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쌓여 가다
“뭐야, 썩 안 꺼져?”
사내는 비에 흠뻑 젖은 휘연을 밀쳤다. 연약한 휘연의 몸은 그대로 밀쳐졌다.
찰바닥!
물웅덩이에 엉덩방아를 찧자 속옷까지 젖어 버렸다. 차가운 비가 아니라 절망이 스며드는 듯했다.
용 문신이 가득한 그는 그런 휘연에겐 관심 없다는 듯 무시하더니 다시 아이에게 발길질했다. 눈앞에서 잔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퍽, 퍽, 퍽!
근육질의 우람한 사내는 한 줌의 낙엽처럼 여리고 맑은 아이를 팼다.
“야, 이 개새끼야, 니네 엄마 데려오라는 게 그렇게 어려워? 어?”
퍽, 퍽, 퍽!
남자는 계속 무어라 말을 하며 아이를 때렸다.
아이는 몸을 웅크린 채 익숙하다는 듯 맞았다. 소리 지르지도, 울지도 않았다.
순간 아빠가 맞던 모습이 겹쳐졌다.
이럴 땐 피해야 하는데, 피하는 게 맞는 건데. 엄마가 무서운 사람들이랑 엮이지 말랬는데.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흐흑…….”
쏴아아아.
비가 세차게 내렸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르겠던 물은 휘연의 얼굴을 흥건하게 적셨다.
“흐아아앙…….”
휘연은 어른을 찾아 길을 달렸다. 제일 처음 보이던 아저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후줄근한 양복을 입고 있던 그 사람은 비에 젖은 채 우는 휘연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곧 그녀와 함께 문제의 그곳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내내 휘연은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맞은 것도 아닌데,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집안의 몰락을 톡톡히 확인한 날이어서 그랬을까? 저처럼 비 맞고 있는 게 슬퍼서 그랬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맞고 있는 모습에서 아빠를 발견해서 그랬을까?
휘연은 아저씨의 우산을 쓰라는 말에도 고개만 휘저으며 빨리 달려가야 한다고 외쳤다. 아이가 맞고 있으니까. 별처럼 빛나는 눈을 갖고 있던 아이가 맞고 있으니까.
사내와 아이가 있던 작은 슈퍼 앞으로 숨이 벅찰 때까지 달려갔다.
문신을 한 사내는 달려오는 휘연과 양복을 입은 아저씨를 보자마자 욕을 하며 눈을 부라렸다. 아저씨가 무언가를 보여 주자 사내의 얼굴이 굳더니 곧바로 튀었다.
그런 건 예상에 없었다. 더 예상치 못한 건, 그 아저씨도 사내를 잡으러 달려갔다는 것이다.
비를 맞는 아이와 두 남자의 추격전을 번갈아 보던 휘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발을 동동 구르던 휘연은 울먹거리며 아이를 바라보았는데, 그 아이의 눈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휘연은 불안한 눈을 굴리다 곧 눈앞에 슈퍼가 있다는 걸 자각했다. 그래서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 주인을 찾았다. 주인 할머니는 마룻바닥에 누워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 저 우산 하나 사 갈게요. 근데 지금은 천 원밖에 없어요. 그래도 나중에 꼭 돈 드리러 올게요. 나중에 드릴 테니까 지금 이거 가져가도 돼요?”
귀를 먹은 건지 노인은 답이 없었다.
휘연은 울먹거렸다.
“할머니, 죄송해요. 제가 지금은 돈이 없는데, 꼭 우산을 씌워 줘야 하는 아이가 있어요. 안 그러면 감기 걸리고 말 거예요. 저 어제 이사 온 노루귀아파트 사는 휘연이에요. 꼭 갚을게요. 할머니, 네?”
노인은 미동이 없었다. 휘연은 울먹거리며 투명한 우산 하나를 집어 들었다.
