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메이든 타워(Maiden Tower)
로사는 비에 젖은 옷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타닥타닥, 창을 두들기는 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녀가 막 풀어헤친 머리 위에 수면 캡을 썼을 때였다. 문소리가 났고 롬이 휘장을 젖히며 챔버 안쪽으로 들어왔다. 막 목욕을 마쳤는지 머리칼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상체가 반쯤 드러난 가운 위로 더운 김이 느껴졌다.
“저쪽에서 주무세요, 황자님은.”
로사가 경계심 가득 어린 얼굴로 가운을 여미고 소파 쪽을 가리켜 보였다.
“아니면 난 내 방으로 갈 테니 그냥 혼자 편히 주무시는 게-”
“그게 공녀님이 바라는 바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롬은 머리의 물기를 말리며 침상으로 다가와 앉았다. 국빈용 처소의 침대는 성인 대여섯 명이 함께 자도 넉넉할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낮에도 다과를 들거나 책을 읽고 자수를 두는 등, 침대를 여러 용도로 사용하는 트리포노프 공국 특유의 관습 때문이었다. 그는 입가에 놀리는 듯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이렇게 넓은 침대를 두고 왜 굳이 좁은 소파에 밤새 누워 있어야 하죠?”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요?”
로사는 화가 난 강아지처럼 껑충 뛰다시피, 침대 가장 안쪽 벽까지 물러났다. 커다란 베개를 품에 안은 모양새가, 여차하면 베개를 무기로 휘두를 것처럼 보였다.
“정말 순수하게, 잠만 자려는 생각인가요? 비세그라드 왕가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나요?”
아니잖아! 밤에는 꼭 이 방으로 와서 지내야 한다는 이유가 뭐겠어? 로사는 입을 꼭 다물고 황자를 노려보았다. 롬은 빗줄기가 퍼붓는 창 쪽으로 시선을 주며 천연덕스럽게 동문서답을 했다.
“보안상 당신은 내 곁에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밤에는. 낮에는 본궁에 계속 있어야 하니까. 여기 온 김에 향후 교류나 무역에 대해 논의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가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로사는 흠칫 놀랐다. 베개를 끌어안은 두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롬은 창가의 등잔불을 끄고 차분하게 다시 침대 한쪽으로 돌아와 누웠다.
“거, 건드리지 말아요!”
“지금 그쪽으로 손가락 하나도 안 뻗었습니다.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고요.”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제일 큰 베개 여럿을 침대 한가운데 세로로 쭉 늘어놓았다.
“이러면 되겠죠?”
“저, 정말 여기서 잘 건가요?”
롬은 다시 똑바로 누워 눈을 감았다.
“피곤한데… 계속 말시킬 겁니까?”
“경고하는데 나한테 손끝 하나도 대지 말아요.”
“꼭 처녀처럼 말하는군요.”
어둠 속에서도 그의 비웃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로사는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요? 내가 누구 때문에 처녀가 아니게 됐는데! 지금 그게 댁이, 아니 황자님이 할 말인가요?”
“내겐 이미 권리가 있습니다, 로사. 당신을 어느 때고 안을 권리. 아직 정식으로 혼례만 올리지 않았을 뿐 공녀님은 내 여자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 한 사람뿐이에요.”
“뭐라고요? 웃기지 말아요! 내 몸은 내 건데 왜 남이 내 몸을 어느 때고 함부로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럴 권리는 없어요!”
“…알았으니까 이만 자요. 지금까진 내 의지를 앞세웠지만- 당신이 먼저 약속을 어겼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싫다면 내가 먼저 건드리진 않겠습니다.”
그가 흘깃 눈을 뜨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물론 당신이 먼저 다가온다면 얘기는 달라지지만.”
“미, 미쳤어요? 내가 먼저 다가가다니! 무슨, 그런 태풍이 웃을 헛소리를!”
“그럼 안심하고 누워요. 며칠 쭉 배에만 있었으니 본인이 인지하고 있는 것보다 몸이 훨씬 더 피곤할 겁니다.”
롬은 눈을 감고 돌아누웠다. 로사는 벽에 껌처럼 찰싹 달라붙은 채, 어둠 속에서 침대에 한참 앉아 있었다. 롬 황자의 넓은 등과 어깨가 위아래로 희미하게 흔들렸다. 고른 숨소리도 나직하게 들렸다. 그제야 로사는 안심하고 벽에서 몸을 뗐다. 조심조심, 혹시라도 베개 쪽에 손이라도 닿을까 극도로 신경 쓰며 자리에 누웠다.
그녀는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은 눈으로 황자 쪽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는 곤히 잠든 것 같았다. 로사는 다시 똑바로 누워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을 꼭 닫았는데도 사납게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을 더 부추기는 것 같았다.
아까 그 남자는 대체 누구였을까. 안톤 황자와 상당히 닮은 외모로 봐서는, 그의 적통 형제가 분명했다. 아름다운 이목구비, 매혹적인 눈빛이 어둠 속에서도 뚜렷이 보였었다. 롬 황자만큼 완벽한 용모는 아니었지만… 아니, 잠깐! 왜 또 저 호색한과 비교하고 있는 거야, 나는!
로사는 머리를 세차게 저으며 묘령의 남자에게 집중하려 애썼다. 아무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맺어질 수 없는 사연이 있어서 해외로 도피할 결심까지 하고 있는 듯했다.
