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직접 눈으로 봐
* * *
“뭐?”
“그게, 부회장님 사모님께서 내일 있을 이사회에 회장 후보로 나선다고.”
기분 좋게 이른 점심을 먹고 왔는데 말이다. 재민은 지금 뭔 말을 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깐 윤미주가 지금 차현 그룹 회장으로 나서 보겠다, 이 말이라는 거지?”
소식을 전해 온 비서실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민은 어이가 없는 듯 웃어 보았다.
“그래, 일단 알았으니 그쪽 동향 계속 주시해 줘.”
연희가 자수하고 진우가 죽어 사실상 단독 후보라고 볼 수 있는 최 사장에게 더는 누구도 차현 그룹 회장이 되고 싶다며 도전하는 이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 오너 일가의 스캔들이 너무 커 지금 그룹의 운명 자체가 어찌 될지 모르는데, 침몰하는 배의 선장이 되려 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재민은 최 사장을 내세워 M&A라는 이름으로 하나씩 팔아 치울 생각이었다. 물론 저와 결탁한 검찰과 사이좋게 값을 나눠야 하겠지만 말이다.
진 회장을 어떤 식으로든 진우와 연호가 처리할 것을 알았기에 말이다. 처음부터 재민의 타깃은 연호였다.
연호가 구속됨으로써 잠시 차현 주가가 떨어질 수 있다 예측하고 시나리오를 준비했는데. 뜻하지 않은 살인 사건에 범인이 자수하는 악재까지 터지자 그룹 자체가 흔들릴 정도의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제값에 팔아야 하는데, 이러다가 헐값에 본전도 못 건지겠어.”
지금 이 상황에서는 잘해도 욕먹기 쉬운지라 막말로 외부 CEO도 초빙하기 어려웠다. 결국, 내부적으로 결속해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했다.
물론 연호를 지지하는 세력이 갑자기 튀어나온 미주를 지지할지 미지수이긴 했다. 그렇지만 한국의 특성상 이런 일에는 보통 오너 일가 아래에서 집결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제 생각보다 훨씬 미주가 위협적으로 나올 수 있다, 재민은 여겼다.
어차피 새파랗게 젊다 못해 어리다고 볼 수 있는, 아무런 배경도 없는 여자를 그들이 지지할 가능성은 낮긴 했지만. 미주가 건방지게도 저를 도발했다 결론지었다.
“미주야, 이건 네 머리에서 나온 거니? 아니면 차연호? 그것도 아니면 하정훈 그 씹새끼?”
생각해 보면 미주는 진우가 가지고 있던 차현에 관한 모든 걸 일체 상속받았으니, 명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하루아침에 가지게 된 차현 그룹 지분은 그 누구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깐.
“이것들이 진짜,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것도 모자라 밥도 못 먹게 밥그릇을 내던져 버리겠다?”
재민은 이를 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이번에 새로 옮긴 제 사무실을 살펴보았다. 최 사장이 회장이 되면 저는 임원으로 승진할 예정이었기에 미리 사무실을 옮겼는데.
“여기가 내 차지가 됐는데 뭐가 겁나? 어쩌면 내가 계획한 대로 착착- 일이 진행되고 있으니 즐겨 보는 것도, 똑같이 갚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비릿하게 웃으면서 생각했다. 제 일을 끝까지 망치려 드는 것들에게 제대로 본때를 보여 줘야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핸드폰에 저장된 익숙한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긴 연결음 끝에 제가 좋아했던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미주야, 얘기 들었다. 이 오빠한테 아무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설치면 안 되지.’
정훈을 통해 임원진에게 말을 흘리자마자 재민이 전화했다.
미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옆에 있는 정훈과 요한에게 잠시 조용히 해 달라, 제스처를 취했다. 차분한 톤으로 흥분 하나 하지 않고 재민의 전화에 대꾸했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주인 없는 빈집 터는 거 오빠도 하면서 나는 왜 안 된다고 하는지 당최 이유를 모르겠네.”
