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인의 대가-10화 (10/13)

10장. 그의 이야기

“이 새끼야, 니네 엄마 데려오는 게 그렇게 어려워? 니네 엄마는 뭐 금칠을 해 놨다냐? 밖에 나오면 죽는대? 니네 엄마 데려오면 내가 돈 주겠다고 했는데 왜 말을 귓등으로 들어?”

“안 돼! 우리 엄마 못 만나요! 엄마 아프단 말이야!”

“이 새끼가 돌았나? 누가 감히 반말하래!”

퍽, 퍽, 퍽!

그날도 그렇게 맞았다.

도한의 엄마가 일하던 식당의 단골손님이던 그 깡패는 길에서 우연히 도한을 마주쳤다고 그렇게 팼다.

요지는 그것이었다.

식당에서 언제나 엄마를 더러운 눈길로 쳐다보던 그는 엄마를 밤에 보고 싶어 했다. 엄마는 거절했고, 그러면 아들인 나에게 치근덕거렸다. 나 역시 엄마를 그런 깡패에게 보낼 수 없어 싫다고 거절하면 그렇게 처맞곤 했다.

“우리 엄마한테 나쁜 짓 할 거잖아! 안 돼, 놔요!”

“허어~ 이 어린놈의 새끼가 나를 뭐로 보는 거야? 니네 집 사정 어려운 거 아니까 아저씨가 도와주겠단 거 아니야, 개자식아!”

철퍽!

그는 기어코 어린 도한을 비가 오는 바닥에 밀쳤다.

시골 동네라 차를 모는 사람도, 걸어 다니는 사람도 없었기에 도한은 그렇게 속절없이 그 문신을 한 사내에게 맞아야만 했다.

“억울해? 그럼 니네 엄마 좀 내 가게에 오라고 해, 당장!”

“그럴 수 없어요!”

도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 도한의 집안은 어려웠고, 엄마는 누가 봐도 곱다고 할 정도로 매우 아름다웠다. 때때로 남자들은 가난한 여인에게 돈을 주며 못된 짓을 한다는 걸, 도한은 어린 나이에도 알았다. 그들이 정확히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엄마가 그런 사내에게 끌려갔던 날이면 사색이 되어 돌아오곤 했으니까.

그래서 절대로 엄마를 만나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불한당들에게 순순히 꼬리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힘없고 가난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억울해도 맞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그 사내는 유독 미친 듯이 나를 팼다.

비가 내려 발길질하는 소리와 나의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아 제대로 힘을 실은 건지, 너무나 과격했다.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때였다.

“뭐야?”

발길질하던 사내가 흠칫 놀라더니 그대로 고개를 틀었다.

“어…….”

내리는 비에 나의 시야가 흐릿했다. 정신을 붙들고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하나의 인영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이 미친년이 눈을 어디다 뜨고 다니는 거야?!”

“어, 어…….”

사내의 윽박에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녀의 존재를 인지한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처럼 투명해졌다.

‘…….’

나라면 이 상황이 무서워 바로 도망갔을 텐데, 그 아이는 미동이 없었다.

“뭐야, 썩 안 꺼져?”

사내는 비에 흠뻑 젖은 그녀를 밀쳤다. 연약한 몸은 그대로 밀쳐져 ‘찰바닥’ 소리를 내며 꼬꾸라졌다.

그녀가 물웅덩이에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나의 마음까지 아려 왔다.

하나 그녀를 걱정할 틈도 없이 사내는 다시 나를 때렸다.

“뭘 걱정해? 네 걱정이나 해! 돈도 없는 주제에 고상하게 구는 거, 받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네 엄마한테 똑똑히 전해! 알아들어?”

퍽, 퍽, 퍽!

알았다고 할 수 없었다.

엄마는 그런 사내들이 무섭다고 했다. 그런 사내와 밤을 지내는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순 없는데, 맞는 건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 때문에 넘어진 여자아이가 신경 쓰였다.

비 때문에 흐린 시야 사이로 도한은 열심히 시선을 좇았으나 그새 그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도망가는 게 제일이겠지.’

나였어도 이런 무서운 상황에 도망갔을 테니 그녀가 사라진 게 억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휘말리지 않고 잘 사라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하고 있는데, 멀리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뭐야?!”

사내가 갑자기 발길질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렸다. 나도 그쪽을 보니 웬 아저씨와 아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 여자아이였다.

달려온 아저씨가 사내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자 사내의 얼굴이 굳더니 곧바로 튀었다. 아저씨도 그를 따라잡으려는 건지 뛰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

이런 건 예상에 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준다는 건 내 인생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왜 이러는 거지.’

