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감히 부탁드립니다
* * *
[남편은 다음 주에 나올 수 있어요.]
본디 진우의 집무실이었던 곳을 빠져나오자마자 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내고는 미주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발을 겨우 뗄 때였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갈 테니 어디 계신지 알려 주세요.]
정말 1초 만에 회신되는 텍스트에 마음이 놓여 눈물이 고였다.
[24층으로 오셔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 복도 끝에 자판기가 있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의자 한두 개가 있어요. 거기 계세요.]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미주는 오래전 일했던 전략실이 있는 24층에 위치한 화장실로 들어갔다.
‘여기라면 괜찮아.’
혹여 누군가가 저를 본다 해도 일했던 곳이 궁금해 왔다 핑계 대기도 좋았다.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세면대에 물을 틀고는 입부터 급히 헹궈 냈다.
“욱-!”
구토감이 치밀었다. 입안 가득한 타인의 체취에 내장까지 쥐어짜 모두 털어 내고 싶었다.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넣어 자극해 보지만, 먹지 못해 나오는 것도 없었다.
한참을 욱욱-거리며 구역질을 한 미주가 피가 쏠려 얼굴이 터질 것 같을 때 겨우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다행이야. 이 정도면 어찌어찌 화장으로 가릴 수 있겠어.’
세수하고 싶었지만, 화장이 다 지워질 수 있으니 미주는 손부터 깨끗이 씻고 물을 잠근 후 핸드백 안에서 쿠션을 꺼냈다.
‘쓰리고, 아리고… 아프기까지 해. 하지만 아무리 이게 고통스럽다 한들, 기억해 내. 아이를 잃던 날의 고통과 희주 오빠가, 진우 오빠가 죽던 순간을.’
육체에 가해지는 그 어떤 물리적인 고통도 제 마음이 무너진 날 받았던 아픔보다 클 순 없었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주먹을 꽉 쥐고 참고 이겨 내 본다.
‘버텨 내야 해. 난 살 거야. 쓰러질 땐 쓰러지더라도 이사회는 끝내고 쓰러지자.’
이를 악물고 제 몸에 가해진 행위의 잔상이 주는 괴로운 여운을 버텨 냈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겨우 쿠션을 두드리고 있을 때, 핸드백에서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24층, 말씀하신 곳에 도착했습니다.]
다행이었다. 제 편인 사람이 여기 있다. 미주는 핸드폰을 백에 넣고는 쓸리고 묶인 자국이 너무 선명한 팔목까지 어떻게든 최대한 감춰 보려 애썼다.
‘다행이야. 그나마 원피스가 긴팔이라 조심하면 되겠어.’
옷매무새를 확인한 미주가 화장실 거울을 보며 제 뺨을 때리면서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그 고자 새끼 엿 먹였으면 된 거야.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거울 속 저를 보며 최면을 건 미주가 조용히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다행히도 화장실을 들어가고 나올 때까지 저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수행 비서 하나 없는 재벌가 사모님이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할까? 미주는 고개를 숙인 채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태연하게 걸었다.
“사모님.”
“뭐야, 커피 한 잔 정도는 뽑아 놓고 기다려 줄 줄 알았는데요?”
어딘지 모르게 걷는 게 불편해 보이는 미주가 저를 보며 웃으면서 다가오자 정훈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 모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취향을 몰라서요.”
“자판기는 역시 밀크 커피죠. 한 잔 사 주세요.”
지폐를 넣고 버튼을 누른 후 윙- 하는 소리와 함께 뽑힌 커피를 미주에게 건넸다.
“아, 살 것 같다.”
굉장히 연극적인 톤인 미주에게 정훈은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왼쪽 손목의 시계를 힐끗 보고는 그녀를 살짝 재촉할 뿐이었다.
“10분 뒤에 이사회가 시작되니, 슬슬 가 보셔야 합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인 미주가 들으랍시고 커피를 호로록- 소리 내 마시더니 빈 컵을 휴지통에 넣었다.