‘하긴, 너나 나나 똑같이 근본 없는 건 매한가지니깐.’
재민 역시 잔잔한 말투로 저를 비꼬았다. 웃으면서 서로를 먹이는 두 사람이 의미 없는 대화를 하며 말싸움을 벌였다.
‘그래서 시나리오는 어떻게 나온 건데?’
“글쎄,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지 않을까?”
‘건방지네, 우리 미주. 하긴, 너 어릴 때부터 입이 험하고 시건방지긴 했었어. 그땐 귀엽기나 했지, 지금은 안 통해.’
이죽거리는 재민을 정말 당장이라도 잡아다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미주는 순간의 감정에 일을 그르칠 수 없다 저를 다독였다.
“아무튼, 난 이만. 회장 후보로 나서다 보니 바빠서.”
‘윤미주, 까불지 말고 저녁에 만나서 얘기 좀 하자. 내 일 그르치면 너 가만히 안 둬.’
재민이 꼬리를 내리는 걸까?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저를 설득하려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가 백기를 드는 걸 생각해 보지만, 재민이 그럴 리는 없어 보였다.
미주가 당치도 않다는 듯 대꾸하며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였다.
“나도 내 일 방해하면 오빠 가만히 안 둬. 그러니 까불지 마.”
‘…네가 날 안 만날 수 없을 텐데?’
“뭐?”
‘한 시간 안으로 전화가 갈 거야. 소식 듣고 연락해.’
뚜뚜뚜-거리는 통화가 종결되었다는 신호음. 재민의 마지막 말은 분명 겁을 주기 위한 멘트는 아니었다.
전화를 끊은 제가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낸 모양이다. 정훈이 뭔 일이냐는 얼굴을 하고 있어 미주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가감 없이 재민의 말을 전했다.
“정재민이 알았어요.”
“…빠르네요. 불과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소문이 나다니.”
“그러게요. 근데 그 새끼가 저녁에 날 만나자고 하길래, 거절했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긴장감에 바짝 마른 입술을 저도 모르게 혀로 쓸면서 말했다.
“한 시간 안으로 전화가 갈 거니, 다시 연락하래요.”
“한 시간……?”
미주와 그녀의 조력자들이 초조하게 이리저리 무슨 일이 터질지 수배해 보지만 좀처럼 새로운 정보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때였다.
정훈의 핸드폰이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정훈에게 향할 때, 그가 낮은 저음으로 태연하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네, 검사님. 네, 아… 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여섯 개의 눈동자가 모두 같은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정훈은 흠흠- 하며 목을 가다듬고는 미주를 보며 운을 뗐다.
“검찰에 있는 저희 쪽 사람들 말이……”
“…….”
“조금 전에 정보가 하나 들어왔답니다. 차현 그룹 전무이사가 최근에 살해당한 사건의 배후에 부회장님이 있다고, 전무님 살인을 사주했다는 첩보를 입수해 지금 검찰이 내사 들어갈 준비를 한다고…….”
“정재민, 이 씨발 새끼!”
주먹으로 벽을 쾅- 치며 도균이 목청 높여 욕설을 퍼부었다.
“만에 하나, 김 기사가 잡혔는데 연호 씨가 죽이라 지시했다 거짓 자백이라도 하면…….”
“처음부터 잡히면 그리하라 정 실장과 협의했을 겁니다. 제발 아직 그놈이 국내에 있어야 할 텐데… 저는 그게 제일 걱정입니다.”
한숨을 푹 쉰 정훈이 뭔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미주에게 더는 숨길 수 없다는 듯 연호에게 들은 걸 알렸다.
“사실은 부회장님이 지금 따로 비밀리에 김 기사를 찾고 있습니다. 경찰한테 잡히기 전에 먼저 찾아서 뭔가 회유를 하든, 협상하실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니면 죽여 입을 봉할 것 같긴 합니다만, 아직 소식이 없는 걸 보면 행방이 오리무중이라…….”
“그랬군요. 어제 만나러 갔을 때 나한텐 한마디 말도 없던데…….”
