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인의 대가-13화 (13/13)

13장. 각인의 대가, 그 끝은

심장을 누르는 압박감에 도한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내장이 꼬인 것처럼 속은 뒤틀렸다.

어두운 침실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건 수많은 숫자들만 나열된 모니터뿐이었다. 그 모니터가 의미 없이 작동하고 있는 지도 벌써 사흘째.

휘연을 매몰차게 보낸 뒤에도 그녀 생각에 도한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저택에서만 지냈다.

도한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벗고 2층 욕실로 걸어갔다.

그녀와 폭주하는 밤을 보낸 뒤, 청소하는 사람을 쓰지 않아 2층 욕실은 엉망이었다.

욕실의 구석구석엔 온통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욕조도, 베드도, 샤워기 아래도 모두 휘연의 신음과 그녀의 육신이 닿았었다. 그녀를 생각하면 괴로워 그녀를 매몰차게 보냈는데도 도한의 머릿속에는 이토록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병신.”

날 버렸던 여자를 그렇게 잊지 못하고, 날 사랑했던 여자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는 쓰레기.

도한은 욕을 뱉으며 뜨거운 물을 틀었다.

콸콸콸콸, 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뜨거운 수증기에 폐가 답답해졌다. 하나 차라리 그게 나았다. 육체가 아프더라도 그녀 생각을 지울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아프고 싶었다.

‘쓸데없는 생각…….’

조금이라도 머리를 비우고 싶어 입욕제를 풀려고 주변을 돌아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녀가 있을 때 거칠게 쏟아부었던 입욕제 보틀은 덩그러니 바닥에 버려져 내용물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도한은 그냥 뜨거운 욕조에 다리를 넣었다.

촤아아악, 그의 몸이 들어간 부피만큼 물이 넘쳤다.

도한은 수도관을 잠그지 않았다. 뜨거운 물은 여전히 욕조를 넘실거리며 욕실 바닥에 강을 만들었다. 그 물줄기에 입욕제 보틀이 돌돌돌 바닥을 굴렀다.

“씨발.”

욕설과 함께 도한은 뜨거운 물속에 머리를 끝까지 집어넣었다.

촤아아악. 머리를 꺼내자 폐에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병신 새끼.”

얼굴까지 담갔을 뿐인데, 눈에서 물이 나왔다. 그것은 뺨을 타고 속절없이 흘렀다.

아버지란 작자에게 처맞았을 때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렇게까지 울지 않았는데.

왜일까.

도한의 심장은 구멍 뚫린 것처럼 적적하고 괴로웠다.

휘연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렸을 때 혼자 그녀를 기다릴 때면 떠올렸던 얼굴들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순수하게 웃는 휘연, 긴장해서 조마조마한 휘연, 따사로운 햇살에 나른해진 휘연, 비 오는 날 창밖을 내다보며 젖은 풍경을 감상하는 휘연.

마음에 깊게 새겨져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맑고 순수한 그녀의 모습.

그리고 그녀를 발견했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국의 유명한 큐레이터가 되어 그 누구보다 당당한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휘연.

큐레이터라는 그녀의 직업에 맞춰 억지스런 프로젝트를 의뢰하여 그녀와 한집에 있는 동안 마주했던 모습까지도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벌벌 떨면서도 계약 사안을 지키겠다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내 목소리를 듣고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지 못해 곧 그런 조약을 넣은 게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내가 사용한 욕실에서 그녀가 수도꼭지를 확인하지 않아 흠뻑 젖었을 땐, 그 조항을 넣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육신의 자태가 드러난 그 모습을 본 순간 마음이 동해서 그녀의 얼굴을 봤더라면 무작정 그녀를 안아 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너무나 아름답고도 잔혹한 그녀였다.

비 오던 날 처음 마주했던 휘연의 모습도 가슴에 박혀 지워지질 않았다.

“……휘연아.”

몇 번이고 입에 담아도 담을 때마다 가슴을 아프게 하는 그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며 도한은 죽음을 기다리듯 그렇게 욕조에 녹아내렸다.

*

샤워를 끝낸 뒤, 도한은 2층 불을 켰다. 혹시라도 휘연이 있을까 봐 걱정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떠나보냈는데.’

