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각인의 밤
도한이 없어졌다.
점심을 먹지 않은 휘연에게 도한이 위로를 해 준 날부터 그는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아파트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공부하고 일하느라 바빠서 그를 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건은 꽤 커졌다. 도한이 무단으로 학교를 결석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휘연의 가슴이 무너졌다.
이웃들에게 행적을 물어보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깡촌 경찰들은 제대로 일하지 않았다. 아무리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그들은 찾을 의지가 없어 보였다.
마치 그를 찾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오히려 필사적으로 그 일을 막으려고 했다.
그가 잘 먹으라고 해서 잘 먹는 걸 보여 주고 싶었는데.
도한이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나 다시 힘내고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는데.
미리 그럴걸. 네 걱정 시키지 말걸. 나도 너를 더 신경 쓰고 봐 줬어야 하는데.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세상이 무너지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오리무중으로 사라진 도한의 행적에 휘연의 가슴이 찢어질 때, 도한과 관련된 무시무시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
“……이도한, 금왕 그룹 회장의 숨겨진 아들이라며?”
금왕 그룹은 한국에서 하나의 왕국과 같은 입지의 회사였다. 대한민국에 금왕 그룹 로고가 없는 제품이 없고, 금왕의 계열사가 아닌 회사가 없을 정도니까.
그만큼 금왕 그룹은 일반인이 닿기 어려운 존재다.
그런데 도한이 그런 금왕 그룹 현 회장의 혼외자라는 소문이 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금왕 그룹 회장 지금 정신병 걸렸다던데? 친아들들도 회장 외면하니까 회장도 친아들 모두 꼴 보기 싫다고 혼외자 찾는 거라고 하더라. 그게 이도한이고.”
도한이 사라지기 직전에 산간벽지인 이 시골에 정장을 빼입은 남자들이 자주 보였다는 점, 그 시기에 도한이 사라졌던 점, 동네 경찰들이 도한을 찾는 데 관심이 없는 점을 들어 저 멀리 서울에서 들려온 금왕 그룹 회장의 위독 소식에 도한을 끼워 맞추는 소문이 계속 퍼졌다.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도한이 보이지 않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소문은 점점 힘을 얻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그런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며 아이들을 혼내기만 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일상에 치여도 휘연은 매일같이 도한을 기다렸다.
공기처럼 항상 곁에 존재하던 그 아이가 없어지니,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이사 왔을 때부터 휘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커서도 주변의 부러움과 시샘을 동시에 받게 만들 정도로 멋지게 자랐던 도한이 없다는 건, 휘연에게 죽음과도 같은 두려움이었다.
어느 날 평소 도한과의 관계를 시샘하던 여자아이들이 휘연을 둘러싸고 폭언을 퍼부었다.
“너 때문에 없어진 거야. 이도한, 네가 그렇게 만든 거라고.”
“그 고귀한 핏줄인 애가 너처럼 거지 같은 애 만나니까 어지간히 속이 썩었겠어? 너 때문에 다시 불려갔는데 넌 뻔뻔하게 학교 잘 다니네?”
평소의 휘연이었다면 그 모진 말을 퍼붓는 여자들에게 반박했겠지만 그땐 그럴 수 없었다.
그 여자들이 하던 말은 휘연 스스로가 지난 시간 동안 생각했던 것이었으니까.
‘정말, 도한아. 넌…… 금왕 그룹의 숨겨진 아들이니.’
‘정말, 도한아. 너…… 나 때문에 끌려간 거니. 내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서. 내가 그런 너를 사랑해서…….’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연락 한 통 없을 수 있는지!
휘연은 날마다 외로움과 두려움에 사무쳐 잠들지도 못했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그런 모진 날들은 여전히 사슬처럼 휘연을 괴롭게 옥죄었다.
*
도한이 사라진 지 50일째 되는 날.
휘연은 야자가 끝나 아무도 없는 학교 공터에 앉아 멍하니 달을 바라봤다.
칠흑 같은 어둠을 비추는 달이 유독 컸다. 휘연이 밥을 굶을 때면 찾아온 도한이 건네주던 하얀 크림빵 같았다.
겉모습은 차가워도, 그런 빵을 건네며 언제나 휘연을 생각해 주는 순수한 아이였는데.
휘연의 고개가 까무룩 바닥으로 떨궈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뚝. 뚝.
흙바닥에 진한 동그라미가 불규칙적으로 생겼다.
울음을 참는 소녀의 작은 체구는 엷게 떨렸다.
휘연의 시야가 흐려졌다.
“……도한아.”
부르기만 해도 목이 메는 그 이름에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그때,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익숙한 실루엣, 익숙한 상황.
그리고 곧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이렇게 보고 싶어 하면서 전화는 왜 안 받아.”
휘연이 고개를 들었을 땐, 그토록 그리던 얼굴이 있었다.
“아…….”
믿을 수 없었다.
“한참 찾았잖아.”
“도한아!”
휘연은 와락, 그를 안았다.
으스러지도록.
지금껏 보지 못한 시간만큼 오늘 다 안아 보겠다는 일념으로.
휘연이 안은 그의 몸은 차가웠다. 그녀의 눈시울이 더 뜨거워졌다.
“어디 있었어, 도한아.”