게다가 눈앞의 여자아이는 떠나지도 않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먹거렸다.

돈이 없어 유치원을 다닐 수 없던 나는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동안 주변 동네 아이들의 얼굴을 익히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동네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못 보던 여자아이인데, 초면에 울먹거리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 여자아이는 울먹거리다 곧 슈퍼 안으로 사라졌다.

그게 차라리 익숙했다.

나를 버리고 사라지는 것.

많은 사람들이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괜한 기대를 주는 사람이 오히려 더 싫었다.

나는 묵묵히 빗속을 걸었다.

‘얼른 가서 남은 일 해야 되는데.’

빚 때문에 공부보다 일이 익숙했던 나는 맞고 나서도 일 생각뿐이었다.

울고 슬퍼하는 건 이미 잊은 지 오래다.

그런데, 그때였다.

탁, 탁, 탁, 탁, 탁, 탁.

빗속을 뛰는 발소리가 들렸다.

놀랍게도, 그 아이였다.

“우산 써. 비 맞잖아.”

그 아이는 내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투명한 우산에 후두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런 호의에 익숙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을 받았다가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아 경계심까지 들었다.

무시했다.

그럼 그 아이도 포기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얘!”

울컥,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듯 벅찬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잡았다.

그 아이는 내 앞으로 달려와 우산을 들이밀었다.

당황스러웠다.

그제야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제대로 보였다.

울먹이고 있지만 보석처럼 빛나는 예쁜 눈이.

그 눈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의문이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왜 나를 보며 울고 있을까. 내가 뭐라고. 날 언제 봤다고.

“감기 들어. 우산 꼭 써.”

한순간의 동정이겠지.

처음엔 불쌍하다며 마음 써 주다 결국 등진 사람을 한두 명 본 게 아니었다.

더 이상 그런 상처는 받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도 똑같을 것이라 생각하며 무시하고 돌아가려는데, 또다시 예상 못 한 소리가 들렸다.

“우산 써, 제발! 감기 걸려!”

지금까지 봤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 손에 우산을 쥐여 주려고 세게 붙잡았다. 순간 맞닿은 그녀의 손이 너무 차가워 놀랐다.

나 때문에 이렇게 비를 맞느라 추워진 건 아닐까 싶어 두려웠다.

차마 그런 우산을 받을 수 없었다.

애써 그녀를 등졌다. 그 상태로 그저 멍하니 걸었다.

*

나는 빗속을 걸으며 생각했다.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걸까 생각해도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겐 아버지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머리가 커 가면서 알 수 있었다.

일반적인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를 갖고 있다는 걸. 내게만 아버지가 없고, 그렇게 된 연유에는 차마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 얘기를 꺼내는 걸 꺼려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딱히 엄마에게 묻지 않았다.

다만, 왜 이렇게 집이 힘들어야 하는지는 늘 의문이었다.

엄마는 밤낮없이 일했고, 나도 그녀를 도와 일했다. 식당에서 일할 때면 늘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이 엄마에게 추근거리며 괴롭혔다. 때론 엄마는 울면서 아저씨에게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그런 날이면 엄마는 외식할 돈을 가지고 오곤 했다.

제아무리 외식을 할지라도 엄마의 우울한 얼굴을 보면 그건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그 문신을 한 깡패의 요구도 거부했다. 그리고 힘없는 나는 그렇게 맞았다.

‘조금 춥네.’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걷는 건 처음이었다.

간간이 주변의 아이들이 나를 비웃는 소리도 들렸다.

그런 비웃음은 익숙해서 차라리 괜찮았다. 다만 걱정되는 건, 이 피멍을 보고 엄마의 억장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 바퀴만 더 돌려고 했지만,

“에취!”

이대로 감기라도 걸리면 더 큰일이 될 테니 나는 그렇게 아파트로 돌아갔다.

아파트는 5층이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조금 울적해졌다.

‘그 여자애는 왜 날 보고 울었을까.’

보통의 사람들은 날 보고 비웃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나와 같은 처지인 것처럼 아파해 줬다.

낯설었다.

생각해 봤자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맛있는 냄새도 나네.’

계단에는 웬일인지 달짝지근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비에 맞은 채 돌아다닌 배는 허기지다고 꼬르륵거리며 난리였다.

얼른 가서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가까워진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누구지?’

모르는 인영이 계단에 앉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인가?’

어젯밤 아침에 이사 차가 오는 걸 보았다. 아마도 그런 거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며 긴장한 채로 그 인영을 바라보았다.

모습을 확인한 순간,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이 여자애는…….’

그 아이였다.

아까 보았던, 비를 맞던 아이.

