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네 선택은 옳았어
* * *
며칠만 쉬겠다고 했는데, 일주일을 앓아누웠다.
몸이 상하기도 했지만, 수많은 사람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제 뜻을 전한다는 게 상당한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임을 처음 깨달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토록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정말 우습지만 굴욕을 당한 육신은 하루 이틀 지나니 신체적으로는 회복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일장 연설을 하던 그 순간을 떠올리니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럽고 고통스러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재민이 제게 행했던 패륜적인 행위를 벌써 다 잊은 건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온몸에 남은 잔상들과 싸우며 이겨 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재민은 제가 멘탈이 깨져 폐인처럼 괴로워하길 바랐겠지만, 견뎌 냈다. 아니, 견뎌 낼 수 있었다. 겨우 이 정도로 무너질 자신이 아니었다.
미주가 둥지에 틀어박혀 완벽히 소진해 버린 몸과 마음 모두 다시 채우고 있을 때였다.
[나오셨습니다.]
정훈이 보내온 메시지에 미주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계절이 바뀌고 진우가 죽어서야 자유의 몸이 된 연호가 이제 곧 집으로 돌아온다.
아내는 초조한 마음으로 남편을 기다리면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적인 모습을 꾸며 내는 중이었다. 먹을 것을 준비한다는지, 이왕이면 예쁜 옷을 입고 기다린다든지. 일부러 화장까지 화사하게 하고 생기가 넘치게 코랄빛 립스틱을 발라 마음의 심연을 감춰 본다.
‘각오했으니, 설령 묻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말자.’
머리까지 우아하게 살짝 헤어 기기로 컬을 넣고 완벽한 아내의 모습으로 남편을 기다리지만, 마음 한편의 짐은 여전히 무거웠다.
“좀 시끄러웠으면 좋겠어. 너무 적막해서 두려워.”
TV를 튼 미주가 소파에 앉아 지금 한창 보도 중인 내용을 건성으로 보고 있었다.
동생의 무혐의 출소를 최대한 가리기 위해 일부러 살인자가 된 누나는 첫 공판을 오늘로 잡았다. 판을 짠 대로 언론은 하나같이 연희의 소식만 전하며, 연호의 일을 짤막한 토막 소식으로 전하고 있었다.
불안한 듯 미주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TV 채널을 마구 돌리면서 어느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차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뜨고 가슴이 두방망이질 칠 때, 너무나도 그리웠고 사랑해 배신하고 만 남자가 조금 까칠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인사말을 준비 못 했어. 잘 다녀왔냐고 물어야 할지, 고생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난 모르겠어요.”
울음을 꾹 참느라 입술을 일자로 만든 미주의 볼이 부풀어 올라, 연호는 천천히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미주야. 버텨 줘서 고마워.”
손을 뻗어 남자의 넓은 등을 쓸어 보았다. 한때는 오만하기 짝이 없던 사내는 세상 무서운 게 없어 도도한 차가움이라는 갑옷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있었는데.
“당신이야말로, 버텨 줘서 고마워요.”
더없이 상냥한 말투로 미주는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를 잃은 남자를 위로했다.한참을 서로 끌어안은 채 느끼고 싶었던 체온을 나누던 두 사람 중에서 먼저 현실로 돌아온 건 미주였다.
“연호 씨, 우선 씻고 우리 밥 먹어요, 응?”
“좀만 더 이렇게 있으면 안 될까?”
“안 돼요, 씻고 와. 맛은 장담 못 해도 배를 채울 건 있으니.”
저를 슬쩍 밀치며 욕실로 집어넣는 미주의 횡포에 연호가 항복한다는 사인을 보내며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방금 제가 본 것을 떠올렸다.
거의 흐려졌지만 미주의 손목에 남은 쓸린 자국이 알려 주는 불편한 진실과 모르는 척해야만 하는 비밀.
연호는 싱긋-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시원하게 쏟아지는 뜨거운 온수를 만끽하며 모든 걸 씻어 냈다.
“앞에 가운 가져다 놨으니 입고 식탁으로 와요.”
어느 평범한 가정집의 모습처럼 샤워를 끝낸 연호와 미주가 단출하게 준비한 식탁에 앉아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먹자, 밥은 내가 푸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딱 봤어. 저기 아일랜드 위의 즉석 밥.”
“봤으면 빨리 렌지 돌려요.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지.”
행복했던 그때가 다시 돌아왔다는 듯 익숙한 동작으로 가볍게 식사 준비를 하고 간단히 배를 채웠다. 저도 미주도 정말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게 아니니, 느리게 움직이는 젓가락질 사이로 평범한 대화를 애써 나누었다.
“이거 두부 좀 먹어요. 원래는 교도소를 나오면 먹지만, 구치소도 먹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정갈하게 잘린 사각형이 노릇하게 구워진 채 제 앞에 놓여 있어, 연호가 괜히 볼멘소리를 내었다.
“나 무혐의야. 증거 불충분도 아니고 무죄도 아니고 무혐의.”
저는 먹지 않아도 된다는 듯 말하는 연호의 목소리에 장난이 가득해 미주도 웃으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커피? 차?”
“커피. 네가 좋아하는 거로 마실래.”
“아메리카노 뜨겁게 마셔요, 우리.”
두 사람은 억지로 슬픔을 감춘 채 뜨거운 머그잔을 각자 손에 쥐고는 예전에 그랬듯 소파에 나란히 앉아 후후 김을 불었다. 묘한 정적이 흐른 채 홀짝이는 소리만 이 저택을 채우고 있을 때, 연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야 말하지만 나는 너랑 이렇게 나란히 같은 곳을 보고 있을 때가 참 좋아.”