휘연은 그의 몸을 잊지 않으려는 듯, 더 세게 끌어안았다. 도한 역시 휘연의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제발 그 소문만큼은 진실이 아니길 바라며, 그의 입에서 금왕 그룹 따위는 나오질 않길 바라며 휘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도 몰랐던 아버지한테.”
휘연의 심장이 발로 떨어졌다.
당사자의 입을 통해 확인받고 말았다.
도한이 일반 서민의 자식인 저와는 다른 태생을 가진 남자라는 걸.
어떤 사연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산간벽지에 살다가도 갑자기 끌려가는 게 이상하지 않은 집안의 남자이며, 다른 세상을 사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고 말았다.
휘연은 고개를 들었다.
까만 밤하늘과 콕콕 박힌 별들, 그리고 조막만 한 도한의 얼굴이 보였다.
소년의 여린 선과 남자의 날카로움이 조화롭게 모였던 얼굴엔, 그새 조금 더 남자의 성숙함이 자라 있었다.
또 휘연의 눈에 선명히 들어온 게 있었다.
그의 얼굴에 붉게 자리 잡은 생채기가 너무나 강렬했다.
“누구야?”
그 상처를 보자 피가 달아올랐다.
누가 감히. 도한한테.
도한은 답이 없었다. 휘연의 속이 뒤틀리며 무너졌다.
“……설마 너희 아버지가 그러셨어?”
소리 소문 없이 끌고 간 것도 모자라, 뺨에 이런 상처까지 입힌 걸까?
눈물이 주르륵 흐를 것 같았다.
혹여 몸에도 상처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맞으면서 지낸 건 아닐까. 굶으면서 지낸 건 아닐까.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온 건지…….
묻고 싶었다. 너무나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 질문 하나하나가, 도한에게 아픔을 상기하는 잔인한 트리거가 될까 봐 휘연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게 그에게 슬픔이 될까 봐 울음도 삼켰다.
도한의 손이 휘연의 뺨에 닿았다. 따스했다.
“왜 울어.”
가느다란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비치는 눈썹이 이렇듯 진중하게 물을 때면, 서늘하게 내려갔다.
“네가 사라졌잖아. 연락도 안 받았잖아.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더니. 흐읍. 네 어, 얼굴…….”
그가 사라진 건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가 연락을 못 받은 것도 그의 의지가 아닐 것이다.
금왕은 한국 내에선 하나의 제국을 이루며 제왕적 경영을 하는 대단한 기업이었다. 가히 한국 부호 중 가장 많은 권력을 쥐고 있으며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재벌이다.
그런 재벌가의 핏줄이, 스스로도 그 핏줄인지 모른 채 살다 끌려간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끌려가기 전까지는 평범한 서민처럼 지낸 데에는 남모를 사정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따스하고 아름다웠던 도한의 어머니가, 혼자 힘들게 갖은 잡일을 하며 도한을 키워 내 사정도 모르는 동네 사람들에게 홀어미라는 동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데에는 말 못 할 사연이 있을 거였다.
도한을 탓하면 안 됐다. 지금 가장 힘들고 괴로운 건 도한일 테니까.
그런데 마음이 이성처럼 똑똑하지 못했다.
주먹이 멋대로 그의 가슴팍을 쳐 댔다. 대체 왜 이제야 나타났냐며 원망하듯 소리쳤다.
“나오기 힘들었어.”
가까스로 참았던 눈물이 터져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오기 힘들었다는 말에, 정신병 걸린 회장 밑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아 눈물이 나왔다.
“아픈 건 난데, 우는 건 너네.”
도한이 장난스레 웃었다.
언젠가 어렸을 때 보았던 해맑은 웃음과 닮아 있었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언젠가 그에게 손목을 잡혔을 때처럼 휘연의 손목엔 열이 올랐다.
“나 아파. 여기, 쓰다듬어 줘.”
그가 휘연의 손목을 잡은 채 불거진 그의 상처를 톡톡 건드렸다.
휘연은 나머지 손으로 눈물을 닦곤 울음을 그쳤다.
“갑자기? 안 돼. 너 상처 덧나.”
당장이라도 그의 뺨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덧날까 봐 무서웠다.
“약국 가자. 아니면 우리 집에 가자. 거기 약 있어.”
“난 여기 너랑 단둘이 있고 싶어.”
슬픔이 서린 낮은 목소리.
“아무도 없이, 이렇게 우리 둘만 있자.”
휘연은 더 이상 그의 뜻을 거부할 수 없었다. 휘연은 결국 도한을 끌어안으며 눈을 맞췄다.
“우리 예쁜 도한이 얼굴. 이 예쁜 얼굴을…….”
작은 얼굴에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 상처 때문에 말할 때마다 목구멍에 바늘이 박힌 것처럼 콕콕 쑤셨다.
그럼에도 도한은 전혀 아프지 않은 건지 그저 덤덤히 휘연을 바라보며 옅게 웃을 뿐이었다.
“내가 아는 예쁜 얼굴은, 손휘연밖에 없는데.”
“너 안 아프지? 별 소리를 다 하고.”
“아니, 나 아픈데. 아, 아파.”
그의 상처를 어루만질 때 살짝 휘는 그의 눈매에 휘연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왜 이렇게 됐어.”
“……조금 맞았어.”
“누구한테.”