“사모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저한테 부탁하셨습니다. 당분간은 비밀로 해 달라고.”
연호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미주가 초조해지는지 손톱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만약 정재민이 김 기사를 숨겼다면 내일 내가 최 사장이 회장이 되는 걸 방해하는 순간, 그를 자수시키거나 일부러 붙잡히게 해 범인을 남편으로 지목할 생각인 것 같아요.”
“경찰도 수사를 그리 열심히 하지 않고 있어 뒤에 정재민과 손잡은 검찰 입김이 들어갔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미주는 이마를 감싸 쥐고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무슨 말도 할 수 없는 침묵 속에서 미주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내가 갈게요. 정재민이 원하는 대로 그 새끼, 만나겠어.”
“안 돼요, 미주 씨. 가면 안 돼요.”
오랜 시간 그들과 가까이 있었기에 재민이 미주에게 품었던 위험한 연정을 아는 요한이 극구 미주를 말렸다.
“나보고 오라고 했어요. 연락하라고… 내가 연락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날 놀린 거였어.”
“그래도 혼자 가시면 절대 안 됩니다!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일단, 전화하라 했으니 통화해 보고 다시 얘기해 봐요.”
긴장된 얼굴로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두 번 울렸을 때 기다렸다는 듯 재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말했지? 날 안 만날 수 없을 거라고.’
“그래, 좋아. 어디로 갈까?”
‘저녁 8시까지 혼자 차현 호텔 중식당으로 와. 조용한 곳에서 오랜만에 너랑 밥이나 먹을까 하거든.’
“알았어. 그때 봐.”
명령 같은 재민의 말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미주는 전화를 끊은 후 옅은 웃음을 지어 보았다.
“같이 가요, 요한 씨. 솔직히 말해 센 척하고 있지만 겁나긴 해요. 그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미주 씨, 나도 같이 가요. 둘은 모자라. 넷은 돼야 든든하잖아요?”
도균이 정훈을 보면서 말했지만, 미주는 고개를 저었다.
“하 변호사님은 여기 계셔야 해요. 만약에 우리 모두 같이 갔다가 정재민이 싸그리 우릴 없애 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나는 같이 데리고 가 줘요. 전무님 죽인 새끼, 내가 죽일 거니깐.”
계속 저를 빼먹지 말아 달라 부탁하는 도균을 저버릴 순 없어 미주는 그리하마, 대답하고는 해가 지길 기다려 본다.
저물기 시작한 태양이 어둠으로 사라졌을 때, 세 사람은 굳은 각오를 다지며 재민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미주는 운전하고 있는 도균과 조수석에 앉은 요한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다가 두 사람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우리 알고 지낸 지 벌써 몇 년이죠?”
잠시 햇수를 세어 보던 요한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최소 10년이네요. 미주 씨가 대학생일 때 처음 봤으니… 12년 정도 됐나? 싶네요.”
“강산이 한 번 변했네요.”
“그러네요. 생각해 보니 정말 오래 알고 지내긴 했네요.”
룸미러로 저를 보는 요한이 웃고 있어, 미주도 웃었다.
오래 알고 지낸 시간 동안 요한은 항상 든든한 친구이자 오빠이기도 했다. 제 비밀을 끝까지 함구해 줄 정도로 과묵한 그가 얼마나 의리 있는 인물인지, 정말 잘 알았다.
시선을 창밖으로 던진 미주가 추억 여행하듯, 요한과 도균에게 지난날 세 사람이 함께 경험했던 일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우리 셋이랑 진우 오빠 그리고… 그놈까지 해서 다섯이서 참 술도 많이 마시고 재밌게 놀았던 것 같아요.”
“전 솔직히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미주 씨, 예전에 정말 무서웠어요. 술만 마시면 사람이 살짝…….”
도균이 정말 힘들었다는 식으로 말하자 미주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괜히 자기변명을 해 보았다.
