 허벅지 바깥에 닿는 그의 뜨거운 열기에 밭은 숨을 내쉬었다. 그가 양옆으로 한껏 벌린 그녀의 허벅지 양쪽을 지그시 손으로 밀었다.

졸깃하게 부푼 탐스런 음순들이 벌어져 질구를 완전히 드러냈다. 용광로에서 갓 나온 것처럼 시뻘건 그의 음경이 다미로의 질 입구를 건드렸다.

움찔, 움찔. 자신의 사내를 발견한 여인의 음부가 그를 먹어 치울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움찔거렸다. 태익의 한 손이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다미로의 오금 한쪽을 위로 들어 올렸다. 만개한 그녀의 자목련 꽃잎이 더는 벌어질 수 없을 만큼 활짝 벌어졌다. 질 입구를 슬쩍슬쩍 건드리던 그의 음경이 천천히 그녀의 내부로 침입했다.

다미로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져 파르르 떨렸다. 활짝 열린 자신의 음부를 파고드는 태익을 보는 일은…… 심장이 멎을 것처럼 아찔했다.

피보다 검붉은 꽃잎을 가르고 들어와, 빈틈없이 콱 박혀 든 그를 보는 것은 고통스럽도록 색정적이었다. 하나 된 마음처럼 뒤섞인 서로의 체액이 제 음부를 적시고, 그와 맞물려 질척이는 소리를 만들어 내는 음란한 모습에 저릿한 전율이 심장에서부터 온몸을 휘감았다.

그가 허리를 쳐올렸다. 다미로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의 남성을 꽉 물고 놓지 않는 그녀의 음부가 천장으로 솟구치고 체액이 튀었다.

“하읏…… 으응…… 으응……. 하응…… 응…… 응.”

찰박찰박 찰박…….

다미로의 교성과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여름이었다. 다미로는 스무 살 여학교의 마지막 여름방학을 맞았다. 집안의 식솔들은 그날 모두 야외로 여름 소풍을 나갔다. 중복의 찜통더위를 피해 하루 동안 일을 쉬고 몸보신을 하는 삼계탕을 해 먹자며, 모두들 냇가로 몰려 나갔던 날이었다.

방학식을 마친 다미로가 돌아오자 집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무더운 여름 바람이 정원수를 느긋하게 훑고 지나는 소리만 가득했다. 제 방으로 돌아가 교복 저고리와 치마를 벗어 정리한 다미로는 얇은 원피스 차림으로 나왔다.

그런데 정원에 그가 있었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밑에 자리를 깔고 나무에 등을 기대 책을 보고 있는 태익이 있었다.

다미로와 눈이 마주친 그가 엷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그에게로 다가가지 못했다. 이렇게 집 안에 단둘이 남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한 달 전쯤 다미로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훔쳐보고 말았었다. 태익의 욕실. 그의 침실과 그의 서재 사이에 있던 욕실에서 벌거벗은 그를 훔쳐보고 말았던 것이다.

태평양이 얼마나 넓은지 몰라도 그의 어깨는 태평양 같았다. 잘 발달된 근육들, 잔근육들이 선명한 단전과 길고 튼튼한 다리. 그리고 불룩하게 솟은 엉덩이까지…….

여자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태익의 몸에 다미로는 넋을 놓았었다. 13살……. 그녀가 13살이던 무렵부터 다미로에게 태익은 사내였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지적이며 가장 잘생기고,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주인이며 오라비였다.

세상에 단 하나. 다미로가 품은 남자가 그였다. 세상에 오직 한 사람, 다미로가 믿고 의지하며 따를 수 있었던 사람, 그 사람이 태익이었다.

동경과 존경의 대상이었으며, 불타는 열망의 존재였다. 남들에게는 말수가 적고 다소 딱딱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을 가두고 살던 다미로에게, 그는 유일한 감정의 출구이며 출로였었다.

어렴풋이 자신의 가족사를 알아채고 있던 그녀에게……. 세상이 보내는 눈빛은 온통 동정과 연민이었다. 적어도 안국동의 식솔들은 그랬다.

그러나 안국동의 식솔들은 그녀 세상의 전부였다. 집사 이환도, 오누이처럼 자란 이곽도, 행랑아주머니와 행랑의 식구들도 그녀에게 보내는 눈빛은 언제나 동정이었다.

어미에게 아비를 잃고 버려진 불행한 출생, 그래서 불쌍하고 가여운…… 안다미로. 하지만 태익에게는 아니었다. 다미로를 보는 태익의 눈길에는 들뜨지 않은 열기가 전부였다.

뜨겁고 강렬하지만 오직 다미로만이 느낄 수 있던. 다미로 자신이 그를 열망하는 것처럼 그 역시 마찬가지라는 그 느낌. 출생부터 결코 좁힐 수 없는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의 그 눈빛 하나로 다미로는 그와 동등해짐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점점 더 동등해지고 싶은 욕망이 자라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그의 진짜 모습을 보고 말았던 것이다. 수컷으로서의 그의 본모습.

능숙하게 감정과 욕망을 감추는 사내로서의 그의 본모습.

