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 피어난 장미를 과감히-6화 (6/9)

6화: 드러나는 비밀과 진실

양국이 함께하는 저녁 만찬에 데지레는 없었다. 언니를 어떻게 봐야 할까, 내내 가슴 졸이던 로사의 걱정이 무색하게 그녀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아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고 황자비의 직속 시종이 전달해 왔다.

로사는 여전히 복잡하게 빙빙 돌아가는 머리로 침소에 들어왔다. 실내용 가운으로 갈아입을 생각도 않고 테이블 앞에 오도카니 앉아 있자니, 곧이어 돌아온 롬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왜 저녁 내내 표정이 심각하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던데…….”

“생각할 게 있어서요.”

로사는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귀찮은 듯 대꾸했다. 말끝에 에취, 재채기가 나오자 롬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열려 있던 창을 닫고 돌아서는 입가에 비뚜름한 조소가 걸려 있었다.

“설마 또…….”

어느새 앞까지 다가온 그는 로사의 턱을 치켜들어 시선을 맞췄다.

“달아날 궁리라도 하는 건 아니겠죠.”

로사는 말없이 제 턱을 잡은 손을 쳐 냈다. 도망도 도망이지만, 지금은 아까 목격한 탑 아래 장면이 머릿속에 꽉 차 있어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오늘 밤은 건드리지 말고 조용히 내버려 둬요. 몸 상태도 안 좋고 머리도 아프니까.”

“머리가? 두통이 있습니까? 열은…….”

커다란 손이 이마로 다가왔지만 로사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정말로 안 좋아서 엘리네가 약탕기로 약초즙도 만들어 줘서 방금 먹었다고요. 그러니까 오늘 밤은 다른 방에 가세요. 오늘 밤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러면 더 좋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황궁 여의원을 불러 달라 요청하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온몸이 뻐근하고 잘 못 걷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혹시.”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으르렁거렸다.

“일부러 잘 못 걷고 힘 빠지게 만들어서, 도망 못 가게 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밤마다 날 이렇게 혹사시키는 이유가.”

“뭐요?”

롬의 입에서 풋,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돌아서서 한참을 소리 없이 웃었다. 로사는 신을 벗어, 위아래로 희미하게 들썩이는 어깨를 냅다 후려쳐 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롬은 돌아서서 그녀에게 몸을 굽혔다. 로사는 흠칫 놀랐지만, 양쪽 팔받침을 잡은 두 팔 사이에 가둬져 일어날 수가 없었다. 롬은 자수정처럼 푸른 눈을 그녀에게 고정시키고 엷게 웃었다.

“로사, 당신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귀엽고 사랑스럽고 재치 있고…….”

그의 한 손이 얼굴 위로 올라와 로사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턱이 잡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따스한 입술이 다가와 보드라운 그녀의 것 위를 살며시 쓸고 훑었다. 온몸이 간질간질한 느낌에 로사는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롬을 밀어내려는 찰나, 그는 스스로 입술을 떼고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주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는 촛불을 몇 개만 남겨 놓고 끈 뒤 침상 한쪽에 벌렁 드러누웠다. 어둠 속에서도 능글맞은 웃음이 뚜렷이 보였다.

“당신을 혼자 둘 순 없으니 여기서 잘 겁니다. 선은… 당신 쪽에서만 넘어오지 않으면 문제없을 거고요.”

“뭐라고요?”

“불과 이틀 전 일인데 잊은 건 아니겠지요. 가만히 자고 있는 내게 다가온 건 당신이었습니다.”

“그, 그건…….”

“자다가 몸이 괜찮아진 것 같으면… 얼마든지 또 그렇게 해요. 내 쪽에선 절대 환영이니까.”

“그럴 일 절대, 절대, 절대 없어요!”

로사는 흥, 크게 코웃음을 친 뒤 침소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차라리 자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대쪽 가장자리에 붙어서 잘 생각이었다.

‘트리포노프 황실의 법령상, 만약 직계 일가 중 기혼녀가 다른 남자와 외도한 걸 들키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되나요? 설마 교수형이나 영구 추방, 평생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거나 그 정도의 중벌인가요?’

로사는 자리에 누워서도 몇 번이나, 물어보고픈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쿨쿨 자고 있는 황자를 깨워서 상세히 답을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먼저 데지레와 얘기를 해 보는 게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

다음 날 아침, 로사는 테이블 위에 놓인 또 다른 쪽지를 발견했다. 이번에는 분홍빛 장미꽃 한 송이가 옆에 같이 있었다. 그리고 짧은 편지 내용은 장미꽃, 그 이상의 파문을 로사의 가슴에 던져 놓고 있었다.

오늘은 몸이 좀 괜찮아졌을 테니 황자비궁에 갈 수 있겠지요. 여기 있는 동안 자매분과 최대한 많은 시간 보내길 바랍니다. 그게 내가 일부러 벨레즈가 아닌, 이곳에서 머물기로 한 첫 번째 이유니까요.

“뭐야, 도대체……. 사람을 들었다 놨다. 내가 이, 이런 꽃이나 이런 사탕발림에 흔들릴 줄 알아?”

