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 * *
“일어났네, 오빠. 오랜만이야.”
예전과 거의 변함없는 그녀를 보며 재민은 지금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15년 만이네. 잘 지냈어?”
제 마지막 기억 속 미주가 나이 들었다기보다 더 성숙한 얼굴로 활짝 꽃이 핀 것처럼 웃고 있었다. 재민은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자각하고는 서서히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보았다.
곰팡이 냄새 같기도 하고, 비릿한 바다 내음인 것 같기도 한 짭조름한 향이 가득한 붉은 조명이 켜진 넓은 공간.
어딘가의 창고 같은 곳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시간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제 잠든 이후로 하루가 지난 건지, 이틀이 지난 건지. 컹컹-! 또다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가 위협적이었다.
저를 향한 너무나도 강한 조명이 쏘다시피 빛을 뿜어내고 있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누군지 분명히 알았다. 알 수 없는 시공간 속에 놓인 재민은 이곳에 지금 함께 있는 부부를 알아보았다.
여전히 날씬하고 아름다운 미주가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높은 하이힐을 신은 채 서 있었다. 그 뒤에는 쓰리 버튼 양복을 입은, 여전히 멋진 포스에 중후함까지 더해진 차현 그룹 회장님이 커다란 책상 위에 반쯤 걸터앉아 있었다.
연호가 앉아 있는 책상 위에 술잔 같은 것도 보였고, 술병 비슷한 게 놓여 있었다. 그 뒤로 사람이 더 있는 게 보였지만 눈이 부신 탓에 제대로 그들을 볼 순 없었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지금 이곳에서 복수라는 이름으로 숨 쉬고 있을 사람들.
“얼굴 보니 참, 반가워, 오빠. 잘 지냈던 것 같아서 다행인 것 같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미주가 또각- 소리를 내며 저를 비추던 라이트 조명을 껐다. 재민은 눈이 부셔서 힘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서 있는 미주를 향해 고개를 들고 말했다.
“머리 잘랐네? 단발도 잘 어울린다, 미주야.”
“그렇지? 너무 오래 머리를 길러서 좀 지겨워져 싹둑- 잘랐는데 다들 괜찮다고 하더라.”
짧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해사하게 웃고 있는 미주를 보며 재민이 물었다.
“여전히 우리 미주는 예쁘구나. 그런데 어째 넌 늙지도 않네? 너무 예전 그대로라 무서워.”
“우린 돈이 많잖아. 뭐, 피부과에 돈 쏟아부으니 젊음도 돈으로 살 수 있더라고. 근데, 오빠. 나 아직 젊어, 왜 그래?”
저를 장난스럽게 흘겨보는 미주가 정말 예전 그대로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하니 되려 그녀가 두려웠다. 차라리 눈을 떴을 때 증오하다 못해 분노로 가득 찬 원망으로 저를 보고 있었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 텐데.
재민은 미주와 더는 의미 없는 말장난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직설적으로 물었다.
“좋아, 미주야. 그래서 어떻게 날 죽일 건데?”
실오라기 하나 없이 나체로 묶여 있는 저를 미주가 지그시 내려다보더니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장 내 손에 죽고 싶겠지만, 바로는 못 죽어. 그간 기다린 세월이 얼만데. 우리도 보상받아야지.”
“있잖아. 난 죗값을 치렀어. 감옥에서 10년 동안 성실히 노역하며 기도하고 내 죄를 빌었더니 하느님이 날 용서해 줬어.”
“아, 하느님이 용서해 준 걸 몰랐네.”
편안한 표정으로 회개했다 말하는 재민을 보며 미주는 계속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그런데 하느님은 널 용서했어도 우리는 널 용서 못 했는데 어떡하지?”
가엽다는 듯 재민의 얼굴을 사선으로 붉은빛 손톱을 세워 살짝 긁은 미주가 마지막에 톡톡- 손가락으로 뺨을 두드렸다.
“너흰 자격이 없는 거야. 나는 법적으로도 처벌을 받았고, 신에게도 용서받았어.”
“자격이라. 재밌네, 오빠.”
미주는 자세를 낮춰 재민과 시선의 높이를 함께하며 물었다.