욕실 문틈 사이로 그의 벌거벗은 당당한 몸을 훔쳐보던 다미로는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순간, 발이 얼어붙었다. 꼼짝할 수가 없었다.

태익이 그녀와 눈길을 마주한 채로 느긋하게 욕실을 나와, 커다란 수건으로 하체를 천천히 감쌀 때까지 다미로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그에게 잡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태익과 단둘이 집에서 마주친 것은 여름의 한가운데 날, 중복.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가 눈짓으로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와서 앉으라는 의미라는 것을 그녀가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머리가 아찔했지만 다미로는 그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그의 몸에서 나는 청량한 비누 향기와 그의 셔츠에서 나는 체취가 맡고 싶었다. 그에게 중국어를 배우는 날은 정해져 있었다. 그때 책상에 앉은 그녀의 등을 감싼 그의 품 안에서 맡을 수 있었던 냄새가 다미로는 미치도록 좋았다.

아름드리나무 아래 넓게 펼쳐진 자리 위로 올라섰다. 그의 옆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무릎을 포개어 앉았다. 원피스가 살짝 말려 올라가 그녀의 고운 무릎이 드러났다.

그때, 태익의 뜨거운 시선이 그 무릎에 닿는 것을 다미로는 느낄 수가 있었다. 자신이 그를 향해 느끼는 욕망을 그 역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꺅!”

그러나 그 묘한 적막 속에 뜨거운 욕망이 흐르던 시간을 방해한 것이 있었으니, 나무에서 떨어진 송충이였다. 바로 무릎 앞으로 떨어진 송충이에 놀라 그녀가 팔딱 뛰어올랐다.

저도 모르게 태익의 다리를 엉덩이로 깔고 앉아 버렸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때에는 이미 두 사람의 눈길이 얽혀 든 다음이었다.

그의 입꼬리에 옅은 웃음이 서렸다. 먼저 입술을 포갠 쪽은 다미로였다. 누르고 눌렀던 마음이었다. 이환에게 청혼서가 들어올 때마다 미친 듯이 불안했던 다미로였다.

그래도 그 순간의 용기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 밀쳐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벌인 일이었다. 감히 안태익에게 어울리지도 않을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가 다미로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수줍게 포개어 온 다미로의 입술을 더 세차게 빨아 흡입했다.

서투른 다미로의 입술을 그가 부드럽게 리드해 갔다. 보드랍고 여린 입술을 음미하고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혀를 밀어 넣어, 그녀의 혀뿌리까지 흡입했다.

그러다 목구멍까지 혀를 집어넣어 진하게 그녀를 맛보았다. 동그란 치열을 탐험하듯 더듬고 입술 안쪽의 여린 살들을 유린했다. 천천히 포개었던 입술을 떼자, 타액이 길게 묻어났다.

다미로는 숨을 헐떡이며 새빨개진 뺨으로 그와 시선을 맞췄다. 태익의 입술에 다시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마주했던 그의 시선이 원피스 사이로 살며시 드러난 가슴골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심장이 쿵쿵쿵. 대포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미로는 그의 눈길이 제 가슴골에서 떠나길 바라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원피스 앞자락을 여민 단추로 손이 갔다.

차마 푸르지 못하고 애먼 단추만 손가락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태익의 손이 그런 다미로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톡. 톡.

그가 그녀가 만지작거리던 단추를 풀었다. 단추 2개가 풀어진 원피스 사이로 새하얀 브래지어가 드러났다. 태익의 손등이 브래지어 위로 드러난 뽀얀 젖무덤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조금 더 욕심이 난 듯, 브래지어 한쪽을 아래로 살며시 밀어 내렸다. 탐스럽게 익은 앵두 과실이 톡, 고갤 내밀었다. 다미로는 파르르 떨려 오는 숨소리를 내지 않으려 숨을 참았다.

그리고 그 순간, 보드랍고 뜨거운 태익의 입술이 젖꼭지에 닿는 것을 깨달았다. 무섭지 않았다. 두렵지도 않았다. 태어나 처음 받는 사내의 입술, 숨결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태익이었으니까.

젖꼭지가 그의 입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길 갈망했다. 그의 입술에 완벽하게 먹히면 어떤 느낌일지, 그 발칙한 상상만으로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흐트러진 숨결을 정리하듯 잘생긴 입술을 꾹 다물어 커다란 들숨을 마신 후, 객쩍게 웃는 게 다였다. 그리고 그 객쩍은 웃음에 이렇게 말했었다.

“꼬맹이……. 정말로 다 자랐구나, 이젠.”

맴맴, 맴맴, 맴…….

머리 위에서 우는 매미 소리에 귀가 따갑던 날이었다. 무더운 열기를 실어 온 여름 바람이 다미로의 머릿결을 짓궂게 흐트러트렸다.

“제발……!”

태익의 팔을 움켜잡은 다미로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극도의 흥분과 극한의 쾌락에 그녀는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미치도록 태익을 더 갖고 싶었다. 단 1분 1초도 그가 제 몸속에서 빠져나가길 바라지 않았다.

