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려놔요, 좋게 말할 때.”
롬은 한 발짝씩 천천히 다가왔다.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그녀의 심장 안쪽까지 찔러 오는 것 같았다. 그는 으르렁거리듯 낮게 경고했다.
“말 들어요, 로사. 다치기 전에.”
“얕보지 말아요. 작년부터 쭉 검술을 배워 왔으니까. 호신술이라도 치명상은 입힐 수 있어요!”
“알고 있어요. 즈베덴에 갈 때마다 봤으니까. 하지만 날 다치게 할 정도는 아닙니다.”
커다란 손이 순식간에 다가와 로사의 손을 잡고 비틀었다. 과도는 가녀린 손을 떠나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동시에 다른 쪽 손목마저 억센 손아귀에 잡혀 버렸다. 아무리 죽을힘을 다해 저항해 봐도 소용없었다. 호신술이 아닌, 강도 높은 정식 훈련을 했대도 롬 데르반 황자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정도의 수준도 될 수 없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이 악당! 발정 난 짐승!”
롬은 로사를 깃털처럼 가볍게 안아 들고 침대에 다시 던졌다. 델 모나크 의원의 두건이 완전히 벗겨져 노을빛 긴 머리칼이 시트 위에 부채꼴처럼 퍼졌다. 황자는 맹수처럼 빠르게 로사 위에 올라탔다.
로사는 끈질기게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억센 손이, 사납게 휘둘러 대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잡았다. 롬은 그녀의 양 손목을 한 손으로 거뜬히 잡고서 시트에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델 모나크 의원의 것인 가운 아래, 두 다리가 격하게 허우적댔다. 한 발이 롬의 복부를 가격할 뻔하다가 그의 다리에 맥없이 저지되었다.
“다른 건 다 해도.”
그는 자유로운 한 손으로 로사의 가슴 위, 리본처럼 생긴 줄을 세차게 당겼다. 의원복과 속옷이 눈 깜짝할 새 떨어져 나갔다.
“도망만은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욕망 어린 눈빛이 한결 더 위협적으로 빛났다. 황자는 무장을 해제하고 로브를 빠르게 벗어 내렸다. 그린 듯 완벽한 선을 이룬 가슴 근육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구릿빛 허벅지, 그 사이에 자리 잡은 단단한 살갗도 조금씩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이건, 당신이 자초한 겁니다. 저항해도… 소용없어요.”
짓씹듯 말한 그의 손이 로사의 허리춤에 걸쳐진 마지막 속옷을 몸에서 분리시켰다. 투명한 우윳빛, 그와 어우러진 살구색 나신이 금세 드러났다. 비단보다 더 매끄럽고 부드러워 보였다. 롬은 그녀의 알몸에 더 바짝 몸을 붙이며 거친 숨을 골랐다. 팽팽하게 솟은 페니스 끝이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로사는 눈을 감아 버렸다.
참아. 견뎌야 돼, 로사! 이 남자는 절대 멈추지 않을 거야. 기어코 날… 가질 생각이야. 반항해도 소용없어.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워서,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싶었다. 하지만 황자는 그녀가 기절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커다란 두 손이 뻗어 와 봉긋하게 솟은 젖가슴을 감싸 잡았다.
차디찬 손가락이 일으키는 야릇한 감촉에 로사의 눈이 반짝 떠졌다. 두 눈 속에 미지에의 공포가 가득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길 바라는 심정으로 그녀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쉿, 겁먹지 마. 갈라진 목소리가 로사를 달랬다. 화를 잔뜩 억누른 음성이었다. 여전히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가운데서도, 그는 그녀가 처음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당신을 해치려는 게 아니야. 하지만…….
도망친 신부를 찾기 전까지의 불안, 극심한 초조함이 가신 자리에는 강렬한 욕망과 소유욕만이 남아 있었다.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확실히 제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결연해 보였다.
1화: 바다 위의 무뢰한
“순순히 타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니면, 직접 들어서 옮겨 드리는 영광까지 주실 생각인가요?”
“미쳤군요. 클란츠가… 바첼라프 공국에서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롬 데르반은 푸른 눈을 번뜩이며 로사에게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대륙의 그 누구보다 더 크고 장대한 체격임은 이미 수차례 봐서 잘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대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비세그라드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해적 같은 무뢰한으로 보였다. 아니, 실제로 무뢰한이었다. 지금 그는, 다른 나라로 혼례식을 치르러 가는 일국의 공녀를 바다 한가운데서 낚아채려는 파렴치한 도적이었다.
“바첼라프 공국에서도 조만간 알게 될 겁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다 설명하겠지만… 공녀님과 즈베덴 공국에는 그 어떤 정치적인 해가 없을 테니 안심해도 됩니다.”
그러니 저 배에 순순히 타도록 해. 조용히. 입 다물고.