도한은 세차게 머리를 털며 휘연의 기획안대로 구입했던 작품들을 보관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작품을 바라보다 휘연이 큐레이터로서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보고픈 객기에 무작정 문자를 보냈었다. 올 거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단번에 달려왔었다. 그때 생각에 또 가슴이 저릿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불렀는데도 달려와 준 그녀를 보면서 혹 어쩌면 그녀도 이미 에던이란 이름을 쓰던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아닐까 싶어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런 것도 이젠 모두 부질없었다.

‘……이 기획안도 이젠 파기해야겠군.’

도한은 휘연의 기획안을 다시금 살펴보았다. 그 문서에는 르네상스풍의 여러 작품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만약, 그와 그녀가 십 년 전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 계획서는 그와 그녀의 신혼집 기획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이런 건 의미 없었다.

도한이 그 계획서 파일을 덮으려던 순간이었다.

“…….”

이전엔 발견해 내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모든 서류를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서류에는 마지막 페이지가 한 장 더 있었다.

앞쪽과 찰싹 붙어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았다면 존재조차 몰랐을 페이지였다. 휘연의 기획안을 파기하기 전 마지막으로 온전히 살펴보고 싶었던 도한은 덤덤하게 그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그 순간, 도한의 눈동자가 수축했다.

“이건…….”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비가 내리는 동네의 사진이었다.

화려하고 화사한 예술 작품들과는 대비되는 평범한 사진.

어쩌면 초라하다고 느낄지도 모르는 그 사진은 굉장히 뜬금없었지만, 사진을 주시할수록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사진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곳은, 도한과 휘연이 함께 자란 곳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은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는 ‘추억’일지도 모릅니다. 에던 님께서도 집 안의 한 곳에는 가장 소중한 추억과 관련된 사진을 하나 걸어 두는 건 어떠실지요? 저는 첫사랑을 만났던 순간을 잊지 못하고 그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만큼 아름답고 저릿한 예술 작품이 없거든요, 제게는. 에던 님도 그런 의미에서 자신만의 예술이 된 추억을 하나 마련해 보는 걸 추천드립니다. 결국 이 집의 주인은 에던 님이시니, 마무리만큼은 에던 님의 추억으로 채워졌으면 좋겠습니다.]

휘연이 쓴 기획 의도를 읽고 나서야 도한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멍청한 새끼, 이걸 이제 읽다니.”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도한의 손이 다급했다. 옷장에서 아무 옷을 꺼내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 순간 유독 저택의 복도가 길게 느껴졌다. 도한은 거친 숨을 고르며 복도를 뛰고, 현관문을 열고, 달빛이 아스라이 내려앉은 정원을 뛰었다.

“하아, 하아.”

정원을 밟을 때마다 처음으로 마음대로 그녀의 입술을 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 손휘연.”

휴대폰을 꺼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대체!”

일전의 불안이 다시 도한을 잠식했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또 사라진 거면 절대 용서 못 한다. 이번엔 네가 아닌 나를 용서 못 할 것이다.

“어딨는 거야, 손휘연!”

절박한 마음으로 정원 대문을 벌컥 연 순간, 도한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손휘연.”

그녀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 맑은 눈으로 나만 바라봐 주던 누나.

맑고 선한 사람이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우주.

너무나 사랑했기에 날 괴물로 만들어 버린 잔혹한 악마.

그럼에도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

손휘연.

그녀가 정원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뭐 해, 손휘연. 미쳤어?”

“……으음, 도한아?”

느릿하게 잠에서 깬 눈망울과 목소리가 닿자마자 도한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누가 여기서 자래. 어?”

“……도한이니, 정말?”

“하. 미쳤어. 며칠 내내 여기 있었어, 손휘연?”

도한은 재택 업무를 하며 밖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휘연이 얼마나 있었는지를 모른다. 심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녀에게 벗어나고자 매몰차게 그녀를 버렸으면서도 사실은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았다.

“누가 네 멋대로 여기서 날 기다리래. 분명히 내가 가라고 했잖아. 돈도 줬잖아. 근데 왜 자꾸 이렇게 나타나? 그렇게 돌아와 달라고 할 땐 오지 않았으면서. 나 없이 잘 살았으면서.”

마지막 페이지에 있던 사진과 글이 아른거리며 도한의 심장을 아프게 쿡쿡 찔렀다.

결국 휘연도 자신을 잊지 못했다는 것.

휘연이 자신을 버린 건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으리란 것.

