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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피어난 장미를 과감히-3화 (3/9)

3화: 갓 피어난 장미는 과감히 꺾어야

조곤조곤, 속삭이듯 낮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데르어였다. 깜짝 놀란 로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선실 안을 살폈다.

아직 동 트기 전인 듯, 선창 너머는 여전히 새카만 어둠만이 보였다. 한 중년 남자와 부인으로 보이는 아낙이, 그녀가 누운 대각선 쪽에 자리 잡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부부는 그녀가 자는 데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낮춰 말하고 있었다.

“하여간에 밤새 마을을 죄다 뒤집어엎고, 수색에 혈안이 된 모양이야.”

“그러게.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당장 죽을 것처럼 앓아눕던 공녀님이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대체 어찌 된 거래요?”

“난들 알겄나. 그러니 델 모나크 황실에서도 수색대를 풀어서 지원하고 있겄지. 거의 계엄령 수준이라니까. 여하튼 요즘 대륙 여기저기 저주가 퍼졌나 봐. 나라마다 뒤숭숭한 일이 끊이지가 않네. 열흘 전에는 바첼라프 공국의 후계자가 갑자기 죽어 버리고……. 독살됐다는 설이 제일 유력하더라고.”

중년 남자의 데르어는 표준어에 가깝고 발음도 정확했다. 최소 중급 이상의 교육을 받은 무역상인 것 같았다. 벽을 보고 누워 있던 로사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이게 다 무슨 소리지? 바첼라프 공국의 제1 공자라면… 클란츠인데? 원래 내 정략결혼 상대였던 클란츠 로뎀 바첼라프. 분명히 지금 그에 대한 얘기가… 맞는 거지?

“근래 대륙 각국에서 후계자 다툼도 있고, 왕권 교체도 되고, 그래서 분란이 끊이질 않는 것이겠죠. 아무튼 난리가 났구만요. 정식 황비로 모셔 가던 공녀가 시집갈 나라에 닿기도 전에 병이 나고, 또 병난 채로 감쪽같이 사라지고- 누가 감히 비세그라드의 황비 될 몸에게 해코지할 리도 없고. 아, 혹시!”

중얼대던 부인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건너편에서 자고 있는 로사의 존재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제 발로 도망간 게 아닐까요? 결혼하기 싫어서. 아니면 따로 남자가 있어서?”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그게……. 이 사람아, 비세그라드 제1 황자가 어떤 인물인데? 내가 여자라도 바지자락 붙잡고 늘어지겠다, 참 내.”

“흠, 그건 그렇지만… 아, 저기 사람들이 건너오기 시작하네요, 여보! 미리 와서 안쪽 자리 잡아 두길 잘했죠? 그나저나 저 아가씨는 언제부터 왔는지… 꿈쩍도 않고 잘 자네? 어디 아픈 건 아니겠죠?”

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우르르 선실로 몰려와 자리를 잡았다. 로사는 엉거주춤 일어나 두건으로 코 아래부터 단단히 감쌌다. 중년 부부는 그녀에게 등 돌리고 창 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뭔가를 부산하게 먹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며 잊고 있던 허기를 일깨웠다.

동이 터 오면서, 배가 출항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로사는 배가 항구에서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갑판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가 보았다. 동이 희뿌옇게 터 오는 하늘은 주황색 안개를 그리고 있었다.

아까 들은 그 얘기는 도대체 뭐지? 그럼 바첼라프의 클란츠는 이미 죽었고… 나는 정말로 비세그라드 황자비가 될 예정으로 그 배에 타고 있었던 거야? 도대체 뭐가 진실이지? 대체 어디까지가…….

로사는 황망한 눈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델 모나크 항구 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나마 비세그라드 깃발이 펄럭이는 군선이 보였다. 수색 중이기 때문인지, 황자 일행이 아직 떠나지 않았음은 명백했다. 두건 밖으로 머리가 자꾸 삐져나와 바람에 날렸다. 얼굴 반을 감쌌던 천 역시, 바닷바람 아래 제멋대로 펄럭여 댔다.

“엄마, 저 언니 엄청 예뻐! 공주님 같아!”

어린아이의 외침이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로사는 깜짝 놀라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아이 쪽을 돌아보았다. 한 여자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두 손으로 빵을 베어 물고 있었다.

우르릉, 갑자기 큰 소리가 울렸다. 로사의 배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아이의 엄마가 저런, 웃음 지으며 봉지에서 빵을 하나 꺼내 이쪽으로 건넸다. 브리스톨행 배라서 그들 역시 데르어를 쓰고 있었다.

“어쩌나, 아침 못 들었나 봐요. 하나 먹어요.”

“가, 감사합니다!”

사양하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로사는 고개를 돌리고 정신없이 빵을 먹었다. 건포도와 호두가 여기저기 박혀 있는 호밀빵은 고소하고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아이의 엄마는 목 메이지 말라고 물까지 한잔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친절을 베풀어 주셔서…….”

“천만에요. 그런데… 정말 너무 예쁜 아가씨네요. 머리도 특이한 금발이고. 우리 아이 말대로 공주님 같아요.”

여자의 칭찬에 로사는 자꾸만 울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난간 너머 보이는 델 모나크 항구는 이제 아주 작은 점처럼 보였다. 로사는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어쩔 수 없어. 이제 되돌릴 수 없으니 이대로 브리스톨에 가서 황실을 찾아가 보는 거야. 로사는 품속 깊이 넣어 둔 즈베덴 황실의 반지와 팔찌를 재차 확인했다. 그것들을 보여 주면 제 신분을 증명할 수 있을 터였다. 브리스톨은 공국들 중에서는 르비탄 정도의 대국인 동시에, 즈베덴의 오랜 동맹국이었다. 인권 존중과 민주주의가 잘 확립된 나라인 만큼 분명히 그녀를 도와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괜찮아. 모든 게 잘될 거야. 설령 내가 정말로… 비세그라드의 정식 황비감이었다 해도, 어차피 내가 원해서 하는 혼인도 아니었잖아. 세상 여자 모두가 원한다 해도, 내가 싫으면 싫은 거야. 롬 데르반 황자나 비세그라드의 황비 따위 아무 의미 없어.