강렬한 무언의 명령에, 로사는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20분 전, 정체불명의 거대한 군선이 다가올 때만 해도 이런 사태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바짝 다가온 배의 후미에는 낯익은 동맹국의 깃발이 이내 걸렸고 모두가 비세그라드의 제1 황자 롬 데르반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로사가 탄 범선의 전진을 막아섰고, 그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축하 인사를 건넬 의도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진의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롬 데르반의 존재 자체가 바다 한가운데서 맞닥뜨릴 수 있는 그 어떤 재앙보다 더 나빴다. 격렬한 태풍이나 풍랑, 오래전 일망타진된 데르 해(Derrh Sea)의 해적들보다 더 최악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금수만도 못한 짓이죠? 바로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롬 황자님은…….”
로사는 충격에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7일 전만 해도, 바첼라프 공국의 황자들을 비롯해-클란츠는 비록 몸이 아파 참석하지 못했지만-각국의 사절단 등과 함께 연회장에서 축하주를 나누고 화기애애하게 담화를 주고받았던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일주일 전은 로사의 아버지이자 즈베덴 공국 공왕의 일흔 번째 생일 축하 연회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클란츠와 즈베덴 왕실의 막내딸 로슬린 드 플라비니 즈베덴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클란츠는 어릴 때부터 오누이처럼 지내 온 사이였고 일국의 두 왕들이 정한 혼사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혼인의 당사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롬 황자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비세그라드에서 축하 선물을 보낸 것으로 보아, 그가 몰랐을 리는 없었다.
“비세그라드 왕좌의 정통 계승자에다 문무에 정통하고 품행 방정에 뭇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순간 로사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멈췄다. 갑자기 롬 데르반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로사가 말을 멈춘 틈에 그는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툭, 하고 그녀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망토가 바닥으로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로사는 입을 떡 벌리고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두꺼운 망토 아래, 어깨끈으로 고정된 가운과 끈은 칼자국 하나 없이 멀쩡했다. 신기에 가까운 칼솜씨였다.
“몸이 가벼워졌으니 한결 더 움직이기 쉽겠죠?”
그는 검을 다시 검집에 넣고 한 손을 내밀었다. 눈빛이 한결 더 위협적으로 빛났다.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을 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바닥에 떨어뜨린 검집을 턱짓해 보였다. 떡 벌어진 넓은 어깨 뒤로, 난간 너머 붉게 타는 노을이 보였다. 바다 한가운데서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이 검이 다시 제집에서 나올 때는 공녀님 수족들의 피를 묻히기 위해섭니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로사는 긴장으로 허리에 붙이고 있던 손을 맞잡고 몸을 떨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해 버렸으면 싶었다.
확률은 얼마나 될까. 저 검을 빼앗아서 내 쪽에서 협박할 수 있을 확률은.
턱도 없었다. 상대는 두 배 가까이의 체격에다, 대륙 너머 그 명성이 자자한 로열 나이트(Royal Knight)이기도 했다. 모든 황자에게 황실을 대표하는 기사의 타이틀이 주어지진 않았다. 적어도 비세그라드 왕국에서는 그랬다. 철저히 실력 우선이었다.
로사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간신히 내뱉었다. 최대한 표독스럽게 들리길 바랐지만 제 귀에도 힘없이 들렸다.
“도대체 이유가 뭔지, 이러는 목적이 뭔지나 듣고 싶어요, 먼저. 여자라면 원할 만큼 많을 테고, 아무리 즈베덴 같은 소국이라도 이런 식으로 무례를 범해도 이득 될 게 하나 없잖아요.”
“맞습니다, 공녀님.”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로사의 손을 잡았다. 값비싼 금박 장식이 차락, 차가운 마찰음을 일으켰다. 배와 배 사이의 교각으로 그녀를 이끄는 내내, 시선은 단 한 번도 로사의 에메랄드 눈동자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린 듯, 완벽한 선을 이룬 입술이 여자보다 더 고혹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무례를 범해서도 안 되고, 타국의 아름다운 공녀들은 대륙에 널렸죠. 그런데도 내가 굳이 이러는 이유는…….”
롬 데르반이 군선 바닥에 한발 앞서 내려섰다. 햇빛에 잘 그을린 구릿빛 팔뚝이 하얀 얼굴과 균형 잡힌 대조를 이뤘다.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그는 눈 깜짝할 새, 교각 끝에 선 로사의 허리를 안아 들어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황자는 병사들을 물리고 선실로 그녀를 이끌었다. 분명 질질 끌려가고 있는데도, 겉으로는 느긋하고 품위 있게 호위하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선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로사는 롬의 손길을 힘껏 뿌리쳤다. 그 바람에 가운이 흘러내려 얇은 드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레이스가 촘촘히 파도를 그린 가슴 쪽, 끈이 흘러내릴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무릎으로 황자의 급소를 공격하려던 로사의 움직임은 단번에 제압되었다. 그녀의 양쪽 어깨가 강한 손힘 아래 눌렸다.
“아, 아파……! 이거 놔주…….”