“바쁜 건 알지만 잠깐만 내 손 좀 잡아 줄래요? 기를 좀 나눠 주세요.”
여기까지 오기 위해 너무나도 너무 많은 걸 희생한 미주가 어렵지 않은 걸 부탁해 왔다.
정훈은 조용히 미주의 손을 잡고는 괜찮다는 듯 토닥거렸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정훈의 배려에 미주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섹스는 안 했어요.”
그건 거짓말이자, 거짓은 또 아닌 말이었다. 그렇다고 완벽한 진실도 아니었고.
재민의 말대로 섹스는 남녀 성기의 결합을 뜻하니, 저는 재민과 섹스를 하지 않았다.
유사 성행위가 있었을 뿐이지만 엄밀히 말해 그건 성행위가 아니었다. 아니, 섹스가 아니어야만 했다.
정훈도 미주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차라리 저를 속여 주길 바랐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든 미주의 입에서 나온 하얀 거짓말만 믿기로 했으니깐. 그래서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미주에게 웃으면서 대답해 보았다.
“네, 오늘은 아무 일도 없이, 오래된 친우인 정재민 실장과 이사회 전에 만나 담소를 나누셨던 것뿐입니다.”
“담소, 좋네요. 틀린 말도 아니고.”
피식- 웃은 미주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핸드폰을 끄게 한 게 정재민 쪽 직원이 급히 그를 호출한 이유와 관련이 있는 거죠?”
미주의 손을 놓으면서 정훈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제가 접촉할 수 있는 주주들과 임원에게 부탁드렸습니다. 갑작스럽게 후보로 나왔지만 사표死票가 될지언정 윤미주 씨를 지지해 달라, 말했습니다.”
“어차피 내가 회장이 될 일은 없지만 저들에게 우리 세력이 결집된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 말이신 거죠?”
“네, 물론 시간이 촉박해서 모든 분을 설득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돕겠다 약속은 받았습니다.”
커피를 마셔 카페인 덕분에 머리가 각성이라도 된 걸까? 미주가 정훈의 말을 곰곰이 되씹고 있을 때,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시간이 너무 없으니 빨리 회의실로 올라가시죠. 가면서 제가 계속 브리핑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늦으면 안 되니 빨리 가요.”
빠른 걸음으로 갈 길을 재촉하니 아랫배 전체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정훈의 말을 들으면 고통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가 한 시간 동안 해낸 것을 듣고 있었다.
“부회장님 쪽은 당연히 사모님을 지지합니다. 중간층에게는 서 전무님께서 생전에 후계자처럼 키우려고 했다 어필했습니다. 경력은 부족하지만 재벌가에서 다들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거 이상한 일도 아니라는 식으로 설명하면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의외로 그런 면은 수긍하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진짜 회장이 되겠다가 아니라, 최 사장이 회장이 되더라도 그들의 독주를 막는 게 좋다고 설득도 하셨겠네요?”
“정확합니다. 사모님께서 시간을 끌어 주신 덕분에 제가 접촉하는 걸 정재민이 전혀 막지 못했고요.”
정훈이 애써 준 덕분에 제가 강요받았던 한 시간은 다행히 끔찍한 기억으로만 남는 게 아니라 기회의 발판으로 미화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미주는 정훈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이사회가 열리는 회의실에 도착했다.
이미 오너 일가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것도 있지만, 차현 전자 최 사장에게 잘 보이려고 인사를 하며 눈도장을 찍으려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사모님, 고생이 많으시지요?”
“아니에요, 남편이 더 고생이죠.”
“장례식 이후로 처음 뵙습니다. 바쁘신데 이렇게 참석해 주셨네요.”
“네, 그러네요. 저보다 부사장님께서 더 바쁘실 텐데 제가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게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미주가 최대한 차분한 표정으로 온화하게 착석하자,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중하게 노고를 치하하며 저는 낮추는 화법을 쓰는 미주를 보며 정훈은 진우가 그녀를 높게 평가한 이유를 한 번 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개회하겠습니다.”
