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 피어난 장미를 과감히-9화 (9/9)

9화: 모두 올바른 제자리로

공왕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가 울렸다. 홀 안의 모두가 입을 쫙 벌리고 넋을 놓고 있었다. 로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라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회의실에는 호위병을 제외하고, 서열 막론 모두가 무장을 해제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래서 처음 롬 황자가 이케르에게 검을 넘겨받아 치켜들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뒤로 넘어갈 것처럼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 미쳤어? 아무리 비세그라드라 해도, 타국의 어전 앞에서 검을 빼 들다니!

하지만 검은 곧 트리포노프 자국의 황자인 세르반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세르반은 검집에서 검을 빼 들고 장막으로 달려가 검날을 위에서부터 힘차게 내리쳤다. 둘로 갈라진 장막은 너덜너덜 흔들리다 힘없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공왕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무장한 기사들에게 손짓해 보였다.

“뭐, 뭣들 하느냐! 저 대역죄인을 어서 잡아라!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아무리 내 아들이라도… 피와 살을 나눈 혈육이라도…….”

“진검이 아닙니다.”

롬은 세르반의 손에서 다시 검을 넘겨받아, 좌중의 모두가 나무로 만들어진 검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게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이케르에게 돌려주었다. 세르반은 공왕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장막은 이미 찢겨 있었습니다. 시종들이 비밀리에 한 땀 한 땀 엮어서 지금까지 멀쩡한 것처럼 보였을 뿐. 그래서 목도로 힘만 주었는데도 저렇게 손상된 원상태로 돌아간 겁니다, 폐하, 아니… 아버님.”

“뭐, 뭐라고? 말도 안 돼! 도대체 언제… 어떻게 저 성스러운 장막이…….”

“오래전, 천재가 아닌 인재로 찢어진 것입니다. 안톤이 제1 황자로 책봉되고 처음 계승식을 열었던 다섯 살 생일… 그날 밤 안톤이 시종들과 숨바꼭질 중 휘장 뒤에 숨어서 매달리다 찢어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머님?”

공왕 폐하 옆에 있던 황비가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울먹거릴망정, 결심이 선 얼굴로 장남과 차남 모두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렇습니다.”

공왕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 대경실색한 얼굴로 황비를 올려다보았다.

“세르반 황자가 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네, 점성술사 카잔은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 원래의 예언을 다시 뒤집어 이렇게 말했었죠. 쌍둥이 중 첫째를 그림자로, 둘째를 옥좌에 앉힐 빛으로 다시 책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케르 코르티나가 신의 분노를 사서 벼락 맞아 둘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설령 그 얼토당토않은 말이 사실이라 해도… 계승식 날 휘장이 갈라진 것 자체가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증거가 아니었을까요. 그날부터, 우리 두 아들들은 지금까지 불행하게 살아왔고 그것이야말로 저에게는 최대의 재앙이었으니까요.”

“뭐… 뭐라고……!”

“그동안 아들 둘 다 잃을까 싶어… 점성술사의 점괘가 나올 때마다 억지로 따랐지만… 저 역시 더 이상은 이런 사태가 계속되는 걸 방관하고 묵인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 두 아들들이 각자가 원하는 대로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면… 저도 떠나겠습니다, 폐하.”

공왕은 한 손으로 심장을 부여잡고 뭐라고 쇳소리를 흘렸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세르반의 호출에, 홀 어딘가 있던 황실 의원들이 서둘러 달려와 공왕의 상태를 살피고 부축해 일으켰다. 왕은 결국 들것에 실려 홀 안을 떠났다.

황실 일가와 대신들, 국빈들까지 아직도 놀라움을 거둬 내지 못한 얼굴이었다. 이 소란 중에 침착한 사람은 롬 데르반과 세르반 황자 둘뿐이었다. 롬은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는 로사를 끌어당겨 살며시 안았다.

“다 잘된 것 같습니다. 폐하의 심장에 좀 무리가 간 것 같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이고… 모든 일에 대가는 따르게 마련이니까요. 본인이 지금까지 저지른 행적에 비하면 그리 큰 대가도 아니고.”

롬은 다시 경어를 쓰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짧게 어렸다가 사라졌다.

“정말 대단하네요. 하룻밤 새 세르반 님과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뒀다니…….”

“이런. 처음이네요, 로사.”

“뭐가요?”

롬의 능글맞은 웃음에 로사는 미간을 좁혔다.

“당신이 내 손을 밀어내고 쳐 내지 않은 게 말입니다. 이제야 당신도 내게 완전히…….”

로사는 즉시 그의 손을 쳐 내고 어깨를 힘껏 밀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다시 뻗어 온 롬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다음 날, 하늘은 무척 쾌청하고 맑았다. 마치 하늘도 곧 항해를 떠날 배의 순항을 적극 기원해 주는 것 같았다. 자매는 아주 가까운 미래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작별의 포옹을 나눴다.