엉덩이를 단단하게 조였다. 아랫배에 있는 대로 힘을 주어 질구를 조였다. 태익의 음경을 삼킨 그녀의 음부가 희뿌연 애액을 꿀렁꿀렁 쏟아 냈다.

밤하늘을 가르며 대기와 부딪쳐 타오른 유성처럼 격하게 불살랐던 쾌락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을 다 태우지 않았다는 것을 다미로는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제 여자를 다 갖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태익이 욕망으로 발갛게 익은 그녀의 작은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깊숙하게 입술을 맞물려 칭얼대는 그녀를 달랬다. 체액으로 범벅되어 끈적이는 다미로의 엉덩이 아래로 그가 두 손을 넣었다.

번쩍. 그녀의 몸이 들렸다. 다미로의 늘씬한 두 다리가 그의 허리를 감았다. 태익이 그녀가 앉던 의자로 앉았다. 이제 다미로는 태익을 타고 올라앉아 있었다.

“아! ……하아!”

다미로는 그의 복근에 제 음부 전체가 닿는 것을 느꼈다. 절로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허리가 뒤로 휘었다. 그곳을 그의 단단한 복부에 밀착시키고 엉덩이를 천천히 휘돌렸다.

그가 아직도 허리 위로 그녀를 덮고 있는 원피스 앞 단추를 차례차례 풀었다. 그러자 자줏빛 원피스가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져 나긋한 허리에 걸쳐졌다.

등 뒤로 손을 돌려 브래지어 버클을 풀었다. 동그랗고 탱글탱글하면서도 풍만한 사발 모양의 젖가슴이 한껏 부풀어 묵직하게 출렁였다. 다미로가 그의 복근에 음부를 문지를 때마다 사발 모양의 새하얀 젖가슴이 원색적으로 흔들렸다.

미끈하고 탄력적인 허리를 따라 태익이 힘주어 손바닥을 쓸어 올렸다. 그녀를 완벽하게 범하고 싶었다. 제 몸 아래서 미쳐 날뛰며 울부짖게 만들고 싶었다.

말복이었다. 그해에는 이상하게도 끝에 다다른 여름의 절정이 너무도 무거웠다. 그래서였는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시커먼 하늘은 억수같이 비를 쏟아 내고 있었다.

아침부터 하늘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는 비에 안국동은 고요하기만 했다. 정원을 손보는 손길도, 빨래를 하던 손길도, 부지런히 먹을 것을 다듬고 씻어야 하는 손길도 쉴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집안의 식솔들 모두가 방 안에 콕 들어박혀 낮잠을 자거나, 미루어 두었던 바깥일을 보러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본채에는 태익만이 남아 있었다. 이환마저도 아들 이곽과 함께 안과병원엘 나가 있었다.

“오라버니…….”

서재였다. 의자에 깊게 몸을 묻은 태익은 책에 열중해 있었다. 적어도 다미로가 보기에는 그랬을 것이다.

“모르는 게 있어서요.”

서재 문간에 서 있던 다미로의 손에는 중국어 책이 들려 있었다. 태익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그녀를 향해 의자를 돌려 앉아, 뚫어지게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다미로는 얇은 나일론 원피스 차림이었다. 치맛단 길이가 무릎 아래까지 오지만 얇고 신축성 있는 원단 탓에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들어와.”

태익이 뚫어지게 그녀를 보던 시선을 책상 위로 돌리며 말했다. 긴장하고 있는 다미로의 숨소리는 떨어져 있어도 태익을 자극했다.

“중국언가?”

“네.”

“뭘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는 애써 자신의 욕망을 무시하며 그녀가 내민 책으로 시선을 모았다. 그날……. 정원에서의 일 이후로 그의 눈길은 다미로를 놓치지 않았다.

빨래를 너는 모습이 예뻐서 웃고, 달랑거리는 가방을 들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어여뻐서 웃고, 무더위를 못 이겨 세숫대야에 발을 담근 모습에 욕망이 꿈틀거렸다.

언제부터 그녀가 여자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거리낌 없이 몸을 맞대던 어린 다미로가 그를 의식하면서부터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를 완벽하게 여자로 의식하게 된 시작은 봉긋하게 젖가슴이 솟고 월경을 시작하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였을 것이다. 어느 날 곽이 다미로를 보는 눈길에서 태익은 질투를 느꼈다.

그녀의 모습을 좇는 곽의 시선에서 그녀를 멀리 치워 놓고 싶었다. 가끔 다미로의 여학교 교문 앞에 차를 세워 놓고 그녀를 기다렸다.

그때마다 교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학생들을 볼 때면 어이없게도 후끈하게 머릿속에 열이 올랐다. 그리고 그런 남학생들에게 냉담한 다미로를 보며, 그는 말갛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소중했다. 안태익에게는 그녀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핏줄은 아니지만 가족이자 여동생이었으며…….

그럼에도 짐승처럼 격렬한 욕망을 품게 만드는 여자였다. 미치도록 범하고 싶은 여인이었고 제 것으로 만들어 평생 곁에 묶어 두길 갈망하는 성숙한 여인이었다.