앉은 자리가 불편했다. 참는다고 했는데, 의자에 몸이 닿는 순간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올 정도로 아래에 뻐근한 통증이 퍼졌다.
앉는다는 행위로 인해 체중이 둔부에 실리자 쓰리고 아리고 고통스러운 감각이 밀려왔다. 미주는 입술을 세게 물며 최대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참아 냈다.
남들에게는 그저 자리만 채우는 오너 일가 중 영향력이란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참한 얼굴로 가만히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는 거로 보이겠지만.
미주는 저와 대칭되는 곳에 앉은 차현 전자 최 사장의 옆자리를 차지한 재민을 지그시 보았다.
‘나도 그렇지만, 너도 참 뻔뻔해. 그러니 그 오랜 시간 동안 철면피처럼 우리 옆에 있었겠지.’
조금 전, 바지를 내리고 제 것을 흔들던 놈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말쑥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저 역시 벌거벗은 상태로 섹스보다 더한 일을 겪어야 했지만 여기 이렇게 새초롬하게 세상 순진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재민이 저를 보면서 안경을 한 번 치켜올렸다. 미주는 재민 보란 듯이 앞에 놓인 물컵을 집어 물을 꿀꺽 삼키고는 그를 향해 영업용 미소를 날려 주었다.
그렇게 미주와 재민이 기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회의는 계속 진행됐고 마침내 기다리던 순서가 되었다.
“현재 공석인 회장직에 입후보한 차현 전자 최 사장님께서 먼저 스피치하시겠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최 사장은 준비한 대로 어려운 상황에서 결단을 내려 그룹을 위해 제 한 몸 바치겠다는 이미 다 짜인 대사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여기 계시는 분들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저는 원래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차현의 존폐 위협 속에서 저희가 더 똘똘 뭉쳐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면……”
미주는 죽은 진 회장까지 들먹이며 제가 입사해 여기까지 올라온 이야기를 간략하게 하는 최 사장을 경청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하긴, 입지전적인 인물이긴 해. 평사원 공채로 입사해 임원을 넘어선 사장단에 이름을 올렸으니, 정재민이 잘 고르긴 골랐어, 사람을.’
하지만 미주는 연호와 진우에게 들은 바 있어서 그가 어떻게 출세하게 되었는지 잘 알았다. 진수오의 차명 계좌를 관리해 주는 대가로 승승장구한 평범한 남자는 끝까지 저를 만들어 준 주인의 충실한 개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여기에 있었다. 그를 저지하고, 뒤에 있는 흑막을 막아서야만 했다.
“그럼, 윤미주 씨의 스피치도 들어 보겠습니다.”
지금 여기 호명될 때조차 아무런 직함 하나 없기에 ‘윤미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저 믿으세요. 계획이 있어요.”
미주는 정훈에게 작게 속삭였다. 사회자에게 눈인사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반갑습니다. 윤미주라고 합니다. 우선 오늘 다들 바쁘신 와중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하다 머리 숙여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몸을 90도로 숙여 깍듯이 인사를 한 미주가 다시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저는 이런 큰 회의에 참석해 본 적 없어서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분들을 모시고 매끄럽게 이사회 사회를 맡고 계신, 차현 생명 부사장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미주가 청중의 박수를 유도하자 여기저기서 짝짝-거리는 박수 소리가 나왔다. 덕분에 사회자는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주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전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임원진분들과 주주 여러분들께서 잘 알다시피 저는 지난 몇 년간 차연호 부회장님의 아내로서, 내조에 힘쓰며 살았습니다.”
웃는 얼굴로 낭랑하게 조곤조곤 말하고 있는 아리따운 여자에게 아무래도 남자의 성비가 더 높은 이 현장의 시선이 점점 집중되었다.
“그랬기에 불미스러운 사건들의 연속으로 한낱 가정주부였던 제가, 감히 오너 일가라는 이유만으로 차현 그룹 회장직에 도전하겠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얼마나 기함하셨을지, 그 부분도 잘 알고 있습니다.”