“언니, 그럼 다음 달 계승식에 다시 올 테니까 그때까지 건강해야 돼.”

“그래. 마음은 지금 함께 가서 네 혼례식을 보고 싶지만… 공왕 폐하가 자리보전하고 누워 계시니.”

데지레는 동생을 꼭 끌어안고 몇 번이나 감사의 말을 속삭였다.

“로사, 고마워. 너랑 롬 데르반 황자님 모두 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세르반 님과 내가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할 수 없어.”

황실 일가 모두가 나와서 배웅하는 가운데, 배가 천천히 출항을 알렸다. 로사도 롬 황자와 나란히 난간에 기대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맨 앞에서 말렉 후작과 나란히 서서, 열심히 손을 흔드는 알리체의 모습도 보였다. 로사는 그녀가 어젯밤 그리고 조찬 때 선물로 준 벨벳 머리 장식과 편지가 든 레이스 상자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그녀는 알리체를 향해 크게 손짓해 보였다.

이번에는 함께 가지 못하지만… 알리체 님, 조만간 후작님과 혼례를 올리시는 대로 꼭 비세그라드에 오세요.

네, 예비 숙모님. 아르투르랑 꼭 갈게요! 데르어 공부 더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조금 전의 대화를 뒤로하고, 비세그라드 국기를 단 대형 범선이 푸른 바다 위를 순조롭게 나아갔다. 이대로 순항이 계속된다면 내일 저녁 무렵에는 비세그라드에 도착해 있을 예정이었다.

“…사. 로사.”

다정한 음색에 눈이 천천히 떠졌다. 어젯밤 몇 번이나 그에게 안겼는지, 그 뒤로 얼마나 잤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이마와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롬이 보였다. 선창 밖으로 햇살이 비쳐 드는 걸 보니 해가 중천에 뜬 지 오래된 것 같았다.

“비세그라드에 곧 도착할 거야. 더 자게 해 주고 싶지만 슬슬 일어나야 돼.”

“비세그라드에…….”

로사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간밤의 피로로 좀처럼 떠지지 않던 눈이 활짝 떠졌다. 순탄한 항해 덕분인지, 배는 예정보다 하루 빨리 도착해 있었다.

“타샤와 엘리네가 준비를 도와줄 거야. 항구에 닿는 즉시 난 바로 폐하를 뵈러 가야 해. 혼례식으로 떠들썩하겠지만 어머님과 동생들이 잘 돌봐 줄 거야. 특히 어머니가 목 빠지게 기다리고 계셔.”

바깥에서 그를 부르는 수행원의 외침이 들렸다. 유쾌한 소란으로 보아 비세그라드 공국의 육지가 시야에 들어온 듯했다. 롬은 그녀의 입술에 재빨리 키스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나가자마자 시종 엘리네와 타냐가 두 손 가득 옷과 장신구 상자를 끌어안고 선실로 들어섰다.

“로슬린 님! 시간이 별로 없어요, 어서 최대한 예쁘게 꾸미셔야죠! 순항에다 바람이 어젯밤부터 이쪽으로만 불어서 예상보다 반나절 빨리 도착했어요-”

“이건 길조랍니다. 데르 해의 신들도 로슬린 님과 이 국혼을 환영한다는 의미지요.”

두 여자는 만면 가득 웃음을 띠고 로사를 에워쌌다. 그들은 오늘 밤, 제1 황자비가 될 귀하신 몸을 제 손으로 치장한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비세그라드 드 노르넨- 데르 해 북부 신화에 등장하는 운명과 예언의 여신 노르넨의 이름을 딴 거대한 섬, 비세그라드 왕국은 프로나아드보다는 좀 더 남쪽에, 최남단의 르비탄보다는 좀 더 북동쪽에 있었다.

위로는 혹독한 기후와 대비되어 자원이 풍부한 북해, 나머지 삼면은 따스한 센트럴에 면해 있는 국토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풍부한 천연자원으로 그야말로 부족한 것이 없었다. 서늘한 여름, 온난한 겨울과 함께 천혜의 자연환경을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위치는 그야말로 신의 축복이라 할 수 있었다.

로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육지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푸른 파도와 하늘 위,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돔 모양의 궁전 첨탑은 처음 공국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경외심과 탄성을 절로 자아냈다.

지금이 정말 11월이 맞을까 싶을 만큼, 섬을 둘러싼 숲의 초목은 푸르렀고 꽃들은 활짝 만개해 있었다. 늦은 오후, 항구 앞은 정박한 범선들과 막 출발하려는 상선, 부둣가를 오가는 시민과 상인들로 북적였다. 멀리서 봐도, 사람들은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바다 위를 끼룩대며 날아다니는 기러기들조차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로사를 태운 범선은 항구를 돌아서 황궁을 둘러싼 해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깎아지른 절벽을 선회해 해자 앞에 닿자마자, 롬 데르반은 로사를 안아 들고 배에서 내렸다. 곧이어 해자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교각이 끼긱, 소리를 내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청난 환호성이 그들을 반겼다.

