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삶이 원수처럼 너를 쫓게 하겠다
* * *
사람들의 이목이 제게 집중되고 있음을 잘 알았다.
어제까지 구치소에 있던 사람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온화한 표정으로 멋진 슈트를 차려입고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차현 그룹 본사로 출근하니 말이다.
셈 빠른 승냥이들이 재빨리 태세 전환하는 게 연호의 눈에 보였다. 가령, 굳이 출근하는 제 동선을 알고 주차장에서부터 눈도장을 찍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놈이라든지.
“한 비서, 부회장님께 좀 전해 주게. 최 사장이랑은 입사 동기라… 어쩔 수 없어…….”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굳이 부회장실로 올라와 저를 만나게 해 달라며 주절주절 변명을 읊어 대는, 아버지 대부터 차현에 충성한 계열사 임원이라든지.
고요하게 가라앉은 연호는 계절이 바뀌고야 다시 앉은 제 자리에서 응접용 소파에 앉은 정훈을 보면서 말했다.
“내가 서진우를 죽였다, 김 기사를 통해 살인 청부했다는 게 알고 보니 거짓 정보였다고, 정재민이 검찰에 다시 번복했다고 하던데.”
“덕분에 검찰과 거래한 대로 무혐의로 나오실 수 있었습니다.”
“음, 그런데, 하 변. 나도 알아. 처음부터 정재민 그 새끼 목적이 미주였다는 걸.”
검지로 탁탁- 책상을 두드리고 있는 연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의외로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자 정훈은 조금 놀라웠다. 분명 미주의 일을 떠올리는 순간 이를 갈 줄 알았는데.
‘역시, 재벌 3세 중에서 가장 능력 있다고 일컬어질 만해. 막상 대면하고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진우 형 정도 되는 사람도 쉽게 꺾지 못할 만하달까?’
아마 어릴 때부터 후계자로 키워졌을 남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오랜 시간 동안 트레이닝 받았을 것이다. 타고난 기질과 더불어 후천적인 학습으로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게 당연한 귀족은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는 담력을 호되게 길렀겠지.
정훈이 연호를 보며 평가하고 있을 때, 손가락을 두드리던 연호가 움직임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이상한 점이 있어. 정재민… 아무리 최대한 냉정하게 남 일처럼 생각해 보려 해도 찜찜한… 그런 느낌.”
자리에서 일어나 정훈의 앞에 놓인 소파에 앉은 연호가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내가 정재민이라면, 아무리 미주랑 약속했다고 한들 더러운 목적을 달성한 뒤에 바로 미주한테 뒤통수를 후려 맞으면 약속, 그딴 거 안 지켜.”
“부회장님의 추가 기소 건을 무마해 주겠다, 그게 정재민의 거래 조건이었는데.”
“내가 서진우를 죽이라 지시했다는 거짓 증거도 없는 주제에 미주를…….”
차마 내뱉지 못한 단어를 삼킨 연호가 더욱더 냉정한 눈빛으로 정훈에게 계속 제 생각을 알렸다.
“괴롭히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기에는 너무 허술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하 변?”
“듣고 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전 사실 거짓 증인이나 증거라도 만들어 놔서 오히려 사모님께서 이사회에서 부회장님을 지지해 달라 판을 뒤집었을 때 바로 행동할 줄 알았는데…….”
최 사장이 회장이 되지 못하면, 재민이 그리는 그림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공석인 그룹 회장의 일개 비서실장이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은 극히 제한적인데.
“그간 검찰에서 날 잡아넣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놈들이랑 처음부터 손을 잡았으니, 그 검사들을 통해서 경찰이나 공권력에 입김을 불어 넣을 수 있었어.”
“그런데 더 윗선과 저희가 거래한 덕에 무혐의로 나왔으니 사실상 패배한 것과 마찬가집니다. 심지어 회장 자리도 놓쳤는데… 어제오늘, 너무 조용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연호는 미주에게 단단히 일러뒀다.
‘정재민이 미쳐서 미사일이라도 쏘지 않는 이상은 더는 널 어찌할 수 없어.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 경호 인력을 붙여 놓을 거니깐 불편해도 좀 참아.’
당분간 집 밖으로는 아예 나오지 말 것을 부탁하자 순순히 그러마, 미주가 수긍하는 게 마음이 아팠다. 제가 없는 동안 고군분투한 지친 영혼이 잠시라도 쉬었으면 했다.
이제 곧 새로운 차현 호텔이 예정대로 론칭될 예정이었고, 카지노도 호텔 오픈과 동시에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미주가 스텔라 사장으로서 당분간 얼굴마담인 척해 줘야 했다. 그래서 미주가 복수든 뭐든 제게 잠깐 기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길 때 정훈이 말했다.
“부회장님이 나왔으니 당연히 사모님의 안전은 보장이 되는 거고, 정재민이 까불어도 호텔 론칭에 초를 칠 수도 없다면, 그다음 수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통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굉장히 단순하게 생각해 봤어.”
목소리를 가다듬는 듯 헛기침을 한 번 한 연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 변, 정말 심플하게, 방금 우리가 나눴던 대화는 너무 복잡하니깐 모두 머릿속에서 딜리트 키를 눌러 삭제한 뒤에 내가 말하는 걸 한번 생각해 봐요.”
“네.”
“지금 상황, 솔직히 말해서 내가 칼 들고 정재민이 사무실로 내려가 그 새끼 죽을 때까지 찔러 죽여도 이상할 거 하나도 없는 거, 하 변도 이해되지?”
