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그는 날 원해요
* * *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을 열 수도 없고 묻기도 어려운 두 사람이 침묵의 중력에 마음이 짓눌리고 있었다.
핸들을 잡은 정훈이 룸미러로 요한의 피가 묻은 옷을 갈아입지도 못한 미주를 보며 다시 시선을 앞에 뒀다.
재민과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얘기를 나눴길래 요한이 다친 건지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 저리 침통하게 입술을 꾹 다문 미주의 표정을 보면 분명 뭔가가 더 있었다.
아마 진우가 가장 두려워했을 재민의 삐뚤어진 욕망을 정훈 역시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살아 있을 때 진우가 그걸 입에 올린 적은 없지만, 보통의 남자들이 권력에 취했을 때 할 수 있는 짓.
그것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미묘한 감정을 품었던 여자라면 지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내일, 아니, 12시가 넘었으니 이제 오늘이네요. 이사회가 열리기 전에 잠시 정재민을 만나기로 했어요.”
“만나면 안 됩니다. 아니, 그 새끼랑 거래를 하시면 안 돼요.”
역시 눈치가 보통이 아닌 정훈이 제 말 속의 다른 뜻을 캐치한 것 같았다.
미주는 아직도 칼자국이 선명한 두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진우를 지키기 위해 칼을 두 손으로 쥐고 등을 베이기까지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요한을 찌르던 재민에게 덤볐지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연호를 구하겠다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간절하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 그를 위해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 변호사님, 있죠.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수심이 가득한 얼굴의 미주가 룸미러를 보자 걱정하는 정훈과 시선이 마주쳤다.
“남편이 구치소에 들어간 게 벌써 석 달 하고도 한 달이 지났는데, 계절이 바뀌는 동안 나는 그저 진우 오빠가 해결해 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집에서 걱정하는 거밖에 안 하고 있었거든요.”
“…….”
“면회 가서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고.”
“사모님은 잡담이라고 해도, 부회장님께 그건 큰 위로가 되었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정재민 집 앞에 찾아갔을 때 도와 달라 무릎이라도 꿇고 빌었어야 했는데… 난 그러지 못했어요. 배가 부른 거죠. 자존심이 뭐라고.”
사면초가의 상황이라는 건 저도 미주도, 구치소에 있는 연호도 잘 알고 있었다. 현재로선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저 백호가 빨리 김 기사를 찾아내길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정훈은 독백하듯 담담하게 마음의 빗장을 조금 연 미주의 말을 경청해 보았다.
“근데 그 새끼가 나한테 제안을 했어요. 같이 자면 기회를 준다고.”
“말도 안 될 소립니다. 한 귀로 들을 것도 없이……”
“그는 날 원해요.”
“들을 필요 없는, 말입니다.”
“그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으면, 내일 이사회에 나는 참석 못 해요. 그 새끼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날 막을 것처럼 말했어요.”
오히려 정훈이라서 지금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 긴 시간 동안 친하게 지냈던 요한이나 도균이 편한 건 사실이지만, 서로에게 냉정해질 수 없는 우정이 너무 깊었기에 되려 이런 말을 꺼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늘 침착하고 이성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진우가 그토록 신뢰했다는 이 변호사가 지금 제 마음을 그나마 가장 잘 알아주지 않을까 싶었다.
거래의 기본 조건은 상대가 원하는 걸 주는 것이지 않은가?
어쩌면 그동안 진우뿐만 아니라 연호까지 재민이 진짜 원하는 걸 주지 않아 이 비극적인 운명 속에 그들 모두 놓이게 되었다, 미주는 이미 제멋대로 판단해 버렸다.
“만약, 같이 집으로 들어가자는 정재민의 말대로 따라 들어갔다면, 오빠는 살았을까요?”
“…지난 일에 만약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저는 늘 생각해요. 만약 재민 오빠와 내가 거래를 했다면 연호 씨는 벌써 나오지 않았을까, 하고.”
미주가 뭔 생각을 하는지 너무 빤히 보였다. 정훈 역시 고통스러운 기분으로 룸미러로 그녀를 보았다. 손바닥만 들여다보고 있던 미주가 이미 결심한 듯 통보했다.
“나는 내가 가진 걸 이용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게 무엇이든 간에 거래가 되는 거라면 사용하고, 이용하는 게 맞다 판단했어요.”
“사모님 말뜻,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 않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차라리 절 죽이고 가세요.”
