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 왕관의 무게 (44/53)

42. 왕관의 무게

* * *

“그러니깐, 이게 오늘 저녁에 공식적으로 발표될 서 전무 유언이라는 말이지?”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이 많이 상한 듯한 연호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네, 부회장님.”

“미주도 이 내용은 알고 있고?”

“네, 제가 어느 정도는 간단히 브리핑해 드렸습니다.”

정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연호가 뭔가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서 전무가 죽기 전에 한번 나한테 말한 적 있었어. 딱 한 번 편한 자리에서 같이 담배 한 대 피우고 커피 한 잔 마셨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면… 꼭 와이프 입장 생각 안 하더라도 더 진작에 처남 매제로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

말끝을 흐린 연호가 복잡한 듯 길게 한숨을 쉬고는 원래 하려 했던 말을 꺼내 보았다.

“서 전무가 자기 개인 변호사에 대해서 말해 줬었어. 정재민 그 씹새끼를 믿지만, 그놈한테 다 맡길 수 없는 일을 해 주는 놈이 있다고… 그래서 내가 물었거든. 혹시 예전에 대광 중공업 인수 건을 뒤에서 조종한 놈이냐고 물어보니깐 그저 웃더라고.”

멋쩍은 미소를 짓는 정훈을 보니, 그놈이 바로 제 눈앞의 이놈인 것 같아 알 만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능력 좋던데. 서 전무가 숨겨 둔 이유를 알겠어. 그러니 앞으로 나도 좀 잘 부탁합시다, 하정훈 변호사님.”

수갑 찬 손을 악수하듯이 내밀어 보지만 가로막힌 벽 때문에 당연히 상대방과 신체 접촉을 할 순 없었다. 연호의 위트 섞인 행동에 정훈은 오히려 더 정중하게 고개를 깊게 숙이면서 대답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린다 말씀드리고 싶은데… 이미 모셔야 할 분이 생겨 버려서 부회장님은 다음 기회에 모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쉽다는 듯 연호가 악수를 청했던 손을 거둬들이면서 연한 미소를 띠었다.

“서 전무가 진짜 믿었던 사람이었으니, 나도 부탁할게. 내가 나갈 때까지만 내 아내, 옆에서 잘 지켜 줘.”

하지만 정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의외의 말을 전했다.

“사모님은 자신을 지킬 줄 아시는 분이세요. 그러니 제가 지켜 드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서 전무가 죽음으로써 미주가 이제 완전히 악밖에 안 남았구나.”

“그렇다기보단, 더 강해지신 거겠지요.”

알 만하다는 듯 연호가 미주를 걱정해 보지만 말이다. 정훈의 말대로 그녀는 남자들의 우산 아래에서 비를 피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제 영혼의 반쪽인 남자를 잃었으니 지금 미주는 지옥 불구덩이 한가운데서 몸을 태우듯 모든 걸 파괴하다 못해 자신까지 망치려 하고 있을 것이다.

미주의 복수의 칼날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 알기에, 연호는 이렇게 구속당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제 처지에 화가 나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보름 뒤면 나오실 텐데 걱정하지 마시고 그동안 제가 잘 보필하고 있겠습니다.”

“…미주한테 전해 줘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널 믿으니깐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그리고 난 절대로 안 죽으니 걱정하지 말고 잘 버텨 달라고.”

알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 정훈이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가 아니더라도 와야 했을 이유를 지금 밝혔다.

“서 전무님이 이런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 부회장님한테 따로 남긴 말이 있으셨습니다.”

“…뭐야, 죽을 거라는 걸 알기라도 한 건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접 와서 해 주면 좋으련만. 하긴 죽은 자가 살아날 순 없으니깐.”

침통한 얼굴의 연호가 머리를 몇 번 쓸더니 말해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주와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헤어지는 일 없이 끝까지…….”

헛웃음을 짓는 연호의 눈에 물기가 살짝 돌았다. 끝까지 진우는 미주에게 남자로서 사랑을 표현하지 않은 채 오빠의 마음만 이 세상에 남겨 두려고 했다는 게 느껴졌다.