아내를 욕보인 자를 죽인 남편. 죄는 처벌받아야겠지만, 살해 동기는 그 누구든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마치 내가 그렇게 죽여 주길 바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차마 자살은 못 하겠으니 누가 날 좀 죽여 달라.”
“…말이 됩니다. 전무님을 죽여 이제 우리에게서 자기 목숨을 보장받지 못할 상황인데 굳이 사모님이라는 무리수를 둔 이유는…….”
“날 자극하기 위해서, 그리고 혼자는 못 죽는다, 이거지. 정말 내가 눈이 돌아가 지금이라도 누나 총으로 그놈을 쏴 버린다면 나도 진짜 살인죄를 지은 게 되니깐.”
연호가 내놓은 짐작이 지금 재민이 짜고 있는 계략에 가장 근접한 것이지 않을까 싶어서 정훈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정재민, 정 실장이라면 그러고도 남습니다. 저도 전무님 옆에서 오랫동안 듣고 봐 온 게 있어요. 정재민… 죽을 용기조차 없어서 남의 손으로 죽고 싶었던 건가?”
“서 전무가 죽기 전에 정재민한테 잔나비 놈 혀를 잘라서 보냈다고 했지?”
고개를 끄덕이는 정훈을 보며 연호가 마치 혼잣말을 하듯 탄식했다.
“너무 독했어. 너무 궁지로 몰았던 거야. 아니, 어쩌면 겁먹고 도망가길 바라고 그랬을지도 모르겠어. 경고의 의미. 여기서 꼬리를 내리라는 메시지를 공포에 실어서 보냈는데… 그게 결국 도화선이 될 줄…….”
정훈도 사실 연호의 짐작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진짜 자기 사람들은 한두 번 실수한다고 쉽게 내치지 않았던 진우가 은근히 마음 여린 구석이 있었다는 것도 잘 알았다.
마음을 주면 깊게 준다는 것도, 제게 의리를 지킨다면 끝까지 품에 안고 간다는 것도.
심지어 재민은 진우와 함께 자랐기에, 그가 희주를 배신하고 저까지 배신했다 한들 진우도 끝끝내 그를 도려내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이거. 만약에 내가 뭔 일이 생겨서 죽거나, 생사 불명이 되거나, 의식이 없는 채 누워 있으면 재민이한테 전해.’
진우가 유언장을 수정하겠다고 저를 부른 다음 날 새벽 댓바람부터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와서 툭- 던져 주고 간 편지. 진우가 마지막 순간 재민에게 전하고 싶은 게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미련이 한가득했다.
마치 헤어졌지만 끝까지 질척이는 애인처럼. 진우는 재민에게 대체 무슨 메시지를 남겼을까? 재민과 진우만 알고 있을 그 편지에 담긴 마음조차 재민의 폭주를 막을 수 없었는데.
“하 변, 만약에 정재민 그 씹새끼가 내 손에, 아니 그 누구에게라도 죽임을 당하길 희망하고 있다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연호가 낮게 읊조렸다.
“오히려 살려 둬야지. 이 지옥을 절대로 혼자 빠져나갈 수 없게.”
“하지만 사모님께서는 부회장님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알아. 일단 어디까지나 ‘그러지 않을까’ 하는 가설이니깐 좀 더 지켜보는 게 좋을 듯해.”
연호는 제가 언급한 대로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정재민을 잡아다가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복수라는 이름으로 이성을 잃고 분노의 힘으로만 움직이길 바라는 게 재민의 속내이지 않을까 하니,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연호가 정훈에게 등을 보이며 창가에 서서 도심 한복판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에겐 행복하고 평범한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벗어나고 싶은 심연이라면.
“삶이 원수처럼 너를 쫓게 하겠어.”
몸을 돌린 연호가 정훈에게 제가 아는 걸 재차 확인해 본다.
“서 전무 사무실까지 차지했다지?”
“네, 안 그래도 오늘 다시 비서실로 내려간다는 말이 있기는 하던데. 정 실장도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있다면 지금쯤 고개를 들지 못하겠지요.”
가만히 제 말을 듣고 있던 연호가 태양을 등진 채 물었다.
“아니, 최 사장은 아마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올 테니 차라리 정재민은 원하는 대로 승진시켜야겠어. 상무이사 자리를 원했다고 했으니 내가 직접 명패를 선물해 줘야겠어.”
우두머리를 자처한 놈만 본보기로 끌어내리면 나머지는 알아서 기게 될 것이다. 최 사장은 꼭 재민이 아니더라도 죽은 진수오의 잔당 중 한 명이니 아직 남은 진 회장의 세력에게 보여 주려 했다.
진짜 주인이 돌아왔으니 무릎을 꿇고 충성하라는 메시지. 연호는 더 좋은 수가 생각났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정훈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왕 승진시키는 거, 정 실장 말고 다른 이들도 함께 레벨 업해 주면 되겠네요, 하 변호사님.”
“…부회장님을 엿 먹이려고 했던 자들에게… 말입니까?”
“맞아. 일종의 회유책을 쓰는 동시에 정 실장에게 경고하는 거죠. 아무리 날뛰어도 너는 내 밑이다. 내가 네 자리를 높일 수도 있고 낮출 수도 있음을 확실히 보라, 보여 주는 겁니다.”
“거기에 넌 특별하지 않은 존재임을, 다수의 승진자들 속에서 놈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게 하면서 알려 주면 되겠네요.”
“새로운 차현의 실세로 주목받고 싶었을 텐데, 아쉽겠어.”