그 사실이 파도처럼 도한에게 밀려왔다.

“왜 안 가. 기회를 줬는데 왜 자꾸 이래.”

도한은 휘연을 일으켜 세우며 그녀를 정원 안쪽으로 끌고 갔다. 그녀를 밖으로 내쫓을 때보다 훨씬 더 피가 뜨거웠다.

쾅!

현관문을 닫은 그는 그녀를 거실로 이끌었다.

아직 멀쩡한 정신이 들지 않은 휘연은, 아릿한 육신을 소파에 기대며 털썩 주저앉았다.

벽난로를 피우고 말없이 따스한 차를 끓이는 도한의 뒷모습이 보였다.

휘연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매몰차게 쫓아내는 그를 벗어날 수 없어 매일같이 그의 집 앞에 서성였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거 알았다. 도한이 자신을 향해 느끼는 감정 중 남은 것이라곤 분노뿐이란 걸 잘 알았다. 그럼에도 마음은 이성처럼 똑똑하질 못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속을 앓으며 혼자 고민하기를 수천 번.

지금 이대로 그를 놓치면 평생 후회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염치를 버리고 그의 집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언제 도한이 나올지 몰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가 되기까지 도한이 겪었을 슬픔에 몸에 독이 흐르듯 괴로웠다.

저택에 도한이 있다는 걸 아는 상태에서도 기다리기 괴로운데, 도한은 아무 말 없이 사라진 날 생각하며 얼마나 괴로웠을까. 지난날 널 생각하며 괴로워했던 불쌍한 나는 또 어떻고.

휘연은 저를 위해 차를 끓이는 도한의 등 뒤로 덤덤하게 흘리듯 고백했다.

“내가 너 사랑해, 도한아.”

“…….”

그 말에 도한의 움직임이 멈췄다. 넓은 등판이 쓸쓸해 보였다.

“너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너를 떠난 순간까지. 그리고 이렇게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나의 십 대도, 이십 대도, 지금 이 순간도 모두 너였어, 도한아.”

휘연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두 뺨은 열로 달아올랐다.

“미안해, 도한아. 미안해. 말해 주지 못해,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

“……왜.”

도한의 가슴에 파란이 일었다. 차갑고 단단한 쇠구슬 같은 무언가가 작고 작은 알갱이로 부서지는 것처럼 마음이 파편으로 조각났다.

“아무리 노력해도 난 도한이 너뿐이야. 비가 오던 날 너를 만났던 순간부터 내 마음은 온통 너였어.”

휘연의 고백에 도한은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흑요석처럼 까만 눈동자는 물로 일렁였다. 도한과 휘연은 서로에게 자석처럼 이끌렸다. 휘연은 도한을 얼싸안듯 품으로 파고들었다. 도한의 피부에 느껴지는 휘연의 체온이 뜨거웠다. 가녀린 몸은 엷게 떨리고 있었다.

도한은 더더욱 휘연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만지며 뜨거운 숨결을 흘렸다.

“너도 나처럼, 아직도 좋아해?”

“응. 나 또 떠나지 않을 거야. 또 떠날 수 없어.”

“……왜. 왜 이제 와서.”

도한의 숨이 울음처럼 뜨거웠다.

“난 너만 있으면 돼. 그러니까 이렇게 끝내지 말아 줘. 제발, 도한아.”

“……누나가 없는 동안 내가 얼마나 잔인한 삶을 살았는지 알아?”

“나도야!”

벌벌 끓던 화산이 한순간에 용암을 분출하듯, 뜨거운 목소리가 갈라지듯 그녀의 목에서 나왔다.

“나도라고. 나라고 널 버리고 싶었던 줄 알아?”

학생 때부터 남달랐던 너와 나 사이의 격차. 결국 그 격차의 기원이 차원이 다른 태생이었단 걸 깨달은 순간 느꼈던 절망감, 그럼에도 너를 사랑해서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랑 때문에 얼마나 좌절했는지 네가 알기나 하냐고.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빚이 30억이라 도저히 회생 불가하다고 했을 때, 그때 무너지던 나의 심정을 네가 알기나 해? 넌 몰랐겠지. 아니, 네가 모르길 바랐어. 이 고통, 난 너무 잘 아니까.

세상은 우리처럼 순수하지 못해. 네가 빚 떠안은 가난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걸 네 아버지가 알면, 네가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널 감히 사랑했겠어.