“출소하고 5년 동안 설마 우리가 널 잊었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교도소에서의 10년과 부산에서의 5년. 합치면 총 15년이라는 기간.
15년.
제가 비밀을 숨겼던 시간도 15년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재민은 갑자기 지금이 몇 월인지 떠올라 놀랍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희주 형 죽은 날……!”
“역시 변호사님이라 똑똑해. 맞아. 오늘은 우리 오빠가 너 때문에 죽은 날이지.”
잊고 있었던 제 손으로 첫 죄를 지은 날을 미주는, 그들은 절대로 잊지 않고 있었다.
“기다렸구나, 15년이 되기를. 내가 너희를 기만했던 그 시간을, 똑같이 갚아 주려고…….”
한순간도 정재민을 잊지 않고 살았다.
그가 항소하지 않고 1심에서 받은 구형을 인정할 때부터 미주는 결심했다. 참고 인내하며 기다린 뒤에 재민이 했던 짓, 그대로 돌려주겠노라고.
일부러 손을 써 모범수로 만들어 줬다. 너무 티가 나게 감형받으면 의심을 살 수 있다 여겨 조금씩 형을 줄여 줬다.
혹시나 견디지 못해 교도소 안에서 자살이라도 할까 봐, 일부러 사람을 재민 옆에 붙였다. 그와 같은 방을 썼던 지난 10년간의 범죄자들은 모두 연호의 사주를 받고 들어가 재민을 감시하던 이들이었다.
“오빠, 그 친구 기억나? 상습 필로폰 투약으로 2년 동안 같은 방 썼던 친구…….”
“설마.”
“진짜 뽕쟁이는 아니었어. 다만… 약에 대해서 잘 알기는 했지. 이것저것 티 안 나게 믹스도 잘하고. 진우 오빠랑 연결된 마카오 쪽 사람들한테 배웠으니깐 확실히 일은 잘해.”
턱짓을 하는 미주의 시선을 따라 재민은 고개를 왼쪽으로 숙였다. 팔뚝에 주사를 놨는지 몇 군데 찔린 자국이 선명했다.
자고 있던 제가 어떻게 어딘지 모를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아 미주에게 소리쳤다.
“씨발, 나한테 뭔 짓 한 거야?”
욕을 하기 무섭게 뒤에 서 있던 덩치 하나가 튀어나와 재민의 뺨을 후려쳤다.
“어디서 감히 사장님한테!”
제가 아는 목소리였다.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얼굴 전체가 얼얼해지면서 입안에 피 맛이 돌았지만, 재민은 고개를 들어 인사를 건넸다.
“이야, 박도균. 오랜만이네.”
“상무님, 괜찮아요. 욕이야 할 수 있지. 내가 씨발년인 거 어디 하루 이틀인가? 그치, 회장님?”
“글쎄, 씨발년은 애매하지만 썅년은 확실한 거 같은데.”
“아, 재수 없어. 봐 봐, 오빠. 차연호 말본새 여전하지?”
부부의 티키타카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질 때였다. 도균이, 상무라니. 진우가 죽어도 미주에게 충성을 다한 대가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재민은 대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출세했네. 우리 박 과장이 상무가 다 되고.”
“아, 우리 스텔라에서 정말 고생 많으셨어, 박 상무님. 일 못 하는 여사장 옆에서 보필한다고 속 많이 썩었을 건데 내가 이렇게라도 보상해 드려야지.”
미주의 말에 도균이 피식- 웃더니 손을 탁탁 털어 내며 제 앞에 섰다.
“아, 뭔 짓 했는지 물었지?”
“…….”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아직 아무것도 시작한 게 없으니깐.”
미주가 손가락을 탁- 하고 튕기자 구석에서 느긋하게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전무님, 드디어 재미 보시겠네요. 기다렸던 시간만큼 천천히 즐기세요.”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한 남자에게 미주가 기쁜 듯이 말했다. 그리고 연호에게 다가가 보란 듯이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연호 역시 재민을 뚫어지게 보면서 미주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느긋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저놈의 눈을 제가 직접 찔렀었다.
“요한… 아직 살아 있었네.”
“덕분에 말입니다, 정 실장님.”
재민의 몸이 조금씩 두려움으로 떨리기 시작할 때 별안간 하이 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샴페인 드실 분?”
