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1화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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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끝까지 족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적당한 시기에 소리 소문 없이 석방시키려고 했었던 계집이었습니다. 어쨌든 살인용의자이지 않습니까.”

마루야마 지로 경무국장이었다.

“사실 우리 입장에서는 그 계집을 굳이 잡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의원님께서 아실 테고, 대일본제국을 향한 테러를 한 것도 아니고 조선인 언론인사 몇을 죽였지 않았냐는 의심밖에 없던 터라.”

하하.

마루야마는 눈꼬리가 접히도록 웃었다. 그러다 급하게 다가온 수하의 귀엣말에 미간을 접었다. 길게 다리를 꼬아 앉아 있던 태익이 마루야마의 등 뒤로 시선을 던졌다.

처음 보는 얼굴이 맞는데 낯이 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투박한 얼굴이었다. 일본인이라 치기에는 지나치게 사내답고 조선인이라 하기에는 턱이 너무 좁았다.

어디서 봤더라.

태익이 의자 손잡이에 걸친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그때 경무국장 마루야마가 제 수하와의 용무가 끝났는지 다시 태익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계집은 의원님께서 필요하신 대로 쓰십시오. 우리 쪽에서는 호송 중 탈옥한 것으로 처리를 해 놓았으니. 죽이셔도 상관없고 탐내는 자가 있으면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마루야마는 급한 용무가 생긴 것인지 테이블 위의 모자를 챙겨 들며 결론을 내놓았다. 태익이 마루야마에게 다미로를 넘겨받으며 치른 대가는 제물포의 미곡상이었다.

경무국장씩이나 되면서도 돈에 환장한 노인네였다. 그의 아들 한조와는 부자라는 것이 이상할 만큼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다. 뭐랄까, 마루야마 한조는 아비에 비하면 훨씬 잔악한 놈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육군 소위로 경성에 와 있었지만 작년까지 만주관동군에 있던 전투를 즐기는 전쟁광이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는 태익을 자신과 비슷한 부류로 분리해 놓고 있는 듯 보였다.

언제나 차갑고 냉철하며 망설임이 없는 태익이 그렇게 보였던 것 같았다.

“경무국장의 배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태익은 식은 커피 잔으로 마루야마에게 건배해 보이며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도 필요한 것이 있으시거든 주저 말고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경무국장 쪽 채널은 항시 열어 두겠습니다.”

늙은 너구리의 입은 이로써 완벽하게 막아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놈에게 다미로, 아니 ‘마령’에 대한 정보를 더 얻어 낸 것은 없었다.

“아! 감사합니다. 의원님, 헌데 제가 오늘은 이만 먼저 실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총독부에서 급한 호출을 받은 터라.”

예상대로 마루야마가 모자를 쓰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얼마든. 오늘만 날이겠습니까. 일간 한조 소위와 함께할 자리를 마련할 테니, 그때 뵙도록 하시지요.”

태익이 호탕하게 손을 내밀어 마루야마에게 먼저 악수를 건넸다.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은 마루야마는,

“하이! 초대해 주신다면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의원님.”

하며 깍듯한 인사를 뒤로 등을 보였다.

본점을 경성에 둔 미나카이 백화점이었다. 태익이 주식의 30퍼센트를 쥐고 있는 백화점이기도 했다.

“도련님.”

마루야마가 백화점을 나서는 것을 옥상 정원에서 확인한 이곽이 그를 불렀다. 이곽은 이환의 아들이었다.

“내 차는 집으로 돌려보낸다.”

태익이 자신과 이곽이 따로따로 나갈 백화점 출구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가 눈짓으로 시중을 들던 주변을 물린 뒤였다. 그의 눈짓 한 번에 옥상 정원 레스토랑의 직원들이 소리 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럼 도련님께선……?”

“종로 네거리에서 한강통 방면 전차를 탈 거다. 네가 나를 대신해서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알겠나?”

태익은 자신의 재킷을 벗어 이곽에게 건넸다. 이곽 또한 익숙한 일이라는 것처럼 아무 질문 없이 그와 옷을 바꿔 입었다.

“그리고 마루야마의 아까 그놈 말이야. 마루야마의 직속 수하. 그놈에 대해서 좀 알아봐라.”

“알아보라 하심은……?”

“몰라 묻나?”

바꿔 입은 재킷의 날을 바로잡으며 백화점 아래 거리를 확인하던 태익이 날카롭지만 묵직한 눈빛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이곽은 아주 잠시 눈만 껌뻑이며 서 있었다.

옷깃을 바로잡고 손에 장갑을 끼려던 태익이.

툭.

장갑으로 이곽의 이마를 가볍게 쳤다. 이곽답지 않게 깜빡이는 꼴을 못 봐주겠다는 의미였다.

“가족, 여자, 금전, 지병, 기타 등등. 약점이 될 수 있을 만한 건 모조리 알아보란 말이잖아. 정말 못 알아들어?”

장갑을 낀 태익이 테이블에 기대어 놓았던 단장을 집어 들었다. 검은색의 단장에는 해룡이 장식되어 있었다.

“아!”

제 주인이 지시사항을 조목조목 짚어 주고 나서야 정신이 든 이곽은 그제야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곽은 바로 고개를 조아리며 재빠르게 태익이 나갈 길을 만들었다. 실은, 다미로의 일은 이곽과 태익만의 비밀이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러했다.

경무국에서 잡아들인 현상수배범 ‘마령’이 안태익과 한집에서 살았던 안다미로란 사실은 절대로 바깥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됐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얘기도 없이 사라진 다미로. 소문이 무성했었다. 여학교에서 만난 일본인 선생과 눈이 맞아 같이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는 얘기부터, 생부를 만나 상해로 갔다는 말까지.

하지만 2년 전쯤이었다. 다미로가 사라진 지 3년째 되는 해부터였다. 총잡이 ‘마령’이 다미로와 닮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러시아인 할 것 없이 돈만 주면 죽여 준다는 ‘마령’이었다.

다행히 마령이 다미로를 닮았다는 소문의 폭은 넓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이라도 태익은 마령을 쫓기 시작했다. 안태익은 조선 최고의 갑부 중 한 사람이자 몇 안 되는 조선인 중의원이었다.

호시탐탐 그의 약점을 노리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적이 많을 수밖에 없는 그에게 다미로의 소문은 자칫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다미로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 태익의 처사에 곽은 혼란스럽던 상태였다. 그는 냉철한 사람이었다. 감정에 이끌려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은 결코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스물두 살이 되던 해에 부친이 돌아가셨다. 불과 스물두 살의 나이에 재산뿐 아니라 100여 명에 달하는 식솔과 12개 사업체의 책임을 물려받아야만 했던 태익이었다.

냉혈하고 냉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그였다. 충신이자 가신인 이환이 곁에 있었다고 해도, 그는 늘 언제 누구에게 배신을 당할지 모를 불안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이환과 이곽 외에는 누구도 곁에 두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 다미로는 예외였지만. 태익은 6살이나 어린 그녀를 동생처럼 가르치고 교육시켰다.