“왜냐고 이유를 물어봐야 하는 거죠?”
살짝 고개를 틀어 저를 보는 미주에게 연호도 고개를 틀어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옛날에, 네가 서진우 뺨 맞은 다음 날 내가 회의실로 불러냈을 때 안경을 쓰고 책상 위에 앉아서 다리를 까딱까딱 흔드는데, 어쩌다 옆에 앉은 내 어깨에 네 어깨가 슬쩍 닿았던 게 굉장히 마음에 남았어.”
“처음 같이 잔 거보다 그게 더 강렬한 기억이다, 이렇게 말해 버리면 나는 뭐가 돼요?”
“아니, 그게 있잖아. 그전에 너는 내 손끝만 닿아도 질색했는데, 네가 이렇게 옆에 앉아 나랑 어깨를 부딪친다는 게 너무 기분이 좋았거든.”
“뭔 말이야. 모르겠어.”
“아, 남자의 사랑을 몰라주는 무심한 여자 같으니라고.”
투덜댄 연호가 머그잔을 소파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두고는 팔을 뻗어 미주의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안았다.
“서진우 마지막으로 봤을 때, 사이 좋게 앉아서 네 욕 했었어. 그때 사실 되게 기분이 좋더라? 앞으로 너랑 싸우거나 했을 때 하소연할 곳 있을 것 같아서 좀 든든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 겨우 친해지려고 했는데, 오빠도 많이 아쉬웠겠다.”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사과하고 싶었어. 한 살 어린 놈이 거의 10년 동안 반말 찍찍 하고 건방지게 군 거, 미안했다고 말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괜찮다는 듯 품에 반쯤 안겨 있는 미주가 팔을 뻗어 제 허리를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 우리네 삶이겠죠. 당장 내일 우리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깐.”
서로에게 의지하듯 미주에게 기댄 연호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구치소에 있을 때 밖에 나가면 정말 널 품에 안고 안 놔줄 생각이었는데, 섹스보다 어쩐지 지금 이러고 있는 게 더 좋아.”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 오는 미주의 힘든 인생이 무겁게 전해져 연호는 미주의 팔을 쓰다듬으며 위로를 건넸다.
“아쉬워. 나 섹스 좋아하는데.”
“아, 오해하지 마. 문 열고 들어오자마자 발정 난 짐승처럼 하지 않은 거지, 안 하겠다는 게 아니거든?”
미주의 작은 머리 위에 연호가 턱을 괴듯이 기대고는 바람같이 가볍게 말했다.
“괜찮아. 다 괜찮아. 난 정말 괜찮아. 오히려 미안해.”
그가 뭘 괜찮다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미주는 눈물 대신 담담히 제 죄를 아는 남자가 내뱉을 선고를 기다려 본다.
“날 위해서 네가 해 준 모든 일들… 심지어 얼굴 빨개진다고 자칭 주목 공포증이 있는 미주 네가 마이크를 잡고 날 위해서 말해 줬다니…….”
떨리는 목소리로 연호가 미주를 있는 힘껏 안으며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진우 오빠… 숨이 끊어지던 그때… 나한테 맹세를 시켰어요. 살아남으라고, 약속이 아니라, 맹세하라고. 그래서 했어요. 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기로 오빠 앞에서 맹세했어요.”
“손목… 많이 아팠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집중해서 보면 여린 빛으로 남은 자국을 드러낸 건 비밀을 감추지 않겠다는 미주의 의지일 것이다. 그녀에게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 누군지 잘 알았고, 미주가 왜 그런 수모를 겪어야만 했는지도 뼈저리게 알았다.
“이제 몇 배로 돌려줄 테니 나 믿고 다 잊자.”
하지만 품에 안겨 있는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저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을 믿어요. 그렇지만 꼭 복수는 내가 마무리할 거예요.”
제가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걸 잃은 미주가 활활 타는 눈빛으로 연호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그래. 마무리 투수는 네가 하고, 나는 그놈을 삼진 아웃 시켜 영원히 마운드로 올라오지 못하게 할 거야.”
“…음, 마운드에서 아웃시켜 버리면 내가 공을 던질 기회가 없잖아요.”
“그러네.”
마주 보고 억지로 웃는 미주를 보니 가슴이 아프다 못해 갈기갈기 찢겨 넝마가 될 것 같았다. 연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어수선한 주변에 대해서 물었다.
“턱수염은 이제 괜찮은 거지?”
“네, 의식도 회복했고, 상처도 잘 아물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오른쪽 눈은…….”
미주가 끝말을 꿀꺽 삼키며 차마 말하지 못하자 연호가 위로의 뜻을 전했다.
“턱수염도 사실 내가 참 싫어했었어. 그런데 정말 다 부질없는 짓인 걸, 왜 잃고 나서야 아는 걸까?”
“요 며칠 집에만 누워 있느라 요한 씨 보러 가지는 못했지만 통화했어요. 자기 다 회복되기 전까지 절대 스텔라 사장으로 취임하지 말라고, 자기 꼭 취임식에 참석시켜 달래.”
“그래, 이젠 네 오른팔인데 당연히 옆에 있어야지.”
이제 질투 같은 감정 따윈 모두 승화시킨 것 같은 연호를 보며 미주는 몸을 떼어 냈다. 테이블에 둔 머그잔을 집어 들고 한 모금 길게 마셨다. 그리고 조금 망설였지만, 속이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몸을 틀어 연호를 정면으로 보면서 입을 열었다.
“연호 씨, 나 할 말이 있어요.”