누굴까, 그 사랑하는 여자가. 그리고 그 메이든 타워.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끔찍한 일이야. 르비탄처럼 후궁과 첩을 줄줄이 들이거나, 왕위를 놓고 형제자매간 거침없이 살육이 오가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런 반윤리적인 근친상간 일화는 들어 본 역사가 없었다. 친아버지가 친딸을 탐해서 아내로 맞으려고 하다니 세상에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스르르 의식이 멀어져 갔다. 점차 엷어지는 의식 속에서, 이름 모를 황자가 흘렸던 한마디가 다시 떠올랐다.
‘겉모습에 속지 마세요. 여긴 광기로 얼룩진 땅입니다. 오래전부터 온갖 미친 짓거리가 자행되어 왔고 지금도… 지금도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곳이 바로 여기, 트리포노프입니다. 옛 이름 시르반카는 저주받은 피, 라는 뜻이죠.’
지금도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럴 리가……. 아닐 거야, 설마. 모두가 행복해 보였고 데지레 언니도 행복하다고 했어.
로사의 눈이 반짝 떠졌다. 겉모습에 속지 말라던 남자의 말이 머리에서 재현되었다. 하긴 즈베덴 공국의 황실 여자들도 그랬다. 온갖 연회와 행사 때마다, 부왕 앞에 다 같이 모일 때는 무척 화기애해하고 사이좋게 보였다. 뒤로는 사고를 가장한 각종 독살, 암살을 꾀할 만큼 서로 증오하고 경계했던 사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었다.
그래서 난 싫어.
로사는 눈을 감았다.
그래서 황실을 떠나 자유롭게 살고 싶은 거야, 나는.
광풍이 휘몰아쳤다. 로사는 한밤중에 깨어나 창밖을 보았다. 잠들기 전보다는 좀 덜했지만 비바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롬 황자를 보았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가슴에 손을 대고 똑바로 누워 있었다. 고른 숨소리로 보아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로사는 몸을 똑바로 펴고 황자를 좀 더 유심히 살펴보았다. 갑자기 호기심에 가까운 의혹이 밀려왔다.
이상해. 제1 황자쯤 되면, 이렇게까지 무방비 상태로 잠들 리가 없는데. 무기도 다 벗어 놓고……. 내가 공격할 거란 생각은 전혀 안 하는 걸까?
한번 시험해 볼까.
로사는 충동을 누르지 못하고 황자 쪽으로 살며시 몸을 굽혔다. 정말로 해치려는 생각은 없었다. 직접 검술을 본 적은 없지만, 롬 데르반 황자는 대륙 널리 평판이 자자한 무인이었다. 손끝 하나만 닿아도 금세 깨어날 것이다. 그냥 얼굴 위로 손만 몇 번 붕붕 저어 볼 생각이었다. 그런 기척에도 깨어나지 않으면 천하의 무인이랄 것도 없지, 뭐.
로사는 슬금슬금, 길게 누운 황자의 몸 위로 다가갔다. 무릎 꿇고 그의 자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쿨쿨 곯아떨어져 있었다.
멀리 떨어진 하늘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울렸다. 번개에 반사된 황자의 얼굴이 달빛 아래 조각 같았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정말 잘생긴 얼굴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즈베덴뿐만 아니라 대륙 각국의 황녀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이유 중 첫째는 역시 이 용모 때문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훌륭한 이목구비.
로사의 한 손이 그의 얼굴 위로 뻗었다. 수년간의 호신술 수행을 통해 인체상 기본적인 급소나 약점은 잘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약점을 알든 모르든 계란으로 바위 치는 상황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계란과 바위가 각각 어느 쪽인지도 역시.
손을 거두려는 순간, 황자의 눈이 확 떠졌다. 손목이 확 잡히며 몸이 순식간에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꺄악, 로사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비명 소리는 벼락과 폭우 소리에 묻혀 버렸다. 롬 황자는 두 손목을 침대에 핀처럼 잡아 누르고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뭘 하려던 거였죠.”
“아, 그, 저, 나, 아니… 어…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로사의 입에서 어버버, 방언 같은 말들이 터져 나왔다. 놀라움에 휘둥그레진 두 눈이 그의 시선과 맞닿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황자의 눈이 어둠 속에서 형형한 빛을 발했다.
“뭐가 아니란 겁니까.”
“아니, 해치려고 하거나 그런 게… 그럴 생각은 없었다는 거예요! 이건 과잉반응이에요.”
“덮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닙니까?”
“뭐, 뭐라고요? 미쳤어요? 누가요?”
“당연히 먼저 다가온 쪽이죠.”
비웃음이 가득 밴 목소리에, 로사의 당황은 분노로 변해 갔다.
“미친 소리 그만하고 이 손이나 놓고 비켜요-”
“그렇게 순순히 놔줄 순 없죠. 이 삼엄한 경계를 넘어왔는데.”
황자의 손은, 벗어나려는 가냘픈 두 손목을 더 꼭 붙잡았다. 그의 숨결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개 돌려 피하려고 했지만 입술은 바로 그녀의 것 위에까지 와 있었다.
“먼저 다가온 건 당신이야, 공녀님.”