새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미주가 아니었다.
“나 한 잔만 줘요.”
이 목소리가 미주였다. 미주가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에게 대답했다. 서서히 미주와 연호 쪽으로 다가온 여자가 책상 위에 놓인 샴페인을 집더니 조금 인상을 쓰며 뚜껑을 땄다.
“그래도 회장님부터 한 잔 드리고, 상무님, 전무님, 그리고 부사장님.”
도균이 상무고 요한이 전무면 자동적으로 남은 이는 부사장일 테다.
여전히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며 재민이 아마도 카지노 부사장이 되었을 정훈을 볼 때였다.
조금 야한 듯한 옷을 입은 여자가 천박한 몸짓으로 남자들에게 술을 따랐다. 하지만 미주는 전혀 개의치 않고 교태 부리는 눈웃음과 콧소리를 내는 그녀의 행동을 웃으면서 보고 있었다.
“그리고 제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윤미주 사장님, 한 잔 받으시고.”
비쥬를 하듯 미주의 뺨에 쪽 소리를 낸 여자가 몸을 틀어서 재민 쪽으로 걸어왔다.
“전무님, 미안한데… 저부터 재미 좀 볼게요.”
“뭐, 예나 씨니깐 양보하는 거예요.”
“오케이. 살라맛뽀(필리핀어로 고맙다는 뜻).”
요한에게 잔을 건넨 여자가 저를 보고 웃었지만, 재민은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지금 이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는 잘 아는 여자였다. 그들의 잔을 모두 채워 준 여자가 제 손에 든 샴페인을 홀짝이면서 다가왔다.
“자기야, 잘 지냈어?”
“…내가 졌다, 미주야.”
어이가 없는 듯 패배를 인정하는 재민이 고개까지 끄덕이면서 소리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때 저와 침대에서 뒹굴었던 여자 친구, 아니 예나가 입을 열었다.
“자기야, 아니 재민 씨. 그거 알아? 나 옛날에 우리 윤 사장님 일 도울 때 사실은 서 전무님 꽤 마음에 들었었거든. 되게 남자답고 터프한 게 꼴려서 만날 일 있을 때마다 유혹해도 전혀 안 넘어왔었거든.”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신 예나가 혀로 입술을 쓸면서 말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먼저 하겠다고 했어. 우리 윤 사장님은 날 몇 년간 말렸지만… 자기가 얼마나 쉬운 놈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서 전무님은 몇 년을 내가 들이대도 눈 하나 깜짝 안 했는데 넌 너무 쉬워서 웃겼어.”
“역시 창녀일 줄 알았어. 어쩐지 하는 짓이 음탕한 게 그럴 줄 알았어.”
재민이 예나를 음탕한 창부라 조롱해 보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천천히 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들고 있던 잔을 땅에 내려놓은 채 재민의 허벅지를 어루만지면서 야하게 속삭였다.
“약 없이는 좆도 못 세우잖아. 응?”
“…암캐 같은 년이.”
“자기야, 이제야 말하지만 자기랑 섹스하는 거, 정말 재미없었어.”
“…….”
“흐물거리는 좆이 거기를 왔다 갔다 해도, 감흥이 없더라. 느끼는 척한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자기가 알면 나한테 암캐라고 말 못 할 건데.”
예나는 방긋 웃으면서 더 깊게 손을 뻗었다. 재민은 당혹스러운 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안 그래도 저를 보는 열 개의 시선 속에서 혼자만 벌거벗고 있는 것도 수치스러운데 말이다. 다리 사이로 들어온 여자의 손이 노골적으로 페니스를 만져 대자 점점 얼굴이 붉어졌다.
“아, 씨발! 읍!”
욕지거리를 내뱉을 때, 도균이 기다렸다는 듯 입에 보통 SM 플레이를 할 때 많이 쓰는 구속구를 물렸다. 덕분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어도 더는 그럴 수 없게 되자 예나의 행동이 점점 더 대담해졌다.
음낭을 주물럭거렸다가 페니스를 잡고 흔들기도 하지만 당연히 포르노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상황에서 그것이 반응할 리 없었다. 정상적인 남자라 해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상황에서 몇 번 만졌다고 쉽게 발기하겠는가.