황자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까칠까칠한 인중과 턱의 살갗이 로사의 보드라운 입술께를 스쳤다. 그리고 덮쳐 오는, 낯설고 거친 입술과 몰캉한 혀에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반사적으로 허우적대던 두 손이 바위처럼 단단한 어깨에서 팔꿈치 언저리로 내려왔다. 손톱이 마구 파고들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혀가 통째로 뽑히는 것 같은 얼얼한 통증에 이어,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 가는 강렬함이 전신을 지배해 왔다. 온몸의 세포가 일제히 깨어나는 듯했다. 생전 처음 밀어닥친 감각에, 로사는 어찌할 바 모르고 롬의 잿빛 머리칼을 마구 잡아 뜯었다.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었다. 입 안을 모조리 정복당하는 아픈 쾌감은 좀 더 계속되었다.
롬의 입술이 마침내 떨어졌다. 그의 머리를 휘감고 있던 로사의 두 손도 떨어졌다. 롬은 그녀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제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머리칼을 한 움큼 잡히고서도 그녀의 격렬한 반응이 흡족한 것 같았다. 로사는 충격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황자의 거친 기습도 기습이었지만, 자신이 보인 반응에 더 쇼크를 받고 있었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죠! 설마 당신, 이러는 이유가 날…….”
내 몸을 노린 건 아니겠지, 설마. 소국의 졸자도 아니고 비세그라드 제1 황자라는 인간이 추잡하게!
“궁극적인 목적은 당신이 맞습니다, 로슬린. 한눈에 반했죠,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을 내 걸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그건 네 멋대로 생각하는 거고요… 이거 놔달라고요!”
그는 놔주지 않았다. 롬은 마구 허우적대는 로사의 두 손을 하나로 움켜잡고 머리 위에 고정시켰다. 팔을 올리는 순간, 드레스의 어깨끈 하나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롬은 한 손으로는 로사의 두 손목을 결박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침상 옆 벽을 짚은 채, 눈부시게 아름다운 우윳빛 목선과 쇄골을 내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드레스가 흘러내려 알몸이 죄다 드러날 것 같았다. 그의 한쪽 눈썹이 꿈틀, 움직이며 완벽한 턱선을 타고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로사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빠르든 늦든, 눈앞의 야수는 기어이 그녀를 범하고 말 터였다. 유모와 시녀들은 그녀를 목욕시킬 때마다 진심으로 찬탄을 금치 못해했다. 언젠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거라고 말했을 때 유모는 크게 개탄해 마지않았다.
‘말도 안 됩니다, 로사 님! 그건 죄악이에요.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어 주신 신에게 죄악이란 말씀이지요. 공녀님은 최고의 남자에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셨어요. 강대국 중 가장 훌륭한 왕이 될 재목에게 시집가실 테니 두고 보세요.’
“정말 실망이네요, 롬 데르반 황자! 이렇게 못나고 남자답지 못할 줄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로사는 힘껏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이대로 속수무책으로 순결을 잃느니 차라리 몇 대 맞고 기절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정혼한 여자를 이렇게 작정하고 범할 정도면 분명 폭력도 불사할 것이다. 만에 하나 둘 다 행한다면, 때리고 범하기까지 한다면 최악 중의 최악이겠지만 이렇게 순순히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렇게 원하면 정식으로 마음을 얻는 게 순서 아닌가요? 적어도 당신네 나라에 갈 때까지 기다릴 인내도, 미덕도 없나요? 발정 난 짐승처럼 이렇게…….”
“네. 인내나 미덕 따위 전혀 없습니다. 발정 난 짐승보다 더한 놈이라도 어쩔 수 없어요.”
롬은 금방이라도 탈의될 것 같은 로사의 몸에, 제 몸을 더 바짝 밀착시키며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지금 붙잡지 않으면 언제 도망갈지, 한시도 마음을 못 놓을 테니까요. 공녀님의 도주 계획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 그걸 어떻게?
로사의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바래 갔다. 어떻게 알았지? 어디서 정보가 샌 걸까? 그녀는 오늘 밤, 항해 중 잠시 들르게 될 프로나아드 공국에서 홀로 도주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클란츠가 싫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인형처럼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자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이제 그만… 더 이상 고민해 봤자 부질없습니다, 로슬린.”
바짝 붙은 그의 몸에서 묵직하고 단단한 뭔가가 느껴졌다. 배꼽 아래, 여성의 가장 은밀한 치부에 얇은 천으로 가려진 남성이 지그시 눌러 오고 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로사의 조그만 얼굴을 들어 올려 저를 똑바로 보게끔 했다. 차디찬 손가락이 일으키는 야릇한 감촉에 로사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무 생각 말고 내게 모든 걸 맡기면 됩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으니까.”
롬의 더운 숨결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갑자기 몸이 번쩍 들리며 야트막한 선실 천장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구름 한가운데 누운 것처럼 푹신함이 온몸을 감싸 왔다. 황자의 입술과 혀가 다시금 그녀의 입 안을 거침없이 장악해 왔다. 로사는 다시금 밀려오는 혼란스런 쾌감에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말도 안 돼!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왜 롬 황자가 나를……!