“좋아요, 그럼 죽어요, 하 변호사님. 내 앞길, 하고자 하는 일 가로막으려 들면 이젠 그 누구도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니깐 차라리 지금 죽어요.”
눈빛을 번뜩이는 미주가 너무 살벌해, 정훈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 듯했다.
“변호사님은 지금 남편이 이대로 살인죄를 뒤집어쓰는 걸 눈 뜨고 지켜보자는 건가요?”
“지금 찾고 있습니다, 김 기사…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수배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손 놓고 관망 중이니 우리가 더 빠를 겁니다!”
“그렇게 김 기사를 잡아 봤자, 그가 과연 정재민이 그랬다 실토하고 자수라도 할까요?”
“그렇게 만들어야…….”
사실 정훈도 그 부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베테랑 탐정인 백호가 김 기사를 찾아냈다 한들, 그가 회유될지 미지수였다.
어쩌면 벌써 정재민이 김 기사를 죽였을 수도 있고, 김 기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수도 있다. 설령 살아 있다 한들 끝까지 입을 안 열고 그들이 불리한 방향으로 일관되게 진술할 수도 있었다.
힘들게 잡았는데 끝까지 차연호가 살인을 지시했다 말해 버리면 정말 빠져나올 구멍이 없었다. 최악의 수로 붙잡은 김 기사를 아무도 모르게 죽여 버려서 땅에 묻었다 해도, 연호에게 씌워진 혐의는 계속될 수 있었다.
‘차연호는 김 기사를 설득할 자신이 있으니 그를 찾고 있겠지만…….’
연호가 진짜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뭔 뾰족한 수를 가지고 있다 한들 최소한 김 기사를 대면해야 실마리가 풀릴 수 있다고 정훈도 늘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연호가 밖으로 나와서 찾아낸 김 기사와 뭔가 거래를 해야 함이 맞았다. 그러니 그가 구치소 밖을 나오지 못하면, 김 기사를 잡았다 한들 아무런 소용 없을 수 있었다.
‘정 실장이 바로 이 점을 알고 검찰에 정보를 흘려 추가 기소 시킨 게 분명해… 우리 입장에서는 차연호가 무조건 밖으로 나와야 하니, 그걸 가지고 지금 미주 씨와 거래를 한다면 절대 거절할 수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시작했을 거야.’
정훈은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팩트만 눈앞에 두고 생각했다.
당장 30분 뒤에 백호가 김 기사를 잡았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는 이상, 끔찍하게도 그녀의 배수진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찌 정재민과 잠자리를 하라 말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굳게 마음먹은 미주를 흔들어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함이 옳았다. 정훈은 조금 격양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이해해 달라 말한 게 아니에요.”
“내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본사로 가시는 걸 막겠습니다.”
“그럼, 우리 모두 죽어요.”
칼에 베인 손바닥만 보던 미주가 천천히 무릎 위로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정훈을 향해 매섭게 쏘아붙였다.
“이렇게 상상을, 아니 망상을 해 보세요. 만약에 정재민이 하 변호사님을 원한다면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저는 만약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원하는 걸 줘서 사랑하는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지금 나를 지지해 주고 따라와 주는 이들 모두 더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면.”
“…….”
“어때요? 하 변호사님도 저와 똑같은 답을 내리셨겠죠?”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미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네온사인마저 져 버린 어두운 새벽 차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남편은 살인죄에, 요한 씨는 오늘 오른쪽 눈을 잃었어요.”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러라고 제가 서 전무님, 아니 진우 형 따라 안 죽고 지금 그쪽 옆에 있는 거예요.”
“맞아요. 그 여러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에요, 내가 내일 정재민을 만나는 거. 왜 쉽게 생각하지 않으시죠?”
맞다. 만약 미주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 일종의 수단으로서 도구처럼 쓰일 여자였다면 말이다. 지금 이렇게 말싸움에 가까운 대화를 할 필요가 없었다.
저는 그리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고, 죽은 진우 역시 목적을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는 자였다.
그리고 그의 동생 역시 오빠와 비슷한 면모를 보였다. 다만, 조금 다른 건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는 것.
“내일이 되면 도균 씨의 눈도 잃을지 몰라요. 팔이나 다리가 될 수도, 아니면 하 변호사님 손가락이 될 수도 있고, 제 머리가 잘릴 수도 있어요.”
“…모두 죽는다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제발.”
“왜 쓸데없이 개죽음을 바라는 건가요?”
정훈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그녀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이 총성 없는 전쟁에서 승기를 빼앗겨 다시 패전 운이 드리웠는데 아직도 이것저것 따질 게 남아 있기는 한 걸까?