로사는 씩씩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아무리 맑은 하늘과 푸르디푸른 파도에 시선을 고정해도, 자꾸만 떠오르는 한 남자의 잔상을 떨쳐 내긴 쉽지 않았다. 더는 생각해선 안 된다. 강제로 취하려 했고, 어차피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느니 멋대로 농락한 무뢰한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진짜로 몸살이 났을 때 밤새 간호하던 손길이 자꾸만 잊히지 않았다. 아직 해명을 듣지 못한 말도 있었다. 지난 4년 동안 쭉 지켜만 봐 왔기에 도저히 자제할 수 없었다느니, 그녀의 아버지도 이 상황을 알고 계신다느니-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잔잔하던 파도에 점점 파란이 일었다. 갑판 위에도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조타실 쪽에서 선원들이 저들끼리 주고받는 외침들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로사는 사람들이 가리키는 범선 후미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롬 데르반 황자의 군선이 이쪽으로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어젯밤까지 그녀도 타고 있던, 바로 그 배였다.

…잡혔구나.

로사의 무의식이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두건을 뒤집어쓰고 배 여기저기를 둘러봤지만 숨을 곳이라곤 없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도망갈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어, 어떻게 알았지? 일단 출항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게다가 브리스톨 배라서 안심했는데.

비세그라드 병사 여럿이 갑판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서 당황하는 사이, 위치가 이미 파악된 것 같았다. 그녀는 빠르게 포기했다. 끌고 갈 테면 가라지, 꼿꼿하게 서 있던 로사의 눈이 다음 순간 크게 흔들렸다. 출렁이는 파도만큼이나 위아래로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갑판 내 술렁거림이 더 커졌다. 병사들을 뒤로한 채 앞장서서 걸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배 안의 그 누구보다 크고 건장한 체격이었다.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양쪽으로 쫙 갈라져서 길을 터 주었다. 들릴 락 말락, 조그만 속삭임이 일었다.

“어느 나라 귀공자일까? 저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봐.”

“귀공자? 하지만 그 이상의 카리스마가 넘치는데- 어느 나라 황자 아닐까?”

롬 데르반은 사람들의 경이로운 시선을 뒤로하고 로사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푸른 쪽빛, 파도 같던 두 눈이 시퍼렇게 벼려진 칼날 같았다. 로사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황자는 지금 폭발 직전의 활화산 상태에 있었다.

“제 발로 알아서 갈 겁니까? 아니면 말해요. 어떤 방식을 원하는지.”

경어는 여전했지만 온기나 부드러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더 이상 예를 갖추지 않겠다는 의지로 들렸다. 롬은 들릴락 말락 낮게 말을 이었다. 달려들기 직전, 맹수의 으르렁거림 같았다.

“기절시켜 거꾸로 매달거나, 짐짝처럼 질질 끌려가거나.”

“내…….”

로사는 두려움에 덜덜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공포로 숨이 목 바로 위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내 발로 가, 갈 거예요.”

“앞장서요.”

롬은 등 뒤를 턱짓해 보였다. 찌를 듯한 두 눈에 질식해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로사는 휘청, 쓰러질 것 같은 다리로 천천히 걸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그의 장대한 기골이 갑판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로사는 산송장처럼 뻣뻣하게 앞서 걷는 병사들을 따라 비세그라드 군선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호기심과 경악에 가득 찬 시선이나, 저 아름다운 여자는 누군지 서로 묻는 속삭임들은 보이지도 않았고 들리지도 않았다. 등 뒤에서 죽일 듯 노려보며 따라오는 남자에게만 온 신경이 죄다 쏠려 있었다.

로사가 두 선박 사이의 교각 위로 한 발을 디디는 순간, 롬은 뒤에서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들고 단숨에 그의 배 쪽으로 뛰어내렸다. 로사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새도 없었다. 황자는 한쪽 어깨에 그녀를 자루처럼 들쳐 업은 채 곧바로 선실로 향했다. 교각이 제자리로 돌아가며, 두 배는 다시 각자의 항로를 계속할 태세에 들어갔다.

“꺄악-”

롬은 로사를 선실 침대에 짐짝처럼 던졌다. 그녀의 몸이 크게 위로 들렸다가 시트 위로 풀썩 가라앉았다. 어깨와 허리가 쑤시듯 아팠다. 하지만 아픔을 호소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두 손을 짚어서 침대와 마주한 벽까지 기듯이 뒷걸음쳤다. 롬이 두꺼운 로브를 벗어 던지고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로사는 침대에서 재빨리 빠져나와 구석으로 몸을 날렸다. 반대편 나무 탁자 위에는 과일 접시와 과도가 놓여 있었다. 단도처럼 작은 과도였지만 칼은 칼이었다. 그녀는 칼을 빼 들고 롬을 돌아보았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황자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는 게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품에서 작은 천 같은 것을 꺼내 보였다. 즈베덴의 비약, 카덴차가 들어 있던 주머니였다.

로사는 칼을 든 채 황자의 얼굴과 주머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비약을 삼킨 뒤 침대 위 혹은 바닥에 그대로 방치했던 기억이 났다.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서늘하게 훑었다.

“안쪽에 남아 있던 가루를 조사해 봤습니다. 백 년에 한 번꼴로, 딱 한 송이 피는 카덴차 꽃잎으로 만든 비약이더군요. 비세그라드에도 비슷한 효능을 가진 약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금지되어 있지만.”

롬 데르반은 손안의 주머니를 던져 버리고 핏발 선 눈으로 로사를 보았다.

“그렇게도 내가… 나와 혼인하는 게 싫은가요? 지독한 고열과 복통에 시달리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롬은 이를 갈며 천천히 내뱉었다. 로사는 황자의 푸른 눈 속, 불꽃처럼 타오르는 격노를 읽었다. 칼을 쥔 두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조용히 포획할 대상을 노려보는, 한 마리 맹수 같았다. 하지만 로사의 분노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분노가 훨씬 더 정당하다고 믿었다.

“혼인? 웃기지 말아요! 날 첩으로 삼으려고 했던 주제에…….”