비세그라드 왕국(The Kingdom of Visegrád)에서 즈베덴으로, 데르 해를 건너 항해하는 데만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사실 동맹국이라기엔 두 나라 간의 국력 차이는 매우 컸다.
비세그라드는 오래전, 데르 해를 둘러싼 대륙전이 있기도 전부터 이미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가장 오랜 역사를 보유한 왕국이었다. 수 세기 전, 민족에 따라 자잘한 소국으로 제각기 독립한 공국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 2년에 한 번씩 양국 간의 회담을 위해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방문해 오는 쪽은 늘 비세그라드 왕국이었다. 오래전에, 얼마 전 고인이 된 즈베덴의 선왕이자 로사의 조부가 비세그라드 왕가와 깊은 인연이 있는 까닭이었다. 즈베덴의 선왕은 대륙전에서 현재의 비세그라드 왕실 후손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고, 그 은공은 현재까지도 즈베덴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로사가 처음 롬 데르반 황자를 본 것은 4년 전, 열다섯 살 때였다. 황자는 당시, 이미 스물한 살 성인이었고 풍문으로 듣던 것처럼, 아니 모든 면에서 소문보다 훨씬 더 우월했다.
배다른 언니들은 롬 데르반이 모국을 대표해 방문해 온 첫 나라가 즈베덴이라는 사실에 감격해 어쩔 줄을 몰랐다. 갓 성인을 넘긴 공녀들은 손에 손을 맞잡고 환호를 올리며 다 함께 가슴 설레어하면서도, 경쟁심에 불타서 서로에 대한 견제를 놓지 않았다.
혹시나 내가 롬 황자의 눈에 든다면. 아무리 우리 즈베덴이 소국이라도 과거의 인연도 있고, 지금의 돈독한 동맹 관계에서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언니들의 목표는 하나로 대동단결되어 있었다.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승자가 단 한 명일 뿐. 비세그라드 대국의 황비가 되어 전 대륙의 여자들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서는 것만 해도 엄청난 행운이건만, 동시에 롬 데르반 같은 남자의 아내가 된다니.
그때부터였던 것 같았다. 정실과 후실들의 공녀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시작된 것은. 롬 데르반 황자를 선두로 비세그라드의 사절단이 1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즈베덴을 방문해 오기 시작한 4년 전부터였다.
부왕과 숙부들, 여러 후궁과 첩들의 소생인 공녀들까지, 왕실의 소녀들은 본래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실현 가능한 소망과 야망 앞에서, 그녀들과 각 부모들의 관계는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언니들과 터울이 많은 로사만이 그 잔잔한 소용돌이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혼사가 실제로 이루어질 열아홉이 될 무렵, 공녀들은 이미 어딘가 시집을 가 있을 터였다. 실제 그들 중 하나가 롬 데르반과 혼약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가장 어린 나이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로사만은 그 누구의 견제나 미움 없이 평탄한 황궁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막내 공녀는 주변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이성에 대해 마냥 어리기만 하지는 않았다. 롬 황자를 연회석상, 먼발치에서 볼 때마다 어린 로사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치 마법에 홀린 것처럼,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사로잡혀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신기했다. 즈베덴 왕실의 몇 안 되는 직계 황족 남자들 중에도 잘생긴 사람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데르 해 가장 위쪽 대륙에서 온 롬 데르반 같지 않았다. 그는 키가 무척 컸다. 장대한 기골과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는 체격은 멀리서도 위협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얼굴은 건장한 체격과는 딴판이었다.
갓 스물을 넘긴 얼굴에는 앳된 소년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머리를 기른다면 그리고 지금처럼 회색을 띤 잿빛이 아니라 언니들 같은 금발이라면, 분명히 동화 속 요정처럼 보일 텐데. 그런 바보 같은 상상도 해 본 적 있었다. 그만큼 황자의 이목구비는 완벽했고 여자처럼 고운 선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해가 바뀔수록, 그의 즈베덴 방문이 4년 내내 거듭될수록, 여성보다 더 고왔던 선은 빠르게 변모해 가고 있었다. 보다 굵은 선을 띠게 된 용모는 한결 더 바람직한 쪽으로 바뀌어 갔다. 완벽함은 잃지 않으면서, 훨씬 더 남성적인 카리스마와 조금은 거친 풍모로 빠르게 탈바꿈되었다.
언니들은 매년 더 근사해져 가는 황자의 모습에 더욱 열광했고, 서로를 향한 견제에서 비롯된 갈등은 더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황자가 왜 스물다섯이 되도록 혼례에 대해 무심한지에 대해서도, 격렬한 호기심과 근거 없는 억측들이 끊이질 않았다. 풍문에 따르면, 그는 쟁쟁한 타국들의 여식들에게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즈베덴 공녀들 입장에서는 안심이었지만 그렇다고 불안과 초조함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과년한 소녀들은 차례대로 타국이나 즈베덴 내 고위 귀족들과 혼인하는 등, 하나둘씩 아쉬운 마음을 누르고 각자 시집을 가야만 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성인식을 마친 로사에게도 청혼이 들어왔다. 상대는 어릴 적부터 가끔씩 보아 왔던 동맹국 바첼라프의 제1 공자 클란츠였고, 변동이 없는 한 그녀는 바첼라프의 황비가 될 수 있었다. 공국은 초창기 독립 시의 명칭일 뿐, 독립된 하나의 국가인 만큼 공왕의 부인은 황비란 명칭으로 불렸다.
