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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그리고 다시, 부산 (51/53)

49. 그리고 다시, 부산

* * *

날씨가 좋을 것 같았다.

새벽이니 조금 춥긴 하지만 그래도 겨울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서서히 밝아져 오는 세상을 보면서 재민은 발걸음을 옮기다 중얼거렸다.

“늘 보던 하늘이라 해도, 자유의 몸으로 보니 좀 새롭기도 하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다시 나온 세상에는 변한 것도 많았지만 그대로인 것도 많았다.

“모쪼록 잘 지내세요, 정 변호사님.”

“네, 그동안 잘 살펴 주셔서 편히 지냈습니다.”

교도소로 들어올 때 입었던 옷과 지녔던 물건을 돌려주는 교도관이 아쉽다는 듯 인사를 건넸다. 일명 6번 방 변호사님으로 통했던 재민은 이제는 유행이 지나다 못해 유물이 되었을 제 오래된 지갑을 열어 보았다.

유효 기간이 끝난 신용카드 여러 개와 현금. 신분증만 있으면 어디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재민은 차가운 새벽 공기를 폐부까지 마시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교도소 앞에는 많지는 않지만 정말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두부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당연하지만 저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가족은 너무 오래전에 죽은 어머니와 평생 도박꾼으로 살았던 아버지 두 사람뿐이었고 가족처럼 여겼던 이들은 오래전에 제가 죽이거나 배신했다.

재민은 누군가의 가족이나 친구가 죄지은 이가 출소하길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제 갈 길을 갔다.

“간간이 운동해 두길 잘했어.”

조금 걷고 싶어져 한참을 길을 따라 쭈욱- 걸었다.

제가 수감되었던 곳은 서울에 사는 동안 몇 번 가지 않았던 곳에 위치해 있어 지금 발이 닿는 대로 걷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냥 정처 없이 걷고 싶었던 오랜 소망대로 해가 높이 뜰 때까지 그저 걷고만 있었다.

“이제 출근 시간이구나. 차가 많아졌어.”

미세 먼지가 극성이라고 해도 오랜만에 보는 쾌청한 하늘에 재민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다가 드디어 발을 멈췄다.

“어디로 가십니까?”

“서울역으로 가 주세요.”

택시를 잡아탄 재민은 말없이 제가 모르는 서울을 눈에 담았다. 행색이 어딘지 모르게 남루해 보였는지 자꾸만 택시 기사가 룸미러로 저를 힐끔 보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출근 시간이라 그런지 차가 많이 막혔다. 한 시간이 조금 넘어서야 택시에서 내린 재민은 10년 동안 오른 택시비에 속으로 조금 놀라면서 서울역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부산행 KTX 특실 표를 끊었다. 김포로 가서 비행기를 타도 괜찮았지만, 일부러 이곳으로 왔다. 혹시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마음이 바뀌어 대전이나 대구에서 내려도 괜찮으니 흔들리는 차창을 넘어 세상을 보고 싶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뭐라도 좀 먹고, 옷이라도 좀 사긴 해야겠어.”

중년이 된 여전히 반듯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는 서울역 근처 은행으로 향했다. 한국에 일부 남겨 둔 계좌를 10년 만에 열고 한동안 어디에서든 체류할 수 있을 정도만 지갑을 두둑하게 채웠다.

그리고 계획대로 무언가를 먹고, 원래는 명품이었지만 이젠 촌스러운 스타일이 된 제 옷을 버리고는 나이에 맞는 기성복을 적당히 사서 입었다. 물론 돈이 없는 게 아니니 싸구려를 입은 건 아니었고 서울역에 연결된 쇼핑몰을 살펴서 그중 가장 고가로 골라 저를 치장해 봤다.

“핸드폰이 없으니 좀 불편하긴 해.”

부산역에 내린 재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택시를 잡았다.

“영락 공원으로 가 주세요.”

부산역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에 있는, 또 다른 부산의 끝에 위치한 납골당.