표정은 조금 굳었지만 미주의 눈동자가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빛으로 저를 보고 있어, 연호는 알 수 있었다. 재민이 미주의 영혼까지는 더럽히지 못했음을.
미주 쪽으로 몸을 튼 연호가 그녀의 두 손을 제 쪽으로 끌어 꼭 잡으면서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안 들어도 다 아니깐 내 대답은 이거야.”
손등에 키스한 연호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너한테 그런 일을 겪게 한 내가 죄인이야. 넌 아무 잘못 없어. 그러니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
“연호 씨…….”
“나한테 고백하기 위해 네가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게 싫어서 그래.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
“사랑해, 미주야. 네가 믿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난 우리 아이… 유주를 잃고, 너까지 잃고 나서야 깨달았어. 너 없이는 안 돼. 난 윤미주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놈이라는 걸 알았어.”
흘리지 않으려고 했던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뚝뚝- 턱 끝에 맺혀 떨어지고 있었다. 미주가 목이 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 연호는 제 여자의 아픔을 다정하게 닦아 주면서 진심을 전했다.
“정재민은 실수한 거야. 널 가지면 이긴다고 생각했겠지만 틀렸어. 네 마음이 나한테 있는데 뭐가 더 중요하겠어?”
미주는 살짝 슬픈 듯 미소 지으며 제 손을 꼭 잡은 연호에게 농담처럼 대답했다.
“섹스는 안 했어요.”
“그럼 뭐 했는데?”
“묶어 놓고 날 괴롭혔어. 사디스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고자 새끼더라고.”
뜻밖의 아웃팅에 연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 새끼가 변태 새끼라니 어디 한번 죽기 직전까지 저질렀던 대로, 아니 그보다 몇 배로 이자 쳐서 내가 갚아 줄게.”
“마무리 투수는 날 시켜 준다면서요? 설마 변태 짓은 빠지고 싶지 않다?”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엄청난 짓으로 복수해 줄 테니깐, 그것만큼은 나한테 양보해 줘.”
손을 마주 잡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부부는 악을 해치우기 위해 더한 악이 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이제는 눈물을 그친 미주에게 연호가 물었다.
“Deal?”
재민을 죽이는 건 제가 할 테니, 고문 정도야 연호에게 맡겨도 되겠지. 미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Deal.”
제 말에 연호가 웃더니 소파에서 일어나 침실 방향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좀 쉬자, 이제. 오늘 하루 정도는 어떻게 끔찍하게 복수할지 더는 고민하지 말고 하루쯤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면서 밀린 얘기나 하자.”
“진짜 얘기만 할 거예요?”
“글쎄, 하는 거 보고.”
연호가 이끄는 대로 제 남자의 팔을 베개 삼아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게 좋았다. 이렇게 살을 맞대고 누워 체온을 나누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미주는 감격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랑한다는 게 뭔지, 조금 알 것 같아요.”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는 상냥한 손길에 조금 황홀한 표정으로 미주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진우 오빠가 날 사랑해 줬던 마음이, 마치 이런 느낌이었을 것 같아.”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안정되고… 어쩐지 잠이 잘 올 것 같은 그런 느낌이지?”
“음… 반 정도는 맞아요. 비슷했어. 내가 생각한 건, 봄날 훈훈하게 부는 바람에 앞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 같은 그런 따스한 기분이랄까?”
“너무… 추상적이라 오히려 와닿지는 않는데, 뭔 말인지는 알겠어.”
저를 더 세게 끌어안는 연호의 살 내음이 은은하게 코끝에 느껴져 미주는 겨우 쉴 수 있는 마음의 휴식처를 찾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당신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있잖아, 구치소에 누워서 이렇게 천장을 보고 있으면 내가 살면서 놓치거나 후회했던 순간들이 하나씩 떠올라 나도 모르게 계속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
미주의 등을 쓸면서 연호 역시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그녀의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 벗지 못한 마지막 위선의 가면을 드디어 벗어던지면서 인간으로서 나약한 자신을 미주에게 보여 주었다.
“그동안 나는 어쩌면 너를 사랑하는 나 자신한테 취해 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너를 정복해서 내 옆에 뒀다는 승리감, 거기에 취한 나머지 사랑하는 마음 자체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기에… 치졸한 마음으로 파르르 떨면서… 그다음은 말 안 해도 알지?”
“알다마다요. 하지만 아이를 잃은 건… 당신 탓만은 아니에요. 나 역시 그즈음 숨기는 게 많았고, 고민도 깊었고… 우리 산부인과 선생님 말씀이 정말 틀린 게 아니라면 하필이면 여러 가지 상황이 좋지 않아… 그다음은 말 안 해도 알죠?”
제 말을 고대로 따라는 미주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부딪친 연호가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오늘은 집에서 쉰다고 했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제대로 출근해서 밀린 업무를 봐야 해. 그리고… 우리 일이 정리되고 나면 같이 가자. 유주한테 인사하러.”
고개를 끄덕이는 미주의 귀밑머리를 넘기면서 연호가 따스하게 물었다.
“그리고 서진우, 아니 형님한테도 인사드리러 가자. 부산에 모셨다면서?”
“자기가 휴 헤프너도 아니고. 우리 희주 오빠가 마릴린 먼로였다니. 세상에, 납골당 옆자리를 사 놨을 줄 정말 몰랐다니깐요.”
“이야, 그거 진짜 사랑이네.”
“그치? 오빠가 진짜 사랑한 게 난지 우리 오빠인지 살짝 궁금해졌다니깐?”
“뭐야? 알고 있었어?”
진우가 미주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당연히 모를 수 없었던 연호는 지금 미주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새삼스럽다는 듯 미주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설마 몰랐겠어요?”
