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2)

2

“동양지광. 장위건.”

“뉘긴지 감이래 잡은 것이네?”

“예, 언젠가 엄 대장이 타깃으로 잡았던 놈으로 알고 있는데. 틀립니까?”

장충단공원이었다. 아직 아침 안개가 뿌옇게 끼어 있었다. 수포교 아래엔 오리 떼가 아침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뿐, 산책하는 외국인 몇을 빼면 고즈넉한 시간이었다.

“기억력 조쿠나 야, 안태익이.”

유 선생이 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웃었다. 낡은 중절모를 벗은 그가 말린 강냉이 한 줌을 꺼내 수포교 아래 오리들에게 던졌다. 얼핏 보기엔 아침 산책을 나온 할 일 없는 노인과 아들쯤으로 보일 풍경이었다.

어제 살롱 챠플린에서 돌아온 태익은 고작 3시간을 자고 나온 길이었다. 다미로를 먼저 집으로 보내고 그는 살롱에서 마루야마 경무국장을 상대해 줘야만 했다.

마루야마에게 알아낼 것이 있어서였다. 태익이 계획하고 설계한 작전이지만 선봉에 나설 사람은 유 선생이었다.

“그 에미나이 때문에 기러는 거면, 관두라.”

유 선생이 먼 산에 두었던 시선을 그에게 향해 말했다. 태익은 1미터쯤 떨어져 서 있는 이곽에게 자리를 비키라는 고갯짓을 했다. 곽과 경호원 셋이 두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 갔다.

그들이 다리를 내려가는 모습을 확인한 태익이 천천히 다리 난간 위로 팔을 짚어 섰다. 시선은 수포교 아래 개울에 둔 채, 최대한 가볍게 말했다.

“어차피 잡으려고 하셨던 놈 아닙니까. 제가 건드리면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그 아새끼 뒤에 거물 하나가 버티고 있으니 하는 말이 아이간.”

“거물이라고 하셨습니까.”

“강선애라고.”

강선애.

“삼성상회 국대철이가 애끼는 첩마누라디, 글고 그 에미나이래 가깝게 두고 부리는 아새끼가 장위건이고 말이디.”

장위건을 캐내니 그 뒷배로 강선애라는 친일파 애첩 마누라가 나왔다……? 태익은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었다.

“안 사장이 경무국에서 빼낸 그 에미나이 말이디, 5년 전에 우리 아들 대글박에 총알 쑤셔 넣을라 했던 그 에미나이래 맞디?”

유 선생이 뒷짐을 지며 태익에게 물었다. 태익은 난간을 짚고 서 있던 몸을 펴 천천히 유 선생과 다시 마주 섰다. 유 선생이라 불리는 유지락은 원래 중국 소주에서 당원이 500여 명에 이르는 민족당을 이끄는 대표였다.

“안 사장 자네래, 우릴 많이 도왔단 사실은 내래 절대로 잊지 않고 있지비. 모르는 놈들이야 자네래 친일이네 회색분자네 왈가왈부 떠들어 대지만서두, 내래 뉘기보다 안 사장 자넬 잘 알고 있지 않카써.”

“떠들어 대는 말들, 제가 언제 신경이나 썼습니까, 선생님.”

진심이겠지만 그래도 인사치레로 시작하는 유 선생이 곧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가기에 하는 말이었다. 수포교 아래 창포가 바람결에 흔들렸다.

“알지. 내래 왜 모르갔어.”

유 선생이 그에게서 몸을 돌려 수포교 저 멀리 안개에 묻힌 산을 바라봤다.

“선생님.”

“마령이라고 했나? 그 에미나이래 이번 작전에 쓴 다음, 우리 쪽으로 넘기라우.”

태익은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본래 이 작전에 쓰기 위해 유 선생은 ‘마령’을 쫓았고 태익은 그 과정에서 그녀가 다미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곽을 제외한 그 누구도 마령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상태고 말이다. 태익은 잠시 생각에 골몰했다. 그녀를 경무청에서 빼내 집으로 데리고 들어간 이유는 애초 하나였다.

유 선생과 약속한 작전대로 그녀를 이 작전에 써먹는 것.

“아직.”

태익이 유 선생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잠깐 뜸을 들이다 그는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여자에게 하겠다는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우리 작전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왜, 말하지 않았나? 시간이 충분했을 텐데.”

나흘이면 충분한 시간은 맞았다. 작전은 타이밍이 생명이니까.

“개인적으로 그 여자와 해결을 볼 일이 있었습니다.”

“음.”

유 선생이 생각에 잠겼다.

“자네래 그 간나한테 따로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은 마음은 내래 이해하갔어. 그런데 말이야. 그 간나나 우리나, 개인적 관계에서 일을 치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까 내 말은, 그 간나래 죗값은 당 차원에서 받아 내야…….”

“개인적 관계. 있습니다, 저하고 그 여자.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선생님. 당 차원에서 그 여자를 처단하시는 일은 보류해 주십시오.”

유 선생을 마주한 태익의 눈빛에는 일체의 흔들림이 없었다.

“제게 많은 도움 받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갚을 길이 없다고도 하셨고.”

“안 사장.”

“송구한 말이지만 한 번만 갚아 주신다 치십시오. 그 여자에 대한 처분을 보류해 주시는 것으로.”

유 선생이 아는 태익은 언제나 한 치의 틈도 없었으며 감히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고 대범했다. 경성에서는 사업가 안태익으로 살고 있지만 태익이 쓰는 이름은 그 외에도 서너 개가 더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7년을 넘겨 8년 가까이 유 선생과 일을 하면서도 그는 한 번도 일제에 정체가 탄로 난 일이 없었다. 비범한 머리로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영어에 능통했다.

또 대범함으로 남들이 감히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일들을 해치우고는 했다. 친일 조선인 사업가로 자신을 위장하고서 말이다.

“내래, 안 사장 자네한테 하나만 묻자우.”

유 선생의 표정엔 진심 어린 걱정이 있었다. 그는 태익을 잃고 싶지 않았다.

“자네래 원래 배짱이 두둑하다는 그이 내 진즉에 알지만서두 말이디. 상황을 감당할 수 있갔어?”

주변과의 관계에 대한 얘기였다. 친일이네 회색분자네 하며 진짜 안태익을 모르는 사람들과의 관계. 어쩌면 이번 일로 인해 태익은 일제가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동지들의 표적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태익은 두려움도 없이,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공원 끝 마루로 시선을 던졌다.

“일단 하고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제까지 감당할 수 있겠다 여기고 했던 일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까.”

짙었던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밤사이에 숨어 있던 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 *

“도련님, 도련님?”

운전석의 곽이 뒷좌석의 태익을 불렀다. 눈을 감고 생각에 골몰했던 태익이 눈을 떴다.

“자애병원 김 원장님이라도 잠깐 뵙고 가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거울을 통해 태익을 살피는 곽의 눈엔 걱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태익은 차창 바깥을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됐다, 약속 장소로 가자.”

태익의 목소리는 피곤으로 갈라져 있었다. 꼬박 보름이었다. 그는 유 선생을 만난 그날 인천에서 바로 중국 청도로 출발했다. 청도에서 엄 대장을 만나 유 선생의 밀지를 전한 그는 그곳에서 최종적으로 장위건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미리 엄 대장을 통해 청도에 있다던 장위건의 소재를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손가락, 못…… 못 보셨습니까?”

위건의 호텔방 문밖엔 태익의 경호원들이 무장한 채로 지키고 있던 상태였다.

“왼손 약지 말입니다. 마령 그 여자 왼손 약지 첫째 마디가 없는 거 모르시는 겁니까?”

태익은 위건이 겁에 질려 하는 말에 다미로의 왼손 약지에 감긴 석고 깁스를 떠올렸다.

“그거 잘린 겁니다. 강선애 그 여자한테.”

“잘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위건과 마주 앉은 채였다. 위건의 머리에는 곽이 겨눈 총구가 들이밀어져 있었다.

“첫 임무 실패에 대한 책임을 그렇게 물은 거죠. 내 생각에는 일부러 빗맞힌 게 분명했지만요.”

“첫 임무라면 경성상회의 안 사장과 만나기로 되어 있던 민족당 당원들을 쏜 얘길 하는 건가?”

담배를 꺼내며 등을 보인 태익의 물음에 위건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꾸역꾸역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태익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직감이 스쳐 지나갔다.

“예.”

태익의 어깨가 움찔 옅은 동요를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하지만 그는 더 이상의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 등잔불에 담뱃불을 붙이며 물었다. 위건은 잠시 뜸을 들였다. 곽의 총구가 그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위건은 그제야 힘주어 눈을 감았다가 뜨며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바로 3미터도 안 되는 등 뒤에서 쐈는데 빗맞는다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담배에 불을 붙이고 허리를 세운 태익은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애초부터 마령 그 여자는 그 애들을 쏠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 여자한테 접근하기 위해, 손가락을 걸고 그 일을 하겠다고 했던 걸 겁니다.”

“손가락을 걸어?”

“강선애 그 여자는 원래 일을 그렇게 시킵니다. 거액의 돈을 주는 대신 실패하면 그때마다 손가락 한 마디씩 잘릴 거라는 경고로 시작하죠.”

위건은 강선애의 얘기를 하면서 부르르 눈동자를 떨었다. 하지만 태익의 눈동자는 서서히 얼어붙어 갔다. 이제야 어떤 감이 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공진과 제영, 두 사람 모두 총에 빗맞았던 것이 그저 우연이라기엔 너무 이상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지금껏 그는 다미로의 총 솜씨가 어설퍼서라고만 여겼었다.

두 사람이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진 것은. 그런데…… 뭐라고? 다미로 제 그들을 빗맞힌 대신 손가락이 잘렸다고…….

머리를 노렸다가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일부러 머리를 빗맞힌 것이었다는 말인가?

태익은 천천히 위건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유는, 뭔가? 마령이 강선애라는 여자한테 접근한 이유.”

하지만 그래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태익을 배신하고 동생처럼 아끼던 공진과 제영을 쏘면서 제 손가락까지 걸어야 했던 이유 말이다.

“이유라기보다…….”

위건이 망설였다. 등잔불이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목적이 있었습니다.”

“목적?”

“그 여자, 강선애를 죽이는 거요. 그게 마령 그 여자 목적이었습니다.”

장위건의 목소리가 태익의 귀에 윙윙 바람 소리처럼 메아리쳤다. 잠시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태익이 마른 입술로 긴 한숨을 내뱉었다.

대체 다미로 넌……. 왜. 한숨과 함께 그의 가슴속에서 그 말이 맴맴 맴돌았다.

“도련님, 도련님……, 에이, 제가 병원에 들르자 안 했습니까. 그분이 오실 때가 됐구먼. 그래서 말씀드렸더니.”

깨워도 반응이 없는 태익을 뒷좌석 문을 열어 부축하려던 곽이 안타까이 말했다. 태익은 그런 곽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부축하려던 그의 팔을 밀어냈다.

“잔소리는, 마누라도 아닌 놈이.”

그가 차 문을 의지해 몸을 일으켰다.

“오셨습니까.”