날 보는 그 여자애의 눈망울은 여전히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붉었다.

“나 옆집에 이사 왔어.”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그렇게 말해 주었다.

“……여기 살아?”

나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계단에 앉아 있는 그녀와 시선이 얽혔다.

느낌이 이상했다.

“난 손휘연이야.”

그녀는 먼저 이름을 알려 주었다.

손휘연.

휘연.

입에 부드러운 바람이 머무는 느낌이 드는 포근한 이름이었다.

“이도한.”

그녀가 먼저 이름을 말해 준 덕에 용기가 생겼다.

“내 이름은 이도한이야.”

남들은 비웃는 내 존재에 원래 붙어 있던 이름을 그녀에겐 알려 주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가 너무 예뻐 괜히 부끄러워졌다. 나는 재빨리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녀가 다급하게 날 불렀다.

“저기!”

이런 적은 처음이라 망설여졌다. 반응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는데 그녀가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떡이었다.

“이거, 시루떡인데 집에 가져가. 우리 집에서 쏘는 거야.”

“……주는 거야?”

“응. 원래 이사 오면 잘 지내자는 의미에서 떡을 돌린대. 지금은 좀 식어 버렸지만 그래도 맛있을 거야.”

그런 선물은 처음이었다.

누군가 도한에게 무언가를 줄 때면, 무조건 조건을 걸었지만 이 여자애는 그러질 않았다.

떡을 내민 그녀의 눈동자는 순수하게 빛나고 있었다.

“줘.”

툭 던진 말에도 그녀는 또다시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가 꼭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아름다워 내 눈에 담기에 벅찼다. 눈부신 그 웃음에 눈이 멀 것 같아 난 황급히 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그대로 문을 닫아 버리려 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문 채 날 바라보는 그 아이의 존재가 느껴졌다.

‘고,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어떤 말을 건네야 제일 마음을 잘 표현하는 건지 알기 어려웠다. 머뭇거리며 시간만 축내다 나는 결국 한 줌의 용기를 끄집어냈다.

“고마워.”

처음 뱉어 보는 말에 입안이 간질거렸다. 그런 말조차 어렵게 꺼내는 나를 보고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걱정이 들어 그녀의 얼굴을 흘깃 본 순간.

‘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너무나 맑게 웃어 주고 있었다.

진창에 핀 한 송이의 꽃처럼.

그렇게 그녀는 내 세상이 되었다.

*

시간은 흘렀다.

나보다 나이가 많던 그녀는 한참 큰 어른처럼 언제나 나를 챙겨 주었다. 우주가 궁금해서 물어보면 우주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음악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면 또 관련 책을 가져와서 읽어 주었다. 그림 역사를 알고 싶다고 하면 한가득 책을 들고 와 읽어 주고 세계사가 궁금하다 하면 막힘없이 술술술 말해 주었다.

그녀는 내 스승이고, 친구이고, 세상이고, 우주였다.

그녀를 통해 삶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고 기쁨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옆집 누나의 의미를 넘는 존재였다.

말갛게 새하얀 얼굴, 앳된 표정, 따뜻한 마음씨.

모든 것 하나하나 사랑스럽고 잊지 못할 만큼 눈부신 그녀였다.

세상을 알기도 전에 마음을 닫아 버렸던 나는 그렇게 그녀를 만나며 다시 밝게 피어났다.

좋아했고, 사랑했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스런 여자였으니까.

아이의 티를 벗어나 소녀가 돼 갈수록 그녀는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그런 휘연을 사랑했다. 휘연 역시 나를 사랑했다.

진창에서 각인된 서로는 서로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신이 있다면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커 갈수록, 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그녀는 나의 세상이고 우주였다.

마음에 넘쳐흐르는 바다였고, 마음을 이루는 대지였다.

사랑하고 사랑받았다.

순수하게 웃는 휘연, 긴장해서 조마조마한 휘연, 따사로운 햇살에 나른해진 휘연, 비 오는 날 창밖을 내다보며 젖은 풍경을 감상하는 휘연.

그녀의 모든 모습은 또다시 마음에 깊게 새겨져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그녀와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땐 세상을 가진 것처럼 기뻤다.

그러나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됐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렸을 때와는 다르다는 것, 나를 향한 동급생, 선배들의 과한 관심이 그녀에겐 독이란 걸 알아 버렸다. 나는 그들의 관심을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그녀는 그들의 질투에 괴로워해야 했다.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데, 나란 존재가 그녀의 가슴에 생채기를 낸다는 걸 깨닫자 지독하게 괴로웠다. 그럴수록 더 치열하게 그녀를 사랑했다.