“…대단해. 나라면 그렇게 못 해. 사랑하는 여자의 행복만 빌어 주는 거, 나 같은 놈은 못 하는 짓이야.”

고개를 세차게 젓는 연호가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려 한다는 걸 알았다. 정훈은 착잡한 마음으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그를 배려해 줬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젖은 숨을 내쉬던 연호가 주먹을 꽉 쥐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나가고 나서 그 새끼 처리하려고 했는데. 단 하루도 못 기다리겠어. 배신자 새끼를 그냥 둘 순 없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견딜 수 없거든.”

“부회장님, 설마.”

“맞아. 김 기사 지금 내가 따로 수배 중이야. 그러니 아직 미주한테는 전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가능하면 그녀의 손이 더 더러워지는 걸 원치 않으니깐.”

섬뜩한 눈빛을 내는 연호가 뭔 뜻을 전하는지 정훈이 모를 리 없었다.

“제가 도울 일 있으면 알려 주세요. 전적으로 돕겠습니다.”

하지만 연호는 고개를 저으며 정훈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비밀은 비밀이 아니게 돼. 그러니 하 변은 모르는 척해 주고 있으면 돼. 그래야 실패하더라도 혐의를 벗을 수 있으니깐.”

“그럼… 만에 하나…….”

실패하면 어쩌냐는 말을 차마 묻지 못하는 정훈에게 괜찮다는 듯 연호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때가 오면, 미주한테 전해 줘. 날 버리라고.”

“…….”

“날 버리는 셈 쳐야지 반격의 기회가 있을 거야. 날 구하려 들면 결국 모두 정재민 손에 끝장나게 될 테니깐.”

일이 잘못되면 모든 걸 떠안고 가겠다는 연호의 생각이 이해된다는 듯 정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별일 없으면 보름 뒤에 밖에서 보자고.”

“네.”

“그리고 와이프한테 지금 상심이 클 텐데 굳이 나 보러 안 와도 괜찮다고 꼭 전해 줘. 본인부터 잘 추스르고…….”

연호는 끝말을 씹으며 그저 웃었다.

“그럼, 다음 달 초에 뵙겠습니다.”

“내 쪽 변호사들한테도 너무 고생이 많다 꼭 말해 주고. 고생했다, 나가서 소주 한잔하자고 말해 줘.”

“…벌써 100일 하고도 한 달이 넘도록 다들 잠도 못 자고 고군분투 중인데, 소주 갖고는 안 되실 겁니다.”

“그래, 알았어. 나 차연호야. 알지?”

차연호, 그와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구치소를 나온 정훈은 시간을 체크한 후에 차현 그룹 본사로 핸들을 움직였다.

* * *

본디 진우의 사무실이었던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보통 유언장 공개는 변호사 입회하에 가족들 앞에서 하는 편이지만 말이다. 그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공표하길 바랐기에 진우와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엮인 많은 이들이 이곳에 있었다.

“안 피곤해?”

“응, 별로. 오빠는?”

“나도.”

옆에 앉은 미주가 매우 아름다운 얼굴로 고개를 살짝 틀어 짧은 대답을 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라도 수수하게 저를 꾸미고 이곳에 나올 줄 알았는데.

재민은 검은색 투피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미주가 화려하게 화장을 하고 나타나니, 조금 구미가 당기긴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꼴렸다.

일부러 세게 보이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짙은 검은색 눈매와 대조적인 연한 핑크빛 입술이 꽤 먹음직스러웠다.

“지금부터 고인이 되신 서진우 전무이사님의 유언장을 공개하겠습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저음으로 죽은 자의 말을 대신 옮겨 주는 정훈이 낭랑하게 유언을 읊는 소리에도 그저 아래는 바짝 서, 피가 몰리고 있었다.

“…으로 한다. 두 번째,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차현 그룹 관련 주식과 그 외 다른 주식들, 현금 및 현물, 동산과 부동산 및 기타 등등 재산으로 간주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윤미주에게 상속한다.”

진우가 모든 걸 미주에게 준다는 말에 이곳에 와 있던 차현 그룹 사람들의 눈동자가 분주해지고 있었다. 재민은 분위기를 캐치하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세 번째, ……으로 한다. 네 번째, 내가 죽으면 ……해 달라.”