어느새 이환이 차고로 나와 태익을 맞았다. 시간은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이었다. 오겠다던 날짜보다 이틀이나 늦게 돌아온 태익을 이환은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태익의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한 것을 이환은 놓치지 않았다. 거실을 제외하고 불이 꺼져 있는 본채로 들어선 그는 이환에게 겉옷을 건넸다.

숨통을 틀어막는 것 같은 넥타이를 길게 잡아 내렸다. 자신의 방으로부터 거실을 가로질러 반대편에 있는 다미로의 방에 눈길을 두었다.

“다미로는?”

타이를 풀어내며 태익은 그녀의 방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아씨는 진즉에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으신지 힘도 없으시고, 아무래도 보약이라도 몇 첩 지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 자애병원 김 원장을 부를까요?”

추적추적.

겨울을 재촉하는 빗줄기 소리만 고즈넉한 가운데 이환이 넌지시 물었다. 넥타이와 조끼까지 벗어 이환에게 건넨 태익은 “……그러든가” 하고 중얼거리며 소파에 깊게 몸을 묻었다.

“도련님, 방으로 드셔서…….”

“나중에…… 영감은 그만 들어가 봐.”

그가 눈을 감았다. 이환은 더는 그런 주인에게 말을 붙이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비스듬한 스탠드 불빛과 적막한 어둠 속에 태익은 길게 눈두덩을 눌렀다. 빛이 바래고 피로 얼룩져 추억이 아니라 고통스런 기억이라 여겼던 순간들이 또다시 꿈처럼 그를 침잠해 왔다.

나긋하게 감겨 오던 다미로의 벌거벗은 육체가……. 지치고 힘든 그의 몸에 환영처럼 감겨드는 것 같았다. 자신이 그녀에게 뱉어 낸 지독한 말들처럼 잔혹해지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러면서도 그저 넘쳐날 것만 같은 사랑으로 그녀를 안았던 순간들이 뒤얽혀 그의 정신을 침잠해 들어갔다.

* * *

동도 트기 전 새벽이었다. 어슴푸레한 여명이 동쪽 하늘을 보랏빛으로 물들여 놓은 때였다. 새벽에 내린 비로 정원의 나무들이 반쯤 헐벗고 바닥에 젖은 낙엽들이 수북했다.

“도련님…… 오셨다.”

“……그래?”

옅게 우려낸 뜨거운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싼 다미로는 곽의 말에 짧은 대꾸만 했다. 서양식으로 만든 주방의 작은 테이블에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있었다.

“어디에 다녀왔는지 안 물어 봐?”

곽은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궁금증과 의구심을 도저히 떨칠 수 없어 다미로에게 물었다.

“물으면…… 답은 해 줄 거고?”

“…….”

“나 같은 배신자한테 오라버니가 어딜 다녀오셨는지 네가 말할 리 없는데…… 내가 그걸 왜 물어?”

그녀가 마치 자폭이라도 하는 것처럼 무뚝뚝하게 곽에게 되물어 왔다. 자조하는 미소도 없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길도 없는 표정이었다.

5년 전의 다미로는 맑았다. 적어도 그녀가 사라지기 6개월 전까지의 다미로는 지금 그녀와는 사뭇 달랐다.

원래도 여우 같은 여자는 아니었지만 수다스런 그렇고 그런 여자와는 달랐었다. 얼굴은 누구에 비할 바 못 되게 아름답고 청초했지만 사실 그녀는 사내처럼 자랐다고 봐야 했다.

이환의 두 아들 이곽과 이철, 그리고 태익과 같이 사내들 틈바구니에서 자랐기 때문이었다. 태익을 주인으로 모셨지만 곽과 철, 그리고 다미로에게 그는 맏형과도 비슷한 존재였다. 그들은 태익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

“도련님이 널 가장 아끼신 건 너도 부정 못 하잖아. 아냐?”

곽은 제 우문을 역시나 총명하게 피해 가는 다미로에게 결국 추궁하는 말밖에 할 것이 없었다.

“다미로 네가 우리 셋 중 제일 똑똑했으니까. 또 돌아가신 나리께서 너한테 도련님하고 같은 성을 물려주셨으니까……. 널 더 아끼셨던 거고 그래서 우리 아버지도 철이 놈하고 나보다 널 더 애지중지하셨던 건데, 네가…….”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태익을 배신할 수 있었냐는 질문을 곽은 결국 할 수가 없었다. 테이블 위에 놓은 주먹을 움켜쥐며 그는 말을 삼켰다.

“호랑이 새끼를 키우셨다고……. 후회하시라 해.”

하지만 다미로는 고개를 숙여 소리 없이 커피 한 모금을 삼키며 말했다.

“나중에 어르신이 내 일을 아시게 되면 그때.”

“다미로!”

“시끄러, 목소리 낮춰.”

다미로가 목소리가 높아진 곽을 낮은 목소리로 나무랐다. 그녀의 지적에 곽이 주변을 살폈다. 그가 다미로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너 그거 모르지……. 딱 이맘때마다 도련님 앓아누우시는 거.”

커피 잔을 쥔 그녀의 손가락이 흠칫 떨렸다. 곽은 아직 깁스가 감긴 그녀의 왼손 약지로 절로 눈길이 떨어졌다.

“5년 전에 네가 사라진 그 시기마다 도련님께서 며칠씩 앓아누우신다. 저 강철 같으신 분이!”

첫째 마디가 잘린 손가락이라고 했었나? 남편이라던 장위건이 태익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곽은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친구이자 동생 같았던 다미로에 대한 연민보다 주인을 배신한 그녀에 대한 원망이 더 컸다.

“너같이 차갑고 매몰찬 게 뭐라고! 그래도 널 동생처럼 여기셨다고 너한테 당한 배신이 쓰라려서 아프신 걸 보면 내 속이, 속이 아니다.”

차라리 태익이 아프다고 엄살을 떠는 사람이었다면 곽은 속이 덜 아팠을지도 몰랐다. 그가 아는 안태익은 산처럼 거대하고 너무나 강한 사내라서 결코 요란 떨지 않으며 어느 물 위에 있어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 1년에 꼭 한 번 그는 며칠을 죽도록 아팠다. 5년 전부터 꼭 이때에만.

“나간다며.”

곽이 낮은 소리로 쏟아 내는 원망에 다미로는 미간 한번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먼저 반만 마신 커피 잔을 들고 테이블에서 일어나며 고저 없는 음성으로 그를 재촉했다.

“태익 오라버니께서 시키신 일 있다고 나가는 길이라고 했잖아.”

그녀가 빤한 시선으로 곽을 바라봤다. 곽이 뿌득 어금니를 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제 감정을 타박으로 뱉어 냈다.

“여하튼, 넌 옛날이나 지금이나 계집애가 계집애 같지 않아. 독하고 차갑고. 그러니까 여학교 다니면서 연애하잔 남학생 하나를 못 만났지.”

그런 주제에 도대체 그 더러운 친일파 장위건이란 놈은 어떻게 꼬드겨 결혼까지 했었던 것인지! 정말로 결혼이란 것을 하기나 한 것인지!

장위건은 친일논객이었다. 변절 문학가였다. ‘모던재팬’이라는 잡지사의 의뢰를 받아 글을 쓰는데, 일제의 조선 침략과 점령을 옹호하는 글로 시작했다.

“도련님이 너한테 어떤 처단을 내리시든……. 나는 못 말려. 내가 말린다고 될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널 유 선생님 쪽에 넘겨 처단 받게 하는 건 나도 막고 싶기는 한데…… 같이 자란 정이 질겨서 나도 널 살리고 싶기는 한데…….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다.”

곽은 밀려드는 궁금증이 제 것이 아님을 알기에 몸을 돌렸다. 다미로에게 태익과 같은 배신감을 느끼지만, 정확하게 그녀가 배신한 사람은 태익이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민족당의 조직원도 아니었고 민족당을 후원하고 돕는 태익의 수하도 또 태익을 돕는 자신의 수하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처벌은 피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밀정, 친일파, 일제앞잡이. 지금의 조선에 기생하는 그 3대 악 중 3가지 모두에 그녀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별채로 통하는 주방 뒷문이 드르륵 거친 소리를 내면서 여닫혔다. 도로 테이블 위로 컵을 올려놓는 다미로의 손이 그제야 바르르 떨렸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곽이 확인시켜 준 사실이 더 뼛속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한 태익의 증오. 그리고 자신을 처단해야 할 그의 위치에 그에 따른 책임까지 말이다.

차갑기만 하던 태익의 눈빛이 떠올랐다. 오로지 분노로만 그녀의 몸을 만지며 짓이기고 싶어 했던 그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 손길마저도 너무도 그립기만 했던 자신도 그녀는 함께 떠올랐다.

그리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이미 5년 전에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다미로는 알게 되었다. 한데, 여전히 사무치게 태익을 그리워하는 자신을 그녀는 완전히 깨닫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에게 길든 몸이 마음보다 더 그를 놓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으니까.

* * *

다미로는 오로지 ‘안태익’ 그 앞에서만 여자였다. 태익이 아는 다미로는 그런 여자였다. 잘생기고 훤칠한 뭇 남학생들의 눈길에도 얼굴 한번 붉히는 적이 없었다.

혼잡한 전차 안에서 어느 남학생이 전한 연모의 편지조차 그녀의 호기심을 끌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런 다미로가 태익의 스치는 시선 하나에, 머무는 눈길 한 자락에는 언제나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마음의 시작은 아마도 같았을 것이다. 피어나는 다미로는 절로 태익의 눈에 담겼다. 연못에 꽃망울을 맺은 연꽃처럼 그의 물에 담겼고, 하늘을 담은 연못처럼 그의 심장에 담겼다.

태익의 몸 아래에서 다미로라는 꽃봉오리는 점점 요염해져 갔다. 수줍던 꽃잎은 태익의 손길에 활짝 만개해 갔다. 경성상회의 주인, 사업가 안태익이 아닌, 몇 개의 다른 이름으로 동경, 만주, 상해, 소주와 항주,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를 돌아야만 할 때에도 그녀는 태익이 돌아갈 곳이었다.

돌아갈 곳.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돌아가야 할 그곳. 다미로는 태익에게 그런 존재였다.

“……꿈인가?”

잠결에 보이는 다미로의 모습에 태익은 중얼거렸다. 다미로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럼 악몽인 거군.”

“……제가 있어서요?”

반 정도 눈을 떴다가 다시 감은 태익은 대답이 없었다. 다미로가 보기에 지금 그는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듯 보였다. 그녀가 잠에 취한 태익의 이마로 머뭇머뭇 손을 짚었다.

“오라버니, 아무래도 약 드셔야 할 것 같아요.”

역시 그녀의 생각대로 체온이 높았다. 곽의 말이 마음에 걸려 다미로는 한참 동안 그의 방 앞을 서성였다. 태익이 이맘때면 어김없이 앓아눕는다는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방에 발을 들여놓는 일이 얼마나 위험할지 모르지 않았지만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다.

“약…….”

그는 잠과 현실의 경계에서 조금 더 현실에 가까운 듯 보였다.

“네, 일단 해열제라도 먼저 드시고, 어르신께 말씀드려서 김 원장님을 모셔 와야 할 것 같아요.”