네가 부서지고 사라질까 봐 무서웠어.

네 얼굴에 난 그 상처, 나 때문에 생겼다는 걸 알고 나서 더더욱.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된 걸 견딜 수 없다는 걸, 도한 너가 제일 잘 알지 않았을까.

널 버리고 비행기에 오른 순간에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어떻게 살았는지 아니? 하루하루 고통이고 지옥이었어. 나처럼 평범하다 못해 나락에 가까운 집안에게는 평생 뼈를 갉는 고통으로 일해도 못 모을 돈 때문에 처참하게 살았어.

그래도 그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는지 알아? 맞아 죽었어. 아시아인이란 이유 하나로. 돈이 많았다면 그랬을까? 아니. 돈이 있다면 그렇게 만만하게 여기고 건드리지 않았겠지.

계층이 있다면 난 바닥 밑의 지하실에 사는 존재였어. 쓰레기 같은 삶이었다고. 아버지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병에 걸린 어머니도 자살하고 말았어.

발악하고 아등바등 살았더니 남은 건 여전히 아득한 빚과 부모님의 장례뿐.

더 이상 부서질 데도 없는 이런 처참한 인생인데, 무슨 염치로 하늘에서 빛나고 있을 널 찾을 생각을 했겠어?

그렇지만 이 멍청한 심장은 널 잊지 못하더라.

나도 매일 밤 네 생각 했어.

네가 살아있을까, 살아 있다면 건강하게 살고 있을까.

다른 여자라도 생겼으면 어떡하지. 그러면 난 어떻게 살지.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일밖에 없었어. 그래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야.

큐레이터 일을 할 때면 널 잊을 수 있었으니까.

이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에 임했을 때, 어둠 속에서 몰래 네 눈을 훔쳐봤을 땐 오금이 저렸고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지.

그런데 네 손길에 난 황홀했어. 고통스럽고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에던이란 존재에게서 도한을 느꼈으니까.

“흐흑…….”

울분이 덧입혀져 애절한 목소리의 고백이 멈추지 않았다.

휘연은 피를 토해 내듯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네가 무서웠어. 네가 무서웠던 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너의 그 미친 집착이 무서웠고, 그렇게 만든 사람이 나란 사실에 죽을 것 같았어.”

칼이 되어 심장을 도려내는 직설적인 발언에 도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진짜 무서웠던 건, 널 그렇게 만든 과거의 나의 죄를 마주하는 거였어. 도한아, 널 사랑하는 내 마음은 변함없어.”

한 여자에게 미쳐 그녀를 잊기 위해, 그녀를 잊지 않기 위해 발악하면서 태워진 십 년이 재가 되어 미래엔 암흑만 남았는데도, 그녀는 그 재라도 기꺼이 삼키겠다는 듯 울며 매달렸다.

“날 놓지 마. 우리 같이 공멸한다 해도, 날 놓지 마.”

“……사랑해, 나를?”

“어, 사랑해. 널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심장을 바칠 수 있을 만큼 사랑해.”

그 말에 도한은 열기 띤 숨결을 뱉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사랑해?”

“도한아, 내가 네가 아니면 누굴 사랑하겠어.”

“누나…….”

도한이 무너질 듯 애처로운 얼굴로 휘연을 바라보았다. 휘연의 가슴도 찢어졌다.

“내게도 누나뿐이었어. 단 한 순간도 네가 아닌 적 없었어.”

그녀를 눈에 담아 제 몸 안으로 삼켜 버리겠다는 듯, 뜨거운 집착 어린 눈빛이 휘연에게 내려왔다. 곧 그는 휘연의 입술을 감쳐물었다. 입술이 겹쳐지며 열기가 피어올랐다.

“으읏……!”

키스가 사랑을 표현할 수 있던 최대치의 그 어린 시절의 그 풋풋함.

서로의 몸에 살짝 닿기만 해도 화상이라도 입은 양 달아올랐던 순수함.

십 년이란 세월이 각인시킨 선명한 집착.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녹아내릴 듯 두 사람의 혀가 진하게 얽혔다.

지난밤과는 다른 결의 열기였다. 피부가 연해지고 발끝이 몽롱해지는 따뜻함이 있는 키스였다.