10년 전, 화장한 진우를 이곳으로 모실 때 온 뒤로 처음이었다. 재민은 천천히 기억 속 두 남자가 안식을 취하고 있는 곳으로 걸어가 그들의 이름 앞에 섰다.

[윤희주] [서진우]

꾸준히 누군가가 두 사람을 잊지 않고 돌보고 있는지 자잘하게 꾸며진 걸 보며 재민은 피식- 웃었다.

“담배라면 질색을 하던 미주가 희주 형이랑 진우 형한테 아예 담배를 한 갑씩 넣어 놨네요.”

희주에게는 이제는 정말 추억 속 물건이 되어 구하기도 힘든 디스 담배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진우가 즐겨 피우던 말보로 레드가 있었고.

“형, 나는 교도소에 들어가니 자동으로 금연이 돼서 이제는 진짜 완전히 담배 끊었어요.”

재민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우두커니 두 남자가 영면에 든 걸 부럽다는 듯 보았다. 그러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납골당을 빠져나온 재민은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바다라도 보고 싶어 차현 그룹에서 일했던 시절 즐겨 갔던 해운대 백사장이 보이는 호텔에 체크인했다.

“일단 뜨거운 물에 몸을 좀 담그고, 씻자.”

욕조 가득 물을 채운 재민이 감격한 듯 중얼거렸다.

“씨발, 대체 얼마 만이지? 이렇게 향이 좋은 걸 써 보고.”

몸이 노곤해질 때까지 몸을 데운 재민이 머리를 말리고 습관처럼 룸서비스를 시켰다. 간단히 배를 채울 수 있는 먹을거리와 제가 좋아했던 위스키를 시키고 해가 져 이제는 검게 보이는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을 건데. 아직인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재민의 말투.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저를 찾거나 찾아오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조금은 호사스러운 호텔 생활을 만끽하며 재민은 침대에 누워 10년 전 일을 떠올렸다.

* * *

김 기사가 경찰에 자수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주변 정리를 거의 끝낸 상태였다.

미주의 몸을 유린했던 이사회 날. 불과 30분 전까지 벌거벗고 다리를 벌린 채 제게 당하던 여자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덕에 저는 이제 나락으로 떨어질 준비를 해야만 했고, 각오했던 끝이 이제 곧 오리라 믿었다. 처음부터 이기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 아니었고 목표한 바를 거의 다 이루었기에 후회는 없었다.

죽은 진우를 욕되게 했으며, 미주의 몸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았다. 거기에 미주는 연호의 아내였으니 제가 되고 싶었던 남자의 소중한 걸 망가뜨렸다 생각했지만, 의외로 부부는 견고해 보였다.

‘설마 미주가 숨긴 걸까? 아니면 차연호도 알면서 모르는 척 쉬쉬하는 걸까?’

솔직히 구치소를 나온 차연호가 저를 제일 먼저 찾아와 목을 부러뜨릴 줄 알았는데.

한때 나름대로는 정말 좋아하고 사랑했던 여자의 몸까지 제 방식대로 유희했으니 그녀를 현재 차지한 남자가 저를 살려 둘 리 없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들은 진 회장에 이어 두 번째 살인은 차마 할 수 없었나 보다. 그들이 경찰에 넘겼을 김 기사가 진우를 죽인 배후로 저를 지목할 때 재민은 웃었다.

“바로 이게 내가 그렸던 판이었어. 너희가 날 이겼다고 생각할 그때가 바로 진정한 내 승리의 순간이지.”

저를 죽이지 못한다면 저들이 떠올렸을 최후의 수단.

김 기사를 경찰보다 먼저 찾아내 그를 회유한 다음, 제가 살인을 청부하고 지시 내렸다 경찰에 말하라 했겠지. 실제로 그리한 것도 맞으니 재민은 담담하게 저를 체포하러 온 형사들을 맞았다.

‘정재민 씨 맞으시죠?’

아직도 생생한 팔목에 채워지던 차가운 수갑의 냉기. 하필이면 제가 차지했던 진우의 사무실을 정리하지 못했을 때 구속 영장을 받아서 아쉽긴 했지만.