대체 미주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지. 정훈은 그녀가 일어나기 전에 말한 ‘계획이 있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습니다. 저는 제 위치를 잘 알기에 돌아가신 제 친오빠와 다름없었던 서진우 전무님께서 생전에 부탁하신 차현 호텔 산하 카지노, 스텔라 론칭에 온 힘을 쓸 예정입니다.”
장내가 일순 술렁거렸다. 미주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면 그건 그녀가 지금 회장 후보에서 사퇴하겠다는 뜻과 비슷했다.
정훈이 조금 놀란 눈빛으로 옆에 서 있는 미주를 올려 보니, 눈이 마주친 그녀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으라는 표정. 알겠다는 듯 정훈이 다시 태연한 얼굴로 앉아 있는 각각의 참석자들을 훑으며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을 때였다.
미주는 멀리 앉아 있는 재민이 이겼다는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어, 오히려 축하한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래서 저는 감히, 이곳에 계시는 분들에게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살짝 마이크를 입에서 떼어 낸 미주가 목이 마른 듯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참석자의 시선과 흥미를 한데 모았다. 마치 타고난 선동가처럼 배운 적도 없는 행동을 하며 좌중을 휘어잡고 있었다.
“지금 구치소에 계시는 차연호 부회장님께서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차현을 위해 살아왔는지, 제가 굳이 구구절절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마 이곳에 계시는 분들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제 말에 원래 연호에게 줄을 대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주에게 동조해 주었다. 그래서 좀 더 자신감이 가득한 말투로 미주는 천천히 진짜 그들에게 원하는 걸 달콤한 말로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는 늘 선대 회장님, 즉 제게는 사적으로 시아버님이셨던 회장님의 유지를 언제나 말해 주곤 했습니다. 차현이라는 이름은 할아버지께서 단순히 연안 차씨의 성을 딴 ‘차’와 밝을 현의 ‘현’을 붙여 지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조금 다르게 설명을 해 주셨다고 부회장님께서 가끔 말했습니다.”
역시 선대 회장을 거론하자 그 시절 다 같이 잘살아 보자고 열심히 몸 바쳐 차현을 위해 일했던, 지금은 머리가 희끗해진 사람들이 아련한 눈빛으로 저를 보았다.
“밝을 현은 지금 회사를 위해서 일해 주는 수없이 많은 직원들을 뜻한다고, 그들이 없으면 차현은 아무것도 아니니 항상 직원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라, 늘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노골적으로 감성을 자극하는 식상하고 올드한 멘트가 꽤 먹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제 말에 탄식의 한숨을 쉬는 이들도 있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어 미주는 쉬지 않고 그들을 현혹했다.
“부회장님께서는 늘 그 말을 가슴에 새긴 채 차현을 위해서 일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회장님 역시 사람이기에 실수할 수 있고, 넘어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마침내 제가 하고자 했던 말을 하며 미주는 어금니를 꽉 문 채 조금 울먹이듯 호소했다.
“차연호 부회장님에게 기회를 주세요. 그가 회장직에 정말 적합한 인물인지 좀 더 냉정하게 평가해 주실 시간을, 부회장님에게 주세요. 왜냐면 차현은 여러분들께서 이끌어 가는 회사이지, 회장 한 명이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곳이 아니니까요.”
궤변에 가까운 말이지만 미주는 최대한 감성에 호소해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 했다.
“그리고 차연호 부회장님께서 잘못하고 있다면 바로 여러분들께서 따뜻하게 질책해 주시고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등불과 등대가 되어 주세요.”
재민이 논리적으로 차현 전자 최 사장이 회장직에 맞다고 설득했다면 오히려 정반대의 방법으로 판을 흔드는 게 승산이 있다, 미주는 생각했다.