로사는 장미꽃을 냅다 테이블 위에 팽개쳐 버렸다. 그러고는 몇 초 뒤, 다시 슬금슬금 집어 들어 향을 맡다가 창가 꽃병에 가지런히 꽂았다.

넘어가면 안 돼. 아직은 믿을 수 없어. 아직 좀 더… 두고 봐야 해.

그렇게 굳게 다짐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활짝 핀 꽃봉오리에서 한동안 떠나지를 못했다.

잠시 후, 로사는 타샤를 불러 데지레 언니와 점심을 들기 위해 황자비궁으로 향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천둥 번개로 시끄러웠다. 을씨년스럽다 못해 스산한 날이었지만 다행히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었다. 궁에서 궁으로 연결되는 미로 같은 통로를 걷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의 기척이 감지되었다. 거대한 주랑 뒤에 숨어서 그녀를 지켜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얕으나마 호신술을 꾸준히 익혀서 그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로사는 발걸음을 멈추고 주랑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기둥 너머로 옅은 금발머리카락 끝이 하늘거렸다.

“누구세요.”

“…….”

“숨어서 보지 말고 나오세요, 공녀님.”

“…….”

“알리체 공녀님.”

로사는 상대가 나올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렸다. 숨어 있던 그림자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까지 불린 이상 더 버틸 수 없었을 터였다.

며칠 전 시르반카 궁에 온 첫날, 손수건을 그녀 앞에 떨어뜨렸던 공녀는 그때처럼 금발에 비취색 눈동자를 한 얼굴로 로사 앞에 섰다. 알리체는 한 손으로 레이스 손수건을 쥐고 홍조 띤 장밋빛 뺨을 살며시 문질렀다.

맞아. 그때의 손수건이야. D.V라는 금박 이니셜. 잠깐… 저건.

D.V의 의미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니셜 아래 찍혀 있는 것은 비세그라드 왕국 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지금 와서 다시 보니 확실히 그 문양이 맞았다. 아, 그럼 V는 혹시 비세그라드(Visegrád)의 머리글자인가?

“아, 그 손수건 혹시 비세그라…….”

“데르반은 내 거야.”

“네……?”

“로슬린 드 플라비니 즈베덴. 나는 당신이 싫어. 불공평해……. 왜 당신은… 비세그라드 사람도 아닌데 그곳으로……. 왜 데르반을 당신이…….”

알리체는 데르어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가며, 매서운 눈으로 로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며칠 전 처음 맞닥뜨렸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눈빛이었다. 로사는 당혹감에 입만 멍하니 벌리고 서 있었다. 제 귀가 잘못됐나 의심까지 들었다.

롬의 호위기사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뒤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트리포노프 시종들이 다가와 알리체를 재빨리 에워싸고 반대쪽으로 데려갔다.

“죄송합니다. 알리체 님이 요즘 몸이 안 좋으셔서……. 혹시 어떤 결례를 범했다면 너그러이 양해해 주세요.”

시종들 중 하나가 로사에게 정중히 절을 해 보였다. 그녀는 괜찮다고 짧게 대꾸하고 다시 가던 길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데지레 일로 머리가 산란한데 갑자기 이게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황자비궁으로 향하는 마지막 로비에는 트리포노프 소속 보초병들과 타샤, 그들 뒤를 따르는 롬의 호위무사들만이 함께하게 되었다. 그제야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타샤가 로사의 로브 한쪽 소매를 잡았다.

“로슬린 님, 방금 아까… 그 알리체란 공녀님이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예요? 저는 좀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다 못 들었지만, 분명히 로슬린 님에게 당신이 싫다 불공평하다 어떻다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은데……. 혹시 예전에도 두 분이 아시는 사이예요? 로슬린 님이 여기 오셔서 처음으로 만난 게 아니셨어요?”

“맞아. 처음 봤어. 전혀 모르는 사이야. 그래서 나도 사실… 지금 무척 혼란스러워.”

“음, 아무래도 말씀을 드려야겠어요. 로슬린 님.”

타샤는 로사에게 더 바짝 다가와 걸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막내 공녀가 얼굴은 천사처럼 아름다운데 정신이 좀 오락가락한다고 들었어요. 정서 불안에 우울증, 공황장애 등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섞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까 횡설수설한 말도 그냥… 흘려들으시면 되지 않을까 해요.”

“아, 그렇구나. 그래… 그래, 신경 안 쓸게.”

로사는 타샤의 말에 호응해 주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알리체 공녀를 떨쳐 내지 못했다. 단순히 흘려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타샤가 들은 말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우선 왜 트리포노프 공녀가 비세그라드 황실의 일가만이 지닐 수 있는 손수건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데르반. 데르반은 자신의 것이라니? 그녀가 알기로 데르반이란 명칭은 왕이 바뀔 때마다 비세그라드 황실 직계들에게 새로이 하달되는 미들 네임이었다. 그래서 롬 황자의 경우, 정식 명칭은 롬 데르반 비세그라드가 되는 것이다.

“로사! 어서 와.”