본사 건물이 발칵- 뒤집어지다 못해 차현 그룹의 이미지가 세 번째로 저로 인해 망가지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차현이 회복 불가로 망하길 소원했지만, 대기업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주식이 반 토막을 넘어서 거의 3분의 1 정도만 남기고 폭락했기에 아무리 차연호라고 한들 그 뒷감당이 쉽지 않을 테다.

‘저는 정의는 실현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은 서진우는 15년 전 부산에서 사람 셋을 죽인 살인마였습니다… 그 당시 남자 셋에게 윤간당했던 현재 스텔라 카지노 윤미주 사장을 위한 복수였다고는 하나… 너무나도 잔인한 그를 보며 저는 긴 시간 번민하며……’

미리 치밀하게 준비해 놓은 대로 마치 외운 듯 재민은 재판장에서 죽은 진우의 비밀과 연호가 그토록 숨기려고 했던 미주의 과거를 세상에 드러냈다.

사람을 죽이라 지시하긴 했지만 죽은 자는 죽어 마땅한 자였다.

받은 대로 돌려주기 위해서 그들이 진수오를 죽였을 때 내세운 명분 그대로 저를 변호했다. 혹시나 경찰이나 검찰에 진술할 때 부산에서 있었던 일로만 저를 변호하면 연호가 가진 영향력으로 아예 묻힐 수 있다 여겼다.

그래서 일부러 희대의 두 번째 차현 그룹 살인 사건을 취재차 방청객으로 들어온 황색 언론 기자들 앞에 자극적인 소스를 던져 주었다.

[차현 그룹 차연호 부회장의 아내이자 차현 호텔 산하 스텔라 카지노 윤미주 사장이 사실은 과거에 납치 강간을 당한 적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 이번 차현 그룹 임원 청부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재판에서 처음 밝혔는데 죽은 임원 역시 사람을 죽였다고… 그리하여 차현 관련주는 최소 몇 년은 상승 호재가 없을 것으로 사료되니 신중 투자 요망.]

덕분에 연호가 어찌어찌 틀어막긴 한 것 같았지만 이런 찌라시가 한참이나 돌았다고, 나중에 교도소 같은 방에 있었던 마약 사범에서 들었다.

‘13년 형을 선고합니다.’

판사가 선고를 내리는 순간 재민은 눈을 감았다.

13년.

생각보다는 길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법이 의외의 곳에서 관대하다 못해 거지 같은 것도 있지만, 죽은 진우가 사실은 극악무도한 살인범이었다는 것도 판결에 한몫했다.

재민은 형을 선고받고 법정을 빠져나올 때, 한 번도 빠짐 없이 재판에 출석해 방청석 제일 앞자리에 고고하게 앉아 있던 미주와 눈이 마주쳤다.

‘…….’

고요하게 가라앉은 바람 한 점 없는 적막 속 바다 같은 미주의 눈동자가 어쩐지 마음에 각인되었다.

‘미주야, 어때, 이긴 기분이? 어쩐지 진 것 같아서 좆 같을 것 같은데.’

분노도 체념도,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은 그녀의 눈빛이 가끔 떠올라 재민은 교도소에서 밤잠을 설치곤 했다.

수감 후 기본적으로 타고난 기질 자체가 성실했기에 모범수가 되어 형이 조금씩 감형되었다.

그래서 13년이 10년이 되었을 때 항소도 포기한 채 묵묵히 실형을 사는 저를 언론과 대중들은 안티 히어로처럼 떠들어 대곤 했던 것 같다.

살인범을 죽인 살인범.

꽤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는 드라마나 영화로 각색되어 나오기도 했던 것 같았다. 제가 복역했던 교도소에서 가장 범털이었던 저를 함부로 하지 못한 교도관들과 어울리며 친분을 쌓은 덕에 밖의 소식을 이따금 들었다.