즈베덴 왕실에서 그렇게 훌륭한 제안을 거부할 리 없었다. 어느덧 칠순이 되어 병약해진 부왕은, 생일 연회가 파하자마자 막내딸을 따로 불러 독려의 말을 건넸다.
“제일 어리니 좀 더 오래 데리고 있겠거니 생각했건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어 버렸구나. 아직 출가 안 한 언니들이 몇 명 남았지만 순서 따위 상관없다. 클란츠라면 널 맡길 수 있어. 너도 알다시피 난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버님, 그런 말씀 마세요…….”
“최고의 혼수품을 준비해 줄 테니 일주일 후 유모와 시녀들을 데리고 가거라. 내일 그쪽에서 널 데려갈 바첼라프 황실 선박과 현지 수행단을 보내 올 거다.”
“아버님, 일주일이라니요!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요.”
“괜찮다, 로사. 나의 사랑스러운 로사… 넌 특별한 아이야. 거기서도 모두에게 사랑받는 훌륭한 왕비가 될 거다.”
부왕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진 한 손을 뻗어 어깨 아래 흘러내린 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머리칼은 죽은 생모, 플라비니 황비의 것을 물려받아 매우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즈베덴뿐만 아니라 데르 해 북쪽과 중간국 민족에게 금발은 흔했다. 하지만 로사처럼, 햇빛과 달빛에 반사될 때마다 석양처럼 붉은빛이나 초록색, 때로는 밤하늘처럼 신비한 보랏빛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황금빛 머리칼을 지닌 여자는 누구도 없었다.
“넌 영원히 떠나는 게 아니다, 로사. 관례에 따라 첫 아이를 낳으면 친정을 방문할 수 있을 테니 너무 상심 말거라. 내 반드시 그때까진 살아 있을 테니.”
부왕의 자애로운 미소에, 어릴 적부터 떼 한번 쓴 적 없던 로사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왕의 품에 안겨 한참을 더 울었다. 로사와 가장 가까운 시녀는 왕실 주치의의 딸이었다. 로사는 우연한 기회에 그들 부녀의 대화를 엿듣고, 현재 부왕의 상태가 모두에게 알려진 것보다 더 심각함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몇 달을 넘기지 못하실 수 있었다.
황자에게 혀를 고스란히 내어 준 상태로, 로사는 기억의 반추에서 벗어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부왕의 상태가 뇌리에 떠오르자마자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이 울컥 터져 나오고 있었다. 황자가 키스를 멈추고 몸을 떼고 나서도 흐느낌은 멈추질 않았다.
“아버님… 아버…….”
로사는 침상에 널브러진 채 몸을 돌리고 하염없이 울었다. 부왕이 그렇게 애지중지 걱정하던 막내딸의 지금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애통해하실지 분하고 슬펐다. 해적에게 납치되어 순결을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라니.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조금 전까지, 황자와 맞서고 공격까지 하려 했던 용감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제발 하지 말아요… 아버님이 아시면…….”
침상이 크게 흔들렸다 멈췄다. 황자의 무게가 덜해진 침상 위에는 이제 그녀밖에 없었다. 영원처럼 긴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로사의 흐느낌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정도 진정한 뒤로도, 시트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겠습니다. 배에 태운 것까진 어쩔 수 없이 강제로 했지만… 처음까지 강제로 밀어붙일 생각은 없어요.”
낮은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울렸다. 속내를 가늠할 수 없는 음성은 좀 더 이어졌다.
“며칠 뒤 비세그라드에 도착하면 모든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손대지 않는다고 약속하죠. 단, 도망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로사는 대꾸하지 않은 채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저벅저벅, 발소리에 이어 선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눈물을 닦았다. 아담한 선실 구석에는 물이 가득 담긴 욕조와 식탁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몸을 씻을 생각도, 배가 고프다는 느낌도 없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몸을 눕혔다. 설마 자는 동안 들어와서 건드리진 않겠지. 강제로 하지 않겠다고 제 입으로 말했으니.
로사는 완전히 탈진 상태에 있었다. 의식이 빠르게 흐려지고 있었지만 붙잡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싶었다. 눈을 뜨면 바첼라프행 배의 선실이었으면, 아니 차라리 아무도 그녀를 모르는 낯선 곳이었으면 싶었다.
***
로사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눈을 한동안 더 깜빡이고 나서야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동그란 선창 너머, 쾌청하게 푸르른 하늘이 보였다. 머리는 맑았지만, 잔뜩 긴장한 채 잔 탓인지 몸은 찌뿌둥했다.
“깨셨어요, 로슬린 님?”