로사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황자비궁의 살롱이 활짝 열리고 데지레가 그녀를 맞았다. 두 자매는 서로 포옹을 나눈 뒤 살롱 창가에서 간단한 점심 겸 다과를 들었다.

“태풍이 가라앉고도 며칠 더 있으면 좋을 텐데……. 날씨가 좋아지면 바깥의 해안가 정원에서 식사하고 오수도 즐길 수 있거든.”

“응. 그럼 좋긴 하겠지만…….”

“역시 바첼라프에 빨리 가야 하겠지? 거기서는 예비 황자비가 오기를 얼마나 오래불망 기다리고 있겠니. 내부 반란이 일어나서 왕권이 전복됐다다느니 황실 일가 대부분 죽었다느니, 이상한 소문이 자꾸 돌기는 하는데… 역시 헛소문이겠지?”

“그래……. 그럴 거야. 대륙에 떠도는 소문 중 절반은 다 헛소문이니까.”

로사는 디저트로 나온 프랄린 크림파이를 먹으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로사, 알겠지만… 너는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했던 동생이야. 지금도 그렇지만.”

데지레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모호한 웃음을 지었다.

“똑같이 황실에서 태어나도 황녀나 공녀의 운명은 남자들과는 또 달라. 결혼이든 미래든… 우리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어. 기껏해야 몇몇 주요 의전 활동에서 얼굴만 빼꼼 비칠 수 있고, 주어지는 권리는 슬하의 시종들을 내 맘대로 관리하고 지정할 수 있다는 것뿐.”

“아아…….”

로사는 잠자코 수긍했다. 데지레가 작년에 여기로 시집오기 전 즈베덴에서도 가끔 했던 대화였다.

“여자로 태어난 숙명이니…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언니.”

“다른 건 다 받아들일 수 있어. 상관없어. 하지만 적어도…….”

데지레는 살짝 떨궜던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자포자기해 버린 사람 같은 눈빛에 로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평생 함께할 사람만은 내 의지로 정하고 싶은데. 그러고 싶었는데…….”

“안톤 황자님과… 잘 지내지 못하고 있어, 언니?”

“그렇게 따지면, 황자고 황녀고 공녀고 죄다 제 의지로 결혼할 수 없으니까 다 똑같이 불공평하긴 한데.”

데지레는 로사의 말을 못 들었는지, 혹은 들었지만 그 질문엔 대답할 의사가 없는지 계속 제 말만 이어 갔다.

“그래도 불공평해… 이건. 난 아무것도 모르고…….”

‘불공평해.’

로사의 뇌리에 또 다른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유 모를 적대감과 억울함이 가득하던 비취색 눈동자.

그래서였을까? 알리체 공녀도 그들처럼, 원하지 않는 상대와 정략혼인을 하게끔 정해져 있어서 그렇게 불공평하다고 말했던 걸까. 하지만 왜 내게… 왜 나에게 데르반과 비세그라드를 언급하면서…….

로사의 머리에 번뜩 섬광이 일었다. 하지만 데지레의 흐느낌이 불쑥 끼어들어, 그 섬광이 더 선명해지는 것을 막았다. 데지레는 찻잔을 옆으로 밀어 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작게 흐느꼈다.

로사는 언니에게 다가가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등을 토닥이고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용기 내어 운을 뗐다. 어차피 조금 전 데지레 스스로가 절반은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안톤 황자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상대는 필시, 아까 메이든 타워 지하에서 사랑을 나누던 그 사람일 것이다.

“언니, 실은 어젯밤에… 봤어.”

“보다니… 뭘?”

데지레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다가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어제 만찬 전, 탑 쪽으로 산책을 갔었어.”

“…….”

“걱정하지 마. 나 혼자… 혼자만 봤어. 잠깐. 아주 잠깐.”

“…….”

“언니, 내게는, 내게만은 솔직하게 말해 줘. 그 긴 머리 남자… 도대체 누군지. 앞으로 어쩔 생각인지도 다.”

로사는 충격으로 말문을 열지 못하는 언니의 한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편이라고 신뢰를 심어 주는 눈빛에, 데지레는 조금씩 말문을 열었다. 눈가를 문지르던 손수건이 손안에서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세르반 볼트 트리포노프. 저 호수와 같은 이름이지. 숨겨진 황자이자 안톤의 쌍둥이 형이야.”

역시. 역시 쌍둥이였구나. 로사의 기억은 예전에 읽은 책 어딘가를 더듬어 나갔다. 코르피 해 너머, 보헤미안 혈족에 뿌리를 둔 몇몇 나라의 귀족 사회에는 비틀린 신앙이나 미신, 관습이 여전히 굳게 뿌리를 박고 비밀리에 시행되고 있다 들은 적이 있었다. 쌍둥이가 불길함의 상징이란 잘못된 미신 역시 그중 하나였고, 트리포노프는 코르피 해를 낀 보헤미안 조상들의 땅이었다.

“쌍둥이라서 계속 숨겨진 존재로 살아오고 있는 거구나.”