설마 제 핏줄이 이렇게 되기까지 때렸을까 싶어 다시 한번 물었지만.
“회장님한테.”
돌아오는 답은 불길한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도한의 얼굴을 문대던 휘연의 손이 멈췄다.
“그 소문, 맞았구나.”
네가 평범한 아이이길 바랐는데.
“설마 끌려가서도 나 보러 오겠다고 해서 맞은 거야?”
“……어.”
“왜 맞으면서까지 나 보러 왔어. 왜. 방법 많잖아, 나한테 닿을 방법.”
“없어.”
“생각이나 해 보고 말해.”
“네가 보고 싶은데 그럼 어떻게 해.”
한숨 섞인 낮은 목소리가 휘연의 귓바퀴를 타고 흘렀다.
“널 보지 말라고 보지 말까? 가지 말라고 가지 말까? 그러다 네가 없어져 있으면, 네가 다른 남자 품에라도 있으면, 네가 어떻게 되기라도 하면. 그럼…… 그럼 난 어떻게 살아.”
진심이 가득 담긴, 남자와 소년 사이의 눈빛.
그의 눈에 휘연은 심연에 빠진 것처럼 모든 감각이 녹진해졌다.
“너 못 보면, 나 죽어.”
“그럼 나는.”
답답했다.
“나 때문에 다친 널 봐야 하는 내 마음은?”
왜 하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금왕 그룹의 핏줄인지 운명의 신을 찾아가 잔인하게 죽이고 싶었다. 어떻게 운명을 이렇게 만들 수 있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옆집에 오지 말게 하든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와…… 사랑에 빠지지 않게 하든가.
왜 서로에게 서로일 수밖에 없게 만들어 놓고 이런 잔혹한 운명을 걷게 만든 거냐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고 싶었다.
“너 못 봐서 미쳐 죽을 것 같은 하루를 보내는 것보다, 하루 얻어터지는 게 나아.”
“도한아…….”
“사라지지 마. 없어지지도 마. 나 잊지도 마. 네가 어디 있든 난 널 찾아갈 거야. 내가 죽어서라도 너 보러 갈 거니까 넌 그렇게 알아.”
그 말에 휘연은 열사병에 걸린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새삼 도한을 보니, 그를 창조할 때 조물주는 꽤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획의 가지런한 눈썹, 살짝 올라간 색정적인 눈, 오뚝한 콧대, 도톰한 붉은 입술이 작은 얼굴 안에 오목조목 담겨 있었으니까.
감탄이 흐르는 얼굴을 한 옆집 꼬맹이였던 그가, 실은 대한민국 최고 재벌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휘연은 이질감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호, 해 줘.”
그럼에도 도한은 여전히 옆집 누나를 대하듯 휘연을 대했다.
“안 돼. 위험해. 감염될 수도 있어.”
“나 아픈데.”
“그래도! 네가 어린애도 아니고.”
“나 아파, 누나.”
누나라는 말에 휘연의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너 정말…….”
휘연은 못 이기는 척 호, 하고 입을 동그랗게 말고 불었다.
호, 호, 호.
지금껏 놀랐을 그의 마음을 향해. 지금껏 아팠을 그의 몸을 향해.
울음을 참기 위해서라도 뜨겁게 숨을 불어넣었다.
“그래 가지고 아픈 게 낫겠어?”
“뭐?”
오기가 생겨 휘연은 후욱, 크게 숨을 불어넣었다.
또다시 후욱, 숨을 내뱉으려는 순간 입술에 따스한 무언가가 닿았다.
휘연의 눈이 커다래졌다.
고개를 숙여 입술을 부딪친 도한이 그대로 휘연의 벌어진 입술을 감쳐물어 말아 올렸다. 느닷없는 감촉에 휘연의 눈에 별이 반짝였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은 계속 휘연의 입술에 머물다 서서히 떼어졌다.
휘연이 놀라 아무 저항도 하지 않은 게 마음에 들었는지, 색정적 입술 사이로 옅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입술까지 달아, 누난.”
감각이 깨이는 목소리.
휘연은 놓았던 정신을 붙들고 고개를 들어 도한을 바라봤다.
입술을 더 동그랗게 말아 후욱, 후욱 바람을 불어넣었다. 도한은 그 모습을 보고 예쁘다는 듯 부드럽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휘연이 그 입꼬리에 넋이 나갈 때, 다시금 그의 입술이 닿았다. 그리고 혀가 입안을 밀고 들어왔다.
달았다.
너무나도 달았다.
부드럽고 섬세하게 점막을 훑는 도한을 느끼며 휘연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불어 줘.”
너무 가까운 도한의 숨결.
휘연은 어지러울 정도로 색정적인 그의 목소리에 마른침만 넘겼다. 휘연의 숨결에 열이 너무 올라 그가 덥다고 느낄 것만 같았다.
칭찬하듯 아찔하게 쏟아지는 그의 음성 사이사이로 ‘누나’라는 말이 들렸다. 휘연의 심장이 멈출 것처럼 벅찼다.
숨결조차 단 남자는, 단어 하나로 휘연의 세상을 달콤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입술이 닿았다 멀어지며 휘연의 머리가 아찔해질 무렵.
“사랑해, 휘연아.”
소년의 숨결을 간직한 남자의 고백.