기분이 좋은 듯 구두 소리를 내는 연호가 책상 위의 전화를 들고 비서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하반기에 예정된 인사이동 명단을 제가 검토하고 확정 지으면 그들에게 먼저 소식을 전하라고.
살아 있는 무간지옥 속으로 재민을 빠뜨리려 연호가 배틀 로얄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 몸을 슬슬 풀고 있을 때였다.
[김 기사, 찾았습니다.]
백호에게서 온 메시지에 핸드폰을 잡은 연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순간 몇 초간은 핸드폰에 적혀 있는 텍스트를 보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와 진우를 죽인 놈이 드디어 경찰보다 제 손에 먼저 잡혔다. 기쁜 듯한 연호가 애써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꾹 누르면서 정훈에게 소식을 알렸다.
“김 기사, 찾았어.”
늘 침착하게 동요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던 정훈의 포커페이스가 서서히 무너지는 게 연호에게도 보였다. 감정의 기복이 그다지 심하지 않은 저와 비슷한 남자 역시, 사주를 받았다 한들 형제 같은 이를 직접 죽인 자를 용서할 순 없었을 것이다.
“진우 형 죽인 놈… 저도 만나게 해 주십시오, 부회장님.”
꽉 다문 어금니 사이로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가 배어 나왔다. 연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훈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같이 만나러 가자고 말할 생각이었어.”
그와 진우가 무슨 인연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아직은 정확히 몰랐지만 말이다. 분명 미주가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진우와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으리라 이미 짐작되고도 남아 부드럽게 웃었다.
“한 비서, 저녁 일정은 모두 캔슬시켜 줘. 바로 복귀하니 역시 힘들어서 하루 정도는 집에 일찍 돌아가 더 쉬어야겠다고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내선 전화로 비서진들에게 일정을 취소시킨 연호가 핸드폰에 뜨는 새로운 메시지를 확인했다.
[대림동으로 배달시키겠습니다.]
[네, 자세한 건 직접 만나서 묻도록 하고, 잘 감시해 주세요, 계장님.]
그리고 새로운 수신인을 찾아 연호는 손을 바삐 움직였다.
[김 기사 찾았어. 하 변호사 보낼게.]
미주에게 메시지를 보낸 연호는 겨우겨우 치밀어 오르는 살의를 누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김 기사를 제 앞으로 끌고 와 목뼈를 부러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연호는 해야 할 일이 있었고, 지금은 그 무엇보다 실추된 차현의 명예를 회복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회장 자리가 공석인 탓에 사실상 현재 차현의 수장은 자신이니 공백이 생긴 동안 엉망이 된 회사를 바로 세워야만 했다.
그래서 연호는 재민을 아직 죽이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김 기사에 대한 분노도 잠시 내려놓는 게 맞다 여겼다. 반나절도 참지 못한다면 아들을 죽인 자를 곁에 뒀던 진 회장보다도 못할 것이다.
‘누나가 다 안고 가 주고, 미주가 날 위해 고통받았던 걸 생각해.’
더 날카롭게 복수를 연마하는 심정으로 연호는 다시 기업인의 얼굴로 돌아가 제 할 일에 집중해 본다. 정훈 역시 최대한 어른스럽게 사적인 감정은 숨긴 채, 잠시 미주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함께할 새로운 파트너와 합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타고난 핏줄의 힘 덕분에 능력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다른 재벌 후계자들과는 다른 연호의 새로운 면모에 조금 놀라고도 있었다.
“커피 한잔하고 정신 차리자, 나도 하 변도.”
진우와는 다르게 서글서글한 면은 없지만 냉정한 이성과 뜨거운 감성을 가진 남자를 정훈은 보았다. 진우가 한때 그토록 모든 걸 쏟아부으면서 타도 차연호를 외쳤지만 그를 밀어내지 못했던 이유를 한 번 더 여실히 느끼면서.
“전무님 살아 계실 때, 농담으로 그런 얘기 한 적 있었습니다. 부회장님과 한번 같이 일해 보고 싶었다고.”
“…그래서 어때? 하루지만 같이 일해 본 소감은?”
“나쁘지 않습니다.”
뜻밖에도 직접 종이컵에 탄 커피를 건네는 연호가 인간적이라 정훈은 웃으면서 컵을 받아 들었다. 앞으로 또다시 시작될 피 냄새가 진동할지 모르는 살육극 앞에서 이 정도 여유는 부려도 될 것 같다고 여기면서.
연호는 종이컵에 남은 커피를 다 마시고는 정훈에게 물었다.
“참, 내가 할 얘기는 이거였는데. 그래서 미주 말고 나랑 일해 보는 건 어때, 하정훈 씨?”
하지만 아쉽게도 정훈은 고개를 저으며 연호가 듣고 싶은 답을 내어 주지 않았다.
“부회장님은 제가 없어도 되는 분이지만 사모님께는 미흡하지만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으니, 사람은 쓰임이 있는 곳에 있는 게 좋을 듯합니다.”
“진짜 진심으로 물은 건 아니었어. 나도 이젠 미주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열심히 해 줬으면 하니깐… 부탁할게. 우리 와이프가 더 성장할 수 있게 많이 도와주세요.”
“…저 말고도 든든한 이 차장과 박 과장이 있으니 저희 셋이 모이면 부회장님 하나 정도는 되지 않겠습니까?”
“역시 변호사야. 말은 잘해. 차였는데도 기분이 하나도 안 나쁘니.”
웃는 사이에 연호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회신됐다.
[잘됐네요. 내가 김 기사한테 물어볼 것도 있으니 나중에 봐요.]
미주의 회신에 연호가 정훈에게 부탁했다.