항상 시선은 그녀를 향해 있었고, 마음은 그녀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일인지 또 밥을 안 먹고 있을 때면, 나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매점에서 점심을 사 들고 가 그녀를 찾았다.

햇살이 쏟아지는 맑은 날, 아이들의 소란스런 웃음소리가 자욱한 운동장을 등지고 쓸쓸히 앉아 있는 널 보았을 때 내 마음이 찢어지던 걸, 너는 알까.

너를 찾으면, 일부러 목소리를 더 낮게 깔아 보았다.

“손휘연.”

그러면 너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럴 때면 너의 얼굴에 나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머리가 하얘졌다.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예쁘게도 담긴 눈, 코, 입이 심장에 닿아 떨리게 만들었다.

“또 밥 안 먹지.”

나 때문에 밥을 먹지 못하는 너란 걸 알아서, 말은 그렇게 툭 튀어나왔다.

그녀의 손목을 잡으면, 내 손에 잡히고도 남는 그 가녀림에 새삼 놀라곤 했다. 그럼에도 손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갗에 심장이 미친 듯이 달아오르기도 했다.

인적 드문 벤치에 함께 앉으면, 분명 밥을 먹여 주려고 한 건데도 입을 맞추고 싶었다.

푸른 잎 사이로 영그는 햇살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져 부드러운 피부가 매끄럽게 빛날 때면, 당장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어 내 안에 가두고 싶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입을 맞춰 버릴 것 같아 일부러 그녀의 얼굴을 외면하곤 간식을 꺼냈다.

그녀가 직접 먹을 수도 있겠지만, 내 욕심은 그걸 허락하지 못했다.

직접 손으로 꺼내 먹여 주고 싶었다. 너는 그러면 꽃잎 같은 입술로 간식을 예쁘게도 받아먹었다. 어쩌다 네 입술이 내 손끝에 닿을 때면, 마치 내 손가락이 먹히는 것 같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입가에 크림이 묻으면 그게 그렇게 귀여워 난 미칠 것 같았다.

차오르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 줄 때, 손에 닿는 네 입술에 가슴이 얼마나 불타올랐는지 모른다.

사람 입술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걸까.

당장이라도 감쳐물어 내 흔적을 남기고 싶을 정도로 너는 너무 사랑스러웠다.

말없이 나를 응시하는, 속눈썹이 빼곡한 여린 동공을 볼 때면 열사병에 걸린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졌다.

“잘 먹네, 예쁘게.”

진심이 뭉근하게 입 밖으로 피어 나올 땐, 내 속마음과 다르게 무심하게 툭 튀어나오는 어조가 못내 아쉬웠다.

너를 볼 때면 이리도 어지러우니 말투가 늘 그 모양이었다.

그녀와의 하루하루는 열사병에 걸린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다가도, 어쩔 땐 달콤한 사탕을 문 것처럼 달콤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 둘 사이 굳건한 마음은 결국 결혼이라는 종착지로 향하게 될 거란 걸 우리는 암묵적으로 알았다.

그게 순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휘연 너와의 미래를 꿈꾸며 앞날을 열심히 준비했다.

그래서 꿈을 가졌고, 그래서 공부했다.

지독한 이 가난을 탈출하고자, 너에게 꽃길을 만들어 주고자.

그 믿음은 굳건했다.

내 인생에 아버지란 개새끼만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

평범한 하루였다.

아침 일찍 시작된 학교는 해가 떨어지기 전 마쳤다.

휘연은 방과 후 수업이 있어 야자가 끝난 후에나 만날 수 있었고, 달리 공부할 곳이 없던 나는 그날도 집으로 향했다.

걸어서 30분은 걸리는 집은, 그녀와 하교할 땐 가깝게 느껴졌지만 혼자 하교할 때면 천리 길처럼 느껴졌다.

그날은 유독 빨리 휘연이 보고 싶었다.

그래도 정해진 공부를 끝내야지 그녀를 볼 수 있으니,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집 근처에 처음 보는 세단 두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땐, 다른 집 방문객이려니 생각했다.

그때, 세단에서 양복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런데 그들이 내가 늘 들어가는 입구로 걸음을 옮기자, 그들의 목적지를 모르는데도 우리 집으로 향한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문을 여니 집 안에는 족히 열 명의 사내들이 있었다.

엄마는 무슨 일인지 엎드린 채 그들에게 빌고 있었다.

“엄마……?”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엄마, 무슨 일이야?”

그러자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나를 저지했다. 나의 눈매는 매섭게 올라갔다.

“뭐야, 당신들?”

나의 목소리는 거칠었고 엄마는 목이 쉬어라 통곡했다.