그것도 ‘제가 회장이 되겠으니 뽑아 달라’가 아닌 ‘차연호를 기다려 달라’면, 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재민에게 모욕당하고 있을 때 정훈이 그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저를 지지해 달라 했다면 말이다. 제 편이 아닌 이들도 끌어당길 묘수가 필요해 지금 이 자리에서 눈물 섞인 말투로 호소한 결과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회장직이 공석이라고 해서 차현은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 계시는 사장단과 이사진들, 그리고 우리를 믿어 주시는 주주 여러분들이 계시기에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여기저기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앉은 이들과 뭔가를 다들 의논하는 듯한 모습에 미주는 만족스럽다는 듯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인 채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차연호 부회장님이 다시 그룹으로 돌아와 헌신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한 번 더 몸을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한 미주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옆에 있던 정훈이 놀랍다는 눈빛을 보내자, 살짝 그에게 몸을 숙여 속삭였다.
“한국 사람들은 마음이 약해요. 그걸 이용하면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부회장님을 지지해 달라 말씀하실 줄 몰랐습니다… 심지어 후보가 아니기에 이건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정훈의 말에 씩- 웃으며 미주가 대답했다.
“결과를 보면 알 거예요.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하이에나는 아닐 테니, 그들도 생각이 있다면, 그리고 내 말을 수긍했다면 어떻게 해야 가장 적절한지 저보다 잘 알 거예요.”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미주가 일종의 후보 사퇴를 함으로써 투표는 단독 후보 최 사장을 회장직에 추대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하지 않는가가 되었는데.
과반수가 넘는 사람들이 기권을 하거나 최 사장을 뽑지 않았다. 그리하여 최 사장은 계속 차현 전자 사장에 머무르게 되었고, 차현 그룹 회장직은 여전히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본디 연호와 진우 쪽 사람들 외 일종의 부동층이라고 볼 수 있었던 이들이 미주의 말에 마음을 움직인 듯했다. 아니면 그저 최 사장이 탐탁지 않았기에 좋은 핑계로 그를 외면했던 건지도.
“…허, 이게 무슨.”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사실상 최 사장이 회장이 되는 게 거의 당연한 분위기였는데 미주가 흐름을 바꿔 버렸다.
처음 저와 의견을 나눌 때처럼 그녀가 끝까지 후보로 나왔다면 아마 최 사장은 왕관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후보인 척 나와 사람들의 이목을 끈 다음, 남편에 대한 변함 없는 지지를 호소하다니.
정훈은 패배자가 된 그들의 적에게 시선을 돌렸다. 최 사장은 죽상이 되었고, 아무 말 없이 미주와 정훈을 보던 재민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훈과 눈이 마주친 재민은 저들을 지켜보겠다는 듯 검지와 중지를 V 자로 만들어 제 눈 쪽을 가리킨 다음 정훈을 가리켰다. 미주가 같잖다는 듯 웃자 재민은 더는 액션을 취하지 않고 최 사장과 함께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정 실장, 이렇게 되면 상무 승진 건도…….”
사무실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최 사장이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듯 목소리를 내자, 재민은 괜찮다는 듯 대꾸했다.
“저는 뭐,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되지만 최 사장님은 이제 일주일 뒤에 차연호가 나오면 아무래도 좀 껄끄러워지겠습니다.”
탄식하듯 한숨을 쉰 최 사장이 불안함이 가득한 눈으로 재민을 보면서 말했다.
“돌아가신 회장님께 의리 지키려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면 나도 내 살길 찾아야 할지도 몰라.”
“배신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시죠?”
“아니야, 무슨… 내가 그럴 놈으로 보이는가!”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되려 역정을 낸 최 사장이 흠- 소리를 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마자 인사도 없이 쌩-하니 재민을 두고 먼저 나갔다.
재민은 그런 최 사장의 행동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천천히 차현 그룹 본사 로비를 지나 출입구 밖으로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반짝반짝하는 높은 건물이 하늘에 닿을 듯 솟아 있었다.
‘저기에 한 번은 올라가 보고 내려오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겠어.’