“맞아. 태어나자마자 둘 다 재앙의 존재로 여겨졌고, 둘 중 누구를 숨길지 여부도 철저히 미신적인 의식으로 정해졌어. 세르반을 처음 만난 건… 작년 가을 여기 와서 혼례식을 앞둘 무렵이었지. 처음에는 다들 극진히 환대해 주고 안톤도 무척 다정하고 상냥해서 아무것도 몰랐어. 아무것도 몰랐는데…….”

폭풍 전야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뭔가 엄청난 비밀이 폭로될 것 같아서, 로사는 데지레의 손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모든 것이 사전에 계획된 일이었어……. 아버님과 나 모두 감쪽같이 속아서 이 괴기스런 나라에 혼약하러 온 거야.”

가까스로 진정되었던 데지레의 눈에서 또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다음 몇 분간, 그녀가 털어놓은 사실은 로사를 경악케 했다. 단순한 경악 그 이상이었다. 수십 년 전 부왕이 친딸을 탐해서 혼인을 강제해 결국 메이든 타워에서 뛰어내려 죽게끔 했던, 그 일화만큼이나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이.”

로사는 데지레의 손을 여전히 꼭 잡고서 제가 들은 내용을 정리하려 애썼다.

“안톤 황자는 태어나고 얼마 안 돼 생식 기능을 잃게 됐어. 쌍둥이 황자 둘 중 누구를 은폐해야 할지 정하는 의식을 통해서. 처음에는 안톤 쪽이 그림자 황자로 점괘가 나왔다가 점성술사가 별의 흐름이 갑자기 변하는 이변이 일어났다고… 안톤 황자님의 신체를 일부러 훼손시키고 난 직후, 다시 세르반 황자를 그림자 황자로 재지명한 거야.”

그때부터 트리포노프 공왕 부부와 점성술사는 두 황자의 미래를 제멋대로 결정지어 버렸다. 훗날 두 황자 모두 성장해 후사를 볼 수 있을 때가 되면, 누가 됐든 안톤의 황자비는 껍데기만 안톤의 비일 뿐 실제 후사는 세르반과의 관계에서 얻어야만 했다.

“뭐…라고? 안톤 황자님을 그림자로 지목해서 거세시켰다가, 나중에 점괘가 반대였다며 다시 세르반 황자가 그림자 쪽이 된 거야? 무슨 그런 엉터리가 다 있어!”

“점성술사는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수하 한 명이 별을 관측하는 시간을 처음부터 잘못 쟀다며 그 사람이 처벌받게끔 했어. 그러고는 세르반과 미래의 황자비 사이에 나올 아이의 운세가 더 좋게 나왔으니 어쨌든 후사는 세르반의 씨가 더 낫다고 했다는 거야. 본인의 과실을 덮으려 한 것인지, 정말 그렇게 점괘가 나와서였는지는 모르겠어.”

“점괘는 무슨! 모든 게 처음부터 엉터리 허튼소리인 거지.”

“도착하고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혼례식 첫날밤 그 사실을 알고 도망가려고 했어. 그랬더니 공왕 폐하와 대신들이 나를 불러 협박을 가했어. 내가 도망가면, 즈베덴에 첩자를 보내서 아버님과 내 직계 형제자매들을 죄다 해하겠다는 거야.”

“그런 미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버님과 로사, 너만은 절대 그런 위험에 처하게 둘 수가 없었어. 그러다 아버님 병환이 위독해지셔서 얼마 안 남았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너도 바첼라프에 시집간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게 된 거야. 세르반 님과 함께… 도망가기로.”

“역시… 세르반 황자님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거구나.”

데지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처음 몇 달간은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강제로 마신 묘약으로 멍한 상태에서 그 탑 지하에 꾸며진 신방에 처음 발을 디뎠는데… 어지러운 상태에서도 쓰러져 울기만 했지. 세르반은 나를 절대 강제로 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하인처럼… 물을 떠다 주고 책을 읽어 주고 저는 침대 아래 바닥에서 자는 등, 마치 몸종처럼 시중만 들었어. 그러다 점점 세르반에게 끌렸고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된 거야. 자신도 끔찍한 상황이라는 데 동의했지만, 동생인 안톤 때문에 무작정 참고 따를 수밖에 없었대.”

“그랬겠지. 며칠간 분위기로 느꼈지만… 안톤 황자님, 무척 여리고 유약한 성품 같았어. 처음엔 마냥 다정하고 점잖다고만 생각했지만.”

“그 말대로야. 안톤은… 모든 짐을 벗고 인근 섬에서 낚시하고 가장 좋아하는 그림만 그리면서 살고 싶어 해. 일국의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릴 능력도, 관심도 없는 사람이야. 술을 마시고 매일 내게 한탄을 늘어놓지. 차라리 나와 세르반이 정식으로 황자와 황자비가 되고, 자신은 폐위하여 휴양지에서 걱정 없이 편안한 일생을 보내고 싶다고.”

“미쳤구나, 정말. 공왕 폐하와 장로, 대신들 죄다 제정신이 아니야. 야만국이라는 르비탄에서도 이런 미치광이 미신은 믿지 않을 거야.”