계속 이어지는 진우의 전언을 듣고 있을 때, 꽤 놀라운 말이 정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재민에게 이것을 전한다.”

갑작스러운 제 이름의 등장에 재민이 살짝 의아해할 때, 정훈이 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건넸다.

“직접 읽어 보시면 됩니다.”

“그래요, 하 변호사가 수고가 많습니다.”

공개된 곳에서 굳이 그걸 꺼내 보일 필요는 없으니, 재민은 진우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궁금했지만 애써 참아 내면서 표정을 흩트리지 않았다.

“이상 서진우 전무이사님 유언 공개를 끝내겠습니다.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훈의 인사에 사람들이 하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각자 꿍꿍이를 가진 듯 눈빛을 교환하거나 수군거리며 전무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들이 왜 그런지 잘 아는 재민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미주의 옆에서 천천히 일어나 보았다.

공개된 진우의 유언 내용은 어떤 이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일 것이다. 물론 재민에게도 그랬다.

다른 부분은 다 제외하더라도 진우가 가지고 있던 차현 그룹 관련주가 미주에게 상속된다는 건 말이다. 차현 그룹 부회장의 아내라 할지라도 저를 뒷받침해 줄 친정 세력 하나 없는 미주였기에 그간 그녀는 사람들의 견제 대상이 아니었다.

연호가 미주의 명의로 현금이나 부동산 따위를 선물로 줬다 해도 차현에 대한 주식은 단 한 장도 없었기에 총수 일가의 지분율을 따질 때 미주는 항상 제외됐었다.

그런데 진우가 죽음으로써 그의 주식이 고스란히 상속되자, 이제 미주는 그 누구도 저를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단숨에 오르게 된 것이다.

진우가 죽었기에 공석인 회장직은 차현 전자 최 사장으로 확정됐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미주가 어떤 변수로 작용해 생각지도 못한 다크호스가 될지도 몰랐다.

다들 열심히 눈을 굴리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듯해, 재민은 여전히 앉아 있는 미주의 옆에 서서 비꼬듯 말했다.

“좋겠네, 우리 미주. 이제 부자가 됐어.”

“그러게. 덕분에 남편이 나한테 준 건 소소한 용돈이 된 정도야.”

저를 올려 보는 미주는 말로는 벼락부자가 된 걸 기뻐하는 듯했지만, 여전히 표정만큼은 세속적인 일에 관심 없다는 듯 초연했다.

“그래도 같이 살 맞대고 산 마누란데 차연호가 어지간히 쩨쩨하게 굴었나 봐?”

“설마하니 그랬겠어? 썩어도 준친데 재벌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그렇게 쪼잔했을까?”

“그래, 잘 챙겨 둬. 사람 일은 모르니깐. 누가 알겠어? 네 남편이 나중에 널 내쳐도 잘 먹고 잘살 정도는 쥐고 있어야지.”

“맞아. 심지어 진우 오빠가 물려준 것도 꽤 쏠쏠해서 죽을 때까지 돈 걱정은 안 하고 살 것 같기는 해.”

제가 긁어 대는 말에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미주가 눈꼬리를 치켜뜨는 게 어쩐지 섹시해 보여 오늘은 참아 주기로 했다. 어차피 내일이 되면 미주가 울면서 무릎을 꿇고 제 구두에 입을 맞추며 남편을 도와 달라 빌러 오게 될 테니깐.

재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머리를 만지는 미주에게 몸을 기울여 귓가에 속삭였다.

“조만간 보자, 미주야.”

“글쎄?”

무슨 소리냐는 듯 미주가 경계심을 가득 담아 재민을 노려보았다.

“내 말이 뭔 말인지 곧 알게 될 거야.”

“…….”

“그럼 난 이만 가 볼 테니, 푹 쉬어.”

재민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는 어깨를 툭툭- 치자 미주는 더럽다는 듯 그의 손이 닿은 곳을 털어 냈다.

그런 제 행동을 재민이 보고는 피식- 웃더니 묘한 눈길로 진우의 사무실을 훑어보고 느린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재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정훈이 미주에게 다가와 진우의 유언에 관해 좀 더 디테일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전무님의 모든 게 사모님의 것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기분이 좀 이상하네요.”