“한 시간 먼저 퇴근해서 미주 데리고 대림동으로 와요. 주소는 알려 줄 테니. 믿을 만한 사람이 미주를 데려와야 안심이 돼서.”
“네, 어려운 일도 아니니 그리하도록 하고, 저흰 이거부터 먼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 주식 시장이 열리면……”
시간은 어찌어찌 흘러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미주는 연호에게서 연락을 받은 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최근 피곤했던 제 삶에서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쉬는 거라고 해 봤자 입이 여전히 소태라 아무리 맛난 음식도 들어가지 않았고 원수가 아직 태연히 세상을 활보하니 밖을 나갈 수도 없었다.
연호가 당부한 대로 악에 받친 재민이 뭔 짓을 할지 알 수 없었기에 당분간은 집에 있는 게 낫다는 것도 잘 알았다.
‘내 생각은 이래. 카지노 론칭 전까지 어떻게든 정재민을 끝장내 놓을 테니 당신은 멋지고 화려하게 세상에 데뷔했으면 좋겠어.’
연호의 바람대로 그가 구치소에서 나온 지 하루 만에 김 기사가 잡혔다.
미주가 저를 데리러 온 정훈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지금 제가 가는 곳이 멀지 않은 과거에 진우도 왔었던 곳이라는 걸 모른 채 조용히 생각에 잠기고 있을 때였다.
“여깁니다.”
“네, 고생하셨어요. 같이 들어가요.”
어두운 밤거리를 지나 서울에 사는 동안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곳에 미주의 하이힐이 닿았다. 또각또각-거리는 소리가 조금은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가 가득한 곳에 울렸다.
분명 간판은 ‘양자강’이라는 중국집인데 어쩐지 양고기 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은 식당 깊숙한 곳에 미주의 발이 멈췄다.
“부회장님께서 먼저 와 계십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지만 제게 깍듯한 이 중년의 남자가 누구인지 미주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보지만 처음이 아닌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계장님, 처음 뵐게요. 오늘까지 남편을 위해 고생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모님.”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자, 미주와 정훈이 안으로 성큼 걸어서 들어갔다. 딸각-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닫은 백호는 담배를 꺼내 물고는 마치 수문장이라도 된 듯 앞을 지켰다.
“다시 뵙네요, 김 기사님.”
안쪽으로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었다니. 미주는 오른손을 코앞에서 흔들면서 연호를 장난스럽게 노려보며 말했다.
“창문도 없는 곳에서 담배를 이렇게 피우면, 나 같은 사람이 얼마나 피해를 보는데.”
제 말에 낡은 철제 의자에 앉아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땅바닥에 떨어뜨린 연호가 구둣발로 비벼 담뱃불을 끄면서 대꾸했다.
“너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깐 심심하잖아.”
“나한테 먼저 기회를 주겠다?”
“아버지 몫은 나중에 청구하면 되니깐 우선 죽은 진우 몫부터 챙겨야지.”
연호에게도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인 김 기사를 아직 손 하나 대지 않고 제가 올 때까지 그냥 뒀다는 인내심에 박수를 보내야 할 정도였다.
“기다리는 동안 둘밖에 없는데 담배라도 피우면서 기다렸어.”
연호의 발밑에 떨어진 꽁초의 개수를 보면서 미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래요, 잘했어요. 그럼 나도 한 대 줘 봐요.”
의외라는 듯 연호가 해 보라는 식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미주에게 건네자 그녀는 다른 것도 요구했다.
“라이터도 줘야지. 내가 뭐 손에서 불이라도 나오는 능력이 있나?”
헛- 하고 웃은 연호가 까만 에나멜 광색이 반짝거리는 라이터를 건넸고, 미주는 천천히 김 기사 앞으로 향했다.
“작은 사모…….”
의자에 팔다리가 묶인 채 앉아 있는 김 기사는 꽤 멀쩡했다. 구타를 당한 흔적도 없어 보였고, 신체를 훼손당한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도망 다녀야 했기에 얼굴에 누적된 깊은 피로를 보면서 미주는 연민이 가득한 표정으로 김 기사의 등 뒤에 섰다.
“팔이 이렇게 묶여서야 어디 담배 한 대 피우겠어요?”
연호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지만, 미주는 아랑곳없이 김 기사의 결박된 손목을 풀어 줬다.
“몸수색이 끝났으니 여기 이렇게 앉아 계셨지, 뭐라도 숨겼으면 벌써 무슨 일이 났어도 났겠지요.”
“틀린 말은 아니라서 말리진 못하겠네.”
수긍한다는 연호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을 때, 몸을 숙인 미주가 다리까지 모두 풀었다. 그리고 다시 김 기사 앞에 서서 연호에게서 강탈한 담배 한 개비를 그에게 건넸다.
김 기사는 아무 말 없이 미주가 건네는 담배를 받아 들었다.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입에 필터를 물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 미주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담뱃불을 붙여 줬다.
“김 기사님, 저 어릴 때 이런 식으로 진우 오빠 담뱃불 참 많이 붙여 줬었어요.”
“…….”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땐 뭘 몰랐어요. 삼류 건달인 우리 희주 오빠랑 고등학생이던 진우 오빠가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게 어찌나 멋있게 보이던지.”
미주가 조용한 방 안에서 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김 기사 앞을 팔짱을 끼고 왔다 갔다 하면서 옛 추억을 회상하는 듯했다.
“지나서 생각해 보니깐 난 그게 재밌었던 거예요. 이런 퐁- 소리 나는 좋은 라이터 말고 그냥 싸구려 다방 이름 적힌 일회용 라이터 부싯돌을 탁탁- 하고 돌리는 게 어린 마음에 재밌었는데….”