도한은 젖은 숨결을 흘렸다. 제 숨을 삼켜 지독하게 자신을 기억하고 살아남으라는 듯.

휘연 역시 뜨거운 숨결을 그의 잇새로 흘려보냈다. 이 숨결이 끊길 때까지 널 사랑하겠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숨이 얽혀 진득하게 서로의 살결을 느끼고, 음미하고, 탐미했다.

공기마저 적셔질 때, 도한이 느리게 입을 떼었다. 찔걱. 야한 소리와 함께 얽혔던 혀가 풀어지며 타액이 두 사람을 잇는 걸 눈으로 확인할 때, 다시 그의 입술이 들어왔다.

이전과는 다르게, 더 섬세하고 붉은 움직임이었다. 선혈이라도 빨아들일 것처럼 강렬하게 다가와서 은밀하게 입술을 쓸어 대니 달싹달싹 몸이 반응했다.

“으읏…….”

이렇게 달콤한 키스를 해 주는 남자가, 제 남자다. 도한은 이전의 거칠었던 순간들을 모두 배상이라도 하겠다는 듯 천천히, 그리고 유려하게 점막을 훑었다.

곧 그 혀는 목덜미를 따라 귓바퀴로 옮겨 갔다. 귓속을 파고드는 촉촉한 것의 움직임이 야했다. 귀에 점막을 형성해 간지럽히듯 핥아 점점 달아오르게 만든다. 젖은 귀에 낮게 내려앉는 그의 탁한 신음이 공명해 뇌까지 어지럽게 했다.

“사랑해, 누나.”

십 년에 맺힌 감정이 휘연을 집어삼킬 듯 강렬하게 귓가에 맺혔다. 타오르는 태양처럼 매혹적인 그는, 휘연이 그의 사랑에 녹아내리기라도 원하는 건지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였다.

그 어린 날, 얼마나 달렸는지 숨이 넘어갈 정도로 벅차오르던 순간, 내 눈에 들어왔던 단 하나의 아이.

찰박거리는 물웅덩이에 웅크린 채 누군가에게 맞던 아이.

보는 내 마음이 찢어지는데도 전혀 울지를 않던 아이.

도움을 주려고 해도 무감하게 무시하던 아이.

첫 만남부터 내 마음에 깊숙이도 박혀 결국은 내 마음이 그로 가득 차 버리게 만들어 버린 예쁜 그 아이.

우리의 꽃길은 한때 꺾여 버렸지만, 결국 그곳에도 서로를 향한 마음의 씨앗은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휘연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랑했던 도한, 나의 사랑 도한.

널 버리고, 널 짓밟은 게 나였지만, 다시 너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도 나이고 싶다.

휘연은 벅차오르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사랑해, 누나. 사랑해.

사랑해. 정말 너무 사랑해.

죽을 때까지 사랑해. 우리 영원히 사랑하자.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고백을 하는 도한의 속삭임에 휘연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휘연은 도한의 몸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눈을 떴다.

촉촉이 젖은 눈에는 어렸을 적 휘연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소년미와 압도적인 남성미가 모두 녹아 있었다. 도한이 휘연의 뺨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에필로그

3개월 뒤.

겨울이 다가왔는데도 유독 따스한 햇살에 높고 푸른 하늘이 꼭 가을처럼 날이 맑았다.

“날씨가 맑구만.”

관장은 어깨를 두들기며 미술관 안을 드리우는 맑은 햇살에 기분이 좋은지 걷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직원들도 모두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오늘 드디어 돌아오는 날이지, 우리 미술관 가장.”

의뢰 건으로 100억이라는 쾌거를 이뤄 낸 소식을 들은 관장은 마치 제 딸이 성공이라도 한 것처럼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언젠가 그 저택을 어떤 작품으로 어떻게 작업해 놓았는지 직접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이 의뢰 건에 100억을 흔쾌히 투자한 ‘에던’이란 사람이 어땠는지도 정말 궁금했다.

비록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그래도 3개월 동안 일하면서 한 번이라도 마주하지 않았을까? 관장은 물어볼 질문이 한 보따리라 얼른 휘연이 보고 싶었다.

“관장님, 손 선배님 오십니다.”

신입 큐레이터가 바싹 긴장한 목소리로 달려와 보고했다. 관장은 정신을 차리고 직원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자, 자, 다들 준비했던 대로, 알지?”