다미로는 그의 부친 안길준의 또 다른 가신이었던 ‘주옥’의 딸이었다. 그녀가 왜 상해에서 태어나 두 살도 안 되어 안길준의 집에 홀로 보내졌는지, 이곽도 거기까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녀가 안씨 성을 받아 자라기는 했지만, 곽이나 그녀나 태익을 주인으로 모시며 친구로 함께 자랐다. 그렇기에 다미로의 배신은……. 태익뿐 아니라 곽에게도 말로 다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한데, 그런 다미로를 태익은 왜…….

“아, 그리고…….”

손목시계를 확인하던 태익이 곽을 불렀다. 곽은 과거를 더듬던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네, 도련님.”

“옷.”

“네?”

“혼사이에 주문해 놓은 다미로의 옷이 있어. 속옷까지 전부. 챙겨서 집에 가져다 놔. 밤에 데리고 갈 데가 있으니까.”

그것은 의미를 다 헤아리기 힘든 명령이었다. 다미로의 옷이라니……. 속옷까지 전부 그가 미리 주문을 해 놓았다니…….

곽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이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을 다 숨기지 못한 채 태익을 먼저 보냈다.

* * *

따릉따릉 따르릉.

종로네거리를 지나는 전차에 태익은 가볍게 올라탔다. 미나카이백화점을 이곽과 각자 다른 길로 빠져나와 채 10분을 걷지 않고서였다.

“2만 불.”

전차 안은 붐볐다. 해가 넘어간 퇴근길 경성의 전차 안은 늘 비슷했다. 차림새가 어수룩한 사내 옆으로 자연스럽게 선 태익이 그의 주머니로 물건을 넣으며 말했다.

“내가 주문한 물건은?”

태연하게 전차 밖 종로 거리를 구경하는 척 태익이 묻자, 차림새가 어수룩한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민첩하게 손톱만 한 쪽지를 그의 재킷 호주머니에 넣고는 바람처럼 전차에서 내렸다.

접선자가 내린 후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강통을 순환하는 전차가 종착지를 돌아 다시 성을 향해 갈 때쯤이었다. 붐비던 전차에 사람이 드물어진, 밤안개가 짙어진 시간이었다.

태익은 차가워진 밤바람을 맞으며 손에 든 쪽지를 한참 응시했다. 쪽지는 아직 처음 전해 받은 대로 접힌 상태였다. 쪽지에 적힌 내용은…… 다미로, 즉 마령의 남편이라 추측되는 사람의 이름과 간략한 신상 정보일 터였다.

그런데 빌어먹을……!

태익은 입 속이 말랐다. 타이는 풀어 주머니 속에 있건만 목이 답답했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쪽지를 펴지 못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그깟 남편 놈 이름이 뭐가 대수라고.

이성을 따라 주지 않는 자신의 마음에 태익은 주먹을 움켜쥐며 차창 밖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다음 정류장에 전차가 서기도 전에 훌쩍 차에서 내렸다.

인적이 드물고 주변이 어둑한 정류장이었다.

타닥타닥 타다닥.

뒤를 따르는 다급한 발소리를 확인했다. 누구냐, 왜 날 미행하느냐 하는 등의 물음은 필요가 없었다. 전차에서부터 눈치를 채고서 내린 것이었으니까.

발걸음 소리가 비로소 바로 뒤통수에 붙을 때였다. 태익의 단장이 뒤따르던 사내의 경동맥을 단번에 가격했다.

탓!

털썩!

소리도 없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공격이었다. 사내는 비명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태익이 위장용으로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하수구로 던져 넣었다.

입고 있던 재킷을 깔끔하게 뒤집어 부드럽게 팔을 꿰고 깃을 단정하게 바로잡았다. 그러나 쪽지를 확인하는 일은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주변을 훑지 않고 그대로 쪽지를 폈다.

[장위건. 동양지광.]

적힌 내용은 단어 두 개였다.

장위건, 동양지광이라.

재빨리 내용을 되새기며 태익은 쪽지를 입 안에 넣었다. 미행을 당했으니 어떤 단서도 남겨서는 안 됐다. 자신 쪽에 붙었던 미행이든 전차에서 접선했던 그 엄 대장 뒤에 붙었던 미행이든.

미행은 또 있을 수가 있었다. 그러니 만에 하나 쪽지의 내용이 알려진다면……. 다미로가 위험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고 계산하며 빠르게 걷던 태익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자신과 엄 대장이 미행을 당했다는 사실에, 태익 자신이 그 누구도 아닌 다미로 걱정을 제일 먼저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한심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스스로 기만당한 느낌에 기분이 더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미로가 떠오른 한순간 태익의 몸엔 후끈 열기가 올랐다.

지금도 다미로의 음부를 헤집던 손안에 열기가 후끈했다. 질척이는 그곳을 들락날락했던 순간의 그 찰진 감각이 손가락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랫도리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흐읏……!’

입술을 앙다물고 끝까지 소리를 참아 내던 다미로의 붉은 입술과 달아오른 얼굴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그 순간 태익은 일부러 눈을 차갑게 얼렸다.

짧게 숨을 들이마신 그는 천천히 단장을 짧게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갈무리했다. 다시 느긋하게 그러나 발걸음은 정확하고도 빠르게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녀를 향한 생각들은 감정이 아니라, 욕정, 색욕, 음란하고 방탕한 육욕일 뿐이란 사실을 되새기며 달아오른 머리를 차갑게 식히려 노력했다.

5년 전 심장이 난자당하는 것 같았던 그 배신의 고통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다미로의 14년식 반자동 권총이 민족당의 ‘하공진’과 ‘박제영’을 쐈을 때.

태익을 만나러 왔던 그 두 사람이 그녀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을 때 느꼈던 그 고통이 반복되길 그는 절대로 바라지 않았다.

“제기랄…….”

그의 입술에서 나지막이 흘러나온 욕지기가 남대문로를 내달리는 차 소리에 묻혔다. 점점 늘어나는 인파들과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네온들이 거리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 * *

“안 됩니다, 다미로 아씨.”

이환은 여전히 그녀를 ‘아씨’라고 불렀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다미로를 그렇게 불러 왔다. 태익의 부친 안길준이 태익을 오라비라 부르게 그녀에게 교육시키면서부터였다.

“아저씨, 잠깐이면 돼요. 두 시간, 아니 넉넉잡아 한 시간만 나갔다 올게요.”

“죄송합니다, 아씨. 도련님께서 절대로 아씨를 바깥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셔서.”

다미로가 이환을 붙들고 몇 번이나 부탁을 해 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변함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거실 바깥의 정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키는 사람은 넷, 다섯, 여섯. 중문에 여섯이었고 중문 밖으로 보이는 곳에는 보이는 인원만 넷이었다. 그녀가 아는 숫자만 도합 열 명이니.

문이 아니라 담을 넘는다고 해도 도저히 집을 빠져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경비가…… 엄중해졌네요. 옛날보다.”

다미로는 설마하면서도 이환을 떠보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환은 대수롭지 않게 답을 하는 눈치였다.