서늘한 다미로의 손이 태익의 이마에서 금세 뜨겁게 덥혀졌다.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인 그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모습이 꿈이 아님을 확인해 갔다.

초점이 명확해진 태익과 다미로의 시선이 엉겨들었다. 다미로는 머쓱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이마에서 손을 떼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에게 손이 잡혔다.

보름 만이다. 그와 살롱 챠플린에서 그렇게 따로 집으로 와, 보름 만에 다미로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동녘으로 붉어진 아침 해가 올라와 있었다.

암막 커튼 사이로 낯을 들이민 아침 해에 태익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음영이 짙은 사내의 얼굴에 고된 여행과 살 떨리게 긴장한 순간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을 다는 몰라도 5년 사이, 그녀는 태익의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총에 명을 달리한 사람들 중, 대부분이 태익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 혹은 그런 이들을 쫓는 일제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이들이었으니까.

그게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어느 나라 사람이든 말이다. 강선애는 돈을 좇는 여자였다.

“약…… 가져올게요.”

그리고 그 여자에게 가깝게 가기 위해 다미로는 더러운 피를 여러 번 묻혔다. 지금 태익에게 잡힌 손에 말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손이 태익에게 닿는 것을 그녀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잡힌 손을 비틀었다. 그에게서 빼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조금 더 억세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와 다시 만난 이후, 그가 손을 잡은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몸에 오른 열로 오히려 섬뜩하도록 차갑게 식은 그의 손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다미로가 다시 한 번 잡힌 손목을 비틀었다. 태익의 손에 힘이 한층 더 실렸다. 그리고 그는 힘겹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으로 발을 내렸다.

다미로의 손목을 잡은 채 그는 서 있는 그녀를 올려 보았다. 짙고 가지런한 눈썹 아래 태익의 눈빛은 복잡했다. 증오와 일그러진 욕망만 있던 보름 전과는 어딘지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기에 불안해진 다미로는 고개를 돌리며 다시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자 뜻밖에 태익의 손에서 쉽게 힘이 풀렸다.

대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테이블로 향했다. 태익의 방은 기품이 있었지만 단출했다. 커다란 앤티크 침대와 기다란 앤티크 테이블, 그리고 의자와 대대로 물려 내려온 자개 장식의 6단 문갑 두 짝이 전부였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물 컵에 주전자 물을 따랐다. 새벽에 돌아온 그는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로 쓰러지듯 잠을 잤던 모양이었다. 구겨진 셔츠의 소매는 대충 접힌 그대로였다. 그나마도 전혀 제대로 자지 못한 듯 보였지만.

열과 잠에 취해 있는 줄 알았던 그가 채 몇 분 사이에 저렇게나 명료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혼인신고가 안 되어 있던데. 어떻게 된 거지?”

고열과 피로로 인해 갈라진 목소리로 태익이 느릿하게 물었다. 다미로는 다소 놀라긴 했지만 태익이라면 장위건의 호적등본을 확인하는 일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바로 인정했다.

“굳이 할 필요 없었어요. 사실혼 관계였으니까.”

“장위건과 잤다는 거짓말을 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위장결혼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 건가.”

태익의 물음은 물음이 아닌 단정이었다. 그가 컵을 입으로 가져가며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넓고 단단하게 각진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매끄럽고 단단한 얼굴은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나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싶은 거라면…… 해라, 다미로. 그렇지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술래를 그리 오래하는 일은 없을 거다.”

안다.

그가 술래를 그만두기로 마음먹는다면 숨바꼭질은 바로 끝이 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장위건에 대해 그가 알아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을 없다고 다미로는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오라버니한테 잡힌 목숨인걸요. 그러니 유 선생님께 제 처단을 맡기신대도 저는 할 말이 없어요.”

어쩌면 그러길 바라는지도 몰랐다. 태익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나을 테니까. 심장이 멈추고 피가 빠져나가 동공이 풀어진 모습 따위를 다미로는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양심 없는 욕심이라고 할지라도 다미로는 태익에게 추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5년 전 그날 이미 그에게 그렇게 남아 버렸다고 해도 말이다.

“얌전히 내 집에 들어앉아서 처분을 기다리겠다……?”

다미로의 대답을 곱씹던 그가 그녀의 말을 다시 되새겼다.

“내가 그 말을, 믿어야 하나?”

되돌아올 줄 알았던 물음. 다미로는 그가 힘없이 들고 있는 컵으로 손을 뻗으며 대답을 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아요, 오라버니. 하지만 제가 입을 열면 그 말이 어떤 말이든 나오는 순간 오라버니 앞에서는 다 변명이에요.”

진실, 사실, 다미로는 제가 안고 있는 비밀들을 다 태익에게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가 영원히 모르길 원했다.

“그래도…… 할게요.”

“뭘 하겠다는 말인데. 변명……?”

“네.”

너무 많은 감정들로 복잡하게 짙은 그늘이 졌던 그의 미간이 처음으로 움찔 감정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해 보라는 말도 듣기 싫다는 말도 없이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혓바닥에 모래가 앉은 것 같았다. 입 안 가득히 모래를 물고 있는 것 같았다.

“장위건……. 그 사람 꼬임에 넘어갔었어요. 멍청했죠. 동경제국대학 출신에 집안도 좋은 사람이라서 저 같은 거와 상대가 안 될 사람이었지만 흠이 있었으니까. 동경에서 일본여자와 결혼을 했던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날 떠났다? 하공진과 박제영을 쏘고……?”

“네, 결혼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 사람 아버지가 제국대학 학장님이셨고 어머님은 저명하신 여류화가시죠……. 오라버니도 아시잖아요. 제 근본이 미천한 거. 비록 돌아가신 나리께서 성을 주시기는 하셨지만……. 아비도 어미도 없는 천애 고아에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피식.

태익이 그녀의 말에 피식 입술을 당겨 웃었다. 그녀의 어이없는 거짓말이 우습고도 아파서 그는 힘주어 눈썹 언저리를 손등으로 눌렀다.

“신분상승이 목적이었어요. 죽도록 올라서고 싶었어요. 어차피 오라버니는 제 손에 쥐어질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저런 거짓으로 자신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가치를 부정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태익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 스스로 망가져 가면서까지 강선애를 죽이려 하는 것인지 말이다.

표정에 미동조차 없어진 태익이 다미로가 숨긴 진심을 꿰뚫겠다는 듯 쳐다봤다. 다미로는 그의 시선에 뼈까지 관통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복잡한 감정들로 얽히고 얼룩진 그의 눈빛에서 다미로는 그의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이리…… 이리로 와라, 다미로.”

테이블에 걸터앉은 채로 태익이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아픈 태익은 처음이었다. 이렇게나 고통스럽도록 번뇌하고 고뇌하는 태익이 다미로는 처음이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이지만 항상 자신이 갈 길이 어디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었다. 일을 앞두고 고뇌하기는 하지만 번민에 잠기지 않았었다.

계획을 세울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만 일단 실행에 들어가면 망설이는 법이 없는 사람이 안태익이었다. 사업이든, 그가 목숨을 걸고 하는 그 일이든…… 다미로가 알던 태익은 그런 남자였다.

자석에 이끌리듯 다미로는 태익에게 가까이 갔다. 다가온 다미로의 얼굴을 절망과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녀가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을 띤 태익이 오랫동안 쳐다봤다.

그가 손을 내려 다미로가 허벅지 옆으로 얌전하게 붙인 그녀의 양손을 잡았다. 잡은 손을 당기지도 않고 밀지도 않고 그저 그대로 꾹 힘주어 잡았다. 하지만 그녀가 꼼짝달싹할 수 없는 힘이었다.

“오라버…….”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일순, 다미로는 증오와 절망이 뒤범벅되어 독한 말로 상처 입히고 제 손에 반응하는 그녀를 모욕했던 그가 떠올랐다. 그래서 또 그럴 줄로 알았다.

그런데…….

손만 힘주어 잡은 채로, 테이블 모서리에 걸터앉은 채로 태익은 그녀에게 입술을 겹쳐 왔다. 뜨겁지만 대지를 하얗게 감싸는 눈송이처럼 부드러웠다.

내리는 순간 바닥에 앉으면서 녹아 버리는 눈송이처럼 태익의 키스는 안타깝도록 애절하고 부드러웠다. 길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길게 윗입술을 물어 그녀의 입을 벌리고 들어갔다.

말캉한 혀로 다미로의 타액을 훑고 그녀의 호흡을 길게 들이마셨다. 뇌수까지 저릿한 감각들이 핏물처럼 번져 갔다. 슬픔보다 더 진하고 격한 갈망이 그녀의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태익의 입술이 그녀에게서 천천히 떨어져 나왔다.

하아하아.

다미로가 내쉬는 밭은 숨 사이로 그가 이마를 맞대어 왔다. 손은 여전히 꽉 움켜쥔 그대로였다.

격렬하지 않지만 짙고 깊게 차올라오는 욕망을 삼키기 위해 그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술래는…… 혼자서 놀이를 끝내지 못한다, 다미로.”

태익의 손이 뜨거웠다. 맞댄 태익의 이마에 열이 들끓었다. 그러나 태익의 이성은 어느 때보다 차갑게 식어 있었고 그의 심장은 감당하기 두렵도록 달아오르고 있었다.

다미로를 향해서…….

* * *

<마령, 장위건 그 개자식이 중국으로 튀었어요. 소문에는 소주에 있다고도 하고 상해, 청도로 갔다는 말도 있는데 정확히는 알 길이 없어요. 대신 반가운 소식은 내달 29일 7시에 있다는군요.>

쪽지를 읽은 다미로는 봉투에 동봉된 종이돈 한 장을 꺼내 12살 동구에게 줬다.

“자, 심부름 값.”

“고맙습니다.”

“대신 비밀 엄수. 지킬 거지?”

“네.”

“좋아. 그럼 다음에 또 부탁할게.”

본채의 주방 뒷문이었다. 빡빡머리 동구는 옅은 미소조차도 보기 어려운 다미로 앞에 바짝 얼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내민 심부름 값을 받자, 넙죽 인사를 하고 냅다 뒷마당을 달려 나갔다. 동구의 모습이 사라지자 다미로는 쪽지를 구겨 치마 주머니에서 꺼낸 성냥불에 태웠다.

‘반가운 소식은 내달 12월 29일 7시에 있다는군요.’

다시 한 번 경순의 편지 마지막 구절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앞으로 한 달 남짓 후였다. 12월 29일이면. 아마도 마지막이 될 기회 같았다. 총잡이 ‘마령’의 얼굴이 경찰들에게 제법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다미로 아씨.”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다미로는 검댕이 묻은 손을 치마에 재빨리 문지르며 뒤를 돌았다.

“아무래도 지금 짐을 챙기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이환이었다.

“짐을 챙기다니요? 어르신? 왜…….”

“도련님께 아직 이야기를 못 들으신 게로군요.”

“듣다니 뭘 말씀이세요?”

아마 이환의 눈이 멀쩡했다면 그는 긴장으로 굳은 다미로의 얼굴을 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도련님께서 아씨를 상해에 있는 대학에 보내신다고……. 정말로 말씀 못 들으셨군요.”