로사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교각 너머, 휘황찬란한 성채와 난간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들을 올려다보았다. 본성 안은 국가적인 연회 준비가 한창이었고 멀리서 보이는 시종들은 제각기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대한 기둥들이 수없이 늘어선 주랑 너머, 연회 홀 안에서 로사를 제일 먼저 맞이한 사람은 롬의 말대로 그의 모친과 여동생들이었다.

“로슬린! 어서 오너라! 먼 길 항해하느라 많이 힘들었지?”

마흔을 갓 넘긴 율리아 아덴 비세그라드 황비는 초면인데도 로사를 딸처럼 반갑게 맞았다. 미소 띤 눈가에 주름이 조금 잡혔을 뿐, 황비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황녀들도 오래전부터 로사에 대해 수없이 들어 왔으며, 실제로 보니 듣던 것보다 더 아름답다며 잔뜩 흥분해서 열심히 재잘댔다.

모두가 로사와의 만남을 오매불망 고대해 왔던 듯, 허물없는 태도는 그녀를 적잖이 안심시켰다. 잠시 후, 황비는 황녀들을 물리고 알현실에 로사만을 남겨 두었다.

“로슬린, 모든 게 혼란스럽고 걱정도 되겠지. 지금부터 하는 얘기에 좀 놀랄 수 있을 거야.”

“네. 롬 데르반 황자님에게 얘기를 들었지만… 첫 혼담에 대해서만은 황비마마께서 다 알려 주실 거라고 했어요. 제가 처음부터 바첼라프 공국이 아닌, 비세그라드에 혼인하러 오기로 되어 있었다는데… 그게 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어요. 제 정혼자로 알고 있었던 바첼라프의 클란츠 황자가, 정말로 독살된 게 맞는지요.”

“그래. 제1 황태자 클란츠는 독살되었다. 보름도 더 됐으니 네가 닷새 전 즈베덴을 출발하기도 전의 일이야. 가엾은 일이다만 딱히 놀랄 일은 아니지. 수십 개의 대륙국 중, 왕좌를 둘러싼 암투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극소수니까. 다행히 우리 비세그라드가 그중 하나고.”

“그럼 저는 혹시… 클란츠 대신 다른 황자의 혼례 상대로 그곳에 가고 있었던 건가요? 아니면 역시, 처음부터 롬 황자님의 상대로 정해져 있었고 아버님만 그 사실을 알고 계셨지만 바첼라프에 가고 있었던 건 일종의 눈속임으로……?”

“역시 듣던 대로 영리하구나. 죽은 클란츠 황자의 숙부이자 다음 왕좌의 주인이 될 프레데릭 집정관이 널 기다리고 있었단다. 혼례 상대로. 미친 늙은이지. 아무리 황족이라도 육십 넘은 영감이 이제 열아홉이 된 널 아내로 맞다니!”

“네에?”

유, 육십 넘은 남자의 부인이라니! 혼비백산하던 로사는 빠르게 충격을 거둬들였다. 황비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점점 아귀가 정확히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네 말대로, 즈베덴 공왕 폐하께서는 처음부터 너를 내 아들 롬 데르반과의 혼약에 동의하신 거였어. 그렇게 어여삐 여기시는 막내딸을 바첼라프의 교활한 늙은이에게 보내실 리 없지, 아무렴. 벼락을 맞아도 시원치 않을 놈이야. 하지만 걱정 마라. 그 집정관은 어제 날짜로 왕좌는커녕 집정관 자리에서도 물러나 투옥되었으니까. 조카이자 차기 국왕이었던 클란츠 황자를 시해한 것 외에도, 차마 입에 담기도 싫은 갖가지 추악한 악행에의 죄목이란다.”

“아아… 클란츠를 독살한 건 그 집정관이었군요.”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참형에 처해질 거다. 클란츠의 동생인 레날드 황자가 조만간 왕위 계승식을 하고, 어린 신왕이 올바른 국정을 이끌 수 있게끔 장로들이 도울 테니 내년에는 바첼라프도 안정되지 않을까 한단다.”

“그럼 왜… 아버님은 처음부터 저와 롬 황자님과의 혼약을 철저히 비밀로 숨기신 걸까요? 역시 제 언니들… 다른 황녀들과 후궁들 때문이었을까요.”

황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최대한 타국의 황실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으로 들리지 않게끔, 그녀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짐작하겠지만, 네 신변을 무척 걱정하셔서 여기 안전히 도착하게 될 때까지 만전을 기하셨어. 즈베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황녀들 귀에도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도 극도로 보안에 신경 썼고. 누가 됐든, 롬의 혼약 상대가 비세그라드행 배에 타고 있다는 게 알려졌다면… 상상 이상의 갖가지 시도가 이뤄졌을 테니까.”