“알아요, 제가 좀 그랬다는 거.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봐 봐, 불리할 때는 딱딱한 존댓말 써. 전무님이 왜 돌아 버리겠다 하셨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알았다니까요? 우와 진짜,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무한 반복이라.”
“흑역사는 잊어 달라 말하고 싶은데… 다 제 업봅니다. 그래도 이젠 술 많이 줄였으니… 조만간 축배를 들 일이 생겼을 때, 시원하게 한잔 다 같이 해요.”
미주가 룸미러를 쳐다보며 도균과 시선을 맞추면서 말하자, 도균도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달릴 땐 찐하게 빨아야죠.”
“역시 못 말려.”
미주가 살짝 몸을 앞으로 빼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도균에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며 하이파이브 동작을 유도했다. 오른손을 뒤로 돌린 도균이 짝- 소리를 내며 미주와 손뼉을 치자 요한이 웃으면서 거들었다.
“미주 씨. 나도 같이, 우리 마실 땐 찐하게 달려야죠.”
“으악, 완전 오빠 말투야. 역시 서진우 왼팔. 말투까지 닮아 버리다니.”
미주가 요한과도 하이파이브하며 그의 말투에 질겁한다는 표정을 짓자 도균도, 요한도 모두 소리 내며 웃었다.
요한과 도균에게도 여동생 같았던 미주는 죽은 진우가 얼마나 그녀를 아꼈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지켜 주고 싶었다. 정훈이 두 사람에게 따로 알려 준 진우의 유언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셋은 친구였으니깐.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어느덧 차는 차현 호텔에 도착했다. 어찌 되었든 그룹 부회장의 아내가 계열사로 찾아왔으니 호텔 직원들은 깍듯이 미주를 약속 장소로 안내했다.
“도균 씨는 주차장에서 기다려 주세요. 진짜 사이좋게 앉아서 밥 먹으려고 온 거 아니니 한두 시간이면 끝날 테니깐.”
“그래도, 같이 가는 게…….”
고개를 저은 미주가 도균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만약에 우리가 내려오지 않거나 연락이 두절되면 바로 하 변호사님께 연락하시고, 필요하면 경찰에 신고라도 꼭 해 주세요. 그래서 남아 있으라 부탁드리는 거예요.”
“네, 그렇게 해요.”
요한이 입술을 꾹 다문 도균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는 미주를 에스코트하며 차현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재민이 말한 중식당 VIP 룸에 도착했을 때, 먼저 와 있던 재민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왔어?”
“응, 오빠가 먼저 왔네.”
자리에 앉은 미주가 묘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자 재민은 예상했다는 듯 그녀의 옆을 보았다.
“이 차장이 같이 올 줄 알아서, 내가 미리 음식은 넉넉히 주문해 놨어.”
“감사합니다, 실장님.”
고맙다는 듯 요한이 태연하게 재민에 대한 끓는 감정을 숨긴 채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그래, 많이 먹어.”
대놓고 저의 승리를 확신하는 재민에게 미주는 일부러 눈꼬리를 초승달처럼 휘면서 말을 건넸다.
“네, 잘 먹을게요, 정 실장님.”
“그래, 미주야.”
재민은 그저 웃으며 대꾸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저리 여유를 부리지 못할 거로 생각하면서 하나씩 나오기 시작하는 음식이 테이블에 세팅되는 걸 가만히 보았다.
“왜? 내가 독이라도 탔을까 봐?”
“…….”
제 앞에 놓인 물조차 마시지 않는 미주를 보면서 재민은 미리 준비된 고량주를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술부터 한 잔씩 하면 또 잃어버린 식욕이 돌아올지도 모르지.”
미주의 오른쪽에 앉은 요한의 잔을 채우고는 그 옆의 미주 잔도 채웠다. 재민이 술을 따르며 테이블 주변을 한 바퀴 돌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안 그래도 지금 우리 회사 이미지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잖아. 여기서 또 사람 한둘 죽어 나가면 이젠 회생 불능인 거 모를 정도로 나 바보는 아니다?”
