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인의 대가-5화 (5/13)

5장. 예감은 틀리지 않고

삐삐삐삐. 삐삐삐삐.

“하아……!”

알람과 동시에 벅찬 호흡을 뱉으며 휘연이 눈을 떴다.

“하아, 하아, 하아.”

요동치는 속사정과 달리 오피스텔 원룸에는 따사로운 햇빛이 평화롭게 내려오고 있었다.

‘아, 꿈…….’

늘 꾸는 꿈이지만 오늘은 유독 생생했다.

제 손으로 버린 사랑했던 남자를 안는 꿈.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던 잔인한 첫날밤.

한때 연인이었던 상대의 가슴을 찢어발기는 잔혹한 순간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그 때문일까. 휘연의 가슴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두 손에는 땀이 한가득이었다.

“후우…….”

땅으로 꺼질 듯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휘연은 뼈가 도드라진 양손으로 얼굴을 쓸며 마른세수를 했다. 온몸이 땀범벅이라 얼굴이 끈적해졌다.

‘요즘 왜 이러지.’

원래 자주 꾸는 꿈이지만 근래 들어 그 횟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꿈을 꿀 때마다 너무 생생해 죄책감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이 모든 게 대가겠지.’

휘연은 오늘도 신경안정제를 먹은 뒤 출근했다. 벌써 신경안정제를 달고 산 지도 오 년이다.

도한을 떠난 지는 벌써 십 년.

그런데 최근 들어 십 년 전 그 첫날밤이 생생했다.

마치 곧 그 아이가 내게 다가오기라도 할 것처럼.

오늘의 꿈은 유독 심하게 생생했다.

운전대를 잡은 그녀의 손이 이상하게 후들거렸다.

정말이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두려웠다.

*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기 일을 그만두란 겁니까, 관장님?”

휘연의 싸늘한 음성이 K미술관 사무실 안에 낮게 깔렸다.

“아니, 휘연 씨. 내 말을 곡해하지 말고 들어 봐. 앞으로의 커리어에서보다 더 많은 돈을 거머쥘 수 있는 기회라니까?”

“관장님, 저는 큐레이터 인생만 보고 살아왔습니다.”

휘연의 붉은 입술은 제 말을 끝내고는 굳게 닫혔다. 오늘 촉이 좋지 않았지만 이렇게 암담할 줄은 몰랐다.

휘연은 너무 어이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환갑을 바라보는 관장은 힘겹게 진을 빼면서도 기어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휘연 씨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아. 우리 미술관에서 가장 실력 있는 사람인 것도 알고. 아니, 우리 미술관을 넘어 한국에서 가장 유능한 큐레이터지. 그러니까 휘연 씨가 선택된 거야. 인재 스카우트, 그런 거라고.”

흰 머리가 희끔희끔 보이는 관장은 계속해서 휘연을 설득했지만, 휘연의 이글거리는 눈은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화려한 유학 경력, 국립현대미술관의 역대 최연소 학예사 타이틀을 가진 그녀는 명실상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능한 큐레이터였다. 이탈리아에서 유학한 그녀는 르네상스 분야에서는 최고의 실력을 갖고 있었으며, 곧 전시 개발, 연구 플랫폼인 ‘리서치 센터: 유럽’과 ‘유럽, 지중해 지역 작품 구입 위원회’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게 될 예정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거쳐, 고유의 르네상스 분야를 개척해 가면서 유럽과 한국을 잇는 역할을 하면서 말이다.

그만큼 그녀는 인생을 미술관에 쏟았고, 미술관을 떠나 다른 일을 하는 것 따위는 상상해 본 적 없는 사람이다.

“맡고 있는 전시가 한두 개가 아닌 거 알고 계시잖습니까.”

“알지, 그럼. 그런데 그건 내후년이잖아. 이 의뢰 끝내고 시작해도 충분히 할 수 있어.”

휘연은 답답했다. 그녀는 르네상스와 백남준식 아트를 결합한 대규모 회고전을 기획하고 있었다.

전시 하나하나는 그녀의 삶이고 스펙이었다.

전시회는 곧 휘연이었고, 미술관은 삶의 터전이었다.