발을 멈춘 미주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김 기사를 보며 말했다.
“근데 생각해 보세요. 꼬맹이가 라이터 만지면 말려야지. 희주 오빠나 진우 오빠나 둘 다 참, 인간들이 아무 생각도 없이, 쯧쯧.”
망자를 떠올리면서 혀를 끌끌 찬 미주가 빙그레 웃으며 조용히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김 기사에게 물었다.
“왜 그랬어요?”
“…….”
“아니, 질문을 바꿀게요. 김 기사님이 화난 마음은 십분 이해해요. 약속한 필리핀 리조트, 오빠가 한 입으로 두말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깐… 객관적으로 보면 진우 오빠도 잘한 건 없다는 걸 알아요.”
“…작은 사모님. 진우 죽을 때 약속했습니다. 죄는 연호 도련님한테 받겠다고.”
마치, 여자인 저와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김 기사의 말투에 미주는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치켜떴다.
“아니, 정확히 말해야지. 사실은 차연희 관장이 널 처분해 주길 바라는 거 아니야?”
연희의 이름이 언급되자 뒤에서 조용히 관망하고 있던 연호가 움찔거리면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정훈을 보았다. 하지만 정훈도 몰랐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걸 보고 미주의 추궁을 가만히 들었다.
“진우 오빠는 당신이 차연희 관장을 그동안 몰래 혼자 연모했던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줬어! 알지? 김 기사 당신이 오빠랑 술 마시다가 내 시아버지 죽음이 타살인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실수 했다는 그날….”
김 기사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미주는 놓치지 않았다.
3년 전, 진우에게서 듣게 된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김 기사가 이상한 소리를 한 덕에 뭔가를 포착한 진우가 그의 집을 불법 침입 해 샅샅이 살펴보던 중 찾아낸 수상한 방. 벽면에 차연희의 사진과 기사들이 빼곡해 벽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진우가 말했었다.
‘아마 혼자 짝사랑한 것 같은데… 약간 도를 넘어선 느낌을 받기는 했어. 스토커적인 느낌. 그래서 오히려 말하기 쉬워졌지.’
뜻하지 않은 김 기사의 약점에 진우는 그것을 쥐고 그와 거래를 한 것이었다. 그의 위험한 연정을 함구해 주는 대신, 알고 있는 진수오의 추악한 비밀을 제게 알려 달라.
그렇게 진우가 손에 쥐게 된 차씨 남매 아버지 죽음의 진실과 진 회장의 여죄餘罪라고 볼 수 있는 여러 비리들.
하지만 진우에게 부탁해 연희를 제 병실로 불렀던 날, 미주는 그녀에게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밝힐 순 없었다.
‘사실 오빠가 불법을 저지른 건데 김 기사 집을 몰래 뒤졌대요.’
무언가가 나왔냐는 연희에 물음에 대답하진 않고 이렇게 말했었다.
‘그걸 가지고 넌지시 김 기사를 회유했대요. 대체 선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렇게 둘이 빅 딜을 한 거죠.’
하얀 거짓말로 김 기사가 끝까지 숨기려고 했던 비밀을 미주도 지켜 주기 위해 적당히 얼버무렸었다. 제 말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지 그 이후로 연희가 그 일을 다시 묻는 일은 없었고.
하지만 진우가 김 기사의 손에서 죽는 걸 바로 눈앞에서 목격한 미주가 매일 밤 끝없이 펼쳐지는 진우의 숨이 끊어지던 그 순간을 한 장면, 한 장면 되씹어 보니 말이다.
‘필리핀 리조트.’
과연 그것만으로 김 기사가 움직였을까 하는 작은 의문이 생겨났다. 골수까지 사무친 복수심으로 제가 아는 선에서 기억하는 모든 정보를 끄집어내 뭔가가 더 있지 않을까 하고 쥐어짜니 보였다.
“김 기사님, 그래서 나는 생각했어요. 진우 오빠가 당신 비밀을 알았던 그 시절에는 정재민과 사이가 좋았으니 어찌어찌 그 새끼도 당신이 숨기고자 한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제 말에 그간 잠잠히 있던 연호가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노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서 전무가 누나 자수할 때 가짜 공범으로 널 지목한 거였어! 네가 절대 거절하지 않을 걸 알았던 거야.”
연호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미주가 이를 악물고 김 기사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김 기사님, 정재민이… 다 까발리겠다고 말했죠? 오랜 시간 동안 남의 여자를 마음에 품은 걸 세상에 터뜨리겠다고.”
담배를 다 피운 김 기사가 불씨가 남은 꽁초를 제 엄지와 검지로 비벼 껐다. 마치 뜨거움을 못 느끼는 것처럼. 아니면 재민에 대한 분노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제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김 기사지만 그의 행동을 보니 짐작이 맞아 들어간 것 같아 미주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생각했어요. 내가 만약 정재민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정말 우습게도 정재민 그 새끼랑 오랜 시간 함께 보냈기에 그 새끼가 뭔 생각을 할지, 어느 정도 감이 오더라고요.”
침을 한 번 꼴깍- 삼킨 미주가 자세를 낮췄다. 의자에 앉아 있는 김 기사에게 바짝 다가가 그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사실은 김 기사님이 진수오를 죽인 차연희와 내연 관계였다고 정재민이 거짓으로 엮어 버리면, 대중에게는 우리가 거짓으로 만든 공범의 동기가 이해되겠죠. 그게 내 시누이와 우리에게 좋은 일이 절대로 아니더라고요.”