로사는 긴장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저도 모르는 새, 지난 며칠간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음을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했다. 홀로 타국에의 도주까지 계획했을 만큼 씩씩한 그녀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오는 암살자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로슬린, 즈베덴 왕실 상황은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 있단다. 배다른 황녀들과 모친들 사이의 갈등은 오래전부터 점점 더 심화돼 왔어. 네 생모인 황비마마는 이미 돌아가셨고… 유모와 소수 시종들 외에는 널 진심으로 염려하고 지켜 줄 이 하나 없었으니 즈베덴 공왕 폐하가 제일 걱정하셨던 것도 무리가 아니야.”

“실은 저도… 언젠가부터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어요. 제가 열다섯이 되고 열여섯이 되고, 점점 해가 지나고 나이 들어 갈수록 이모들과 숙모님들, 언니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있었다는 걸. 제일 어리고 견제할 대상도 아닌데 이상했지만… 아무튼 그래서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숨죽여 지내는 게 마음이 편했지요. 제 몸 하나 지킬 수 있게 호신술도 나름 열심히 익히고 있었어요. 아주 가끔씩, 누군가 뒤따라오거나 지켜보고 있다는 기묘한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들 입장에서는 네가 충분히 견제 대상이었을 거야. 이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데 당연하지 않겠니! 아무리 어리고 성년 전이라도 사전 청혼은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리고 이상한 시선이나 감시의 느낌 말이다만, 그건… 아마도.”

황비는 더 참을 수 없었는지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 아들이 심어 놓은 보디가드일 거야. 틀림없어.”

“네? 롬 황자님이……?”

“정보통이 워낙 철저하니 즈베덴 황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대강 간파했을 거고… 하지만 1년에 기껏해야 두 번밖에 방문할 수 없으니 다른 수가 없었겠지. 널 보호해 줄, 가장 믿을 수 있는 기사 몇 명을 즈베덴에 상주시키는 것밖에. 적어도 네가 성년이 되어 여기로 데리러 올 때까지는 말이다. 짐작컨대 즈베덴 공왕 폐하께서도 승인하셨을 거야.”

“아아…….”

로사는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지만 황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생색내는 건 절대 아니다만 롬이 그동안, 그러니까 네가 성년이 될 때까지 나름 많이 고생했단다. 여러 내로라하는 강대국에서의 청혼도 수십 번 고사하고 남색가란 소문도 다 감수하고…….”

“나, 남색이라뇨!”

남색이라니, 밤마다 시달리는 로사의 입장에서는 헛소문도 그런 헛소문이 없었다.

“그런 소문이 돌 법도 하지. 스무 살이 넘도록 여자 보길 돌처럼 했으니. 르비탄이나 로스코 등 남방 국가에서는 실제로도 있는 것 같더구나. 대외적으로는 쉬쉬하지만.”

황비는 좀 더 가까이 다가와 로사의 한 손을 두 손으로 모아 잡았다. 친어머니처럼 따뜻한 손길이었다.

“로슬린, 고맙다. 롬의 청혼을 받아들여 줘서. 그 애가 배에서 다 설명하고 청혼했지? 바첼라프에 대한 자세한 것이나 정치적인 것은 말 안 했어도 적어도, 널 4년간 쭉 지켜보고 사랑해 온 건 다 말을 했겠지? 그리고 정식으로 청혼을 하고…….”

“아. 그… 4년간 절 봐 왔다는 말은 했지만…….”

반지는 끼워 줬지만 청혼은 하지 않았다. 입이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롬 데르반의 입에서 나온 말 중 청혼의 표현은 단 하나도 없었다. 시종들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해 다짜고짜 해적처럼 제 배에 옮겨 태우고, 도망치던 걸 붙잡아 강제로 안았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벨레즈 공국에서 다시 만났던 그날도, 어젯밤도 하루의 반나절은 피로로 나자빠져 있어야 할 정도로 발정 난 짐승처럼 격렬하게 안고 또 안았다.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비세그라드에 도착하면 다 말해 주겠다는 등 전조만 흘렸다가 조금씩 진상을 털어놓고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었다.

지난 4년간 쭉 지켜봐 왔고 검술 연습하는 것도 봐 왔다. 너무 오랫동안 지켜만 보다가 도망을 가 버리니 덜컥 자제력을 잃고 맹수처럼 다짜고짜 안아 버리고, 이틀 전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비세그라드 황가의 반지도 끼워 주었다.

“그렇지? 그래, 이 반지! 어쩜, 너한테 꼭 맞는구나. 어찌 됐든 청혼을 받아들였으니 여기까지 함께 온 거겠지만, 롬이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를 거야.”

“황자님이… 마음을 졸였다고요?”

내가 청혼을 거절할까 봐서? 결국 제대로 청혼도 안 하고 제멋대로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와 놓고는.