선실 뒤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여자아이는 머리를 녹색 두건으로 감싸고, 길고 느슨하게 늘어뜨린 페플로스 복장을 하고 있었다. 몸에 적당히 붙는 즈베덴 복식 스타일과는 사뭇 달랐지만 완전히 낯설지가 않았다. 비세그라드 왕실 시동의 복장은 즈베덴에서도 한 번 본 적 있었다.
“넌…….”
“저는 타샤라고 합니다. 일주일 전 공녀님을 가까이서 뵌 적이 있어요. 즈베덴 공왕 폐하의 생신 축하연 사절단에 저도 있었거든요. 물론 기억은 안 나시겠지만…….”
“몇 살이니? 데르어가 아주 능숙하구나…….”
“열다섯 살입니다. 다섯 살 때부터 데르어를 배웠어요.”
아이는 수줍은 듯 웃었다. 로사는 열다섯이란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4년 전, 그녀가 처음으로 롬 데르반을 보았던 나이였다. 하지만 롬을 떠올리는 순간, 얼굴이 저절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로슬린 님, 괜찮으세요? 식사를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면 황자님께서 갑판에 계신데 불러 드릴…….”
“아냐. 싫어!”
로사는 저도 모르게 빽 소리쳤다. 아이가 깜짝 놀라자 애써 웃으며 화제를 바꿨다.
“배가 고파. 목도 마르고. …그리고 조용히 쉬고 싶으니까 황자님에겐 알리지 않아도 돼.”
“네.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잠깐.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어. 나와 함께 있던 즈베덴의 시종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니? 모두 이 배에 타고 있어?”
“아, 그분들이 탄 배는 저희가 탄 이 범선을 따라오고 있어요. 이 배가 워낙 커서 모두 승선해도 되지만, 황자님께서 따로 뒤따라오라고 지시하신 것 같아요. 중간에 정박할 일이 없으면… 앞으로 닷새 뒤엔 도착할 테니 그때 다시 만나실 수 있을 거랍니다.”
로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최소한 시종들의 안전은 확실한 것 같았다. 어제 빌어먹을 황자는 허리춤의 검까지 들먹이며, 제 말대로 하지 않으면 모두 베어 죽일 것처럼 도발했었다. 부디 처음부터 공갈 협박이었기를 바랐다.
잠시 후, 아이는 선실과 연결된 다른 문으로 나가더니 쟁반에 이것저것 음식을 담아 왔다. 신선해 보이는 야채와 과일, 말린 사슴고기와 미트파이가 산미를 돋우는 올리브 오일 등 여러 가지 소스와 곁들여 담겨 나왔다. 뜨거운 스튜 같은 것도 있었다. 즈베덴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확실히 구별되는 음식들이었다. 아이는 그녀가 먹는 동안, 곁에 앉아 이것저것 끊임없이 떠들어 댔다.
“다시 배를 타고 로슬린 님을 데리러 간다고 들었을 때 무척 들떴어요! 전 로슬린 님처럼 예쁜 분은 처음 봤거든요. 우리 황녀님들도 다 예쁘시지만 로슬린 님이 제일 아름다우신 것 같아요. 지금까지 제가 본 분들 중에서…….”
타샤는 멋쩍게 웃었다. 면전에서 마구 찬양한 게 민망한 모양이었다. 로사는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와인처럼 생긴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켰다.
“고, 고마워…….”
그녀 역시 민망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절세미인들로 소문난 비세그라드 황녀들에 비하면 난 존재감도 없을 텐데, 설마.
“로사라는 애칭도 벵골 장미인 로사 키넨시스(Rosa chinensis)에서 따왔다고 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장미꽃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우셔서. 그래서 황자님도 서둘러 혼약하기 위해 로슬린 님을 한시라도 빨리 데리러…….”
“잠깐. 타샤! 난, 내가, 그러니까 처음부터 즈베덴을 떠나 비세그라드로 가기로 되어 있었니? 넌 그렇게 알고 있었어?”
“네. 그래서 데르반 황자님이 일주일 전, 즈베덴 공왕 폐하 생신 연회를 마치고 귀국하시자마자 바쁘게 혼례 준비를 하시고 어제 배를 띄워서 오신 거잖아요.”
“말도 안 돼. 난… 난 바첼라프로 가는 중이었어. 클란츠 황자와의 혼약을.”
로사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타샤의 조그만 머리 뒤, 선실 문가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롬 데르반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침대 위, 베드 트레이의 절반쯤 비워진 접시들을 빠르게 훑었다.
“타샤, 수고했다. 이만 가서 쉬어라.”
아이는 황자와 로사 둘 모두에게 정중히 절을 한 뒤 선실 밖으로 사라졌다. 로사는 멀어져 가는 시동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비록 어제는 순순히 물러났지만, 그녀를 명백한 욕망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남자와 다시 단둘이 된다니 끔찍하게 싫었다.
로사는 저도 모르게 시트를 가슴 위까지 끌어 올리고 있었다. 본능적인 몸짓이었다. 롬 데르반과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떻죠, 로사?”