“아, 안… 응!”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것 위에 겹쳐지며 혀가 곧장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벗은 상체가 펑퍼짐한 잠옷 위에 겹쳐졌다. 틀어박힌 입 속에서 흐윽, 억눌린 신음이 고양이 울음소리처럼 그르렁거렸다. 하체를 감싼 얇은 천 너머, 혀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묵직함이 다리 한가운데를 꾹 눌러 오고 있었다.
서로 맞물린 혀가 하나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혀와 혀가 마찰되는 불꽃이 야릇하고도 아릿해서 입 안이 통째로 데일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달콤하고 끈끈한 액이 끊임없이 새어 나와 몸의 힘을 빼고 있었다. 그 다디단 액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근육들이 빠르게 이완되며 의식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나른한 쾌감, 기분 좋은 무기력함이 로사의 저항을 천천히, 확실하게 무너뜨리고 있었다.
“아…흑!”
마침내 혀가 자유를 되찾는 순간, 로사의 입 밖으로 새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가슴께까지 올라갔던 잠옷이 머리 위로 벗겨지고, 드러난 가슴이 그의 입술에 공락당하고 있었다. 붉은 혀 선단이 날름, 우뚝 솟은 유두 돌기를 한 바퀴 돌고는 젖꼭지 위를 간질간질 핥았다.
“앗! 안… 하, 하지 말…….”
로사의 허리가 위로 크게 튕겼다. 등골이 쭈뼛 서며 쾌감의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두 손으로 황자를 밀어내려 했지만 양손은 이내 잡혀 버렸다. 강인한 악력에 양 손목이 머리 위로 결박되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황자의 다른 한 손이 한쪽 가슴을 거세게 쥐었다. 다른 쪽 가슴은 뜨거운 숨결, 집요한 입술과 혀 아래 한시도 자유로울 틈이 없었다.
이 끝이 유두 선단을 살짝 깨물다 놓기를 반복하는 동안, 로사의 신음은 거의 울부짖음 비슷하게 바뀌어 있었다. 엄청난 쾌감이 몸과 머릿속을 관통해 들어와 제 몸이란 실감마저 일지가 않았다. 어느새 반쯤 벗겨진 속옷은 연신 흘러나오는 애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 그만! 하지 말… 아! 응!”
황자는 한참 뒤에 가슴에서 입을 뗐다. 하지만 결박한 양 손목은 풀어 주지 않고서, 다른 한 손으로 양쪽 가슴을 위로하듯 어루만졌다. 따스한 손바닥이, 강한 애무에 시달리다 빨갛게 부어오른 가슴 위를 부드럽게 오갔다.
“정말이지 감도가 너무 좋군요……. 반응하는 걸 보면 멈출래야 멈출 수가 없단 말이죠.”
롬은 격렬했던 애무를 사과하듯, 한쪽 유두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잔뜩 피가 몰린 하체가 뻐근하다 못해 폭발 직전에 이르러 있었다.
“그만해요… 이거 놔달라고요……!”
로사는 거의 울먹이다시피 애원 반, 협박 반의 어조로 으르렁거렸다. 자신도 잔뜩 흥분해, 욕망으로 달뜬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꿋꿋하게 멈출 것을 종용하다니 웃음이 났다. 눈물이 그렁그렁, 촉촉하게 젖은 눈이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귀엽고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대로 보고만 있자니 몸서리가 날 지경이었다.
롬은 양 손목을 쥐고 있던 제 손을 천천히 풀었다. 어차피 반항해도 소용없다는 건 둘 다 명백히 알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양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내 인내심이 새삼 대단했다 느껴집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무슨 수로 당신을 보고만 있었는지.”
어둠 속에서도 격하게 번뜩이는 욕망에 숨이 막혀 왔다. 로사는 눈을 감아 버렸다. 롬의 입술이, 감긴 눈꺼풀 위를 살며시 눌러 왔다. 그의 입술이 코, 뺨, 입술과 턱을 지나 목까지 내려왔다.
“몸을 열어요. 힘 빼고…….”
황자는 백조처럼 가냘픈 목에 제 입술을 묻고 조용히 속삭였다.
“잠자코 내 것이 되세요, 오늘 밤도.”
내일 밤도, 그다음 날도, 앞으로도 쭉.
부드러운 명령 직후, 그는 거침없이 제 본능에 충실하게 몸을 움직였다. 주저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뜨거운 묵직함이 활짝 열린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크고 단단한 남성이 좁디좁은 질 안을 꽉 채울 때까지, 롬은 허리를 천천히 앞으로 밀었다. 로사의 새끼 고양이 같은 울음도 점점 더 커졌다. 두 팔 가득 끌어안은 가슴에서 심장 고동 소리가 울렸다.
완전히 막다른 내벽에 이른 순간, 발버둥 치던 저항도 잠시 수그러들었다. 롬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로사의 이마며, 볼, 귓불과 목 안쪽까지 열렬히 키스를 퍼부어 댔다. 흑, 히끅, 딸꾹질 같던 울음도 어느새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가 곧 움직임을 재개하면 다시 요란한 헐떡임과 신음, 비명의 향연이 이어지리란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로사, 당신은… 모를 겁니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지…….”
“아! 으흑! 응! 응!”
허리가 크게 들썩거렸다. 롬의 분신이 좁은 동굴 속에서 힘차게 자맥질을 해 나갔다. 페니스가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 양, 제가 점령했던 처녀지의 내벽에게 열렬히 구애해 나갔다. 퍽, 퍽, 그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로사의 신음도 더 높아져 갔다.