“네, 알겠습니다. 관장님.”

직원들이 큐레이터 사무실 앞 복도에 다들 긴장한 채로 서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들이 제각기 풍선이니, 꽃이니, 플랜카드니 하는, 연예인을 대접할 때나 보이는 것들을 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관장이 시켜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는 것도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오, 옵니다!”

젊은 신입 큐레이터가 급하게 외치며 손짓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자리를 갖췄다. 모두들 긴장했다.

그때, 멀리서 그들이 기다렸던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어머, 진짜. 왜 이래요? 나 없는 동안 미술관 공사 끝낸 게 이렇게 꼭꼭 숨겨서 보여 줄 일이에요?”

그리웠던 전설의 목소리, 손휘연이 걸어 들어왔다.

후배 큐레이터의 팔짱을 끼고 안대를 쓴 채로.

직원들은 긴장했다. 그녀가 서서히 다가온다. 사무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휘연의 팔을 걸었던 여자가 조심스레 안대를 벗겨 주었다.

“복귀를 축하합니다!”

“와아아!”

펑, 펑, 펑.

때아닌 파티 폭죽 소리에 휘연은 눈앞의 상황을 채 인지하지도 못하고 얼떨떨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석 큐레이터 손휘연의 복귀를 축하합니다!]

[수고했어요, 우리의 자랑]

플랜카드에 다들 풍선까지 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었지만 정작 휘연은 너무 당황스러워 속눈썹만 파르르 떨었다.

“뭐예요, 다들……?”

“시어 해지펀드가 K 예술 재단에 전폭 지원을 하게 되면서 우리 미술관도 좀 덕을 봤거든. 다 휘연 씨 덕분이니까, 이 정도 축하는 받아 마땅하지?”

“……아.”

관장의 말에 휘연은 그만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의 업적은 누군가의 실패다. 내가 성공한 만큼 자리를 차지하면 누군가는 그만큼 뒤로 밀려난다. 자본주의 사회 일부인 이 세계도 다르지 않다. 휘연이 성장하면 그만큼 휘연이 맡는 업무가 많아지면서 누군가의 일자리는 없어진다.

슬프게도 그건 당연한 진리였다.

그렇기에 휘연은 자신이 승승장구할수록 주변의 시샘과 질투도 스스로 감내해야만 했다. 가끔은 혼자라서 그게 너무나 고통스럽기도 했다.

지금 이 의뢰 건 보수가 소문이 점점 퍼져 나가면서, 휘연은 복귀하는 게 두려웠다. 미술관을 버리고 사리사욕을 채우러 간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큐레이터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어젯밤엔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런데 막상 이곳으로 오니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휘연을 대단하다고 여겨 주고, 따스하게 맞아 주었다.

휘연이 의도치 않게 이뤄 낸 운 좋은 업적일 뿐인데, 그들은 휘연을 진심으로 칭찬해 주었다. 살가운 동료가 곁에 있었다. 휘연은 든든하고 먹먹해져 고개를 돌렸다.

동료들이 휘연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얼싸안으며 위로해 준다. 그 품이 너무나도 따뜻해 정말이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고마워요, 다들…….”

진심으로 휘연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

“그래, 또 밤낮없이 바쁘구만.”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관장은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야근 중인 휘연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기획전 무사히 완수하려면 지금부터 갈아 넣어야죠.”

“그래, 쉬고 왔으면 또 그러긴 해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관장의 눈썹은 걱정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하루도 안 돼서 그녀는 엄청난 양의 자료를 뽑아 읽고 정리하며 기획안을 수정했다.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속도와 성취다.

“덕분에 K 예술 재단이 미국에서도 빛을 봤어. 시어 해지펀드가 투자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쪽 투자자들도 이 세계에 눈을 뜬 거지. 앞으로 K 미술관이 더 좋은 미술품을 소장할 기회가 늘었어. 그러니 다들 자네의 복귀에 감사할 수밖에.”

“고마워요. 저는 한 것도 없는데.”

“흠흠. 한 게 왜 없나. 대단한 일을 했지. 투자자를 꾀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무려 에던의 투자를 유치했으니. 이사장님이 얼마나 칭찬했는지 몰라.”

휘연은 싱긋 웃어 보였다. 여전히 자판을 치는 그녀의 손길은 쉼이 없었다.