차연희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로 총기를 들고 저를 위협하는 남편을 우발적으로 죽인 가련한 아내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정재민이 이 판을 흔들어 버리면 말이다.
차연희는 남편의 운전기사와 오랜 시간 불륜을 저지른 끝에 결국 김 기사와 함께 남편을 계획적으로 죽인 부도덕한 여자가 될 수 있었다.
“정재민의 협박을 듣지 않으면 차연희 자수라는 우리의 고육책이 다 물거품이 된다 생각했던 거지요?”
“…….”
“사실은 이 모든 게 다 차연희가 지키고 싶었던 차현 그룹과 그녀의 남동생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 속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거 맞지요?”
“…맞아, 작은 사모.”
“거기에 진우 오빠가 약속을 안 지켰으니 살인의 명분까지 생겨 버려서 당신 진짜 본심을 숨길 수 있었고.”
연호가 놀란 표정으로 성큼 다가와 미주 옆에 서서 김 기사의 어깨를 붙잡고 언성을 높였다.
“설마 우리 누나 명예를 지켜 주려고… 나를 보호해 주려고, 서진우를 죽였어? 말해! 말해요! 김 기사! 설마!”
무너지는 김 기사의 표정에서 이미 답을 얻은 연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탈하게 말했다.
“왜 그랬어? 왜! 설령 불륜을 저질렀다는 거짓 불명예를 가져도 누나는 절대 안 죽어. 그래 봤자 몇 년 형이 더 나오겠지! 알잖아, 김 기사! 우린 차현의 자식이야! 돈으로 죄를 가볍게 할 수 있는데! 대체 왜 그런 이유로… 서진우를 죽인 거야……?”
주름진 얼굴에 새겨진 인생의 굴곡이 많은 중년 남자는 흐느끼듯이 처음으로 제대로 입을 뗐다.
“도련님, 나 같은 버러지 때문에 감히 불륜이라니… 저는 큰 사모님 이름을 더럽힐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난 선택한 거야!”
“아버지를 죽인 네가 감히 누나한테 그런 마음을 품다니!”
미주가 말릴 새도 없이 김 기사의 멱살을 잡아 쥔 연호가 그를 끌어 올려 죽일 듯이 소리를 질렀다.
“순간 돈에 눈멀어 회장님 죽이고… 저도 죽고 싶었지만 진 회장이 무서워 죽을 수도 없었어요.”
눈물을 흘리는 김 기사가 오래된 죄악을 떠올리며 울었다.
“죽을 때까지 숨길 수만 있으면 속죄하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서 전무가 큰 사모님이 진 회장을 죽였다고 자수할 건데 공범이 필요하다 해서 기꺼이 하겠다 마음먹었는데… 정 실장이… 서 전무를 죽이지 않으면… 큰 사모님의 이름에 먹칠하겠다 하니… 저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 연호도 잘 아는 거였다.
사랑. 빌어먹을 사랑.
필리핀 리조트는 핑계였을 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할지라도 제 사랑이 감히 모욕당하는 걸 김 기사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 한 번 죽인 적 있었으니 두 번은 쉬웠겠지! 그런데 정재민, 그 뱀 같은 놈의 사악한 간계에 놀아난 덕분에 미주가 보는 앞에서 진우가 죽었어!”
김 기사를 패대기친 연호가 이성을 잃고 씩씩거릴 정도로 흐트러지자 미주가 그를 말리며 막아섰다.
“연호 씨! 김 기사, 찾아낸 게 아니라 사실은 제 발로 우릴 찾아온 거 맞죠?”
미주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연호는 백호에게 전해 들었다.
‘부회장님께서 나오신 걸 알고 일부러 자기 위치를 노출시킨 것 같습니다… 김 기사 찾는다고 원래 서 전무님과 연이 닿아 있던 마카오 애들까지 한국으로 건너와서 정말 샅샅이 찾았는데도 머리카락 하나도 안 보이더니…….’
“맞아, 찾아 달라고 꼬리를 흔들었다 백호가 말했어.”
연호는 간신히 살의를 참아 내고는 저를 붙들고 있는 미주를 안심시키듯 대꾸했다.
“방금도 말했고, 진우 오빠 죽을 때도 말했지만 당신한테 벌 받겠다고 했어요.”
미주가 뭔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를 리 없는 연호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쓰러진 채 흐느끼는 김 기사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네 죄를 덜고 싶어서 내 손에 죽고 싶은가 본데, 그 전에 해 줄 일이 있는 건 아마 말 안 해도 알 거야.”
고개를 끄덕인 김 기사는 이미 모든 걸 체념한 듯 고개를 들어 연호를 보았다.
“자수해. 가서 경찰한테 말해. 정재민이 전부 다 시켰다고, 진우를 죽이라 사주한 게 정재민이었다고 말해.”
하지만 미주는 김 기사에게 자수를 권유하는 연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쳤다.
“안 돼요! 설마 김 기사와 정재민을 법의 심판대 위에 세울 생각은 아닌 거죠?”
연호가 눈짓하자 정훈이 다가와 미주를 제지했다. 그러자 미주는 더 펄펄 날뛰듯 미친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미쳤어! 김 기사를 경찰에 자수시킨다고? 안 돼! 내가 죽여! 내가 죽일 거야! 진우 오빠가 어떻게 죽었는데… 아직도 내 손에 오빠 피 냄새가 진동하는데.”
연호는 굳은 얼굴로 미주의 울부짖음이 안 들리는 것처럼 김 기사를 향해 제 처분을 알렸다.