부드럽게 벌어지는 입술 속 음성이 생생하게 귓가에 파고들었다. 휘연의 온몸이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몇 번의 계절이 순환하고 나서 찾아온 2년 뒤, 2월의 어느 날.
“잘 만나고 있어서 다행이다, 휘연아.”
“그때 걱정했잖아, 너랑 도한이 헤어지는 줄 알고.”
도한이 사라졌던 건 인제고등학교 학생이라면 모두가 알 만한 전설적인 사건이 되었다. 도한은 금왕 그룹 회장과 어떤 타협을 했는지 다행히 휘연과 같은 동네에 살며 계속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다만 이 어마어마한 사건은 철저하게 통제된 언론 때문에 세상에 주목받지 못했다. 따라서 인제고등학교 학생들도 자연스레 몸을 사렸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던 도한을 보니 두려웠던 것이다. 금왕 그룹 핏줄도 그리되는데, 연고 없는 자신들이 함부로 금왕 그룹에 대한 얘기를 꺼내고 다녔다간 어떻게 될지는 아무리 어린 학생이라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이야기의 당사자인 휘연 앞에서는 이렇게 참아 왔던 궁금증과 할 말을 모두 털어놓곤 했다.
“이제 성인이네. 흐흐. 둘이 결혼은 할 거니?”
도한의 졸업식으로 가는 내내 친구들은 그런 질문을 했다.
“글쎄…….”
그녀의 희미한 목소리에 동창들이 발끈 열을 올렸다.
“어어, 왜 말끝을 흐려? 이게 고민할 일이야? 당연히 잡아야지!”
“진짜 의외다, 손휘연. 도한이 같은 남자를 또 어떻게 만나? 당연히 결혼해야지.”
마음 같아서는 휘연도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집안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운명은 기어코 휘연을 바닥 저변으로 끌어내렸다.
며칠 전, 부모님은 수북이 쌓인 계약서와 빚 고지서를 번갈아 보며 우셨다.
‘휘연아, 미안하다. 아빠가 미안해. 죽을죄를 지었어. 미안하다, 정말.’
‘휘연아, 엄마가 미안해. 어흑, 우리 휘연이 불쌍해서 어떡해. 우리 휘연이, 가여워서 어떡해…….’
다시 집 안에는 압류물품표가 덕지덕지 붙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늘 휘연을 속박했던 굴레가 다시 씌워지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휘연아. 너무 미안해. 무능력한 아빠, 엄마라서 미안해.’
‘……왜 자꾸 불안하게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응? 사정을 말해 줘야 알지. 또 뭐가 잘 안 됐어요?’
‘……휘연아.’
엄마는 휘연을 안아 주었다. 눈물로 어깨가 축축해질 때까지 그녀는 계속 울었다.
그리고 말해 주었다.
아버지는 주식 투자를 실패했고 엄마는 청약 주택 사기로 우리의 미래가 완전히 깨져 버렸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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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이없게도 그 상황을 듣자마자 나온 말은 ‘왜’였다.
이미 충분히 상황을 들었는데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왜, 왜, 왜!’
절망스러웠다. 신이 있다면 이래서는 안 되는데, 신이 있다면 이렇게 망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될 텐데.
부정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 휘연이 목청이 터지도록 몇 날 며칠을 우는 동안 30억의 빚을 지게 된 휘연의 집은 파산 신청을 했다.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다더니, 휘연의 인생은 끝없는 지하로 떨어졌다.
“어, 왔다! 이야, 애들 많이 왔네!”
친구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인제고등학교 제56회 졸업식]
새 출발을 축하하는 청춘들로 운동장은 빼곡했다.
그 빛나는 청춘에는 도한도 있었다.
‘……도한아.’
가슴에 맺혀 잊히지 않을 이름을 휘연은 남몰래 외롭게 불러 보았다.
음악과 웃음소리로 졸업식이 무르익고 있었다.
휘연은 아침 꽃집에서 사 온 꽃다발을 들고 사람들을 지나치며 걸었다.
분홍색, 파란색, 흰색의 아기자기한 꽃들이 화사하게 색별로 꽂힌 꽃다발을 바라보는 휘연의 눈에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꽃다발이 남들 것보다 화려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물망초를 선택한 이유를 휘연 스스로는 알고 있었기에.
물망초의 꽃말은 ‘날 잊지 마세요, 진실한 사랑’.
그 꽃말이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의 마음을 갈구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가슴이 저렸다.
‘……웃자, 일단은.’
하나 아무리 애써도 입꼬리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휘연은 꽃다발을 든 채 졸업식이 한창 무르익은 체육관 앞에 멈춰 섰다.
도한은 인기가 많으니 선후배와 선생님 할 것 없이 모두의 축하를 받을 것이다. 휘연이 없어도 그는 전혀 외롭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애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2월의 하늘은 새파랬다.
1년 전, 자신의 졸업을 축하해 줬던 도한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때만 해도 휘연은 빚을 갚아 나가며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줄만 알았는데.
“도한아…….”
그녀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왜.”
그 목소리에 휘연의 눈이 빠르게 커다래졌다.
음절 하나로도 휘연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 사람. 어른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면서도 살며시 벌어진 입술엔 소년의 숨결을 간직한, 순수와 성숙이 동시에 존재하는 남자.
도한이었다.
“도한아?”
“한참 찾았잖아, 누나.”