“그렇단다. 네가 저를 거절할까 봐 얼마나 초조해했는지. 겉으로는 늘 고고하고 의연한 척하지만 어미인 내 눈까지 속일 순 없지. 너도 다 들었겠지만, 4년 전 그 애가 널 처음 만났을 때 호위병 복장을 하고 있었잖니. 의전 참석이 지겨워서 잠깐 쉬려고. 넌 시종처럼 입고 혼자 검 휘두르고 있었고. 그거 보면 너희 둘, 정말 천생연분이지? 호호…….”

황비는 그녀의 손을 잠시 놓고 유쾌하게 웃었다.

“아무튼, 그때 네가 시종인 척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잖니. 롬은 당연히 네가 누군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 말에 숨겨진 진의를 다 이해한 거고. 네가 황실에서의 삶에 얼마나 염증을 느끼고 지긋지긋해하는지, 성년이 되면 다른 나라로 시집가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살 맞대고 살면서 기계처럼 아이들만 낳고, 나이가 좀 더 들면 후궁과 첩들, 그녀들이 낳은 아이들과도 피 튀기는 권력 다툼에 생존이 걸린 암투에 시달려 하룻밤도 맘 편히 발 뻗고 못 자고……. 그런 숨 막히는 감옥 같은 삶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 절실히 느꼈다고 하더구나.”

“네. 그래서 도… 네, 솔직히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있었어요.”

상대가 누구든 처음부터 도망가려 했었고, 결국 롬을 오해해서 두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지금도 있겠지, 그런 마음은?”

황비의 물음에 로사는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수 없었다. 황비는 잠시 놓고 있던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넌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로슬린. 롬이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그 애는 진심으로 너한테 깊이 빠져 있거든. 사랑하는 제 여자가 단 하루라도 불행한 상황은 절대 만들지 않을 거란다.”

황비는 그 후로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로사를 잠시 쉬게 해 주었다. 그녀는 알현실을 나서기 전, 황비에게 자신을 로사라고 불러 주길 청했다. 두 여자 사이에는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낸 듯한 친밀함이 감돌았다.

***

4년 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혼례식은 성황리에 끝났다. 3일간의 연회 준비는 사실상 한 달 전부터 조금씩 실행되어 왔다. 혼인 상대인 즈베덴의 막내 황녀가 무사히 도착하기 전까지 누구도 드러내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신랑 측의 철저한 계획하에, 태어날 때부터 쭉 함께였던 유모와 시종들도 신부와 함께 새로운 환경으로 옮겨 와 있었다.

비세그라드의 국왕 부부와 직계 혈족, 장로와 대신들의 축복과 축배를 무수히 받고 나서야 두 사람은 신방에 들 수 있었다. 11월, 달이 휘영청 뜬 비세그라드의 밤은 온화했고 어둠을 가득 채운 별은 그야말로 별바다를 이뤘다.

“로사.”

롬은 혼례식 예복 차림 그대로, 그녀를 침대 위에 앉히고 신부 베일을 들어 올렸다. 은은한 촛대 아래, 두 사람의 눈이 맞닿았다.

“너무 아름다워.”

그는 반지가 끼워진 왼손을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단둘이 있을 때만은 완전히 경어를 버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늦어도 12월 초에는 즈베덴 공왕 폐하께 인사드리러 갈까 하는데… 당신 생각은?”

“아버님께요?”

뜻밖의 말에 로사는 깜짝 놀랐다. 혼인 뒤 신부 쪽 모국을 방문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간다고 해도 최소한 첫 황자를 낳고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으시니까. 한겨울 항해가 어렵기 전에 뵙고 오는 게 좋겠어. 안심시켜 드릴 겸. 이제 명실공히 내 정비니까 누구도 널 건드릴 수 없어. 즈베덴이든 어디든.”

로사의 가슴에 뭉클, 온기가 퍼졌다. 황자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하지만 고마워도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은 있었다. 그녀는 제 손으로 베일을 다 벗고 수십 개의 핀으로 고정한 머리를 풀어헤쳤다. 붉은색 도는 금발이 촛불 아래 루비처럼 빛났다.

“왜 처음부터 청혼하지 않았어요? 황비마마는 당신이 배에서 제대로 청혼했고 내가 받아들여서 온 줄로 알고 계세요. 그게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고.”

“그럴 겨를이 없었어. 당신이 너무 질색하고 끔찍해해서… 좀 진정되고 델 모나크에서 머물게 된 밤에 하려고 했었어. 하지만 그럴 상황이 못 됐지. 트리포노프에서도 마지막 날 밤 하려고 했지만 그때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롬의 눈에 깃든 당혹감이 빠르게 엷어졌다. 그녀가 두 번이나 혼자 오해하고 달아났던 상황을 꼬집어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당연하잖아요. 내가 끔찍해했던 건 너무 당연해요.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하고 청혼하고, 내가 받아들이고 오늘 이렇게 혼례식까지 기다렸어야…….”