“…하긴, 그게 사랑이 아니면 말이 안 되지.”
“하지만 오빠의 사랑은 내가 오빠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저 너머에 있을 사랑이라 감히 날 사랑해 달라 할 수 없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뭔 소리야.”
“바보 차연호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풀어서 설명하자면, 당신이랑 내가 하는 사랑보다 더 위대하다, 그 말이에요.”
“아, 그건 공감해. 나는 그런 사랑 못 해. 이렇게 옆에 있는데 손도 못 대면 피 말라 벌써 죽었을 거야. 나는 저급한 놈이니깐.”
연호는 사랑이 넘치는 눈으로 미주를 지그시 보며 그녀의 턱을 제 쪽으로 살짝 잡아당겼다.
“서진우 몫까지 내가 옆에서 아껴 주고 평생 사랑해 주며 지켜 줄게.”
마치, 프러포즈하는 듯한 연호가 미주의 입술에 입술을 살짝 맞췄다 떼면서 계속 말했다.
“구치소에서 제일 후회한 일이 있는데, 물어봐 주면 안 될까?”
“싫은데?”
“나쁜 년. 좀 물어봐 줘.”
“좋아. 안 궁금하지만 억지로 물어본다, 나쁜 놈아.”
제 대답이 흡족하다는 듯 연호가 한 번 더 입맞춤을 하더니 조금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진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순간까지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어.”
“…….”
“밖에 있을 네가 너무 걱정되고, 서진우한테 미안한 게 너무 많았고… 회사도, 누나 일도 너무나도 복잡한데, 정재민 그 새끼를 어떻게 죽여 버릴지 매일 피눈물을 쏟으며 이를 갈다가 문득 떠오르더라고.”
미주의 반듯한 눈썹을 검지로 한 번 쓱- 쓸면서 연호가 한 번도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꺼내 보았다.
“만약 내가 서진우처럼 죽게 된다면 최후의 순간에 무엇을 떠올리면서 죽을까… 이런 생각이 드니 바로 사랑하는 네가 눈앞에 그려지는데… 본 적도 없는 모습이 상상되는 거야.”
“대체 무슨 꼴로 당신 눈앞에 그려졌는지 너무 궁금해.”
미주가 웃자, 연호는 그녀의 손바닥에 남은 깊게 베인 상처에 입을 맞추면서 부끄럽다는 듯 속삭였다.
“입은 적도 없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윤미주가 날 보고 웃고 있는데, 그 순간 이게 상상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정도였어.”
정말 뜻밖의 말에 미주는 당황스러웠다. 저도 그간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던 걸 연호가 언급하다니.
그때는 저와 절연을 선언한 진우가 폭주하고 있을 때라 그를 여러 가지 이유에서 막기 위해 급히 혼인신고만 하고 부부가 되었다. 그래서 그 뒤로 결혼식을 따로 올린 적 없었다.
가끔 웨딩드레스를 입은 저를 상상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의 첫 단추가 잘못 꿰이는 바람에 그런 걸 원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넘다 미주는 생각했었다.
함께했던 시간 동안 저를 사랑해 주는 연호의 마음을 느꼈다 해도 말이다. 사랑과 남자들의 싸움은 별개니, 언제든 저는 그에게 이용 가치가 없어질 수 있다고 여겼기에 농담으로도 입에 올린 적 없었다.
그런데, 서로를 물고 뜯고 할퀴다 못해 상처 준 끝에 하얀 웨딩드레스라니. 어안이 벙벙한 미주에게 너무나도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연호는 사과했다.
“결혼식, 몇 번도 하고 남았을 일을 생각도 못 하고 산 내가 너한테 얼마나 개새끼였는지 그때 안 거야.”
“…구치소, 갈 만하네요. 차연호가 갱생됐어.”
“모든 게 끝나면 그때 네 머리에 면사포 씌워 줄게. 내 아내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면 저승에 못 갈 것 같아서 그래.”
미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연호에게 눈을 흘기며 볼멘소리를 냈다.
“이것 봐. 차연호는 결국 죽는 순간까지 자기중심적인 거 자기만 모르고 죽겠어.”
“왜?”
“연호 씨가 보고 싶어서 나 웨딩드레스 입혀 준다는 거잖아요.”
“아… 그러면 안 돼?”
하지만 눈을 흘기는 것과는 다르게 연호의 뒷머리를 잡은 미주가 그의 머리를 제 쪽으로 당기면서 대꾸했다.
“하는 거 보고 입어 줄게.”
미주의 살짝 벌어진 입술이 연호의 입술에 닿아 지그시 문지르듯 비벼지더니 적극적으로 남자의 안으로 침범하고 있었다. 보드라운 그녀의 혀가 스리슬쩍 제 입술을 맛보더니 이내 갈라진 틈으로 들어와 제 혀와 얽혀들었다.
연호는 미주의 허리를 깊게 끌어안았다. 체중을 실어 미주를 묵직하게 누르면서 그녀를 아래에 눕혔다. 빈틈없이 메운 공간은 타액이 넘치는 소리로 가득했다.
연호의 혀가 부드럽게 미주의 입천장을 건드리다가 입술을 할짝대면서 더 깊게 혀뿌리까지 빨아 먹을 기세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긴 시간 갈구하고 갈망했던 상대를 다시 품에 안고 더없이 뜨겁지만 그렇다고 차분하지는 않게 서로에게 질척였다.
부부이니 관능적인 익숙함도 좋지만 풋풋한 연인같이 키스만으로도 짜릿함을 나누는 게 지금은 더 즐거운 유희였다.