“김 기사님, 알지? 스스로 용기를 내 봐요. 그게 내가 내리는 벌이야.”
제 말뜻을 이해한 김 기사는 연호에게 약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한 거로 알겠습니다. 그러면 나도 약속드리죠. 누나는 영원히 이 일을 모르게 하겠습니다.”
다행이라는 듯 김 기사는 연호를 향해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도련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리하겠습니다.”
“아버지 일까지 모두 다 안고 가세요.”
“네.”
“그럼, 오늘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계장님을 부를게요.”
활활 타는 눈빛으로 저를 보는 미주를 뒤로한 채, 연호는 문을 열고 백호를 불렀다.
“미주야, 잠시 우리 이야기는 따로 해.”
“연호 씨! 저 새끼 보내면 내가 당신 죽여 버릴 거야!”
“그래, 죽여. 죽이고 싶으면 날 죽여. 그러니 김 기사는 보낼게.”
미친 것같이 발광하는 미주를 간신히 정훈이 붙들어 매고 있을 때 백호가 소란스러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계장님, 김 기사님께서 내일 경찰서 가실 겁니다. 그 전에 식사 좀 대접해 주시고, 사우나 가서 깨끗이 씻으실 수 있게 같이 가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백호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 자국이 가득한 얼굴의 김 기사 팔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김 기사, 가서 좀 씻고 나랑 같이 밥이나 먹음세.”
차현 그룹 사주 일족의 충견으로 함께했지만, 운명은 두 나이 든 남자의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했다. 한 명은 여전히 충실한 그 집안의 사람으로 남을 것이며, 한 명은 이제 얼마나 남지 않은 제 목숨을 주인을 위해 쓸 예정이었다.
비틀거리면서 일어난 김 기사는 일방적인 연호의 행동에 화를 참지 못하며 이를 갈고 있는 미주를 보면서 마른 입술을 뗐다.
“작은 사모님.”
“…….”
저를 노려보는 미주의 큰 눈에 가득 맺힌 원한의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걸 보며 김 기사는 힘겹게 말했다.
“정재민이 작은 사모님은 절대로 죽이지 말라고 했어요. 자기가 도련님과 작은 사모님께 지는 꼴을 꼭 봐야만 하니 절대로 죽이면 안 된다고…….”
“뭐?”
“전 아둔해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기는 것도 아니고 진다니… 그래서 경고했던 겁니다. 조심하라고…….”
백호가 김 기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데리고 사라지자, 정훈이 미주를 그제야 놓아줬다.
눈물이 범벅인 미주가 연호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듯 옷깃을 거머쥐고는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치며 울었다.
“왜! 왜!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은데… 왜 그랬어요? 연호 씨… 응? 도대체…….”
“미주야,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봐.”
흐느끼는 미주가 이번에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세게 내리치자 연호는 그녀가 자해하지 못하게 두 손목을 붙들고 말했다.
“일단 진정해. 알았어. 미안해. 미리 말해 줬어야 했는데… 알다시피 시간이 없었어.”
정훈이 녹슨 의자를 미주 옆에 가져오자 연호는 그녀를 자리에 앉히고는 저도 자세를 낮춰 쉬쉬- 하는 소리와 함께 달랬다.
“미주야, 진정해. 네가 화내는 이유 잘 알아.”
“…….”
“나도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진 않았어. 나도 저놈, 경찰이고 나발이고 지금 여기서 죽여 버리고 싶지만…….”
붙잡은 미주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연호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복수는 우아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화려하게 해야지.”
쌕쌕-대던 미주의 숨소리가 조금 진정이 되자 연호는 제 생각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방금 김 기사가 한 말을 듣고 확신했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짐작이었을 뿐, 나 역시 반신반의했는데… 김 기사는 그런 말을 지어낼 정도로 똑똑한 사람은 아니야.”
가만히 연호의 말을 듣고 있던 정훈이 가까이 다가와 미주에게 말을 덧댔다.
“우리에게 지는 걸 보겠다, 김 기사 말대로 이기는 게 아니라 진다니… 정재민 머리에서 충분히 나올 만한 말입니다.”
정훈에게 미주의 시선이 옮겨 갈 때, 연호가 입을 열었다.
“오후에 하 변과 이런 이야기를 했어. 정재민이 서진우를 죽이기로 마음먹었을 때, 우리가 자길 그냥 둘 리 없다고 분명 계산에 넣었을 거라고 말이야.”
“그리고 이사회 이후로 부회장님이 구치소에서 나오시기까지 했는데 너무 조용합니다. 마치 심판을 바라는 것처럼…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도 소리를 지른 탓에 조금 쉰 듯한 목소리의 미주가 연호에게 물었다.
“그럼 설마, 우리가 자길 해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요?”
“아마도. 모든 건 짐작일 뿐이지만 너와 나, 그리고 지금 병원에서 회복하고 있는 이요한이든 그 누구든 그 새끼는 상관없을 거야.”
입술을 꾹 다문 미주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움직였다. 다행히 하나를 알려 주면 열까진 모르더라도 다섯 정도는 알 만한 미주였다. 잠깐의 침묵 속에서 서서히 굳어 가는 표정의 미주가 무겁게 운을 뗐다.
“그럼 회사를 집어삼키겠다는 야욕도, 날 욕보인 것도… 요한 씨 오른쪽 눈마저, 모두… 우리 손에 죽고 싶어서… 우릴 자극하기 위한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군요.”
진우를 죽인 이상 어차피 제가 살 수 없음을 알았기에 죽기 전 하고 싶었던 걸 모두 하려 했던 걸까?