“대학이요?”

그녀의 미간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러나 이환은 들뜬 얼굴로 그녀를 재촉했다.

“어서 짐 챙기세요. 옷가지까지 무겁게 이고 가려고 하지 말고, 소중한 물건 몇 가지만요. 옷이며 구두며 도련님께서 상해에 가셔서 좋은 것으로 다 해 주실 거예요, 아씨.”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다미로는 알았지만 이환에게 아니라는 말을 해서 무엇 할까.

“어르신, 태익 오라버니 지금 집에 계세요?”

“이 시간에 계실 리가요. 명치정 집무실에 나가 계시지요.”

“전화 좀 하게 해 주세요.”

“전화요?”

이환이 잠시지만 망설이는 표정을 했다. 태익에게 명령 받은 사항 중 하나가, 다미로를 절대 집 밖으로 내보내지 말 것과 전화 사용이었다.

“어르신, 제가 이제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친한 친구한테 간다는 전화 한 통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어쩌면 이환은 친구에게 전화를 하겠다는 다미로의 의도를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만일 눈치를 챘다고 한들 그는 겉으로 드러낼 사람이 아니었다.

알지만 묵과해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르신.”

“한 통만입니다. 제일 친한 친구분 한 분과 꼭 한 통화만 하세요. 알겠습니까?”

“네, 어르신. 고맙습니다.”

“대신.”

네?

전화기가 있는 거실로 나가려던 그녀가 이환을 돌아봤다.

“도련님 속은…… 이제 그만 썩이신다고 약속하세요, 저하고.”

그가 어디까지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다미로를 포함해 태익도 곽도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눈이 멀어 살아온 세월만큼 오감이 아니라 마음으로 태익과 다미로를 보고 있던 환에게는 무엇인가가 보였나 보다.

아무리 다미로가 사라진 5년의 세월 동안 태익과 곽이 다른 얘기로 그를 속여 왔다고 해도.

“전화하고 바로 짐 챙길게요. 오라버니 기다리시지 않게.”

차마 알겠다는 대답을 하지 못한 다미로는 가만히 손가락만 말아 쥐며 다시 거실로 향했다.

-교환입니다.

“소공동에 우공당 부탁합니다.”

전화기를 든 다미로는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테이블 위의 신문을 들여다봤다. 짙어지려는 죄책감과 나약해지려는 자신을 추슬러야 했다.

-네, 골동점 우공당입니다.

“저예요, 마령.”

-마령? 세상에…… 어떻게 전활! 아니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요?

“안국동 집에, 와 있어요,”

-하아! 정말이오? 정말 그런 거면 다행이지만. 경무국에 마령이 잡혔다는 소식까지만 들었지 그 다음은 통 소식을 알 수 없어서 내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알아요?

“죄송해요, 구 선생님. 연락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혹시…….

소공동에 있는 골동점 우공당의 주인은 화가 ‘구본’이었다. 그는 뛰어난 미술품이나 골동품들이 일본으로 반출되지 않게, 조선인 수집가들에게 연결을 시켜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마음 안 바뀌었느냐고요……?”

-그래요.

구본이 전화기 너머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다미로는 눈만 두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고 단풍이 물들고 낙엽이 떨어진 정원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작은 스무 살 그 무렵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였다. 부친 ‘주옥’과 돌배기 다미로, 그리고 한 명의 여자와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부친 주옥의 유일한 유품이기도 했다.

“아시잖아요, 내가 해야 하는 일인 거요.”

-당신 목숨씩이나 걸고서요? 처음 실패했을 때, 그 작전은 그곳에서 바로 폐기된 작전이었어요.

“실패의 원인이 나였잖아요. 목숨을 빚졌으면 갚아야죠.”

다미로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그녀가 하는 말 속에 담긴 의지와 아픔을 구본은 알고 있었다.

-그때 당신은 어렸어요. 머뭇거릴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고. 아마 나뿐 아니라 죽은 동지들도 당신과 같은 상황에서는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구본이 주려는 면죄부. 그러나 다미로는 빡빡한 목으로 숨을 삼키며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12월 29일 7시라고 했어요.”

그녀가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날 머뭇거렸던 자신보다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존재 자체였다.

“정확히 한 달 하고 보름 남았습니다. 우선, 이순석을 강선애 옆에서 떼어 내야 해요. 그래야 29일에 강선애가 날 찾을 거니까.”

이순석은 강선애의 경호원이었다.

-후…….

구본의 한숨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그러나 다미로는 상관치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조선호텔 사거리에 있는 낙랑다방으로 가세요, 오늘. 저녁에 그곳에 가면 이순석을 떼어 내는 일을 도와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구본은 역시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다미로는 그의 침묵이 부정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응원해 주지 못할 뿐, 그는 다미로를 말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29일에…… 일이 성공을 하든 또다시 실패를 하든…… 구 선생님은 당분간 경성을 떠나 계세요.”

-마령.

“그게 안전해요.”

- …….

그녀는 마지막이 될 구본과의 통화를 그렇게 마쳤다.

전화기를 제자리에 놓은 후, 그녀는 한참 동안 정원을 응시했다.

* * *

상해에서 출발해 일본 하카타 항구에 머물다 인천에 들러, 다시 상해로 돌아가는 배는 거대했다. 마치 1912년 북대서양 얼음 바다에 수장되었다던 영국의 호화유람선 타이타닉호가 연상될 정도였다.

거대한 성벽과 같은 배. 그 배 위로 하공진과 박제영, 덩치가 산만 한 김산과 족제비처럼 생긴 최창학, 그리고 그 뒤로 태익이 차례로 배에 올랐다. 다미로는 태익의 뒤를 따르는 곽과 함께였다.

“각자 방으로 가서 짐부터 풀어 놓은 다음에, 일단 모두 식당으로 모이지. 식당은 바로 아래 6층이야.”

“옛! 사장님!”

“분부대로 거행합죠, 사장님!”

7층. 2등 선실로 들어가는 복도 앞에서였다. 태익이 공진과 제영, 김산과 최창학이 곽에게 방 열쇠를 받는 것을 지켜보며 말했다. 짙은 회색의 새틴 슈트를 입은 태익은 누가 보아도 재미교포 사업가 ‘이엽’으로 보였다.

이엽. 그가 상해에서 쓸 이름은 이엽이었다. 배에 오르며 그가 내민 신분증 역시 이엽의 신분증이었다. 다미로의 선실은 태익과 곽이 쓰는 선실 바로 옆, 그리고 그 맞은편이 공진을 비롯한 나머지 네 남자의 선실이었다.

달칵.

선실로 들어선 다미로는 동그란 창으로 보이는 바다에 잠시 눈을 두었다. 이 여행에 대해 항구로 오는 차 안에서 태익에게 간략히 설명을 들었다.

“사람을 찾을 거다, 찾아서 조선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게 이번 여행의 목표고.”

“찾는 사람은 누군데요?”

“이름이 중요한가, 뭘 하는 사람인가가 중요하지.”

“……뭘 하는 사람인데요.”

“그건 만나면 알 테고.”

단 네 마디의 짧은 대화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미로는 태익이 여전히 자신을 전혀 믿지 않고 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사람을 찾는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에 관해 그녀는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몹시도 앓았던 그날 아침, ‘술래는…… 혼자서 놀이를 끝내지 못한다, 다미로’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고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다미로 자신이었으니까. 또 배신은 그녀가 했으니까.

다미로는 가볍게 싼 짐 가방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풀려야 풀 짐도 없기에 만나기로 한 식당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문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붙박이 거울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화려한 코사지가 달린 모자와 우아한 베이지색 원피스코트를 입은 자신이 다미로는 낯설었다.

“누나, 예뻐요. 잘 어울려요.”

식당으로 내려와 테이블에서 만난 공진이 슬쩍 귀에 대고 말했다.

“사장님하고 진짜 부부라고 해도 믿겠어요. 물론 여기선 위장이기는 하지만요.”

“부부가 왜 다른 방을 쓰네?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거에 젤로 이상하다 하갔어.”

다미로의 맞은편에 앉은 ‘김산’이라는 사내가 심술궂게 하는 말이었다. 김산은 여자인 다미로가 불편하다며 항구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투덜거렸던 인물이었다.

“별거 중인 부부라고 생각하겠지요.”

다미로는 그런 김산에게 지기 싫어 본능적으로 그의 말을 받아쳤다.

“미국이란 나라가 그렇다고 들었어요, 결혼도 이혼도 자유로운.”

태익이 재미교포 사업가로 위장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가 앉은 의자 뒤쪽에서 느긋한 태익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여기선 이혼한 부부가 아니지, 마령 동지. 별거 중인 부부는 더더욱 아니고.”

그가 다미로의 의자 뒤로 와 그녀의 옆으로 앉았다. 뒤따라온 곽이 공진과 제영 곁으로 앉았다.

“다 모인 건가?”

태익이 테이블을 둘러보며 물었다. 태익의 팔꿈치가 다미로의 팔을 스쳤다. 그의 체취와 옅은 면도 크림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맴돌았다.

“네, 사장님.”

곽이 대답했다. 다미로는 차마 태익을 대놓고 쳐다보지 못하고 그의 손에 머물러 있었다. 크고 섬세한 손이었다. 남자답게 뼈대가 굵지만 손가락이 길고 깨끗하게 깎인 손톱은 단정했다.

그가 스물일곱 살 때인가, 다쳐서 들어왔던 때가 있었다. 무슨 일로 그렇게 되었는지 다미로는 묻지 않았지만 그때 다친 곳이 손바닥 바깥쪽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다. 마치 총알이 스쳐 피부가 깊게 파였던 흔적인 양, 1센티 정도의 둥글고 긴 상처. 자애병원의 김 원장이 왕진을 와서 치료를 해 줬지만, 그 후론 붕대를 갈 때마다 다미로가 해 주었었다.

그의 발치에 앉아 자신의 옆얼굴을 보는 태익의 시선에 가슴 떨려 하면서 말이다.

“그럼 우선 서로 통성명하고 인사나 할까?”

태익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어색하게 둘러앉은 동지들을 향해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지난 열흘 가까운 시간 동안 다미로가 보아 왔던 태익은 없었다. 그녀가 잘 알던 예전의 태익이었다. 다미로 앞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는 늘 이랬겠지만.

“나이순으로 하지, 최창학 동지?”

그가 다미로의 맞은편에 앉은 30대 중반쯤의 사내를 불렀다. 키가 크고 깡마른 사내였다. 그가 짧게 자신의 소개를 하고 그다음으로는 김산과 공진, 제영이 차례대로 간단하게 인사를 했다.

“이쪽은 내가 소개하지.”

그리고 유일하게 여자인 다미로가 제일 마지막으로 소개를 할 차례였다. 태익이 테이블에 나온 싸구려 와인을 동지들의 잔에 따르며 말했다.

“이름은 마령, 총잡이다. 상해에서 총을 쏠 일은 없길 바라지만 그래도 그럴 일이 생긴다면…… 뭐, 이 친구한테 맡기는 걸로 하지.”

“머이네? 동지래 총잡이였네?”