우연히 듣게 된 시종들의 담화는 그 이후 배에서 엿들은 부부의 말들보다 더 영향력이 강했다. 로사의 본능은 긍정적인 불확실함보다, 보다 현실적인 최악의 상황을 택하고 있었다. 어쩌면 오해일지 모른다는, 정말로 그녀를 정식 혼례자의 상대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는 가능성은 그녀의 고함에 묻혀 갔다.

“나도 다 알고 있어! 지금 비세그라드 황실엔 혼례식이나 정혼녀를 맞이하는 준비 따위 전혀 없다는 걸. 당신 같은 파렴치한, 무뢰한의 후궁이 될 생각은 전혀 없어요. 털끝만큼도 없다고!”

“내려놔요, 좋게 말할 때.”

롬은 한 발짝씩 천천히 다가왔다.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그녀의 심장 안쪽까지 찔러 오는 것 같았다. 그는 으르렁거리듯 낮게 경고했다.

“말 들어요, 로사. 다치기 전에.”

“얕보지 말아요. 작년부터 쭉 검술을 배워 왔으니까. 호신술이라도 치명상은 입힐 수 있어요!”

“알고 있어요. 즈베덴에 갈 때마다 봤으니까. 하지만 날 다치게 할 정도는 아닙니다.”

커다란 손이 순식간에 다가와 로사의 손을 잡고 비틀었다. 과도는 가녀린 손을 떠나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동시에 다른 쪽 손목마저 억센 손아귀에 잡혀 버렸다. 아무리 죽을힘을 다해 저항해 봐도 소용없었다. 호신술이 아닌, 강도 높은 정식 훈련을 했대도 롬 데르반 황자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정도의 수준도 될 수 없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이 악당! 발정 난 짐승!”

롬은 로사를 깃털처럼 가볍게 안아 들고 침대에 다시 던졌다. 델 모나크 의원의 두건이 완전히 벗겨져 노을빛 긴 머리칼이 시트 위에 부채꼴처럼 퍼졌다. 황자는 맹수처럼 빠르게 로사 위에 올라탔다.

로사는 끈질기게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억센 손이, 사납게 휘둘러 대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잡았다. 롬은 그녀의 양 손목을 한 손으로 거뜬히 잡고서 시트에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델 모나크 의원의 것인 가운 아래, 두 다리가 격하게 허우적댔다. 한 발이 롬의 복부를 가격할 뻔하다가 그의 다리에 맥없이 저지되었다.

“다른 건 다 해도.”

그는 자유로운 한 손으로 로사의 가슴 위, 리본처럼 생긴 줄을 세차게 당겼다. 델 모나크 의원복과 속옷이 눈 깜짝할 새 떨어져 나갔다.

“도망만은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욕망 어린 눈빛이 한결 더 위협적으로 빛났다. 황자는 무장을 해제하고 로브를 빠르게 벗어 내렸다. 그린 듯, 완벽한 선을 이룬 가슴의 근육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구릿빛 허벅지, 그 사이에 자리 잡은 단단한 살갗도 조금씩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이건, 당신이 자초한 겁니다. 저항해도… 소용없어요.”

짓씹듯 말한 그의 손이 로사의 허리춤에 걸쳐진 마지막 속옷을 몸에서 분리시켰다. 투명한 우윳빛, 그와 어우러진 살구색 나신이 금세 드러났다. 비단보다 더 매끄럽고 부드러워 보였다. 롬은 그녀의 알몸에 더 바짝 몸을 붙이며 거친 숨을 골랐다. 팽팽하게 솟은 페니스 끝이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로사는 눈을 감아 버렸다.

참아. 견뎌야 돼, 로사! 이 남자는 절대 멈추지 않을 거야. 기어코 날… 가질 생각이야. 반항해도 소용없어.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워서,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싶었다. 하지만 황자는 그녀가 기절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커다란 두 손이 뻗어 와, 봉긋하게 솟은 젖가슴을 감싸 잡았다.

차디찬 손가락이 일으키는 야릇한 감촉에 로사의 눈이 반짝 떠졌다. 두 눈 속에 미지에의 공포가 가득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길 바라는 심정으로, 그녀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쉿, 겁먹지 마. 갈라진 목소리가 로사를 달랬다. 화를 잔뜩 억누른 음성이었다. 여전히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가운데서도, 그는 그녀가 처음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당신을 해치려는 게 아니야. 하지만…….

도망친 신부를 찾기 전까지의 불안, 극심한 초조함이 가신 자리에는 강렬한 욕망과 소유욕만이 남아 있었다.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확실히 제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결연해 보였다.

롬의 더운 숨결이 가슴 위로 내려앉았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사탕을 할짝이듯, 그의 혀가 집요하게 유두와 민감한 돌기를 핥고 물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두 손이 등 뒤로 둘러져 소용없었다.

“아악- 으읏…….”

혀와 입술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날카롭게 파고드는 짜릿한 통증이 머리끝을 쭈뼛 서게 만들었다. 이 끝이 박히는 얼얼함에 로사는 머리를 양쪽으로 마구 흔들며 저항했다. 물론 소용없는 몸짓이었다. 저항하면 할수록 황자는 오히려 더 도발되는 것 같았다. 그의 손길과 혀놀림, 이 끝으로 깨무는 애무는 더 격렬해져만 갔다.

“아. 하윽……! 그, 그만!”

로사는 어느새 침대 위, 그의 알몸 아래 깔려 있었다.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내고 몸을 뒤척였지만 전희는 더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차가운 손가락이 배꼽 아래, 갈라진 틈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 로사의 비명은 한 음 더 높아졌다. 손가락이 집요하게 처녀지 안을 파고들어 거침없이 휘젓기 시작했다. 몸이 강력한 갈고리에 의해 조종되는 것처럼, 제 몸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아… 안… 흐읏… 흐…….”

허리를 뒤틀자 손가락이 스륵 빠져나갔다. 그리고 꿀 같은 점액으로 촉촉하게 젖은 손가락은 비부 대신, 그녀의 입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직접 맛을 봐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눈물로 흐릿한 시야에 롬 데르반의 가학적인 미소가 어렸다. 그는 숨을 고르며 손을 뻗어 로사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 몸짓은 거칠기 짝이 없는 폭풍 직전, 잠시 다가오는 미풍 같은 것이라고. 황자의 눈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많이 아플 거야. 알고 있겠지만. 그냥 받아들여. 이끄는 대로 얌전히.