“오빠가 죽기 전에 나한테 맹세시켰다고 말했죠?”
미주는 두 손을 꼭 잡고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살아남아라.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으라고 했어요. 살아남는 놈이 이기는 거니, 꼭 살아남아서 이기라고.”
“…….”
“난 이기는 게임만 할 거예요. 절대로 질 수 없어.”
정훈은 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주는 뜻이 무엇이든 미주는 개의치 않았다.
“하 변호사님을 말리진 않겠어요. 차연호 씨한테 가서 내가 뭔 짓을 했는지 말해도 탓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 둘만의 비밀로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무신다 해도 의리를 지켜 준 이유를 묻지도 않을 거고요.”
“…사모님.”
“결심했어요. 나는 차연호를 구하기로. 설령 이 일로 그가 날 더러운 여자라 지탄하면서 버려도 관계없어요. 내 남자는 내가 지키기로 마음먹었으니깐. 이깟 몸뚱이 원하는 놈들 누구에게라도 줄 수 있으니, 그를 구할 수만 있다면 난 무슨 짓도, 이것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미주의 말 속에 박힌 피눈물이 정훈의 가슴에서 흘러내렸다. 그래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주는 피곤하지만 눈빛만큼은 생생한 채 정훈에게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늦은 시간에 감사해요. 덕분에 편하게 왔네요.”
“…….”
고개를 숙인 정훈을 보며 미주가 차 문을 열고 내릴 때였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정훈이 앞에 성큼 다가왔다. 그는 고민이 역력한 표정으로 다물고 있던 입을 뗐다.
“저는… 사모님, 아니 윤미주 씨 판단을 믿기로 했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전, 절대로 윤미주 씨를 세상의 잣대대로 심판하지 않을 겁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미주는 최대한 방긋 웃으며 저를 믿어 주겠다고 말하는 정훈에게 기쁜 듯 말했다.
“하지만 걱정 마요. 받은 만큼 몇 배로 돌려줄 테니. 지금은 그저 때가 아닐 뿐이고,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닐 뿐이에요.”
“오늘 결국 사모님의 뜻을 꺾지 못했던 저를 훗날 절대로 용서하지 마세요.”
“오히려 날 이해해 줘서 고마운걸요? 정재민이 약속한 건 한 시간이에요. 그러니…….”
뜸을 들인 미주가 부탁했다.
“내가 정재민 사무실로 들어간 뒤 한 시간이 훨씬 넘어도 연락이 되지 않으면, 하 변호사님께 뒷일을 부탁드릴게요.”
“아무 일도 없으실 겁니다.”
“나는 정재민을 만나고 이사회에 참석할 거예요.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궁금하지만… 내일이 되면 알게 될 테니 굳이 묻진 않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꾸벅한 정훈이 다시 차에 올라타 요한이 입원한 차현 의료원으로 향했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던 정훈이 갑자기 길게 한숨을 내쉬다가 급히 속도를 줄여 도로 가장자리에 차를 정차했다.
톡톡톡- 핸들을 치는 손가락의 RPM이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뒤집어서 생각해, 만약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미주 씨로 인해 기회가 생기는 거라면?”
재민이 약속한 한 시간.
역으로 생각하면 재민은 그 한 시간 동안 미주에게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미주를 막지 못하고 막을 수도 없다면, 차라리 명분을 만들어 주면 된다.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만들어 주면 된다.
다시 핸들을 움직여 깊은 밤, 여전히 의식이 없는 요한을 내려다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지금 제가 생각해 낸 것이 얼마나 실현 가능한 일인지 계속 경우의 수를 따져 보면서.
* * *
미주는 침착하게 집으로 돌아와 항상 하던 대로 일과를 정리해 보지만. 침대에 누워서 새카만 천장을 보고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렇게 어두운 데서 보니 손이 멀쩡해 보여.”
손을 들어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오빠, 오빠한테 맹세한 대로 난, 무조건 살아남을 거야. 어떤 비참한 짓을 당해도, 또 끔찍한 일을 겪는다 해도, 이젠 하나도 겁나지 않아.”
연호가 실망하든, 노여워하든, 그것도 아니라면 어찌 그런 일을 저질렀냐 같이 죽자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같이 죽자고 하면 연호 혼자 죽어라 말할 생각이었다.
“연호 씨, 난 있죠. 육체의 정절도 중요하지만… 당신이 더 중요해. 당신 없인 살 수 없으니 차라리 미움받는 길을 택하기로 했어.”