“네, 문자 그대로 따지자면 여기 사무실에 있는 차현 그룹 소유의 집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모님 소유입니다.”

미주는 정훈의 말에 책상 앞으로 다가가 손으로 물건들을 만지며 씁쓸하게 물었다.

“예를 들자면 이 몽블랑 만년필도 이제 내 거다?”

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원하시면 전무님 집 열쇠를 드릴 테니 들어가셔도 됩니다. 사모님께서 그리하실 수 있도록 전무님 살아생전에 법적 효력이 발생할 수 있게 공증까지 받아 놨으니까요.”

“이거 참… 아무리 오빠라 해도 남자 혼자 살던 집에 내가 들어가는 건 좀 그런 거 같은데.”

“…그러실까 봐 제가 먼저 들어가서 좀… 전무님 프라이버시…에 관련된 건 치워 두긴 했습니다.”

“웃으면 안 되는데 뭔가 웃기네요. 하긴, 나라도 갑자기 죽으면 제일 먼저 걱정되는 게 컴퓨터 검색 기록이랑 하드에 저장된 것들일 테니, 뭐.”

미주는 이곳에 남아 있는, 여전히 진우에게 의리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괜히 농담을 던지며 웃었다.

“아, 하 변호사님께 들어 보니 진우 오빠 차고에 차도 좀 많이 모아 놨던데, 어때요? 어차피 전 이미 좋은 차 있어서 뭐, 요한 씨랑 도균 씨, 마음에 드는 거 하나씩 가져가요.”

요한이 고개를 저으며 정훈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슬프지만 또 웃기다는 듯 모순된 감정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이미 하 변호사님 통해서 전달받은 게 있어요. 저도 도균이도 섭섭하지 않게 전무님께서 챙겨 주셔서…….”

“뭐야, 알고 보면 오빠 알짜는 모두 두 사람이 가져간 거 아니에요?”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는 미주에게 두 사람은 손사래를 치면서 부정했다.

“설마요. 전무님이 저희에게까지 세세하게 마음을 쓰셨다는 게 정말 감사하지만… 받지 않겠다고 말해도 하 변호사님께서 전무님 뜻이라 하시니.”

“일부러 사모님에 대한 것만 공식적인 유언장으로 남겨 두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선 따로 남긴 게 있어 제가 정리해 드릴 예정이고요.”

“…네. 오빠가 알아서 잘 준비했겠지요. 하 변호사님께서 고생이 많으세요.”

미주가 정훈에게 살짝 묵례를 하자 괜찮다는 듯 정훈이 오히려 당황했다.

“아닙니다. 제 일이 바로 이런 건데요.”

“근데 오빠는 어쩌자고 이런 걸 미리 준비한 건지. 마치 죽을 걸 알고 그런 것 같아 마음이 아프네요.”

“…설마 알고 그러셨겠습니까? 그저 그만큼 철두철미하셨던 분이셨으니… 만에 하나 때문에.”

미주가 정훈의 말을 가로채면서 담담히 말했다.

“그 만에 하나가 정말 됐어요. 그런데 그게 양날의 검이 될 것 같아 조금 두렵기도 하고요.”

“보통 이 정도 위치에 계시는 분들은 오래전부터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맞아요. 나도 내일 죽을지 모르는 인생인데.”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우습다는 듯 미주가 말을 덧댔다.

“하긴, 차연호 씨도 준비해 둔 유언장이 있다면 1번이 아마 그걸 거야. 내가 죽으면 윤미주를 순장시키라고.”

제 혼잣말을 들은 정훈이 갸웃거리자 미주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농담이에요. 그냥 해 본 소리니깐 신경 쓰지 마요.”

미주의 장난 섞인 말에 정훈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요한과 도균을 번갈아 보고는 살짝 운을 뗐다.

“이 시점에 좀 뜬금없는 말이긴 합니다만, 이 차장님과 박 과장님 모두 전무님께서 이번에 오픈 준비하셨던 카지노로 넘어오시기로 했습니다.”

“여기 본사는 그만두고 간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단순히 일종의 발령…이라고 봐야 하는 건지.”