“근자에 들어 도련님께서 눈에 뜨이게 사업을 확장하신지라 보이지 않는 적이 많아지지 않았겠습니까.”

적이 많다.

다미로는 정원을 응시한 채 이환의 말을 되새겼다. 자신이 이 집을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경비 인력을 늘린 것도 맞겠지만,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인 사업가들에게 적이 많은 것이 사실이기는 했다. 그러나 친일 사업가에 한해서이지 태익처럼 눈에 뜨이는 친일 행보를 하지 않는 사업가는 독립군들도 노리지 않는 편이었다.

한 마디로 얄밉도록 정확하게 중도 노선을 타는 태익과 같은 사업가는 섣불리 건드릴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뭘까. 이 엄중한 경비는…….

다미로는 삼면의 벽에 유리가 달린 화려한 미세기문으로 장식된 거실 바깥의 정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르신, 마루야마 소위께서 오셨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다미로가 중문을 들어서는 한조를 발견한 것은 하녀가 그의 방문을 집사에게 알리기 직전이었다.

마루야마?

다미로는 본능에 가까운 습관으로 그의 이름을 재빠르게 되새겼다.

“僕は居間が楽だけど(나는 거실이 편한데)”

그러나 그녀와 이환이 한조의 방문을 전해 들은 건 이미 그가 거실 위로 올라선 후였다.

다미로는 그런 한조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베이지색 어린 송아지 가죽을 씌운 벨기에산 앤티크 소파에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서였다.

안으로 들어선 한조의 거만한 눈썹 한쪽이 이마 위로 삐죽 솟았다. 그의 눈이 순식간에 다미로를 아래에서 위까지 훑어 올라갔다. 보통의 여자라면 거저 줘도 싫다 할 남루한 회색 블라우스에, 몇 년은 입었을 법한 허름한 모직 스커트를 입고 있는 검소한 차림의 여자거늘.

여자는 황홀하도록 예뻤다.

안경 너머로 한조를 똑바로 쏘아보는 그녀의 눈은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서 그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미로의 안경은 거적보다 못한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 누군가 챙겨 넣어 둔 것이었다.

“……誰?(누구?)”

한조가 다미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이환에게 물었다. 그러나 다미로가 먼저 입술을 떼려 할 때였다.

“의원님의 여동생 되시는 안다미로 양이십니다. 나흘 전 상해 유학에서 돌아오셨습지요.”

이환이 선수를 쳤다.

상해 유학? 오라버니가 식솔들에게 그렇게 얘길 했단 말인가? 아니면 영감의 임기응변이라는 말인가?

다미로는 예상대로 태익이 자신의 배신을 집안사람들에게 얘기하지 않았음을 알아챘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여동생이라는 말은 빼고 먼 친척의 방문쯤으로 해 두려 했던 터라, 그녀는 입술을 다물고 말았다.

“ああ!そう?(아! 그런가?)”

한조가 이환의 대답에 입술을 비쭉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미로는 한조를 경계하면서도 일순 태익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 그는 집에 없었다. 사업에 바쁜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고 차라리 다행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태익과 함께 있는 일은 고통 그 이상이었다.

처음 총을 잡았던 18살에 느꼈던 그 두려움보다, 처음 사람을 쐈던 스무 살 밤꽃 향기가 짙었던 그 봄날보다, 더 큰 두려움이고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고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감정을 드러내는 법을 잊었으니까. 다만, 태익의 손에 죽기 전에 그 일을 마쳐야만 하는데…….

태익을 떠올리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의 뇌리에 그제 아침의 아찔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식사 준비했습니다, 도련님. 지금 안으로 들일까요?”

문 바깥에서 들리는 이환의 목소리였다. 다미로는 숨을 내쉴 수도 들이쉴 수도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태익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고, 방만하게 다리를 벌린 채 음부를 태익의 손에 점령당한 채였다.

질 내벽의 주름을 긁는 그의 손가락이 주는 쾌락에 온몸이 떨렸다.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내쉴 수도 들이마실 수도 없는 가쁜 호흡에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하……!”

밭은 숨이 터져 나오려는 찰나였다. 태익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붉은 속살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올라오는 소용돌이가 그녀는 감당되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쾌락에 그녀는 태익의 입술에 매달렸다. 그의 페니스를 움켜쥐고 싶은 욕망을 참아 내야만 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았던 걸까?

태익의 다른 손이 다미로의 출렁이는 젖가슴을 고통스럽도록 아프게 쥐어짰다. 그리고 동시에 문밖으로 새어 나갈까 두렵도록 질척이는 소리를 높이다가, 느닷없이 그녀의 질 속을 헤집던 손가락을 빼냈다.

하아. 하아. 하아.

순식간에 몸 안에서 빠져나간 열기에 그녀는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그녀의 검붉은 속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애액이 흘러내렸다.

말갛고 하얀 다미로의 체액이 머리카락 한 가닥 흐트러지지 않은 태익의 슈트 바지에 얼룩을 만들었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했다.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고지를 향했던 쾌락이 나락으로 추락하고, 다미로에게 절망감이 몰려들었다.

수치감과 모멸감이 덮쳐 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녀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움찔움찔 태익의 손길을 갈구하는 그곳이었다. 미진하게 남은 쾌락의 잔향이었다.

……다미로는 입술이 말랐다. 귀가 화끈거리고 속이 거북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드러날 리 없었다. 다미로는 자신을 ‘태익의 여동생’이라 소개한 이환에게 옅은 미소를 보낸 후 한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참말이지, 너무나도 뻔뻔해졌구나! 안다미로…….

그렇게 자신에게 스스로 욕을 퍼부으면서…. 그 순간 한조가 물었다

“上海なら僕も満州にいたとき行ったことがある。上海のどの大学で勉強をしましたか?(상해라면 나도 만주에 있을 때 가 본 일이 있는데. 상해 어느 대학에서 공부를 하셨습니까?)”

다미로는 감정 없는 눈으로 그런 한조를 쳐다봤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한조의 입술이 재미있다는 듯 또다시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指はどうされたんですか?(손가락은 어쩌다 그런 겁니까?)”

그녀가 대답이 없자, 다미로의 의중을 대충 눈치챈 그가 눈짓으로 석고 깁스를 한 그녀의 왼손 약지를 가리켜 물었다. 한조는 다미로에 대한 호기심을 전혀 숨기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깍듯이 예의를 지켰다.

보통의 조선인 여자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그녀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다미로는 그의 호기심을 풀어 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 또 낯선 일본군을 친절하게 상대해 줄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도 않았다. 그녀는 인형처럼 입술을 움직여 한 마디만 하기로 했다.

“조선말을 할 줄 아시면, 조선말로 대화란 걸 시도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마루야마 상.”

거실 안의 모든 공기가 일제히 싸하게 식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집사 이환의 숨결도, 차를 준비하던 행랑어멈과 하녀들까지.

테이블을 두고 그녀와 마주 앉아 있던 한조의 얼굴도 차갑게 굳어졌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마친 다미로는 소리 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한조에게 등을 보이던 순간이었다.

“도련님.”

