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폭발
휘연은 저릿한 통증에 늘어진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웠다.
약에 취한 것처럼 뭉근한 시야에 담긴 광경에, 그녀의 얼굴이 절망으로 녹아내렸다.
“아…….”
변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곳을 벗어났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처참하게 깨졌다.
어둠의 공간은 그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것을 쳐다볼 수도, 다른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공간의 무거운 분위기마저 도한을 닮았다.
속박하고, 압박하고, 죄책감에 허덕이게 만든다.
휘연은 휴대폰을 찾으려 했지만 곧 그것이 무의미한 일임을 깨달았다.
쓰러지듯 침대에 눕자 눈가에 물이 차오르고, 눈가가 붉어질수록 그녀의 가슴이 뜨겁게 미어졌다.
‘그렇구나. 나는 지금…….’
지금 나는 벌을 받는 중이다.
그를 버렸던 그 과거를 심판받는 중이다.
‘……무서워. 너무, 너무 무서워.’
그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과거의 아픔에, 지금의 고통에, 미래의 좌절에 가슴은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설마 했지만 그 고압적인 목소리의 주인이 도한일 줄이야.
죽을 것 같았다.
차가울지언정 본성만큼은 그 누구보다 따뜻했던 도한의 속엔 이제 말라비틀어진 심장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 안에 악마가 들어 있다고 보는 게 더 적합한 설명일지도 모른다.
순수했던 소년의 추억 따위는 모두 말살된 채 집착과 원망 따위밖에 남지 않은 도한 생각에 휘연은 목이 메었다.
제 몸을 삼킬 기세로 매섭게 몰아치던 도한.
그가 자신을 원망하는 걸 원망할 수 없다.
그가 그런 괴물인 된 건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다.
그는 조건 없이 휘연을 사랑해 줬지만, 휘연은 미래가 두려워 결국 그를 버리고 떠났으니.
그가 휘연을 원망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일 테다.
옛날과 똑같길 바라는 건 사치일 것이다.
휘연은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한을 토했다.
“흐흑. 미안해, 도한아. 내가 너무 미안해. 정말 너무너무 미안해…….”
지난밤, 맹렬히 긁어 대는 그의 싸늘한 말들은 독이 되어 휘연의 심장을 삼켰다. 맹독 같은 말을 퍼붓는 남자가 아니었단 걸 너무나 잘 알기에 그렇게 변한 모습은 더더욱 휘연을 괴롭게 만들었다. 자신이 그렇게 한 소년을 타락시켰다는 사실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혼자 남겨진 어둠 속에서 그녀는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외로웠다.
이곳이 그의 집이니 언젠가는 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잔인한 진실에 숨이 막혔다.
가느다란 숨은 격해지다가 뜨거워지고 폭발하기도 했다. 두려움이 심장을 잠식하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정신은 공포와 죄책감에 잠시도 격분을 주체 못 하지만 육신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녹작지근했다.
“도한아…….”
벗어나고픈 마음과 벗어나지 못하겠는 마음이 동시에 휘연을 강타했다.
지난날 아름다웠던 추억은 휘연이 도한을 갈망하게도, 그를 외면하게도 했다.
복잡한 마음속 기저에 깔린 자기모멸감과 도한에 대한 그리움은 계속 진해지기만 했다.
오늘 밤은 어떻게 스러질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혼자 어둠 속에 있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셀 방법도, 셀 의미도 없어진 육신의 생체 리듬이 완벽하게 깨졌기에.
휘연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침대에 늘어진 채 침묵의 벌을 받으며 두려움에 떠는 것뿐이었다.
배는 고팠지만 무언가를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씻는 건 당연히 할 수 없었다.
세상과 그렇게 단절된 채 휘연은 의미 없이 가동 중인 컴퓨터 모니터만 바라보며 어둠 속에서 죽은 사람처럼 묵묵히 파멸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차라리 도한이 눈앞에 나타나길 바랐다.
뺨을 때리고 발로 걷어차도 좋으니, 욕을 퍼붓고 칼로 찔러도 좋으니 제발, 나타나 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혼자 생각의 늪에 빠져 있다간 자살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런 비겁한 방법만큼은 하면 안 되니까…….
