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인의 대가-6화 (6/13)

6장. 위험한

심연에 깊게 박히는 낮은 목소리.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휘연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에던, 그다.

몸속에 흐르던 포도주의 알코올을 증발시킬 정도로 중압적인 목소리에 몸은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만약, 이 저택 안에서 에던 님을 만나게 된다면, 얼굴을 곧바로 숙여 주십시오.’

비서의 말이 머리에 스치자 휘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이라도 계단을 내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때, 남자의 발소리가 귀를 타고 흘렀다.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계단에 이는 진동이 커질수록 휘연의 심장도 압박당하듯 옥죄어졌다.

저벅, 저벅, 저벅.

일정한 무게에 일정한 속도로 내딛는 그의 발걸음이 계속 이어지더니 곧 멈췄다.

휘연의 바로 앞에서.

‘이 무슨…….’

시각이 차단되어 예민해진 후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첫사랑을 보면서, 사람을 이끄는 건 눈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남자는 그 생각을 철저하게 부수고 있었다. 그의 체향은 당연하다는 듯 휘연을 사로잡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의 체향에 끌리고 있다는 배덕이 휘연의 마음에 균열을 만들었다.

“계약에 철저하다고 들었는데.”

눅눅히 젖은 낮은 목소리는 휘연의 귀를 관통해 맴돌았다.

사람 목소리가 이럴 수 있을까.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심장에 맺혀 울렸다.

“죄송합니다.”

가슴에서부터 끌어 올린 사죄였다. 미쳤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휘연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고요한 밤의 적막이 새삼 무섭게 다가왔다.

“역시 너한테는 쉬운가 봐?”

초면부터 반말로 내리꽂히는 그의 차가운 음성은 잔인한 악마 같았다.

“약속 따위 네 마음대로 갖다 버리는 거.”

뇌쇄적이고 차가운 음성이 휘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계약을 어겼으니 그의 태도가 싸늘한 건 당연한 것이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휘연 앞에 마주한 남자는 마치 휘연의 모든 과거에 대해 비난하듯 냉정했다.

한 번의 잘못으로 그렇게까지 질타받을 일인가 생각다가도 분명 작업 전에 합의된 사안이었기에 그녀는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변명은 화를 부를 뿐이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라. 그래, 우리 아직 시간이 많지.”

“프로젝트는 철저하게 완수하겠습니다.”

“내려가.”

남자는 더 말을 줄인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적막이 흐르고 나서야 휘연은 숨을 터뜨렸다.

“하아.”

그와 동시에 그녀의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계단에 주저앉았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그 어떤 정보도 하나도 맞지 않았다.

그는 추남도, 은둔형 외톨이도 아니었다.

목소리의 위압과 숨결만으로도 느껴졌다.

그는, 위험한 남자라는 걸.

어쩌면 얼굴을 보지 말라는 건, 그의 냉기 어린 얼굴에 공포로 질식할까 봐 비서가 건넨 배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그 어떤 남자보다 아름다울 것 같아.’

분명 위험한데, 필히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가…….

정말이지 위험하게 느껴졌다.

*

또 마주치지 않을까 싶었던 그는 한동안 저택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사이에 휘연은 인터넷에서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고자 했지만 헛수고였다.

에던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자 힘이 빠졌다.

마치 사라진 도한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어 느꼈던 무력감이 덮쳐 왔다. 그 무력감이 소름 끼치게 혐오스러워, 그 감정을 없애고자 독한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다시 일하고, 또 술을 찾고 또다시 일을 하고자 발악하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결국 마음을 다잡지 못한 그녀는 미술도감을 덮었다.

이 집에 온 지도 벌써 2주가 다 돼 간다.

곧 기획안을 제출하여 결재만 받으면 일은 끝나 갈 것이다. 끝이라 생각하자 마음이 저릿했다.

‘역시 너한테는 쉬운가 봐?’

‘약속 따위 네 맘대로 갖다 버리는 거.’

휘연이 잘못한 게 맞지만 그 이상의 분노에 차 있는 것처럼 보였던 에던.

자꾸 머릿속에 그의 말이 맴돌았다.

한없이 차갑고 싸늘하지만 말의 저변 어딘가는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뜨거웠다.

오랜 세월 묵혀 두었지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깊은 분노가 스며든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에 휘연은, 마치 저가 오래전부터 그에게 죄를 지은 것처럼 죄책감이 밀려왔다.

계약 내용을 어겼으니 죄책감이 드는 건 당연한 것이지만.

자꾸 도한과 얽힌 과거의 죄책감까지 들어 숨 쉬기가 괴로웠다.

휘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넓은 집에 혼자 있으니까 정신이 이상해지는 거야.’

그녀는 손에 꽉 들어차는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비서에게 문자를 보냈다.

[기획안이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브리핑을 하고 싶습니다.]

새삼 생각해 보니 너무 늦은 시간에 업무로 연락했나 싶어 살짝 후회되었지만 이미 문자는 제 손을 떠났다.