급하게 밖을 나가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아이는 이미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비를 맞은 채 가는 그의 뒷모습이 너무 쓸쓸해 마음이 아팠다.
그가 발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여 휘연은 또 죽을 것처럼 달렸다.
겨우 그의 앞을 막아서자 또다시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아이의 입술은 부르트고 온몸엔 피멍이 들어 있었다.
무감한 그 눈빛에 휘연은 제가 다친 것처럼 가슴이 욱신거렸다. 무서운 사람들이 집으로 쳐들어와 아빠를 때릴 때 휘연의 가슴이 멍들었던 것처럼 아팠다.
“우산 써. 비 맞잖아.”
투명한 우산에 후두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맞고 혼자 쓸쓸히 걸어가는 게 일과인 사람처럼 슬픔도 분노도 절망도 없었다. 그게 더 휘연의 가슴을 찢었다.
“얘!”
울컥,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 벅찬 음성에 비를 맞던 아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휘연은 다시 그 아이 앞으로 달려가 우산을 들이밀었다.
다시 봐도 작고 여린 아이였다.
남자아이임에도 고운 살결과 빼곡히 찬 속눈썹, 큰 눈망울, 앵두 같은 입술이 보기 좋게 예뻤다.
너무나도 고운 아이인데 왜 맞고 있었을까.
휘연이 단순히 사는 집 때문에 무시 받았던 것처럼 이 아이도 그래서 그런 무서운 일을 당한 건 아닐까 싶어 괜히 마음이 미어졌다.
“감기 들어. 우산 꼭 써.”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공허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의 눈만큼은 달랐다.
그 아이의 눈에는 또래 사이에선 볼 수 없는 뜨겁고도 이글거리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것이 다시금 휘연의 마음을 울렸다.
분명 이 아이에게 잘못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억울하게 맞은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이 아이는 왜 울지 않을까. 왜 내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나올까.
보석처럼 빛나지만 공허한 아이 앞에서 휘연은 다시 한번 울먹이며 말했다.
“우산 써, 제발! 감기 걸려!”
그럼에도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체념한 듯 목석처럼 가만히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직접 손에 우산을 쥐여 주려고 그의 손을 잡은 순간, 휘연의 눈이 흔들렸다.
아이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 아이가 갖고 있던, 타오르는 불에 수십 번 달궜다 빼낸 쇠처럼 강직하고도 뜨거운 눈처럼 열이 올라 있었다.
쏴아아아.
비는 더 세차게 내렸다. 아이는 우산을 쥐여 주려고 폈던 손을 거부하며 오히려 휘연의 손에 우산을 단단히 쥐여 주었다.
이미 혼자인 건 익숙한 건지, 그는 그렇게 혼자 걸어갔다.
휘연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휘연은 재빨리 집에 들어가서 샤워를 끝마쳤다. 부모님에게 비에 홀딱 젖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서 받은 숙제를 하려고 알림장을 펼친 순간 부모님이 들어왔다.
“우리 딸!”
가죽 공방을 하는 두 분은 그날도 가죽 특유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휘연은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비 오는데 괜찮았어, 우리 딸?”
“응, 나는 괜찮았어요.”
“우산이 없었는데 비는 안 맞았고?”
현관에 우산을 숨겨 두다시피 둬서 부모님은 그 투명 우산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부모님의 얼굴에 미안함이 서린 걸 보자 휘연은 차마 비를 맞고 다녔다는 걸 말할 수 없었다.
“네! 우산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같이 쓰고 왔어요.”
“그래? 다행이구나. 벌써 좋은 친구들 많이 사귀었나 보다, 우리 딸.”
차마 학교에서 집으로 차별받았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휘연은 엄마의 말에 더 대답 않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아빠와 엄마는 웃으면서 봉다리를 하나 건넸다. 휘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게 뭐예요?”
“이사 떡. 휘연이가 옆집에 주고 올래?”
시루떡에서는 뭉게뭉게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가요?”