‘도한아, 얼른 날 심판해 줘…….’
휘연은 그렇게 어둠에 갇힌 채 또 시간을 흘려보냈다.
*
까무룩 잠든 정신에도 무언가 인기척에 잠결이 흐트러졌다.
‘으음.’
잠드는 것도 피곤해서 자는 게 아니었다. 빛을 보지 못한 채 방에 갇혀 있으니 자연스럽게 생명이 마모되면서 잠이 휘연을 잠식했을 뿐이다.
‘으읏…….’
그렇게 어둠 속에서 잘 때면, 귀신과 악마가 번갈아 가며 악몽에 나와 그녀를 괴롭게 만들곤 했다.
이젠 꿈을 넘어 가위에 눌리는 건가 싶어 눈을 떴을 때, 휘연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도, 도, 도한아…….”
“깼어?”
언제 온 건지 도한이 태연하게 그녀의 머리칼을 쓸고 있었다. 맥박이 미친 듯이 올라 호흡이 눈에 띄게 거칠어졌다.
“나 보니까, 그렇게 반가워?”
태연한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사람을 죽일 것처럼 싸늘했다. 눈 역시 잔혹했다. 휘연이 사랑했던 장난기 가득한 맑은 눈은 없었다. 티끌 하나 없던 선한 눈에는 순수 대신 원망만이 가득이었다.
“반갑지 않냐고, 누나. 이렇게 십 년 만에 보니까.”
“…….”
언제일지 모를 까마득한 그 순수한 옛날에도 누나란 단어를 입에 잘 올리지 않던 도한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도한은, 그러니까 지독하리만치 처연하고 아름답게 자라 버린 도한의 입에선 ‘누나’가 잘도 흘러나왔다.
그동안 도한이 어떻게 지냈는지 알지 못하는 휘연의 입술이 막연하게 떨렸다.
눈가가 젖어 흐릿해졌다.
도한이 긴 손가락으로 휘연의 눈가를 쓸자 그녀의 속눈썹이 파릇 떨렸다.
“반갑냐고 묻잖아, 내가. 날 버린 너한테.”
에던이란 이름으로 전혀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도한이, 이렇게도 선명하게 자신의 앞에서 위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수록 두려웠다.
“……너, 대체 왜 그러는 거-”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입술이 도한에게 삼켜졌다. 서늘함이 내려앉은 입술은 지독히도 달았다. 그걸 거부할 수 없는 제 자신이 싫으면서도 그리웠던 촉감에 애써 닦았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도한인 걸 알고 범해지는 입술은 배덕하게도 쾌락적이었다.
휘연을 조각내 집어삼킬 것처럼 농밀하고 진득한 움직임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으읏……!”
타액에 젖은 신음이 귓가에 들리고 나서야 도한은 그 입술을 느릿하게 떼어 냈다.
“여전히 아니, 더 달아졌어. 네 입술.”
열기에 젖은 목소리는 순결했던 소년의 미성 따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끓어오르는 집착으로 뜨거웠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싸늘한 그 눈빛에 휘연은 아득해졌다.
십 년의 간극은 너무나 거대했다. 휘연은 도한이 모르는 곳에서 살아남았고, 도한 역시 휘연이 모르는 곳에서 살아남았다. 서로가 십 년간 어디서 뭘 했는지 알지 못한다.
휘연은 알고 싶었다. 그녀가 떠나야 했던 이유는, 도한이 금왕 그룹의 일원이었기에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없어서였다. 그 수많은 빚을 지닌 자신을 사랑하다 그 집단에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 잔혹하게 도한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휘연이 예상한 대로 살지 못했다면, 그건 너무나 끔찍했다. 얼마나 큰 죄책감으로 다가올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무섭고 두려웠다.
벌벌 떠는 휘연을 보며 도한은 픽 하고 웃었다. 그 웃는 입술에선 허탈감이 엿보였다.
“나 없는 동안 씻지도 않고 뭐 했어?”