두 사람에게 돌리던 술을 제 잔에 보란 듯이 부은 재민을 보면서 미주가 건배하듯 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한입에 술을 탁- 털어 마신 후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두자, 흡족한 듯 재민이 저처럼 술을 마시고는 본론을 꺼냈다.
“내가 여기로 널 부른 이유, 궁금하지?”
“날 불렀다기보단 오게끔 오빠가 만든 거잖아.”
“하긴, 차연호가 진우 형을 죽인 게 돼 버리면 넌 최소 10년 이상 남편이랑 섹스를 못 할 테니깐 이리 급히 왔겠지.”
“정 실장님……!”
미주를 말로 능욕하는 재민에게 요한이 눈을 부라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미주가 팔을 뻗어 그를 부드럽게 제지했다.
“이 차장님, 실장님 말, 노골적이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니깐 화낼 필요 없어요.”
미주가 참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요한이 재민을 죽일 듯 노려보면서 자리를 지켰다. 재민은 이제 숨기지 않겠다는 듯 시꺼먼 속내를 천천히 드러냈다.
“하긴, 지금도 모르지. 벌써 몇 달인데, 옆에 요한이 달고 온 거 보니 차연호가 알면 놀라 자빠질 만한 일이 있었을지도.”
“오빠, 나에 대해서는 괜찮지만, 차장님에 대해서는 예의를 좀 지켜 줬으면 좋겠어.”
“아, 예의?”
“응, 예의. 이요한 씨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오빠 같은 사람이 아니니깐.”
“그래? 하하, 쏘리. 내가 미안하게 됐어.”
어금니를 꽉 문 듯, 미주의 잇새로 새어 나오는 분노가 아주 잘 전해졌다. 재민은 조금 소리 내 웃다가 의자에 기댄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말했다.
“그럼 너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거지?”
“어, 괜찮아. 마음대로 해.”
미주가 고혹적으로 재민을 쳐다보며 요염하게 웃었다. 어디 한번 마음껏 세 치 혀로 저를 강간해 보라는 그녀의 눈에서 두려움 따윈 전혀 보이지 않아, 재민은 마음에 들지 않는 기분이었다.
미주가 수치스러워하고 부끄러워해야 재미있는데. 도도한 얼굴로 건방짐을 숨기지 않는 그녀를 보며 놀랍다는 듯 미간을 한 번 올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인데 너무 다큐로 받지 마, 미주야.”
“나도 농담이었어. 오빠야말로 매사 무엇이든 진지한 다큐멘터리로 만들지 말아 줘.”
피식- 웃는 자신만만한 미주를 보며 재민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곁으로 한 발자국씩 다가갈 때였다.
“실장님, 돌아가신 전무님을 생각하셔서라도 미주 씨한테 그런 말은 삼가해 주세요.”
“네가 우리 사이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잘 모르지만 그래도 아는 만큼은 압니다.”
분노를 삼키며 정중하게 부탁한 요한이 말대답을 하자 재민은 그를 무시하며 미주의 옆에 섰다.
“건방진 게. 네가 그런다고 회장이 될 줄 아니?”
짝- 하고 미주의 뺨을 갈겼다. 재민이 상체를 숙여 미주의 귓가에 더러운 혀를 놀렸다.
“까불지 마, 윤미주.”
“…….”
“가만히 있어도 살려 둘까 말깐데, 자꾸 이러면 진우 형 옆에 보내 버린다?”
무서운 표정의 재민이 미주의 코를 장난스럽게 툭- 치더니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미주는 벌떡 일어난 요한에게 곁눈질로 참으라는 듯한 신호를 보내며 제 앞에 놓인 물을 한 잔 마셨다. 입안에 도는 비릿한 피 맛.
잔을 내려놓을 때, 안경을 벗어 양복 상의 안에 넣은 재민이 피곤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고는 옆으로 다가와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면서 입을 열었다.
“차연호, 살인죄로 추가 기소될 거야.”
“…그걸 정 실장님이 나한테 친절하게 알려 주는 이유는 뭘까?”