“그래서… 로사, 사실은… 이틀 뒤, 태풍이 가라앉는 낌새를 보이는 날 밤, 나는 세르반과 도망갈 거야. 대략 계획도 다 짜 놓았어.”

“뭐라고?”

“걱정하지 마. 네가 바첼라프로 떠나고 그날 밤 실행에 옮길 거니까. 혹시나 너에게 해코지를 할 수 없게. 그리고 태풍이 끝나고 시가지가 다시 시끌벅적해질 때 달아나는 편이 훨씬 유리하거든.”

“언니, 나도 사실은… 바첼라프로 가는 도중에 프로나아드로 달아나서 엘로이즈 님에게 잠시 신세를 지려고 했었어. 내 의지 없는 결혼도 싫고, 왕궁에서 평생 암투에 시달리며 사는 게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서.”

“뭐? 즈베덴에서 가끔 그런 말을 비칠 때는 그냥 하는 말이려니 했는데…….”

“나도 몇몇 시종과 나름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태풍이 오고… 배에 문제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잠시 지체된 거야.”

태풍 이전에, 롬 데르반 황자에게 납치되다시피 해 지금까지 내내 함께 있었고 이미 그와 한 침대에 들어 버렸다는 사실은 잠시 보류시켰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언니를 더 어지럽게 만들 것 같아서였다.

“뭐? 그럼… 로사, 너도 우리와 함께 가자. 나와 세르반도 실은 프로나아드 쪽으로 먼저 옮겨서 은둔하다 향후 계획을 세우기로 결심한 상태야. 지금 프로나아드만큼 타국의 이민자들을 적극 유치하고 정착을 독려하는 나라는 없으니까. 수천 개의 섬들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아니, 언니. 나는…….”

갑자기 붉은 석류색 장미와 분홍빛 꽃봉오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깊은 심해처럼 어둡고 푸른 누군가의 두 눈 역시.

“일단 이틀 뒤까지 기다려 줘.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하지만 언니와 세르반 님의 도주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울게.”

아무리 무모한 도주라 해도, 지금처럼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계속 살 수는 없었다. 데지레가 처한 비극은, 사랑하는 남자를 평생 그늘 속에 숨기고 다른 남자와 껍데기 부부처럼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르반과의 아이가 생기면, 공왕 부부와 대신들은 또다시 얼토당토않은 점을 쳐서 아기의 운명을 결정짓거나 종종 점괘에 따른 결과로 괴상한 미신적 관례를 치르게 강제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회임을 촉진하는 약이 아니라 그 반대로, 최대한 회임을 막을 수 있는 독초를 달여서 먹고 있었던 거구나.”

“응. 어쩔 수 없었어. 세르반은 모르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도망가기 전에 임신하는 걸 방지해야 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언니, 몸에 해로운 것은 이제 더 이상 복용하면 안 돼. 알잖아. 그런 독초 성분이 몸 안에 쌓이면 수은 중독처럼 치명적인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걸…….”

로사는 울음이 왈칵 터지려는 걸 가까스로 억눌렀다.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 심성 착하고 여리디여린 데지레가 먼 타국에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줄만 알았건만, 이런 참혹한 현실 아래 괴로워하고 있었다니.

“언니, 내일 아침 다시 올 테니까 자세한 도주 계획을 알려 줘. 내가 도와줄 게 있는지 생각도 좀 해 보고. 알았지?”

“그래. 달아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 메이든 타워 지하에 마을까지 이어진 비밀 통로가 있어.”

“알았어. 자세한 건 내일 다시 얘기해. 곧 만찬 시간이 될 테니 이만 가 볼게.”

살롱을 나오는 순간, 로사는 알리체 공녀에 대해 묻는다는 걸 깜빡했음을 깨달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내일 다시 만날 때 얘기하기로 결심하고 별궁을 향해 걸었다. 몇 걸음 떼놓지 않았을 때 타샤가 살짝 입을 삐죽 내밀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로슬린 님, 저 정말 죄송한데… 아까 화장실 다녀오는 걸 깜빡했어요. 조금 급해요.”

“응. 괜찮아. 호위병들과 먼저 가고 있을 테니 천천히 와.”

이틀 뒤. 이틀 뒤에는 태풍이 물러가게 돼. 혹시… 혹시라도 롬 황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지금까지 들은 것으로 미루어 보면, 공왕 부부와 대신들은 소름 끼칠 만큼 골수 미신 신봉자였다. 만에 하나 잡히면, 그때는 또 이상한 점괘를 들이대어 언니와 세르반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그러니 꼭 도망가지 않고도 제대로 타국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롬 황자에게 의논해 보면 어떨지 고민이 되었다.

내 도주 자체부터가 고민인데 어쩐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언니가 이렇게 무서운 곳으로 시집을 오다니 상상도 못 했어. 이렇게까지 곪아 들어간 것은, 아무래도 오랜 쇄국정책 때문이었겠지.

더 이상 시대의 흐름에 거스를 수 없어서, 이제 트리포노프도 무역을 개방하게 되었다. 그러니 어쩌면 앞으로는 나아질지도 몰랐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로사는 생각에 잠긴 채, 타샤가 따라잡을 수 있도록 통로를 천천히 걸었다. 커다란 아치형 창 너머 뿌연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뒷모습도 보였다.