미주의 육체를 탐하고 연호를 흔들고 저를 경멸의 눈으로 보던, 진우가 저만큼 아꼈던 요한의 눈까지 찔러 가며 죽음을 재촉했다고?
“확실치 않지만 그래. 그리고 이건 내 추측이지만 아마 정재민 계산 속에서 미주 넌, 처음부터 배제됐을 가능성이 높아. 네가 말한 만행 중에 이요한 빼고는 다 날 겨냥하고 있으니.”
차현 그룹도 저도 재민이 건드렸을 때 눈이 뒤집힐 사람은 바로 연호였다. 미주는 애써 침착하게 다시 하나하나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니 연호의 추측이 틀리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사모님이 예상치 못하게 부회장님을 기다려 달라고 임원진의 마음을 샀고….”
그러나 저가 재민의 예상과는 다르게 판을 흔들어 버렸다. 미주는 정훈의 말을 가로채 담담하게 고백했다.
“내가 당하지 않고 반격해 버리니 당황했을 거예요. 이제 알았어. 이사회가 있던 날, 나를 원래 진우 오빠가 쓰던 사무실로 불러내 범한 건 당신과 진우 오빠를 능멸하기 위함이었어.”
미주는 이미 두 사람에 대한 재민의 어마어마한 열등감을 이미 보았다. 그날의 한 시간 동안 재민은 저를 여자로 품고자 했던 게 아니라 두 남자를 제 몸을 통해서 모욕한 것이었다.
재민과 있었던 한 시간 동안 벌어진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일. 그것을 비밀로 영원히 함구한다면 이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자신의 부정한 죄를 연호에게 고할 때였다.
“정재민이 옷을 다 벗으라 그러더니 나한테 그랬어. 섹스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냐고.”
“…저는 잠시 연락을 취할 곳이 있어서…….”
눈치 빠른 정훈이 미주의 슬픈 고해성사는 연호만 들을 수 있게 자리를 피해 줬다.
“괜찮아. 아무 말도 안 해 줘도 돼.”
“아니야,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질 것 같아요.”
의자에 앉은 미주 앞에 연호가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붙잡은 미주의 손을 더 강하게 쥐었다. 연호가 정말 편안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면서 따스하게 웃어 주자, 미주는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진우 오빠가 쓰던 책상에 못을 치더니 거기에 날 엎드리게 해서 내 팔을 결박했어요.”
뜸을 한번 들인 미주가 결심한 듯 한 번에 모든 걸 털어놓았다.
“내가 말했죠? 그 새끼 고자 새끼라고.”
“설마.”
“진짜야. 내 몸에 넣지도 못했어. 심지어 내가 조롱하니깐 흐물흐물 죽더라?”
피식- 웃는 미주가 안쓰러워 연호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연호 씨, 그 새끼가 이러더라. 섹스의 사전적인 의미는 남녀 성기의 결합이라고. 자기는 나랑 섹스는 안 한대. 그래서 진짜 사전적인 의미로는 난 정재민과 섹스를 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 새끼가 기구를 가지고 날 마음껏 가지고 놀았지.”
참담한 연호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지만, 미주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그 고자 새끼가 이랬어요. 이제 진우 형이랑 차연호랑 같이 날 가졌다고, 자기도 이제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서 좋다고. 사이좋게 날 나눠 먹어서 안심된다고 말하는 순간, 알았어요.”
“……외로웠구나.”
“맞아요. 그런 거였어. 그래서 멘탈을 터뜨려 버렸어요.”
“뭐라고 했길래 겨우 세운 게 죽었을까?”
미안하다는 듯 제 뺨을 계속 어루만지는 연호가 조금 장난스럽게 물어, 미주는 안심이 되는 기분으로 저 역시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넌 차연호 좆만도 못하다고 그랬어.”
“내 좆이 보통 좆인가? 잘했어.”
연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풋- 하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미주야, 나라도 그 정도 말 들으면 좆이 죽었겠어. 역시 우리 와이프 대단해. 정말 멋져.”
미주를 꼭 안은 연호가 그녀의 등을 쓸면서 진심을 또 한 번 전했다.
“고마워, 미주야. 네가 한 선택 절대로 후회하지 마. 잘했어. 그리고 내가 미안하고 고마워. 정말 한 톨의 원망도 하지 않고, 널 부정하다 생각지 않으니깐.”
“용서해 줘요.”
“아니야, 네 말 듣고 나니 더 확실해졌어. 정재민, 절대로 살려 두지 않을 거야.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거.”
연호의 어깨에 기댄 미주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꾀에 넘어간 것처럼 보이자?”
“맞아. 그 고자 새끼의 계산 안에는 김 기사가 저를 서진우 살인을 지시한 진범이라고 실토하는 것도 들어가 있을 거야.”
이제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 미주가 연호의 품에서 제 머리를 떼어 내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했다.
“우리가 자기를 지금 당장 죽이길 바라고 있었어.”
“맞아. 거기에 살인 청부 죄로 결국 구속되어 교도소로 가는 것까지 다 예측했을 거야.”
“지는 꼴을 봐야 한다, 아니 그건 정재민이 이기는 거였어.”
“그래, 미주야. 당장은 우리가 지는 것처럼 보여 정재민이 이겼다 느끼게끔 해 주자고.”
연호가 언제 발악하고 울부짖었냐는 듯 매서운 눈으로 차갑게 자신을 다잡은 미주를 볼 때였다.
“진우 오빠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무슨 말?”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
연호는 다시 혈색이 도는 미주의 뺨에 입을 맞추며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그래, 복수는 10년이 넘어도 절대 늦지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