연호에게 살인까지 뒤집어씌울 거면 굳이 이렇게 예고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미주는 담담하게 물어보았다.
“전에 말했잖아? 이요한 이 새끼가 우리 집 알려 줘서 날 찾아왔던 날, 얘기했을 건데?”
역시 짐작이 맞았다. 재민은 지금 저와 거래를 하려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기에 미주가 애써 별일 아니라는 듯 굳은 얼굴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실장님, 제가 잘못한 건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그러니 미주 씨는 그냥 두세요.”
꾹 눌린 분노를 담아 말하고 있지만 눈으로는 욕을 퍼붓는 요한의 말이 듣기 싫다는 듯 재민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한아, 자꾸 그딴 눈깔로 보니깐 내가 어쩔 수 없는 거야.”
“네?”
“뭔 뜻인지 잘 생각해 봐. 너도 나만큼 똑똑하잖아?”
재민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고는 미주의 등 뒤에 바짝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목덜미에서 올라오는 끔찍한 감각에 미주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제 목을 마치 애무하듯 끈적이는 손길로 만지며 재민이 말했다.
“미주야, 잘 봐 둬. 네가 까불면 까불수록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직접 눈으로 봐.”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재민의 오른손이 앞에 놓여 있던 젓가락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미주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요한의 눈을 찔러 버렸다.
“안 돼!”
“으악……!”
동시에 울리는 미주의 경악에 찬 고함과 요한의 비명 소리.
재민이 손을 뻗어 요한의 머리를 감싸 쥐고는 오른손을 깊게 넣을 수 있을 때까지 찔러 대면서 소리쳤다.
“씹새끼, 전에 날 경멸하듯이 보던 눈깔, 내가 이제 못 쓰게 해 주려고!”
요한의 얼굴에서 쏟아져 내리는 피가 그의 머리를 움켜쥔 재민의 손가락 사이에서 미친 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빠! 오빠! 그만해! 안 돼! 미친 새끼, 내가 너 죽여 버릴!”
미주가 고함을 지르며 요한에게서 재민을 떼어 내 보려고 하지만, 이미 짐승의 눈으로 살의를 번뜩이는 남자를 이길 수 없었다. 제 육체의 물리력은 재민을 한 번 휘청이게만 했을 뿐, 미주는 튕겨 나가 버리고 말았다.
미주가 바닥에 널브러졌을 때 요한은 고통스럽다 못해 인간의 언어가 아닌 듯한 소리를 지르다가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개새끼! 너도 죽어!”
재민이 방금 그런 거처럼 미주도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세팅된 아무 젓가락을 하나 빼 들었다. 그의 목 어디라도 찌르면 당장 죽이진 못하더라도 치명상 정도는 입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진 회장과 개싸움을 벌이면서 느꼈던 것이 있었다. 저는 여자라 남자를 한 방에 제압할 순 없지만 비열한 수를 쓰면 적어도 타격을 입힐 순 있다는 것을.
운이 좋아 경동맥이라도 찌르면 저 짐승 새끼를 죽이고 요한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미주는 있는 힘껏 재민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뒤에서 껴안듯 요한의 머리를 잡고 그의 눈을 찌르다 못해 후벼 파고 있으니 재민이 저를 쉽게 방어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으니까.
“씨발, 웬만하면 손 안 대려고 했는데!”
하지만 재민이 귀찮은 벌레를 떼어 내듯 저를 발길질하자,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바닥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예쁜 얼굴이랑 몸에 흠집이 나는 게 싫어서 그래, 응? 이왕이면 나는 예쁜 게 좋으니까.”
“씨발 새끼.”
주저앉은 미주가 피눈물을 흘리며 저를 보고 있어 재민은 좋았다. 패배자의 눈을 한 미주가 마음에 들어 재민은 만족한다는 듯 그제야 붙들어 매고 있던 요한의 머리를 놨다.
그러자 의자 아래로 커다란 남자가 쓰러졌다.
“요한 씨!”