“……아.”
휘연은 서늘하게 내려앉은 음성에 제 꼴을 다시 확인했다. 옷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고, 제 몸을 겨우 가리는 속옷은 지난날의 격정에 헐거워져 있었다.
순간, 십 년 만에 만난 첫사랑 앞에 이런 꼴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자 휘연은 자신이 얼마나 피폐하게 시간을 버리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고작 이틀 여기 있었다고 폐인이 된 거야?”
도한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따라와.”
손목을 잡는 게 사랑을 표현하는 높은 수위였던 어린 시절의 손길과는 전혀 다른 거친 손길이 그녀의 손목을 옥죄었다.
“아, 아파, 도한아!”
족쇄가 채워진 것처럼 으스러지게 조여 오는 힘에 휘연은 애절하게 호소했지만 그는 전혀 듣지 않았다. 에던과의 계약에서 절대 허락되지 않았던 2층의 어딘가로 휘연은 험하게 이끌렸다.
“도, 도한아? 어디 가는 거야?”
“또 하려면 씻어야지.”
“……뭐?”
낮은 그의 목소리에, 지난날 아랫배가 저릿하고 몸이 부서질 정도로 고통스럽게 쾌락적이었던 밤이 떠올라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이미 몸이 너무나도 아팠다. 박히고 박히고 박히고 계속 박혔다. 그럴 때마다 몸은 괴로움과 쾌락의 전율에 감정의 폭풍을 맞아 차라리 죽기를 바랐다. 자신을 안는 남자와 이럴 수 없는 관계임을 머리는 알고 있지만 가슴은 부질없이 환희에 젖어 버린 끔찍한 모순을 겪고 있었으니까.
“으읏, 아, 아파!”
휘연이 소리치자 도한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놓았다.
“……여기는?”
주변을 둘러본 휘연의 입에서 흐린 목소리가 나왔다.
“거기서 기다려.”
쾅!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휘연은 얼어붙은 것처럼 제자리에 서 있었다.
도한에게 끌려가서 도착한 곳은 2층의 욕실이었다.
1층 욕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넓고 화려한 욕실에서 그의 재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지독하게 살아남았는지 휘연이 절대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광기는 휘연을 향해 있었다.
그의 뒷모습에 가슴이 저릿했다.
콸콸콸콸콸.
커다란 틀 안으로 뜨거운 물이 연기를 내뿜으며 담겼다.
도한은 긴 손가락으로 입욕제를 들더니, 스파 제품을 조금씩 흘려 넣었다.
휘연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감을 잡을 수 없어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목욕 따위로 시간을 축낼 여유는 없었다. 더욱이 죽고 싶어서 씻을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다.
휘연이 하고 싶은 건 대화였다. 도한 너는 왜 인터넷상에서 사라졌고, 너는 내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성공했는데도 왜 나를 잊지 못했는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등등 염치없게도 그런 대화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들끓는 분노가 흐르는 그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생존 서열 정점에 군림하는 포식자 같은 도한의 뒷모습에 휘연의 몸이 두려움으로 떨렸다.
입욕제를 풀자 뭉근한 플로럴 향이 공간 가득 피어올랐다. 곧 도한 역시 고개를 돌리더니 휘연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눈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벗을래, 벗겨 줄까.”
“도, 도한아, 우리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이럴 때가 아니면, 뭐 할 땐데?”
“우선 이건 아니야. 지금 이렇게 한가롭게 샤워할 때가 아니잖아, 응?”
“한가로워?”
정염과 분노에 젖어 열기 가득한 목소리에 휘연이 뒷걸음질 쳤다.
“네 눈에 내가 한가로워서 이러는 거 같아?”
“……어?”
“네 머릿속에 또 다른 생각 들까 봐 난 빨리 섹스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는데, 넌 아니야?”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에 휘연의 속눈썹이 파들 떨렸다.
“난 그 지옥 같은 나락에서도 네 생각 하나로 견뎠어.”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과거 지옥에 대한 경멸과 모멸, 두려움이 뒤엉켜 있었다.
