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53/53)

에필로그

* * *

퐁-

경쾌한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이윽고 빨간 불이 타오르더니 불씨를 옮긴 채 다시 조용히 사라졌다.

시동을 끄지 않은 채 운전석에서 내린 연호가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며 길게 연기를 뿜었다. 그러고는 슈트 상의를 탁탁- 치고 보닛 앞을 지나 조수석 문을 열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확인은 우리가 먼저 할 테니까, 정리되면 들어와서 확인해.”

부산항 부두 창고 후미진 곳에 나타난 고급 세단 안에 앉은 미주는 남편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하긴, 사람이 죽은 걸 보는 게 두 번째긴 해도… 자연사도 아닌 걸… 굳이 나까지 갈 필요는 없을 테니깐.”

“맞아. 안의 상황이 끔찍하다 먼저 온 요한이 전해 왔으니, 우리가 수습 다 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네가 얼굴만 확인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연호가 제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차 문을 닫고 몇 발자국 앞에 있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호가 등장하자 열렸다 다시 닫히는 문틈으로 요한과 도균이 보였다.

정훈은 소식을 듣고 따로 지금 정재민이 세상에 남긴 흔적을 모조리 소각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미주는 조수석 등받이를 뒤로 살짝 젖히며 오디오 볼륨을 점점 높였다.

“하아… 우리가 결국 이렇게 될 줄, 그땐 알았을까?”

차 안에 울려 퍼지는 바흐의 샤콘느라면 재민의 마지막 가는 길에 나쁘지 않은 장송곡이겠지. 천천히 눈을 감으며 힘들었던 인고의 시간을 반추해 보았다.

* * *

김 기사가 제 발로 찾아와 연호에게 죄를 고했던 날.

눈앞의 분노에 이성을 잃었던 저를 재민의 수를 꿰뚫어 본 연호가 깨우쳐 준 덕분에 지금 이날까지 복수의 칼날을 날카롭게 갈았다.

“15년 전에 죽였으면 이판사판으로 그냥 단칼에 해치웠을 테니. 오히려 그걸 바라고 있었던 오빠라서, 우리 모두 기다렸어.”

제 복수는 그들 모두의 복수였다.

진우는 제 오빠이기도 했지만 연호에게는 라이벌이자 어쩌면 가장 좋은 친구였고, 요한과 도균에게는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 은인이기도 했다.

조금 지나서 알게 된 거지만 예나가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비밀을 지켜 주며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을 한 번 더 도운 이유는 간단했다. 겉으로는 연희를 위해 TV에 나오는 용기를 낸 게, 사실은 진우에게 달콤하고 쌉싸름한 감정이 있어 그를 돕고자 한 것이었다.

진우가 죽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필리핀 마닐라에서 해후한 예나에게 진실을 알렸을 때, 그녀가 먼저 제안했었다.

‘언니, 아니 이젠 사장님이네요. 윤 사장님. 예전에 그랬듯 이번에도 꼭 저를 끼워 주세요. 절대로 전무님 죽인 놈, 그냥 둘 순 없으니.’

창녀에게도 순정은 있었고, 여자는 남자들보다 훨씬 의리 있었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급하지 않은 복수를 각자 꿈꾸며 때가 되길 기다렸다. 물론 혹시나 김 기사처럼 교도소에서 자살이라도 할까 봐 사람을 붙이며 감시했지만.

‘그래도 김 기사는 양심이라도 있는 놈이었어. 정재민 그 새끼는 우리 생각대로 스스로 생을 마감할 용기조차 없는 놈이니.’

김 기사는 때가 됐을 때 모든 걸 안고 가겠다는 연호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 뒤 강산이 한 번 변했을 때 출소한 재민을 자유라는 더 넓은 감옥에 둔 채 감시하고 지켜보면서 말이다.

‘방심했을 때, 정말 이젠 다 끝났다고 그 새끼가 생각할 때, 바로 그때야.’

가끔 미칠 듯한 분노에 재민을 죽이겠다 울부짖을 때마다 연호가 저를 달래면서 해 줬던 그 말을 주문처럼 되뇌면서 버텼다.

마침내 희주를 죽음에 몰아넣은 원죄의 날을 기념하며. 습관처럼 재민이 자기 전에 마시던 물에 평소보다 좀 더 깊게 잘 수 있는 것을 보탰다.

* * *

그리하여 재민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몇 날 며칠을 능욕, 치욕, 굴욕, 이런 단어를 넘어선 욕辱을 당하고는 오늘에서야 죽음에 이르렀다.

아마 재민이 짐작했을 수 있겠지만 그간 딱 죽지 않을 만큼 최소한의 의료 행위를 하며 생명을 연장해 줬다. 수혈도 그랬고, 그가 거세를 당했을 때나 두 눈을 잃고 의식불명일 때 친절히 수액까지 달아 죽이지는 않았으니깐.

그가 행했던 악행을 몇 곱절 되돌려 주며 앞이 보이지 않는 재민이 더는 여성도 남성도 아니게 되었을 때.

“짐승보다 못한 놈이니, 저보다 나은 짐승한테 당하는 게 가장 어울려.”