그는 휘연을 보자마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촉.
휘연이 그가 입을 맞출 때 감은 눈을 서서히 떴다. 눈에 담긴 도한은 옅게 웃고 있었다.
“이건 뭐야?”
도한이 휘연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바라보며 물었다.
휘연은 쓴 침을 삼키며 입을 떼었다.
“꽃.”
“그건 알아. 그니까 꽃을 왜 사 왔냐고.”
“어? 그야 오늘 네 졸업식이니까.”
“이미 누나가 꽃인데 무슨 꽃다발이야. 이런 거 필요 없어.”
도한에겐 꽃다발보다도 휘연이 중요했다. 그는 휘연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그 온기에 당황한 휘연이 불쑥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 그래도 받아. 졸업식인데.”
잊지 말아 달라는 말을 차마 못 해서, 이렇게 에둘러 표현하는 거니까.
휘연의 속을 알 길 없는 도한이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예쁜 누나가 주는 거니까 소중히 받을게. 그런데 이렇게 꽃도 준비했으면서 왜 안 들어왔어? 계속 찾고 있었어.”
“어……? 그냥, 좀, 우리 도한이 사람들한테 축하 많이 받고 있길래. 바빠 보여서 그냥 밖에 있었어.”
“다른 사람들 축하는 관심 없다는 거 알잖아. 내가 보고 싶었던 사람은 누나뿐이야. 요즘 바쁘다고 우리 자주 보지도 못했잖아.”
‘바쁘다’는 말에 심장이 아렸다.
‘누나’라는 말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속은 엉망진창이었지만 그의 졸업식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휘연은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바빴던 이유를 차마 말할 수 없어 애써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너, 교복은 어디 팔아먹었어?”
“응? 갑자기 웬 교복? 성인이 무슨 교복이야.”
“성인은 무슨. 진짜 성인이 되려면 아직 멀었어. 오늘 졸업식인데, 사진 찍을 땐 교복 입고 찍어야지. 언제 또 교복 입고 사진 남긴다고.”
“사진 따위 하나도 안 중요해.”
도한은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도 꽉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누나랑 빨리 놀러 가고 싶은데 교복을 왜 입어. 그리고 내가 말했지. 내 인생에서 사진이 중요한 순간은 우리 결혼식 할 때뿐일 거라고.”
결혼식.
도한은 종종 그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어렸을 때부터 서로를 향한 마음은 굳건했고, 결혼이란 어른들이나 하는 먼 미래의 얘기 같아도 둘 사이에도 따라오는 당연한 수순이라 여겼던 두 사람이었으니까.
휘연 역시 그와 같은 미래를 꿈꿨기에 행복했고, 그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단 사실에 희망을 얻곤 했다.
그러나.
‘……도한아, 미안해. 난, 난…… 우리 집은 이제…….’
이제 휘연은 안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이제 사치가 되었다는 것을. 제 존재가 도한에게 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휘연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도한과의 이별을.
무너지듯 가슴이 아파 왔다.
“도한아, 졸업 축하해.”
2월 햇살이 너무나 맑아 휘연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 도한의 졸업식은 끝이 났다.
그리고 휘연은 그와 함께 도시 곳곳을 누볐다.
점심을 먹고, 공원을 가고, 산책을 하고, 카페에서 단것도 먹고, 다시 저녁이 되었다.
도시에는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았다.
“보고 싶었어, 많이.”
휘연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쥔 그가 조용히 고백해 왔다.
감미로움에 휘연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집에 데려다줄게.”
때론 입술을 먼저 앗아 가던 도한이지만 이렇게 때때로 먼저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해 주는 순수한 남자이기도 했다.
평소였다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도한의 손을 잡으며 집으로 향했겠지만 휘연의 발걸음은 차마 떨어지질 않았다.
‘휘연아, 우리 곧 떠나야 할 것 같아. 우린 여기서 살 수가 없어.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겼다간 우리 모두 죽고 말 거야. 그러니까 묵묵히 지내다 떠난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돼. 알겠지? 미안해. 미안해, 휘연아. 엄마 아빠가 이렇게 무능력해서 너무 미안해. 그래도 엄마 아빠는 우리 휘연이랑 잘 살고 싶어, 계속……. 엄마 아빠는 우리 휘연이가 소중하니까 그래도 다시 노력하고 싶어. 그런데 여기선 아니야. 여기엔 너무 나쁜 사람이 많아……. 미안해, 휘연아. 자꾸 어딘가로 떠나게 만들어서 너무 미안해…….’
엄마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자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도한을 떠날 수 없었다.
그냥 이렇게 도한을 버리고 갈 수 없었다.
휘연은 눈물을 꾹 참고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달뜬 목소리로 눈을 휘었다.
“도한아.”
“응, 누나.”
떨림을 감추려고 숨을 참아 보기도 하고, 말을 멈춰 보기도 했지만 헛기침할 때조차 파르르 떨렸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휘연이 용기를 쥐어짜 내며 말했다.
“오늘은 집에 안 갈래.”
그 말에 도한의 눈이 짙어졌다.
“……무슨 말이야?”
“집에 안 가겠다고. 너랑 있겠다고.”
살짝 떨리는 목소리에 도한은 휘연의 양팔을 잡으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응. 괜찮아.”