거실로 들어서는 태익이었다. 무섭도록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태익과 다미로의 시선이 먼저 맞부딪혔다. 쿵쾅쿵쾅 다미로의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요동쳤다.

그의 입술로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떨어졌다. 말끔하고 깔끔함을 넘어선 그의 완벽하게 하얀 셔츠 속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팍으로 다미로의 시선이 비집고 들어갔다.

태익은 한조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무섭도록 굳었던 입가에 형식적이고도 접대적인 미소를 올렸다. 그가 재킷을 벗어 이환의 손에 넘겼다.

저벅저벅 태익이 다미로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늘 그랬듯 거실 한쪽에 준비되어 있는 세숫물을 이환이 가져왔다. 그가 세숫물에 손을 담그며 그녀에게 중국어로 말했다.

“他是耳聋、 听不到、 用读的来懂朝鲜话、 他在关东当兵的时候聋的。(저 자식은 귀머거리야, 조선말을 알아듣는 게 아니라 읽는 거고. 관동군에 있을 때 전쟁에서 귀가 나갔지.)”

다미로는 불시에 다가온 태익 때문에 긴장한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真的吗?(정말이에요?)”

그녀가 느릿하게 중국어로 되물었다. 다미로는 태익에게 여학교 시절부터 중국어를 배웠다. 상해에 처음 가 본 것은 스무 살 때 태익의 출장에 따라나서서였다.

그때, 알몸으로 태익의 품에 안겨 호텔 창가에서 봤던 와이탄과 황푸강의 풍경은 지금도 잊히지 않았다. 맨 등에 닿았던 태익의 매끄러운 맨살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도시를 휘감은 푸르스름한 물안개를 감상하던 태익은 밤새 내달렸던 욕망의 끝을 그 창가에서 마무리했었다. 다미로의 하얀 손끝이 창틀을 힘주어 잡았다.

“흐윽! 오라버니…….”

뒤에서 밀고 들어와 음경의 뿌리까지 그녀의 내부에 박아 넣은 그의 움직임은 몰아치는 폭풍처럼 격렬했다. 쉴 새 없이 검붉게 충혈된 다미로의 여린 속살을 가르고 또 갈랐다.

밤바다처럼 무게감 있게 출렁이는 다미로의 풍만한 가슴을 한 손으로 그러쥐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엉덩이를 잡아, 뇌수가 찡하니 울리도록 세차게 음경을 박아 넣었다.

“흐음 으읏!…… 오라버니…….”

마치 이번 생의 마지막 섹스인 것처럼 태익은 다미로의 붉고 여린 속살이 헐고 부풀어 오를 때까지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리곤 사과라도 하는 것처럼 정성껏 그곳을 물고 빨았다.

그리고 또 그렇게 다미로를 흥분시켜, 그녀가 까무러칠 때까지 사랑을 나눴다. 나중에 그녀가 안 사실이지만 그때의 태익은 이미 다미로의 배신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득한 기억. 그러나 잔인하도록 생생한 그때의 감각들, 그리고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추억에 다미로는 지그시 어금니만 물었다. 순식간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멍해 있었다.

그때, 이환이 건넨 수건에 손을 닦던 태익이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다미로의 멍했던 눈동자가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태익이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숙여 심술궂게 입술을 바짝 붙였다. 보드랍고도 뜨거운 그의 입술이 닿자 발끝까지 찌릿한 감각이 혈관을 타고 내달렸다. 다미로는 꼼짝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낮고도 묵직한 저음이 그녀의 심장까지 울려들었다.

“我,应该当天杀了你……。你一直是我的。(그날, 널 죽였어야 했는데…… 네가 아직 내 것이었을 때 말이지.)”

그 역시 와이탄의 그 호텔 창가를 떠올렸었던 것이다. 아마 그때 태익이 그녀를 조금만 덜 사랑했었더라면 그렇게 했을 수도 있었다. 당시에 다미로는 태익을 완벽하게 속이지 못했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이런 재회는 없었을까? 다미로는 가까스로 눈만 들어 태익에게 되물었다.

“是啊。那时候我没有杀。(그러게요…… 그때 죽이시지 그러셨어요.)”

그렇지만 그때의 선택을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 선택은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태익이 고개를 기울여 거만하게 다미로를 내려다봤다. 피식 그가 윗입술을 당겨 웃었다. 이환에게 손을 닦은 수건을 돌려준 그가 말했다. 그러나 이번엔 중국어가 아닌 조선말이었다.

“그때 죽였으면 후회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젠, 후회 안 할 걸 분명히 아니까……. 타이밍은 지금이 훨씬 좋은 것 같은데. 틀린가?”

그의 눈동자에 다미로를 향한 증오와 갈망, 그리고 잔인함이 검은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가 여유로운 미소 뒤에 숨긴 그 감정들을 다미로는 읽어 낼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 가는 실처럼 위태로웠다. 한조가 그런 둘 사이로 끼어든 것은 얼마 있지 않아서였다.

“失礼ですが、僕はここが朝鮮なのか中国なのか区別がつかないですね。院議員。실례지만, 저는 이곳이 조선인지 중국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군요. 의원님.)”

태익이 다미로를 향해 차갑게 웃음을 물었던 얼굴을 천천히 한조에게 돌렸다. 그의 눈빛은 등골이 시리도록 차가우면서도 맹수처럼 사나웠다.

“そうでしたか?(그랬습니까?)”

한조를 향해 완전히 돌아선 태익이 오만하게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갈무리하며 되물었다. 그 순간 한조는 태익이 여느 날과 어딘지 다르다는 것을 서서히 알아챘다.

한조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찰나였다. 태익이 오만했던 표정을 거둬 내며 사과를 했다.

“무례를 범했나 봅니다, 제가. 마루야마 소위에게.”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찰나였다.

“영감, 손님 배웅해 드리지?”

빤히 한조의 눈을 마주하며 태익이 이환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황망함과 수치심에 한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이곳에서 한조가 태익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안태익이 조선인이라 해도. 안태익은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부친 마루야마 지로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오지 않았을 태익의 집이지만 말이다.

지로가 태익에게 받는 돈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한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자존심에 금이 갔으니 불쾌하다는 한마디를 던져 놓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한조는 다미로가 의식됐다. 그녀에게 나쁜 인상을 남기기가 왠지 싫었다. 그렇기에 태익에게 까닥 고개를 숙인 그는 군인의 걸음으로 거실을 나왔다. 화려한 장식에 유리 옷을 입은 거대한 미세기문이 열리고 곧바로 닫혔다.

“다미로.”

태익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다미로를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서재를 향해 돌아서며 늘 그랬듯 이유를 알려 주지 않고 명령했다.

“옷 갈아입어라.”

다미로는 앞으로 모아 잡은 손가락을 아프게 움켜쥐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은 아무것도 내보이지 않았다.

정성 들여 만든 프랑스산 밀랍 인형처럼 무감하기만 했다. 그녀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태익을 향한 감정과 욕망과는 무관하게.

* * *

‘살롱 챠플린.’