그런 끔찍한 삶 속에서 휘연은 도한의 우주였고 종교였고 신이었다. 그녀를 위해 살아남아야겠다는 원초적인 갈망이 도한을 생존하게 만들었다. 모든 치욕을 견디고 모든 아픔을 이겨 내게 만들었다.
그녀와 하나 된 순간에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휘연을 위해 견뎌 낼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휘연만이 삶의 이유였다.
“네가 내게 네 모든 걸 줬던 밤, 난 너한테 내 인생을 바치리라 다짐했어.”
도한의 눈빛은 모든 걸 집어삼킬 듯 서늘해져 있었다. 살갗을 도려내는 서늘함에 휘연은 목에 피가 날 것 같았다.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 없어. 너를 향한 원망마저 사랑으로 승화시킬 때까지 매일이고 너를 생각하며 널 만날 생각으로 이렇게 살아왔던 나야.”
맹렬히 긁는 목소리에 담긴 진심이 무거워 휘연의 눈가가 흐릿해졌다.
“매일 너를 떠올리며 이런 생각만 했는데, 어떻게 넌 아니야?”
매서운 음성과 함께 쾅, 소리가 나며 그가 벽을 쳤다. 그 품에 갇힌 휘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도한의 빼곡한 속눈썹이 촉수처럼 휘연을 핥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십 년 동안 보지 못한 만큼 지금 그녀의 눈을 빨아 먹겠다는 듯이.
“작년에 우연히 널 발견했어.”
욕실의 수증기 때문인지 축축이 젖은 입술이 나른하게 귓바퀴를 타고 흐른다.
“널 찾은 순간 바로 널 찾아갈 수도 있었겠지. 너한테 왜 그랬냐고 평범하게 물을 수 있었겠지. 그런데, 내가 십 년 동안 겪은 고통이 있는데 너한테 그냥 그럴 수가 없겠더라.”
귓바퀴를 적신 입술을 뗀 도한이 뻐근해진 고개를 비틀며 뜨거운 숨결로 휘연의 시야를 흐렸다.
“목소리는 들리는데 얼굴은 볼 수 없어 미치는 거, 나만 겪을 순 없잖아.”
도한이 바르르 떨리는 휘연의 몸을 위험하게 훑었다.
“매일 꿈속에서 네 목소리를 듣지만, 절대 널 볼 수 없는 나처럼.”
도한의 중압감에 휘연은 울먹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너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기를 바랐어.”
“도한아, 제발, 내 얘기도 들어 줘, 도한아. 으읏!”
뜨거운 수증기가 욕실을 메웠고, 그의 손이 휘연의 벌어진 꽃잎 살을 훑었다.
“네 얘기를 들어 줘?”
“하읏!”
순식간이었다. 도한의 긴 손이 아래쪽의 깊숙한 곳을 찔렀다. 도망치듯 휘연의 허리가 뒤로 밀렸다. 그러나 차가운 벽에 닿은 허리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나는 널 잊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내 목소리도 기억 못 하는 네 말을, 들으라고 나한테?”
내벽을 휘젓는 손이 거칠었다. 그가 움직일수록 안은 질척해졌다. 뜨거워졌다.
휘연의 벅찬 신음에 도한은 탁한 숨을 흘렸다.
“그래, 넌 이것만 기억하지.”
욕실을 가득 채운 수증기의 열기 때문인지, 그가 몸을 자극해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휘연의 몸은 빠르게 열이 올랐다.
“넌 내 몸만 기억하고 네 쾌락만 기억하지.”
안쪽의 자극에 휘연의 가슴이 가느다랗게 차올랐다. 곧 그것이 도한을 흥분시켰는지 그가 유두를 집어삼켰다.
“하앗……!”
“누나가 이토록 내 몸을 기억하니까 이젠 맞춰 줘야겠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
손가락이 내벽을 긁으니 안쪽에 용암이 흐른 것처럼 뜨겁고 아팠다.
휘연은 통각에 몸부림치며 그를 밀쳐 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도한에게 결박당했다.