“그래, 그래서 에던 얼굴은 실제로 보았나?”

“에던이요?”

“그 의뢰자 말이야.”

“……음.”

작업하던 손이 느릿하게 멈췄다. 휘연은 생각에 잠겼는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말을 어떻게 꺼낼지 궁리하는 것 같았다.

“뭐가 궁금하신데요?”

“허허. 그냥 생긴 것부터 해서 나이나 성격이나…….”

“직접 봐 보세요.”

“어허?”

서류철을 확인하던 관장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그렇게 높은 사람을 어떻게 마주한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보겠어. 휘연 씨, 나는 이런 미술관 관장 자리나 지키는 거지, 그런 기회는 자네 같은 인재한테나 돌아간다고.”

“직접 보실 수 있다니까요.”

“응?”

휘연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핸드백 안을 뒤적이더니 곧 예쁜 연분홍 청첩장을 내밀었다. 정갈한 필체로 쓰여진 ‘청첩장’을 보자 관장의 눈이 커다래진다.

“결혼해?”

“네. 보시다시피.”

허허, 허허. 사람 좋은 웃음소리가 그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그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지더니 이내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휘연은 활짝 웃는 관장을 보며 저도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

“좋으세요?”

“허허. 좋지! 그럼! 드디어 휘연 씨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구나.”

“첫사랑이에요.”

“첫사랑?”

예상치 못한 단어에 관장의 눈이 더 커다래졌다.

“진심으로 축하하네. 근데 자네가 연애를 하고 있던가?”

“음, 네.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요, 그냥 장거리 연애였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허허. 또 나만 몰랐구먼. 어디 보자, 허허! 청첩장 예쁘게 잘 나왔구먼.”

휘연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그의 시선에서 뭉클함을 느꼈다.

일반 직원이라면 절대로 상급자에게 결혼을 달갑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여자라면, 더더욱.

하지만 휘연에겐 사랑하는 가족이 없는 대신 이렇게 주위에 좋은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 없이 살아남아야 했던 휘연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사람이기에 휘연은 그에게 제일 먼저 알려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에던을 궁금해했으므로.

좀 놀려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달까?

“어디 보자, 신랑 이름이…….”

신랑 이름을 확인하는 관장의 목소리가 희미해지고, 휘연의 입술은 기분 좋게 호선을 그렸다.

“……설마 내가 아는 그 에던은 아니지?!”

세월의 풍파를 그대로 견뎌 내 우악스런 목소리가 휘연의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휘연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너스레를 떨며 싱긋 웃어 주었다.

“보실 수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잠깐만, 휘연 씨. 지금, 첫사랑하고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어?”

“네, 제 첫사랑이랍니다.”

“…….”

관장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 찬다. 그럴 만했다. 휘연이었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휘연은 그저 웃으며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다 관장님이 이어 주신 덕분이에요.”

“응? 내가? 아니, 지금 나 이해가 잘 가지 않는데.”

“나중에 설명드릴게요. 저 우선 이제 퇴근하겠습니다.”

“잠깐만! 휘연 씨! 나 이대로 잠 못 자! 이대로 가면 안 돼!”

하지만 휘연은 과감하게 하던 업무를 중단하고 정리했다. 관장은 이제 울먹이며 애원까지 한다. 관장이 큐레이터에게 이렇게 매달리는 광경을 본다면 세상 사람들은 기함할지도 몰랐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나중에 저 주례, 해 주실 거죠?”

“응? 주례? 그럼! 당연히 하고말고! 휘연 씨가 하는 결혼인데! 당연하지!”

“그럼, 그때 우리 회포 풀어요.”

“……좋아, 그렇고말고. 내 모든 스케줄 비워 둘 테니까 언제든지 말하라고!”

“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

휘연은 기분 좋게 그와 헤어지며 사무실을 나섰다.

언제 말할까 걱정만 안겨 줬던 결혼 얘기까지도 완벽했다. 휘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늦은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밤공기는 그새 으슬으슬해졌지만, 밤하늘의 별은 유난히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언제 오지?’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이미 휘연이 만나자고 한 시간이 지난 터였다. 휘연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도로를 살펴보았다. 씽씽 달리는 도로에는 그녀가 기다리는 차량이 없었다.

‘흠. 먼저 안 기다리고 있었어?’