태익의 소개에 김산이 코웃음을 치며 다미로에게 물었다. 다미로는 그런 김산에게 짧은 시선을 줬지만 그뿐이었다. 김산 역시 답을 원했던 물음은 아닌 듯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이미 벌어지고 있던 약간의 기 싸움을 태익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다미로의 안색을 살피며 핏 웃음으로 소개를 마무리하고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상해까지 이 배로 사흘이다.”

모두의 시선이 다미로와 김산에게서 태익에게로 다시 모였다.

“그 사흘 동안은 다들 맘 편하게 쉬자고. 상해에 도착해서 일본 조계지로 들어가면 그때부터 몸도 정신도 피곤해질 테니까……. 이상.”

그가 말을 마치자 잠시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가 동료들에게 다른 할 말이 있는지 시간을 준 것이지만 다들 별 질문사항이 없는 모양이었다.

태익의 입술에 옅지만 장난스런 미소가 올랐다. 김산을 비롯해 어린 공진, 제영까지, 그들의 시선이 음식에만 꽂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로서는 난생 처음 구경하는 호사스런 밥상이었던 것이다. 태익이 삐져나오는 너털웃음을 숨기지 않고 웃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다른 질문들이 없으면……. 일단 식사부터 하자고. 자, 들지” 하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테이블은 바로 난장이 되었다.

다미로는 그런 태익을 잠시지만 넋을 놓은 채로 바라봤다. 저렇게 웃는 사람이었다. 거대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는 저렇게 소박한 일상에 즐거워하고 웃음 짓는 그런 사람이었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태익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다미로는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식사를 채 반도 하지 않고서 조용히 먼저 테이블을 빠져나왔다. 선실로 돌아가지 않고 갑판으로 나왔다.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보기 위해 6층 갑판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여기서부터는 기상이 좋지 못할 거야…….”

언제 온 것인지, 난간에 기댄 그녀 곁으로 온 사람은 태익이었다. 다미로는 고개를 돌려 곁에 선 태익을 바라봤다.

“외양에 직접 노출되는 바다여서지. 그래서 기상 상태가 수시로 바뀌기도 하고 간혹 파도도 높아지기도 하고.”

바다를 향한 그의 매끈한 옆얼굴을 그녀는 깊은 시선으로 쳐다만 보았다. 포마드를 발라 완벽하게 넘긴 머리와 우뚝한 콧날, 날렵한 턱, 그리고 잘생긴 입술…….

미치게 그리워했던 그였다. 매일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미치도록 과거로 돌아가고 싶게 만들었던 남자였다. 모든 것을 다 알아 버렸지만 아닌 척, 뻔뻔하게 그의 집으로 돌아가 그 품에 안기고 싶게 만들었던 남자였다. 태익은.

그녀의 유일한 고향이었고 안식처였으며 부모이고 형제이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녀의 남자였다.

그런데 사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 같았던 그와의 요 며칠이 지나고, 오늘 본 태익은 완벽한 타인처럼 느껴졌다. 스무 살에 처음 야학운동을 나갔을 때…… 아직 아무도 그녀를 믿지 않았을 때, 그녀를 낯설게 맞았던 그들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유 선생님과 약속이 있으셨어요?”

이유는……. 그가 다미로 자신을 그렇게 대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을 그녀는 알았다. 그저 그가 시키는 일을 할 사람, 그러나 동료는 아닌.

안다미로가 아닌 마령, 총잡이로만 대하고 있었다. 아까 그의 동지들에게 그녀를 소개했던 말 그대로 말이다. 지금의 상황에 따른 필요로 하는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절, 경무국에서 빼내신 이유 말이에요. 유 선생님과 어떤 약속이 있으셨던 것 같아서 묻는 거예요, 오라버니.”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을 가능성은 컸다. 그가 아팠던 그날 이후로 태익은 다미로에게 손끝 한번 댄 적이 없었다.

오늘 배에 타기 전까지 그와 집에서 마주친 것은 겨우 서너 번. 함께 식사를 한 것은 저녁식사 한 번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태익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예전과 마찬가지처럼 보였을 것이다. 식사자리에서 가볍게 농담 몇 마디를 건넸고, 자기 전엔 짧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으니까.

그러나 그뿐이었다. 태익은 집안의 다른 일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그녀를 대했다.

“오라버니.”

다미로는 태익을 향해 돌아섰다. 바다에만 눈을 두고 있던 태익이 그제야 그녀를 돌아봤다.

“널 빼올 계획을 세울 때부터 이번 작전에 널 쓰기로 했다. 그래서 널 빼온 거고. 선생님과 나는 총잡이 마령이 필요했으니까.”

그는 다미로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진실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녀를 그저 총잡이 마령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말을 담담하게 했다. 차라리 자신을 배신한 다미로를 증오하고 벌을 주기 위해 욕망했던 그가 그리울 정도로 그는 완벽한 타인처럼 굴었다.

“너에 대한 처벌은 일을 마친 후에 결정하게 될 거다. 지금은 그마저도 보류가 된 상태지만.”

“저에 대한 처벌이 보류가 된 이유는요?”

뻐근하게 조이는 심장을 억누르며 다미로가 물었다. 태익이 그녀와 마주했던 고개를 틀어 바다로 향했다. 매끈한 슈트 안주머니로 그가 손을 넣었다. 담배케이스를 꺼낸 그는 다시 다미로와 얼굴을 마주했다.

“부탁을 드렸다, 선생님께. 너에 대한 처벌은 내게 일임해 달라고. 너와는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왜! 그런 말을……!”

순간이었지만 다미로는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데, 그런 소리를 한 것인지 그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칫 그가 변절자 내지는 밀정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실이 언제까지 숨겨질 것 같은가, 마령.”

상아를 깎아 만든 짧은 담배파이프에 담배를 꽂으며 그가 조용히 되묻는 말에 다미로는 비로소 이해가 됐다. 그는 머리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머리가 뛰어난 사람은 기본을 무시하지 않는 법이다.

진실은 숨길수록 오해가 커지게 만들고 일을 어렵게 한다고 태익이 언젠가 그녀에게 가르쳤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진실을 꺼내 놓는 대신, 자신이 받을 의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

다미로는 머리가 멍했다. 신의와 사랑을 배신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런데 도대체 태익에게서 무엇을 바랐던 것인가. 그가 보였던 증오의 감정 속에 아직 사랑이 남아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태익은 잠시 혼란스러웠던 것뿐이었다. 그도 사람이니까. 그리고 한바탕 앓고 난 그는 혼란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했던 것이리라. 자신이 해야 할 일, 유 선생과 약속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로 한 것일 것이다.

그가 그녀를 안다미로가 아닌 마령으로 대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어이쿠야! 두 분이래 려기 따로이 나와 계셨음까?”

“안으로 들어가시죠. 바람이 찹니다.”

언제 갑판으로 나온 것인지 두 사람을 찾은 김산과 최창학의 목소리가 다미로는 아득하게 들렸다. 그런데 그때 조심스럽게 다가와 다급한 목소리로 태익의 귓가에 곽이 속삭였다.

“도련님…… 방금 저쪽에서…….”

“アン議員?”

마루야마 한조?

미처 곽이 한조의 등장을 알릴 틈도 없이 그가 태익과 다미로를 먼저 알아봤다.

“아……. 마루야마 소위.”

아무리 배짱 두둑한 태익이라도 일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한조를 봄과 동시에 김산과 최창학, 그리고 바로 그 뒤로 나와 있던 공진과 제영을 훑었다.

일제에 얼굴이 알려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 그들이 김산과 최창학이었기 때문이었다.

“반갑습니다, 소위. 그런데 이 배는 무슨 일로…….”

그러나 태익의 당황은 한순간이었다. 그는 느긋함을 가장해 한조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눴다. 한조의 시선이 태익 옆의 다미로에게 향했다. 그 순간 태익은 최창학과 김산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곳을 벗어나라는 의미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던 다미로는 한조의 시선에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한조와 맞잡은 태익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천천히 한조에게로 시선을 올리며 물었다.

“혹시, 카드게임 할 줄 아세요……? 마루야마 소위님?”

한조를 다른 곳으로 유인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이제 자신은 태익에게 애증의 대상도 원망의 대상도 아니라는 사실. 총잡이 마령 그 이상의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그녀였다.

“식사를 마치고 오면서 보니까 게임 룸이 있던데. 카드게임을 할 줄 아시면 좀 가르쳐 주시겠어요? 영화에서만 몇 번 봤지 해 본 적이 없어서요.”

자신의 목소리 같지가 않았다. 제 입술이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다미로는 한조에게 미소를 지었다. 코트 안에 입은 남빛 원피스와 남빛 모자에 어울리게 바른 붉은 립스틱.

그녀의 붉은 입술 꼬리가 매혹적으로 올라갔다. 눈은 얼어붙어 있었지만 붉은 입술은 한조를 향해 고혹적으로 웃고 있었다. 태익의 눈동자와 입매가 굳어졌다.

한조가 다미로를 향해 눈썹을 위로 치켜 올렸다.

“흥미롭군요. 제가 아는 조선 여인들은 카드게임 같은 것엔 관심을 갖지 않던데. 다른 여자들의 옷이나 모자라면 모를까.”

“제가 조금…… 별나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긴 하죠, 소위님.”

다미로의 대꾸에 한조는 입술을 당겨 웃었다. 군인이라기에는 하얗고 창백한 한조의 미소는 차가웠다. 그가 다미로를 에스코트하겠다는 의미로 팔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이 한조의 팔에 사뿐히 얹혔다.

두 사람은 바로 등을 보이며 선실로 향했다. 한조의 군복 위에 얹힌 다미로의 손에 태익의 시선이 박혀 들었다. 그의 턱이 불거졌다.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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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익의 말처럼 외양을 접한 바다의 기상은 변덕스러웠다.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 아름다운 저녁놀을 선사했던 하늘에서는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해를 향하는 호화유람선은 빗줄기에 아랑곳없이 도도히 바다를 갈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든 6층의 식당과 게임 홀은 술과 음악으로 번잡하고 시끄러웠다.

게임 테이블에 앉은 다미로의 등 뒤에 서 있는 한조의 팔이 그녀의 어깨로 넘어왔다. 그의 손가락이 다미로가 손에 쥔 카드 중 한 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네들 뒤를 남루한 차림의 사내 패가 어슬렁거렸다. 아마도 배의 5층 아래쪽을 타고 항해하는 장사치들 같았다. 게임과 돈이 오가는 장소인지라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다미로와 한조가 있는 게임 테이블에서 약간 떨어진 바에는 곽과 태익이 함께 있었다.

“저대로 둬도 될까요? 도련님? 다미로가 한조를 잘 상대해 주고 있긴 한 것 같지만 그래도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곽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태익은 스트레이트 글라스를 입으로 가져가며 다미로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한조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러다가 말입니다. 한조가 다미로가 마령이라는 걸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제, 제가 지금 가서 그냥 확 데려오면 안 될까요, 도련님?”

불안으로 좌불안석인 곽이 성마르게 물으며 동의를 구하듯 태익에게 고개를 돌렸다. 태익이 입술로 가져간 스트레이트 글라스 안의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과유불급.”