하지만 이럴 줄 알았기에 처음부터 계산된 패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진우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날 결심한 걸 다시 곱씹어 보면서.
저는 원하는 걸 다 이룬 패자가 될 것이니, 그들은 하나도 갖지 못한 승리를 맛보리라!
끝끝내 재민이 끝을 보겠다 칼을 갈고 있을 때, 아직 회의실에 남아 있던 미주에게 다가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녀를 격려해 주고 있었다.
“사모님, 말씀 정말 잘하시네요. 뭔가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내조를 이리 잘해 주시니 부회장님께서도 구치소에서 안심하고 계시겠습니다.”
눈치 빠른 자들은 벌써 판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입바른 소리를 하고 있었다. 미주 역시 웃는 얼굴로 그런 박쥐 같은 이들에게도 겸손한 표정으로 되려 잘 부탁한다 말하고 있었고.
어쩌면 이 자리가 미주의 공식적인 데뷔인 것 같아 정훈은 묵묵히 뒤에서 그녀를 지켜 주었다.
‘진우 형, 그래서 스텔라라고 지은 겁니까? 처음부터 미주 씨한테 주려고…….’
어쩌면 진우는 그녀를 차현의 진짜 일원으로 만들려고 했던 건지도 몰랐다. 한 남자의 아내도 좋지만, 그는 동생을 피로써 이룩한 자리에 본인 대신 앉히고 싶었던 건지도.
진짜 진우의 뜻이 무엇인지 이젠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그의 유지는 공식적으로 사람들에게 공표된 거나 다름없었다.
미주가 은근슬쩍 카지노의 오너가 되겠다고 차현의 실세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 말했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반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훈은 룸미러로 슬쩍 미주를 보면서 물었다. 너무나 길고도 아팠던 하루가 이제 끝나 모든 것을 잊고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말이다.
“스텔라 이야기도 역시, 일부러 흘리신 거죠?”
정훈을 속일 수 없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미주가 눈을 뜨면서 대꾸했다.
“일부러 큰 거를 버리는 척하니, 아무도 토를 달지 않네요.”
“처음부터 사퇴하실 생각이셨다면 저한테 귀띔이라도 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조금 원망하는 말투의 정훈이 룸미러로 흘겨보자 미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까 24층 자판기 앞에서 떠올랐던 거예요. 하 변호사님께서 사표 얘기를 하실 때 문득… 이게 더 낫지 않을까 하고.”
저를 뽑아 준다 한들 대세를 바꾸긴 어렵다고 누차 정훈이 말했었다. 그래서 이대로 당하지만 말고 적어도 우리가 이 정도 덩치로 너희를 견제하고 있다는 걸 저에게 표를 던지는 거로 보여 주자, 정훈이 생각해 냈는데.
‘사표보단 차라리 기권이 더 좋을 것 같은데…….’
거기서부터 시작된 생각이 꼬리를 물자 떠올랐다. 다른 대안이 없다면 차라리 원점으로 돌아가 보는 게 낫지 않을까 했다.
‘남편을 지지해 달라고 하는 거야. 쓸데없는 사연 팔이 넣어서 적당히 거짓말로 구슬려 내가 아닌, 불쌍한 왕자님 좀 도와 달라고 빌어 보는 거야.’
도박을 했다. 어쩌면 제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베팅이었다. 순간 삐져나온 생각을 검토해 볼 시간도 없이, 그대로 질렀다.
직감을 그냥 믿었다. 한 번 정도는 그저 직관적으로 행해도 될 것 같은 일이, 하필이면 차현 그룹 회장직과 관련한 일이라니.
“덕분에 최 사장을 저지했으니 다행이긴 합니다만… 예상치 못한 결과에 지금 정 실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듯한 게 걱정입니다.”
미주는 이마에 난 작은 혹을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그것까지 노렸어요. 지금쯤 날 죽이고 싶어서 길길이 날뛸 테니 차라리 냉정한 머리를 식히지 못해 뭔 사고라도 치길 바라고 있을 뿐이에요.”