로사는 말끝을 흐렸다. 얼굴에 떠오른 홍조가 점점 크게 번지고 있었다.

“알아. 적어도 오늘 밤까지는 기다려야 했다는 걸.”

그의 눈에 자책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다지 깊진 않았다.

“처음 델 모나크에서 네가 도망가 버리고, 또다시 날아갈까 봐 뼛속 깊이 두려웠어. 그래서 일분일초라도 빨리 당신을, 너를 내 것으로 확실히 만들고 싶었어, 로사.”

롬은 그녀의 두 손을 꼭 맞잡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두 눈에 절실함이 어려 있었다. 몇 시간 전 황비가 한숨지으며 들려줬던 말들이 로사의 뇌리를 스쳐 갔다.

‘정말이지 상사병이 나서 죽는 줄 알았단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지난 4년간, 즈베덴에 갔다가 돌아오던 날. 그리고 그 뒤로 열흘 정도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얼마나 가엾던지. 세상 고고하고 냉철한 황자라고 대륙 곳곳에 소문난 아이가 말이지…….’

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로사의 손을 들어 올려 약지에 끼워진 다이아몬드에 눈길을 주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그는 침상 아래로 내려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그녀의 한 손을 잡고 경건하게 청했다.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로슬린 드 플라비니 공녀님.”

“혼례식 끝나고 청혼하는 건 어느 나라 법인가요?”

로사의 핀잔에, 롬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다시 침상 위로 올라와 그녀를 마주 보았다.

“최대한 자유롭게 살게 할 거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멀리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대 들지 않게. 의전뿐만 아니라 정책에도 적극 참여하고 국가적인 사업도 추진할 수 있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야. 당신에겐 그럴 능력이 충분하니까.”

“아뇨. 이번에… 벨레즈에서 그 일을 겪고 황궁 밖 세상이 얼마나 호락호락하지 않은지 뼛속까지 느꼈어요. 나는 황궁이란 온실에서 보호받고 자란 연약한 존재였을 뿐…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나는 당신처럼 영리하고 강하고… 용감한 여성은 본 적이 없어, 로사.”

롬은 말을 이었다. 확신에 찬 어조가 그의 말이 진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당신은 괴한들에게 잡힌 상태에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도망쳐 나왔어. 어차피 그 근방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으니까 내가 구해 냈겠지만… 대륙의 공녀들 중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을 거야.”

로사의 눈에 서린 경계심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롬은 그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그리고 후궁이나 연인도 없어. 단 한 명도. 아버님처럼.”

사실이었다. 중후한 카리스마를 지닌 비세그라드 국왕 옆에는 황비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아무리 전 국민의 깊은 존경과 신뢰를 받는 왕이라 한들, 후궁과 애첩을 두루두루 거느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였다. 통치자의 자질이나 인성과는 완전히 별개로 간주되었다. 결국, 정비 한 사람만이 존재하는 데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폐하께는 어머님뿐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25년째 어머님밖에 안 계시지.”

“그러신 것 같았어요.”

“나도 정비 한 사람뿐이야. 그러니까 당신이 봐 왔던 그런 지옥은 생기지 않아.”

“…약속할 수 있어요?”

“약속해, 로사.”

온기로 가득 찬 눈이 시종일관 그녀의 것을 떠나지 않았다.

“사랑해. 내겐 로슬린 공녀님 하나뿐이고 앞으로도 영영 그럴 거야.”

“나, 나는…….”

로사는 그의 거침없는 고백에 말을 잇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처음에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농락을 당하는 줄로만 생각했다. 그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모든 것을 알게 된 후로는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한 심정이었다.

“난 아직은 당신을…….”

아직은 그를 사랑한다고 거침없이 말할 수는 없었다. 4년 전부터 쭉 그녀를 사랑하고 봐 왔던 황자와 같은 마음일 수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하지만 그에게로 급속히 마음이 기울고, 여자로서 강렬히 매혹되어 어느새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알아. 당연히 지금은 나 혼자만의 일방적인 감정이지. 난 4년 전이었지만, 넌 불과 보름 전에 날 제대로 만난 거니까.”

“하지만… 그때는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알리체와 당신의 진짜 관계를 알게 됐을 때. 그리고 당신이 진심이란 걸 확인했을 때…….”

로사는 좀 더 용기 내어 말을 이었다.

“기뻤어요, 정말로.”

롬은 그녀를 좀 더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두 손이 로사의 양어깨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그의 눈에는 벅찬 감정이 담겨 있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며, 그녀 역시 곧 자신과 같은 감정이 될 거라는 자신감이 넘쳤다. 숨길 수 없는 애정,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욕망과 소유욕도 함께였다.

“당신이 날 더 이상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 얼마나 감동적인지…….”