진우의 책상에 엎드린 채 결박되어 받았던 모욕을 갚아 줬다. 연호에게 듣기로 재민은 그 상태로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고 몸이 넝마가 될 때까지 고통받으며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주의 눈가에 복잡한 눈물이 맺힐 때, 누군가 차 문을 똑똑- 두드렸다. 창문을 내려 달라는 수신호에 미주가 오른손으로 버튼을 누르자 요한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장님, 들어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네, 알았어요.”

요한의 안내에 따라 미주가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창고로 들어서니 입구에 선 연호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주야, 냄새가 좀 많이 날 거야. 그러니 손수건으로 가리고 확인해.”

늘 언제나 다정한 남편이 건네는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자, 익숙한 향이 폐부로 스며들었다.

미주는 한 걸음씩 걸어가 창고 중앙의 흰 천으로 덮여 있는 것 앞에 자세를 낮추고 앉아 흰 천을 살짝 내렸다.

“……재민 오빠, 있잖아. 잘 가라고 말하고 싶지만 지옥에서는 또 희주 오빠랑 진우 오빠가 기다릴 텐데, 괜찮겠어?”

그나마 많이 상하지 않은 재민의, 이제는 푸르게 변한 뺨 위로 뚝뚝-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눈물이 떨어졌다.

역시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미주의 첫사랑은 가장 잔인한 형태로 이룰 수 없는 각자의 길을 간 끝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싸늘한 재민의 뺨을 철썩- 하고 때렸다.

그리고 또 한 번, 또 한 번.

하나는 희주의 복수였고, 둘은 진우의 복수였다.

마지막 셋은 우아하고 고상하게 갚아 주는 제 복수였다.

이로써 드디어 모든 게 끝났다.

“네, 끝났어요.”

미주가 다시 흰 천을 덮어 망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때였다. 연호가 다가와 저를 일으켜 주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래, 다 끝났어. 이제 다 끝났어, 미주야.”

연호가 눈짓하자 도균과 요한이 두 사람이 타고 온 차 트렁크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뿌렸다. 휘발성의 냄새가 순식간에 창고 안을 가득 메웠다.

진우가 오래전 미주를 위해 모든 걸 불태웠듯, 이번에도 그녀와 그들 모두를 위해 불길 속에 죄를 묻으려 했다.

“준비됐으니 나가시죠.”

연호의 품에 반쯤 안긴 미주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제 남편과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 앞에 섰을 때였다.

갑자기 몸을 돌린 미주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창고 안을 가만히 보더니 연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연호 씨, 나 담배 한 대만 줘 봐요.”

“…뭐, 줄 수는 있는데, 피워 본 적 없잖아?”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금 한번 피워 보려고요.”

미주가 부탁하는 일이 놀랍기도 하고 엉뚱하다고 여긴 연호가 눈썹을 한 번 삐죽이며 품 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자. 여기 뒤집지 말고, 여길 물어야 해.”

“흡연자들 틈에서 산 세월이 얼만데. 그 정돈 알거든?”

농담 섞인 말투로 퉁퉁거리는 미주를 보며 요한과 도균이 살짝 피식- 웃어 보았다.

미주의 입술 사이로 하얀 담배가 물리자 연호가 라이터를 꺼내더니 정말 괜찮겠냐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궁금해서. 희주 오빠나 진우 오빠도 그렇고 심지어 당신까지 담배를 사랑해 마지않으니 대체 무슨 맛인지 솔직히 궁금했어요.”

장난이 아닌 진심 같은 미주에게 연호는 조용히 퐁- 소리를 내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여자의 두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담배가 붉은 입술에 물려 한 모금 제 몸을 태웠다.

그 순간, 엄청난 기침 소리와 함께 미주가 질겁하듯 소리쳐 남자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으악, 이게 뭐야! 콜록콜록! 으으으! 이런 걸 피운다고?”

“그 맛으로 피우는 거지. 아직 멀었어, 윤미주.”

해소병자처럼 기침하던 미주가 끔찍하다는 얼굴로 여전히 제 손에 들린 담배를 보다가 천천히 표정이 변했다.

“내가 마무리할게요.”

그 한마디에 연호는 왜 미주가 뜬금없이 담배를 달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아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 그게 제일 좋겠어.”

“시작은 나였으니, 마지막도 내 손으로 끝내고 싶어요.”

모든 건 부산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저를 위한 진우의 복수가 결국 또 다른 복수를 낳았고, 그 복수는 다시 끔찍한 복수가 되어 그들 모두 잔혹한 운명의 굴레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모든 건 부산에서 끝났다.

미주는 천천히 손에 들린, 불이 붙은 채 연기를 내뿜고 있는 담배를 있는 힘껏 던졌다.

바닥에 닿기 무섭게 화마가 치솟았다.

아마, 진우가 하늘을 불태웠던 날도 이렇게 넘실대는 붉은 주황빛 염화가 사랑도, 분노도, 그리고 미움과 복수까지 모두 삼켜, 모든 걸 태웠을 것이다.