* * *

“맞아, 드라마 제목이 뭐였더라? ‘그들이 있었다’였나?”

푹신한 호텔 침대에 누워 잃어버린 10년을 생각하던 재민의 머릿속에 떠오른 제목. 3년 전, 차현 그룹에 있었던 여러 비극과 사건을 픽션으로 잘 각색해 그해 가장 시청률이 높았다던 드라마를 죽기 전에 찾아 한번 시청해 볼까 싶었다.

재민이 핸드폰을 사지 않고 어디 거취를 정하지 않은 채 호텔 방에서 사는 이유. 오늘 하루가 어쩌면 남은 인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생각했기에 굳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너무 바빠서 내가 나온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미주야?”

솔직히 말해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순간 과장을 보태 연호와 미주가 킬러라도 고용해 저를 죽일 줄 알았다. 10년이 지났다고 해도, 아무리 징역을 살면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한들 그들이 결코 저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일주일을 지나 한 달이 다 되어 가도 제 신변은 놀랄 만큼 평화로웠다. 부산으로 내려온 지 열흘이 되었을 때 핸드폰과 노트북을 샀다. 그리고 다시 닷새가 지났을 때 은행과 증권가를 돌며 국내에 남겨 놓은 재산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10여 년간의 자유가 없을 것을 대비해 미리 준비해놨다. 덕분에 원래도 많았던 돈이 더 많이 불려 있었다. 굳이 외국으로 빼돌린 자산을 지금 당장 현금화하지 않더라도 집 한 채 살 돈은 충분히 마련되었으니깐.

“집을 하나 매수할까 하는데 좀 둘러볼 수 있을까요?”

호텔에서 생활한 지 20일을 넘겼을 때, 오래전부터 꿈꿔 왔던 일을 현실로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다.

꽤 예전부터 해운대 바다가 보이는 곳에 집을 마련하고 싶었다. 부산이 고향이라서 해운대에 대한 로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바다가 보이는 멋진 뷰를 가진 집과 작은 요트 한 채.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외제 차. 생각을 조금 바꿔 차라리 언제 죽을지 모르니 찰나의 부귀영화를 누려 보고자 함도 있었다.

“사람을 둘이나 죽인 대가가 이만하면 꽤 나쁘지도 않네.”

보안이 철저한 집 안에서 석양이 지는 광안대교를 보며 재민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 * *

벌써 출소한 지도 1년.

백수 모양으로 집에서 소소하게 주식 투자나 하며 지내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다.

“뉴스나 보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재민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해 정수기에서 시원한 물을 받아 마셨다. 거실로 발을 옮겨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움직이니 차연호의 외가인 언론사 소유의 종합 편성 채널에서는 메인 뉴스 시간을 앞두고 광고가 한창이었다.

[함께하는 차현, 우리 모두 내일을 향해….]

최근 반듯한 이미지를 가진 남자 배우를 전면에 내세운 차현 그룹 이미지 광고. 강산이 변할 동안 제가 망가뜨려 놓은 차현이 다시 바닥을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사실상 한 번 망했다 평가받았지만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재기에 성공한 차현 그룹은 이제 혁신의 아이콘이 되고 있었다.

중년이 되었다 한들 여전히 재벌 총수치고는 아주 젊은 차연호 차현 그룹 회장.

살인 스캔들 속에서 회장직에 오른 그가 제일 먼저 단행한 건 사재私財를 털어 부도 위기까지 갔던 차현을 심폐 소생 시키는 일이었다.

그 후 찬찬히 시간을 들여 진수오가 살아생전에 문어발처럼 확장했던 사업 중 내실이 없고 실속이 부족한 계열사를 하나씩 정리하며 알짜만 남겨 둔 채 모두 매각했다. 그리하여 한때는 몇 안 되는 계열사를 가진 재계의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였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래전 저와 진우가 함께 일했던 시절처럼 대학생들이 입사하고 싶은 기업 1위에 뽑힐 정도였다. 재민이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아도 TV나 라디오나 인터넷에서 보이는 소식.