재민은 악을 쓰면서 모멸적인 수치를 주는 그들에게 저항해 보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이거 봐요, 내 말 맞잖아! 약 없이는 안 서는 고자 새끼 맞죠?”
“그렇죠? 15년 전에도 내가 몇 마디 했더니 팍- 죽더라고.”
“아, 그래요, 사장님? 에휴, 불쌍해라. 지금은 몰라도 15년 전이면 젊을 땐데. 그래서 변태가 된 건가.”
“아니, 고자라서 변태가 된 것 같더라고요, 예나 씨.”
여자들의 대화에 남자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를 조리돌리는 연놈들에게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구속구를 문 탓에 침이 흐르고 턱이 덜덜덜 떨려 왔다. 지난날 제가 이런 식으로 여자들을 괴롭혔던 업보가 그대로 돌아오다니.
아니다. 미주를 묶어 두고 그녀의 몸에 몹쓸 짓을 하면서 능욕한 대가를 지금 이렇게 되돌려 받고 있었다.
“팔 아프게 손으로 해 주면 뭐 해? 세우지 못하니깐 싸지도 못하지.”
한참이나 저를 희롱하던 예나가 더는 재미없다는 듯 손을 털면서 옆에 둔 잔을 들고는 몸을 일으켰다.
“고자 새끼 진짜 고자로 만들면 우리 서 전무님 억울한 거 좀 풀릴까?”
“으? ……으으?”
“마지막으로 한번 싸게 해 주고 싶었는데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 날 원망하지 말아요, 재민 씨.”
호로록- 샴페인을 소리 나게 마시며 예나가 재민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지고 있을 때였다. 연호가 입을 열고 누군가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박 상무님부터 하시죠.”
그러자 제 옆에 서 있던 도균이 너무나도 오래 기다렸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회장님. 지혈제를 준비해 뒀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혈제……, 설마!
재민이 있는 힘껏 발악해 보지만 일은 순식간이었다.
앞으로 다가온 구릿빛 얼굴의 도균이 제 무릎을 벌리더니 페니스를 우악스럽게 쥐어 잡았다. 그러고는 거리낌 없는 동작으로 칼을 꺼내 흉측한 물건을 잘라 내기 시작했다.
“읍! 읍! 아악! …읍!”
흡사 짐승 멱따는 소리가 공간 안에 울려 퍼졌지만, 누구 하나 귀를 막는 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 벌어지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도륙의 현장을 눈을 떼지 않고 보고 있었다. 파티를 즐기듯, 저들끼리 샴페인 잔을 부딪치면서 우아하게 자리를 지켰다.
의식이 있는 채로 거세를 당하고 있는 재민이 감전이라도 된 양 고통에 못 이겨 푸드득거렸다.
‘날 죽이지 않고 산 채로 고문을 할 생각이구나.’
거의 기절 직전인 재민이 숨을 헐떡이며 비명을 질러 댈 때 예나가 다가와 제 팔뚝을 잡더니 무언가를 찔러 댔다.
‘아, 뭐지? 주사약? 대체…….’
아래에서 피가 쏟아지니 현기증이 돌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으! 읍! 아읍! 읍… 흡!”
아프다고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생살을 뜯어내는 상상 초월의 고통 속에서 재민은 발광하고 있었다.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묶인 의자째로 들썩이다가 앞으로 고꾸라지기까지 했지만, 그 누구도 동정의 시선으로 저를 보지 않았다.
머리를 바닥에 처박듯 묶인 채 꿈틀꿈틀할 때,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뒤집어진 미주의 얼굴이 보였다. 씨익- 하고 웃는 그녀가 마녀처럼 보인다 여길 때 완전히 눈앞이 암전되었다.
* * *
“으…, 으…….”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눈앞이 밝아졌다. 정확히는 점점 잠 깨듯 정신이 돌아오면서 자연스럽게 눈꺼풀이 떠졌다.
제가 잡혀 온 공간 안에는 저 말고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간헐적으로 들리는 컹컹-거리는, 이제는 그게 개인지 다른 짐승인지 모를 소리만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들렸다.