그런데 관장은 그런 휘연에게 미술관을 떠나 다른 일을 하라고 제안했다. 아니, 무조건 수락하라고 설득하고 앉았다.

휘연이 큐레이터로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하는지 제일 잘 아는 관장이 말이다.

“저보다 유능한 큐레이터를 구하셨습니까?”

“그럴 리가. 자네보다 유능한 큐레이터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럼, 왜 자진해서 나가라고 하는 겁니까?”

“나가라니. 섭섭해, 휘연 씨. 나라고 귀한 인재를 그런 일에 보내고 싶을 것 같아? 자네 생각해서 제안하는 거야, 나도.”

관장의 말에 휘연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내 생각을 했다니?

그가 제안한 따위의 일은 휘연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일이었다.

관장이 말하는 프로젝트는 재벌들의 ‘개인 도슨트’가 되는 걸 일컬었다. 좋게 말해 도슨트지, 실제로는 ‘오디오 가이드’ 취급받는 게 더 적합한 설명이겠다. 평생 예술을 공부하고 노력하여 계약직이든, 정규직이든 당당한 사회인으로 일하고 있는 큐레이터를 말하는 미술관 도록쯤으로 생각하는 무례한 재벌들이 있었고, 휘연은 사람을 도구로 여기는 그런 부류를 혐오했다.

그걸 관장도 잘 알았다. 그런데 관장은 기어코 휘연의 귀에 그런 제안이 들어오게 했다. 관장의 말로는 그런 건 아니고, 그저 비슷한 일일 뿐이라고 했지만.

“미국에서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신 분이야. 이번에 서울에 집을 하나 장만하셨다고 해. 집에 어울리는 예술 작품을 골라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셨어.”

휘연은 더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녀가 밤낮없이 공부해 가며 배운 예술은 고작 한 부호의 집 인테리어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었고, 그녀 역시 한낱 인테리어 매니저가 되기 위해 살지 않았다.

가치관에도 맞지 않고, 경력도 끊기는 일을 휘연이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땅바닥으로 꺼질 것만 같은 관장의 무거운 한숨에 휘연은 일단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휘연 씨, 요즘 힘든 거 알아.”

그 말에, 칼날처럼 반듯했던 휘연의 눈썹 끝이 올라갔다.

“휘연 씨, 이제 짝도 찾고 결혼도 하면서 좀 여유도 누려야지.”

“관장님, 지금 그 얘기는 대화 주제에 어긋난 것 같습니다만.”

“내가 왜 이 의뢰를 자네한테 말해 주는 건데. 난 매일매일 보여, 휘연 씨가 힘들다는 게. 지금 일중독이라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휘연 씨는 너무 많이 일했어. 건강검진 마지막으로 받은 게 언제야? 기억 안 나지?”

관장은 한숨을 쉬며 아이패드를 손에 쥐었다. 손가락으로 몇 번 터치하니 수많은 포스터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휘연 씨가 이 미술관에 있으면서 맡은 전시들이야. 그 전에도 얼마나 많은 전시를 맡았고? 이 살인적인 개수 보여? 일반 큐레이터들은 감당할 수 없는 개수야. 그런데 개수만 많은 게 아니라 모두 최고의 퀄리티였어. 모두 평이 좋았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휘연 씨 갈아 넣은 덕에 휘연 씨 몸은 어때? 지금 휘연 씨 안색 말이 아니야. 휘연 씨한테는 휴식이 필요해. 그래서 이 일을 하면 좋겠다는 거야. 응? 미술관 일을 잠깐 쉬고 이런 리프레쉬 되는 새로운 일을 하라는 거지. 이런 일은, 안목 뛰어난 휘연 씨한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휘연은 아이패드를 직시했다. 화면에는 그녀의 손에서 탄생한 전시 목록이 빼곡했다.

휘연이 인생을 갈아 넣으며 만든 결과물들.

그의 걱정은 고맙지만 그가 간과한 게 있다.

저렇게 미친 듯이 일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사실을 그는 모른다.

“휘연 씨, 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거 알지?”

“관장님, 말씀을 꼭. 지금은 건강하시지 않습니까.”