깨끗하게 비운 글라스를 바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태익이 말했다.

“네?”

“지금 상황에서 무리한 행동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 그래도!”

“먼저 들어가서 쉬어라, 곽.”

그가 의자 뒤로 등을 묻으며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눈빛으로 명령을 내렸다. 이럴 때의 태익을 곽은 무서워했다. 단칼로 말을 자르는 태익 말이다.

그 깊은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곽은 태익 역시 다미로가 마령임을 들킬까 봐 불안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토를 달려던 입술을 다문 곽은 다미로와 한조에게 불안한 시선을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태익에게 고개를 숙인 후 자신의 선실로 향했다.

태익이 바텐더에게 손가락을 튕겼다. 바텐더가 스트레이트 글라스를 채웠다. 작은 잔을 쥔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지독하게 앓고 난 후 지난 며칠간 그는 일부러 다미로를 피했다.

왜…….

일과 감정이 뒤섞여 판단력이 흐려지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유 선생과의 약속과 다미로 사이에서 그는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약속을 이행한다면 다미로가 다치는 상황을 피할 수가 없다.

하지만 태익은 그녀가 다친들 어쩌란 말인가! 하는 갈등이 없지도 않았다. 이 모두 다미로 스스로 자처한 일이었다. 그녀가 먼저 배신했으며 어쩌면 대물림된 업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은가…….

머리와 이성은 태익에게 그렇게 현실을 재인식시키길 반복했다. 그러나 태익은 다미로를 빤히 보이는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 일을 제 손으로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미로를 불구덩이로 밀어 넣지 않기 위해 유 선생과의 약속을 저버린다면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뿐…….

“우가키 가즈시케. 육군특무대장이네.”

“조선에는 언제 들어오는 겁니까?”

“련말에서 내년 1월 사이에는 들어오지 않갔어?”

“비교적 경호가 느슨한 틈을 타야 하겠군요.”

“기렇디. 그놈이래 조선으로 립성하면…… 우리 조선아들 징병이 점점 본격화되지 않간. 그 전에 막을 수 있으면 막아야 하지 않갔느냐는 말이다!”

‘우가키 가즈시케’는 분명히 전범이다. 그는 37년 난징대학살 때 민간인과 포로들을 도륙한 인물 중 하나였다. 도망친 국민당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목 하에 6주에 걸쳐 민간인과 포로를 도륙한 인물이었다.

그때 죽은 사람만 난징과 그 주변 도시를 합쳐 12만 명에서 35만 명이었다. 일제의 중국 침략이 끝난다면 그는 전범이 되어야 할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유 선생과 다른 지도자들의 판단이 그랬다. 절대로 가즈시케가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그런데 그 가즈시케가 현재 일본 육군특무대장으로 상해 일본 조계지에 머무르고 있었다.

상해로의 출발을 앞두었던 태익은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한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다미로를 갈망하는 마음으로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내부에서 욕망은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솟구쳐 올랐다. 다미로가 숨기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로는 더욱 그랬다.

단순한 욕망과 욕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감춘 진실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깊어질수록 다미로를 향했던 증오와 배신감은……. 열망과 갈망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제 손길 아래에서 고통과 절망, 그리고 욕망이 뒤섞인 다미로의 눈빛을 보는 게 아니라, 환희와 쾌락에 울부짖는 눈동자를 원했다. 그녀가 내지르는 교성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런데 지금 다미로는…….

뜨거워진 피로 들끓는 심장을 태익은 차가운 이성으로 억눌렀다. 힘주어 쥐고 있던 스트레이트 글라스를 천천히 입술로 기울였다. 한조의 손이 다시 다미로의 어깨를 잡았다.

“덕분에 재미를 붙일 소일거리가 하나 생겼네요, 소위님.”

갑판의 공기는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가웠다. 추적추적 내린 빗물에 갑판을 밝힌 등불이 주황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요. 다미로 양.”

한조가 거만하게 뒷짐을 지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미로는 어깨에 걸쳐진 한조의 군복 외투를 벗어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녀는 선체 모서리 저쪽에서 이쪽을 노리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놓치지 않았다.

“상해에선 어디에 머무르실 예정이신가요?”

좋지 않은 기운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 다미로는 이만 한조를 자신의 선실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조를 노리는 것인지 자신을 노리는 것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만일 자신이라면…….

“외탄 구역에 호텔을 잡았습니다. 일본 조계지보다는 그쪽이 덜 번잡해서.”

“그러시군요.”

이 좋지 않게 느껴지는 기운으로 인해서 자칫 한조에게 정체를 의심받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만일 그녀의 정체가 후일에라도 탄로 나는 날엔, 태익이 위험해질 것은 자명했다.

다미로는 한조에게 그의 외투를 돌려주며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척했다.

늦었으니 이만 헤어지자는 의미였다.

“머무는 선실은 6층입니까?”

그런데 눈치라고는 개똥만큼도 없는 한조가 물었다. 다미로는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며 한숨 섞인 대답을 했다.

“아뇨, 7층이에요.”

“그럼 가시지요. 바래다 드리…….”

“눈치가 없으시네요, 마루야마 소위님.”

빗소리에 섞였지만 선체 모서리 뒤쪽의 움직임은 성말랐다. 마음이 급해진 다미로는 한조에게 약간의 강수를 두었다. 한조가 순간 그답지 않게 당황했다.

“……네?”

하지만 너무 몰아치면 한조와 같은 사람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다미로는 곤두선 신경을 능숙하게 감추며 교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숙녀는 신사들보다 화장실을 더 자주 다닌답니다. 화장실 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싫어하면서도요.”

한조의 얼굴에 잠시 무안한 빛이 올랐다. 하지만 그는 이내 머쓱해하며 모자를 벗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다미로가 먼저 몸을 돌렸다. 저벅저벅 한조의 군홧발 소리가 멀어짐을 그녀는 귀를 세워 확인했다.

선체 모서리 뒤쪽의 검은 그림자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자라는 것을 알아서였다. 다미로는 가려던 방향에서 몸을 틀어 한조가 사라진 방향으로 서둘러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림자가 더 빨랐다.

“헉!”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총에는 능했지만 남자와의 몸싸움에는 능하지 않은 다미로였다. 그림자에 팔이 잡혀 그대로 당겨졌다. 다미로의 팔꿈치가 사내의 가슴팍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철퍼덕!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아 제압한 남자와 다미로가 빗물 바닥으로 함께 넘어졌다. 사내의 두 팔이 그녀의 팔과 몸을 옥죄었다. 다미로 있는 힘을 다해 허리를 꺾어 남자의 팔을 물어뜯었다.

“으윽! 이런 육시랄!”

남자의 팔에서 힘이 풀리는 순간 다미로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순간 “하윽!” 오른팔 위쪽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도…… 돈! 돈 내노랑께!”

사내가 버벅대면서도 소리 죽여 낮게 소리치는 말이었다. 다미로는 빗물로 흐려진 시야로 사내를 노려봤다. 사내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칼에 스친 팔을 움켜쥔 다미로와 사내의 눈이 마주쳤다. 눈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사내의 얼굴을 보지 말았어야 했건만! 사내 역시 자신의 얼굴을 다미로가 봤다는 사실에 당황해했다.

그리고 그녀가 바닥에 넘어진 채 발을 밀어 사내에게서 달아나려는 순간, 발목이 잡혔다. 다미로가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사내의 힘을 당해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찌지직!

치맛단이 찢어졌다. 잡힌 두 발목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마를 때리는 빗줄기가 세찼다.

퍽! 퍽! 퍼벅!

누군가가 난타당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버둥거리던 다미로의 다리에 힘이 풀려 갈 때였다. 잡혔던 발목이 자유로워졌다.

“으윽, 욱! 욱! 살려…… 아이고 살려 주십쇼……!”

애걸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미로의 시선이 바닥에서 발이 들려 선체 벽에 매달린 것처럼 보이는 사내를 향했다.

컥 컥컥!

“살려…… 살려 주십쇼, 나, 나리…….”

사내는 금방이라도 꼴딱 숨이 넘어가기 일보직전 같았다. 그리고 불과 몇십 초도 안 되는 시간에 사내를 제압해 멱살을 움켜쥔 사람은…….

오라버니.

태익이었다.

딱딱 이가 부딪쳤다. 태익의 코트에 머리까지 싸여 몸이 번쩍 들린 순간부터 줄곧 다미로는 덜덜 떨고 있었다. 그녀를 안은 태익은 곧장 그녀의 선실로 갔다.

“보자.”

의자에 그녀를 앉혀 두고 젖은 재킷을 벗은 그가 다미로에게 다가와 말했다. 태익은 이환이 그녀의 가방에 챙겨 넣어 둔 구급함까지 꺼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다미로는 그의 코트를 움켜쥔 채 멍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다미로.”

태익이 그녀 앞으로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다미로가 그제야 태익의 얼굴을 쳐다봤다. 완벽하게 빗어 넘긴 머리가 빗물에 젖어 있었다.

언제나 완벽했던 남자의 새하얀 셔츠가 젖어 있었다. 대충 소매를 걷어올린 팔과 손에 흐릿한 찰과상이 보였다. 다미로는 태익의 반듯한 눈썹과 쌍꺼풀 없이 기다란 눈, 단정하지만 우뚝한 콧날을 따라 그의 입술과 날렵한 턱까지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상처……. 보자, 다미로.”

그가 코트 깃을 움켜쥔 다미로의 손가락을 지그시 힘주어 풀어냈다. 그녀는 반항하지 않고 순종적으로 손을 풀었다.

“절, 어떻게 찾으셨어요?”

태익이 다미로의 오른팔 상처를 살필 때였다. 그녀가 물었다.

“다행히 꿰맬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태익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척 자기 말을 했다.

“좀도둑이라 식당에서 훔친 칼이 시원치 않았어. 불행 중 다행이지.”

알코올을 묻힌 솜으로 상처의 피를 닦아 내고 지그시 눌러 지혈을 시켰다. 그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면 붕대를 상처에 감았다.

“안아…… 주세요.”

그가 붕대를 다 감고 매듭을 지을 때였다. 다미로의 떨리는 목소리에 그는 비로소 상처에서 눈을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로 그녀의 얼굴이 젖어 있었다.

그 젖은 얼굴이 겨울비에 속수무책으로 몸을 적신 가을꽃 같았다. 곧 닥쳐올 추위에 미처 겨울 준비를 못한 붉은 넝쿨 장미 같았다. 그래서 확 꺾어 버리고 싶은, 꺾어서 꽃병에 꽂아 곁에 두고 싶은…….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상처가 될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구급함을 수습하며 말했다.

“널, 안고 말고는 내 의지다. 다미로.”

“그러니까 안아 주세요.”

“그러니까라는 네 말은 내가 앞에 한 말과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는데.”

“어째서요.”

그녀가 따지듯 물었다. 구급함을 수습한 태익이 그녀와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어째서냐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비에 젖은 새틴 원피스가 그녀의 볼륨감 넘치는 가슴에 착 달라붙어 있어서였다.