“으-”
들쑤시다 못해 아래가 빠질 것 같은 통증에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금니가 딱딱- 부딪치는 걸 보니 입에 물렸던 구속구를 뺐나 보다. 여전히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제 다리 사이로 본능적으로 시선이 향했다.
“하아… 하아… 흐으…, ……흐.”
혀가 굳은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와 조금 다르게 의자에 구속된 제 다리는 좀 더 넓게 벌어진 채 묶여 있었다.
그리고 있어야 할 제 신체 부위가 뿌리만 남기고는 피범벅이 된 모양으로 흉측하게 그 절단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흐으… 으…….”
욕이라도, 비명이라도 질러야 하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거세시킬 게 아니라 죽여 줬으면 고마웠을 텐데.
앞으로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재민을 덮쳐 오자, 오금이 저리고 뒷덜미가 뻐근할 정도로 두려웠다.
“흐흐… 흐흐…….”
그저 흐느낌 같은 소리만 내면서 패닉에 빠져 있을 때 다리뿐만이 아니라 제 팔도 처음과 다르게 묶였음을 알아챘다.
‘뒤로 결박한 게 아니라… 팔걸이에 팔을…….’
ㄴ 자로 고정된 팔에 꽂혀 있는 가느다란 튜브 관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수혈?”
힘겹게 고개를 드니 혈액 주머니가 붉은색 조명을 받으며 링거대에 걸려 있어 재민이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저을 때였다.
인기척을 들은 건지, CCTV라도 달아 제가 의식을 차리길 기다렸던 건지. 덜컹- 하고 문이 열리며 제가 아는 얼굴들이 들어왔다.
“역시, 생각보다 일찍 정신 차렸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바뀐 걸 보면 최소 하루나 이틀이 지났나 보다.
처음 봤을 때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던 미주가 베이지 톤의 투피스 바지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멋진 행커치프를 꽂은 스트라이프 슈트를 입고 있는 연호가 미주의 옆에서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고.
제 여자 친구인 척했던 창녀는 없었고, 분에 넘치는 상무라는 직책을 가진 도균도 지금은 안 보였다.
제가 정신을 잃었던 동안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과다 출혈로 죽기라도 할까 봐 너무 친절히 혈액 팩까지 달아 아직 저를 살려 두고 있다는 것.
그 말은 아직 죽이지 못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니 재민이 바싹 마른 입술로 무슨 말을 하려 달싹일 때, 미주가 앞에 다가왔다.
“우리 오빠, 물 좀 마셔야겠다.”
생수병을 손에 든 미주가 따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밀봉된 뚜껑을 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저는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미주야, 손이라도 풀어 줘야 마시지.”
“아니, 이렇게도 마실 수 있으니깐 노력을 해 봐, 재민 오빠.”
저를 놀리듯 생수병을 기울인 채 최대한 한 방울씩 떨어뜨리려고 애쓰는 미주의 예쁜 얼굴이 인상을 쓰면서 집중하고 있었다.
“혀를 내밀어서 할짝거려 봐. 짐승처럼.”
“……썅년이.”
욕을 내뱉는 순간 다시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별이 반짝였다. 이번에는 요한이 재민의 뺨을 후려갈기면서 노엽다는 듯 말했다.
“벌레만도 못한 새끼가 어디서 감히…….”
“아이 참, 전무님. 릴랙스, 릴랙스, 응? 나이 들어도 이렇게 단정하게 잘생긴 얼굴 흔치 않거든요. 그러니 자꾸 때리면 쓰나?”
“뭐야, 그래서 말리는 거예요?”
“네, 이왕이면 난 잘생긴 게 좋아. 남자는 잘생기고 봐야지. 아니면 데리고 노는 맛이 없잖아요.”
미주의 투정에 연호가 알 만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미주야, 설마 나도 잘생겨서 데리고 놀아 주는 거였어?”
“아, 요한 씨. 차연호가 눈치챘어요. 어쩌지?”
“미주 씨, 회장님이 스스로를 잘생겼다 말한 게 포인트인 거 아시죠?”
먹잇감을 두고 어쩜 저렇게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재민은 저들의 대화에 너무나도 기시감이 들었기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이왕이면 나는 예쁜 게 좋으니까.’
오래전 했던 말을 미주가 한 글자도 잊지 않고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육체에 고통을 가해 저를 죽이는 게 아니라, 서서히 말려 정신이 완전히 무너지길 바라는 듯.