배낭을 메고 복도를 걸었다. 집 안의 불을 끄고 휴대폰 플래시도 켰다. 칠흑 같은 어둠을 휴대폰 플래시에 의존해 걸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방 키로 문을 닫으려는 순간, 정원 수풀에서 퍼스슥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동공이 커진 휘연이 채 인지하기도 전에 검은 물체가 발을 맹렬히 긁고 지나갔다.

“꺄아!”

이야옹~

놀라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은 휘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검은 물체가 정원의 꽃밭으로 사라졌다.

“하. 내가 미쳐.”

욕지거리가 나오는 걸 참느라 휘연의 인상이 구겨졌다.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는데 그 검은 고양이가 결국 휘연을 폭발시켰다.

‘하, 안 되겠다. 한 대 피우고 가야지.’

매캐한 연기로 속을 중화시키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재킷에선 검은 돌라이터를, 뒷주머니에선 담뱃갑을 꺼냈다. 붉은 입술 사이에 담배를 넣었다.

타닥, 타닥, 치익.

고운 손가락이 까끌까끌한 돌라이터를 문지르자, 화르륵 불꽃이 일었다.

그녀는 담배 끝을 불에 태웠다.

숨을 들이쉬자 매캐한 담배 연기가 깊숙이 폐부를 찌른다.

“후우.”

그녀의 폐부 속 어둠이 스며든 연기가 나온다. 휘연은 정원까지 걸어가며 몇 번이고 담배를 빨아 마셨다.

정원을 나서기 직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저택을 뒤돌아보았다. 아무리 봐도 주변과는 매치가 안 되는 집이었다. 오로지 휘연을 위해 준비해 둔 것만 같은 디자인의 집.

몇 번을 봐도 이상하다.

‘뭐, 취향이 겹치니까 날 고용한 거겠지.’

도톰한 입술로 담배를 짓누르며 잘근 씹었다. 필터가 토독토독 터지는 느낌이 꽤 짜릿했다.

검게 타들어 가 재가 된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탁탁, 재를 털었다.

그 순간.

인기척을 느껴 뒤돌아보기도 전에 담배는 그녀의 손을 벗어나 있었고, 휘연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거 허락한 적 없는데.”

목덜미에 닿은 그 음성에 휘연의 머리가 하얘졌다.

에던.

에던이다.

이 대저택의 정원에서 감히 담배를 피운 걸 그 주인에게 들켜 버렸다.

휘연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두 눈 역시 질끈 감았다.

그의 얼굴을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보안 계약이라는 비서의 말을 떠올리며.

그녀의 손을 벗어난 담배의 열기가 어느새 얼굴 바로 앞에서 느껴졌다. 경련하는 속눈썹 위로 매캐한 연기가 내려앉는다.

“……아.”

휘연이 숨을 토해 냈다.

에던, 그가 휘연이 물었던 담배를 다시 물고 있다.

마치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무는 듯 배덕했다.

“달긴 하네.”

그의 목소리에 휘연의 심장이 짧게 진동했다.

몸을 훑는 저음에 그녀는 마치 발가벗겨진 것 같았다.

처음이었다.

복종해야 할 것만 같은 목소리도, 그에게 복종하는 자신도.

“여전하지, 너.”

“…….”

그의 손짓에 그녀의 턱이 들렸다.

그의 말이 중의적이라 해석하는 휘연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달다는 게 여전하다는 건지, 혹은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게 여전하다는 건지…….

“오늘은 그냥 못 넘어가겠는데.”

“죄송합니다, 대표님.”

얼굴도 모르는 남자한테 자꾸 잘못만 들킨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벌써 두 번째니 벌을 주고 싶은데.”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시정하겠습니다.”

“그 입이 문제야. 죄송하다고 하는데, 늘 나를 화나게 만들어.”

“…….”

“벌써 두 번째인데 내가 왜 널 봐줘야 하지?”

비서는 계약을 어겼을 시에는 에던의 권한에 따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했다. 그 말뜻이 이해 갔다.

“잘라 버리고 싶네.”

“…….”

섬뜩한 말에 눈썹이 움찔거렸다.

“무, 무슨 말씀인가요, 대표님.”

“그 입술, 잘라 버리고 싶다고.”

“……!”

진심인 것처럼 들끓는 목소리에 휘연의 입안이 바싹 말랐다.

“네 계약 어긴 입술, 내가 알아서 처분하려 하는데, 동의해?”

“……네?”

계약을 어긴 나에게 징계를 내리는 것도 아니고, 내 입술이라니?

휘연은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눈을 뜰 뻔했다.

“자꾸 약속 어기는 그 입술에 확실하게 각인시키려고.”

“대표님? 우선 대화를…….”

“벌려.”

“네?”

당황한 휘연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그가 다시 턱을 휘어잡았다.

순식간에 휘연의 온몸에 핏기가 가셨다.

“……대표님?”

“거짓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다신 안 그러지, 너는.”