“그래, 지금은 건강하지. 나 암 판정 받기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암이었다니까? 자네 보면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 그렇게 일하다 그냥 한순간에 훅 갈까 봐 걱정돼.”

“……관장님.”

“자네한테는 휴식이 필요해. 이 프로젝트 맡으면서 숨 좀 돌려.”

관장의 진심 어린 걱정의 눈에, 휘연은 눈을 돌렸다.

그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었다.

휘연은 사실 요 근래 병이 생겼다.

“아프지? 아프면 좀 쉬어야 돼. 안 그러면 나처럼 된다.”

관장은 자신의 배를 툭툭 치며 사람 좋게 웃었다. 암 수술을 받아 흉터가 가득한 배라고 했다. 지금은 웃고 있는 관장이 감내했을 고통을 상상하니 마음이 저릿했다.

“죽었다 살아나 보니까 내 후배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식이 아프질 않길 바라는 마음 같아 부모 없는 휘연에게 마지막 가족 같은 그의 말이 크게 다가왔다.

“길게 봐야 해. 잠시 쉬어야 할 때도 있는 거야. 미술관 전시만 기획하지 말고 이런 일도 해 보면서 경험을 더 쌓는 거지.”

휘연은 이제는 관장의 뜻에 수긍하겠다는 뜻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엇보다 이 의뢰는 꼭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한 건 보수인데…… 휘연 씨, 놀라지 마. 이번 프로젝트 보수가 말이야.”

관장은 침을 한 번 삼켰다. 괜히 그 때문에 휘연까지 덩달아 긴장되었다.

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백지수표야, 무려.”

곧 휘연은 머리를 맞은 사람처럼 멍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오피스텔 안.

휘연은 화이트와인이 담긴 잔과 트러플 오일을 바른 비스킷을 탁자 위에 올렸다.

블루투스 스피커 버튼도 눌렀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방을 채웠다.

‘……백지수표라니.’

상상도 하지 못한 보수, 백지수표.

관장에게 사기꾼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미국에서 신흥 재벌로 떠올라 투자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람이니 절대로 사기 계약일 순 없다고 했다.

이 미친 계약의 의뢰인은 시어 해지펀드 매니지먼트 대표, 에던.

휘연은 속으로 그 이름을 곱씹었다.

에던, 에던, 에던.

그는 돈이 얼마나 많은 걸까?

고작 집에 어울리는 예술품을 추천하는 데 백지수표라니.

직장인들 사이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백지수표를 제안받았다는 게 여전히 얼떨떨했다.

그러나 이상한 조건도 걸렸다.

‘단, 무슨 일이 있어도 얼굴은 절대 마주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떠올리고 이해해 보려 해도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조건이었다.

이유는 그저 보안상이라고만 설명했다.

이상해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관장은 어느 분야에서든 백지수표를 받는 건 영광이라며 절대 거절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천애 고아가 된 휘연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인 그가 그렇게 말하니 자꾸 수락 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사실 관장의 말대로 휘연의 건강은 나빠지고 있었다. 그녀는 남들도 그렇게 느낄 정도로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있었다. 몇 개월 전에는 도슨트 전시를 돌다 쓰러지기까지 했다. 구급차 안에서 고통에 울부짖으며 생사를 오갔던 다급한 순간은 기억에 각인돼 잊히지 않았다. 용암이 종아리를 파고드는 것처럼 맹렬한 고통이었다.

의사는 급성구획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강력하게 휴식을 권고했다. 근육 조직을 괴사시켜 버릴 수도 있는 병이니 꼭 쉬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두 다리로 걷고 뛰며 작품을 보고 모으는 게 큐레이터의 일이었다. 단 한 순간도 눈과 손발을 쉴 수 없었다.

일을 놓치면 과거의 그 순간이 떠올라 괴로울 걸 알기에 휘연은 고통을 참으면서도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몸이 먼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관장의 말대로 숨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지 않고 만약 아파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자꾸 도한의 기억으로 괴로워 죽어 버리고 말 테니까.

*

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실오라기처럼 엷게 내부를 감싼 미술관 사무실 안.

관장은 햇살에 빛이 부서지는 은테 안경을 고쳐 쓰며 계약서를 주시했다.