늦어서 미안하다 하려 했는데 오히려 아주 혼내야겠다는 생각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려는 순간, 휴대폰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놀란 휘연이 고개를 돌리자 그대로 부드러운 살갗에 입술이 닿았다.

촉.

도한의 부드러운 뺨이었다. 휘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이도한!”

“누나, 기다리다 죽을 뻔했어.”

“뭐?”

눈앞에 멀쩡히 살아 있어 자신을 끌어안고 놀래키기까지 했으면서 죽을 뻔했단다. 어이가 없어 휘연이 피식 웃으며 그의 뺨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죽을 뻔했다고?”

“응, 네가 너무 늦게 나와서 기다리다 답답해서.”

“미안. 관장님하고 얘기하다 조금 늦었어. 그래도 이제 내 얼굴 봤으니까 괜찮지?”

“아니.”

“……어?”

순간 잘록한 곡선에 훅 들어온 손이 으스러지게 그녀를 안았다. 허리에 느껴지는 단단한 남자의 무게와 그와 대비되는 강아지 같은 눈길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입 맞춰 줘, 그럼 살 거 같아.”

“여기서? 갑자기 왜? 여긴 직장 앞이잖아.”

“그게 중요해? 당신 남편 죽겠다는데.”

그렇게 말하는 도한의 눈은 타오를 듯 뜨거웠다.

휘연은 또 그 눈빛에 속절없이 두근거려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 알았어. 자, 뽀뽀.”

휘연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도한의 입술로 촉 가져갔다. 여전히 달콤하고 따스한 입술이었다.

“우리 누나 잘한다. 더 해 봐.”

촉. 촉. 촉.

따스한 입술에 입술이 부드럽게 감기었다 떨어질 때, 도한은 더 달콤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 가며 그녀에게 아찔한 칭찬을 쏟아 냈다.

입술이 몇 번이고 닿았다가 멀어지는 사이사이,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휘연의 눈이 순식간에 커다래졌다.

그에게 입술을 닿았을 때, 고개를 비튼 도한이 그대로 휘연의 벌어진 입술을 감쳐물고선 깊게 들어왔다.

속수무책으로 들어오는 그 입술에 무방비해진 휘연이 저항하지 않고 그를 받아들인 게 예뻤는지 도한의 입술 사이로 옅은 웃음이 흘렀다.

얼굴이 달아오른 휘연은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여기 직장 앞이라고 했지.”

“뭐, 어때? 이미 근처에서 할 거 다 한 사인데.”

“너! 정말!”

“네가 내 부인 될 거란 거, 어차피 모두가 알게 될 텐데 무슨 상관이야.”

도한은 부드럽게 속삭이며 휘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 마리의 강아지처럼, 때론 늑대처럼.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며 휘연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각인시킬 거야, 네가 내 거란 걸.”

“응. 각인해 줘, 도한아.”

“……빨리 차에 타. 당장 각인시켜 줄게.”

휘연은 부정의 의미로 숨을 뱉었지만 몸은 또다시 순순히 끌려갔다. 그 행동이 예뻤는지 도한이 급하게 휘연을 이끌었다.

이대로 끌려가면 어떻게 되는 건지, 세세하게 그려졌다.

그게 더 휘연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새를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의 몸은 차 안에서 다시금 얽혀 들었다. 차창이 열기 어린 김으로 불투명해질 때까지.

서로의 몸을 잊지 않으리라는 듯, 뜨겁게.

두 사람의 격정 젖은 눈은 서로를 핥으며 내려앉았다.

젖어 버린 목소리로 도한이 가슴에서 끌어 올린 진심을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랑해, 휘연아. 영원히 너만 사랑하고 널 바라보고 널 행복하게 해 줄게.”

사랑을 속삭이는 따뜻함에 휘연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벅차오르는 그 진심을, 휘연은 온몸으로 느끼며 단발적인 숨과 함께 대답을 뱉었다.

“나도 사랑해, 도한아.”

그에게 안겨 그의 모든 것을 오롯이 느끼는 이 순간이 소중했다.

‘다시는 널 잊지 않을게.’

다시는 이 품을 놓지 않으리라.

다시는 이 사랑을 놓지 않으리라.

휘연에게로 도한이 더 격렬하게 다가오자, 추운 겨울을 녹여 버릴 것처럼 진한 절정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두 사람 사이를 축복하듯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BORI 갠소요게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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