알리체.

비슷한 사람일까 생각도 해 봤지만, 아까 봤던 보랏빛 문양의 꼬뜨는 분명 그녀였다. 공녀는 첨탑 망루 너머, 예배당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예배당이라기보다 점성술사가 기거하고 미신적인 의식들을 거행하는 곳이겠지만, 지금은 인적이 거의 없는 시간대였다.

차라리 잘됐어. 내일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지. 아까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왜 그런 말을 했고, 어째서 내게 적대감을 드러냈는지.

“잠깐 예배당 쪽으로 가겠어요.”

로사는 등 뒤의 기사들에게 이르고 앞장서서 빠르게 걸었다.

“공녀님, 하지만 너무 멀리 가시면…….”

“저기, 트리포노프 공녀가 보이죠? 잠깐만 얘기를 나눌 거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혼자 가는 게 좋지만 경들도 날 철저히 호위해야 하니까…….”

안 그러면 롬 황자가 노발대발할 테니까, 로사는 낮게 한숨 쉬었다.

“거리를 좀 두고 따라오세요. 설령 날 노리는 자객이 있다고 해도 충분히 막아 줄 수 있는 레벨이시잖아요.”

로사는 뒤돌아서서 재빨리 알리체의 뒤를 쫓았다. 그녀는 아담한 체구임에도 동작이 꽤 빨랐다. 그녀를 따르는 시종들이 아무도 없는 걸 보면 몰래 빠져나온 것 같았다. 계단을 몇 개 더 넘어서서 마침내 난간 하나만을 남겨 두고 알리체를 불러 세우려던 순간, 로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리고 재빨리 난간 아래로 고개만 내민 채 몸을 숨겼다.

“알리체.”

공녀는 누군가와 밀회를 갖기 위해 일부러 아무도 없는 예배당 뒤뜰로 서둘러 온 것이었다. 알리체는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는 남자의 품으로 뛰어들어 폭 안겼다. 그리고 몇 번이나 그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발을 굴렀다.

“롬! 보고 싶었어요. 왜 이제야……!”

로사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 하느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왜 어제부터 계속 충격적인 일이……. 하지만 지금 눈앞의 광경은, 데지레의 일과는 또 다른 성격의 쇼크를 던져 주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제 나라로 대동해 가던 정혼녀를 두고, 타국의 다른 여성과 저렇게 뜨겁게 포옹하는 광경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로사는 너무 놀라 난간 아래로 고개를 떨구고 두 사람의 대화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거리 때문에, 대부분의 데르어 대화는 그녀의 귀에까지 닿지 않았다.

“롬, 이번엔 나 정말 데리고 갈 거죠?”

그나마 똑바로 들리는 것은 알리체의 새된 음색이었다. 롬은 조용조용, 연신 달래고 어르듯 공녀에게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포옹이 끝나고 조금 거리를 두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다정한 눈으로 알리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사의 심장이 벌컥 내려앉았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그녀는 다시 난간 아래로 주저앉았다.

“나 정말 …하나요? 네?”

저음인 롬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알리체의 음색이 더 밝게 고조되는 걸 보아, 분명히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안 된다고요? 하지만… 알았어요. 어쩔 수 없죠. 나 정말 버리지 않는 거죠, 롬? 약속하는 거죠?”

알리체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로사는 난간 위로 다시 고개를 내밀어, 예배당 너머로 사라지는 둘의 뒷모습을 보았다. 기가 막혔다. 하늘 아래 이렇게 어이없는 경우가 또 있을까. 엄청난 배신감이 밀려들어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이제야… 의문이 풀렸어. 공녀의 손수건에 새겨져 있던 V는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비세그라드, D는 데르반(Dervan)이었어. 롬 데르반.

데르반은 제 것인데 왜 그녀가 가로채는지, 비세그라드로 그를 따라가는지 억하심정에 물었던 것이었다. 이 나라에 머물 동안에는 보안상, 둘 사이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고 했지만 알리체 입장에서는 모를 수가 없다. 롬이 당연히 알려 줬을 것이다.

로사는 간신히 몸을 똑바로 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배신감과 분노로 전신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사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대륙 제일의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비세그라드 왕국이라도 당연히 비공식적인 애인들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분노로 널뛰는 심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로사는 엉거주춤 균형을 잡고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디뎠다. 계단 아래서 줄곧 올려다보고 있던 호위기사들이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안 좋으신 데라도…….”

“아, 아뇨… 괜찮아요. 그냥 갑자기 두통이 있어서.”

기사들은 아래쪽에 있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로사는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계단을 내려갔다. 로브를 여미는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겉으로만 아름답고 실상은 섬뜩한 나라, 이 공국에 오면서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정신적 충격이 그녀를 강타하고 있었다.