황금정1정목 삼거리에 자리 잡은 살롱의 이름이었다. 술과 노래, 여자와 춤, 그리고 도박이 있는 곳이었다. 경성뿐 아니라 부산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살롱이었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춤과 노래가 있는 공연이 있었고 마작 놀음이 크게 벌어지는 곳이었다.

다미로는 묵직한 극장용 문을 힘껏 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뿌연 담배 연기와 알싸하고 달콤한 술 냄새가 그녀를 맞았다. 먼저 나간 태익이 차를 남겨 두었다.

하지만 차를 타러 그의 저택을 나온 그 순간에도 그녀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본채를 나오는 순간부터 경호원 셋이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도쿄나 상해의 외국인 조계지 못지않게 교육 받은 웨이터가 다미로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그녀의 자리는 무대가 잘 보이는 2층 중앙 난간 옆이었다.

다미로는 코트를 벗어 옆 의자 위에 반듯하게 걸쳐 놓았다. 주변에 앉은 화려한 여자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다미로의 차림이 이 화려한 살롱과 어울리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태익이 골라 사다 놓은 옷 대신, 5년 전 쓰던 별채의 제 방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수수하고 낡은 옷이지만 다미로는 이 낡은 옷이 편했다.

다미로의 눈이 본능처럼 사람들 무리 속에서 태익을 찾아냈다. 그가 있는 곳은 마작실. 포마드를 발라 완벽하게 넘긴 머리칼 아래 태익의 얼굴은 조각과 마찬가지였다.

깨끗하고 귀족적이었다. 이제 그의 나이 서른셋.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원숙함과 고뇌의 흔적이 사람들 속에서 그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이 미련 없이 마작 패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그러자 같은 테이블에 앉은 여자가 그에게 무엇이라 말을 건넸다. 톡톡. 그의 손이 이번에는 마작 패를 들고 테이블을 두드렸다.

생각이 깊을 때 하는 그의 습관이었다. 몇 초쯤 지났을까? 태익이 여자를 돌아보더니 의자에 등을 기대며 옅게 미소를 짓는다. 짧은 몇 마디 대화가 오가는 것 같았다.

우아하고 세련된 여자는 태익을 유혹하지 못해 안달 난 몸짓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여자의 태도에 적당히 응대만 할 뿐이었다.

태익의 미소……. 5년 만이었다. 다미로가 그의 미소를 보는 것은. 만일 5년 전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의 저 미소는 여전히 자신의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생각인지 알기에 다미로는 “주문하신 음료입니다” 하는 웨이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살롱 안을 훑었다.

그녀를 지키던 경호원들의 시선이 아직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잠시만이라도 이곳을 벗어나, 위건에게 연락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미로는 코트와 가방은 그대로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롱 구석구석에 숨어 그녀를 주시하던 경호원들이 움직였지만 다미로는 2층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다미로 누나? 누나! 누나 맞아요?”

자신을 알아보는 남자. 젊다기보다 어려 보이며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다미로의 안경 너머 동공이 점점 확대됐다. 그녀의 몸이 그야말로 밀랍 인형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마작실에 있던 태익의 시선은 마치 지금 상황을 예견하고 있던 것처럼 차갑고 여유롭게 그녀를 향했다. 그가 라이터를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공진.”

다미로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여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낯빛을 다행히도 공진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야! 맞네. 이 동생을 알아보는 걸 보니, 다미로 누나 맞네! 정말이지, 상해에서는 언제 돌아오신 거예요? 누나!”

헤어졌다 다시 만난 형제를 대하듯 다미로를 반가워하는 공진이 그녀의 시야 속에서 가물거렸다.

살아 있었…… 어?

“얼마…… 안 됐어.”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과는 다르게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랬구나! 아무튼 어디 보자 다미로 누님, 다시 보니 더 예뻐지신 것 같기도 하고. 여전하신 것 같기도 하고!”

반가움에 들뜬 공진이 그녀를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는 사이, 하얗게 바랬던 다미로의 머릿속에선 5년 전 공진을 쐈던 기억들이 빠르게 거꾸로 재생되고 있었다.

심장이 아니라 머리를 노렸었다. 고통 없이 끝내 주고 싶어서…….

“공진아.”

“네, 누나.”

다미로는 공진을 부른 자신의 목소리가 남의 것처럼 들렸다. 그를 향해 미소조차 지을 수 없었다. 그날, 방아쇠를 당기던 손가락에 느껴지던 그 섬뜩하도록 차가웠던 느낌.

되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의 강을 건넜다는 절망……. 죽음보다 더 영원할 것 같았던 죄책감!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그녀의 뇌리에 떠올랐다.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몸이 밀렸다. 공진이 그런 다미로를 잡아 주려 했지만, 그녀가 손길을 피해 어깨를 움츠렸다. 당황한 공진의 손이 허공에서 맴돌다 어색하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미로는 변명처럼 들릴 것을 알면서도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공진을 만난 일이 우연이든 아니든.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래서 나가려던 중이었거든.”

초점이 분명하지 않은 눈으로 말했다. 공진이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실망한 얼굴을 했다.

“어, 그랬구나!”

“……또 연락하자.”

“아! ……네, 그래요, 누나. 그런데 누나 여전히 우리 사장님 댁에 계시잖아요, 맞죠?”

공진의 확인하는 말에 다미로는 부정을 할 생각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 있어.”

“가세요, 누나.”

“응.”

발이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공진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망설이듯 계단 위쪽을 향해 발걸음을 떼는 공진의 다리가 보였다. 그 다리는 마비 증세로 불편하게 절룩이고 있었다.

다미로는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때, 간뇌를 조준했다가 일부러 빗맞혔던 총알은 그의 목숨을 빼앗는 대신 왼쪽 다리의 자유를 빼앗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다미로의 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귀를 울리는 재즈 음악과 그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에 떠밀려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잘린 손가락이 부딪쳐도 느낌이 없었다. 비록 지금은 그 손가락이 또 부러져 깁스를 감고 있었지만 말이다.

탓!

사람들을 헤집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던 다미로의 손목을 잡아챈 사람은 태익이었다.

“아무 일 아닌 것처럼 행동해. 죽은 사람 다시 보는 눈은 하지 마라, 안다미로. 쪽 팔리잖아, 쏴 놓고도 못 죽인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바들바들 떨던 그녀의 어깨에 태익의 무쇠처럼 단단한 팔이 둘러졌다.

“놓아주세요,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럴 수는 없지, 일부러 초대를 했는데 바로 가 버리면 싱거워지잖아. 내 초대가.”

태익의 입술에는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미소를 본 순간 다미로는 비로소 하얗게 비워졌던 머릿속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공연이 벌어지고 있는 무대 뒤쪽이었다. 다미로는 태익의 손에 이끌려 시설물들이 가득 쌓여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차단된 곳으로 들어갔다.

탓!

하지만 안에 들어서자마자 다미로가 태익의 팔을 쳐냈다. 태익의 미간이 순간 움찔 날카롭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내쳐진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다 다미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 맹렬하게 타오르는 분노와 욕망이 있었다. 태익은 살롱 안으로 다미로가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를 지켜봤다. 수수하지도 못한 초라한 차림이었다.