그의 말대로, 그들은 늘 함께 절정을 맞았다. 특히 그녀가 완전히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인 어젯밤,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더 격렬한 환희에 몸부림쳤었다.

로사는 어느새 롬의 품 안에 있었다. 그의 손이 눈 깜짝할 새, 신부 예복을 벗기고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맨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로사는 희미한 거부의 신음을 흘렸지만, 그를 밀쳐 내지 않았다.

바닥 모를 안도감이 쾌감과 함께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그가 그녀를 4년 전 처음 본 순간부터 쭉 사랑해 왔다 고백했을 때, 그리고 처음부터 첩이나 후궁이 아닌 정혼녀의 대상이었음을 확실히 알았을 때의 감동이 다시금 밀려왔다. 심장을 꽉 채우던, 깊고 포근한 그 행복감의 정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확실해지고 있었다.

타인이 정한 대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혼인해 아이 낳고 평생을 궁 안에 갇혀 사는 건 끔찍하게 싫었다. 그녀가 세상 제일 고귀한 보물이나 되는 듯, 몸 곳곳에 키스를 퍼붓는 눈앞의 남자는 그녀가 택한 상대는 아니었다. 분명, 4년 전의 비밀스런 혼담과 첫 만남은 그녀의 의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고, 가까이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일었다. 좀 더 많이, 깊이 알게 되면 분명 목적지에 닿게 될 것 같았다.

그녀가 늘 찾고 있던 것. 탐욕과 암투만이 가능하던 가식의 세계 너머, 어째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어떻게 이 주어진 삶을 가치 있게 영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 로슬린 드 플라비니 즈베덴 황녀로서의 굴레를 벗어나, 그 누구도 아닌, 그대로의 자신으로 늘 있을 수 있는 곳. 그렇게 함께할 수 있는 사람.

비세그라드의 황비라는 굴레나 책임도 물론 존재한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았던, 즈베덴 막내 공녀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크고 버거울 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와 함께라면…….

로사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롬은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정하게 탐하고 능숙하게 리드해 나갔다. 뜨겁고 달콤한 입술과 혀가 로사의 목덜미 안쪽, 가장 보드랍고 민감한 살결을 시종일관 자극해 왔다. 날카로운 이 끝이 살갗을 깨물며, 붉은 상흔을 쇄골과 목 전체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아… 핫… 으응… 응!”

능숙한 애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지며 몸 주인을 미치게 만들었다. 뜨겁고 단단한 남성이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마음을 온전히 열어서인지, 충분히 익숙해진 탓인지, 이제는 초기의 통증이 훨씬 덜했다. 짧고 묵직한 충격 직후, 뿌듯하게 차오르는 쾌감이 온몸에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로사.”

거칠고 낮은 헐떡임, 짐승처럼 날것 그대로의 음색이 그녀의 귓가에 달콤한 반향을 그렸다. 로사, 나의 아름다운 장미. 이렇게 눈부시게 활짝 피어날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지.

롬의 쾌락에 달뜬 몸은 장미 꽃잎처럼 여린 속살을 쉼 없이 탐하고 정복해 갔다. 갓 피어난 장미가 가시를 거두고 그와 조금씩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롬은 좀 더 열렬히, 과감하게 로사의 장미 속으로 녹아들었다. 애틋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장미 꽃잎은 그의 것을 힘주어 감싸고 놓지 않았다.

“아… 흐읏… 아! 응! 응!”

갓 맺어진 한 쌍은, 허리의 격한 율동 끝에 격한 절정을 맞았다. 길고 거친 신음의 향연 끝에,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여운을 만끽했다. 어디선가 흐르는 은은한 장미 향이 짙은 안개처럼 두 남녀를 포근하게 감쌌다.

로사는 롬의 품 안에서 촉촉하게 젖은 눈을 뜨고 어깨 너머,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미 향의 근원지를 알 것 같았다. 창가를 휘감은 덩굴 가득, 갓 피어난 장미가 달빛 아래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사랑해, 로사.”

장미를 향한 롬의 고백은 그 후로도 몇 번 더 이어졌다. 나른한 수마에 빠져들기 직전까지, 꿀처럼 달콤한 그 한마디는 꽃의 잔향과도 같이 방 안 가득 맴돌았다.

FIN

작가 후기

안녕하세요? 피오렌티입니다. 추석을 맞이하여 두 번째 말레피카는 가벼운 가상 시대 로맨스물로 돌아왔습니다.

예전에 가벼운 단편으로 써 놨던 중세 가상국 이야기에 살을 좀 붙여서 완성시키느라, 올해 7, 8월은 정말 힘들었어요. 주 5일 꿀벌(요즘은 직장인=꿀벌이라 칭하더군요)로 짬 내어 글 쓰는 일상은 이제 4년 차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정도 익숙한 즐거움이자 괴로움이지만 거기에 폭염이 더해지고, 최소한의 스토리상 개연성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기초적인 고충이 더해지다 보니 심신이 유독 더 힘든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즐거움이 훨씬 더하니 도저히 중단될 수는 없고… 후기를 쓰는 동안, 또 다음 막장을 머릿속에 그리며 공상하는 꼴이라니 개미지옥이 정말 따로 없네요(오열).