“아니. 지금 집에 안 가겠다고 한 말…….”
도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침묵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거냐고.”
이미 어엿한 성인이 된 휘연이 모를 리 없었다. 휘연은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떨고 있잖아, 누나.”
무게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원래 낮았지만 지금은 더 밑으로 꺼져 더 이상 소년의 것이라고 생각될 만한 미성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완전한 남자였다.
휘연은 도한을 안았다. 남자의 체취가 물씬 풍겨 왔다.
“안아 줘, 도한아.”
네가 날 잊을 수 없게. 그러나 네 인생 가장 쓰레기가 될 날 네가 철저히 잊을 수 있도록.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세상이 멈춘 듯 고요했다.
휘연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옆으로 두꺼운 팔이 슥 하고 밀려 나왔다. 허리를 움켜잡은 손은 몹시 컸고 부드럽게 감싸 오는 손가락은 또 길었다.
휘연의 몸이 그에게 기울자 도한의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덮쳐 왔다.
“읍…….”
농밀하게 밀려왔다 끈적하게 치열을 훑으며 안을 범하는 도한이 삽시간에 거친 돌풍이 되어 휘연의 안을 휘몰아쳤다. 그가 잡아 준 허리가 꺾일 정도로 그의 힘은 강했다.
어린 시절 그가 선사했던 부드러운 키스와는 판이한 강렬한 키스였다.
“……도한아…….”
두 사람은 정신이 없었다. 여유가 없었다. 근처 호텔에 급하게 들어선 두 사람은 현관에서부터 뜨거웠다.
“하아, 하아.”
혀가 얽히며 타액이 오가는 농밀한 키스는 예상보다도 진득했다. 휘연도 꿈꿔 온 순간이었지만, 도한의 이런 남성성은 생각보다도 위압적이었다.
“흐읏…… 도한아.”
“하아, 하아. 누나.”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얽혔던 입술이 떨어졌다. 도한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오늘만을 꿈꿔 왔어.”
들끓는 목소리가 휘연을 휘감았다.
“맨날 이런 순간을 기다렸다고.”
“도한아…….”
오랜만에 만나 끓어오르는 마음이 서로의 입술을 탐하게 만들었다.
강렬한 욕구가 지배하는 키스였다. 목울대를 몇 번이고 움직이면서 빨아 당겨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아, 더 성질난 채로 맞부딪히는 입술, 치열과 입속을 긁어 대며 혼미한 정신을 만드는 움직임.
모든 것이 뜨거웠고, 모든 순간이 황홀했다.
“읏……!”
휘연은 니트 안쪽으로 밀려 들어오는 커다란 손길에 달뜬 숨을 내뱉었다. 은밀하게 살결을 쓸어 올리며 향하는 곳, 오래전부터 관계를 상상해 온 능숙한 손길이었다.
휘연은 아득해지는 정신 사이로 도한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휘연이 사랑한 눈매가 망막에 맺혔다. 까만 밤을 닮은 흑요석 같은 눈동자와 그것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날카로이 올라간 눈꼬리.
그 눈에 걸린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마주했을 땐, 휘연의 심장이 무겁게 박동했다.
서늘함이 내려앉던 입술은 욕망에 차, 액으로 번들거렸다.
니트 안쪽에서 살결을 쓸어 넘기던 손이 옷 밖으로 나와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의 손길에 의해 옷은 하릴없이 말려 올라갔다. 버클을 푸는 손길은, 거친 듯 감미로웠다.
투욱. 은은한 호텔 조명에 비친 그녀의 봉긋한 가슴은 수려했다. 휘연이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도한의 얼굴이 그녀의 가슴에 묻혔다.
“아아……!”
“하아, 왜 이렇게 예뻐.”
뜨거운 덩어리가 가슴에 닿았다. 아득해진 정신 속 휘연은 그것의 주인이 누군지 끊임없이 상기해 냈다.
도한이었다. 이도한. 그녀가 사랑하는. 그녀가 모든 걸 바쳐서라도 사랑하는. 삶의 모든 걸 내어 줄 수 있는.
살결을 쓸어 내던 입술은 그녀의 가슴 위를 돌고 돌아 정중앙으로 향했다.
“아아!”
그의 치열이 그녀의 정중앙을 잘근, 씹었다. 고통에 젖은 쾌락에 잠시 아득해졌지만 휘연은 조금 더 버텼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욕정을 풀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말끔했던 눈매는 진해져 있었고, 그 밑으로 자리 잡은 속눈썹은 숲처럼 빼곡했다. 곧 조각같이 날카롭게 내려온 콧대의 강줄기와 그 아래 자신의 가슴을 빨고 있는 그의 붉은 입술은 성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이미 정신은 쾌락으로 젖어 들어가고 있는 때에, 휘연의 정신에 별이 반짝 보였다.
“도, 도한아.”
휘연의 모직 치마 역시 하릴없이 위로 말아 올려졌다. 그녀의 레이스 달린 연분홍 면 속옷은, 그녀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말해 주었다.
휘연은 첫 경험에 너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라 그것만큼은 말리고 싶었다. 휘연이 급하게 도한의 어깨를 잡았다. 소용없었다. 도한은 이미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리지 마. 미칠 것 같으니까.”