미주가 눈이 커지면서 갸웃거리자 정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무님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사모님께서 회사로 나와 줬으면 좋겠다고.”

“…그렇긴 한데.”

“스텔라 카지노 사장님으로 사모님께서 취임 좀 해 주셔야겠습니다.”

“……네?”

놀란 얼굴의 미주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지만 말이다. 정훈은 아랑곳없이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 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사장 자리가 공석입니다. 그런데 전무님께는 동생이 계시고요.”

“그래도 사장이라니요. 그냥 어디 말단 직원도 아니고 사장이라니. 전 회사 생활도 겨우 1년밖에 못 했고… 카지노를 경영… 이라니……”

“솔직히 말해서 가족들끼리 오너 자리에 앉는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무경력이라 밖에서 욕은 좀 먹겠지만 말입니다.”

제 말을 딱 자른 정훈에게 요한이 힘을 보탰다.

“그래서 저희가 갑니다. 양옆에서 도와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더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카지노 론칭에 참여했던 실무진은 그대로입니다. 전무님 자리만 비워진 거지 바뀐 건 아무것도 없으니 사모님은 그저 비극 속에서 명목상 사장 자리를 채우는 척하시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버리면 됩니다.”

정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 하진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씌워지는 작은 왕관이 너무나도 무섭고 무겁게 느껴졌다. 미주는 불안 가득한 얼굴로 제 사람들을 보았다.

“…오늘 오전에 남편 만나서 이 문제를 미리 의논했겠네요? 내가 변호사님을 보낸 건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지만요.”

“네, 부회장님도 전적으로 동의하셨습니다.”

“하아, 진우 오빠… 대체 날 어떻게 보고 이런 걸…….”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은 미주가 한숨을 푹 쉬면서 숙명 같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좋아요. 해 봐요, 우리. 카지노 망해도 나한테 책임 지우면 안 돼.”

“걱정하지 마세요. 나중에 부회장님께서 나오시고 하면 더 힘을 받을 테니 상황이 정리된 후 천천히 일 배우면 되세요.”

“다만 걱정인 게, 정재민이 이 일을 알고 훼방을 놓지 않을까 싶은데.”

미주가 인상을 쓰면서 조금 전 재민이 남긴 기분 나쁜 메시지를 떠올렸다.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스텔라는 마카오 쪽과도 연결되어 있기에 정 실장이 절대 먼저 치진 못할 겁니다.”

“아, 마카오… 오빠한테 들은 적 있어요.”

“네. 그리고 모레 열리는 이사회에서 아마 최 사장을 그룹 회장으로 만든 다음, 본인도 분명히 승진해 위로 올라갈 거라 저는 예상합니다.”

이 모든 일을 뒤에서 검찰과 손잡아 설계한 막후의 실력자가 겨우 ‘비서실장’으로 만족하진 않을 것이다.

재민이 어디까지 올라갈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정훈의 말을 들어 보니 재민을 견제하기 위해서 제가 자리를 하나 차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남편이 나오고 나면 본격적으로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또 작전을 펼치겠지요. 아니면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또 다른 수로 모두를 흔들거나.”

비로소 진우가 저를 왜 밖으로 끌어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재민이 본격적으로 그들과 대립하기 시작한다면 높은 자리에 있는 아군이 많을수록 좋았다. 진우가 제 잠재 능력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다는 뉘앙스를 풍긴 적 있었으니 말이다.

사적인 복수와는 별개로 더는 연호의 우산 아래에서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 폭풍을 맞이하기로 마음먹었다.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에 공식적으로 데뷔해 재민을 상대함이 최선임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정훈에게 물었다.

“그럼, 제가 갖게 될 차현 주식이 어떻게 되나요?”

“아, 그게…….”

정훈이 조금 곤란하다는 듯 요한과 도균을 보자, 자리를 피해 달라는 뜻임을 간파한 듯했다.

“미주 씨, 저흰 커피 한잔 마시고 오겠습니다. 하 변호사님과 말씀 잘 나누세요.”

“네, 항상 고마워요.”

눈치 빠르게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보면서 미주와 단둘만 남게 되자 정훈은 조금 편한 톤으로 질문에 답했다.