“응. 엄마 아빠가 윗집, 아랫집에 주고 왔는데 옆집에 휘연이 또래가 산다고 하더라고. 우리 휘연이랑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서.”
……이런 상황에서 뭐가 좋아.
아랫입이 불쑥 나올 것 같았지만 휘연은 참았다. 그랬다가는 그동안의 설움이 폭발할 것 같았기에.
휘연은 힘들게 일하고 온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떡을 들고 바깥으로 나섰다. 계산도 제대로 하지 않고 멋대로 가져온 투명 우산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휘연은 눈을 딱 감고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탁.
휘연의 집 문을 닫자 바로 맞은편 문이 보였다. 거대한 지옥문 같았다.
‘이상한 사람이 살고 있으면 어떡하지.’
집에 오기 전 마주쳤던 순간이 떠올랐다. 눈빛만으로 힘 빠지게 만드는 무서운 사내가 살까 봐 두려웠다. 그럼에도 이사 떡을 사 온 부모님의 뜻을 거스를 순 없어 휘연은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까치발을 하며 하늘처럼 높이 있던 초인종을 꾸욱 눌렀다.
띵-동.
고전적인 벨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하지만 답은 없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건가.’
따끈따끈한 떡은 여전히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어차피 줘야 한다면 빨리 건네서 마음의 부담을 지우고 싶었다.
띵-동. 띵-동.
몇 번을 더 눌렀지만 애석하게도 묵묵부답이었다.
비상계단에 앉아 휘연은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창밖 세상은 아직도 흐릿했다.
‘비가 여전히 많이 내리네…….’
그 더러운 아스팔트 위에서 서럽게 맞고 있던 아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 모습과 그 아이의 올곧은 눈동자도 잊히질 않았다.
‘예전에 배웠던 노래를 부를까?’
빗소리를 들으며 휘연은 이전 동네 유치원에서 배웠던 노래를 떠올렸다. 한 번 부르고 나서 다시 띵동, 두 번 부르고 나서 띵동, 세 번 부르고 나서 띵동. 그래도 여전히 답이 없었다.
‘오늘은 그냥 사람이 없었다고 해야겠다.’
차갑게 식어 가는 시루떡을 보며 휘연은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오늘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그대로 일어서려는데, 자박자박 발소리가 비상계단 아래쪽에서 들렸다.
‘……누구지?’
휘연은 침을 꿀꺽 삼키고 숨을 죽였다.
자박자박.
심장을 조이는 소리에 휘연의 솜털까지 쭈뼛 섰다.
누굴까. 옆집 이웃일까? 이웃이면 어떤 사람일까? 무서운 아저씨일까? 아니면 인자한 아주머니일까?
사람의 인영을 대놓고 쳐다볼 순 없어 휘연은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 조심스럽게 고개를 아래로 돌렸다.
어느 순간 발소리가 멈췄다. 그제야 휘연도 슬쩍 고개를 들어 보았다.
그 순간, 휘연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아……!”
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 아이였다.
아까 보았던, 비를 맞던 아이.
바로 집으로 가는 줄 알았더니, 방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비를 그렇게 맞고도 이제야 집에 온 듯싶었다.
그 순간만큼은 굳건하던 그 아이의 눈망울도 흔들렸다.
어디서 더 맞았는지 옷은 엉망진창이었고, 온몸에는 피멍이 군데군데 들어 있었다.
울컥, 다시 뜨거운 게 목으로 솟아올랐다.
“나 옆집에 이사 왔어.”
메이는 목소리를 겨우 추스르며 말을 이었다. 이런 시시콜콜한 말이 아니라 아프지 않았는지, 괴롭진 않았는지, 대체 어디 있었는지 등을 묻고 싶었는데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여기 살아?”
휘연의 조심스런 질문에 그 아이는 머뭇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계단에 앉아 있는 휘연과 그 아이의 눈높이가 맞아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마음이 욱신거렸다.