그런데도 다미로는 단박에 사내들의 시선을 꿰찼다. 그녀를 향한 증오에 휩싸인 태익의 눈길을 떼어 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안경에 감춰져 있어도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이 얼마나 뇌쇄적인지 그는 알았다.

허름한 옷으로 감추고 있어도 다미로의 육체가 얼마나 요염한지 태익은 잊지 않았다. 냉철한 지성과 냉정한 이성 속에 그는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지나치게 잘 알았다.

“내가 사 준 옷은 왜 안 입었나?”

다미로의 머리칼로 손을 뻗으며 그가 물었다. 자신의 내부 안에 들끓는 분노와 증오는 그녀를 향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런 다미로를 미치도록 원하는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옷이 중요해요?”

다가오는 태익을 피해 뒤로 다리를 물린 그녀의 뒤꿈치가 벽에 부딪쳤다. 아까 계단 위에서 태익이 지켜봤던 다미로의 동요는 또다시 사라진 상태였다.

“중요할 건 없지.”

그가 또 비릿하게 웃으며 여유롭게 말한다.

“그렇지만 이왕 죽은 줄 알았던 옛 친구를 만났는데 차림새가 훤해 보이면 좋은 것 아닌가?”

뒤틀릴 대로 뒤틀린 태익의 감정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가 자신이 죽였다고 믿고 있었던 공진과의 만남을 준비한 이유도 그 때문일 테니까.

하지만 이대로 그의 함정에 계속 끌려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더욱이 그녀는 태익과 이렇게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를 향해 기립하는 감각들이, 그를 향한 마음들이 장마철 잡초보다 더 빠르게 되살아나고 있었으니까.

죽은 줄 알았던 공진을 보고 놀란 마음과 그날의 죄책감보다, 이렇게 바짝 마주 선 그의 체온과 체취가 미치도록 더 괴로웠으니까. 그제 아침과 같은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다.

“오라버니.”

“장위건.”

그런데 태익이 잇새로 뱉어 낸 이름에 다미로는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두 손이 다미로를 벽과 그 사이에 가두었다.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안경을 벗겨 낸 후, 태익은 고개를 숙여 다미로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가온 그의 얼굴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태익이 위건의 존재를 알아내는 일이 시간문제라는 것을 다미로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놈하고 좋았나?”

하지만…….

“오라버니.”

“대답해.”

“나보다 널 어떻게 더 만족시켜 줬던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이런 식의 오해는 가장 원하지 않는 결과였다. 다미로에게 남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안태익뿐이었다는 사실만은 더럽혀지고 망가지지 않길 그녀는 애타게 바랐었다.

“설마 그 자식은 매일 뒤로 해 줬나?”

여유를 잃지 않은 비릿한 웃음 속의 냉철한 가면 뒤, 태익의 심장에서 끓고 있는 지독한 증오를 다미로는 온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오라버니.”

왈칵 두려움이 밀려든 그녀가 그를 불렀다.

“아니면.”

“오라버니.”

태익의 손등이 그녀의 뺨을 쓸어 내려와 쇄골로 내려갔다. 다미로의 심장이 그의 손가락 아래에서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네가 원할 때마다 그걸 박아 줬었나? 여기에?”

쇄골을 따라 내려왔던 손이 옴짝달싹못하게 굳어 버린 다미로의 치마 속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러더니 정말로 억센 힘으로 그녀의 팔을 잡아 벽을 향해 그녀의 몸을 돌려세웠다.

헉!

뒤에서부터 그녀의 허리 사이로 넘어온 태익의 손이 낡은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밀쳐 올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턱이 잡혀 뒤로 목이 꺾인 채로 그의 입술이 다미로의 입술을 삼켰다. 단번에 밀고 들어온 혀가 다미로의 여린 혀를 거칠게 휘감았다.

숨도 쉬어지지 않을 만큼 사납게 뿌리까지 혀를 감아 흡입했다. 동시에 한 손으로 그녀의 탱탱한 젖가슴 양쪽을 아래에서 쳐올리듯 움켜쥐었다.

“읍!”

가슴을 움켜쥔 태익의 손가락이 젖꼭지를 잡아당겼다. 비틀고 손바닥 전체로 유륜과 젖가슴을 비벼 댔다. 진홍빛으로 단단해진 붉은 돌기가 빳빳하게 발기했다.

두려움과 공포에 다미로의 뇌수가 타들어 갔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두려움과 공포가 아니었다. 태익의 손길과 그의 육체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길들여진 자신에 대한 공포였다.

가져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죗값이었다. 태익의 무조건적이었던 사랑을 다시 열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주는 쾌락의 고지를 다시금 갈망하게 될 자신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 갈망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다미로는 지독하게도 두려웠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다미로의 턱에 흘렀다. 태익의 입술이 다미로의 입술 전체를 물듯 흡입했다가 그녀의 귀로 순식간에 옮겨 가 귓불을 세차게 물었다.

강렬한 통증과 쾌감, 그리고 욕망에 꺾여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 새끼 지워. 내가 죽여 버리기 전에 미리 지워라, 다미로.”

젖꼭지를 비틀던 그의 손이 땀이 배어나 미끄러운 다미로의 배를 타고 배꼽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치마 허리춤을 밀고 들어간 그가 속옷 속 그녀의 음모를 손가락에 휘감았다.

벽과 태익의 몸에 짓눌린 다미로의 젖가슴이 이지러졌다. 태익의 손이 갈라진 붉은 속살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아래위로 자극했다. 오돌오돌 일어선 진분홍 젖꼭지를 희롱하던 손으로 다시 그녀의 턱을 잡아 돌렸다.

입술이 강하게 맞부딪쳤다. 와글거리는 사람들 소리가 다미로의 귓가에서 아득하게 멀어졌다. 위태로운 재즈 선율이 아득했다.

흡!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입술을 뗀 태익이 다미로를 돌려세웠다. 등이 아프게 벽에 부딪쳤다. 머리도 벽에 부딪치는 줄 알았지만 태익의 손이 이미 그녀의 뒤통수를 안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돌연 입술을 떼고 그녀를 돌려세운 태익이 그녀를 바라봤다. 이성을 넘어선 욕망에 사로잡힌 눈이었다. 냉철과 냉정에 금이 가고 있었다. 감추어 두고 있었던 태익의 욕망은 4일 전 경무국에서 그녀를 다시 본 순간부터 슬금슬금 달아올라 있었다.

창백하기만 했던 다미로의 뺨이 피보다 붉었다. 바짝 메말라 타들어 갔던 그녀의 입술이 태익의 입술에 빨리고 물려 피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밀려 올라간 브래지어 밑으로 진홍빛 젖가슴이 탱탱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그 진홍빛 돌기 위에 빳빳하게 고개를 든 유두가 자목련보다 붉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가시를 세운 장미와 같았다. 공진과의 만남으로 넋이 나가 있던 틈을 탄 태익의 일방적인 공격에 무너졌던 다미로의 정신이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비켜…… 주세요, 태익 오라버니.”