그는 눈으로 속삭이고 본격적인 삽입을 위해 허리를 위로 치켜들었다. 로사는 이를 꼭 악물고 고개를 옆으로 세차게 저었다. 아니, 얌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지금 힘으로 당하는 건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이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 반드시……!

“아아! 아흑……!”

오랜 전희로 충분히 젖었어도 처음의 고통을 줄여 주진 못했다. 로사가 생애 최초로, 전혀 예기치 않게 받아들인 남성은 무지막지했다. 롬은 서서히 허리를 앞으로 전진시켰다. 뜨겁고 뭉툭한 페니스의 선단이 천천히, 집요하게 좁디좁은 동굴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로사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리다 숨을 헐떡이는 분투를 이어 나갔다. 여성의 신체 중, 가장 연약하고 민감한 속살이 철저히 장악되고 정복당하는 과정은 힘겹고 고통스러웠다. 낯설지 않은 냄새가 후각을 자극해 왔다. 생리 때와는 또 다른 혈향이었다. 출혈이 동반되는 모든 것은 아프기 마련이다.

그의 것이 몸속을 온전히 채우는 순간, 롬의 어깨에 박힌 로사의 손톱 아래서 피가 솟았다. 황자는 조금 움찔했지만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로사는 더 세게, 더 깊이 손톱을 박아 넣었다. 내 성스러운 처녀지에 피를 낸 것만큼,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많은 피를 너에게서 뽑아낼 거야- 마치 그렇게 선언하는 것만 같았다.

롬은 잠시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자의 것보다 더 길고 짙은 속눈썹 아래, 푸른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가 제 것을 끝까지 묻은 채 허리를 좀 더 위로 들어 올렸다. 로사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허리의 율동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안 돼……. 그만! 움직이지 말아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정하게 두 손으로 그녀의 양 뺨을 감싸고 입을 맞출 뿐, 갑자기 목소리가 막혀 버린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수 초 뒤, 그의 입술이 달래듯 귓불을 핥기 시작했을 때 희미한 속삭임이 울렸다. 속삭임이라기보다 야수의 으르렁거림에 더 가까웠다.

한 번, 또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그의 짐승 같은 소유욕이 더 크게 들끓고 더 깊이 요동쳤다. 찾기만 하면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결심할 만큼 걱정되고 증오스러웠지만, 지금은 미치도록 사랑스럽고 예뻤다. 정말 살아 있는 존재가 맞는지, 너무 아름다워 믿을 수가 없었다.

로사는 몸속에 남성이 꽉 들어찬 아픔을 견디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황자의 속삭임에 귀를 막고 싶었다. 그녀도 원한 처음이었다면, 꿀처럼 달콤하기 그지없는 찬사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의 의지도 존중받지 못한 채, 무방비하게 범해지며 쏟아지는 찬사 따위 사양이었다.

닥쳐. 듣기 싫어, 그런 말……. 빨리 끝내 버려, 제발!

으으응, 철저한 거부의 표시였지만 실제 소리는 앙탈을 부리는 듯한 신음처럼 나왔다. 새끼 고양이 같은 울음은 롬의 것을 더욱더 능동적으로 자극했다. 그 흐느낌을 쾌감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는 쾌감이었다. 머리로는 거부하려 애썼지만 그의 것과 맞물린 접합부에선 미끌미끌, 꿀 같은 점액이 끊임없이 흘러서 시트를 적시고 있었다.

“아흑! 악! 앙! 앙!”

그가 허리를 본격적으로 전진시킬 때마다 로사의 신음은 더 커졌다. 울먹이는 탄식은 스타카토처럼, 롬의 짧고 강한 움직임과 강도를 나란히 했다. 철썩, 철썩, 잔뜩 젖은 비부의 샘과 지칠 줄 모르는 살기둥이 마찰하는 소리가 선실 안에 요란하게 울렸다. 선상의 파도 소리도 이보다 더 격렬하진 않을 것 같았다.

힘껏 치대고 부딪쳐 오길 한참, 격한 허리짓이 잠시 멈췄다. 투둑, 굵은 땀이 롬의 이마에 헝클어진 머리칼과 뺨을 타고 로사의 가슴에, 복부에 빗방울을 그렸다. 그의 한 손이 다가와 제 땀방울이 떨어진, 수풀 아래 꽃술 같은 주름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하악, 그녀의 허리가 위로 튕겨 올랐다. 그 바람에, 롬의 것이 들어찬 동굴이 힘 있게 수축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숨을 몰아쉬었다.

“…끊어질 것 같아요. 이렇게 꽉 물고 조여 대니.”

황자는 흐트러진 숨결 사이로 조롱하듯 속삭였다. 그는 이미 그녀가 제 여자인 것처럼 굴고 있었다.

“로사… 너무 아름다워.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빨리…….”

로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 악물고 말했다. 내뱉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로사? 로사라니. 그건 아버지와 언니들만 부를 수 있는 애칭이야. 친근한 척, 감히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빨리 끝내 버려요, 빨리! 당신 따위 너무 싫어…….”

로사는 헐떡이는 숨 사이로 쏘아붙였다. 꼭 감은 눈시울이 다시 달아오르고 있었다. 혀를 깨물고 싶었다. 아무리 억울하고 분해도, 그의 것이 몸 깊숙이 박혀 있는 이 상황에서 그렇게 앙칼지게 적의를 드러내다니. 어리석었다.

황자의 것이 동굴 안쪽에서 움찔, 동요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잠자코 응징을 기다렸다. 분명, 더 거칠게 범하고 모욕감을 가할 것 같았다. 최악의 경우, 폭력을 가할 수도 있었다. 이윽고 크고 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와 닿았다. 로사는 흠칫 놀라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귓가에 목 쉰 속삭임이 울렸다. 로사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가늘고 흰 목 안쪽에 와 닿았다.

“그렇게 싫다니 슬프지만…….”

안쪽을 꽉 채운 그의 것이 한 번 더 움찔거렸다.

“처음이니까 제대로 할 겁니다, 로사. 최대한 오래…….”

“아흑!”