반대의 경우라 해도 저는 연호의 선택을 존중할 거라고 이미 마음먹었다.
그가 저를 구하기 위해 다른 여자 100명과 침대에서 뒹굴었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의 진실한 사랑은 저 하나이니, 마음이 제게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참고 있던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요한마저 어쩌면 오늘 잃었을지도 몰랐다.
“죽이지 않고 눈 하나로 끝내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 응? 재민 오빠?”
이제 해가 뜨면 하루가 시작된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미주는 저를 기다리고 있을 재민이 두렵거나 겁이 나지 않았다.
이미 두 번이나 죽었다가 살아났다. 한 번은 진우가 구해 줬고, 한 번은 연호가 구해 줬다. 사랑하는 남자들 덕분에 구원받은 인생인데 이깟 일로 다시 땅굴을 파고 자책하며 평생 눈물 속에 살지 않을 것이다.
잠을 자지 못했지만, 생각보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예쁘게 하고 오라는 그의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미주는 화장에 공들여 본다. 차분한 색을 얼굴에 더하며 암시를 걸면서.
‘그저 섹스야. 아무것도 아닌 거. 아무 감정 없는 상대와 그냥 육체적인 접촉을 하는 행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일부러 최대한 수수해 보이는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 안에 갖춰 입은 속옷도 평소 취향대로 아무 장식 없는 검은색 심플한 솔리드 타입이었다.
뭔 옷을 입었다 한들 정재민은 그 음흉한 이빨을 거둬들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 싸움을 하듯 제가 하고 싶은 대로 꾸미고 왔다는 걸 보여 주고팠다. 미주는 한 치의 화려함도 배제한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섰다.
“이런 거로 울면, 진짜 울어야 할 때 눈물이 안 나올 것 같거든.”
거울 속에 비친 평범한 저를 보면서 입꼬리로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 봐.”
아무리 나쁘다 한들 15년 전 까만 밤보다 더할까? 아니, 이제는 오히려 그런 일을 겪은 저라 재민이 뭔 짓을 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제대로 치유하지 못했던 오래된 내면의 상처가 연호 덕분에 나았으니 다시 그런 일을 겪는다고 해도 저는 열아홉 살의 윤미주가 아니었다.
‘강해지자, 마음도 몸도. 단단해질 거야. 정재민이 날 부서뜨리려고 해도 절대 흠집 하나 낼 수 없도록.’
셀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리며 신발장을 열었다.
“하이힐을 신고 와라, 상당히 변태적인 취향일 것 같아.”
잠시 고민을 하다가 진 회장의 장례식장에 가기 위해 신었던 구두를 꺼내 들었다. 연호가 좋아했던 하이힐이라면 저를 지탱해 줄 것 같아 그 어떤 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본사라…….’
그런데 차를 운전해 차현 그룹 본사로 오는 내내 들었던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사람들 눈에 띄는 게 싫은 듯한데 왜 날 회사로 부르는 걸까? 섹스할 곳이야 많은데 왜 하필이면 본사로…….’
정말 타인의 시선을 재민이 신경 썼다면, 저와의 거래를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면 방법은 많았다.
어디 호텔로 저를 불렀을 수도 있고, 집으로 저를 오라 했을 수도 있었다. 섹스할 방법과 장소는 차고 넘치게 많을 건데, 왜 본사인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취향과 성벽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점점 재민에게 가까워질수록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미주가 간신히 털어 내 보며, 저를 이곳으로 안내한 이를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저기, 여긴 제가 알기로는 돌아가신 서진우 전무님 사무실로 알고 있는데요.”
불과 며칠 전에도 이곳에 와 정훈이 낭랑하게 읊어 댔던 진우의 유언을 듣지 않았던가.
“어제부터 정 실장님 사무실이 되었습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 앞에 선 미주가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 시간 뒤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보내기 무섭게 회신되는 정훈의 말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사모님, 정재민을 대면하면 제일 먼저 놈이 핸드폰 전원을 끄게끔 유도해 주세요. 가능하면 부탁드립니다.]
[네, 한번 해 볼게요.]
[한 시간 뒤에 연락을 꼭 해 주세요.]
미주는 핸드폰을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정훈이 뭔가 따로 계획이 있는 듯해 믿는다는 듯 입술을 꾹- 다물고 결심을 다시 다졌다.
저도 아직 완전히 정훈에게 오픈하지 않은 최후의 수가 있으니 그도 알아서 이 난관을 헤쳐 주길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