“…….”
롬은 어느새 침대 옆 의자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방금까지 타샤가 앉아 있던 위치였다.
“식사는 제대로 한 것 같은데.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날 로사라고 불러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어요. 그건 가족들만 부르는 애칭이니 삼가 주세요.”
로사는 쌀쌀맞게 내뱉듯 말했다. 하지만 롬은 차분하게, 동시에 끈질기게 로사라는 호칭을 고수했다. 로사의 적의 앞에서 언짢아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어차피 우린 곧 가족이 됩니다. 타샤가 대강 말해 주지 않았나 합니다만. 워낙 말이 많은 아이라.”
“그 얘기 말인데요.”
로사의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어젯밤의 키스를 생각하자 수치심에 머리까지 이불을 도로 뒤집어쓰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어제부터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죠? 난 제대로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어요. 아까 타샤라는 아이도 일주일 전부터 당신이 날 혼인 상대로 데리러 오는 게 기정사실인 걸로 알고 있던데-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상황이에요!”
“닷새 뒤 비세그라드에 도착할 겁니다. 그때 다 설명하죠.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즈베덴의 폐하도 이 상황을 알고 계시니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안전하게 비세그라드로 가서 나와 혼례식을 올리게 되어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뭐라고요……?”
로사는 경악으로 눈을 크게 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 말을 어떻게 믿죠? 말도 안 돼요. 아버지가 알고 계셨다면 처음부터 숨기지 않고 어떤 상황인지 다 말씀해 주셨을 거예요! 다짜고짜 해적처럼 이렇게 멋대로 납치해…….”
순결을 빼앗으려 했던 놈의 말 따위 절대 안 믿어! 못 믿어! 앙칼지게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너무 흥분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롬은 분노로 물들어 가는 로사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다 그녀의 한 손을 잡았다.
“어제는 너무 성급하게 굴어서 미안합니다, 로사. 지난 4년 동안 당신을 지켜만 보…….”
“로사라고 부르지 말아요!”
로사는 그에게 잡힌 손을 홱 빼내며 소리쳤다. 화가 나서 그의 말을 마저 들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당신 말을 한마디도 믿을 수가 없어요. 처음부터 바첼라프로 가는 게 아니었다면, 지금이라도 배를 돌려 즈베덴으로 보내 주세요. 당장. 직접 아버님 말씀을 들어 볼 테니까.”
롬 데르반은 침대에 앉아 길길이 날뛰는 로사를 잠자코 바라만 보았다. 그녀는 이름처럼 한 송이 장미 그 자체였다. 무척 아름답지만 뾰족한 가시를 품은 벵골 장미.
“어젯밤 일은 사죄하겠습니다. 하지만 배를 돌려 즈베덴으로 가는 건 불가능해요. 일단 비세그라드에 도착할 때까지 진정하고 쉬는 게 좋겠…….”
“진정? 진정하게 생겼어요, 지금? 당신 때문에 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어요, 그것도 모자라서 멋대로 안고 멋대로 혼례를 올린다고 일방적으로…….”
“그 계획이란 건 어젯밤 프로나아드 공국으로 도주하려 미리 손써 뒀던 걸 말하는 거겠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어서 서둘러야 했습니다.”
롬은 불쑥 물었다. 이제 질문의 공은 그에게 넘어가 있었다. 미리 손써 뒀다 해도 시종들 몇 명이서 무작정 달아나려 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계획 아니냐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대체 프로나아드로 달아나서 뭘 어떻게 할 생각이었죠? 즈베덴 공왕 폐하가 얼마 남지 않으셨다는 걸 알고 그런 결심을 했겠지만 말입니다.”
“당신이 알 바 아니에요.”
프로나아드의 엘로이즈 황비에게 도움을 요청해 변방 섬에 잠시 피해 있을 생각이었다. 엘로이즈는 열 사내 부럽지 않은 여장부였고,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는 정책을 피력하는 등 훌륭한 인품으로도 대륙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결혼을 하고, 어떻게든 내 자식들을 왕좌에 앉히려고 눈앞에선 거짓 웃음 지으며 암투를 벌이고… 그런 뻔한 미래를 살고 싶지 않아서예요. 아버지께는 따로 기별을 보내서 어딘가 살아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알릴 생각이었고.”
너 알 바 아니라고 쏘아붙이던 로사는 다시 싸늘하게 덧붙였다. 별생각 없이 도망가려 했던 철부지처럼 보이기는 싫었다. 확실히 못을 박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롬 데르반 황자,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내 의지와 무관하게 당신과 혼약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 완력으로 내 몸을 멋대로 할 수는 있겠지만… 다른 건 절대 아니에요.”
로사는 침대 위에 꼿꼿하게 앉아서 한 마디 한 마디 강조해 나갔다.
“비세그라드에 도착하면, 아니 도착하기 전이라도 난 반드시 달아날 거예요.”