그는 천천히 움직이다 조금씩 속도를 빨리했다. 그의 것은 몸속을 후려치듯, 사정없이 부딪쳐 왔다. 여린 속살이 거칠게 쓸리고 밀리는 통각, 점점 더 커져 가는 쾌감이 한꺼번에 뒤섞여 로사의 몸을 파도처럼 뒤덮어 왔다. 롬이 잠시 숨을 고르고 로사를 일으켜 마주 보고 앉았다. 그는 그녀의 벗은 몸을 끌어안고 허리를 위로 힘껏 쳐올렸다.
“아! 앗! 응! 잠깐… 하윽!”
로사의 손톱이 단단한 어깻죽지 살을 힘껏 파고들었다. 세찬 비바람 속, 무방비 상태의 꽃잎처럼 가냘픈 몸이 힘껏 흔들렸다. 강한 손이 그녀의 매끄러운 허리 양쪽을 잡고 쉴 틈 없이 위아래로 쳐올렸다. 손톱이 탄탄한 등 근육을 할퀴며 목덜미 뒤쪽에 제 몸을 박았다. 로사는 눈을 감고 연신 흐느낌을 내뱉었다. 죽을 것 같았다. 거대한 남근이 몸속에 똑바로 직립해서 사정없이 자궁 위를 찔러 오는 충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가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그의 것이 점점 더 집요하게, 빠르게 박혀 오고 있었다.
아아, 미쳤나 봐… 왜 이렇게 좋은 거지……. 내가 원한 게 아닌데 왜……!
죽을 것처럼 짙은 황홀경이 잠시간 더 계속되었다. 리듬을 타고 움직이던 그의 몸이 좀 더 속도를 빨리했다. 롬은 더 빨리, 성급하게 허리를 움직이다 그녀를 다시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그러고는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로사의 알몸에 제 몸을 바짝 밀착하고 박차를 가했다. 격렬하게 찔러 오는 그의 것에, 로사는 절정이 가까웠음을 알았다.
아, 안 돼. 회임이라도 하게 되면……!
하지만 절정이 밀려오자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뜨거운 파정액이 왈칵, 몸속 깊이 흘러들며 둘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마지막 오르가즘을 동시에 만끽했다. 롬이 그녀의 몸 위로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로사 역시, 그의 품 안에서 무너져 이내 의식을 잃었다.
콰광, 창밖에서 한 번 우레 같은 천둥이 내리쳤다. 방 안의 폭풍은 잦아들었지만 바깥의 것은 여전히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
다음 날, 그다음 날도 하늘은 여전히 잿빛 먹구름 속에 뒤덮여 있었다. 비가 그쳤을 때도 햇빛을 보기엔 아직 요원해 보이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롬은 세르반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뾰족한 첨탑 아래, 망루 한가운데 서서 넓은 평지를 내려다보았다. 회색 창공 아래로 물안개가 뿌옇게 어려 있었다.
“태풍으로 농작물 피해가 있진 않습니까? 아무리 농한기라도 이듬해 농사에 피해가 분명히 있을 텐데요.”
“아, 그렇기는. 합니다.”
트리포노프 재무대신은 농한기니 괜찮다, 는 무사태평한 답을 하려다 흠칫 놀라며 말끝을 흐렸다. 아들뻘 되는 타국의 황자 앞에서 굽신거리고 쩔쩔매는 자신이 초라해 보인다는 자각도 없었다. 비세그라드 차기 국왕 계승자이자 현 국왕의 대리 옥쇄를 지닌 사람 앞에서, 그런 자각을 갖는 것조차 사치스런 여유였다. 그런 여유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대신들뿐만이 아니었다.
“롬 황자, 대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정말 고민이 많습니다. 이제 막 쇄국정책을 접고 무역을 개시했을 뿐인데 적자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러다 우리 왕실이 거덜 나는 건 시간문제예요. 공왕 폐하도 그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고…….”
트리포노프의 차기 공왕 계승자인 제1 황자 안톤은 울상을 지으며 가련한 눈으로 롬 황자를 올려다보았다. 누가 보면, 바로 아래 신하가 주인에게 간절히 조언을 구하는 모양새나 진배없었다.
“정확히 말해서 적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황궁과 왕실 일가의 일상에 소비되는 자금과 물품을 조금씩만 줄여도 무역이 활성화되기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롬은 동갑인 안톤 황자를 차분히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상대를 향한 질책이 그 서늘한 눈빛에 역력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잠깐의 절약… 작은 희생을 피하고자 무턱대고 자국 농민의 세 부담을 높이거나 타국의 무역 상인들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세금을 징수하면 안 됩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절대 좋지 않을 겁니다.”
“예? 하, 하지만…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택해야겠기에, 저는 롬 황자가 결정해 주시는 대로 그 조언들 따라서 왕실의 생활비를 유지하고자 했거든요. 갑자기, 당분간이라도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한들…….”
“허리띠를 졸라매는 게 아닙니다. 이웃의 벨레즈 공국에서 매주 공수해 오는 많은 양의 캐비어나 커피, 향유와 비단 등… 값비싼 식재료와 생필품, 아니 사치품을 좀 줄이라는 겁니다. 영원히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한 무역이 활성화되어 국고에 풍성한 보탬이 될 때까지만.”