“난 손휘연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름을 알려 줬다. 그 아이는 절대 반응하지 않으리라 생각해 휘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그때.
“이도한.”
찌르르,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맑은 목소리.
휘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고결하게 빛나는 은방울꽃처럼 고고한 그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도한.
고결하고, 맑았다.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예쁜 이름이었다.
“내 이름은 이도한이야.”
아무리 짓밟히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꽃봉우리를 피워 내는 꽃처럼 굳건한 그는 한 번 더 이름을 말해 주었다.
그 이름이 귓가에 맴돌았다.
도한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입고도 아무렇지 않게 현관문을 열었다.
그제야 휘연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저기!”
쓸쓸하게 혼자 집으로 들어가는 그가 너무 적적해 보여 불쑥 붙잡고 말았다. 도한아, 라고 불러 줄걸. 약간의 후회도 들었다.
휘연은 머뭇거리다 불쑥 떡을 내밀었다. 그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이거, 시루떡인데 집에 가져가. 우리 집에서 쏘는 거야.”
“……주는 거야?”
“응. 원래 이사 오면 잘 지내자는 의미에서 떡을 돌린대. 지금은 좀 식어 버렸지만 그래도 맛있을 거야.”
식었다고 별로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괜히 동정하는 거라고 마음 아파하면 어떡하지.
휘연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도한이 받을지 않을지 걱정되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을 때, 그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줘.”
툭 내던진 말이었지만 그건 큰 변화였다.
휘연은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아까처럼 어떤 도움도 받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는데 기뻤다.
도한은 떡을 받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는 휘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다가 문이 채 닫히기 전 잠시 멈췄다.
거의 닫혔던 문이 다시 살짝 열리더니, 그가 얼굴을 내밀어 휘연을 바라보았다.
툭, 맑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고마워.”
진창에 핀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
“휘연아! 어디 가? 점심 끝나고 피구 할 건데 같이 안 할래?”
“응, 나는 갈 데가 있어!”
시간은 물 흐르듯 흘렀고, 휘연은 어느 순간부터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피구 하는 것보다 도서관에 가는 걸 즐기게 되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오는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건 너무나도 설레는 일이었다.
‘오늘은 이 책이 좋겠다.’
휘연이 한가득 책을 골라 도서관 카드를 건넬 때면 사서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무거워서 다 들고 가겠어?”
“네! 잘 들고 갈 수 있어요!”
“이 책 좀 어려운데 괜찮겠어? 더 쉬운 난이도의 책도 있는데 선생님이 추천해 줄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녀는 휘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아하게 웃어 주었다.
“우리 휘연이 똑똑하기도 하지.”
“헤헤.”
휘연은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았다.
‘도한아, 사람들이 너보고 똑똑하대.’
휘연은 양손 가득 커다란 책을 들고 교실로 갔다. 책가방이 터질 기세로 책을 한가득 넣으면 그게 너무 좋았다.
마음이 뿌듯했다.
“어, 여기 있었네. 휘연아, 우리 이제 자리 나서 놀이터에서 놀 건데 같이 놀래?”
“나 바쁜데?”
그렇게 거절하면, 친구는 징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다 휘연에게 졸랐다.
“또 책 읽으려고? 십 분만 놀자~”
한참을 고민하다 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한에게 책을 읽어 주려면 체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니까 몸을 움직일 필요도 있어 보였다. 휘연은 앙칼진 눈을 지으며 도도하게 말했다.
“딱 십 분이야.”
“응, 그래. 가자!”
비록 계급은 상, 중, 하로 나뉘어 있었지만 걱정과 달리 ‘상’에 속한 아이들 빼고는 모두들 잘 어울려 놀았다. 휘연도 걱정과 달리 아이들과 무난하게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휘연은 노는 시간보다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게 좋았다.
그리고 하루를 열심히 보내고 하교할 시간이 되면, 그때 휘연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가방이 터질 것처럼 무거워도 발걸음만큼은 가벼웠다.