옆에서 똑같이 지켜보고 있는 휘연도 괜히 긴장되었다.

딸처럼 여기는 휘연이 고생하는 건 원치 않는다고 직접 계약서를 검토하러 온 관장은 계약서가 만족스러운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던의 수행비서가 동굴처럼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그럼 손휘연 님께서 수표 금액을 적어 주십시오.”

휘연은 결의에 찬 눈을 뜨며 또렷하게 말했다.

“우선, 계약금만 제안하겠습니다. 추후 금액은 프로젝트가 끝난 후 결과물에 만족하는 만큼 ‘갑’께서 지불해 주십시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목소리엔 결단이 묻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비서와 관장 모두 동공이 흔들렸다.

“계약금으로는 이 금액을 제시하겠습니다. 약속대로 일시불로 입금해 주길 바라며, 추후의 금액은 어떤 결과든 달게 받겠습니다.”

어젯밤 고민 끝에 휘연이 내린 결론이 사무실 안을 감돌았다.

휘연에게 ‘돈’은 애증의 것이었다.

어젯밤, 노후 걱정 없을, 아니 평생을 쓴다 해도 다 쓰고 죽지 못할 액수를 제시할까 하다가 그놈의 돈 때문에 저버린 첫사랑을 떠올리니 그럴 마음이 모두 사라졌다.

‘돈’은 불행의 근원이었다. 그 돈 때문에 사랑을 잃었다.

지금 휘연이 사랑하는 건 일이었다.

욕심을 내다 직장까지 잃을까 두려웠다. 결국 3개월 치 월급만큼만 제안하기로 했다.

“휘연 씨, 잘 생각해. 급성구획증후군 수술이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야. 미리 예방해야 돼. 수술이 임박하기 전에 검사도 받고 진료도 받아야 한다고.”

“괜찮습니다. 결과물로 평가받는 게 제 일인걸요.”

관장은 한사코 말렸다. 더욱이 가족도 없이 혼자 살고 있으면 아플 때 간병인이 없어 꼭 돈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휘연의 생각은 변함없었다. 더 욕심내다가 돈 때문에 가족과 사랑을 잃었던 것처럼 직장마저 잃을까 두려웠다.

그저 돈이 자신을 따라온다면 맞이할 뿐, 욕심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휘연의 이런 행동은 일종의 경고이기도 했다. 큐레이터를 단지 인테리어 매니저로 여기지 말라는 뜻을 담은 경고.

계약은 그렇게 완료되었고 휘연은 관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오겠습니다, 관장님.”

관장 역시 휘연의 눈에서 세월이 빚어낸 확고함을 보았다.

“그래, 기다리고 있겠네.”

*

휘연은 프로젝트 대상이 되는 ‘갑’의 저택으로 이동했다.

에던의 수행비서가 모는 세단은 흔들림 없이 움직였다.

휘연은 곧 자신은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도달했다. 재벌과 부호들이 사는 동네로. 그곳에는 건축의 멋과 웅장함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휘연은 문득 도한이 떠올랐다.

그가 사라졌던 50일 동안 그는 저런 곳에서 지냈을까? 아니면 시골의 그 초라한 아파트와 비슷한 곳에 감금되었을까? 그 어린 나이에 납치되고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와 다시 같은 학교를 다니도록 어떻게 아버지를 설득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만약 그때, 도한을 영영 보지 못하게 되었다면.

50일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5년은.

10년은.

그 상상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에 휘연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때 도한에게 버려졌다면 지금처럼 고통스럽지 않았을지, 그 따위 고민은 의미 없으니까.

한참을 더 달리자 세단은 조용히 멈췄다. 부스스한 정신에 몽롱했던 휘연은 내리자마자 잠이 단번에 달아나 버렸다.

그녀 앞에 있는 건물은 주변 건물과는 다른 양식이었다. 마치 그 부지만 보면 이탈리아에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휘연이 가장 사랑하는 양식, 르네상스 양식이었다.

‘에던이란 사람도 르네상스를 좋아하는 건가.’

얼굴은 모르지만 통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 뭔지 모를 편안함이 살짝 느껴졌다.