“이렇게 몸을 대 줘야 네가 다시는 날 잊지 않겠지.”
“읏, 도, 도한아. 그런 게 아니…… 하앗!”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렇게 흥분했으면서.”
“으읏!”
도한은 제 손에 유린당하는 휘연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실제로 그녀가 그를 기억하지 못한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징계를 핑계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을 때부터 이유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십 년의 세월을 몸으로 풀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몇 번이고 그녀를 박고 맛봤는데도 몸은 계속 그녀를 갈구했다. 강렬하게 각인된 맛을 잊지 못해 여전히 불량식품을 갈망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녀가 이미 이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를 생각하며 자위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와 섹스도 했다. 몇 번이고 박고, 싸고, 박고, 싸고를 반복했는데 분노와 욕정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도한은 제 몸 아래 한 마리의 짐승이 된 휘연의 입술을 물어뜯듯 빨았다.
찔걱, 음탕한 소리와 그녀의 신음에 도한의 성기가 단단해졌다.
“이러니 예뻐하지 않을 수 없지, 누나.”
싸늘한 음성과 함께 도한은 그녀의 팔을 잡아 욕조로 끌고 갔다.
“자, 잠깐만! 도한아!”
풍덩!
말을 채 잇기도 전에 휘연은 욕조 안으로 넘어졌다. 뜨거운 물이 넘실거리며 육신을 압박했다.
촤아아악.
도한이 발을 담그자 부피에 물이 넘쳤다.
“으읏…….”
열기에 어지러워 정신을 채 차리기 전에 도한이 그녀의 가슴을 쥐었다. 그는 곧 그녀의 유두를 물고 빨았다.
“읏……!”
이전과는 다른, 물에 녹은 입욕제의 매끈거림에 감도가 달랐다. 이토록 원초적인 쾌락에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에, 그의 말에 항변할 여지가 없어 휘연은 죄스러웠다.
“좋아 죽지.”
“으읏, 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도한은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허리를 뒤로 젖혔다.
“꺄악!”
강직도와 부피감이 느껴지는 그것이 적나라하게 휘연의 성기에 맞닿았다.
입욕제 때문에 매끈거리는 감촉에 유독 열이 빨리 오르는 듯했다.
“점점 빨리 느끼는 거 같아?”
“읏, 아, 아니야……!”
“역시 누나는 아직 한참 멀었어. 아직도 거짓말할 여유가 있지?”
곧 도한의 성기가 들어오자, 물이 출렁출렁 넘쳤다.
“으, 읏, 아, 아!”
“역시, 날 버린 넌 더 매혹적인 악마가 되었어.”
“읏, 너, 널 버린 거 아니, 읏, 야!”
“먹고 버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가?”
“아읏! 아!”
뜨거운 물에 열이 오른 그의 허리짓. 뜨거운 성기가 강렬하게 안을 쑤셔 와 정신을 어지럽게 만든다.
이번만큼은 안 되었다.
이번만큼은, 정신을 잃지 말아야 했다.
“하아, 씨발. 왜 이렇게 좋은 거야, 누나.”
도한은 이미 제가 알던 그 도한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마지막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고. 지금, 이 남자는 위험하다고.
“네가 과거에 한 짓 걱정하지 마. 난 이제 네가 어떤 짓을 하든 사랑할 수 있으니까.”
“으읏! 나, 나도 사정이 있었어! 읏, 아!”
“이제 와 변명하지 않아도 돼. 네가 날 버린 걸 사랑하기까지 시간은 걸렸지만 결국 그것도 사랑하니까.”
그는 밑을 격렬하게 치받아 댔다. 통각이 쾌락으로 발돋움 하면서 내지르는 교성에 도한은 이성이 끊겼는지, 그 상태로 일어나 욕조를 벗어났다. 성기와 성기가 물린 채로 몇 걸음 이동하자 욕실 내부의 작은 베드에 도달했다.
“하아! 읏!”
뜨거웠던 물이 공기 중에 노출되며 연기를 내었다. 질척거리는 타액과 매끈거리는 입욕제가 만나 상상 이상의 감도로 내벽을 자극했다.