숨을 헐떡이며 다미로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말려 올라간 브래지어와 옷을 잡아 내렸다. 그에 마찬가지로 호흡이 거칠어진 태익이 그녀의 타액으로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입술은 떨어졌지만 여전히 태익의 하체가 다미로의 하체를 바짝 누른 채였다. 단단해진 그의 욕망이 그녀의 아랫배에 느껴졌다. 언제나 그녀를 원했던 그 옛날의 안태익처럼 말이다.

한 번도 태익에게 이렇게 거칠게 다뤄진 적이 없었다. 그가 다미로에게 느끼는 욕정은 같아도 그에 담긴 마음이 같지 않다는 의미였다.

“비켜 주세요.”

조금 더 명료해진 머리로 다미로는 한 번 더 말했다. 잠시 태익과 그녀 사이에 긴장된 공기만 흘렀다. 하지만 태익은 곧 두 손을 어깨 위로 올려 항복의 표시를 하며 뒤로 발을 물렸다.

그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걸려 있었다.

“내가 말했을 텐데.”

다시 뒤로 한 발 더. 그가 발을 물리며 말했다. 다미로는 펄떡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정리하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뭐를요?”

태익의 시선이 떨리는 그녀의 손에 닿았다.

“내가 무서운가, 다미로.”

다미로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손길을 멈췄다. 여전히 그의 손이 닿았던 이곳저곳에 남은 열기가 저릿했다. 하지만 그저께 아침과 같은 상황을 피한 것에 그녀는 더 감사했다.

“네.”

그가 묻는 무섭냐는 말의 의미는 정확하게 몰랐다. 하지만 태익이 두려운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

그가 짧게 되묻고는 다시 뚫어져라 그녀를 보며 조끼 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그럼 그렇게 내가 무서운데 감히 나를 배신할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

언제인가 이런 얘기를 그와 하게 될 날이 있으리라고 다미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방금 전까지 그렇게 격하게 그녀를 안으려 했던 그가 말이다.

하지만 태익에게 조금 전의 열기는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아니다. 남아 있지만 그것은 태익에게는 너무나도 쉽게 제어할 수 있는 정도의 욕망에 불과했던 것 같았다.

다미로는 그저께처럼 형편없이 태익의 손에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여전히 펄떡대는 심장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와 눈을 맞췄다.

“오라버니보다 더 무서운 게 있었으니까요.”

“나보다 더 무서운 거라……. 그게 뭘까?”

그가 라이터를 당겼다.

“글쎄요.”

“난 글쎄란 대답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데. 그것도 벌써 잊은 건가?”

“잊어버릴 리가요.”

다미로의 짧지만 지극히 반항적인 대답이었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하게 신경 줄이 당겨졌다.

그때.

팡! 팡! 팡!

폭죽 소리와 비슷한 효과음과 함께 두 사람과 무대를 가르고 있던 커튼이 위로 올라갔다. 놀란 다미로가 본능적으로 뒤로 발을 빼던 순간이었다.

태익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만일 태익이 다미로의 손목을 잡지 않았다면 그녀는 순식간에 몰려든 사람들에 휩쓸려 중심을 잃었을 것이다.

살롱 밴드의 흥겨운 연주가 풍악 소리보다 더 크게 시작됐다. 무대 위와 홀은 춤을 추는 사람들로 한순간에 가득 메워졌다.

“오라버…….”

“쉿! 잔말 말고 몸 붙여.”

잡은 손을 억세게 잡아당겨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는 태익에게 다미로가 반항하려던 차였다.

“내 등 뒤 45도 각도, 회색의 더블브레스트를 입은 남자.”

마치 왈츠라도 추는 양 태익은 그녀를 바짝 당겨 안은 채 속닥였다.

“네가 있는 곳을 경무국에 찌른 놈이다. 누군지 알아보겠나?”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에 다미로는 당황했다. 그렇지만 위험에 익숙한 그녀는 바로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뇨. 모르는 얼굴이에요.”

“그래? 그렇다면 적어도 다미로 넌 5년 전 나처럼 당한 것은 아니란 뜻이군.”

그가 비꼬아 말했지만 다미로는 대꾸하지 않았다.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더욱이 안태익이라면 다미로가 복수의 대상이라고 해도, 경무국에 그녀를 넘긴 협잡꾼 하나 찾아내는 것은 일도 아닐 터였다.

안태익이 아니던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 현상금이 걸린 ‘마령’을 잡은 경무국에서 단 나흘 만에 그녀를 빼낸 것만 봐도 그가 미치는 힘이 어디까지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오라버니.”

그렇기에 다미로는 한 번 더 애원하기로 했다. 아무리 그녀가 날고뛰어도 태익은 절대로 그녀가 달아나도록 두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달려도 한번 잡힌 이상, 그의 손바닥 안이라는 것을 다미로는 알고 있었다.

“열흘만 시간을 주세요.”

그의 품에서 옅은 담배 냄새와 남성 향수 냄새가 섞여 났다. 아까 거칠게 그녀를 다뤘던 그의 셔츠에는 미약하게 땀 냄새도 배어 있었다. 사랑을 나눈 후 그에게서 나던 이 짠내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녀였다.

“그 얘긴 그저께 끝낸 것 같은데.”

“꼭 마쳐야 할 일이 있어요.”

“그 일이 미나미 지로를 암살하는 일이라고 해도 안 돼.”

미나미 지로는 현 조선총독이었다.

“오라버니.”

아직 다미로는 체력이 다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터진 입술의 딱지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창백했고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대로 태익에게 잡혀 타이밍을 놓칠 수는 없었다.

“잊었나?”

그가 그녀의 어깨 뒤로 시선을 둔 채 물었다. 그는 평온을 가장했지만 다미로는 느껴졌다. 허리를 안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널 내 손으로 반드시 죽일 거라고 했던 내 말.”

“아뇨.”

“그런데 어째서 자꾸 널 놔 달라고 나한테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는 거지?”

“놔 달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 아시잖아요. 돌아오겠다고…….”

“한번 주인을 문 개는 죽이지 않으면 또 주인을 물게 돼 있지. 사람을 문 개를 그 자리에서 죽이는 이유가 그것이고. 그걸 모를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는 않을 텐데.”

주인을 문 개.

다미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에게 거칠게 다뤄졌을 때 느꼈던 수치와 모멸감보다 그녀의 가슴을 더 예리하게 후비고 들어온 말이었다.

거칠게 다뤄졌대도……. 그럴 수밖에 없는 태익의 마음을 전부는 아니라도 이해했었다. 그렇지만 방금 말은……. 처음부터 안태익이 안다미로를 그의 개로 여겼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안태익을 주인으로 여겼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그와 동등해지고자 여학교를 다니고 중국어를 배웠다. 하지만 알지 못했으면 좋았을 일을 알아 버리고 말았다. 그를 배신했다는 오명을 쓰고서라도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미로는 새삼 억울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의 선택이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나, 주인을 문 개라니.

“그래서, 제 처형 날짜를 언제로 잡으셨는데요?”

다미로가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물었다. 태익의 눈동자가 파랗게 빛났다. 순간 다미로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커튼 뒤에서 격렬했던 그 순간의 그로 되돌아온 것이 보였다.