손에 닿은 연호의 살짝 덜 마른 머리카락이 주는 시원한 감촉이 좋았다. 저를 소중하다는 듯 끌어안고 농밀한 키스를 나누지만 서두름 없이 천천히 제 몸을 나른하게 해 주는 연호가 사랑스러워 가슴이 아팠다.
“연호 씨.”
고개를 돌리면서 자연스럽게 떨어진 입술 사이로 미주의 고통스러운 마음이 새어 나왔다. 연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기에 제 얼굴을 미주의 가슴에 묻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먼저 말할게. 그 대신 말 끊지 마.”
“그래요.”
“2년이라는 우리 사이의 공백, 그 시간 동안 나는 깨달았어.”
두근거리는 미주의 심장 소리가 제 귀에 기분 좋게 들려왔다. 연호는 눈을 감고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그녀에게 더 가깝게 전했다.
“내가 왜 네 모든 걸 사랑하지 못했는지, 알게 됐어.”
미주는 마치 엄마 품이 그리워 안겨 있는 아이 같은 연호의 등을 꼭 안으면서 그의 고백을 경청했다.
“네가 했던 말, 그 말이 맞았어.”
“무슨 말을 했더라?”
“날 물건 취급 하지 말라고, 난 네 소유물이 아니라고 했던 말. 그 말 그대로야.”
그녀 옆을 떠나 제 마음을 들여다보며 매일같이 후회했던 시간 속에서 처음부터 잘못된 사랑이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내 사랑은 나를 위한 사랑이었어. 자해와 약물, 술에 취한 너를 내가 구해 줬다는 우쭐한 우월감을 느끼면서 널 항상 보살펴 줘야만 하는 약한 존재로 인식했었어.”
“…말 끊지 않겠다고 약속해서, 끼어들 수가 없네요.”
“그래, 끝까지 들어 봐. 쑥스러운 고백인데 이왕이면 근사하게 들어 줘.”
키스를 나눈 덕에 조금 부푼 입술을 혀로 살짝 적신 연호가 웃으면서 기쁜 듯이 말했다.
“넌 날 용서했어. 난 알아, 미주야. 네가 말로는 날 죽이겠다 증오하고 내가 밉고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 망할 사랑 때문에 날 용서할 수밖에 없어 괴로워했다는 걸… 느꼈으니깐…….”
숨을 들이쉰 연호가 내뱉듯이 마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널 내 눈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 거야. 네가 뭔 짓을 해도 관계없어. 진수오를 죽였어도, 정재민이랑 잤어도, 죽은 서진우가 다시 살아와 같이 떠나겠다 날 버려도.”
한 템포 박자를 쉰 연호가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죽은 자가 부활하는 그런 일은 없을 테지만. 네가 마음을 바꿔 지금 이 자리에서 날 죽여도, 난 기꺼이 네 손에 쓰러지기로 마음먹었거든.”
“미친놈.”
“맞아, 미친 사랑이지. 제정신이 아니야.”
“하긴, 나도 미친년이라 당신 사랑이 뭔지 너무 잘 알겠는걸?”
“좋네, 미친 커플. 남들이 우리를 이해 못 해도 상관없어. 이해를 받고 싶지도 않고, 심지어 네가 날 이해 못 해도 정말 괜찮아.”
연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고마워, 미주야. 네 선택은 옳았어. 나는 너를 믿고 지지하니깐 절대로 후회하지 말고, 선택한 과거에 대해서 더는 뒤돌아보지 마.”
“…연호 씨, 나한테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한 면죄부를 주지 마요.”
조금 울먹이는 것 같은 미주가 연호의 뺨을 만지면서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을 때였다.
“미주야, 날 위해 최선을 다해 줘서 고마워.”
“…멘트가 느끼해.”
“좀 그랬지?”
“심지어 너무 진부해서 하품할 뻔.”
몸을 살짝 일으킨 연호가 피식- 웃는 미주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면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태어나 날 만나 줘서 고마워.”
반대쪽 눈꺼풀에도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나도 너한테 구원받았어. 너 아니었으면 진짜 사랑도 모른 채 살았겠지.”
콧잔등에도 입을 맞춘 연호가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계속 중얼거리자, 미주는 부끄러운 듯 계속 타박해 본다.
“너무 대사들이 연극적이야. 그래서 제 점수는요, 탈락.”
“그래도 셰익스피어 같은 고전은 아직 먹히지 않을까?”
아, 잊을 뻔했는데 할 게 남아 있기는 했다. 다시 입술을 탐하기 시작한 연호가 본래 스타일대로 조금 터프한 듯 섬세하게 저를 녹여 내기 시작했다.
혀가 뜨겁게 부딪쳐 츄릅- 소리를 내면서 서로를 집어삼켰다. 이미 맛본 입술을 달콤하게 핥기 바빠 타액들이 끈적이면서 입가를 적셨다.
가운만 입은 연호가 끈 하나를 푸니, 탄탄하면서도 세밀하고 다부진 남자의 몸이 제 몸에 닿았다. 연호가 계속 키스를 퍼부으면서 제 옷을 벗겨 내는 걸, 미주 역시 적극적으로 도왔다.
“역시, 예뻐. 어쩜 이렇게 예쁘지?”
벗겨진 브래지어가 침대 아래로 떨어지자 볼록하게 솟은 탐스러운 미주의 가슴을 아름답다는 듯 연호가 보면서 유두를 손가락에 끼웠다.
“으읏……!”
연호는 핑크빛 작은 동그라미를 손끝으로 살살 괴롭히면서 점점 변하는 미주의 표정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조금만 만져 줘도 화가 나서 요렇게 동글동글 몸을 딱 세우잖아?”