아무튼, 여름휴가를 추석에 붙여 쓰느라 프라하에 다녀온 직후 출간이 될 것 같습니다만, 프라하의 근대사에 대한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중에 이 <갓 피어난 장미를 과감히>를 쓰게 되어서 인물명이나 지명이 자연스럽게 보헤미안 쪽 실제 지명이나 비슷한 분위기의 이름들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바첼라프나 비세그라드(비셰흐라드가 정확한 명칭)는 실제 지명이자 실제 역사적인 인물들의 이름입니다. 로사는 본문에도 밝혔듯이 벵골 장미(로사 키넨시스)에서 따왔고, 롬이나 안톤, 아르투르, 라이너, 이케르, 율리아, 안네로제, 트리포노프 등은 일견 흔한 서양 이름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클래식 음악과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꽤 익숙한 울림이 되실 수 있겠습니다.

메이든 타워는 작년에 아제르바이잔 여행 중 올라가 본 실제 메이든 타워가 모티브입니다. 탑에 얽힌 다소 끔찍한 일화는 메이든 타워를 둘러싸고 전해지는 유래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만, 극중에서는 실제로 벌어진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시르반카 궁성의 동화 같은 정경은 예전부터 여행을 계획 중인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성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모 드라마의 배경으로도 잘 알려진 곳인데, 해당 드라마는 보지 못했지만 트란실베니아 성과 함께 보헤미안 지역에서 꼭 가 보고 싶은 성과 궁 리스트에 늘 올라와 있어요.

소니페로(sonifero)는 수면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입니다. 여러 나라 동의어 단어들의 어감을 비교했을 때 소니페로가 아무래도 가장 적절할 것 같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이탈리아어가 지구상 언어들 중 가장 예쁘고 시적인 발음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페라도 이탈리아 쪽이 한층 더 듣기 좋고 아름다운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트리포노프 공왕이 미신에 사로잡혀 목숨 걸고 사수했던 “성스러운 장막”은 라틴어에서 따왔습니다. 사케르 코르티나(Săcer Cŏrtína: 성스러운 장막)- 당연히 라틴어 사전에서 각 형용사와 명사만 검색해 붙였습니다.

외국어는 정말 어렵습니다. 어쩌다 보니 10년 넘게 통번역을 업으로 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모국어인 우리말도 잘 모르고 허점투성이라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앞으로도 오타나 내용적 오류에 대해 거침없는 지적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 최대한 그런 일이 없도록 사전에 철저히 신경 쓰는 게 우선이겠지요.

어쩌다 보니 여러 가지 모티브들에 대해서만 주절주절 나열하는 후기가 되어 버렸네요. <스케벤저의 딸>, <아라스벨>에 이어 세 번째 중세 가상국 로맨스입니다만, <갓 피어난 장미를 과감히>는 역시 부족함투성이였습니다.

가상국 로맨스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 자체는 현대물보다 더 재미있는 반면, 실제 역사와 가까운 설정들일 경우에는 철저한 시대적 고증이 필요해서 저처럼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에겐 이 부분에서 정말 부족함을 많이 느낍니다.

이 후기까지 쓰고 완고를 넘기는 즉시, 집 앞 대형 서점에 바로 달려가 관련 서적을 몇 권 쟁여 두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진도 있는, 제대로 된 자료여야 합니다. 사진 없고 글만 있으면 뭐가 뭔 소린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갓 피어난 장미를 과감히>는 <아라스벨>과는 첫 만남이 비슷하고 데르 해와 주변국 등 세계관이 같습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 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고 남주도 사뭇 다르니, 조금이라도 즐겁게 읽어 주시면 기쁠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조금이나마 당찬 여주를 쓸 수 있어서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나쁘다기보다 소유욕 강하고 능글맞은 여주바라기 계략남과 파이팅 치와와 모드로 늘 으르렁거리는 여주의 조합을 생각했는데 잘 어울렸나 모르겠습니다.

비록 차기작은 삼시 세끼 고구마만 먹을 기세인 여주가 나오지만, 원래 표렝이 조합이란 게 여주가 푹 삶은 고구마일 때, 남주는 캡사이신 천만 그램에 고깔해파리 천 마리에서 추출한 맹독을 섞은 녀석이니까 남주에 관해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럼 12월에는 오랜만에 표렝이표 남주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두 번째 말레피카도 함께 고생해 주신 손도영 차장님께 감사드리고, 늘 쓴 말씀 좋은 말씀으로 막장 함께해 주시는 독자분들께도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즐거운 추석 보내셨길 바라며, 늘 행복하세요.

2018년 9월, 피오렌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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