“지금 뭐냐고 묻고 있잖아요!”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나의 팔을 움켜쥐었다.

순식간이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은 태연했고, 기계처럼 말했다.

“이도한 님을 데려오라는 분부를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뭐?”

내가 팔에 힘을 주자 그들은 더 세게 내 팔을 으스러뜨렸다.

“도한아! 가면 안 돼! 어흑, 당신들, 당신들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도한이는 내 전부야. 이미 내 모든 걸 빼앗아 갔잖아. 도한이만큼은 안 돼. 하라는 대로 쥐 죽은 듯이 살고 있었는데 대체 왜? 왜!”

상황을 이해하기에 내가 아는 건 너무 없었다.

다만,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마의 팔을 거칠게 휘어잡자 내 목소리는 더 거칠어졌다.

“뭐 하는 짓이야? 당장 못 놔?”

절박한 외침에도 그들은 태연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당장 놓으라고! 엄마? 엄마!”

“도한아, 안 돼. 도한아, 도한아……!”

나는 속절없이 사내들에게 끌려갔고 엄마는 그들에게 저지당했다.

그녀의 숨이 끊어질 듯 애절한 울음소리,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의 무전 소리, 둔탁하게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

매섭게 몰아붙이는 그들의 움직임에 나의 시야가 점점 뭉개졌다.

그때 그들은 내 코로 무언가를 들이밀었고, 그 내음이 시큼했던 것만이 기억난다.

어느 순간 뇌는 나른하게 풀어져 버렸다.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공간은 공감각을 자각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암순응 후 공간의 윤곽이 드러났고, 처음 선명하게 눈에 잡힌 건 벽난로였다.

타닥타닥, 바짝 마른 나무 타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불에 탄 삼나무 냄새도 공간 가득 은은하게 풍겼다.

이글거리는 붉은 불꽃은 이 공간이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 경고에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내 정신이 알싸해졌다.

다시 공간을 훑어보니 한 남자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뒤로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다섯이 서 있었다.

내가 그들을 발견한 걸 눈치챘는지 테이블에 앉은 그는 나를 보더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잘 컸네.”

무심하게 흘러나온 짧은 한마디.

하나 그 짧은 한마디에 나의 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묵직한 낮은 바리톤의 음성은 어딘가 불안정했고 광기가 스며 있었다.

당신은 누군지, 여긴 어딘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어볼 게 산더미지만 그의 고압적인 존재감에 내 입술은 쉽게 움직이질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 것이었다.

시야에 들어온 남자의 얼굴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 얼굴은 내가 살아생전 봤던 얼굴 중 단연코 가장 매혹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교결했다.

조각 같은 콧날과 강인한 턱선, 사람을 제압하는 낮은 목소리.

하나, 얼굴을 주시할수록 이유 모를 불길한 기시감이 피어올랐다.

“외모는 마음에 들게 잘 컸어. 그 여자도 적당히 닮았고.”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로 걸어왔다.

저벅, 저벅.

소리를 흡수하는 카펫 위로 짓누를 듯 무거운 중압감으로 다가와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나는 내 허락 없이 얼굴을 만진 그의 손을 탁 밀쳐 냈다.

“당신, 누구야.”

객기였다.

그러자 남자는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곧 입가를 비틀었다.

“영락없군, 내 아들이.”

불손하게 던져진 그 발언에 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가 위험하게 공간을 메웠다.

“그 여자가 아무 말도 안 하든?”

무례한 발언이 내 귀에 꽂혔다.

‘그 여자’라는 주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곧바로 깨달았으니까.

처음 보는 내게 아들이라느니, 어머니께 그 여자라느니 불쾌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이상한 기시감의 원천을 발견했다.

그의 눈.

짙은 냉소가 박힌 눈.

그것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나의 것을 연상시켰다.

“내가 아들들하고 요즘 사이가 안 좋거든. 이것들이 기껏 키워 놨더니 지 엄마랑 붙어먹어서는 단체로 내 지분을 가져가려고 하는 게 도저히 용납이 안 돼서 엿 좀 먹이려고 하는데.”

그의 음정은 불안정했다. 그의 정신 상태는 산산조각 난 위스키 유리 파편 같았다.

목소리는 알코올로 눅눅히 젖었고, 광기는 위험하게 피어올랐다.

“지들에게 돌아갈 지분이 없다고 하면 얼마나 재밌는 표정을 지을지, 그게 보고 싶어져서 말이야.”

독한 음성이 나의 귀를 사납게 긁어 댔다.

그 남자가 낄낄 웃더니 내가 사색이 되자 곧 칼로 잘라내듯 웃음을 끊었다.