엄지와 검지로 잡아 비비듯 끝을 만지다가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아……!”
남자의 손아귀에 잡힌 탓에 둥근 모양이 아니라 끝이 둥그스름한 삼각뿔 형태가 된 가슴을 연호가 입안 가득 물고 혀끝을 세워 유두를 자극했다. 맛있는 과일을 베어 물듯 연호는 미주의 가슴을 빨면서 온통 혀로 더럽히기도 하고 불면 깨질 듯 조심스럽게 또 만져 대기도 했다.
그리고 서서히 묵직한 남자의 체중을 담아 미주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갖다 대니, 배 언저리쯤 딱딱하게 솟은 페니스가 닿아 몸을 눌렀다. 서서히 아래로 향하는 손이 자연스럽게 스윽- 그녀의 음부 사이에 자리 잡아 붉은색 아래를 터치했다.
“하읏… 아. 좋아.”
부드럽게 벌어진 곳을 연호의 손가락이 왔다 갔다 하면서 제가 충분히 열릴 수 있도록 사랑이 가득한 애무를 해 주었다.
누구 말대로 섹스가 단순히 성기의 결합이라면, 지금 이것은 섹스가 아니라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전하며 영혼이 동화되는 에로스적인 행위일 것이다.
“조금 더 젖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더 느끼면 되겠지?”
“응, 그렇게 해 줘.”
살짝 엉덩이를 들어 다리를 더 넓게 벌린 미주의 원치 않게 다친 영혼을 제가 치유해 주고 싶었다. 연호는 벌린 탓에 적나라하게 보이는 그녀의 허벅지에 여전히 남은 고통의 상흔들에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키스했다.
“…으으응…….”
“괜찮아. 새로운 상처가 생겨도 내가 다시 아물게 해 줄 테니, 마음껏 상처 입어도 돼.”
입술로 죄를 닦아 내듯, 혀로 고통을 쓸어 내듯, 시간을 들여 하나씩 어루만지면서 그녀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팠다. 점점 안쪽으로 다가온 남자의 두툼하고도 젖은 혀가 가장 바깥쪽부터 달콤하게 먹어 치우더니 클리토리스를 할짝대기 시작했다.
“여기 또, 숨어 버렸네. 내가 금방 찾아낼 건데.”
손가락을 살짝 써서 부끄러워 몸을 숨긴 작은 돌기를 찾아냈다. 부드러운 입술로 비비고는 혀에 힘을 빳빳하게 주고 질척이다가 빨아 먹었다.
“흐응, 아… 흐!”
반쯤 눈을 감은 미주가 내리뜬 눈으로 아래에 고개를 박고 끄덕끄덕 목을 움직이는 남편의 행동을 보면서 달뜬 신음을 토해 냈다.
“아, 연호 씨…….”
애액이 흠뻑 흘러나와 시트를 적실 정도였다. 체취가 그득한 가장 사적인 체액이 맛있다는 듯 연호는 날름거리며 질구를 혀로 쓸다가 끝을 밀어 넣기도 했다.
점점 발끝에 힘이 들어가고, 몸이 녹진녹진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었다. 미주는 환상처럼 가끔 아래가 묵직해지면서 붕붕거리는 이명이 들리는 악몽을 이제는 떨칠 수 있을 것 같아 애타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빨리 넣어 줘. 넣어서 날 가득 채워 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미주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듯 앉은 연호가 페니스를 잡았다. 애액을 선단에 묻히며 단단한 기둥을 비비더니 끝을 쑥- 하고 밀어 넣었다. 기분 좋은 저항감으로 가득 찬 제 여자의 은밀한 곳이 환영하듯 꽉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미주는 다리를 살짝 들어 더 깊게 연호를 받아들이자 끝까지 몸속에 들어온 뜨거운 감각에 정신이 아찔했다. 가짜는 절대로 줄 수 없는, 사랑하는 남자와 살을 맞대고 몸을 섞어 서로를 하나로 만드는 이 기쁨.
철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배어 나오는 이슬 같은 눈물도, 간간이 참다가 못 견디겠다는 듯 잇새로 새는 연호의 신음도. 너무 행복하고 사랑스러워 미주는 그와 리듬을 함께 나누며 함께하는 쾌락이 주는 열락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하앗… 흐읏! 아아아……!”
있는 힘껏 세게 그녀의 몸 안으로 저를 뿌리까지 밀어 넣었다. 수렁 같은 뜨거움을 머금은 여자의 깊은 곳이 저를 사정없이 조였지만 그보다 미주가 쾌락의 환희를 느꼈으면 하는 마음으로 허리 짓에 속도를 올렸다.
“아……!”
타액과 애액으로 범벅인 결합점이 끈끈한 소리를 내며 질척였다. 미주가 한 번 인상을 쓰면서 허리를 움찔하자 강한 자극이 페니스에 느껴졌다.
“하아, 미주야. 네 몸이 정말 너무 부드럽고 좋아서 하루 종일 여기에 넣고 있고 싶어.”
“말도 안 되는……!”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연호가 더 격렬히 허리를 탁탁- 박아 넣자, 흔들리는 음낭도 더 세게 튀어 올랐다가 그녀의 몸에 부딪혔다.
“…소리, 아읏……!”
눈을 감고 잔뜩 느끼는 표정을 짓는 미주가 저도 모르게 손을 머리 위로 뻗어 베개를 붙잡는 게 연호의 눈에 들어왔다.
“아, 이렇게 느리게 움직이면 안이 막 꿈틀거리는 게 느껴져서 짜릿해.”