욕망 속 또렷하게 낮은 목소리와 거침없는 자세. 뜨거운 염기로 달아오른 머릿속이 일그러지는 와중에도 그녀는 도한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젖은 속옷의 파인 곳이 도한의 손가락으로 문질러졌다. 길고 수려한 그의 손가락, 적당한 열과 속도로 마찰을 주며 휘연의 발끝까지 쾌락에 젖게 만들었다.
“……도한아…….”
앓는 듯한 신음과 함께 흘러나온 목소리. 아득해진 정신 속 무의식이 불러낸 그의 이름이었다. 그 목소리에 도한은 갑자기 일어섰다.
그에게선 남자의 체취가 물씬 느껴졌고 그녀가 사랑했던 그의 눈매엔 색욕이 걸려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보고 그렇게 흥분했다는 것, 그 사실에 휘연의 몸이 더 달아올랐다.
“팔 걸어, 누나.”
군주 같은 목소리에 휘연은 슥슥 팔을 걸었다. 그의 몸도 열기에 사로잡혔는지 뜨겁고 끈적했다. 그의 노골적인 체액에 코를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도한은 그녀를 번쩍 들었다.
공주님 안기가 되었을 때, 휘연은 몰래 도한의 턱선을 눈에 담았다.
그의 존재, 그의 욕망, 두 사람의 열기.
그 공간의 모든 것이 뜨거웠던 만큼 휘연의 마음도 달아올랐고, 달아오른 마음만큼 몸도 성욕으로 절절 끓었다.
성큼성큼, 그의 긴 다리가 몇 걸음 만에 두 사람을 침대로 인도했다. 그는 꽃을 다루듯 조심히 침대 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침대에 올라온 그의 태도는 사뭇 거칠게 바뀌었다.
“……너무 예뻐, 누나.”
부끄러웠지만, 욕망에 사로잡힌 두 다리는 하염없이 벌어졌다.
다리 아래쪽으로 도한이 내려갔다. 그의 손가락이 닿았다. 길고 하얀 손가락만큼은 무엇보다 차가웠다.
“젖은 속옷도.”
휘연은 부끄러움에 다리를 오므리고 싶었다. 다리를 조금 움찔했다. 곧, 도한의 큰 손이 저지했다.
“녹아내리는 가슴도. 지금 누나한테 보여 주고 싶을 만큼, 너무 예뻐.”
“으읏. 그런 말 하지 마.”
어른의 체취가 섞인 냄새에 그의 달뜬 숨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의 얼굴은, 그녀의 성기에 가까워져 있었다.
아직 얇은 면으로 가려져 있음에도, 젖었다는 걸 여실히 보여진다는 게 밑을 더 젖어 들게 만들었다.
그의 얇은 손가락이 다시 음부에 닿았다. 젖어 말려 들어가 있는 샘 쪽으로 그가 손가락을 지그시 눌렀다. 다시 시작이었다. 다 젖어 버린 면 위로 소음순과 대음순을 마찰시켰다. 이미 염기로 뜨거워져 버린 그곳을 마찰시키니 휘연은 어쩔 줄을 몰랐다. 발끝에까지 전율이 일어 발가락은 오므라들었다.
면 위로 마찰열을 내던 손가락이 속옷을 집었다.
설마,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가 속옷을 옆으로 밀었다.
왈칵, 하고 액이 쏟아져 나왔다. 음욕에 나온 뜨거운 액의 주인이 휘연이란 걸 여실히 증명하듯, 질구 안쪽이 꿀렁거렸다.
“넣지도 않았는데, 싼 거야?”
……그런 거 아니야. 휘연이 스러져 가는 목소리로 부정했다.
도한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쌀 거 같은 거, 누나뿐인 거 아니니까 괜찮아. 야한 목소리가 휘연의 귓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말할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음부에 닿아 엉덩이까지 움찔움찔했다. 열이 올라 미칠 것 같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닿다, 이내 물컹한 것이 닿았다.
“읍……!”
처음 맞이하는 남성에 음부에서 액이 쏟아졌다. 음부에서부터 생겨난 전율이 배꼽과 명치, 가슴을 타고 유두를 훑어 그녀의 머리끝까지 닿았다. 발가락은 더 이상 오므라지지 못할 만큼 오므라졌다.
도한은 개의치 않고 혀에 힘을 주곤 꼿꼿해진 그것으로 클리토리스를 눌렀다. 감전사라도 할 것처럼 강렬한 찌릿함이 튀었다. 그의 손은 들썩거리는 휘연의 엉덩이를 덥석 움켜잡았다. 휘연은 그에게 종속된 느낌이었다. 흥분되었다.
“제대로 먹고 싶으니까, 그만 움직여.”
성인이 된 그는 무섭게 군림했다. 그 동굴 같은 목소리에 담긴 단호한 명령이 더 휘연을 가슴 뛰게 만들었다. 심박보다 강렬한 박동이 그녀의 몸 가장 깊숙한 곳에서 느껴졌다.
질구 안을 헤집는 그의 혀에 질 내벽은 꿈틀거렸다. 질구는 음탕하게 꿈틀거리며 열리고 다물어지길 반복했다. 그의 뜨거운 덩어리가 질 내벽을 헤엄칠 때마다 그녀의 안쪽은 용암이 끓는 것처럼 뜨거웠다. 쾌락을 긁어 대는 그의 움직임에 그의 타액인지, 저의 체액인지 모를 음란한 액체들이 왈칵왈칵 쏟아졌다.