“절대 잊을 수 없게.”

그의 응징은 좀 다른 방식이었다. 롬은 시종일관 부드럽게 쓰다듬고 속삭였다. 하지만 그녀의 몸속 깊이 장악한 분신은 절대 온화하지 않았다.

“아아… 아흑……! 흣……. 응, 응……!”

로사의 입에서 끊어질 듯 흐느낌과 신음이 번갈아 새어 나왔다. 입술을 꼭 앙다물려 했지만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뜨거운 분신이 힘껏 찔러 왔다. 몸 안쪽 깊은 곳이 사정없이 박히고 부딪치는 강도가 점점 더 격심해져 갔다.

롬은 간간이 격렬한 움직임을 멈추고 로사의 목덜미와 귓불 여기저기 입술과 혀로 애무했다. 그녀가 거부의 신음이나 몸짓을 보이면 그는 입술과 혀를 거두고 이를 세웠다.

따끔한 통증이 일 때마다 로사의 안쪽은 그의 것을 더욱 꽉 조여 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롬의 입에서는 짐승 같은 으르렁거림이 새어 나왔다. 이 빌어먹을 황자는 그녀의 반응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으응… 응! 응! 아흣!”

그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고 빨라지고 있었다.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황자가 허리를 좀 더 세우고 더 강하게 부딪쳐 올 때마다 로사의 신음도 더 높아졌다. 롬의 양손이 가슴을 감싸 쥐고 잔뜩 부풀어 오른 유두를 입 안에 머금는 순간, 그녀의 몸속에서 변화가 일었다. 아픔뿐이었던 감각에 기묘한 전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너무 이상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롬이 허리를 빠르게 쳐올릴 때마다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쾌감에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로사는 억눌린 신음을 연신 내뱉으며 변화를 부정하려 애썼다.

아냐. 이건 기분 좋은 게 아냐. 그냥 머리가 이상해진 거야. 이 발정 난 파렴치한, 정말 싫어. 역겨워! 역겨운 놈. 황자도 아니야, 이런 짐승은……!

역겹다고 생각해야 마땅한데, 그래야 정상인데 몸은 자꾸만 그의 빠른 몸짓에 호응하고 있었다. 지금 미칠 듯이 격하게 흔들리는 요동이 바깥의 실제 파도 때문인지, 오롯이 침대 위에서만 존재하는 쾌락의 물결인지 분간도 할 수 없었다.

하나로 뒤얽힌 거친 숨결 속에서 로사는 고개를 양쪽으로 저으며 몸부림쳤다. 인정하기 싫은 또 다른 장면들이 기억 어딘가에서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롬 데르반은 늘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로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원과 연결된 거대한 아치형 문 너머, 늘 그녀를 좇던 시선이 있었다. 비세그라드에서 국빈 사절단이 올 때마다 느끼는 시선. 그리고 그녀 역시 그랬다. 사절단이 올 때마다 멀리서 늘 훔쳐봤던 한 사람. 어쩌다 가끔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마주치기 직전마다 심장에 작은 태풍이 일곤 했었다.

황자의 격렬한 움직임에, 기억의 반추는 이내 사그라져 갔다. 내내 박차를 가하던 그의 허리가 마지막으로 강하게 전진한 순간, 로사는 크게 비명을 질렀다. 롬 역시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커다란 신음을 토해 냈다. 절정을 향해 질주해 가던 욕망이 마침내 분출해 나왔다.

“아아… 으흑……. 아흑…….”

최후로 찔러 온 일격 직후, 뜨거운 파정액이 용암처럼 몸속 더 깊은 곳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흘러드는 느낌이 멈추고 난 뒤에도 롬은 그녀를 놓지 않았다. 절대 품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듯, 꼭 겹쳐 안은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몸을 뒤척이려는 순간 정신이 들었다. 하체에 밀려오는 뻐근한 통증이 그녀를 깊은 잠에서 깨웠다. 온몸이 흠씬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다행히 어두운 선실에는 그녀 혼자밖에 없었다. 날이 저물 때까지 쭉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로사는 벌떡 일어나 이불을 젖혔다. 시선이 자동으로 다리 사이로 가 있었다. 이국적인 문양의 잠옷 안쪽은 깨끗했다. 누군가 정성껏 씻기고 향유까지 바른 듯 매끄럽고 좋은 냄새까지 났다.

그 순간, 벽에 드리워진 커다란 그림자에 로사는 입을 막았다. 비명을 지르기 직전, 어두운 선실 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인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깨어났군요.”

“여, 여기서 뭘…….”

“잘 자는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계속 식은땀을 흘리고 힘들어해서.”

롬은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로사는 저도 모르게 움찔, 뒤로 물러앉았다. 하지만 더 도망갈 곳이 없었다. 딱딱한 침상머리가 등에 와 닿았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로사는 손이 제 이마에 닿기 전에 그 손길을 매섭게 쳐 냈다. 롬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화가 나진 않았지만, 잔뜩 움츠러들어 노려보는 모습이 측은해 보였다. 그녀는 온몸의 털을 세우고 잔뜩 경계하는 고양이 같았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식사나 마실 것을 준비시킬…….”

“아뇨. 다 필요 없어요! 당신만 없으면 돼요.”

그녀는 바들바들 떠는 가련한 고양이에서 가시 돋친 장미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시트를 목 위까지 올리고 매섭게 쏘아붙였다.

“나가요.”

“전에도 말했지만 여긴 내 선실입니다.”

“그럼 내가 나갈게요.”

“…….”

“내가 나간다고요. 비켜요!”

“안 됩니다. 빈 선실은 없어요.”

롬은 미동도 않고 침대 가장자리에 버티고 앉았다. 최대한 멀찍이 떨어졌는데도 그는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충분히 닿고도 남았다.

“그래도 나갈 거예요!”

“갑판에서 자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밖을 보면 마음이 달라질 겁니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선창 쪽으로 돌아갔다.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냥 바람이 아니라 세찬 비바람에 파도까지 넘실대고 있었다. 갑판으로 나가는 즉시, 폭우에 생쥐처럼 젖는 건 물론이고 그녀의 배 속도 파도처럼 마구 요동칠 건 뻔했다.

“언제 도착하나요, 도대체…….”