“내가 네게 질리고 물리고 나서.”

파랗게 빛을 내며 그의 입술이 무표정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의 어깨를 잡은 다미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눈빛이 재회 이후 처음으로 전투적으로 타올랐다.

태익의 한쪽 입꼬리가 잔인하게 올라갔다. 그녀의 반응을 그는 즐기고 있었다. 태익이 멀어진 그녀를 다시 힘껏 당겨 안았다. 그녀의 귓가로 입술을 내렸다.

“넌 곧 내 앞에서 스스로 다리를 벌리게 돼 있다, 다미로.”

낮게 가라앉아 잔뜩 쉰 목소리였다. 태익은 여전히 냉철과 이성의 가면을 훌륭히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다시금 아랫도리에 부담스럽도록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한순간 맹렬하게 타오르는 그녀를 본 순간, 태익은 그녀를 향한 욕망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욕망이 그저 잔인하게 짓밟아 줘야겠다는, 그런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 아님을 말이다.

흥겨운 재즈 음악에 몸을 맡긴 사람들 틈바구니였다. 다미로의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내려 그녀의 엉덩이를 잡았다. 놀란 다미로가 눈을 부릅떴지만 그는 힘을 빼지 않고 하체를 밀착시켰다.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였다. 음악에 몸을 맡겨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로, 술에 취해 빙글거리는 사내와 계집들 틈바구니를 헤치고 태익이 그녀를 데리고 들어간 곳은 마작실이었다.

탁!

문이 닫혔다. 문 바깥에서 음악 소리와 왁자지껄한 사람들 소리, 술잔과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들이 아득하게 들렸다.

으읍!

다미로의 두 손이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가 다미로의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한 번에 위로 밀어 올린 것은 순간이었다. 단번에 유두와 유륜 전체를 쭉 빨아 흡입했다. 오돌오돌 일어선 젖꼭지를 혀로 감아 희롱하며 다른 쪽 가슴을 손 전체로 들어 올려 손바닥에서 뭉그러트렸다.

태익은 다미로의 육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느 곳을 어떻게 자극해야 하는지, 언제 자지러지는지 그녀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그에게 삼켜지면서도 다미로는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입술이 젖가슴에서 떨어져 다시 게걸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먹어치웠다. 아랫도리가 터질 것처럼 딴딴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부러질 것처럼 힘이 들어갔다.

그가 자신의 남성을 다미로의 사타구니 사이로 밀어 붙였다.

“하아!”

입술이 맞물린 채로 다미로가 자신에게 파고든 그의 남성을 허벅지로 조였다. 그 순간 그의 미간이 움찔 경련을 일으켰다. 희미해져 아주 꺼져 버리기 직전의 이성이 되돌아왔다.

미쳐 날뛰려던 다미로를 향한 욕망에 제어기가 걸린 것이다. 억눌린 욕망에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해결되지 못할 방사욕에 아랫도리가 뻐근하도록 통증이 들었다.

그렇지만 태익은 눈을 감아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입술을 떼며 고개를 틀어 다미로를 내려다봤다.

하아. 하아.

입가 전체가 거친 마찰로 붉어져 있었다. 상기된 뺨과 가쁜 호흡을 내쉬는 그녀의 눈동자는 절망과 욕망이 뒤범벅되어 그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눌려 뭉그러진 그녀의 젖가슴이 가쁜 호흡으로 꿈틀거렸다. 태익이 다미로의 허리에서부터 밀착해 허벅다리 안쪽으로 손을 내렸다.

헉!

그녀의 오른다리가 허리 높이까지 번쩍 들렸다. 달아올라 벌어진 입술에서 밭은 숨소리가 짧게 새어 나왔다. 태익이 치마 속 그녀의 속옷을 힘주어 잡아 뜯었다.

얇은 속옷 천이 날카롭게 다미로의 피부를 파고들었다가, 잡아챈 힘에 못 이겨 찢겨 나갔다.

흡!

태익의 손이 벌어진 그녀의 붉은 속살을 엉덩이 쪽에서부터 음부를 향해 힘 있게 쓸어 올렸다. 그리고 도독! 음부의 제일 윗머리에서 석류 알갱이처럼 발딱 고개를 든 붉은 보석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 전체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태익이 가하는 가학적 자극에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입술을 깨물고 있지만, 그녀는 벌써 귀까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도저히 견뎌 낼 수 없는 강렬한 자극에 그의 손에 들린 다미로의 다리까지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욕망에 고문을 가하는 태익의 눈동자가 다미를 파고들며 잔인하도록 검게 빛났다.

흐읍!

그의 손이 빠르게 속도를 높였다. 검붉게 부푼 알갱이를 손가락 끝에 끼워 비비고 돌려 가며 자극을 가했다. 까만 체모로 덮인 다미로의 밀지가 축축하고 끈적이는 액체로 젖어 갔다.

혈관을 미친 듯이 내달리는 감각세포들이 그곳으로 다 모여드는 것 같았다. 움찔움찔 검붉은 속살 사이의 밀지가 그를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등 뒤의 단단한 나무문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간헐적인 숨소리만 뱉어 내는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잔인하게 빛나는 태익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한 다미로의 눈에서 또르르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승리를 깨달은 태익은 그제야 자신의 손을 그녀의 중앙 밀지에서 천천히 떨어져 나왔다.

왁자지껄한 살롱의 소음과 음악 소리가 그녀의 귀로 되돌아왔다. 태익이 다미로의 체액으로 젖은 손으로 담배케이스를 꺼냈다.

“너는 여전히 맛있다, 다미로.”

비꼬임이 들어 있는 음란한 말로 그녀를 희롱하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가 케이스에서 꺼낸 담배를 상아로 만든 필터에 끼웠다.

“그러니까 내일은 애원해라.”

라이터를 당겨 불을 붙인 그가 담배에서 시선을 들어 다미로를 다시 응시했다.

“……앞으로 내가 만들어 갈 이 지옥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거든 애걸해야 할 거다, 다미로. 나랑 해야겠다고. 방금 밖에서 말한 대로 내 앞에서…… 스스로 다릴 벌려야 할 거라는 말이지.”

그의 말은 잔혹하고도 음탕하지만, 그의 방식으로 하는 우아한 협박이었다. 다미로는 턱 끝으로 흐른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내고 치맛자락을 끌어 내렸다. 이미 그저께 아침에 이어 불과 30분 전에, 그리고 지금 다시 느껴야만 하는 굴욕과 수치심을 그녀는 독하게 버텨 냈다.

그가 자신에게 가하는 수치심보다, 그렇게 당하면서도 태익을 원하는 자신에 대한 경멸과 모멸이었다.

태익이 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밟았다. 그리고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겨우 내 손가락에 자지러지지 마라, 내 복수가 너무 싱거워지면 피차 재미없잖아. 안 그런가?”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며 살롱 어딘가에 있었을 자신의 경호원을 향해 짧게 손짓했다.

그의 경호원들은 어느새 마작실에 남겨진 다미로를 에워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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