***

로사는 두통을 핑계로 저녁 만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는 촛불을 다 꺼 버린 어두운 침소에 누워 있었다. 일찌감치 잘 준비를 마치고 누웠지만, 이제나저제나 롬이 방에 들어올까 봐 머리부터 발끝까지 날을 세우고 있었다.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있다 다시 눕기를 한참 반복한 끝에, 로사는 타샤를 호출해 불면증에 매우 효능이 뛰어난 차를 가져오게 했다. 트리포노프에는 인체에 무해한, 천연 수면효과를 지닌 약초가 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서 타샤가 작은 티포트처럼 생긴 병을 가져왔다.

“로슬린 님, 여기 소니페로(sonifero)를 푹 달인 약이에요. 잠이 잘 안 오세요? 이걸 드시면 바로 주무시긴 하겠지만, 황자님이 금방 돌아오실 텐데 말이에요.”

바로 그래서 마시려는 거야. 깨어 있으면 죽일 것 같아서.

“괜찮아. 그놈, 아니 롬 황자님이 오시면 약 먹고 자니까 깨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잘 말해 줘.”

로사는 병 안의 차를 잔에 따라 술처럼 벌컥 들이켜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썼다. 이렇게라도 강제로 곯아떨어지지 않으면, 분하고 억울해서 악을 쓰고 울 것만 같았다.

바보. 네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 믿을 수 없다, 혼인 절대 안 한다, 두고 봐라 또 보기 좋게 도망치고 말 테니 운운하더니. 따로 여자가 있다는 걸 안 순간부터 이렇게 심장이 에일 듯 아프고 분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약효가 금세 나타났는지, 다행히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멀어지는 의식 너머, 그녀의 것이 아닌 금발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누군가의 손이 떠올랐다.

롬은 트리포노프 공왕 및 안톤 황자와의 긴 담화를 마치고 자정이 가까워서야 국빈용 별궁에 도착했다. 일국의 지도자와 그 후계자는 최근 개방한 무역에의 법안들은 물론,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정책들에 대해 그의 조언을 생명줄처럼 떠받들고 즉각 수렴했다.

“분명 비세그라드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법안을 살짝… 역시 그런 방향으로 많이 유도하셨겠지요?”

수하 이케르의 지적에, 롬의 한쪽 입가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쪽도 알고 있으니 상관없어. 조언의 대가치고는 오히려 싼 편이지. 안 그래?”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천 번, 만 번 동의드리는 바입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십시오, 전하.”

이케르가 물러가고, 롬은 어두운 침소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로사가 깰까 싶어 소리 없이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소니페로를 복용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것은 이미 들었다. 의자를 끌어당겨 침상 머리맡에 앉으니 쌕쌕, 고른 숨소리가 제 것인 양 선명하게 와 닿았다.

그는 손을 뻗었다. 곤히 잠든 소녀, 아니 이미 여자가 된 머리카락은 벨벳처럼 부드럽고 제 이름처럼 장미 향기가 흘렀다. 그 달큰한 체취를 맡기만 해도 다리 사이의 혈관이 생동감 있게 반응해 왔다.

젠장…….

그는 이를 갈며 로사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거뒀다. 오늘 밤은 어젯밤에 못 한 것만큼 더 제대로 사랑하고, 그가 트리포노프에 온 두 번째 이유도 말해 줄 생각이었건만. 이렇게 눈 뜨고 두고만 봐야 한다니 애가 탔다. 마음은 지금 이대로라도 본능에 충실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가뜩이나 미움받고 있는데 여기서 더 짐승 취급받고 싶진 않았다.

“응…….”

잠꼬대 비슷한 소리와 이불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공녀의 천진난만한 숨소리가 평온하게 울렸다. 어둠 속에서도 잠든 얼굴이 천사처럼, 티끌 하나 없이 맑고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롬은 그 모습을 한참 더 바라보다 그 옆에 조용히 몸을 뉘었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어젯밤은 천사처럼 아름다운 모습일망정, 빨리 밤이 지나가 눈 뜬 모습을 마주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귀엽고 사랑스럽다 한들, 그를 버려두고 홀로 꿈나라에 있는 것보다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릴 때가 훨씬 더 좋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조금 달랐다. 평소에 드러내던 것보다 훨씬 더 날 선 독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려 있었다.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말아요! 저리 좀 멀리, 떨어지라고요!”

눈을 뜨자마자,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평온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표독스러운 얼굴만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롬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베개에 휘갈겨 맞은 제 손을 거뒀다.

“머리가 흐트러져 있어서 바로 해 주려던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내 머리가 어떻게 되어 있든 상관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 머리니까! 머리뿐만 아니라 내 몸 어디라도 절대 함부로 손대지 말아요!”

로사는 펄쩍 뛰다시피 침대에서 내려와 그에게 소리쳐 댔다. 그대로 더 두고 봤다가는, 공녀답지 않은 거친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롬은 한 번 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눈앞의 공녀는 적을 만나 온몸의 털이 빳빳하게 곤두선 고양이 같았다.

“내가 그렇게 싫습니까.”

“네!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싫다고, 너무 싫다고!”

롬은 잠시간,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불쑥 물었다.

“무슨 일이죠.”

“…….”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있는 건 확실한데 대체 무슨 일인지를 묻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 없이 롬을 죽일 듯이 노려보곤, 타샤를 호출하는 휘장 옆 끈을 냅다 잡아당겼다.