“일단 차현 그룹 지주 회사인 차현 건설에 대해서는 4%이고, 중공업에 대해서는 제가 관리하는 차명까지 전부 포함해서 6%쯤 됩니다. 거기에 원래 차연희… 관장님께 드리려고 했던 차현 물산 지분도 1% 정도 되고…….”

미주는 정훈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 4%니 6%니 하는 주식 보유량이 실제로는 주가에 따라 몇십억에서 몇백억에도 달한다는 말에 조금 놀라는 중이었다.

“그럼 제가 물려받는 게 이사회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칠 순 있나요?”

“진짜 솔직히 말씀드리면, 현재로선 결정적인 영향력은 없습니다. 저들이 모은 지분율이 이미 압도적이기 때문에 차연희 관장님이나 부회장님이 직접 등장하지 않는 이상 사모님이 가진 거로 대세를 바꿀 순 없어요.”

미주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눈을 반짝이면서 정훈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말도 안 되긴 하지만 내가 회장직에 올라서 그를 저지하는 건 어때요?”

“네?”

“내가 후보로 나가면요? 이번 이사회에서 회장 선출하는 거 다들 임시직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맞습니다.”

“변호사님께서 말해 준 스텔라 사장 건, 명목상이라고 했으니 차라리 명목상 내가 회장이 돼도 괜찮을 것 같은데.”

미주가 차현 그룹 회장에 도전한다니? 깜짝 놀랄 만한 말에 정훈이 멍하게 그녀를 보았다.

“내가 차현 그룹 회장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정재민이 이겼다고 생각한 판을 뒤집을 순 없어도 흔들 순 있을 것 같은데.”

“말씀해 보세요, 잘 듣겠습니다.”

“하 변호사님 말 듣고 순간 떠올랐어요. 당장 내일모레 열리는 이사회에 지금 차현 전자 최 사장님이 단독 후보인 모양인데…….”

마른 입술을 적신 미주가 짧게 숨을 내쉬고는 제 묘수를 꼼꼼히 쏟아 냈다.

“진짜 회장이 되겠다가 아니에요. 내가 등장해서 조금이라도 저들을 흔들 수 있다면 나한테 시선이 뺏겼을 때, 남편이 치고 나가면 될 테니깐.”

예전에 연호가 그랬다. 방패막이가 될 테니 방심한 틈을 타 진수오의 뒤를 치라고.

그에게 배운 전략이니 연호를 돕기 위해 다시 그 방법을 이용하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조금만 버티면 연호가 나올 것이고, 자유의 몸의 된 그와 머리를 맞대고 정재민을 어떻게 찢어 죽일지 궁리할 시간만 벌면 된다, 미주는 생각했다.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정훈은 조금 머뭇거리며 연호가 이제 곧 행동으로 옮길 일을 그녀에게 말하는 게 옳을지 잠시 고민했다.

‘부회장님 말이 틀린 건 아니야. 위험한 일은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위험해져. 만약을 항상 대비해야 해.’

“다만, 뭐요?”

제 의견을 묻는 미주에게 정훈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다만, 너무 갑자기라 이 짧은 시간 내에 이사진과 주주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네요.”

“아니요, 그럴 필요 없으세요. 그냥 내가 나왔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정재민 네가 얕잡아 봤던 윤미주가 밟으면 꿈틀이라도 한다는 걸 보여 주는 쇼라고 생각해 주세요.”

어쩌면 정훈 역시 미주를 조금 과소평가했을지도 몰랐다.

가끔 진우에게서 말로만 전해 들었던 그녀에 대해서만 보면 말이다. 진우가 그녀를 언제나 상처투성이 작은 새처럼 생각해 품 안에, 우리 안에 보호하고 싶어 했기에 정훈 역시 그 감정에 동화되어 있었는데.

제 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맨몸으로 정글에 뛰어들겠다는 가녀린 여자는 누구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목숨 걸었어. 그러니 다들 그 정도 각오가 없으면 여기서 끝내요.’

이미 어제 보지 않았는가? 저보다 덩치가 두 배나 큰 남자 셋을 일순간 꼼짝 못 하게 하는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왜 진우가 미주를 후계자처럼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아 정훈은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저기, 잠시 혼자 있고 싶은데… 오빠한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요.”