제가 그걸 바라고 미주를 불러내 옷을 벗기지 않았는가. 하지만 몸은 희롱당했을지언정 미주의 마음은 티끌도 흠집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심리전에 말려, 사실상 저는 패배했다.
“때려서 미안. 예쁜 말 쓰면 안 때릴 테니깐 알아서 잘해.”
“…….”
“아, 전무님. 손수건 좀 주세요.”
엉망이 된 재민의 얼굴을 유심히 보는 미주에게 요한이 낡은 손수건을 품에서 꺼내 건넸다. 미주는 손수건을 생수에 적신 후 재민의 얼굴을 닦아 내면서 나긋하게 말했다.
“역시 이리 가까이에서 보니깐 오빤 안경 안 쓰는 게 훨씬 나아. 그 안경 때문에 이 잘생긴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니.”
“…….”
“아, 아니다. 그 안경이 더럽고 추악한 널 숨기는 수단이었겠지. 오빠는 안경 너머 세상을 어떻게 볼까 늘 궁금했는데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아서 조금 슬프긴 해.”
제 얼굴을 다 닦아 낸 미주가 손수건을 요한에게 건네고는 다시 생수병을 기울여 한 방울씩 떨어뜨리면서 물었다.
“줄 때 받아 마셔. 개만도 못한 놈아.”
목이 너무 말랐다. 사실은 타는 듯한 갈증에 침조차 말라붙은 기분이었다. 더는 자존심을 세울 힘도 없었고, 어차피 저는 이러나저러나 죽을 운명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미주가 선심 쓰듯 베푸는 것을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재민이 허겁지겁 꿀꺽거리자, 연호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울렸다.
“바닥에 부어 놓고 핥게 해야 했는데, 역시 넌 너무 착해.”
이토록 사악하게 구는 여자가 착하다고 말하는 남자는 대체 얼마나 잔인한 짓을 하려고 하는 걸까? 생각해 보면 지금껏 미주가 전면에 나와 저를 괴롭히고 있었는데, 연호가 너무 조용했다.
마치 최후의 큰 수를 두고 자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하면서 기갈이 조금 해소될 때였다. 밖에서 또 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릿아릿한 통증이 또다시 잘린 중심에서 온몸으로 퍼져 나가 고통스러움에 몸을 뒤틀었지만 저는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겨우 적신 입술을 혀로 쓸면서 조금이라도 제 몸에 수분을 공급해 보려 안간힘을 썼다.
그때 미주가 손을 거둬들이면서 아직 반절이나 생수병에 남은 물을 바닥에 쏟으며 웃었다.
“너한텐 물도 과분해.”
“…그럼, 왜 줬어?”
명랑한 목소리의 미주가 제 앞날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재밌잖아. 정재민 네가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꼴이 우스워서 감상 좀 하려고 그랬지.”
“이… 좆 같은 년이……!”
“내가 말조심하라고 했지? 응?”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품에서 작고 반짝이는 걸 꺼낸 요한이 그대로 재민의 얼굴을 향해 그것을 깊게 찔렀다.
“으으으아아아아아!”
메스를 쥔 요한이 재민의 오른쪽 눈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창고에는 컹컹거리는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사람 비명 소리가 끔찍하게 울려 퍼졌다.
미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볼륨을 최대한 올렸다.
“헨델?”
“응, 울게 하소서. 요한 씨가 예전에 진우 오빠 위로해 준다고 들려줬었대요.”
미주의 핸드폰을 힐끔 본 연호가 팔짱을 끼고선 낭랑하게 울리는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빼낸 날카로운 블레이드가 붉은 조명을 받아 번쩍거렸다. 요한이 재민을 고고하게 내려다보면서 일갈했다.
“오른쪽은 내 눈.”
“으으으…… 아아아!”
그리고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다시 피범벅인 메스가 재민의 얼굴로 내려꽂혔다.
“왼쪽은 전무님 복수.”
“으아아악……으으아악!”
이래서 미리 수혈시키고 있었던 걸까? 시뻘겋게 변한 눈앞에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뺨을 타고 턱까지 흘러넘치는 피가 가슴까지 적시는 게 느껴졌다.