숨을 돌리려는 듯 연호가 조금 느리게 페니스를 자궁까지 찔렀다가 입구에 귀두가 살짝 걸칠 정도까지 빼냈다. 특히 끝에 물린 선단에 닿는 움찔하는 질구에 안쪽과는 또 다른 자극점이 있어, 연호도 느끼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연호는 재민과 섹스는 하지 않았다는 미주의 고백을 의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좆도 못 세우는 고자 새끼라고 할지라도 분명히 뭔가 이상한 짓을 했을 거라 여겼다.
심지어 그 고자 새끼가 사디스트라 묶어 놓고 괴롭혔다니, 연호는 미주의 몸에 남았을 비밀을 지워 주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은 온화하지만 육체는 조금 격정적으로 미주의 얼어붙었을 몸을 녹여 주고 있었다.
오래전, 그녀의 아픈 기억을 치유해 주고 싶었듯, 오늘도 맞닿은 살결 넘어 진심을 전해 다친 영혼을 치료해 주려고 했다. 다시 속력을 올리며 이번에는 몇 번 피스톤질을 하고 그대로 박은 채 허리를 돌렸다.
“하아! 하…! …아으읏……!”
“씨…….”
내벽이 미친 듯이 수축을 하면서 닿는 돌기가 주는 마찰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찌릿했다. 배꼽쯤부터 당기는 느낌을 보니 슬슬 사정감이 치밀어 올랐다. 연호는 분홍빛 신음을 헐떡이는 미주의 허리를 잡고 더 깊게 잡아당겼다.
“흐응……!”
턱턱-거리며 미주의 몸을 당겼다가 밀었다가 하자 제가 움직일 때와는 또 다른 감각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둔탁하지만 젖은 채 마찰되어 매끄럽게 붙었다 떨어지는 아래에서 생기는 충격파가 특히 미주를 더 즐겁게 괴롭히는 듯했다.
“이러면, 몸 안이 전부 야릇해지는 기분이라고 했지?”
“으응, 그래.”
신음하다 못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오빠한테 예의 없는 미주 특유의 반말이 나와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전에 물으니, 아래가 온통 얼얼할 정도로 묘한 감각이 퍼지는 기분이라 했다.
또 자연스럽게 제 치골에 닿는 클리토리스가 계속 자극되니 말이다. 질 안에서 페니스 때문에 느껴지는 쾌감과 더불어 두 배 더 강한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 같다고 미주가 말해 준 걸 연호가 기억 못 할 리 없었다.
“말랑한 네 몸 안에 날 잔뜩 채워 줄게.”
“아으! 하아……, …앗!”
양손에 잡히는 여전히 가느다란 미주의 허리를 더 세게 잡고는 더 강하게 삽입될 수 있게 팔에 힘을 잔뜩 줬다. 찌걱거리는 포르노 사운드 속에서 팔뚝의 힘줄이 불거지며 이마에 살짝 땀방울이 맺힐 때,
미주가 하이 톤을 내며 자지러졌다. 덕분에 쫀쫀한 근육이 제정신이 아닌 양 미친 듯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저를 조였다.
“아, 미주야…….”
연호도 더는 참지 못하고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제 안에서 터지는 절정을 그녀의 몸 안에 쏟아부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자연스럽게 숨을 몰아쉬면서 미주가 연호의 등에 손을 올릴 때, 그가 여전히 검붉게 발기된 페니스를 손을 잡고 제 몸에서 빼냈다. 주르륵- 정액이 흐르는 느낌 속에서 연호는 한 번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듯 스리슬쩍 미주의 어깨를 잡고 옆으로 틀었다.
“심장, 그렇게 쉽게 안 터져. 지금 터져서도 안 되고.”
제 의지와 관계없이 옆으로 누운 자세가 된 미주가 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 보았다.
“더는 못 하겠어.”
“맨날 그 소리.”
“내숭 떨 때는 모르는 척 좀 받아 주지.”
제 어깨를 잡은 연호가 허리까지 잡고는 옆으로 틀다 못해 침대에 뒤집어 놓더니 뒷덜미를 혀로 쓸면서 대꾸했다.
“내숭은.”
“흣…….”
저 때문에 미주가 엎드려 자는 듯한 자세를 취하자 날개뼈에 입을 맞춘 그가 새로 생긴 상처를 안타까운 듯 손으로 어루만졌다.
“소식 들었을 때는 굉장히 심각할 거로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상처가 깊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연호의 커다란 손이 다정하게 사선으로 등을 가로지르고 있는 자국을 따라 움직이자 미주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나 이제 몸에 칼 맞은 적 있는 여자야, 차연호.”
유치한, 치기 어린 어린애가 떠드는 것 같은 말을 들으면서 연호는 미주의 작고 얇은 등을 조심스럽게 손에 담았다.
“흉터가 있어도 여전히 예뻐. 오히려 훈장 같아서 정말 멋있어, 윤미주.”
거짓이 아니라는 듯 연호가 등에 새겨진 상흔에 뜨겁게 키스를 퍼부었다.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짧은 비음과 함께 순간순간 미주의 척추가 오목하게 패며 반응했다. 그러다 탐스럽게 익은 뽀얀 엉덩이쯤에 다다랐을 때, 침대 매트리스에 얼굴을 묻은 미주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고 싶어.”
“응?”
엎드린 탓에 소리가 묻힌 건지, 미주가 일부러 웅얼거리며 말을 얼버무린 건지. 여체에 밀착된 입술을 떼어 내며 연호가 귀를 의심한 채 몸을 세워 그녀의 얼굴 쪽으로 다가가 물었다.
“방금 뭐라고 말했어?”