아차, 그녀는 뒤늦게 제 경솔함을 후회했다. 자신을 감시할 대상에게 턱하니 그런 말을 내뱉다니. 하지만 롬은 그 말에도 별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절대 달아날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평정일 것이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황실에서 태어나 19년 동안, 부족한 것 하나 없이 보호받으며 살아왔는데 무슨 수로 외지에서 새 인생을 살겠다는 겁니까?”
“나도 다 생각이 있어요. 당신에게 알려 줄 의무만 없을 뿐이죠.”
프로나아드 공국에 속한 데르 해 북쪽에는 수백 개의 섬들이 있었다. 엘로이즈 황비는 대륙 곳곳에서 범죄자를 제외하고, 정치적 목적이나 다른 타당한 이유로 망명해 오는 이민자들에게 섬들을 내주고 독자적인 정착을 돕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로사도 공녀로서의 신분을 버리고 그 정책의 혜택을 요청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거란 계획이었다.
로슬린 드 플라비니 즈베덴 황녀가 아니라 그냥 일반인 로사로 조용히 살아가는 거야. 무슨 일이든 할 각오는 되어 있어.
열여섯 살 때부터 유모들과 시종들 어깨너머로 바느질, 수예, 직물 제조, 간단한 요리와 비올라 디 감바(중세의 첼로) 연주 등 최대한 많은 것들을 습득하려 애썼다. 책읽기가 무료하니 심심풀이 겸 소일거리로 하는 거라 핑계를 대면 시종들도 굳이 막지는 않았다.
롬은 그녀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길고 짙은 속눈썹 아래, 속을 알 수 없는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그렇게… 싫은가요? 어젯밤 일 때문에?”
“그게 제일 큰 이유이긴 하죠.”
어제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리자 심장이 다시 미친 듯 뛰었다. 중간에 멈추긴 했지만 혐오감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키스할 동안 밀려왔던 이상한 쾌감은 잊힌 채, 두려움만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어제 강압적으로 시작하려 한 건 잘못이었습니다. 몇 번이고 사죄해도 좋아요. 하지만 상대가 누구든 정략결혼을 하게 되면 싫든 좋든 의지와는 상관없습니다. 누구와든 초야는 치러야 하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혹은 첩이나 다른 후궁에게 관심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그런 밤은 계속될 겁니다. 모르지 않을 텐데요?”
“그래서 달아나려 했던 거예요! 그것도 내가 공녀로서의 인생을 버리고 나만의 삶을 개척하려 했던 이유 중 하나라고요! 그런데 당신이 내 계획을 다 망쳤어요. 하지만 말했듯이 상관없어요. 중간에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나는 내가 계획한 대로 살 거니까.”
그 강경한 선언에 롬의 눈빛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조금은 상처를 받은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상한 것도 같았다. 어쨌든 심기가 불편해진 건 확실했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몸을 똑바로 세웠다.
“좀 진정하고 저녁때까지 쉬시죠. 필요한 게 있으면 줄을 당겨 타샤를 부르고. 단.”
그는 건조한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도망갈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요.”
롬의 푸른 눈에서 매서운 파도가 일렁였다. 로사는 저도 모르게 움찔, 침을 삼켰다.
“날 원망하든, 욕하고 때리든 뭐든 맘대로 해도 좋습니다. 단, 도망만은 절대 용서 안 해요.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그는 차갑게 말을 맺고 선실을 나갔다. 로사는 잔뜩 긴장한 채 황자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노려보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잠깐이었지만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도 듣는 이 없는 텅 빈 방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쳐 댔다.
“흥, 웃기고 있네! 도망갈 거야! 도망가고 말 거야. 두고 봐! 이 발정 난 호색한!”
로사는 분한 마음에 잠시 눈물을 글썽이다가 침대 밖으로 발을 디뎠다. 팔다리가 찌뿌둥해서 좀 움직여 줘야 할 것 같았다. 적당히 아늑하게 꾸며진 선실 구석에는 물건들이 몇 개 더 늘어나 있었다. 욕조 옆에는 새로 데워 온 온수 대야와 향료, 화장수 등이 잘 구비되어 있었다. 아까 깨어나기 전 타샤가 정리해 둔 게 분명했다.
지금 몇 시나 됐을까.
로사는 선창을 반쯤 가린 커튼을 들춰 보았다. 완벽한 청색을 띤 하늘 여기저기, 솜사탕처럼 포근한 구름들이 드리워져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현 상황에 대해서 조용히 생각해 보고 싶었다.
비세그라드까지 앞으로 닷새. 그 안에 기회가 주어지면 반드시 프로나아드로 도망갈 거야. 두고 봐!
로사는 맑디맑은 하늘을 향해 두 손 모아 빌었다.
제발 닷새 안에 태풍이 일기를. 신이시여, 제발…….
매년 11월에서 12월, 데르 해에는 며칠에 한 번꼴로 태풍이 일었다.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로, 닷새 안에 풍랑이 거세질 확률은 반반이었다. 태풍이라 해도 표류될 정도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하룻밤은 가장 가까운 섬이나 항구에 정박해 쉬어 가야만 했다. 로사는 오직 그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