함께 자란 기억들이……. 태익으로 하여금 그녀를 속속들이 다 알게 했으니까. 그녀가 어떤 아이인지, 어떤 아이에서 어떤 여자로 성숙해 갔는지 그의 기억 속에 또렷했으니.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운명이었고 숙명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마음이 먼저 자라고 나니, 점점 그녀를 향한 성적 욕망도 그 마음의 넝쿨을 따라 무성하게 자라나 가지를 뻗어 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부터 막혔어요. ……아무리 옥편을 뒤져도 찾을 수가 없어서.”

“그 옥편, 내가 사 준 거 맞기나 한 거냐?”

태익이 옅은 웃음으로 물었다. 다미로는 잠시 당황해했다. 그러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그냥 예전부터 서재에 있던 것으로…….”

“내가 사 준 건?”

“그건…….아껴서 보느라.”

다미로는 옆으로 고갤 돌려 감히 태익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묶은 머리칼 몇 올이 빠져나와 땀과 습기로 끈적이는 그녀의 목에 달라붙어 있었다.

가녀린 목과 곧게 벋은 쇄골을 따라 길고 까만 머리칼이 딱 들러붙어 있었다. 태익이 손을 뻗어 그녀의 쇄골 위로 붙은 머리칼을 떼어 냈다.

그제야 다미로가 놀란 눈으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햇볕이 뜨겁던 그날 중복에 입술을 스쳤던 분홍 빛깔의 과육……. 차마 머금지 못했던 그 탐스러운 과실이 태익은 너무나도 욕심이 났다.

놀라 동그래진 다미로의 눈에서 시선을 떼어 쇄골을 따라 가슴솔로 눈길을 미끄러트렸다. 그녀의 봉긋한 젖가슴이 크게 울렁였다. 하지만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태익의 욕망 가득한 눈길을 알면서도 그녀는 뒤로 물러나지도, 몸을 굳히지도 않았다. 그저 긴장으로 흐트러진 숨결을 뱉어 내며 태익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쇄골에 머물러 있던 손가락을 태익이 미끄러트려 원피스의 네크라인을 길게 아래로 잡아 늘였다. 얇고 신축성이 좋은 나일론 원단은 쉽게 아래로 늘어났다.

탐스러운 젖가슴을 담은 하얀 브래지어가 드러났다. 태익이 브래지어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브래지어 컵 한쪽을 그녀의 젖가슴 아래로 당겨 내렸다.

타락죽처럼 하얗고 말캉한 다미로의 젖이 온전히 제 모습을 다 드러냈다. 태익은 순간 숨을 삼켰다. 엄지를 세워 뽀얀 젖가슴 위로 톡 고개를 내민 분홍 젖꼭지를 문질렀다.

“하……!”

다미로의 꼭 깨문 입술 사이로 미처 삼키지 못한 탄성이 새 나왔다. 놀란 그녀가 두 손으로 제 입술을 틀어막았다. 태익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입술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가벼운 손길 하나에도 이토록이나 순진하게 떠는 다미로가 완전히 성숙한 사내의 욕망에 삼켜지면 어떻게 될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그가 입술에 반호를 그리며 다미로의 젖꼭지를 새빨간 혀로 날름 핥았다. 그녀가 파르르 떨며 어깨와 가슴을 움츠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뒷걸음질하지 않았다.

태익은 눈을 들어 그녀의 눈동자를 확인했다. 열기 띤 눈동자가 그를 열망하고 있음이 보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두 뺨이 부끄럽지만 용기 내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었다.

갖고 싶다……! 보고 싶다……!

순간 억눌려 있던 태익의 욕망에 불이 붙었다. 다미로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의자에 앉은 그의 다리 사이로 다미로를 당겨 세웠다. 다른 쪽 젖가슴을 감춘 원피스와 브래지어를 한꺼번에 끌어 내렸다.

“흡!”

그녀가 숨을 삼킨다. 태익은 탐스럽고 짙은 색으로 익은 젖꼭지를 입술에 머금었다. 뜨거운 혀로 오돌토돌 돌기가 일어선 유륜을 커다랗게 원을 그려 핥았다.

진홍빛 유두가 바르르 진동했다. 꼿꼿하게 고갤 세워 어서 빨아 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것 같았다. 태익은 혀를 세워 발딱 고개를 세운 젖꼭지를 잘근잘근 깨물다가 다시 혓바닥으로 길게 핥았다.

난생처음 겪는 야하고 음란한 자극을 견디기 위해 다미로가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는 모습에 태익은 심장으로 뜨끈한 피가 몰려듦을 느꼈다.

눈보다 흰 다미로, 봄날 목련꽃보다 더 순결한 다미로가 제 손길에 정염으로 물드는 모습은 짜릿한 쾌락이었다.

다미로는 살집이 별로 없었다. 다른 여자들보다 키가 컸지만 골격이 가늘었다. 그 때문에 그 가녀린 어깨와 가는 허리 사이의 풍만한 가슴은 더 애욕적이었다.

그러나 태익의 시선을 늘 잡아끌던 곳은 그녀의 쭉 뻗은 다리와 가는 발목이었다.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고 그녀가 나풀거리며 정원을 가로지를 때마다…….