로사는 시선을 시트 끝에 두고 절망한 목소리로 물었다. 문가의 작은 램프만이 희미한 빛을 던져 줄 뿐 선실은 어둠침침했다. 그 어둠이 서로의 모습을 가려 줘서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일이 생각나자 수치심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처럼 활활 달아올라, 카덴차의 후유증으로 다시 발열이 시작된 게 아닌가 싶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비세그라드든 어디든, 빨리 도착하는 게 낫겠어. 저 남자랑 이렇게 밤새 한 선실에 있어야 한다니!

“폭풍이 며칠 더 이어질 예정이라 바로 비세그라드 본토로 갈 수 없어요. 잠시 근해의 동맹국에 들러서 며칠 묵을 예정입니다.”

로사는 대답 대신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바람이 무색할 만큼 절망적인 대답이었다.

“어, 얼마나요?”

“글쎄요. 폭풍이 잦아지는 정도에 따라 사나흘이 될 수도 있고, 일주일까지 걸릴 수도 있겠지요. 오늘 새벽, 당신을 찾느라 몇 시간 지체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안전거리 안에 들어가 비세그라드 근처까지 와 있었을 겁니다.”

말끝이 묘한 여운을 남겼다. 결국 지금의 사태를 자초한 것은 다름 아닌 너야- 그가 전하는 의미는 명백했다. 로사는 잠시 이 악물고 있다가 화제를 돌렸다. 잡히기 전, 브리스톨행 배에서 들었던 상인 부부의 대화가 생각났다.

“바첼라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클란츠가 열흘 전에 암살됐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설마… 진짜는 아니죠? 소문일 뿐이겠지요?”

“사실입니다. 자세한 건 아직 내막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제1 황자가 사망하고 현재 왕실이 매우 어수선한 것은 맞아요. 당신이 거기에 갔다면 정치적 볼모로 잡혔거나 다른 놈과 강제로 혼인하게 됐거나… 어쨌든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됐을 겁니다.”

“세상에. 어떻게……! 하지만 아버님은…….”

“즈베덴 공왕께선 대략 다 알고 계셨고 당신에게 미리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어차피 내가 중간에서 당신을 비세그라드로 무사히 데려갈 것을 알고 계셨으니까요. 자세한 얘기는 비세그라드에 도착하면 다 말해 주겠습니다.”

로사는 그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어 이제 황자의 실루엣은 명확히 보였다.

“어떻게 내가 브리스톨행 배에 타고 있는 걸 알았죠?”

“…그 정도 잔머리는 충분히 예상 가능합니다. 병사를 두 패로 나눠서 프로나아드, 브리스톨행 배 모두 수색하게 했죠.”

어둠 속에서도 황자의 조소가 보이는 듯했다. 로사는 앙다문 입술 안으로 이를 악물었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네가 어떻게 해도 결국은 내가 몇 수 앞이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부아가 치밀었다.

“어쨌든 며칠 뒤 본국에 도착하면…….”

“당신 말 못 믿어요. 그리고 확실히 말해 두는데.”

로사는 황자의 말을 싹둑 자르고 매섭게 쏘아붙였다.

“처음을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구속되란 법은 없어요. 그런 법은 즈베덴에도, 대륙 어느 나라에도 없고 관례일 뿐이에요. 관례라는 것은 말 그대로 오래전부터 관습적으로 지켜져 온 전통일 뿐 그게 반드시 도덕, 윤리적으로 옳은 것이므로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녀는 숨도 쉬지 않고 술술 말을 이었다.

“나는 첫 남자에게 종속될 생각 절대, 절대로 없어요.”

“물론 첫 순결을 나눈 상대와 맺어진다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쾌락을 느끼고도, 과연 다른 놈에게 만족할 수 있을까요? 내게 그렇게 안겨 놓고?”

“……?”

“잘 생각해 봐요. 답은 스스로 알고 있을 테니까.”

“무…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죠? 키스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내가, 나도 역시 느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사실이 그런 거겠죠. 본인도 그걸 의식하고 있으니 일찌감치 부정할 만반의 태세를 갖춘 걸 테고……. 당신도 절정까지 갔어요, 분명히. 처음엔 힘들었겠지만.”

“뭐라고요?”

그녀의 양손이 목 위까지 올라와 있던 침대 시트를 확 젖혔다.

“헛소리하지 말아요!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내내 울기만 했는데 무슨…….”

“…….”

“본인이 꽤 섹스에 능하다고, 엄청난 자신감에 넘쳐 있는 모양이네요! 글쎄요? 그 정도면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나로서는 처음이니까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나는 느낀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녀는 숨도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쏟아 내다 포효하듯 몇 번이나 더 강조했다.

“느낀 적 없다고요! 좋아한 적 없다고! 쾌락 따위 느낀 적 없어!”

“…….”

“그러니까 건드리지 말아요, 다시는! 손끝 하나도 대지 말라고요!”

“다시 해 볼까요, 그럼.”

깊은 울림을 자아내는 음성에, 로사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그 낮은 차분함은, 그녀의 새된 목소리와는 상이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침착함은 폭풍 전야의 고요함과도 같았다.

“어디, 한 번 더 건드려 보죠.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

다음 순간 로사는 침상에 똑바로 누워 있었다. 헐렁한 잠옷이 눈 깜짝할 새 머리 위로 벗겨지고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다. 힘껏 날뛰고 저항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힘을 당해 내는 건, 바깥의 태풍을 멈추게 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였다.

황자는 어둠 속에서도 노련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로사의 양손을 단번에 제압하고 거칠게 입술을 부딪쳐 왔다. 그러고는 그녀의 혀를 성이 찰 때까지 격렬하게 탐하고 빨아들였다. 도발에 자극받은 분노가 거친 소유욕으로 전이된 것 같았다.

그는 완벽하게 솟은 가슴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위로 밀어 올렸다. 터질 듯 풍만한 가슴 위로 유두가 단단하게 곤두서 있었다. 롬은 엄지와 검지 사이로 유두를 잡고 살짝 비틀었다. 로사의 허리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아앙! 으… 아흑! 그, 그만… 제발……!”