하교를 하면, 휘연의 진짜 행복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어깨가 무거워도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면, 놀이터에는 그 아이가 있었다.
“도한아!”
꾀죄죄하고 남루한 차림이지만 눈만큼은 너무나 맑아 멀리서도 눈에 띄는 아이.
그 아이가 휘연의 행복이었다.
“오늘은 우주 책을 가져왔어.”
“응, 좋아.”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서로 함께하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휘연이지만 도한은 그런 휘연을 언제나 기다렸다. 휘연도 자연스럽게 옆집 아이인 도한을 살뜰하게 챙기게 되었다.
“읽어 줘. 궁금해.”
“응. 이건 우주에 관련된 책이야. 재밌을 거야.”
“우주?”
“응. 있지, 우주란 말이야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래. 엄청 커다랗대.”
“우리 집 별로 안 큰데.”
“음, 이 집 말고 눈에 안 보이는 커다란 큰 집이 있어. 밤에 보이는 별들 있지? 그 별들이 수백, 수천 개 모여서 만든 게 우주인 거야.”
도한은 이해를 하지 못했는지 눈썹을 구기다가도 책을 보면 질문을 끊임없이 늘어놓곤 했다. 그러면 휘연은 졸음을 이겨 가며 읽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도한에게 설명해 주었다.
유치원을 다니지 않는 도한이 혹시라도 저 때문에 잘못된 지식을 얻을까 봐 언제나 밤새 공부했다. 그가 우주를 보고 싶다 하면 우주 공부를 열심히 했고, 음악에 대해 알고 싶다 하면 음악 공부를 죽어라 했다. 그림 역사를 알고 싶다 하면 도서관에서 그림 관련 책을 모두 빌렸고, 세계사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면 담임선생님께 이것저것 물어보며 정보를 얻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것들을 도한에게 알려 줄 때면 도한의 눈은 생기로 반짝였다.
행복했다.
가진 것 없는 휘연과 도한이었지만, 그렇게 붙어 있는 순간이 즐거웠다.
저로 인해 생기를 찾아 가고, 때론 ‘누나’ 하며 따르고, 휘연이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언제나 곁에 있는 도한이 소중했다.
남들은 휘연이 도한에게 아낌없이 퍼부어 준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럼 우주란 건 엄청나게 소중하고 중요한 거네?”
“응, 맞아. 도한이가 제대로 이해한 거야.”
“우주는 누나 같은 거구나.”
“응?”
“반짝반짝 빛나고 엄청 소중한 거니까.”
“아…….”
항상 그렇게 순수한 눈과 말로 휘연에게 힘을 주었으니까.
그래서 두 사람은 언제나 함께였다.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함께 웃고 울고 가슴 아파하고, 기뻐하고.
서로의 존재는 단순히 옆집 누나동생을 넘어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유난히 푸르렀던 가을날, 비가 억세게 쏟아질 때 보았던 그 남자아이는 해가 지날수록 곱게 자라났다. 작고 연약했던 아이는 갈수록 똑똑해지고 빛나며 꽃처럼 피어났다.
진창이어서 아무 의미도 없을 줄 알았던 인생에서 휘연은 희망을 보았고, 그 덕에 힘을 얻어 살아갔다.
행복을 함께하고 슬픔을 공유했다. 지칠 땐 서로가 위안이 되었고 슬픈 땐 서로가 버팀목이 되었다.
씨앗에서 새싹이 나고, 꽃이 피면 열매가 맺는 게 당연한 것처럼 두 사람 사이의 사랑도 무럭무럭 자라나 굳건해지는 건 당연한 순리였다.
아이의 티를 벗어나 소년이 돼 갈수록 그는 고결하고 아름다웠다.
그런 그는 휘연을 사랑했다. 휘연 역시 그를 사랑하는 건 당연했다.
진창에서 각인된 서로는 서로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신이 있다면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운명은 잔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