그는 이따금 서재의 커다란 의자에 깊게 등을 묻은 채, 습관적으로 엄지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며 상상했다. 저 어여쁜 발목에서부터 늘씬하게 뻗은 종아리를 더듬어 올라가……. 허벅지에 이르렀을 때…….

그 두 허벅지 사이의 그곳은 어떨까…….

짐승 같은 생각이라며! 깨물던 손가락에서 저도 모르게 피를 내면서도 태익은 생각만으로 심장이 뛰는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다미로를 향한 마음이 너무나 깊어서.

마음의 깊이만큼 욕망의 강도가 강해져 가서.

“보여 줘, 다미로.”

태익의 애원에 다미로의 손가락에서 힘이 풀렸다. 어느새 그의 책상 위로 몸이 눕혀진 다미로는 허리까지 말려 올라간 치맛단 아래, 팬티를 움켜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태익이 천천히 그녀의 팬티를 아래로 잡아 내렸다. 그녀가 한 발을 들어 팬티를 벗기는 일을 도왔다. 수줍은 스무 살 다미로의 음모가 태익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다.

“다…… 성숙했는지 보자, 다미로.”

“…….”

저항의 의미는 아니래도, 자꾸만 오므라드는 다미로의 허벅지를 태익은 부드럽게 벌렸다. 그리고 곧 그녀의 두 다리를 책상 위로 올렸다. 무릎을 굽혀 발바닥을 책상 위로 디디게 했다.

그러자 음모와 사타구니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숨어 있던 다미로의 음부가 수줍게 드러났다. 아름다웠다. 깨끗하고 고운 선홍색이었다. 사내의 손길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다미로의 밀지는 곱고 순결했다.

길게 갈라진 선홍빛 음순이 이슬을 머금은 꽃잎처럼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래서 태익은 범하고 싶었다.

그녀의 순결한 선홍색 밀지가 태익 자신에게 범해져 검붉은 육즙을 뚝뚝 흘리며 욕망에 진동하게 만들고 싶었다. 순결하고 순수한 처녀를 향한 잔인한 사내의 욕망이었다.

하지만 범하듯 그녀를 안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영혼이 없는 수컷 짐승의 욕망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태익은 다미로에게 그저 수컷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절대적인 존재, 그녀의 영혼과 육체를 다 소유할 수 있는 세상 유일무이의 남자……. 남편……. 그녀가 낳을 아이의 아버지가 되리라 다짐했으니까.

비록…… 그녀가 최순임의 딸이라 할지라도.

책상 위의 다미로 곁으로 태익은 몸을 세워 누웠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입술을 먼저 삼켰다. 서투른 그녀의 혀가 당돌하게 그의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곧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태익이 깊숙하게 맞물린 입술 사이로 짓궂게 웃었다. 그녀의 온몸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태익은 책상 위의 술잔 속에서 녹다 말은 얼음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새까만 음모 위로 놓았다. 차가운 얼음물이 음부 사이로 흘러내렸다.

선홍색 순수의 밀지. 그 밀지 속의 오동통하게 부푼 음순 사이로 얼음물이 파고들었다. 태익이 팔꿈치를 짚어 허리를 세웠다. 탐스러운 음모 사이로 살며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다미로의 다리가 움찔거렸다. 처녀의 본능대로 허벅지에 힘을 줘 다리를 오므렸다.

“다미로…….”

달콤한 목소리로 태익은 그녀를 얼렀다. 그녀의 허벅지에서 힘이 빠졌다. 탐스러운 선홍빛 꽃잎을 그가 손가락으로 벌렸다.

“오라버…… 니…….”

부끄럽다고, 창피하다고. 말하고 싶은 다미로의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태익은 멈추지 않았다. 더 활짝 겹겹이 겹쳐진 선홍색 꽃잎을 손가락으로 벌렸다.

먹고 싶었다. 삼키고 싶었다. 새빨갛게 열이 올라 단단해진 혀로 벌어진 음순 사이를 길고 힘 있게 핥아 올렸다.

“안 돼……!”

누워 있던 다미로가 발딱 일어났다. 그러나 그 순간 고개를 든 태익과 눈이 마주쳤다. 새빨간 색이었다. 다미로의 얼굴도 입술도, 그녀가 내뱉는 숨결도 부끄러움으로 새빨간 색이었다.

방만하게 다리를 벌려, 태익에게 음부를 활짝 드러낸 자신의 모습에 다미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태익은 그녀의 뺨을 감싸 쥐어 그 시선이 다른 곳으로 비켜나가지 못하게 했다.

자신 앞에서 치모와 여인의 음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다미로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흥분과 기대로 부풀어 올라 맞붙은 음순을 다시 벌렸다.

“하……!”

다미로의 입술이 벌어졌다. 두려움과 기대, 흥분으로 뒤엉긴 그녀는 숨소리마저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태익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벌린 음순 사이로 동굴 입구를 찾았다. 분홍빛이었다. 싱싱하고 축축하게 젖어 번들거리며 그를 갈구하고 있었다. 다미로의 무릎이 오므라들었다.

“오라버니…….”