“대표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 읍!”

말을 채 뱉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밀려와 휘연의 입술을 부서지듯 짓눌렸다.

“대표님!”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휘연이 몸부림 쳤지만 그에게 붙잡혔다.

“가만있어.”

고압적인 목소리로 휘연을 짓누르며 그는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으읏…….”

십 년 만에 닿은 남자의 숨결엔 담배 냄새와 향수 냄새, 그리고 체향이 뒤섞여 녹진했다.

“잠깐만, 대화, 대화로 풀면 안 될……!”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휘연의 여린 입술을 씹었다. 휘연이 두려움에 바르르 떨자 그는 제 숨결을 흘려주었다. 뜨거운 온기가 힘껏 깨문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두려움에 경직되었던 입안에 들어온 숨결이 점막을 눅진하게 녹였다.

입안을 헤쳐 들어온 감촉은 두려움에 경직된 입안을 풀어 주려 살며시 깊게 밀며 들어왔다. 휘연의 눈이 짧게 진동했다. 부서지는 신음을 얇게 저미며 에던이 각도를 기울였다.

“하아.”

밀려오는 힘을 이기지 못한 휘연의 등이 꺾였다. 동시에 에던의 홧홧한 손이 목덜미를 감쌌다.

“아!”

그는 휘연 안의 낯선 감각들을 날카롭게 들쑤셨다. 깨물 듯 말 듯 유려하지만 날카로운 움직임에 지배당한 휘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에 흥분됐는지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좋아?”

……얼굴도 모르고 연고도 없는 남자에게서 범해지는 상황, 좋을 리가 없다.

“……하아, 하아.”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휘연은 분노를 느끼며 거친 숨을 쉬었다.

“좋잖아, 너도.”

“대표님!”

“네가 유발한 일이야.”

중압적인 목소리에 휘연의 몸에 힘이 풀렸다.

“움직여, 너도.”

낮은 목소리에 휘연의 가슴 안쪽이 떨렸다. 순간 강렬한 파도가 밀려오듯 그의 입술이 그녀를 덮쳤다. 휘연은 그 파도에 잠식되지 않으리라는 듯 몸부림쳤다.

하지만 거부하려 해도 계속 파고드는 그의 입술에 휘연의 입술은 속절없이 벌어졌다.

격한 숨결이 귀를 두드렸다.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에 휘연의 이성이 흐려졌다.

‘대체 이게 무슨…….’

“흐읏!”

점막을 훑는 뜨거운 살덩이에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동시에 순간적으로 휘연의 눈이 떠졌다.

“……!”

달빛에 드러난 그의 얼굴에 휘연의 이성이 퓨즈가 녹듯 탁 끊겼다.

“하아!”

순간 입술 아래 점막을 훑고 깨무는 그의 능란함에 휘연이 신음을 뱉었다. 입술이 퉁퉁 부을 것처럼 그는 한없이 물고 빨고 깨물었다. 분명 능욕당하는 것인데도 에던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저항할 의지가 사라졌다.

치열을 훑는 그의 혀와 욕망 섞인 숨결이 휘연의 입술에 내려앉을 때, 정신이 아득해졌다. 술에 취해 잘못 본 것이겠지. 헛것일 거야.

스스로를 타이르며 혀의 감각에 입안이 녹아내려 정신이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이제 그 입술 제대로 놀려야겠다고 정신이 드나?”

젖은 입술처럼 촉촉한 그의 목소리가 고막에 치달아 울렸다.

그 목소리가 이전과는 다르게 들렸다.

“……으읍.”

성질난 입맞춤은 낯설면서도 익숙지 않은 것으로 다가와 휘연을 혼란의 구렁에 몰아넣었다.

그때 혀 안을 돌풍처럼 몰아오는 그의 움직임에 전기가 끊기듯 휘연의 머리가 새하얘질 때 그가 입을 떼었다.

월광에 타액이 은밀하게 드러났다.

“이제 알겠어?”

휘연은 곧바로 고개를 떨궜다. 몰래 눈에 담은 그의 얼굴이 아른거려 다리가 후들거렸다.

“언약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그는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제 입술을 검지로 쓸었다.

서늘한 그 촉감에 휘연의 척추가 알알이 섰다.

“……네. 다시는 어기지 않겠습니다.”

휘연은 고개를 꺾은 채 눈을 감고 처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정적이 머물다, 곧 그의 발소리가 옅어졌다.

그 자리에서 휘연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월광에 비친 그 집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마치 자신을 후원하는 듯한 이 말도 안 되는 제안. 처음 보자마자 무례하게 꾸짖던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자꾸 위험한 생각이 선뜻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자꾸 아까 본 그 얼굴의 흉터가 휘연의 정신을 흐트린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그 얼굴에 새겨진 안타까운 흉터.

“……만약 너라면. 정말 너라면.”

휘연의 눈에 염수가 차오른다.

만약 너라면, 에던이 만약 너라면…….

금지된 상상에 휘연의 가슴이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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