“예에… 그건 알지만.”
“무역 활성화를 위해서 삼면의 항구를 일일이 재정비하고 숙박업소와 식당, 치안을 위한 행정관 산하 자경단 등을 구축하는 데 든 경비는 필수적인 지출이었습니다. 그 지출에 필요했던 자금을 우선 왕실 국고에서 융통해 썼다는 이유로, 자국민들 삶을 더 힘들게 하면 왕실에 대한 존경심은 하락하고 반발만 야기하는 결과가 됩니다.”
“아아… 예…….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만… 그, 그럼 무역세는 왜 올리면 안 됩니까? 다른 나라의 무역상은 자국민이 아니니 좀 부담이 된다 한들…….”
바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롬은 잠시 틈을 두었다. 굳이 이렇게 인내심을 발휘해서까지 조언을 해 줄 입장이 아니었지만 그는 잠자코 말을 이었다. 도와줄 입장도, 위치도 아니었지만 그래야 할 도의적인 이유는 있었다.
“무역상만큼 실리에 밝고 이윤을 따지는 이들도 없습니다. 그런 상인들이 굳이 더 높은 세금들- 통행세, 체류세, 무역세를 내고 이곳 트리포노프에 올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상인이라도, 더 저렴한 세를 부과하는 인근의 벨레즈 공국과만 거래할 겁니다. 어차피 한 번에 선박에 실어 올 물량은 한정되어 있고, 굳이 그것을 비싼 세를 부담하고 두 나라에 나눠서 팔 이유는 없으니까요.”
“아아…….”
“벨레즈에는 없고 트리포노프에만 있는 특화품이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상인들은 벨레즈에만 정박할 것입니다.”
“아… 예. 그럼 달리 도리가 없군요. 아버님, 어머님께 의논을 드려 황궁 유지비와 수입 물품 등을 좀…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당장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이 하나라도 줄어들면 반발이 심하겠지만… 어쩔 수가… 휴우…….”
“정 어렵다면 황궁의 대관식 홀 공사를 잠시 당분간 중단하는 쪽도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에? 대, 대관식 홀 공사를……. 하지만 그건 제가 2, 3년 뒤 아버님의 옥좌를 물려받을 때 거행될 곳이라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모든 것에는 대가와 희생이 공존합니다, 안톤 황자. 전에… 황자 스스로 말한 바 있지 않습니까. 황실에 태어났다 해도, 백성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처럼 온전한 행복을 누리진 않는다고 한탄하지 않았습니까. 옥좌에서 물러나는 그 순간까지도, 강대국의 침략과 간섭에서 나라를 지키고 일국의 번영과 안정을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부담감을 백성들이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고.”
“예. 맞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말씀해 주신 조언을 모두 종합해서 아버님께 의논드려 보겠습니다. 그래도 두 가지 방안이라도 나와서 다행입니다! 롬 황자가 마침 태풍을 피해서 여기 와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이렇게 환대해 주시고 융숭한 접대까지 해 주시니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그럼 점심때 별실에서 뵙죠.”
롬은 호위기사들을 대동하고 망루 아래로 발길을 옮겼다. 안톤 황자와 대신들이 시종일관 굽신거리며 절하는 모습이 등 뒤로도 꽂힐 듯 생생했다.
일행이 모두 망루 아래로 내려왔을 때, 바로 뒤에서 걷고 있던 호위기사 이케르가 롬에게 바짝 다가왔다. 일견, 주인과 수하 이상의 친밀한 기류가 둘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하아… 전하께만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정말로 무력하다는 말밖엔 안 나옵니다. 수년 내 일국의 왕이 될 후계자가 타국의 황자에게 제 나라 국고와 재정난 해결에의 조언을 구하다니. 아마 어느 나라에서도 전례 없는 일일 겁니다.”
“어쩔 수 없어. 폐쇄주의를 해제한 지 불과 몇 달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천혜의 자연, 풍부한 자원이 있었지만 이제 다른 공국들처럼 무역을 통한 동맹도 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때가 온 거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아둔, 흠, 아니 무지하지 않습니까.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실제 제1 황자는 따로 있고 지금까지 나라가 망하지 않게 이끌어 온 건 사실 그 진짜 황자의 국정 개입 덕인데 말입니다. 어쨌든… 전하 입장에서는 그분 때문에라도 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두고 보실 수는 없으시겠지요.”
이케르의 마지막 말에, 롬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어쩔 수 없지. 본인이 이 나라 남자와의 혼인을 원하니까. 감정이란 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참, 앞날을 예견해 보면 트리포노프 공국이 번영하게 되는 건 순전히 그분 덕이겠군요. 그분 때문에 전하가 이 나라를 나 몰라라 하실 수 없는 거니……. 일부러 더 가까운 벨레즈가 아닌 여기로 오신 것도… 그분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서가 맞으시지요?”
“그런 이유도 있지.”
“다른 이유는 역시… 로슬린 공녀님 때문이시죠? 모처럼 자매간 해후를 위해서.”
“그보다 안톤 황자 주변을 좀 더 조사해 보라던 건? 어제 말한 군사력 상태도 알아봤나?”
롬은 화제를 돌렸다. 이케르는 입가 한쪽을 비틀며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황자 전하, 그렇게 좋으십니까. 아주 잠깐이지만 얼굴이 확 변하신 거 모르시지요?”