기어들어 갈 듯 작은 목소리가 창피하다 애원하고 있었다. 태익은 고갤 들어 다미로를 올려봤다. 순결한 다미로는 퇴폐적이었다. 붉은 입술로 밭은 숨을 내쉬고, 반라의 몸은 육감적으로 번들거렸으며, 브래지어와 원피스는 엉망으로 벗겨져 그녀의 허리춤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태익에게 억누르기 힘든 충동이 밀려들었다. 다미로를 욕망하는 정욕을 주체하기 고통스러웠다.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먼저 그녀를 배려하고 탐험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앉은 책상 안쪽으로 돌아가 등 뒤에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뒤에서 그녀를 안은 채로 그가 의자에 앉았다. 허벅지 위로 엉덩이를 앉히고 무릎 위에 발을 딛게 했다.

다미로의 벗은 등을 껴안고 탱글탱글해진 젖가슴을 쥐어짜듯 움켜쥐었다.

“하읍!”

놀란 다미로가 숨을 삼켰다. 그러나 태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다른 손을 밀어 넣었다. 그의 기다란 가운데손가락이 졸깃한 음순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가 그녀의 귓불을 물며 속삭였다.

“봐라, 다미로.”

다미로가 떨리는 숨을 삼키며 그의 명령대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스르르.

힘이 들어갔던 허벅지가 절로 활짝 벌어졌다. 겹겹이 싸여 있던 선홍빛 음순도 활짝 만개를 했다.

그 순간 태익의 가운데손가락이 동굴 입구를 맴도는 것 같더니…….

“……하. ……으읏! 오 오라버니!”

안으로 삽입된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다미로의 등이 경련하듯 떨렸다. 그녀의 엉덩이가 경련을 일으킨 듯 펄떡거렸다. 태익의 등줄기로 강렬한 전율이 솟구쳤다.

뜨거웠다. 그녀의 내부는 미끄럽고 질척거렸다. 그의 손가락을 옥죄는 통로는 좁고 탄력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쾌락은……. 그녀의 질 속을 파고든 자신의 손가락을 보는 것이었다.

다미로의 은밀한 그곳, 지금껏 그 누구도 들어가 보지 못했던 붉은 밀지에 쑤셔 박은 제 손가락을 그녀의 음부가 게걸스럽게 빨아 당기는 모습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다미로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극도의 긴장과 흥분으로 그녀의 동공이 커다랗게 팽창해 제 질구에 박힌 태익의 손가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푹 안으로 쑤셔 넣었다가 느릿하게 밖으로 손가락을 빼냈다가 다시 푹푹 쑤셔 넣었다.

“하아……. 하아……. 하아……. 으응, 응응…….”

다미로가 제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태익은 제 손에 얼굴을 묻은 다미로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그녀의 고개가 뒤로 꺾여 태익의 시선에 붙잡혔다.

“키스해 달라고 해…….”

“해…… 해 주세요.”

태익의 명령에 그녀는 순순히 굴복했다. 저항할 이유도 힘도 없었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엄청난 쾌락과 자극에 다미로는 완전히 함몰되어 있었다.

열망했던 사내였다. 매 순간 매초 열망했다. 사내를 열망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그를 원했다. 그와 마주칠 때마다 몸이 달아올랐다.

그의 눈길이 스칠 때마다 브래지어 속 유두가 빳빳하게 솟았었다. 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 때마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고 중심부에 시큰한 통증이 밀려들었었다.

그것은 다미로에게 해갈되지 않는 가뭄과도 같았다. 태익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미로의 뒷머리가 태익의 어깨에 떨어졌다. 입술에 강하게 부딪쳤다. 동굴을 파고든 손가락이 푹푹 그곳을 쑤시고 강하게 박혀 들었다. 그녀의 두 다리가 완전히 벌어졌다.

그렇지만 내부를 파고든 태익의 손가락을 힘껏 문 그녀의 질구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게걸스럽게 빨고 당기고 조였다. 태익의 손바닥이 다미로의 불두덩에 자리한 새빨간 석류 알맹이를 비벼 댔다.

“하악!”

다미로의 음부가 위로 솟구쳤다. 엄청난 강도의 자극이었다. 태익은 맞물렸던 입술을 떼어 헐떡이는 그녀를 감상했다. 그녀가 서투른 엉덩이짓을 할 때마다 탱탱하게 솟은 젖가슴이 크게 출렁거렸다.

출렁거리는 가슴골 사이로 그녀의 몸에서 솟은 땀방울이 또르르 굴러 내렸다. 태익의 손가락과 그 손가락을 삼킨 그녀의 질구가 질척거리는 마찰음을 냈다.

태익의 아랫도리에 금방이라도 터질 듯 격심한 통증이 일었다. 격렬한 방사욕을 참아 내느라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그녀에게 자신의 남성을 박아 넣고 싶은 욕구를 참아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똑똑똑.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

“도련님…….”

멀리 달아나 버렸던 이성이 되돌아오는 소리. 세상을 다 집어삼킬 듯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욕망에 삼켜졌던 두 사람을 되돌리는 소리.