미주가 요한을 끌어안았다. 정신을 잃은 것 같은 그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물에 옷을 적시고 있을 때, 재민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미주야, 이런 거 가지고 놀라지 마. 진우 형은 내게 잔나비 놈의 혀를 잘라서 보냈어.”
“…죽여도 되는 놈을 죽여서 보냈겠지. 정재민, 네가 지금 이런 짓을 하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
테이블 위에 놓인 물수건으로 요한의 피가 묻은 손을 닦아 내는 재민이 비웃으면서 미주에게 대꾸했다.
“네 눈도 파이거나, 요한이가 애꾸도 아니고 평생 두 눈이 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계속 그렇게 함부로 지껄여 봐.”
미주는 눈물을 흘리며 요한의 손을 꼭 잡고 일갈했다.
“좋아, 날 찔러! 혀도 잘라 버리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그러니 제발… 요한 씨 데리고 빨리 병원으로 가게 해 줘. 제발… 더 늦으면…….”
손을 다 닦은 재민이 미주 앞으로 걸어오더니 자세를 낮춰 미주와 시선을 맞췄다.
“미주야.”
언젠가 어린 시절 사랑했던 그 소년 같은 미소를 지은 재민이 손을 뻗어 턱을 움켜잡았다.
“명심해. 허튼짓할 생각 하지 마. 이사회고 나발이고 지금처럼 덤벼들면 아무리 너라도 봐주는 데 한계가 있어, 응? 우리 예쁜 미주…….”
시뻘겋게 변한 눈으로 부들부들 몸을 떠는 미주의 얼굴을 놓아주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알지? 내가 뭘 원하는지.”
“…….”
“나한테 한 시간만 주면, 이사회에 출석할 수 있게 해 줄게. 막지 않겠어.”
미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다행이라는 듯 재민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내가 원하는 걸 주면 네 남편 살인죄는 거래해 줄 용의가 있어.”
“…….”
“그리고 지금 여기서 더 늦게 전에 이요한을 병원으로 데려갈 수 있을 거고.”
“…그리고?”
피와 땀에 흠뻑 젖은 미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몸이라면 오히려 쉬웠다. 그때 재민의 집으로 찾아갔던 날 결국 이렇게 될 것 같아 그간 마음을 단단히 다졌기에 그의 제안이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겨우 두 가지만 가지고 협상하면 안 될 것 같아, 최대한 많은 걸 걸어야만 했다.
“주차장에 있는 도균이도 적어도 오늘 밤에는 안 죽을 테고.”
“하 변호사님의 안전도 약속해 줘.”
고개를 젓는 재민이 저를 요망하다는 듯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미주야, 네가 그 정도로 많은 걸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럼 남편에 대해서는 약속해, 아니 맹세해! 조만간 무혐의로 나오는 걸 방해하지 않겠다, 맹세해.”
“좋아, 그깟 거 맹세하지. 나도 조건이 있어.”
깨물기라도 했는지 붉은빛을 띠고 있는 미주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면서 재민이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내일 내 사무실로 찾아와.”
“좋아.”
“이왕이면 하이힐을 꼭 신고 오고, 화장도 예쁘게, 옷도 예쁘게 입고 와, 응?”
“그래, 그럴게.”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 내일 보자, 내 동생.”
천천히 일어나 미주를 내려다보면서 넣어 뒀던 안경을 다시 썼다.
“그리고 있잖아, 밥은 다음에 먹자, 미주야. 이거 뭐 이래서 밥맛이 있겠어?”
“…밥? 웃기지 마. 오늘 일,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그래. 내일 일도 절대로 안 잊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내가 너무 앞서 나가는 걸까?”
돌아서 VIP 룸을 빠져나가는 재민을 보면서 미주는 눈물을 삼키며 이성을 되찾으려 안간힘을 썼다.
‘침착해… 일단 구급차부터…… 아, 도균 씨보고 올라와 달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거야.’
의식을 잃은 것 같은 요한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눕히고는 핸드백을 찾았다. 제일 먼저 구급차를 부르고, 다음으로 도균을 불렀다.