저를 산산조각 내려고 했던 놈이 오히려 제게 조리돌림을 당했다. 이제 앞으로 재민은 더는 저를 생각하면서 자위를 하지도 못하겠지. 아니, 저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아 더 발기가 잘될지도 모르려나?
아무튼, 그 고자 새끼는 이 모든 끔찍한 비극을 만들면서까지 거머쥐고자 했던 권력마저 눈앞에서 잃었다.
미주는 욱신거리다 못해 두들겨 맞은 듯한 몸을 간신히 버티며 진우의 마지막 말을 되뇌었다.
“살아남은 놈이 이긴다. 끝까지, 무슨 짓을 당해도 살아남아라.”
“…….”
마치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그 말이 정훈의 가슴에도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진우는 결국 끝까지 재민에 대해서만큼은 잔인해지지 못하고 정 때문에 망설이다 당했으니 죽는 순간 그녀에게 당부했을 것이다.
‘진우 형, 형 말대로 형 동생도 이제 피도 눈물도 없는 불도저가 되었어요. 심지어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아 결국 그게 그녀를 파멸시킬까 봐 두렵기도 하고요.’
멍하게 칼자국이 새겨진 두 손을 들여다보고 있는 미주가 안쓰러웠다. 정훈은 끝까지 침묵하기로 한 오늘 일에 대해서 무덤까지 함구하기로 한 번 더 결심하고는 이젠 편히 쉴 수 있게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며칠은 좀 쉴게요. 뒷일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걱정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요한 씨를 잘 보살펴 주세요. 혹시라도 의식을 되찾으면 꼭 연락해 주세요, 가 볼 테니.”
마치 평범한 일과를 마친 것처럼 태연하게 인사를 하고 인사를 받아 준다.
비틀거리며 겨우 마음 편히 안락하게 쉴 수 있을 곳에 들어오자, 미주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어… 난 정말 그 방법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어…….”
귓가에 윙윙-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갑자기 제 아래가 들쑤셔지면서 꽉 찬 느낌이 환상처럼 들더니 붕붕-거리는 이명이 들렸다.
거실 바닥에 주저앉은 미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이제는 습관처럼 손바닥을 뚫어져라 보며 뚝뚝- 자상을 입은 곳에 눈물을 떨어뜨렸다.
“죽고 싶었어, 오빠. 차라리 그 고자 새끼가 날 죽여 주길 바랐어. 그런데… 참았어. 오빠를 생각하면서 참고, 연호 씨를 생각하면서 이겨 냈어.”
살아서, 정재민의 최후를 보겠다는 맹세를 지켜야만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의 최후는 제 손으로 직접 내려 주고 싶었다.
“오빠, 남편이 내 행동을 알고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더럽다 욕해도 할 말 없어. 추잡한 짓을 했고, 부부로서 믿음을 깨뜨렸어… 그래도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
살인죄까지 더해지면 연호는 사실상 사회적인 생명이 끝나는 것과 다름없었다. 오늘 일은 그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미주의 미친 사랑이 불러온 결과였다.
“내일이 되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어… 정재민이 폭탄이라도 나한테 터뜨릴 것 같은데 말이지…….”
누구는 이런 말을 했다. 재벌의 아내가 되어 인생을 편히 살게 되었으니, 부럽다고. 하지만 제 생각은 전혀 달랐다.
“이 세상에 나만큼이나 팔자가 박복한 년은 또 없을 거야.”
어린 시절 할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얼굴 예쁜 년은 팔자가 사나우니 못생겨도 팔자 좋은 년이 장땡이라고. 미주는 코맹맹이 소리를 하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희주 오빠가 왜 평범하게 살고 싶어 했는지 알겠어… 하지만 돌아갈 수 있다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하겠지.”
무릎을 세운 미주가 소파를 등받이 삼아 몸을 웅크리고는 중얼거렸다.
“오빠, 있잖아. 오늘만, 딱 오늘 하루만 울게. 응? 허락해 줘…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