“아… 네. 그럼 저도 밖에서 커피 한잔하고 있겠습니다.”

정훈이 저를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서류들을 정리해 문을 닫고 나갔다.

정적이 흐르는 진우의 사무실 안에 미주는 혼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모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서로를 보고 웃고 있었지만 말이다. 다들 깊은 슬픔 속에서 각자의 위치를 지키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일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풋- 하고 웃었다.

“이럴 수가. 잠시 센티멘털해졌는데 생각해 보니 오빠한테 뺨 맞았던 곳은 여기가 아니었잖아.”

아직 진우가 비서실장이었던 시절에 그를 지키겠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덕분에 잃어버렸던 시간이 있었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 울렸다. 미주는 처음 와 보는 전무실을 살펴보았다.

“그래도 임원은 좀 다르긴 하나 봐. 내 기억이 맞다면 전의 그 방보다는 훨씬 넓고 크고 전망까지 좋네.”

불과 일주일 전까지 살아 있던 남자가 남겨 놓은 걸 보면서 점점 가슴이 복받쳐 올랐다.

“오빠가 돌아올 수만 있으면 그까짓 뺨 따위 몇 대는 더 맞아 줄 수 있는데…….”

왼뺨을 만지던 미주가 사무실 안을 뱅뱅 돌면서 진우와 함께한 시간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진우의 손때가 묻었을 책상 앞에 담담히 서 보지만.

[전무이사 서진우]

그의 이름이 적힌 명패를 아직 아물지 못한 자상을 입은 손으로 어루만졌다.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오빠. 독하게 살아남겠다 맹세한 거, 오늘 하루만 좀 봐줘… 못 하겠어. 산다는 거 너무 힘들어… 그러니 나도 죽고 싶어…….”

뜨거운 눈물이 책상으로 뚝뚝- 동그랗게 떨어져 그 부분만 색이 점점 더 짙어졌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을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야만 하는 걸까? 미어지는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지금 제 말을 듣고 있을 진우에게 말했다.

“근데 있잖아. 차연호 때문에 오빠 따라 못 가. 그 사람 나 없이는 살 수 없거든. 나도 그렇고….”

지난날, 반쯤 삶의 의지를 놓은 채 술과 약에 취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제 인생에 구원이었던 남자.

연호가 찾아 준 지금의 삶을 감히 놓을 수도 없어 미주는 흐느끼면서 책상에 엎드렸다.

“살아남을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 그러니, 오빠… 이제 그만 편히… 모든 걸 다 잊고…….”

손끝에 닿는 마호가니 나무 책상이 어쩐지 따뜻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옆에 있어 준, 가족이자 친구이며 오빠였던 사람.

연인이 될 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감정으로 사랑했던 남자.

이제는 추억이 될 진우와 함께했던 평생을 가슴에 새기면서 미주는 오늘 밤만큼은 진우와 함께이고 싶었다.

* * *

한편 늦은 시각, 집으로 돌아온 재민은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하얀색 직사각형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형님, 나한테 할 말이 있을 줄 몰랐네요.”

정훈이 건네준 진우의 마지막 전언이 담긴 편지. 이미 그 호텔 루프탑 바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끝났다고 여겼는데.

어쩐지 쉽사리 편지를 열지 못하던 재민은 꽤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마음을 정하고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흰색의 규격 봉투에 담긴 편지를 꺼내 보았다.

“뭐야, 밀봉조차 되어 있지 않으면 이게 진짜 진우 형이 보낸 건지 하정훈 그 새끼가 진우 형인 척 써서 넣은 건지 어떻게 안담.”

설령 진우가 적은 게 맞다 해도, 정훈이 먼저 보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하정훈은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재민은 의심을 접고 천천히 접힌 편지를 반듯하게 펼쳐 보았다.

[재민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진우의 필체는 제가 제일 잘 알았다. 분명 친필이 맞았고 내용 역시 진우가 보냈을 법해, 재민은 말없이 오래된 친구이자 형의 마지막 말을 눈에 담았다.