롬은 애써 정색해 보이며 기사에게 물러나란 손짓을 해 보였다.
“이케르, 사촌 동생이라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타국에서는 제대로 선 지키라고 했지.”
“예, 황자 전하!”
기사는 웃음기를 싹 거두고 일부러 긴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황자 등 뒤로 몇 발짝 떨어져서 다른 기사들과 나란히 걸었다. 롬의 발길은 자동적으로, 방금 한순간 웃음 짓게 만들었던 이의 거처로 향하고 있었다.
***
전날 밤, 수차례의 정사의 여운은 날이 밝고 한참이 되어서도 가시지가 않았다. 로사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드러눕길 반복했다. 먹고 자고 끙끙대고, 이제는 산송장을 넘어서서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큰일이야, 매일 밤 이렇게 휘둘려서야. 덜컥 아이라도 생기면 어쩌지……?”
로사는 낑낑대며 기어가 창턱에 앉았다. 먹구름이 다시 몰려들고 있었다. 타샤의 말로는, 곤히 자고 있는 사이 언니 데지레가 찾아와 몸은 괜찮은지,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스럽게 물은 모양이었다.
‘어제도 찾아오셨는데 오늘도 그러시니……. 병이 아니라 그, 저, 음, 그거…라고 속 시원히 말도 못 하고 걱정을 덜어 드릴 수가 없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라요! 로슬린 님과 롬 황자님과의 관계를 절대 밝혀서는 안 되니.’
로사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씻으려다 다시 침대에 벌러덩 엎드렸다. 다리 사이가 쑤셔서 도무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딱 몇 분만 더 누워 있다 일어나야지……. 하아… 도저히 안 되겠어!”
저녁 전에는 데지레에게 가 볼 생각이었다. 기껏 재회했는데 이렇게 제대로 얼굴도 못 보고 하루 종일 잠만 퍼 자고 있다니.
아무래도 언니가 복용한다는 회임 촉진제 대신, 회임을 방지하는 약이 없는지 다른 핑계라도 대고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이미 몇 번이나 해 버린 뒤였지만 앞으로라도 예방할 수 있어야 했다. 젠장, 거시기 좀 못쓰게 만드는 약도 없는지 알아봐야겠어. 약으로라도 잠시 거세시킬 수 있다면…….
‘황자님은 제가 지금껏 본 황실의 남자분들 중 가장 훌륭한 분이세요. 정말로 완벽하신 분이지요. 화도 안 내시고……. 아, 전에 이케르 호위기사님이 말해 주셨는데 어쩌다 한 번 화가 나실 때는 정말 무서우시대요. 소리 한번 안 지르고 가만히 노려보시는데 오금이 저려서 죽는 줄 알았대요! 하지만 평소엔 워낙 점잖으시고 품위 있으시니까요. 차갑고 냉정하시긴 해도…….’
언젠가 타샤가 제 주인에 대해 줄줄 늘어놨던 찬사가 머리에 떠올랐다. 롬 황자가 진심으로 화를 냈던 모습은 그녀도 몸소 체험한 바 있었다. 바로 얼마 전, 프로나아드행 배를 타고 달아나려다 보기 좋게 잡혔던 순간을 떠올리니 지금도 소름이 쭈뼛 섰다.
그래. 롬 데르반은 확실히… 내가 본 남자들 중 가장 완벽해. 뛰어난 전략가나 무인의 평판이 아니더라도, 즈베덴 황실 남자들 중 누구보다 완벽한 풍모에 카리스마 있고 점잖고. 나한테 싸늘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지만 분명히 본래 성향은 차갑고 냉정한…….
잠깐.
시트에 묻혀 있던 로사의 눈이 반짝 떠졌다. 갑자기 생각난 누군가가 있었다. 즈베덴 황자도, 황실 일가 귀족들도, 자국의 호위무사들이나 대신들도 아닌 한 남자였다.
라이너. 그 남자는 지금 비세그라드 황실에 있겠지……?
4년 전, 비세그라드 황자 사절단이 즈베덴을 처음 방문했을 때, 로사에게는 사절단과 대면하고 인사할 기회가 없었다. 아무리 공녀라도 미성년은 정식 연회에 참여할 수 없는 규율이 있는 까닭이었다. 그 규범에 따라, 로사는 비세그라드 사람들 중 누구와도 대화해 본 적이 없었다. 수행기사 중 한 사람, 라이너란 청년과만 잠깐씩 말을 나눴을 뿐.
비세그라드의 기사들 중 몇 명은 얼굴 대부분을 가리는 헬멧을 쓰고 있었다. 로사는 내궁 안에만 있는 게 답답하고 지겨울 때, 가끔씩 시종의 옷으로 갈아입고 뒤뜰에서 검술을 연습하곤 했다. 가끔은 호위무사들이 마지못해 상대해 주긴 했지만 대부분은 홀로 목각 검을 휘두르는 게 고작이었다. 안전상의 이유로 진검은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4년 전, 비세그라드에서 온 롬 데르반 황자와 사절단의 첫 방문으로 궁 안이 크게 들썩일 때 로사는 시종의 옷을 걸치고 후원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날, 라이너란 비세그라드 소속 기사와 마주쳤다.