갈수록 거칠어지는 그의 몸짓에도 휘연의 질은 그 좆을 으깨듯이 받아들였다.
도한이 탁한 신음을 내뱉을 때면, 그녀의 가슴은 하릴없이 출렁였다.
“흐윽, 윽, 흐으으읏!”
울음과 신음 사이 어딘가의 교성이 욕실로 퍼져 나갔다.
말하고 싶었다.
나도 네가 너무 보고 싶었다고. 나 역시 죽고 싶었다고. 널 떠나야 했던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너의 출생이 우리의 운명을 그렇게 뒤틀어 둔 거라고. 널 사랑하지 않은 적도, 널 잊은 적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아아, 하, 읏, 아!”
“하, 키스해. 손휘연.”
도한이 휘연의 가슴을 짓누르며 상체를 숙이더니 그녀의 입술을 감쳐물었다. 달아오른 입술과 혀가 진득하게 얽힌다. 땀과 타액과 물이 한데 얽혀 술에 취한 것처럼 흐릿한 정신에도 그녀의 입술은 미친 듯이 달콤했다.
도한은 여전히 그녀와의 섹스에선 몇 번이라도 사정할 것 같았다. 허리를 튕기며 그녀의 질 안 깊숙이 들어가 민감한 곳을 찌르면 내벽은 그의 것을 쥐어짜듯이 수축했다. 그때마다 전율에 밭은 숨이 단발적으로 흩어졌다.
죄책감에 젖어 있다, 쾌락에 희열하고, 고통에 울부짖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 그게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눈물까지도 모조리 핥아 제 안에 가둬 두고 싶었다.
“누나, 각인의 대가는 쉽게 치러지지 않아.”
고통과 쾌락 어딘가의 비음을 흘리는 휘연을 보며 도한은 입매를 비틀었다.
“끝내고 싶어?”
이미 정신도 몸도 눅눅해진 휘연은 그 목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한은 좁은 육벽을 벌리며 더 깊게 파고들어 왔다.
고통에 휘연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비음을 내질렀다.
“누나가 죽을 때나 끝낼 수 있을 거야.”
집착 어린 목소리에 휘연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그도 잠시, 클리토리스에 닿은 그의 손이 마찰열을 내며 살점을 문지르자 정신마저 잘게 떨렸다.
살점에, 고통에 가까운 압력을 쥐어짜 내는 탓에 휘연의 아래가 또 그의 것을 꽈악 조였다. 더 깊어진 그의 것이 아랫배에 가득 차자 다시금 숨이 차올랐다.
“하아, 흐윽……!”
고통에 의한 건지, 쾌락에 의한 건지 모를 염기 서린 목소리가 자꾸만 휘연의 잇새를 비집고 흘렀다.
그럴 때면 도한은 더 격렬하게 마찰을 빚었다.
퍽, 퍽, 퍽.
살이 치닫는 소리에 휘연의 허리가 더 격하게 휘어졌다.
“읏, 으읏, 아, 아!”
질 내부에 있는 제일 민감한 성감대에 자극이 닿자 전기가 일듯 찌릿한 오르가슴이 폭발했다.
“하아!”
그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내 흐릿했던 정신이 잠시 걷어지더니, 곧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절정을 맞은 희열에 육체는 바르르 엷게 떨렸다.
도한 역시 폭발하듯 덮쳐 온 오르가슴에 탁한 신음을 내쉬었다.
휘연은 점멸해 가는 정신을 겨우 붙들며 주위를 살폈다.
그때, 도한보다 눈에 들어온 건 베드 옆에 놓인 키였다.
그걸 보자마자 이성이 끊겼다.
이건 너무 무서웠다.
이렇게 계속 섹스만 당하는 건, 이렇게 섹스에 집착하는 도한을 만나는 건 휘연이 상상한 미래가 아니었다.
제가 만들어 낸 악마였지만, 휘연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있다가는 몸이 으스러져 죽을 것 같았다.