불에 덴 듯 작열감이 쏟아지는 재민의 두 눈덩이 사이에서 요한이 만족스러운 듯 반짝이는 금속을 빼내고는 저 멀리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메스가 경쾌하게 타당-거리는 소리를 냈다.
재민은 다시 가물거리는 의식을 정신력으로 붙잡은 채 흐느끼며 소리쳤다.
“미주야!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다!”
“…….”
“차연호! 그냥 죽여 줘. 제발… 미주야! 제발! 그냥 죽여 줘. 너희가 내리는 벌, 받을 테니 제발!”
클래식과 사람이 울부짖는 소리가 끔찍하게 섞이는 걸 들으며 미주와 연호는 태연하게 재민의 피 울음에 답해 주었다.
“이제 시작이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 어디 한번 배신의 결말을 몸소 느껴 봐.”
“…으흐흐, 으으… 차라리 죽여… 줘.”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 재민은 발광을 넘어서 오히려 입을 다물고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덜덜 떨었다. 신경이 손상된 듯 온 얼굴이 찌릿찌릿하다 못해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 것이다. 악마들이 저를 고문하고 있다고 여기며 또다시 귀가 먹먹해지면서 정신을 잃을 때였다.
“정재민, 네가 미주한테 했던 짓, 그 이상으로 당하는 걸 봐야 내 울분이 풀릴 것 같으니…….”
마지막에 꽂히는 연호의 목소리가 계속 메아리처럼 울리며 핏빛 어둠 속에서 재민이 허우적대고 있었다.
낭떠러지에 떨어진 육신이 바닥에 닿아 산산조각 나는 느낌 속에서 다시 온몸이 재조립되는 듯했다. 횃불에 눈을 지진 듯 작열감이 눈앞에서 저를 태우고 있었지만, 아직 제가 죽지 못했음을 무의식중에도 알았다.
컹컹-!
사실상 혼수상태에 빠져 버린 제 귓가에 여전히 들리는 개 짖는 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질 때. 분명히 어떤 손길이 제 몸과 얼굴을 만진다 알 수 있어 그들이 저를 살려내고 있음을 꿈속에서도 직감했다.
그렇게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강을 건너지 못한 재민이 빨려들듯 돌아온 현실에서 몸을 움찔거렸다.
“아, 의식을 되찾은 것 같은데… 사장님께 연락드려야겠어.”
여자 친구인 척했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눈은 떠지지 않았다.
등에 닿는 푹신한 느낌을 보니 지금 저는 누워 있는 듯했지만 다시금 페이드아웃되는 화면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상황에서 저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떠드는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아마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듯했지만 이젠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보이지도 않아 죄책감의 심연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였다.
“…오빠, 내 목소리 들려?”
미주의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죽은 척해야 함이 옳았지만, 저들을 속여 넘길 재간은 없었다. 차라리 죽여 달라 호소해 마음을 움직이는 게 낫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찌릿거리는 죽은 신경의 감각만 느껴지는 검붉은 세상 앞에서 천천히 입을 열어 그녀에게 애원했다.
“…죽여…….”
“안 돼. 아직은 너무 일러.”
두 눈을 잃은 재민이라 지금 고개를 저으며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 미주를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죽여 달라’, 중얼거렸다.
연호의 목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고, 도균이나 요한이 대답해 줄 때도 있었다. 한결같은 그들의 대답은 언제나 아직은 안 된다, 였다.
절망보다 더한 무간지옥 속에서 재민이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정신을 잃고 다시 회복했을 때 등에 아무것도 닿는 게 없어, 의아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컹컹컹-!
이번에는 굉장히 가까운 곳에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사나운 개 짖는 소리가 재민의 귀에 때려 박혔다.
뭔가 딱딱한 곳에 배를 대고 엎드린 채 등 뒤로 팔이 묶여 있음을 알았을 때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오빠, 기억나? 이 책상… 귀퉁이에 못 쳤던 거 설마 다 잊은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처음 이곳에 끌려왔던 날, 연호가 책상 비슷한 곳에 걸터앉아 있었던 게 떠올랐다.
“미주야…….”