[차현 바이오, 신약 개발에 성공…]

[차현 중공업, 해양 플랜트 사업에 박차를…]

[차현 건설, 올해의 아파트 브랜드 대상 수상…]

저와 진우가 사라진 차현은 오너 일가의 스캔들을 슬기롭게 해결한 케이스로 손꼽히기도 했다. 창업주의 3대가 물려받긴 했어도 재벌 3세라 일컬어지는 남자는 상당히 유능했기에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자리를 굳건히 다졌다.

“하긴, 이젠 나 같은 거 다 잊고 다시 원래의 왕족처럼, 귀족 같은 삶으로 돌아갔을지도 몰라.”

혹시나 하고 1년을 더 집 안에 칩거하다시피 하며 주변을 경계하고 지내니 출소한 지도 어느덧 2년이 되었다.

본디 재벌이긴 하나 연호와 미주의 삶이 배부르니 그 칼날과도 같은 복수심도 12년 동안 무뎌진 걸까?

하지만 끝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기에 다시 조심하며 1년을 보내고, 교도소를 나온 지 3년이 되었을 때 드디어 결심했다.

“미주야, 솔직히 말해서 이만큼 널 기다렸는데 날 찾지 않는 거 보면 너희도 그것밖에 안 되는 것 같아 우습기도 하다.”

집 근처에 조그맣게 변호사 사무실을 냈다. 10년의 세월과 바꾼 자유를 다시 버리고 3년간 집 안에서 구금되듯 살았으면 죗값은 이미 다 치르고도 남았다, 재민은 여겼다.

소소하게 동네 사람들의 법률 자문을 자처하며 다시 세상에 나오니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흘러갔다.

* * *

어느새 벌써 출소 후 고향으로 돌아온 지 5년이었다.

“변호사님, 들어가십시오.”

“네, 사무장님. 주말 잘 보내시고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금요일이라 얼마 전부터 교제를 시작한 여자 친구와 데이트가 있을 예정이었다.

목적지로 향하는 재민의 차가 잠시 빨간불에 멈춰 섰을 때, 벡스코에 위치한 어느 지점에 새롭게 짓고 있는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공사 중이라 부지 전체에 빙 둘러쳐진 펜스에 적힌 이름, 차현.

뉴스를 보니 부산에 생기는 차현 호텔에 외국인 전용 카지노도 함께 들어온다고 한다.

“서울 다음에는 제주도더니 이젠 부산이네. 다음에는 어디에 낼 거야, 미주야? 거기 근처 땅이나 좀 투자할까 싶어.”

차 안에서 중얼거리는 재민이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퇴근 시간에 맞물려 밀리기 시작해 뭐라도 좀 들으면 따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재민 씨.”

광안리에 위치한 멋진 레스토랑에 먼저 와 있던 그녀가 저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필리핀 화교와 결혼해 마닐라에서 살다가 이혼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매력적인 여자.

위자료를 많이 받은 덕에 돈은 차고 넘쳐 심심해 운동을 시작해 볼까 하고 테니스 레슨을 받다가 저와 안면을 텄다. 저보다 레슨 시간이 한 타임 앞선 덕에 오다가다 마주치면서 친분을 쌓다가 어찌어찌 남녀 관계로 발전했다.

함께 술을 마시고 원나잇을 했는데 침대 위에서는 꽤 적극적이라 끌렸다. 그리고 그간 풀지 못한 욕정 또한 많았기에 더는 자위 대신 여자의 몸에 제 것을 쏟아붓고 싶기도 했다.

“아아! 자기… 으응, 좋아!”

오늘도 조금 격렬하게 쌓였던 삐뚤어진 욕구를 채우고 있었다. 다행히, 약을 먹으면 그럭저럭 발기는 되는 편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점잖은 척 평범하게 즐겼지만 결국 어느 순간 본색이 드러나고 말았다.

“씨발, 좆 같은 년이…….”

여자의 눈을 가린 채 팔을 머리 위로 올려 두 손목을 묶어 놓고 거칠게 즐기다가 그 안에 파정을 했다.