“로슬린 님, 부르셨어요? 좋은 아침이십니다-”

방글방글 웃으며 들어오던 타샤는 공녀의 얼굴을 보고 흠칫, 바로 맞은편의 황자를 보고는 또 움찔 놀라는 기색이었다. 지난 며칠간의 패턴으로 미루어 보아, 황자는 이미 본성으로 가고 부재중일 거라고만 생각한 눈치였다.

롬은 허리가 부러져라 정중히 절을 해 보이는 타샤를 지나쳐 방문을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시종을 물러가게 명하고 당장 침상에 쓰러뜨려 안아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는 쪽을 택했다.

“잠시만요.”

그가 문을 여는 순간 로사가 그를 불러 세웠다. 아까처럼 악쓰지 않고 침착했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음성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태풍도 물러간다 들었습니다. 오늘 밤은 마지막 밤이 될 수도 있으니 황자비의 궁에서 지내겠어요. 데지레 언니와 마지막으로 밤새 얘기하고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안톤 황자님도 허락했어요.”

롬은 그녀를 돌아봤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숨 막힐 듯한 침묵에, 중간에 선 타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됩니다.”

“…….”

“대신, 자정까지는 황자비의 궁에 있게 해 주겠습니다. 자정에 직접 데리러 갈 테니 그렇게 알아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로사는 홱 몸을 돌려서 전투적인 발걸음으로 욕실을 향해 가고 있었다. 타샤는 뜻하지 않은 두 주인의 냉전에 어쩔 줄 몰라 하다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앗, 로슬린 님- 저기, 제가 세안을 도와 드릴게요- 여기 향유를…….”

롬은 로사가 욕실 안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보다가 문을 닫고 나왔다. 그에게 단단히 화가 난 건 확실했지만 명확한 이유는 오리무중이었다. 자정까지 황자비궁에 두는 것도 싫었지만,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으면 그를 더 미워할 것 같아서 도리가 없었다.

도대체 왜 저러지. 마음을 조금씩 열고 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그의 굳은 표정은 충신 이케르와 호위무사들을 마주하고도 풀리지 않았다.

***

그날 밤, 광풍이 매섭게 몰아쳤다. 황자비궁 살롱 안을 지키던 병사들은 소니페로를 탄 물을 마시고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두 여자는 준비해 뒀던 시종 전용 망토로 온몸을 꽁꽁 둘러싸고 메이든 타워까지 이어지는 지하 통로를 걸었다.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데지레는 동생의 옷소매를 꼭 붙잡고 걸으며 연신 불안함을 토로했다.

“로사, 잡히면… 어쩌지. 나 너무 무서워……!”

“괜찮아. 세르반 님이 몇 달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 왔잖아. 절대 잡히지 않을 거야.”

로사는 어린 동생처럼 떠는 데지레를 의젓하게 다독였다. 돌탑 지하에서는 예정대로 세르반 황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 탑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정확히는 지하의 침소에서 언니와 사랑을 나누는 광경을 본 뒤로는 첫 재회였다. 로사는 후자에 대한 기억은 지우려고 내심 애쓰며,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는 남자를 마주 보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요, 두 사람 모두.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합시다.”

“네, 빨리 서둘러야 해요. 잠에 취한 병사들이 근무태만으로 들키는 건 시간문제고, 비세그라드 기사들이 자정에 절 데리러 오기로 되어 있어요.”

세르반은 두 여자를 또 다른 지하로 이어지는 나선 계단으로 이끌며, 로사의 말에 차분히 답했다.

“이 지하는 내가 우연히 발견한 비밀 통로입니다. 반대편 벽을 이렇게 거울로 막고 좀 더 걸어간 다음, 변두리 마을과 연결된 예배당 밖으로 나올 겁니다. 거기에 우리가 타고 갈 말들이 준비되어 있고요. 우리 경로가 들키진 않겠지만 로슬린 님 말대로 최대한 서두르는 게 좋겠지요. 일분일초라도 빨리 여기서 멀어져야 할 테니.”

세 사람의 이동 경로는 세르반에 의해 꼼꼼히 사전 계획되어 있었다. 반도국인 트리포노프 공국은 규모가 즈베덴보다 더 작았다. 변두리 마을에서 말을 타고 한 시간여 수도인 시르반카를 벗어나면 곧바로 국경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면 중 한 면이 붙은 이웃 나라 벨레즈 공국으로 넘어가, 인접한 마을에서 하룻밤 묵고 다시 항구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거기서 프로나아드행 배를 탈 겁니다. 여기… 데지레 님과 내 위조 신분증은 예전에 만들어 뒀지만 로슬린 님 것은 어제 급히 만들어서 완벽하진 않아요. 그래도 국경을 넘는 데는 충분히 그럴싸하니… 괜찮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황자님…….”

“제가 오히려 고맙죠. 동생분이 같이 있어 줘서 데지레 님이 한결 마음이 놓일 겁니다.”

세르반은 데지레의 어깨를 끌어당겨 다독여 주었다. 그녀도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로사의 한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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