아픔에 그리고 뒤이어 밀려오는 기묘한 쾌감에 로사는 울먹이고 있었다. 몸속에서 뜨거운 샘이 울컥, 솟아나와 시트를 적셨다. 황자의 의도에 그대로 반응하는 제 몸이 밉고 수치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롬은 그녀의 애원은 철저히 무시하고 가슴에 좀 더 애무를 가했다. 그는 더 이상 뾰족해질 수 없을 때까지, 새빨갛게 부풀어 오른 유두를 혀로 살살 굴리다가 덥석 물었다. 그리고 허기진 아기처럼 거세게 빨아들였다. 어깨를 밀어내고 머리칼을 움켜쥐던 그녀의 두 손은 다시 잡혀 시트에 못 박혔다.

민감한 정점이 문드러질 것처럼 쓰려 올 때에야 입술이 떨어졌다. 하지만 안심하긴 아직 일렀다. 황자의 발칙한 입술은 가슴보다 더 은밀하고 더욱 큰 수치감을 자아낼 곳으로 향했다. 로사의 울먹임은 비명처럼 변했다.

“아……! 하지 마……. 안 돼… 안…….”

롬은 그녀의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두 다리를 위로 세운 뒤 양 허벅지 안쪽을 잡았다. 무릎 아래, 가늘고 흰 다리가 허공에서 맥없이 흔들렸다. 롬은 그녀를 그렇게 실험대 위 곤충처럼 붙잡고 다리 사이를 크게 벌렸다. 애액으로 촉촉하게 젖은 속살이 움찔움찔 떨리고 있었다. 롬의 입술은 그 갈라진 틈으로 곧장 향했다.

“아앙! 으흑……! 아흣…….”

어떻게든 그를 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꽉 붙잡힌 허벅지에, 몸이 반으로 접혀 있어 쉽지가 않았다. 뜨거운 혀가 촉촉한 안쪽으로 쑥 밀고 들어와, 점막 여기저기를 거세게 빨기 시작했다.

이미 혀보다 훨씬 더 큰 페니스가 침범했던 곳이다. 하지만 혀로 이렇게 애무당하는 건 또 다른 상황이었다. 새로운 수치심, 새로운 쾌감과 전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에 전에 없던 충격을 가하고 있었다.

롬의 혓바닥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쉴 새 없이 동굴 속을 거침없이 유영했다. 마침내 그의 혀가 떨어지고 허벅지를 움켜잡은 손이 멀어진 순간, 로사는 힘없이 눈을 떴다. 눈물 젖은 얼굴은 엉망이었다. 목 깊은 곳에서 밭은기침이 연신 나왔다. 끊임없이 흘려보낸 신음으로 목이 반쯤 쉰 것 같았다.

“…어제보다 훨씬 더 좋을 겁니다, 오늘은.”

롬은 잔뜩 발기한 제 것을 잡고 비부 입구를 꾹 누르며 비벼 왔다. 자극은 길지 않았다. 그는 곧 그녀 안으로 빠르게 돌진해 왔다. 흘러넘친 애액으로 충분히 젖어 있었지만 삽입은 쉽지 않았다. 그의 것은 너무 크고 뜨겁고, 단단했다.

“아아… 으… 아흐윽-”

로사는 머리를 세차게 저으며 이를 악물었다. 가까스로 멈췄던 울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롬은 안쪽 깊숙이 파고들며 그녀의 상체를 꼭 끌어당겨 안았다. 한 손이 다가와, 자꾸만 옆으로 기우는 로사의 턱을 똑바로 잡아 시선을 맞추려 했다.

“더 많이, 더 깊이 느낄 거고.”

“아흑!”

“이번엔 인정하게 될 겁니다. 확실히…….”

“아! 응! 응! 응…….”

그는 사정없이 부딪쳐 왔다. 이번엔 더 좋을 거란 말은 이번엔 확실한 고문이 될 거란 의미였던 걸까. 롬은 처음부터 거세게 그녀를 밀어붙였다. 확실한 건, 그의 욕망이 어제보다 더 강렬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오늘, 어제보다 훨씬 더 발정 나서 날뛰는 짐승이 될 것이다.

침대가 위아래로 흔들리며 철썩, 철썩, 퍽, 퍽, 살이 맞물리고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롬은 그녀를 다시 쓰러뜨리고 엉덩이 안쪽을 들어 올려 허리를 아까처럼 세웠다. 그는 제 것도 수직으로 세우고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로사의 두 다리는 또다시 허공 위로 흔들렸다.

롬은 격렬하게 피스톤질을 이어 갔다. 허리를 굽히고 점점 더 그녀에게 무게 중심을 실으며, 안쪽 속살을 짓뭉개듯 힘껏 찔러 왔다. 로사의 우는 듯한 신음이 점점 더 커졌다. 하아 하아, 스타카토로 뚝뚝 끊어지던 교성은 길게 이어지는 흐느낌으로 변해 간 지 오래였다. 위로 추켜올린 발목이 롬의 어깨에 걸쳐져 앞뒤로 마구 흔들려 댔다.

로사의 입에서, 울부짖음에 가까운 신음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흡사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다. 뜨거운 쐐기가 몸속에 박혀 오는 고문, 그 쓰라린 달콤함 속에서 로사는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짙은 황홀함이 몸속의 온 혈관을 지독하게 흐리게, 동시에 전례 없이 또렷하게 일깨우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열기에 휘감긴 전율이 가실 줄을 몰랐다. 머리가 이상해진 것처럼, 미치도록 좋았다. 로사는 입술을 앙다물고 이를 악물었다. 끝도 없이 분출되는 쾌감이, 그 쾌감을 야기하는 상대를 향해서는 역으로 더한 반발심을 불러일으켰다.

날을 세운 손톱 끝이, 롬의 팔목과 어깨, 허벅지 위를 사정없이 찍어 눌렀다. 얼룩덜룩 생채기가 나고 피가 맺혀도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로사의 격한 반응에 고무된 듯, 더 거세게 박차를 가해 왔다.

그의 더운 숨결이 로사의 목덜미를 뜨겁게 달구고 호흡이 격하게 빨라졌다.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뜨거운 손바닥이 땀으로 젖은 젖가슴을 힘껏 주무르고 유두를 아프도록 압박해 왔다.