비서는 휘연의 반응을 살피며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이곳은 에던 님이 서울 미팅이 있을 때 호텔 대신 거처하기 위해 매입한 곳입니다. 대동하는 비서들 없이 혼자 주무시기 위해 만드신 곳이죠.”

혼자 사는 집치고는 넓다고 생각했는데도 그의 거처 공간이라는 말에 살짝 놀랐다.

‘혼자 살면 외로울 것 같은데.’

종종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방의 크기보다 터무니없이 큰 규모에서 사는 사람들은 외롭겠다는 생각.

‘만나는 사람이 끊이지 않을 테니 상관없나.’

에던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는 몰라도 돈이 많은 건 확실하니 그럴지도 몰랐다. 매일 밤 여자를 갈아 치울지도.

“1층만 작업해 주시면 됩니다. 2층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네?”

“곧 에던 님께서 이곳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아, 네.”

의외였다. 그렇게 엄청난 액수를 제시해 놓고 2층은 또 작업하지 말라니.

돈이 정말 넘쳐나나 보다 싶어 휘연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정원, 1층의 방과 거실, 욕실에 어울리는 작품을 선정해 주시면 됩니다. 충분히 심사숙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네.”

여전히 휘연은 제가 어떤 작업을 맡은 건지 믿기 힘들었다.

이런 걸 돈지랄이라고 할까?

거대한 미술관을 기획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저택 안을 미술관처럼 꾸미는 것도 아니고, 개인 소장용 갤러리를 기획하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새로 살 집에 어울리는 예술품을 고르는 데 3개월.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자신을 부르는 데 백지수표를 건네는 에던의 심리가 여전히 이해되지는 않았다.

“휘연 님께서는 외부의 어떠한 정보도 없이, 그저 이 방을 보고 가장 어울리는 느낌으로 작품을 구해 주시면 됩니다.”

“의뢰자께서 원하시는 주제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네? 원하는 주제가 없다고요?”

“네. 그 부분에 대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그럼 어떻게 수많은 작품 중에 어울리는 걸 선정합니까? 큐레이터들이 미술 전시 기획할 때 몇 개월에 거쳐 고민하는 게 ‘주제’입니다. 어떻게 기획할지보다 뭘 기획할지가 우선이고, 그게 가장 중요한 작업인데, 어떻게 없다고 말씀을 하시죠?”

“휘연 님의 기획을 전면 수용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네?”

“휘연 님이 살 집, 혹은 신혼집이라고 생각하고 작품을 고르면 될 것 같습니다.”

“설마 의뢰인의 집을 제 취향대로 구성하라는 건 아니겠죠?”

“아닙니다.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르네상스가 전문 분야이신 만큼, 평소 눈여겨보았던 작품들을 마음껏 연구하고 이 집에 걸어 두라 하셨습니다.”

이건 의뢰가 아니다.

이건 마치 ‘후원’이다.

마음껏 연구할 부지와 공간, 식대와 생활비를 제공하고 원하는 만큼 공부하라는 느낌.

대체 왜…….

에던 그 사람이 뭔데 나한테 이런 기회를…….

“다만, 2층에는 절대 올라가시면 아니 되며 또 다른 주의점이 있습니다.”

“네.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이 저택 안에서 에던 님을 만나게 된다면, 얼굴을 곧바로 숙여 주십시오.”

휘연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이게 계약 때 말한 ‘보안상의 이유로 얼굴은 마주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구나.

“에던 님 특성상 언제 이곳에 들어올지 아무도 모릅니다만, 아시는 것처럼 언론에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분이십니다. 업무상 보안 요건이니 반드시 지켜 주십시오.”

“……그건 계약 조건이었으니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만약 실수로라도 얼굴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비서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입술을 떼었다.

“얼굴을 마주쳤을 때의 가이드라인을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네?”

의외의 답에 휘연의 목소리가 설핏 올라갔다.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전적으로 에던 님의 권한하에 사안 처리가 될 것입니다. 비서실에도 언질해 둔 사안이 없기 때문에 저희도 드릴 말씀이 딱히 없습니다.”

“…….”