도한은 이미 제가 알고 있는 도한이 아니었다. 순수했던 도한은 죽고 절망과 분노, 원망이 뒤엉킨 잔인한 악마만 남아 있었다.
휘연은 도한을 세게 밀쳤다.
단단한 몸이 놀랐는지 뒤로 밀렸다.
휘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베드 옆에 있던 키를 손에 쥐고는 미친 듯이 달렸다.
발이 떨리고 손이 떨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앗!”
계단에서 발을 잘못 디뎌 바닥을 굴렀다. 화상을 입은 듯 화끈한 고통이 발목을 덮쳤다. 아파할 새가 없었다. 휘연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계단을 짚고 일어났다.
열쇠 뭉텅이가 찰그락거리는 금속 소리를 내며 저들끼리 부딪혔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휘연은 희미해져 가는 이성을 붙잡으며 키를 찾았다.
어둠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첫 번째 열쇠를 넣었다. 맞지 않았다.
두 번째 열쇠를 넣었다. 맞지 않았다.
“하아. 이러지 마, 제발. 흐흑…….”
눈물인지 물인지 모를 액체들이 바닥으로 뚝뚝 흘러 떨어졌다. 휘연의 심장의 핏기도 그렇게 떨어져 갔다.
“제발! 좀!”
이럴 때 왜 열쇠는 맞지 않을까.
어둠 속에서 당장이라도 저를 죽이러 도한이 올 것 같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제발, 좀! 맞으라고! 제발!”
몇 번째인지 모를 열쇠를 구멍에 넣자, 철컥 소리가 들렸다.
휘연의 눈이 커다래졌다. 나신인 건 상관없었다. 이 감금 상황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상태는 아무래도 좋았다.
휘연은 재빨리 문을 열었다. 급박하게 정원으로 달려 나가려는데 그녀의 시야가 순식간에 흔들렸다.
“꺄아아아읍읍읍!”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에 그녀의 입은 틀어막혔다.
휘연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눈에서는 뜨거운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목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세상 밖을 본 지 1초 만에 그녀는 도한에게 잡혔고 현관문은 싸늘하게 닫혔다.
그리고 살을 도려낼 기세의 음성이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미쳤어, 누나?”
목덜미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두려움에 휘연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렇게 날 버려 놓고, 또 버리고 싶은 거야?”
분노에 찬 음성이 무섭게 휘연을 휘감았다.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날카로운 손길은 저를 물고 놓지 않는 독사였다. 맹독 같은 그의 거친 움직임에 어둠 속으로 끌려갈 뿐이었다.
“아아! 도한아, 도한아!”
“씨발! 십 년을 기다리게 해 놓고, 또 도망가?”
손목이 너무 아파 애절하게 이름을 불러도 그는 여전히 분노로 들끓었다.
“미안해, 도한아. 나 너무 무서워서 그래. 내가 알던 너가 아니라서 나 너무 무서워.”
“무서워?”
일그러진 도한의 잇새로 냉소가 흘렀다.
“무섭다고. 그래! 무서워!”
그가 몸을 숙이자 침대 시트가 쓸려 위로 올라갔다.
휘연은 차라리 그가 자신을 채찍질하든 뺨을 때리든 발로 차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고작 며칠 이 어두운 방에 있는 게 무서웠어?”
“으읏, 아앗! 아!”
기어코 그는 다시 그녀의 질구를 손으로 거칠게 벌려 안을 데웠다. 이미 녹진하게 풀려 있어 뜨겁고 남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던 곳에서 다시 왈칵 액이 쏟아지자, 도한은 그곳을 찢어발기고 싶을 지경으로 화가 났다.
“나는 일주일, 한 달, 일 년, 아니 십 년.”
안이 허물어 부서지더라도, 다시는 자신을 잊을 수 없게, 감히 도망갈 생각을 할 수 없게 각인해야겠다는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나는 십 년을 그렇게 살았어. 이 어둠과 같은 인생을 무려 십 년이나 살았다고!”
“으읏, 아, 도한아, 제발!”