우르르르, 쾅쾅.

숨 막히는 정적 사이로 요란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서 다시 주워 왔어, 아들.”

잔인한 진실이 도한의 심장에 내리꽂혔다.

*

아무도 찾지 못할 만큼 초라한 깡시골에 살던 내가, 최저생계비를 받으며 근근이 살아가던 내가 금왕 그룹의 핏줄이었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엄마가 금왕 그룹의 가정부 중 한 명이었으며, 원치 않는 임신으로 쫓겨나 날 낳았다는 사실에 억장이 무너졌다.

그렇게 어렵게 살아가던 순간에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다가 자신의 복수를 위해 마음대로 날 납치하고 감금해 그의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그가 혐오스러웠다.

날 가혹하게 몰아붙이지만 그는 ‘아버지’라는 미명하에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원치 않은 왕관을 강제로 씌우려 했다.

그는 미친 사람이었고 짐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피해망상은 과했고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부를 세상 사람들이 갈취하려 한다는 압박에 사로잡혀 있어, 자신의 법적 가족도 믿지 못했다. 혼외자식인 날 이용해 정부인에게서 낳은 아들들을 도발하려고 했지만, 결국 속내는 광기를 내게 푸는 것이었다.

고통스러웠다.

그는 후계자 공부를 시키며 날 미치게 만들었다.

실제로 내가 그의 후계자가 되길 원치도 않으면서 친아들들을 도발하라고 끝까지 몰아붙였다.

괴로웠다.

의미 없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내 정신도 피폐해졌다. 싸이코패스와 다름없는 금 회장은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후계자 공부를 핑계로 날 찾아와 죽도록 팼다.

그럴수록 휘연이 보고 싶었다.

그녀와의 평범한 일상이 그리웠다.

사라진 나를 떠올리며 괴로워할 그녀를 생각하면, 나는 지옥에 처박힌 듯 괴로웠다.

휘연을 보고 싶어 금 회장이 강행하는 것들을 거부할 때면 그의 주먹이 내 코로 내리꽂혔다. 처참히 바닥에 쓰러진 나의 멱살을 잡고 또 주먹으로 내리쳤다. 주변 사람들은 그걸 바라보기만 했다.

씨발. 욕이 절로 나왔다.

혼외자라고 쓰레기 버리듯 시골에 처박아 둘 땐 언제고, 친아들들한테 복수하겠다고 구차하게 뒤져서 가져와? 그래 놓고선 이렇게 주먹질이나 하면서 법적 가족에게 성공적으로 복수하길 원하다니.

나는 아버지란 작자에게 저주란 저주는 모두 퍼부었다.

눈가를 덮은 연한 살점이 발개질 정도로 눈물을 참고 그를 노려보면, 금 회장은 증오에 찬 눈으로 다시 내게 주먹을 날렸다.

처참히 발로 짓밟혔다.

매질을 끝나지 않았고, 그렇게 매일같이 피를 흘렸다.

원망과 분노가 뒤엉켜 시간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는 격분이 되었다. 그럴수록 미친 듯이 휘연이 보고 싶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을 때, 무작정 탈출했다.

그리고 그녀를 보았을 땐, 나는 그대로 죽어도 좋을 정도로 황홀했다.

결심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금 회장의 비위를 맞춰 성공하고 말겠다고.

*

나의 탈출 사건 이후 금 회장은 태도를 바꾸었다. 스트레스를 풀어 줄 먹잇감이 사라지는 게 두려웠는지 그는 나의 요구 사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원하는 대로 후계자 공부를 하는 대신 휘연과 같은 동네에 살겠다고 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그와의 문제를 해결하면 순진하게도 난 그녀와의 미래는 무탈할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사이는 문제없는 줄 알았다.

그렇게 서로에게 영원을 약속하리라 믿었다.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땐, 너는 첫날밤을 허락했다.

벅찬 순간에 나는 네 몸에 내가 뿌리내리도록 치열하게 사랑했다.

너의 몸에 나를 각인하고, 나의 몸에 너를 각인하고 싶었다.

정신이 아득하고 몸이 얼얼해졌지만, 내 목숨을 빼앗긴다 할지라도 기꺼이 감내할 쾌락이었다.

그렇게 몸에 깊게, 네가 새겨졌다.

내 몸과 내 인생에.

그렇게 너와의 백년해로를 이뤄 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랬는데, 그런 네가 날 배신했다.

널 위해 그 모든 폭력과 부당함을 감내하고 악착같이 성공하리라 결심했던 나를, 너는 떠났다.

*

아무것도 원치 않던 내가 처음으로 바라고 원하고 갈망했던 존재, 손휘연.