미주의 전화를 받은 도균이 헐레벌떡 올라오니 피투성이가 된 요한과 그를 안고 처연하게 앉아 있는 미주가 보였다.
잠시 뒤, 끔찍한 폭력의 현장으로 구급대원들이 들어와 요한을 들것에 싣고 나갔다.
“…하아, 역시 이럴 줄…….”
응급처치가 끝났을 때 정훈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나타났다.
“경찰에 신고하진 않을 거예요.”
“……사모님.”
미주의 말에 정훈이 도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으로 물었지만 말이다. 도균도 그 자리에 없어 정확히 몰라 고개를 가로저으며 비통해하고 있을 때였다.
이 시간에 그룹 오너 일가 중 한 명이 응급실에 올 리 없다고 여겼는지 미주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응급실을 지키고 있던 응급 의학과 의사가 당직 안과의를 부를 때, 미주의 목소리가 무섭게 퍼졌다.
“당직 의사 말고, 안과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 불러요.”
“아니, 당신이 뭔데…….”
“나요? 나, 차현 그룹 차연호 부회장 와이프예요. 그러니 당장 불러, 교수!”
미주는 차연호 아내라는 자리의 힘을 처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고함을 지르고 얼마 후 흰머리가 희끗희끗 난, 인자해 보이는 안과의가 부리나케 응급실로 뛰어왔으니까.
그래서 저를 어떻게 평가하든 관계없었다. 갑질로 오게 된 중년의 저명한 안과의가 요한의 눈을 고쳐 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내일 아침, 이번에는 제가 TV에 대문짝만하게 나와도 괜찮았다.
하지만 응급실에서 의사를 자기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한 미주의 바람과는 다르게, 요한의 상태는 좋지 못한 듯했다.
“사모님, 그게… 딱 봐도 현재 상태로는 아무래도… 오른쪽 눈은…….”
외상을 입은 요한의 상태만 봐도 알 수 있다는 듯 말끝을 흐리는 안과 교수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미주는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늦은 시간에 불러내서 죄송합니다, 교수님… 부회장님께서 아끼는 직원이니 아무쪼록 잘 회복될 수 있게 부탁드리겠습니다.”
평생 세상을 남은 왼쪽 눈으로만 봐야 할 오랜 친구 요한.
요한이 연호가 아끼는 직원이라는 제 선한 거짓말 때문에라도 안과의는 있는 힘껏 그를 잘 돌봐 줄 것이다. 손상된 오른쪽 눈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왼쪽 눈도 잘 관리해야 할 것 같아, 미주는 의사에게 머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응급처치를 끝내고 입원실로 올라간 요한의 곁을 미주가 지키고 있을 때였다. 정훈과 눈빛을 교환한 도균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미주 씨, 여긴 이제 제가 있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셔서 눈 좀 붙이세요.”
“그럴게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미주가 그러겠다, 희미하게 웃어 도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너무나도 많은 비극이 점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저와 그들 모두를 잠식하고 있었다.
도균 역시 괴롭다 못해 당장이라도 재민을 찾아가 그의 사지를 찢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형제와 다름없는 요한의 옆에서 힘이 되어 주는 게 제 일임을 알았다.
“사모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제가 운전할 테니 같이 가시죠.”
알게 된 지 오래된 건 아니지만 진우가 오래도록 혼자 예뻐하고 아껴 줬다는 정훈의 낮은 목소리에 미주는 마음이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도균 씨라면 분명 요한 씨를 목숨처럼 지켜 줄 거야.
만약에 영화 같은 일이 벌어져 정신을 놓은 재민이 어디서 용병단이라도 사 그들 모두 죽이겠다 달려들어도 말이다.
“요한 씨, 우리 약속했잖아요? 진우 오빠 때문에 구원받은 인생, 헛되게 살지 말자고.”
아직 의식이 없는 요한의 손을 꼭 잡은 미주의 어깨를 정훈이 다독였다. 그가 저를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뜻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기에 미주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