그 모든 걸 빨아 먹겠다는 듯 도한은 키스하듯 계속 입을 맞췄다.
“하아. 보지에 꿀이라도 발라 뒀어? 왜 이렇게 달아, 미치게.”
그 외설적인 말에, 휘연의 얼굴에 더 뜨거운 열이 올랐다. 지이익, 지퍼 내리는 소리에 휘연의 정신도 까무룩 소멸하는 듯했다.
“오늘 하루 종일 이랬어. 아니, 그동안 누나 생각만 하면 이랬지.”
지퍼 사이로 드러난 건 묵직한 성기였다. 젖어 번들거리는 그것은 어슴푸레한 달빛을 받아 그 욕망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만지지 않아도 느껴지는 거대한 부피감과 묵직함, 단단함이 마른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휘연이 말을 할 수 있을 때부터 찾아온 옆집 아이였다. 순수하고 순백했던 눈을 가진.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욕망으로 몸이 끓어오르는 한 마리의 짐승 같은 남자만 있었다.
젖어 번들거리는 그것을 음부에 마찰시키는 그의 허리놀림이 꽤나 위압적이었다. 성기가 맞비벼지는 곳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달아오른 몸이 어디까지 더 뜨거워질 수 있을까 신기할 뿐이었다.
“사랑해, 누나.”
명령 같은 말과 함께 페니스의 뿌리까지 휘연의 안으로 들어갔다.
“으읏…….”
“하아!”
도한의 낮은 신음과 휘연의 교성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처음 남성의 것을 맞이한 휘연의 그곳은 도한의 것에 달라붙어 놓아주지 않고 음탕하게 조여 들었다. 격렬한 파도가 몰아치듯 그의 움직임은 격해졌다. 그가 세게 성기를 박을 때마다 휘연의 질은 더, 더 단단히 페니스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조일 수 있는 끝을 향해 조이는 것 같았다. 내벽은 페니스를 물고 뜯어 버리겠다는 듯 꽉, 더 꽉 조였다.
“하아, 좋아서 미치겠어.”
쾌락에 젖은 표정, 낮은 목소리, 열기에 젖은 한숨.
제 몸 위에 군림하고 있는 도한의 턱 끝에서 떨어지는 땀마저 휘연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사랑해, 도한아.’
휘연은 더 세게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잊을 수 없게, 제발 잊을 수 없도록. 고통에 겨워서라도 잊을 수 없도록 그를 각인하고 싶었다.
“더 세게 해 줘, 도한아. 더……!”
그녀의 손톱이 그의 넓은 등을 파고들었다. 할퀸 자국들이 선명히 열꽃처럼 피어올랐지만 도한은 여념 없었다.
도한은 몸을 완전히 밀착시켰다. 휘연을 소멸시킬 작정인 양 매섭게도 몰아쳤다. 격정의 파도에 쾌락이 넘실거렸다.
“하윽, 읏, 아, 아, 아아.”
휘연은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격렬한 그의 몸짓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고통과 쾌감에 헐떡이면서도 그의 성기를 문 질은 단단히 맞물려 질퍽질퍽 소리를 내었다.
곧 질 내벽에서부터 돌풍이 몰아치듯 강력한 자극이 빠르게 모이더니, 이내 불꽃놀이가 터질 때처럼 강렬한 쾌락이 퍼져 나갔다.
“아, 아아……!”
머리카락부터 발톱 끝까지 관통한 전율이 온 혈류를 타고 돌자 휘연이 파르르 떨었다.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그녀의 질은 울컥울컥 액을 내보냈다. 윤활제가 되었는지, 도한은 더 격한 빠르기로 성기를 박았다.
곧, 그의 입에서도 탁한 신음이 나왔다. 오르가슴의 열기 섞인 저음에 휘연 몸이 엷게 떨렸다. 이대로 부서져도 좋으니, 휘연은 도한을 세게 끌어안았다.
“사랑해.”
그 어느 때보다도 고조된 억양으로 고백했다. 심장에서부터 이끌어 내 목을 거쳐 세상 밖으로 토해 내는 사랑 같은 처절함이었다. 휘연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랑해, 도한아. 영원히.”
맞물린 몸 사이에 틈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두 사람은 완벽한 하나였다.
도한 역시 그녀의 몸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벅찬 목소리로 답했다.
“나도.”
달콤한 저음에 휘연은 그의 품에 안겼다.
“나도 사랑해, 누나. 너무너무 사랑해.”
그의 고백에 휘연의 가슴에 생채기가 일었다. 그 역시 벅차오르는지 터질 듯한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였다.
휘연은 눈을 감았다.
비가 오던 날 마주했던 그 처연한 눈동자.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는 서로밖에 없던 우리.
평생을 약속하며 사랑하기로 했지만 끝내 이어질 순 없었던 우리.
가엾은 도한이 자신을 찬찬히 잊어 주기를 바라며 그의 몸속에서 녹아내렸다.
서로가 서로밖에 없어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서로를 영원히 사랑하리라 생각했지만 그 약속을 내가 깨 버렸다.
이 밤이, 나한테는 잊을 수 없는 죄악으로 각인되고, 너에겐 흔적도 남지 않는 밤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