그러나 넌 날 버렸다.

태생은 진창일지라도 우리 함께라면 이겨 낼 수 있으리라 희망을 가지며 악착같이 노력했던 나를, 우리의 사랑을 너는 무참하게 꺾어 버렸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말해 주지도 않은 채 홀연히 사라져 버린 너.

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아 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렇다면 왜 내게 그런 밤을 허락하고 떠났는지 묻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나는 매일 밤 악몽을 꾸고, 네 생각에 탈진하도록 울기도 했다.

네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각인된 나의 정신은 이상해졌다.

급기야는 아버지에게까지 분노를 참지 못했다.

더 이상 후계자 수업을 들으면서 금 회장의 비위를 맞춰 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네가 없으니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

짜악!

그의 손길에 나의 고개가 무참히 돌아갔다.

“너 죽고 싶어?”

후계자 수업을 핑계로 날 죽일 듯 패던 그의 눈에 광기가 타올랐다.

예전이었다면 참았겠지만, 나 역시 광기를 참지 못할 만큼 미쳐 있었다.

“네, 죽고 싶습니다.”

그렇게 도발하면 금 회장은 꼭지가 돌아 욕설을 퍼부었다.

“먹여 주고 키워 줬더니, 너조차 날 엿 먹여?”

날 후계자로 키우겠다는 걸 정부인에게서 낳은 아들들이 알게 된 뒤, 그들은 금 회장에게 정신과 치료를 제안했다. 그 말에 그는 가족이 재산을 앗아 가려 한다며 폭발적인 히스테리를 부렸다.

이전까지는 어떻게든 일말의 지분이라도 상속받고자 어떤 모욕이든 감내했지만, 네가 사라진 이상 내겐 금 회장의 만행을 참을 이유가 없었다. 나 역시 미친개처럼 그를 물어뜯었다.

“……먹여 주고 키워 줘?”

“이게 미쳤나. 어따 대고 반말-”

“아버지.”

입에 담기 힘든 역겨운 단어를 짓씹듯 끊어 뱉었다.

“어차피 저한테 재산 물려줄 생각 없었잖습니까. 그저 당신의 친아들들을 빡치게 할 유인이 필요했던 거 아닙니까? 아니, 어쩌면 당신이 받는 스트레스를 직원들한테 풀었다가는 기사에 날까 봐 유출 걱정 없는 나를 데려온 거 아닌가?”

지난 몇 년간 그의 폭력의 배설 상대가 되면서 쌓인 분노가 필터 없이 그대로 드러나 버렸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때려 죽이든, 말려 죽이든. 살고 싶지 않으니까.”

너를 위해 참았던 과거가 부질없었다는 사실이, 대한민국 경제를 호령하는 재벌 총수 앞에서도 객기 어린 말이 서슴없이 나오게 만들었다.

“……미친 새끼.”

금 회장은 더 이상 호락호락하지 않은 나를 경멸했다.

정신병 걸린 그 작자가 내게 정신병 걸렸다며, 나를 그렇게 버렸다.

금 회장의 집념은 대단했다.

그는 내가 절대 재기할 수 없게 나의 모든 걸 앗아 갔다.

그래도 그의 피가 섞인 존재일 텐데, 그는 내게서 모든 걸 앗아 갔다.

너무나 경멸스러워 난 되찾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모든 걸 버렸다.

내가 이뤄 낸 것들, 내게 주어진 것들을 버렸다.

그렇게 내 이름을 버렸다. 지긋지긋한 악몽만 떠오르게 하는 한국을 떠났다.

*

너의 의미는 내게 거대해서 네가 떠난 뒤로도 난 매일 너를 생각하며 원망하고 분노하고 슬퍼했다. 해가 지날수록 너를 향한 원망은 내 삶을 갈아먹으면서도 결국 너의 배신마저 사랑으로 품을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난 생각을 바꿨다.

만약 나의 가난 때문에 네가 떠난 거라면, 그래서 이렇게 잔혹하게 군 것이라면 네가 그토록 원하는 그 돈을 준비해 어떻게든 널 찾아야겠다는 오기가 발화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가지고 뒤돌아보았을 땐 난 잃은 게 너무 많았다.

난 가진 게 없었고, 금 회장의 노리개 역할을 하느라 허비했던 시간 동안 엄마의 몸은 병들어 있었다.

비루한 인생을 끌고 가기 위해 나는 또다시 밤낮없이 일해야만 했다.

추잡하고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치열하게 살았다.

그렇게 모은 자금으로 난 투자를 했다.