그때 로사는 지독하게 무료한 나머지 제일 높은 나무에 올라가 앉아 있었고, 라이너는 춘곤증에 꾸벅꾸벅 졸다가 아래로 떨어질 뻔한 그녀를 받아 안았다. 특별한 뭔가가 있던 건 아니었다. 시종일관 황궁의 사환인 척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그 후로 1년에 두어 번씩 비세그라드 사절단이 즈베덴을 방문할 때마다, 라이너와 한 번씩은 꼭 마주쳤었다. 그리고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눴다.
시종인 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황녀로서 그녀가 실제로 했던 일, 보고 듣고 읽었던 데르 해 각국의 이야기를 제삼자의 입장에서 말하기만 하면 대화는 술술 풀렸다.
코 위부터 헬멧으로 가려진 기사는 끝까지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말도 거의 없었고 그녀의 말을 주로 경청만 할 뿐, 함께 있는 시간은 짧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 가끔은 상상도 해 봤었다. 헬멧을 벗으면 어떤 얼굴일지. 분명 헬멧의 금속성과 섞여 울려 나와도 숨길 수 없던 부드러움이 가득 배어 있을 것 같았다.
“로사 님- 아직 주무세요?”
똑똑, 노크 소리에 이은 타샤의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날려 보냈다. 로사는 시종을 들어오게 한 뒤 끙끙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 아니야. 들어와. 도저히 갑갑해서 안 되겠어. 잠시 언니 좀 보러 가려고.”
“앗, 어쩌죠! 데지레 님은 지금 초상화 작업 중이셔서 황비마마 별궁에서 꼼짝 못 하고 계신대요. 이틀에 한 번꼴로 두 시간씩 왕실 소속 화가의 모델이 되셔야 한대요. 아무래도 저녁 식사 후에 뵐 수 있을 듯해요.”
“아, 그래……. 그럼 나중에 만날게. 대신, 답답해서 산책이라도 잠깐 가야겠어.”
“네. 그게 좋으실 것 같아요. 이틀째 방에만 갇혀 계셔서 많이 갑갑하셨죠? 아무래도 저녁때부터 다시 비가 쏟아질 것 같으니 지금 가시는 게 좋겠어요. 제가 호위병들과 함께 갈게요. 엘리네는 주방에서 한창 베이킹을 배우고 있어요. 여기 머무는 동안 트리포노프 전통 후식 레시피를 알아 두려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잠깐 나갔다 오더라도, 롬 황자님이 특별히 로슬린 님 전용으로 지명해 놓으신 호위기사 세 명을 꼭 대동해야 해요. 짧은 산책에 기사 셋이라니 너무 과하다 생각하시겠지만, 아무리 동맹국이라 해도 이곳은 타국이니 어쩔 수 없어요. 안전 문제는 아무리 철저히 해도 지나치지 않으니까요.”
타샤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는 동시에, 낑낑대는 로사를 도와서 그녀가 외출용 망토를 두르고 발목에 스패츠 묶는 것을 도와주었다.
먹빛 하늘 아래서도 파스텔 톤 성벽과 잔잔한 호수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타샤가 언급했던 호위기사 세 명은 좀 떨어진 거리에서 두 여자를 빈틈없이 뒤따르고 있었다.
“정말 신비하고 고적해요, 여기는. 원래 궁성은 수도 한복판에 있는데 여기처럼 해안에 면해 있는 곳은 드물어서 더 그런가 봐요. 시끌벅적한 마을과 떨어져 있으니까요. 와, 저기 저쪽 예배당에 첨탑 좀 보세요. 날이 흐린데도 호수에 비친 게 정말 예쁘네요!”
잠시 호숫가를 거닐던 중, 타샤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로사는 제 옆에 꼭 붙어 있는 소녀를 돌아보았다.
“타샤.”
“네.”
“정말 동화 속 성처럼 예쁘고 아름다워. 그런데 그게 말이지… 처음에는 날씨 때문이려니 했어. 그런데 꼭 태풍 때문은 아닌 것 같아.”
“네.”
타샤는 저보다 좀 더 큰 공녀를, 긴장하는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살짝 움츠러든 어깨가 어쩐지, 로사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예견하고 있는 듯했다.
“어쩐지 으스스해. 어딘가… 음침하고 스산한 적막함이라고 해야 할까.”
“음, 밤에는 확실히 좀 그래 보여요.”
“특히 저기 말이야.”
로사는 한 손을 들어 오른쪽을 가리켜 보였다. 숲과 경계를 이루는 울타리 너머, 돌탑 꼭대기가 보였다. 동시에, 안톤 황자와 매우 닮아 있던 남자도 떠올랐다.
“메이든 타워라고 들었어. 그 끔찍한 실화도……. 타샤, 넌 듣지 못했지?”
“네. 무슨 실화인데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들려줄게. 넌 아직 어리니까 지금은 모르는 게 나아. 그보다, 저 탑을 한 번 더 둘러보고 싶어.”
“한 번 더? 여기 와 보신 적 있으세요?”
“응. 그때는 좀 떨어진 곳에서. 아직 비가 올 기미는 안 보이니까 잠시만 탑 바로 앞까지만 가 볼게.”
“하지만… 혹시라도 위험한 곳이면. 이렇게 울타리가 쳐져 있는 걸 보면, 들어가지 말라는 뜻 같은데요- 앞에 보초병들도 없고요.”