하늘까지 치솟은 검은 연기를 뒤로한 채 미주와 연호는 함께 차에 올랐다.

서울까지 정말 있는 힘껏 달려도 최소 4시간 30분.

뒤처리는 요한과 도균이 해 주기로 했으니 부부는 늦은 밤, 핸들을 서울로 향해 움직였다.

“…….”

고속도로를 타고 질주하는 세단 안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마음이 흘러넘쳐, 미주와 연호는 손을 꼭 잡은 채 어둠을 관통해 새벽으로 나아갔다.

조금씩 날이 밝아지면서 타오르는 붉은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때쯤, 한강을 건넜다.

“…연호 씨, 쉿.”

“…알았어. 깰 수 있으니깐, 조용히…….”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이 발소리를 죽이며 피로 가득 찬 복수를 씻은 후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아직도 두근대는 심장을 간신히 손으로 누르며 미주가 주방에서 물컵을 꺼내 물을 마시고 있는데 작은 인영이 제 앞으로 다가왔다.

“엄마? 이제 왔어?”

눈을 비비던 작은 남자아이가 잠이 덜 깬 듯 부스스하게 다가오자 미주는 웃으면서 아이를 끌어안고 말했다.

“응, 아빠랑 볼일 보고 왔어. 우리 진우 벌써 깬 거야?”

“…으응? 엄마 아빠 오는 소리가 난 것 같아서…….”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보니 확실히 잠이 덜 깬 게 분명했다.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듯 미주가 품에 안았을 때, 진우가 중얼거렸다.

“…고모가… 아빠랑 엄마… 오늘 아침에 온다고…….”

엄마가 등을 토닥이자 이내 잠이 들었는지 진우는 하려던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한 채 새액새액- 숨소리를 냈다. 미주가 진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방으로 가려 할 때, 씻고 나온 연호가 한 몸이 된 모자를 보더니 행복한 듯 웃었다.

“자자, 우리 차진우는 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 아빠한테 와야지.”

“연호 씨, 쉿-! 조용히. 진우 깨요.”

마치 미주에게서 진우를 뺏듯이 안아 든 연호가 살짝 윙크하며 아이 방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침대 구석에서 깊이 잠든 제 누이를 보며 연호는 그 옆에 진우를 눕히고 다시 이불을 잘 덮어 줬다.

더는 꼼수 따윈 쓰지 않겠다고, 연희는 검찰이 구형한 죗값을 항소 없이 달게 받았다. 재벌가에서 태어난 중년 여인은 성실하게 징역을 살고 세상으로 복귀해 조용히 조카를 돌보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연호는 진우의 방 문을 잘 닫고 발소리를 죽인 채 침실로 들어왔다. 침대에 옆으로 누워 있는 미주의 피곤한 등을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미주야…… 이제 다 잊자. 정말 모든 게 끝났어.”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진우 오빠 몫까지 우리 살아요.”

제 곁에는 가족이 있었기에 미주는 외롭지 않았다. 사랑하는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뒤늦은 나이에 기적적으로 생긴 진우가 있었으니 행복했다.

미주는 저를 안고 있는 연호의 따스한 체온 때문에 조금씩 눈이 감기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수면제 없이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말이다.

앞으로 남은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다시 지은 죄가 죽을 때까지 저를 괴롭힐 것이다.

지난 15년 동안 그러했듯 수면제 없이는 여전히 잠을 자지 못하겠지. 연호와 매번 약속했지만, 가끔 참지 못해 지금껏 끊지 못하는 술에 손을 댈 때도 있을 테고.

아니면 완전 범죄란 없을 테니, 결국 지난밤에 있었던 피의 복수로 인해 결국 살인죄로 감옥에서 삶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물론 손에 묻은 죽은 자의 피 내음에 감옥에 가지 않아도 더는 사람이 아닌 짐승인 채로 내일 같은 오늘을 지옥처럼 살겠지.

그래도 괜찮았다.

어떤 결말로 끝맺을지 모를 인생이지만 먼저 죽은 자들을 위해 지금처럼 치열한 하루를 보낼 것이다.

‘이제 한복집 할매 손녀를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구나.’

조금 쓸쓸한 감정에 제 손을 꼭 잡은 연호의 손등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부산, 범일동 매축지 골목을 뛰어놀았던 작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말괄량이를 흐뭇하게 지켜보는, 남들이 봤을 땐 조금 불량했지만 제게는 더없이 든든했던 오빠, 희주가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저를 지켜 주었던 앙숙인 진우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늘도 그랬듯, 내일도 저와 티격태격하며 싸울 테지만 말이다.

미주는 꿈결 같은 시간 속에서 희미해진 어린 시절 기억 속 또 다른 이를 떠올렸다. 안경을 쓴 재민이 선한 얼굴로 진우의 옆에서 조용히 웃고 있었다.

사랑하고, 사랑했고, 사랑한 사람들이 해맑고 행복했던 그 시절로 모두 돌아가 있어, 할 수만 있다면 그들 곁으로 가고 싶었다.

눈을 감은 미주가 연호의 품에서 좀 더 깊은 잠을 청해 보면서.

그곳에 그들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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