“아아, 자기야, 너무 좋아…….”

“밝히기는.”

더 해 달라는 듯 허리를 흔드는 여자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콘돔이 빠지지 않도록 페니스를 음부에서 빼냈다.

“빨아 줄게, 자기야. 손 좀 풀어 줘.”

“그전에 한 번 더 꼴리게 좀 해 봐.”

벗겨 낸 콘돔을 쓰레기통에 넣고는 휴지로 슥슥- 몸을 닦아 낸 뒤 여자의 가렸던 눈을 풀어 주고, 묶인 손을 해방시켜 줬다.

“당연하지.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알잖아?”

침대에서 일어난 여자가 미니바 쪽으로 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얼음으로 가득 채운 잔을 제게 건넸다. 그러고는 이미 나눠 마신 덕에 3분의 1 정도가 없어진 위스키를 부었다.

“한잔하고 계속해, 자기.”

제 잔에도 술을 채운 벌거벗은 여자가 단숨에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 넣고는 저를 마주 보는 방향으로 침대에 앉았다. 천천히 무릎을 세워 다리를 M 자로 만들더니 아직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제 비부에 오른손을 뻗었다.

“하응, 하아… 재민 씨…….”

저를 보며 자위하는 여자를 보면서 재민 역시 수음을 했다.

‘역시 색은 미주가 제일 예뻤는데.’

어느 순간 은밀한 곳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교성을 흘리는 여자가 미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처럼 벌거벗은 미주가 다리를 벌리고 저를 유혹하고 있었다. 손가락을 질에 넣었다가 빼면서, 왼손으로는 가슴을 만지며 반쯤 풀린 눈으로 박아 달라 애원하고 있었다.

재민은 오랜만에 느끼는 약 없이도 빳빳하게 선 페니스가 주는 짜릿함에 더는 참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씨발, 진짜-!”

“흡!”

두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다리 사이로 박아 넣었다. 처음에는 신난 듯 제 것을 입에 가득 담고 빨아 대던 여자도 점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던 것 같다.

“읍! ……으읍!”

숨을 제대로 못 쉬겠는지 여자가 꺽꺽-대면서 토악질을 하며 고개를 빼려 했지만, 재민은 여자를 놔주지 않았다.

“개쌍년, 네 입에 한가득 싸 줄 테니깐 맛있게 먹어.”

대체 누구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눈물 콧물, 침까지 줄줄 흘리며 여자의 숨이 새파랗게 넘어갈 때쯤, 쿵- 하고 세게 머리를 제 쪽으로 짓이기면서 사정을 했다.

“재민 씨… 이건 너무…….”

온갖 체액으로 범벅이 된 여자의 입가에 제 정액이 묻어 있는 게 만족스럽다는 듯 재민이 웃었다.

“미주야, 어때? 내 거 맛이?”

“…미주가 누군데…? 설마 딴 년 생각하면서 내 입에다가 싼 거야?”

기가 막힌다는 듯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그대로 옷을 입고는 문을 쾅- 닫고 호텔을 빠져나갔다.

그 뒤로 여자에게선 연락이 없었고, 재민 또한 여자를 붙잡지 않았다.

찰나의 불장난이 끝나고 또다시 인생은 혼자의 삶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네, 사무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늘도 늘 그렇듯 어제처럼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정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대로 잠이 들면 다시 내일이 올 것이고, 저는 눈을 뜨고 아침을 맞이하겠지.

“어?”

그런데 눈을 뜨니 조금 이상했다.

익숙한 해운대 바다가 보이는 집이 아니라 낯선 곳에 앉아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제가 벌거벗은 채 옴짝달싹할 수 없이 완벽하게 팔다리가 의자에 묶여 구속된 걸 알았다. 그리고 멀지 않은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컹컹-거리는 개가 짖는 소리.

재민이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눈을 깜빡일 때였다.

저를 보면서 환하게 웃는 그리운 얼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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