옆 솔기가 뜯어진 치맛자락 사이로 새하얀 허벅지와 검은 스타킹을 고정시킨 가터벨트가 보였기 때문이다. 안아 달라고 그녀가 말했기 때문이다.

무너지려는 이성의 둑을 가까스로 막고 있던 태익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그리고 아까 한조의 팔에 다미로의 손이 닿는 그 순간에도 말이다. 태익은 만일 그녀에게 손을 댄다면 이젠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만났을 때, 그녀를 희롱한 이유는 확인을 하고 싶어서였다. 아직도 그녀가 자신의 손길을 기억하는지. 자신의 손길에 반응을 하는지, 제가 길들여 놓은 그대로인지 말이다.

그녀가 상처를 받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를 모욕적으로 다뤄도 그것은 그녀가 치러야 할 죗값의 털끝에도 미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래서 멈출 수가 있었다. 맘껏 희롱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말이다. 다미로에 대한 욕망으로 아래가 뻐근해지도록 힘이 들어가도 그는 기꺼이 제 욕망을 꺾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제 몸을 원하시잖아요. 제가 한조와 있는 동안 저한테서 눈을 떼지 않으셨잖아요.”

다미로가 감추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날부터, 태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에게 손을 대는 순간부터 통제 불능의 자신이 될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안아……!”

읍!

애원하던 다미로의 입술이 먹혔다. 그녀의 턱을 억세게 잡아당겨 뒷머리칼을 아프게 움켜쥔 태익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고통스럽도록 거세게 다미로의 아랫입술이 빨렸다.

치아가 강하게 부딪힌다 싶던 순간에 그의 혀가 그녀의 혀를 얽어 단숨에 뿌리까지 당겼다. 태익의 손이 다미로의 젖은 등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흡!

원피스의 등 지퍼가 열림과 동시에 그의 손이 앞으로 파고들어 젖가슴을 아프게 움켜쥐었다. 원피스 상의가 허리까지 끌려 내려왔지만, 다미로는 상관하지 않고 격렬하게 파고드는 그의 입술을 받았다.

치아를 더듬은 혀가 목구멍까지 들어와 그녀를 삼켰다. 비릿한 피 맛이 나도록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빨렸다. 마치 오랜 굶주림에 허기를 채우듯 타액이 흘러내리고 입술을 빠는 야릇한 소리가 허공에 퍼져도 맞물린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읏!”

다미로의 브래지어가 끌려 내려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태익의 섬세하고 큰 손이 젖가슴 양쪽을 동시에 위로 튕겨 올리듯 잡았다. 벌써부터 탱탱하게 부푼 젖가슴 가운데 발딱 일어선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당기고 자극했다.

“하윽…… 오라버니…….”

맞물린 입술 사이로 다미로가 그를 애타게 불렀다. 태익의 입술이 떨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누구의 숨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미로의 이마에 이마를 맞댄 태익은 지그시 힘주어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 이마를 떼고 의자에 앉은 다미로를 열기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허리까지 끌러져 내린 원피스와 브래지어가 퇴폐적이었다. 가녀린 어깨와 그와는 대조적인 탱글탱글하게 부푼 젖가슴을 활짝 드러낸 다미로는 뇌쇄적이었다.

눈을 마주한 채로 태익의 손이 다미로의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었다. 원피스 치마를 걷어 올려놓고 가터벨트 한쪽을 풀어 그녀의 속옷을 천천히 음미하듯 끌어 내렸다.

매끄러운 허벅지 안쪽의 감촉을 손등으로 느끼며 태익은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검은 밀지에 시선을 꽂았다.

하아.

다미로의 젖가슴이 커다랗게 오르락내리락했다. 태익의 눈이 그곳에 닿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강렬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끌려 내려온 속옷이 아슬아슬하게 발목에 걸쳤다.

그런데 그 순간 태익이 그녀의 양쪽 발목을 잡았다.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채기도 전이었다. 다미로의 다리가 의자 양 손잡이에 하나씩 걸렸다.

검은 밀지에 둘러싸여 있던 다미로의 그곳이 활짝 만개한 꽃잎처럼 태익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뇌수에 찌르르 쾌락의 진동이 울렸다.

미치도록 그리워했던 곳이었다. 검붉은 흑장미처럼 붉은 속살이 겹겹이 겹쳐진 그곳. 길게 갈라진 여린 속살 사이 가장 깊숙이 자리한 쾌락의 밀지.

태익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여 그녀의 허벅지 양쪽을 움켜쥐었다. 그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그러나 멈칫. 다미로의 밀지로 향하던 태익의 얼굴이 갑자기 멈추어 섰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미로를 올려다봤다.

두려움과 기대, 흥분으로 범벅된 다미로의 놀란 눈이 그와 마주쳤다.

“오늘은 맛만 보고 못 끝낸다, 다미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경고였다. 이제와 몸을 빼려 한들 놔주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흡!

그곳이 빨린 것은 다미로가 그의 경고와 협박에 어떤 답을 하기도 전이었다. 잔뜩 끝을 세운 혀가 밀지의 가장 예민한 곳부터 건드렸다.

흐읍!

다미로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자극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갈라진 틈새를 핥아 내려가는 그의 혀가 델 것처럼 뜨거웠다. 허벅지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태익의 손이 힘이 들어간 그녀의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가 다리를 벌렸다.

하윽!

쭉 단번에 밀지의 중심부, 동굴 입구가 빨렸다. 그러자 검붉은 꽃잎 안쪽 그보다 옅은 분홍빛 돌기가 질척하게 젖어 들었다. 뜨거운 것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다미로는 황급히 손을 내려 그에게 빨리는 자신의 동굴을 움켜쥐려 했다. 그러나 태익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오라버…… 니.”

그가 고개를 들어 망연해진 다미로를 올려 보았다. 태익은 눈을 맞춘 채로 그녀의 동굴입구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만개한 꽃잎이 촉촉하게 젖어 번들거리는 모양에 아래에 뻐근하게 통증이 들었다.

그가 허리를 펴 다미로의 왼뺨을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의 얼굴이 스치듯 입술을 지나 그녀의 귓가로 다가왔다.

“넣어 달라고 말해, 다미로.”

지독한 욕망에 사로잡힌 남자의 협박이었다. 분출시키지 못했던 욕망에 고통 받는 태익의 명령이었다. 하지만 다미로는 아랫입술을 피가 배도록 깨물었다.

“다미로.”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질 입구를 맴돌며 채근했다. 흐물흐물 다미로는 녹아내리는 자신을 느꼈다. 그러나 그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먼저 안아 달라고 애원했지만 더 이상은 애원하고 싶지 않았다.

태익이 그녀의 귓가에서 멀어져 다시 그녀와 눈길을 마주했다. 그의 눈빛이 붉었다. 정염과 애욕에 휩싸여 당장이라도 다미로를 삼켜 버릴 것 같은 눈이었다.

“말해, 다미로. 넣어 달라고.”

눈을 마주한 상태로 태익의 손이 그녀의 갈라진 틈을 슥 쓸어 올렸다.

하읏!

예민하게 부푼 클리토리스를 그의 손이 건드리자 다미로의 허리가 움찔거렸다. 태익의 눈동자가 야수처럼 파랗게 빛을 냈다. 그녀가 미쳐 날뛰는 곳이 어딘지 그는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석류 알갱이보다 붉게 핏빛으로 달아오른 클리토리스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자극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입술을 악물어도 다미로는 새어 나오는 신음을 막아 내지 못했다.

하응! 하아 하아 하으응!

다미로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움찔거리던 엉덩이가 자꾸만 들썩였다. 더는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태익의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래위로 좌우 옆으로 손가락 사이에 끼여 자극당하는 클리토리스가 터질듯이 발기했다.

하으윽!

그곳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더 이상의 자극을 다미로는 견뎌 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래위로 힘 있게 잡아 흔드는 태익의 손목을 그녀가 움켜쥐었다.

“넣어……. 넣어 주세……. 요!”

기어들어 갈 듯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태익을 열망하고 갈망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다미로의 뺨을 감싸 쥔 태익의 손이 그녀의 입술을 억세게 눌러 쓰다듬었다.

애틋함과 짐승처럼 사나워진 욕망이 섞인 태익의 눈빛을 다미로는 순간이지만 알아봤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였다. 태익의 입술이 길게 다미로의 입술을 흡입했다.

입술을 흡인하던 태익이 그녀의 골반을 세차게 당겨 안았다. 버클을 풀고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는 아득해져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의자 팔걸이에 양다리가 걸려 활짝 벌어진 다미로의 동굴로 태익의 남성이 빨려 들어갔다.

하악!

다미로의 몸이 남자를 받아들인 일은 5년 만이었다. 그렇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마치 첫 경험을 하던 그날과 똑같은 통증을 느꼈다.

태익의 어깨를 잡은 손가락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그가 속삭여 묻는다.

“아파?”

아니 아니. 다미로는 밭은 숨을 내쉬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통증보다 더 버겁도록 좋은 것은 그곳을 꽉 틀어막은 그의 것이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하체가 맞물린 그 느낌이었다.

태익이 다미로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하지만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내려 다미로의 하체에 맞물린 자신의 남성을 잡았다.

천천히, 그러나 길게 그녀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가 다시 천천히 빼냈다. 그의 굵은 남성이 다미로의 체액으로 번들거렸다. 지독하게도 색정적인 광경이었다.

뒤엉킨 까만 음모 사이로 자신의 음부를 천천히 들락날락하는 태익의 음경을 보는 것은, 보는 것만으로 뇌수가 찡하게 울릴 만큼 자극적이었다.

하아…… 아.

마주한 다미로의 격한 호흡이 떨리고 흐트러졌다.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커다랗게 들썩거렸다. 태익이 힘 있게 허리를 튕겨 올릴 때마다 그녀의 탱글탱글한 젖가슴이 밤바다처럼 묵직하게 출렁였다.

그녀가 허리를 젖혔다. 그가 허리를 튕겨 동굴을 진동할 때마다 그녀는 박자를 맞춰 엉덩이를 한껏 치켜들었다. 자극의 강도는 점점 강렬해져 갔다.

맞물린 하체가 서로 힘껏 부딪칠 때마다 다미로는 온몸의 세포가 폭발하는 것 같았다.

하악 하악! 하악!

태익의 사타구니와 다미로의 사타구니가 부서질 것처럼 서로 부딪쳤다. 푹푹 쑤시고 들어와 콱콱 박혀 드는 태익을 받아 내며 다미로는 완전히 허리를 뒤로 꺾었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쾌락이었다.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하는 쾌락과 쾌감의 고지에서 그녀는 정신이 혼미했다. 다미로에게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었다. 생명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태익은 그런 사람이었다.……

짙은 새벽이었다. 해무에 휩싸인 배는 아직 짙은 어둠에 잠긴 밤바다를 유유히 항해하고 있었다. 채도가 낮은 무등 아래에 태익은 다미로의 벗은 어깨를 응시했다.

매끄럽게 떨어지는 살결 위로 동그랗고 작은 흉터가 보였다. 총탄 자국 같았다.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리며 살며시 이불을 끌어내렸다.

잘록한 허리가 드러났다. 희미해져 있지만 경무국에서 당한 것으로 보이는 푸른 멍이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하얗게 몽우리 진 젖가슴 위에 핀 빨간 열꽃이 눈에 들었다.