금 회장 밑에서 강제로 했던 후계자 공부가 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동안 배운 기업과 투자에 대한 정보를 이용했다.

몇 번이고 실패하다 단 한 번, 내게 기회가 왔다.

그 수익금으로 다시 투자를 하면서 나는 생각보다 큰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 돈으로 학업을 이어 나가며 만난 사람들과 더 큰 투자를 하게 되면서 난 어느새 투자의 귀재가 되어 있었다.

하나, 돈을 가지게 되었을 땐 어머니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녀의 지병이 급속하게 악화되어 어떤 치료도 의미가 없었고, 그렇게 어머니는 내 곁을 떠났다.

내 삶의 이유가 되어 줬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단 걸 자각한 순간, 널 찾겠다고 다짐했던 의지조차 사라져 버렸다.

나는 기계처럼 일에 파묻혔고, 사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9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나의 회사는 점점 커졌다.

널 찾기 위해 그렇게 회사를 불리던 나였지만 널 찾을 의지는 어느새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너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질 않았다.

그러던 나는 딱 한 번, 미국 내 투자계 재벌 모임에 초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것이 터닝포인트였다.

*

실리콘밸리의 유망한 첨단 기업 대표들의 모임에 초대되었을 때, 나는 사람들이 저택의 그림에 대해 얘기하는 걸 발견했다. 그림 하나에 수억을 쏟아부어 소유하는 걸 자랑하는 문화가 내겐 낯설었다. 더욱이 유명한 큐레이터가 선별한 그림을 소장한 것 따위를 기껍게 생각하는 게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일종의 스포츠처럼 예술 경매를 즐겼다. 찰나의 순간에 이뤄지는 미묘한 경쟁을 즐긴 것이다. 본래부터 여유로웠던 그들과 달리 악착같이 살아 정상을 오른 내게 그런 자랑을 듣는 건 고역이었다.

특히 한국계 미국인이었던 SJ기업 대표는 같은 한국계인 내게 유독 친밀하게 굴며 그의 컬렉션을 자랑했다.

“이 그림, 유명한 큐레이터 출신 경매사로부터 매입한 것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당시 경매사의 설명이 아주 탁월해서 예상가보다 높게 구매했지만, 마음에 듭니다.”

난 관심이 없는데 그 사람은 계속 내게 그림에 대해 구구절절 말했다.

“경매가 끝난 후 경매사에게 관심이 생겨서 물어봤지요. 어디서 그렇게 공부를 했냐고.”

“아, 그러셨군요.”

의미 없는 대화를 끝내고 싶다는 어투로 말했지만 그는 못 알아들은 건지 집요하게 대화했다.

“큐레이터 공부를 할 때, 선배한테서 많이 배웠다고 하던데, 그 선배란 양반은 지금도 현역 큐레이터라고 하더군요. 에던 씨도 예술에 관심이 있으면 그 큐레이터 전시회 한번 가 보시죠.”

“시간이 나면 한번 그래 보겠습니다. 추천 감사드립니다.”

“아마 후회 없을 겁니다. 머리가 잘 안 돌아갈 때 그런 데 다녀오면 잘 돌아가니까요.”

“그런 여유를 즐길 생각은 못 했는데, 한번 그래 보아야겠습니다.”

“에던 씨도 그 경매사가 그렇게 칭찬하던 큐레이터 얘기를 들으면 직접 만나러 전시회를 찾아가고픈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관심 없는 분야에 계속 얘기를 해 대는 탓에, 나는 대화를 끊어 낼 요량으로 질문을 하나 생각해 냈다.

그 경매사의 이름.

그런 것까지는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말문이 막히면 더 이상의 의미 없는 대화는 이뤄지지 않으리란 계산하에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큐레이터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아, 이름.”

그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지 미간을 구기더니 한참을 머뭇거렸다. 나는 자리를 옮길 생각으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손……씨였던 것 같은데.”

“……!”

손씨.

첫사랑과 같은 성씨라는 이유만으로 느릿하던 나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자리를 옮기려던 나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손씨였던 건 기억이 나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요. 꽤 흔하지는 않은 이름이었는데 말입니다.”

그 순간 나는 미친 건지, 퍼뜩 네 이름을 흘리고 말았다.

“혹시 큐레이터 이름이 손휘연이었습니까?”

네가 어떻게 사는지, 뭘 하고 사는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던 나였는데도, 말도 안 되는 질문인 걸 알면서도 그런 질문이 나왔다.

그런데, 그 결과는…….

“맞습니다! 손휘연 큐레이터였죠! 에던 씨도 알고 있었습니까?”

영영 기억의 심연에 묻어 있을 줄 알았던 너를 발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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