숨이 넘어갈 것처럼 놀라 다미로가 빳빳하게 온몸을 경직시켰다. 태익의 손가락이 그녀의 내부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상황을 깨달은 다미로의 질 여린 살들이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리가 움츠러드는 순간이었다.

태익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쉬……. 괜찮아, 괜찮다, 다미로.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다미로.”

그녀의 질 속에서 손가락을 빼내, 그녀의 음부 전체를 뜨거운 손바닥으로 지그시 감싸 쥐면서였다.

뭉근하게 남은 욕망과 차마 다 채우지 못한 쾌락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다미로의 턱을 잡아당겨 태익은 길고 부드럽게 입술을 포개었다.

똑똑똑.

밖에서 이환이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득했다.

촤아.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에 세상 모든 것이 삼켜져 버렸던 날이었다.

* * *

비에 젖은 상해의 새벽은 어수선했다. 강변을 달리는 공공조계지 경찰차의 사이렌이 요란했고 검문검색을 하는 경찰의 호각 소리도 시끄러웠다.

똑똑! 똑똑! 쿵쿵! 쿵쿵쿵!

일본 조계지 오유미의 카페 2층. 사저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거칠기 그지없었다. 오유미는 벗다 만 드레스 그대로, 어깨 한쪽을 내린 채 잰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요동치는 심장박동을 손으로 지그시 억눌러 심호흡을 했다. 잘 손질되어 올렸던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어깨끈이 흘러내린 드레스의 네크라인을 더 아래로 잡아당겨서 검은색 브래지어를 살짝 드러냈다.

달칵, 문을 열었다. 지친 몸짓으로 문에 기대어 서서 파르르 입술을 떨며 그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신…… 가요?”

중국인 경찰과 일본인 순사가 자못 놀란 눈으로 오유미를 응시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쪽은 일본 순사였다.

“오유미 양, 잠이 드셨던 모양입니다.”

“아……. 아뇨, 막 들려던 참이었어요. 수면제를 찾고 있었는데 아직 찾지 못했거든요. 오늘, 아니 벌써 어젯밤이군요. 아무튼 그 일에 너무 놀라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요.”

“아! 그러셨군요!”

아직도 어젯밤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는 듯, 충격에 휩싸인 오유미의 표정 연기에 중국인 경찰이 신나게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일본 순사는 열린 현관문 틈새로 안을 살피며 물었다.

“혹시, 안에 다른 누가 함께 계십니까?”

“……왜요?”

오유미는 잘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길거리 검문검색뿐 아니라, 어제 그 댄스홀에 왔던 사람들 중 신상 파악이 된 모든 이들의 소재를 파악하려는 것이리라.

댄스 홀 안의 모두가 용의선상에 올랐으니 말이다. 오유미는 어젯밤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전화를 받았다. 댄스홀을 빠져나와 집으로 들어온 직후였다.

“오늘 밤에 난 오유미 당신과 같이 있는 걸로 해 둬. 혹시 당신 집으로 경찰이 찾아올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염두하고 하는 말이야. 단, 이엽이 아니라 안태익으로 있었던 걸로. 알았나?”

태익의 짧은 전화 한 통이었다. 이엽으로 배를 타고 입국했지만, 예상 밖의 인물 마루야마 한조와 맞닥트리지 않았던가. 그 덕에 이엽으로 이곳에 들어온 태익은 실명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아직 잘 몰라도, 마령이 한조 앞에서는 그의 여동생 행세를 해야 했다는 사실도 그녀는 잘 인지하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십니까? 오유미양?”

일본 순사가 성마르게 그녀를 다그쳤다. 오유미는 그의 시선이 비집고 들어가는 자신의 집안 내부를 가리려는 듯 팔을 뻗어 문설주를 잡았다.

일부러 하는 시늉이었다. 집 안에 태익이 있다는 것처럼 보이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경찰이시지만…… 무례하시네요. 그래도 정 대답을 원하신다면, 지금 약혼자와 함께 있어요.”

마른침을 삼키며 일부러 안절부절, 횡설수설하는 척을 했다.

“방금…… 그러니까…… 우린 어젯밤 일의 충격을 잊기 위해서 그걸 했고, 아시죠? 그게 뭔지는? 결혼을 앞둔 남자와 여자가 밤에 함께 할 일이 뭔지……. 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제 약혼자는 지금……. 샤워 중이랍니다.”

일부러 그렁그렁 눈물을 글썽이며 오유미는 감정을 과장했다. 마치 어젯밤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듯 말이다.

“죄송합니다, 오유미양. 실례가 많았습니다.”

사과는 중국 경찰이 먼저 했다. 조금 전까지 까랑까랑한 눈으로 그녀와 집안을 살피던 일본 순사도 고개를 까닥여 사과의 말을 남겼다. 그들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확인한 오유미는 살그머니 문을 걸어 잠갔다.

서늘한 겨울비 속에서도 그녀의 이마엔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녀는 문에 기대어 잠시 전화기를 응시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작전은 성공이었다.