어젯밤 그의 입술에 잘근잘근 씹혀 자극 당한 유두가 진분홍빛을 띠고 부풀어 있었다. 태익의 입 안에 침이 고였다. 5년 사이, 그가 원인을 다 유추하지 못할 상흔이 생긴 다미로는 성숙해 있었다.

스무 살. 처음 그녀를 안았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 태익을 사로잡은 다미로의 눈빛은 열망 그 자체였다. 그녀가 존경하고 우러르는 안태익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숭배였다.

한 번도 무엇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새벽에나 들어와 무작정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잠든 그녀를 안을 적에도 다미로는 싫다는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밤새 몇 번의 관계를 가져도 태익을 밀어내지 않은 다미로였다. 어리고 여린 몸으로 제 살을 파고드는 사내를 버거워하면서도 그녀는 모두 받아주었었다.

그런데 어제의 다미로는 달랐다. 당당하게 요구했고 태익을 갈망했다. 그런 그녀가 그를 더 미치게 했고 흥분시켰다. 하지만 그는 미처 날뛸 수가 없었다.

그녀를 안으면서도 이성을 다 놓을 수가 없었다. 갑판에서 다미로를 공격했던 사내. 그 사내 때문이었다. 별것 아닌 좀도둑이라고 말해 놓았지만 태익은 그 사내가 마음에 걸렸다.

“으음…….”

다미로가 나쁜 꿈이라도 꾸는 양 몸을 뒤척였다. 골반까지 끌어내린 이불이 조금 더 아래로 흘러내렸다. 동그랗고 탐스러운 엉덩이가 드러났다.

농익은 사과처럼 가운데가 깊숙하게 갈라져 양쪽으로 볼록 솟은 엉덩이는 육감적이며 그래서 지독하게도 색정적이었다. 태익은 급작스럽게 시큰거리며 욕망을 호소하는 제 아랫도리에 지그시 미간을 접었다.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그녀에게서 몸을 떼려 했지만 욕망이 이대로 접혀질 것 같지 않았다. 쾌락에 몸부림치는 다미로가 눈앞에 생생했다.

묵직한 젖가슴을 쉼 없이 출렁이며 엉덩이를 흔들어 대던 어젯밤 그녀의 모습이 그의 욕망에 다시금 자극을 가했다. 그러면서도 결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악물었던 그녀가 떠올랐다.

태익의 욕정에 불이 붙었다. 예전처럼 쾌락에 이성을 빼앗긴 그녀의 교성이 미치도록 듣고 싶었다. 태익은 잠든 다미로의 이마에 흥건한 땀을 손바닥으로 짙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 손을 미끄러트려 자신의 입술에 유린당해 여전히 진분홍빛인 유두를 입 안에 머금었다. 입 안에 앵두 알갱이처럼 쏙 들어온 유두를 혀로 살살 건드리고 빨아 당겼다.

유두가 꼿꼿하게 일어서 그의 혀에 착 감겨들었다. 다미로가 “으응……하아……”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낮은 한숨을 내쉬며 태익의 머리를 껴안았다.

유두를 희롱하던 태익의 입술이 가슴골에 짙은 입맞춤을 남기며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허리 근처를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내려 입술을 검은 밀지의 언덕배기를 머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미로는 잠이 채 깨지 못한 상태였다. 태익의 두 손이 그녀의 양다리를 각각 잡아 어깨에 걸쳤다. 엉덩이 아래로 두 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밀지 중앙을 음미하듯 탐닉했다. 어젯밤 자신을 힘겹게 받아 냈던 검붉은 속살을 확인했다. 그의 음경이 들고날 때마다 쓸리고 자극당해 부풀고 예민해진 입구를 핥았다.

흐읏.

그녀가 입술을 깨물어 신음을 삼켰다. 이미 다미로는 잠에서 깨어 있었다.

태익의 혀가 동굴 입구에서부터 위로 갈라진 속살을 핥아 올라갔다. 그의 손이 갈라진 속살을 양쪽으로 당겨 활짝 벌렸다. 끈적끈적한 체액과 그의 타액으로 젖은 쫄깃한 음순들을 확인하며 동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흣…….”

다미로가 본능적으로 그의 손가락을 조였다. 그녀의 배가 위로 들렸다. 허리가 침대에서 들리며 허벅지 안쪽에 힘을 주었다.

“하아 읏!”

그런데 다음 일은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태익이 동굴에 손가락을 삽입한 채로 그녀의 몸을 뒤엎은 것이다. 다미로의 젖가슴은 침대에 밀착해 있었고 육감적인 엉덩이는 천장을 향해 들려 있었다.

“오라버니! 무슨……!”

그녀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그러나 태익은 아랑곳없이 손가락을 쑥 빼더니 다시 세 개로 늘려 동굴로 밀어 넣었다.

으흡!

벌써부터 축축하게 젖다 못해 미끈거리던 그녀의 깊은 곳 내벽을 그의 손가락이 자극해 왔다.

“봐야겠어.”

태익의 목소리였다. 낮았고 갈라져 있었으며 화가 나 있는 것도 같았지만…… 감정은 절제되어 있었다.

“뭘요.”

묻는 다미로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두가 아릿하게 빨려 희롱당하던 순간부터 다미로의 본능은 기대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여길 자세히 봐야겠어.”

뭘 보겠다는 것인지 묻는 다미로의 물음에 그가 엉덩이 골을 손가락으로 길게 쓸어 내려왔다. 그리고 멈춘 곳은 태익을 향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곳이었다.

그의 손가락을 옥죄어 희멀건 체액을 쏟아 내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그곳이었다.

“잠 잠깐만…….”

이제야 태익의 의도를 제대로 인식한 그녀가 팔꿈치로 침대를 딛고 간신히 고개를 틀었다. 그렇지만 그 순간 태익의 손가락이 쑥 밀고 들어와 다시 동굴 내벽을 긁었다. 뭉근한 쾌락이 파도처럼 다미로를 덮쳤다.

“다른 놈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 다미로.”

하악!

금세 빨갛게 농익은 다미로의 입술이 벌어져 뜨겁게 달아오른 숨소리만 뱉어 냈다.

“네 여길 드나든 놈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어.”

“오라버니…….”

하윽!

태익의 손가락이 느닷없이 빠져나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양손이 다미로의 갈라진 틈바구니를 또다시 양옆으로 당겨 음부를 활짝 열었다.

말캉하고 뜨거운 입술이 와락, 검붉게 핀 속살을 물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그곳을 맛보고 혀와 입술로 탐닉했다.

예민한 붉은 속살이 그의 입술로 빨려 들어갔다. 쭉쭉 빨릴 때마다 쾌감이 그녀의 몸을 진동시켰다. 그러면서도 지독한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그에게 엉덩이와 음부를 적나라하게 내보이고 제 그곳이 그의 입술에 먹혀 있는 광경에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제발…… 오라버니…….”

다미로를 그를 밀어내는 말을 하면서도 점점 그의 입술에 밀착되는 엉덩이짓을 멈추지 못했다. 아랫배가 저절로 움찔거렸다. 허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아래위 상하 운동을 했다.

하아. 하아.

“대답해라, 다미로.”

태익이 그곳을 빨아 당기고 애무하던 입술 사이로 대답을 요구했다. 아니라는 대답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자신 외에 그 누구도 그녀의 밀지를 드나든 사내가 없다는 것은 아니까.

다만 그가 원하는 것은 그녀가 스스로 진실을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미로는 입술을 앙다물고 흐트러진 호흡만 새되게 내쉴 뿐이었다.

그가 천천히 그녀의 밀지에서 애무하던 입술을 떼었다. 다미로의 허리를 한 팔로 안아 들었다. 위로 들린 엉덩이를 몸 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핫……!

갑작스레 뒤로 당겨진 그녀가 베개에 묻었던 이마를 들었다. 고개를 틀어 가까스로 그를 돌아봤다. 태익이 손으로 그런 다미로의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새하얀 엉덩이와 정염으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음부가 대조적이었다. 진한 애무와 자극을 못 이겨 통통하게 부푼 쫄깃한 음순의 모양에 뇌수가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제가 쏟아 낸 체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다미로의 그곳이 그의 인내심에 한계를 자극했다.

하아.

태익의 호흡이 일순 흐트러졌다. 다미로의 엉덩이 골을 쓸어 내려온 손이 그녀의 갈라진 음순 사이를 훑고 내려갔다. 움찔, 그녀의 동굴 입구가 놀란 조가비처럼 조여드는 모습에 그는 기꺼이 이성을 버렸다.

“벌려…… 다미로.”

태익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그의 남성이 엉덩이의 갈라진 틈새를 지나 자신의 손으로 한껏 벌려 놓은 붉을 꽃잎 사이를 한 번에 가르고 들어왔다.

학!

단번에 쑤시고 들어와 강력하게 푹 남성을 박아 넣었다. 자극점과 강도가 다른 쾌감에 다미로는 크게 허리를 젖혔다. 그녀의 가녀린 목에 파란 핏줄이 돋았다.

그 모습에 태익이 힘껏 허리를 쳐올리자 다미로의 허리가 더 뒤로 젖혀졌다. 뚫리는 것과 같은 통증과 쾌락이 동시였다. 어젯밤과는 차원이 다르게 그의 남성이 버겁도록 굵게 팽창되어 있는 탓이었다.

“하윽……!”

다미로는 손을 아래로 뻗어 자신의 음모를 움켜쥐었다. 그곳이 찢어질 것처럼 버거웠지만 쾌락의 강도는 그만큼이나 거대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두려움도 커져 갔다.

하윽.

입술을 깨물어 신음을 삼키면서도 그녀는 움켜쥔 제 음모를 잡아 뜯었다. 허리를 고양이처럼 말아 버겁도록 제 안을 꽉 채운 그의 페니스를 강하게 조였다

흐읍.

태익이 숨을 삼키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엉덩이가 태익의 돌처럼 단단한 아랫배를 짓누르며 상화좌우로 춤을 췄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동굴이 쏟아 낸 체액이 질척거리며 그녀를 엉덩이를 흠뻑 적셔 갔다.

아래가 달궈진 쇳덩이에 뚫리는 것 같은 쾌감이었다. 베개에 묻은 입술에서 새된 교성이 터져 나오려 했다. 다미로는 두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이곳은 비좁은 선실이었다. 소리가 바깥으로 새 나갈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동지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니던가. 어젯밤 분명 태익을 먼저 유혹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뇌수가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태익의 달궈진 쇳덩이에 중심부가 관통당할 때마가 머릿속에서 거대한 포말이 밀려와 새하얗게 부서졌다.

부서지고 또 부서지고 쉼 없이 밀려드는 거센 파도에 다미로의 정신은 아득해져 갔다. 눈앞의 빛이 산산조각 나 쪼개져 부서졌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한 자락 이성의 끈을 안간힘을 다해 붙잡았다.

자신이 태익에게 원하는 것은 이것뿐이어야 한다고. 그의 몸 아래에서 헐떡이는 것만 해야 한다고. 더 이상은 이기적인 욕심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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