“버려진 곳인 것 같아. 위험도 없지. 귀신만 없다면. 그럼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히익, 귀신이란 말에 타샤는 움찔 놀라면서도 로사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끝까지 따라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로사는 탑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비세그라드 소속 호위기사들에게, 위험한 곳이 아니라 일종의 관광지니까 탑 벽까지만 가 보고 오겠다고 둘러댔다.
“타샤랑 같이 들어갈 거니까 경들은 울타리 밖에서 기다리세요. 여기서도 충분히 보이잖아요.”
수풀로 우거진 탑 앞은 황량한 것 같으면서도 탑 외벽이나 출입문과 창문 등은 손질이 잘되어 있었다. 왜인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단순한 호기심이든, 알 수 없는 미지의 힘 때문이든, 안톤 황자와 쌍둥이 같았던 남자에게 들은 말 때문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쌍둥이……? 아냐. 트리포노프에 쌍둥이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없어. 그게 알려지지 않았을 리도 없고.
로사는 높은 탑 망루를 올려다보다 손을 뻗어 문을 밀어 보았다. 육중한 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타샤는 불안한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기, 로사 님, 비가 올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들어가시는 게…….”
“타샤, 넌 거기 있어. 잠깐만 보고 올게.”
로사는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탑 가장자리로 살금살금 걸었다.
“앗, 로사 님! 거긴 왜……!”
“괜찮아. 잠깐만.”
로사는 탑 가장자리로 조용히 다가갔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갈대처럼 긴 꽃들 안쪽으로 작은 창문이 하나 나 있었다. 이런 탑은 건축학적으로 지하실이 있고 환기를 위한 창도 있기 마련이다. 예전에 즈베덴에서 왕실 건축가가 부왕과 대화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창에는 두꺼운 암막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로사는 뻐근한 다리를 굽히고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분명히 휘장 아래, 너울거리는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굳게 닫힌 창 안쪽에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안에서 누군가 뭔가 하고 있다 해도,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을 건 분명했다.
뭐였지, 그 그림자는……. 잘못 본 걸까?
로사는 천천히 몸을 폈다. 어쩌면 유령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귀신이니 유령이니 그런 존재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전에 비참한 죽음을 맞았던 공녀의 원혼이 탑 안에 여전히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함이 퍼뜩 들었다.
그녀가 무릎을 펴려는 순간, 하늘거리는 그림자가 다시 보였다. 누군가의 긴 은발이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색이 다른, 두 종류의 은발이었고 둘 다 눈에 익었다. 확실한 기시감이었다.
“……!”
다음 순간, 로사는 한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눈을 의심했지만 창 너머, 탑의 지하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장면은 실제가 맞았다. 투둑, 빗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폭우가 다시 밀려오고 있었다. 등 뒤에서 타샤의 부름이 들렸다. 그녀는 망연자실 엎드린 자세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폈다. 망토를 뒤집어썼는데도 어깨 위가 비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로사 님, 괜찮으세요? 이러다 감기 드시겠어요! 황자님이 뭐라 하실 텐데…….”
타샤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부축해 걸었다. 별성이 멀리 보였지만, 로사는 영혼 없는 인형처럼 말없이 걷고만 있었다. 방금 전 제 눈으로 목격한 것을 믿을 수 없는 까닭이었다.
데지레. 데지레 언니가 도대체 왜……. 왜 그 남자와?
한창 초상화의 모델로 별궁에서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할 황자비는 메이든 타워라 불리는 탑 지하에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안톤 황자와 닮았지만 절대 안톤 황자 당사자는 아니었던 그 머리 긴 남자가, 데지레 위에서 몸을 겹친 채 움직이고 있었다.
강제로 범해지는 건 아니었어. 절대로. 그랬다면… 나도 그렇게 잠자코 물러서진 않았겠지.
데지레는 남자의 목을 두 팔로 두르고 환희에 흐느끼고 있었다. 무척이나 잘 아는 얼굴이었지만,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로사는 이마의 식은땀을 훔쳤다. 땀인지 빗물인지, 싸늘한 날씨에도 망토의 후드 안은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그렇게 비밀스런 공간에서 정사를 벌이고 있었을까. 타샤가 옆에서 계속 말을 시켰지만 동굴 속 먼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어디 안 좋으세요, 로슬린 님?”
“아냐. 괜찮아! 뭘 좀 생각하느라……. 그보다… 저녁 만찬은 언제쯤이지?”
“아, 많이 시장하시죠? 제가 빨리 엘리네에게 가 보고 올게요. 방에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침대 앞 테이블에 노르딕어로 쪽지가 쓰여 있었다. 대륙 공통의 데르어 대신, 일부러 트리포노프 공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노르딕어를 쓴 것 같았다.
산책 나갔다고 들었습니다. 저녁 만찬 전까지는 절대 나가지 말고 방 안에 있으세요.
쪽지 옆에 붉은 장미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그녀의 이름, 로사의 작명 동기가 된 로사 키넨시스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트리포노프 황궁 내 온실에서 꺾어 온 것 같았다.
로사는 줄기 끝부분을 잡고 봉오리에 코를 대 보았다. 달콤한 향이 짙게 찔러 왔다. 머리가 복잡했다. 이대로 롬 데르반을 믿고 그의 황자비로 비세그라드까지 함께 가는 게 옳은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