갑자기 그 넓은 저택에 스산한 기운이 맴도는 느낌이었다.

소름 끼치는 겨울바람이 죽은 시체를 닮은 마른 가지에 부딪히며 내는 그런 불길한 기운이, 휘연의 몸을 옥죄는 것 같았다.

비서는 저택의 열쇠를 준 뒤 사라졌다.

“계약금도 받았으니까 열심히 하자. 병 도져서 아무것도 못 하면, 그땐 진짜 죽고 싶을 테니까.”

휘연은 70평 남짓한 공간을 차근차근히 살펴보았다. 어울리는 작품들을 구비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공간을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현관에서부터 복도, 거실, 다이닝 룸, 욕실 등.

호사스런 건물 내부를 꼼꼼하게 살폈다.

창밖으로는 서울 야경이 보였다.

문득, 허망했다.

‘이런 걸 나 혼자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텅 빈 집에 혼자 있으니 휘연의 곁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잔혹한 첫날밤 다음 날 휘연의 가족은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마지막 희망인 아버지의 동업자를 찾아 떠났고, 그곳에서 빚을 갚기 위해 가족이 함께 가죽 공방을 운영했다.

차곡차곡 빚을 갚으며 정착할 줄 알았지만 곧 아버지는 어느 날 얻어터진 시체로 발견됐다. 동양인 혐오 집단에게 시비가 붙은 지 꼬박 삼 일이 되던 날이었다. 죽음을 조사하니 그 집단의 혐오 때문에 죄 없는 아버지는 그렇게 죽었다.

빚에 강박 증세를 보이다 남편까지 잃은 엄마는 자해를 시도하다 결국 정신병에 걸렸다. 그 와중에 도박에 빠지며 심각한 조현병까지 보이더니 결국 자살했다.

낯선 타지로 도망치듯 떠난 지 1년도 안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아직 삶을 오롯이 혼자 감당하기에 어렸던 휘연도 부모님을 따라 죽고 싶어졌다.

그러나 죽지 못하게 만든 게 도한이었다.

자신이 도한에게 준 상처를 상기하니, 이대로 죽는 건 비겁하단 생각에 죽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죽고 싶었다. 용서를 바라진 않지만, 이렇게 진창인 나이기에 네 발목을 붙잡을 수 없었다고. 선택권이 없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도한의 존재는 그녀를 치열하게 살게 만들었다. 그녀가 할 수 있던 공부를 죽을 것처럼 매달리게 하며 지독한 큐레이터가 되게 만들었다.

일에서 성공했지만 그녀는 웃음을 잃었다. 남들은 그녀를 얼음처럼 차가운 사람,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짜낼 피도 눈물도 없으니까.

그래서 눈물이 없는 줄 알았는데.

볼을 타고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도한아…….”

잊을 수 없는 첫사랑. 뜨거운 아픔이 되어 버린 첫사랑.

휘연은 그 처량한 달밤에, 부르기만 해도 목이 메이는 이름을 처절하게 한 자, 한 자 올렸다.

밤이 스러져 갔다.

*

또다시 아침은 찾아왔다.

휘연은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새벽부터 일어나 저택을 둘러보았다. 공기의 흐름은 어떤지, 새벽의 기운은 저택을 어떻게 감도는지 확인했다.

‘에던은 어떤 사람일까.’

집의 인테리어는 사실 그곳에 살 사람의 취향이 가장 중요했다. 아무리 휘연의 취향대로 구성하라고 했지만, 이미 많은 금액을 받은 입장에서 완벽하게 일을 진행하고 싶었다. 그래서 에던을 직접 만나 보고 어떻게든 그의 취향을 알아내고 싶었지만, 그는 의뢰 단계부터 계약 성사까지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휘연이 그의 정보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카메라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21세기에도 그는 사진 한 장 없었다.

마치 도한에 대해 알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 있는 정보가 단 하나도 없을 때처럼 그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 같았다.

그저 에던이 헤지펀드 메니지먼트 시어(sear)의 대표라는 사실로부터 그의 능력만 엿볼 뿐이었다. 설립 후 몇 년 만에 놀라운 성과를 보이며 많은 투자자들의 이목을 끌고 단숨에 미국의 투자계를 흔들어 놓은 헤지펀드 회사, 시어.