동지들 중 다친 사람도 없었고 아직까지 잡히거나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오유미는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태익이……? 그가 왜 그런 위험을 무릅썼던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길고도 긴 밤이었다. 모레든 글피든, 태익의 부름으로 동지들이 다 모인다면 진한 축배를 들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가슴이 뭉클하고 두근거렸지만, 그녀의 가슴 한쪽은 불안했다.

어쩌면 태익을 ‘약혼자’라고 호칭했던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일 석간신문의 연예란에 커다랗게 보도될지도 모를 일인데도 말이다.

‘상해 최고의 미녀 배우 오유미, 그녀의 약혼자는 경성 최고의 갑부 경성상회의 주인 안태익’이란 제목으로.

* * *

한조는 미지근한 물줄기에 핏물을 씻어 냈다. 아직도 귓속에 이명이 쟁쟁했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음이 빤하건만 귓속에서는 총성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귓바퀴 안쪽을 타고 약간 더 깊은 곳, 고막의 바로 앞쪽에서 두근두근 심장박동과 같은 박자로 총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분명…… 오늘 그 총은 소음기를 끼고 있었을 텐데.

한조는 씻겨 내려가는 핏물을 보며 답답한 가슴을 두드렸다.

하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총성이 사라지길 바라면서 물줄기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미로. 하얗게 질려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가 생각났다.

그러자 생각이 파도를 타고 시간을 거슬렀다. 그녀와 춤을 추던……. 나긋한 팔의 감촉, 제 손에 닿았던 탄력적인 허리의 느낌. 무심한 듯 차갑지만 그녀의 눈동자 속에 너울대는 열기.

한조는 다미로를 떠올리며 아릿해지는 가슴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는 쓰게 웃었다.

왜 하필 너는 조선인인가, 안다미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싫어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반드시 굴복시켜야 할 민족이었다. 내선일체를 이루어 황국식민을 만들어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황국의 거름이 되어야 했으니까.

한조에게 조선은 황국의 거름이 될 나라일 뿐이었다. 비록 조선인 안태익에게 고개를 조아릴 때가 있기는 해도, 그는 근본적으로 일본인인 자신이 우월하다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마루야마입니다.”

핏물을 씻어 내고 머리칼이 마르기도 전에 그는 호텔 방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청력이 살아남은 왼쪽 귀에 한조는 수화기를 댔다.

-확… (인) 했습니다, 한조 소위님.

저주파 영역과 모음의 발음들이 들리지 않았지만, 집중을 하면 전화로도 대화에 무리가 없는 것이 한조의 상태였다.

“그래?”

일본 조계지에 주둔 중인 관동군에 한조는 다미로의 소재 파악을 부탁했었다. 괜스레 그녀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용의선상에 오르는 일을 막고 싶어서였다.

-예. 말씀하신 호텔에 (어)… 젯밤에 체크… (인)을 했더군요.

후일, 태익에게 면도 세울 수 있는 일이고 말이다. 어쩌면 그의 집에 더 자주 드나들 수 있는 구실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신분이 확실한 여자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예, 말씀을 믿지 못한 것은 아… (니)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조선… (인)이라서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소위님.

“용의자는? 압축이 되었나? 어젯밤 그곳에 있었던 인원만 족히 150명 가까이 되는 것 같던데.”

-그게, 아직… (입)니다. 만일 좁혀진다고 해도 일단은 수사를 위해 기밀에 부쳐질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에 있던 모든 중국인, 조선인을 포함한 외국인, 즉 일본인을 제외하고는 전부 조사대상… (이)긴 합니다.

“그런가? 그럼 상해 밖으로 나가는 일도 당분간 제한이 되는 것인가?”

-아니요, 신분이 확실한 사람들은 제한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알았네. 고생하게.”

-예! 소위님. 아버님께도 안부 전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지.”

한조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화장대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봤다. 아버지 마루야마 지로 경무국장까지 팔아 가며 다미로에게 잘 보이려는 자신이 낯설었다.

그렇지만 싫지 않았다. 여자를 생각하면 빨라지는 심장박동 역시 생소했지만 그 두근거림이 좋았다. 들리지도 않으면서 예민하게 귓속을 건드리는 이명이 다미로만 떠올리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마치 구원의 아리아 같지 않은가! 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도륙하던 장교가 구원을 찾다니…….

누가 들으면 코웃음이나 칠 소리다마는. 한조는 부정하지 않았다. 말수가 적은 다미로지만 그녀가 입술을 뗄 떼마다 그 고혹적인 표정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의 과잉 감정이 늘 한조는 피곤했었다. 모친의 아들을 향한 과잉 애정, 여동생들의 예민함과 수다스러움. 그 외 사교모임에서 만났던 여자들의 잘난 척이라니.

잘난 척도 마찬가지로 자기애의 과잉이라고 생각하는 한조였다. 그런 여자들, 인간들 할 것 없이 그는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피곤했다. 그러나 다미로는 달랐다.

자신을 드러내려 애쓰지 않는 여자.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나는 다미로의 모든 것에 한조는 빠져들고 있었다.

거울에서 멀어진 그가 전화기 옆에 놓아 둔 메모지로 시선을 내렸다.

<호텔 리즈 캐슬 21호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그친 상해는 오랜만에 맑은 아침 하늘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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