“그냥… 아니야. 못 들은 척해 줘요.”
쑥스러운 척 얼굴을 매트리스에 숨긴 미주의 몸을 연호가 허리를 끌어안듯 제 쪽을 보게 돌리려 하자, 미주가 장난스럽게 힘을 주면서 버텼다.
“아니, 그냥 좀 넘어가 달라니깐.”
“안 돼,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 정말이야?”
남자가 작정하고 제 몸을 반듯하게 눕히려 드니, 찰나는 버텨도 결국 어쩔 도리 없이 등이 매트리스에 닿았다. 미주는 저를 내려다보는 연호의 감격스러운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회피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미주야, 나 똑바로 보고 다시 말해 줘.”
제 얼굴을 감싸 쥔 남자의 체온이 따스했다. 턱을 잡아 돌려 저를 보게 만드는 그의 눈빛이 주는 뜨거움이 힘든 제 인생의 휴식처럼 편안하게 와닿았다.
순간 분위기에 휩쓸려 충동처럼 내뱉은 말이긴 했지만 언제나 가슴속에 무거운 돌덩이처럼 매달려 있던 그 말.
“정말이지? 응?”
기쁜 듯이 웃는 연호가 슬픈 눈을 하는 게 마음이 아파 미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팔을 뻗어 제 남자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 나 당신 아기를 다시 갖고 싶어졌어. 가질 수만 있다면 말이에요.”
“우리 아이지, 내 아이가 아니야.”
연호가 미주의 상체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대로 몸을 일으켜 허벅지에 앉혀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이 야한 것도 좋지만, 같은 소리를 내며 두근거리는 게 훨씬 좋았다.
부부로 살아왔으니 이미 볼 거 못 볼 거 다 봤다고 한들 말이다. 새침한 표정으로 괜히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하는 미주가 너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사랑이 이렇게 넘치니깐, 금방 생길 수 있을 거야.”
연호가 긴 머리카락을 계속 쓸어 넘기며 다정하게 말하지만, 어째 손길은 섹시하게, 그리고 바삐 움직였다.
“가득 채웠으니 흘러넘치잖아. 사랑도, 이것도.”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인 연호가 야살스럽게 속삭이며 제 다리 사이에 걸터앉은 미주의 젖은 음부를 만지작거렸다.
“으응, 읏……!”
제가 남긴 흔적과 미주의 애액이 끈끈하게 뒤섞여 내는 찰박한 소리가 음란하게 느껴졌다.
“콧소리를 내는 것도 귀엽고.”
조금 전 삽입으로 인해 살짝 부푼 내밀한 곳을 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지면서 귓가에도 혀를 놀렸다.
“허리를 흔들면서 내 혼을 쏙 빼놓는 것도 미치겠고.”
“하아, 으읏…….”
손끝이 하늘을 보듯 그대로 손가락을 미주의 몸속으로 넣고는 까딱까딱- 안에서 관절을 움직였다. 미끌미끌한 점액으로 가득 찬 내부를 앞뒤로 만지자 미주가 허리를 틀며 제 어깨를 깨물었다.
익숙한 반응도 지겨운 게 아니라 매번 새로운 자극처럼 짜릿했다. 연호는 천천히 미주를 다시 침대에 눕히며 계속 손목을 썼다.
“흐읏! 하아! 으응……!”
자연스럽게 세워진 무릎이 더 깊게 연호를 받아들였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몸이 움찔거리며 나른한 쾌감이 몰려올 때 미주가 입술을 열었다.
“나도 당신, 하앗… 기분 좋게 해 주고 싶어.”
그런데 고개를 저은 연호가 손을 빼내더니,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혀로 핥고는 상체를 숙이며 미주의 허벅지를 더 넓게 벌리면서 대답했다.
“난 이게 제일 기분 좋아.”
여전히 단단한 강직도를 가진 커다란 페니스를 비부에 밀어 넣자, 딱 맞게 주름진 근육들이 저를 옭아매었다.
“흐응…, …아앗!”
추삽질을 하는 남자의 허리가 강하게 여자의 안쪽을 공략했다. 미주를 처음 원했던 그 마음대로, 집요하기도 하면서 오직 한 가지 목적만 가진 듯 후퇴 없이 전진하다가 못해 몸속을 꿰뚫었다.
그리고 이미 격정적으로 키스를 여러 번 나눈 덕에 빨갛게 도톰해진 미주의 입술 사이로 연호가 혀를 밀어 넣었다.
“으읍, 흐으읍.”
달콤하고 녹진하게 열에 들뜬 목소리도 연호에게 잡아먹혔다. 오른손과 함께 왼손마저도 잡아 쥔 연호가 깍지를 끼고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놓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제 은밀한 부위마저도 연호의 검붉은 몸뚱이에 잠식당해 속수무책으로 엉망이 되고 있으니 저는 평생 연호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걸 알았다.
육체도, 마음도 모두 그에게 몽땅 빼앗겨 버렸다. 깊은 곳까지 닿는 남자의 페니스가 가장 원초적인 욕구를 위해서 움직이는 쾌락에 이미 길들여져 버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는 열락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미주는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살짝 눈물이 맺혔지만 울진 않았다.
바다 위를 표류했던 것 같은 제가 이제는 연호에게 완전히 닻을 내린 것을 직감하면서.
“흐읏… 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키스를 너무 길게 한 탓에 말을 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속도로 허리를 움직이며 하나가 되는 제 행동으로 아마 전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아아아!”
겨우 입술이 떨어진 절정의 순간에, 연호가 인상을 쓰며 짧은 격정을 쏟으면서 몸속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몇 번이고 가득 부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