“닥쳐. 네 보지는 벌써 물을 토해 내면서 박아 달라고 사정하고 있네. 내가 잊지 못하게 박아 줄게. 네 몸이 내 몸을 잊지 못해서, 이 몸 한 번 더 맛보지 못하면 죽질 못하겠어서 죽을 때까지 날 찾게 만들어 주겠다고.”
“아아, 으윽!”
“하, 씨발. 신음을 이렇게 간드러지게 내면서 무서워?”
“흐읏, 아아!”
고문에 가까운 거친 손가락에 휘연은 쏟아지는 고통과 쾌락의 파도에 잠겨 버렸다.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버렸다. 질 내벽은 이상하게 꿈틀거렸다. 저 집착의 주인이 도한이란 걸 안 이상, 이 흥분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돈 때문이라면, 네가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 쓸 만큼 벌어 줄 자신 있어.”
“아앗, 읏!”
“남자가 고프다면, 내가 언제든지 이렇게 박아 줄 수 있다고.”
“으읏, 마, 말 그렇게, 하, 하지 말라고 했, 응, 잖아!”
“씨발, 널 위해 뭐든 해 줄 수 있다는 나를 왜 떠나!”
“하앗! 응, 읏!”
“내가 널 이렇게 사랑하는데. 네가 날 배신한 것까지 사랑하겠다는데!”
분노에 찬 움직임이 거세져 휘연의 내벽을 꿰뚫을 기세로 마찰이 빚어졌다. 휘연은 아랫배가 찢어질 듯 깊은 그의 성기에 온몸이 뒤틀렸다. 자궁까지 찢어발길 기세의 거칠고 잔인한 움직임에도 괴이하게 쾌감은 극에 달했다.
잔인한 포식자의 움직임은 계속 휘연을 인정사정없이 자극했다. 더 이상 입욕제의 잔재는 남아 있지 않았고, 염정의 쾌락들이 몸 안을 긁어 댔다.
“아윽! 핫! 하아! 읏! 윽!”
번개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새하얘져 갔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절정에 달하자 휘연의 가슴이 바르르 진동했다.
“하아, 씨발.”
그는 거친 목소리로 격분에 찬 신음과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움직임은 휘연의 몸을 뚫을 것처럼 깊게 박혔다.
“아아, 읏!”
“하아. 하아!”
두 사람이 동시에 절정에 이르렀다.
맑은 액체가 휘연의 허벅지 사이에서 둑이 터진 듯 줄줄 흘러나왔다.
절정에 이를 때 급하게 뺀 탓에 덕지덕지 묻은 하얀 액체는 휘연의 자태를 한층 야스럽게 만들었다.
도한은 그걸 보며 비소를 흘렸다.
씨발. 목을 긁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십 년의 세월이 응축된, 감히 그 무게를 상상할 수 없는 감정의 대폭발이었다.
휘연은 잠시 모든 걸 잊게 만들었던 쾌락에 몸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
도한은 포식자를 만나 두려움에 떠는 어린 양을 보는 느낌에 배덕과 죄책감을 느꼈다.
쓰러지듯 그는 그녀의 몸 위로 흘러내렸다.
그와 그녀의 체향, 땀과 열기, 입욕제의 수면을 돋우는 내음이 뒤섞이며 신경을 흐리게 만드는 몽롱함이 뭉근하게 피어올랐다.
도한은 휘연을 품에 안았다.
지난날의 일들로 그새 야윈 여린 체구가 품에 안기고도 남았다.
“……사랑해.”
“……흐흑, 흐흑.”
울다가 쓰러질 것 같은 마른 몸이 애절하게 울음을 토해 내자 도한의 마음도 저릿했다.
“사랑해, 누나.”
“왜 그랬어, 도한아. 나 무섭게, 왜 그랬어? 흐흑, 흐흐흑.”
“……널 사랑해서.”
그녀를 품에 안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널 사랑하는 마음이 날 독하게 버티게 만들어 줬는데.”
그녀의 몸을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도한의 손에 강한 힘이 실렸다.
“그게 날 괴물로 만들었어.”
도한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지 않았다.
우리 같이 공멸하자.
휘연의 귓가에 들린 마지막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