대표인 에던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 이미 인터넷에는 그에 대한 수많은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개중 재밌는 글이 있었는데, 에던이 엄청난 추남이라는 의견이었다. 요지는 에던이란 남자는 사회생활을 하지 못해 은둔형 외톨이처럼 지내지만, 비상한 머리로 투자 회사까지 차린 복 받은 인물이라는 것. 순식간에 재벌급의 인재로 떠오른 사람이지만, 추남이란 본질 때문에 여전히 대인 기피가 심해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의견이었다.

상반되는 주장도 있었다. 에던이 재벌가의 자녀, 혹은 지하 경제와 맞닿은 요주의 인물이라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의견이었다.

읽을수록 흥미롭지만 답답했다.

이렇게 평가가 엇갈리는 남자의 취향을 어떻게 맞춰 업무를 완수할지 걱정이 들었다.

휘연은 손에 들었던 휴대폰을 테이블에 놓았다.

문득, 2층의 존재가 자각되었다. 에던이 사용한다는 2층.

거길 가면 에던의 취향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도 더 성공적으로 진행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2층에 대체 뭐가 있길래.’

가지 말라고 하는 게 신경 쓰였다.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어렸을 적 교훈으로 깨달은 인생의 진리다.

그런데…… 이끌렸다.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그의 은밀한 2층에.

‘……그의 가학적인 취향이라도 모아 뒀나?’

호기심이 자꾸 금단의 영역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머리를 식히고 좀 쉴 필요가 있었다. 계약 조건을 어긴다면 엄청난 위약금을 물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감히 2층을 궁금해하다니.

어떤 대가를 치를 줄 알고.

휘연은 1층의 작은 방으로 돌아갔다.

휘연의 작업실인 그곳에서 그녀는 선정한 작품 목록을 다시 살펴보았다. 기획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작업이 필요했다.

“아…….”

2층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안 되겠다. 술이라도 마셔야겠어.’

늦은 밤, 그녀는 두통을 잊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피처럼 붉은 포도주가 손에 잡혔다. 투명한 보르도 잔에 레드와인을 따랐다.

향긋한 과일 향과 탄닌 특유의 텁텁함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밤은 깊었다.

‘아, 오늘은 그런 날이구나.’

와인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에 미치도록 외로운 날.

외로움에도 주기란 게 있는 건지 휘연은 가끔 몸이 부서질 정도로 외로움에 사무쳤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아무리 직장과 돈이 있다 할지라도 휘연을 고독의 심연에서 건져 내지 못했다.

투명한 와인 잔을 건드리는 손가락에 힘이 실린다.

미치도록 보고 싶다. 이도한.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사는 걸까. 어디 있는 걸까.

찾아낸다 할지라도 다가갈 수 없겠지만, 멀리서라도 지켜보고 싶었다.

자취를 감춘 도한이지만 어떻게 사는지 알고 싶었다. 자격 없는 걸 알지만 그리운 첫사랑을 떠올리는 건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고 싶다, 도한아.’

그녀의 기억이 기어코 도한과의 첫날밤을 다시 끄집어냈을 때, 휘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흐읏……!”

잇새로 흐르는 작은 신음은 그녀가 취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벅차오르는 숨을 내쉬는 휘연은 제멋대로 그곳으로 달렸다.

가면 안 되는, 금단의 그곳으로.

‘가면 안 되는데…….’

머리는 인지하고 있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비틀비틀 몸을 겨우 가누며 도착한 곳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탐하여서는 안 되는 계단.

그러나, 그 금단이 오히려 그녀를 맹렬하게 사로잡았다.

그녀의 발에 힘이 실렸다.

한 발 한 발 오를 때마다 뼈마디로 가시가 파고드는 것처럼 아찔했다.

발을 내디딜수록 적막에 가까워졌다. 자옥이 깔린 어둠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홀린 듯이 더, 더, 더.

그녀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스위치가…….’

2층의 스위치를 누르려는 찰나였다.

“멈춰.”

강렬한 목소리가 휘연의 귀를 꿰뚫었다. 휘연의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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