처음부터 진우의 책상을 여기로 가져다 놓고는 얼마나 인고하며 지금 이 순간이 오길 기다렸던 걸까?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심정으로 재민이 겨우 입술을 달싹이면서 대답했다.
“…기억나지. 얼마나 네 몸이 예뻤는데.”
어차피 이판사판이었고, 되려 저들을 자극해 빠른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 얄팍한 수를 이미 안다는 듯 깔깔-거린 미주가 이를 꽉 물고 제게 말했다.
“그래, 기억해 줘서 고마워.”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역시 미주 혼자 여기에 있는 게 아니었다. 연호가 손가락을 튕기며 지시하자 얼굴을 대고 있는 책상에 드르르- 하는 진동이 울려 몸이 떨렸다.
제가 준비했던 망치와 못이 아니라, 전동 드릴이라니. 오히려 상상이 무섭게 다가와 재민은 서서히 공포에 잠식되고 있었다.
그들은 제가 했던 행동 그대로 등 뒤로 결박된 손목을 풀더니 Y 자 모양으로 저를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고.
“크아아아아아!”
드르르륵-!
또다시 울려 퍼지는 괴이한 비명과 사람의 손등에 그대로 못을 박아 넣는 소리. 양손이 못에 뚫린 채 책상에 박혀 버리자 뜨거운 것이 손에 흥건해지고 있었다.
“으으으! 아아아아아아!”
컹컹-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릴 때, 연호가 미주에게 부드럽게 전하는 말이 재민의 귀에 들렸다.
“당신은 나가 있어. 이거만큼은 안 보는 게 좋아.”
“…하긴, 나라도 비위가 그리 강하지 않으니깐. 이거만큼은 양보할 테니 당신 복수 실컷 해요.”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멀어지면서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조금 둔탁한 구둣발 소리가 지금 여기에 몇 명의 남자가 있는지 알려 줬다.
연호는 드디어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벌거벗은 채 진우의 책상에 엎드려 있는 재민 앞에 섰다.
“정재민. 난 네가 미주한테 한 짓, 그대로 돌려주지 않을 거야.”
재민의 짧은 머리채를 잡은 연호가 두 눈이 짓이겨진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면서 얼굴에 침을 뱉었다.
“몇 배는 더 이자 쳐서 갚아 줘야지. 감히 내 여자를 능멸하다니.”
지난 15년간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았다 말할 정도로 연호는 매일 밤, 재민의 뼈를 갈아 마시는 상상을 하면서 때가 되길 기다렸다.
“차연호, 미안하다. 난…….”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사라져, 버둥거리며 뒤늦은 사죄를 해 보지만 말이다. 저를 죽일 거면 교도소에서부터 진작에 수천 번도 죽이고 남았을 부와 권력을 동시에 가진 남자가 잔인한 미소를 띤 채 누군가에게 지시했다.
“준비됐지?”
“네.”
무언가를 꽉 잡은 정훈이 대답하자 연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재민, 오늘을 위해 특별히 모신 분들이 계셔.”
“…대체 무슨 짓을!”
“죽은 서 전무랑 각별했던 마카오의 알렉스가 제일 처음 소스를 준 건데 솔직히 나도 놀라긴 했어.”
“……뭐?”
“역시 중국 쪽 애들 잔인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깐?”
컹컹- 짖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창고 안을 채울 때 연호가 손수건을 품에서 꺼내 제 입을 가리면서 말했다.
“그냥, 이제 내 말이 뭔지 알게 될 테니 직접 느껴 봐.”
연호가 눈짓하자, 목줄을 쥐고 있던 정훈이 손을 놓았다.
“즐거운 시간 보내. 쌓였던 거 마음껏 즐겨.”
미주의 뒤를 이어 연호가, 다음으로 정훈이 재민을 붙잡아 놓은 곳을 벗어났다. 골수에 복수를 새긴 연호가 제 몸에 뭔 짓을 했는지 정신이 온전치 않았으니 알 수 없었다.
“…차연호, 너.”
그르렁-거리는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의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렸다.
보이지 않아도 제 몸집만 한 짐승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게 온몸으로 느껴져 힘껏 팔을 잡아 빼 보지만.
“…아아! 하아! 하지 마! 안 돼! 제발……!”
점차 거친 숨을 쉬며 재민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