롬의 허리가 더 속도를 높였다. 마지막, 짧고 격렬한 몇 번의 피스톤질 끝에 롬은 포효 같은 신음을 뱉었다. 로사도 동시에 단말마의 비명을 올렸다. 뜨거운 사정액이 파도처럼 몸속 깊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안 돼……! 아이라도 생기면…….

어제에 이어 오늘, 롬은 그녀의 몸속에 주저 없이 욕망을 쏟아부었다. 사전 혹은 사후 피임 약재, 질외사정 등에 대해서는 어제 즈베덴을 떠나기 전까지 유모에게 받은 교육으로 잘 알고 있었다. 유모의 말에 의하면 나라 불문, 첩이나 후궁 아닌 정식 황비에게만 언제든 가임할 권한이 주어지고 피임에 속박되어 있지 않았다.

이 남자는… 정말 진심일까. 나와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만 왜? 지난 4년간 한 번도 대면한 적도 없어. 말 한마디 나눈 적 없는데 왜 나를.

로사는 강제로 생각을 멈췄다. 할짝, 말캉한 혀가 석류처럼 빨갛게 부풀어 오른 유두를 핥아 댔다. 롬은 사정하고 나서도 그녀의 몸에 머물러 있었다. 로사는 머리를 뒤척이며 거부의 의사를 표했다. 내내 격한 애무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가슴이 너무 쓰렸다.

“…나가요.”

로사는 가쁜 호흡 속에서 차갑게 명령했다. 탈진한 상태에서 간신히 들어 올린 두 손이 제 목덜미에 파고든 머리를 밀어내려 애썼다.

“내 몸에서 나가요, 당장!”

“…….”

“당신 아기 가질 생각, 추호도 없어요.”

앙칼진 선언에 그의 머리가 위로 들렸다. 롬은 그제야 로사의 몸에서 빠져나와 상체를 세워 앉았다. 그의 냉랭해진 눈빛에, 로사는 방어하듯 허리를 비틀어 무릎을 붙이고는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롬 데르반은 그녀가 방금 내뱉은 말뜻을 모르지 않았다. 멋대로 안고 바로 사정해 버려도 어떻게든 임신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사후 피임을 위한 민간요법이나 약재들은 공국마다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로사, 당신이란 여자는 번번이 예상을 뛰어넘고 있군요. 모든 면에서.”

롬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가늘게 한숨지었다. 그의 구릿빛 탄탄한 나신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조각상 그 자체였다. 침대에 내려서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고, 가운으로 손을 뻗는 일련의 동작들이 느릿느릿 우아하게 움직이는 맹수 같았다. 가운을 몸에 걸치기 직전,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는 등 근육이 꿈틀 움직였다.

“이름 그대로 활짝 핀 장미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가도 금세 가시를 들이대며 덤벼들지. 성질 사나운 작은 동물 같다가도 금세 뜨겁게 달아올라 폭발할 것 같다가 이렇게 또 금세 차갑게 돌변해서 독설을 퍼부어 대고.”

“아무래도 좋아요. 나에 대한 당신 품평 따위……. 대체 당신 속셈이 뭔지, 날 비세그라드로 데려가 뭘 어떻게 할 작정인지 그거나 말해요.”

“이미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난 당신과 혼인할 거고 모든 건 도착하면 다 말하겠다고.”

그는 답답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소리 없는 한숨을 내보냈다. 죄다 다 털어놓으면 간단할 일이겠지만, 무사히 비세그라드 땅을 밟기 전까지는 철저히 만전을 기해야 했다. 그의 배 안에서 그럴 일은 없을 거라 믿지만, 영토를 떠난 이상 첩자나 연락책이 가까이에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은 늘 있었다.

“그러니까 도착할 때까지 잠자코 있어요. 나도 공녀님의 적의를 최대한 감내하고 있으니까.”

롬은 가운의 허리끈을 묶으며 그녀를 차분히 내려다보았다. 선창 너머, 잠시 폭풍우가 가라앉고 동이 조금씩 움트고 있었다. 로사는 불현듯 이는 수치심에, 시트를 끌어당겨 알몸을 가렸다. 갑자기 다시 침대로 다가오는 그의 동작에, 그녀는 흠칫 놀라 온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롬은 가장자리에 앉아 로사의 턱을 잡아 그를 똑바로 보게 했다.

“어때요? 지금은 인정합니까? 본인이 아까보다 훨씬 느꼈다는 걸.”

순순히 시인할 거란 기대는 없었다. 로사는 그의 손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롬도 지지 않고 다시 턱을 잡아 세웠다. 두 개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시리도록 푸른 바다빛 한 쌍을 힘껏 노려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에게 안겨 쾌락에 헐떡이고 가장 내밀한 본능을 드러내보이던 모습이 거짓말 같았다.

로사는 눈을 깜빡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눈에 너무 힘을 주고 있어선지, 갑자기 분하고 막막한 감정이 북받쳤는지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그녀는 울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다. 롬은 순순히 턱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순간도 그녀의 시선을 비껴나진 않았다.

“타샤가 아침을 가져올 때까지 좀 자 둬요. 기운 빼지 말고. 태풍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동맹국에 도착해 있을 테니까.”

그는 작게 한숨 쉬고 가운의 허리띠를 꼭 여몄다. 넓은 어깨 너머, 일출을 고하는 빛 한 줄기가 선창을 뚫고 비쳐 들었다. 롬은 팔을 뻗어 커튼을 당겼다. 선실 안은 다시 동트기 전처럼 어두워졌다. 로사는 황자가 뭘 하든 쳐다보지도 않고 시트를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하얀 시트에 감싸인 그녀는 미동 없이 둘둘 말린 누에고치 같았다.

롬은 잠시 침대를 더 내려다보다 결심한 듯 선실 문을 향했다.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되고 나서도 로사는 시트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눈에서 그리고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비부에서 뜨거운 것이 계속해서 흘러나와 얼굴과 베개, 시트를 조금씩 적셔 갔다. 화가 나고, 분하고 수치스러워 죽고만 싶었다. 황자의 말처럼, 오전보다 한결 더 격렬하게 반응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황자는 어제보다 훨씬 더 밉고 증오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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