“형은 너무 물러요… 자기 사람이라 생각하면 끝까지 기회를 주고 믿어 주는 거… 그래서 내가 죽인 거예요. 설마 내가 그렇게까지 할까 방심하지 않을까 해서… 그랬어요.”

제 사무실로 배달 온 진우의 선물. 그 훼손된 신체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잘 알았다.

잔나비. 오래전, 제게 먼저 접근해 간사한 말로 현혹했었다.

‘정재민이, 법대생이니깐 나중에 판검사 돼야 할 텐데 아버지가 자꾸만 발목 잡지? 도박꾼 애비가 네 앞길 안 막게 도와줄 테니까, 뭐 좀 물어보자.’

당시 아비가 도박판을 전전하고 있다는 걸 알아낸 그가 달콤한 손길을 내밀었다. 윤희주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만 주면 아비의 빚 절반을 갚아 주겠노라고.

‘혹시 전액 변제를 원하면 한 가지 방법이 있어.’

원숭이처럼 간악한 지혜가 가득했던 그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 왔다.

‘간단해. 윤희주 대가리에 요즘 뭔 생각이 가득 찼는지 그것만 좀 알려줘.’

솔직히 말해, 대답은 빨랐다. 그리하겠다는 제 말에 원숭이를 닮은 놈이 팔자 주름이 깊게 팰 때까지 기쁜 듯 웃었다.

‘괜찮을 거야. 그냥 아는 것만 말해줬으니까……’

진우와 희주처럼 그쪽에 몸을 담고 있지 않았으니 그 세계가 얼마나 위험하고 잔인한 곳인지 정확히 몰랐다. 나중에서야 두 사람이 범죄의 바운더리 근처까지 갈 정도로 꽤 험악한 짓을 많이 하고 다녔다는 걸 알고는 놀랐으니깐.

‘근데, 정재민. 한가지 네가 해 줄 게 있어.’

‘…뭔지 모르겠지만 거절 하…….’

‘아버지 빚이 더 늘어났더라. 괜찮겠어?’

분명히 잔나비는 이렇게 말했었다. 시선만 한 번 끌어달라고.

‘아니면 그냥 없던 일로 하고 네 아버지, 도박판 쩐주한테 몸 조각나는 거 보든지.’

그래서 그랬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희주의 등 뒤에서 이름을 불렀다.

“희주 형!”

친동생처럼 아끼던 제 목소리를 들은 희주가 본능적으로 뒤돌아볼 때, 놈들이 그런 식으로 나타날 줄 꿈에서도 몰랐다.

아직도 생생한,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사람이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로 날아가던 그 모습.

‘윤희주, 이 씨발 새끼. 내가 너 죽일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 좆 같은 새끼…….’

트럭 조수석에서 내린 노란 머리 놈이 쓰러진 희주 앞에서 내뱉던 욕설이 매일 귓가에 울렸다. 눈이 마주친 노란 머리 놈이 마치 입술을 지퍼로 채우는 듯한 동작을 취할 때 재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희주 형… 난 정말 몰랐어. 잔나비가 형을 죽이기 위해 날 속였을 줄… 정말 몰랐어…….”

속여야만 했다. 진우가 알면, 미주가 알면 그들이 저를 어떤 눈으로 볼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데 두 사람을 잘 속여 넘겼다고 생각하고 한시름 덜었을 때였다. 놈들이 미주를 납치했고, 결국 그 대가를 피로써 치르게 되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았던, 피를 뒤집어쓴 악귀 같았던 진우. 말한 적 없었지만 그도 저처럼 매일 밤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다는 걸 알았다.

저 역시, 매일매일 비밀이 들킬까 하는 불안함 속에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으려 늘 노력했었다. 혹시라도 말실수를 할까 봐, 혹여라도 누군가 제 원죄를 눈치챌까 봐.

저를 좋아하고 있는 미주의 마음을 알면서도 차마 먼저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녀가 겪었던 끔찍한 일의 시발점이 바로 저이지 않았는가.

미주를 그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사랑한다고 표현할 수도 없이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못한 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 그럴수록 깊어지는 감정이란.

손에 넣을 수 없어 더 애달팠고, 빼앗겼다고 여겼기에 되찾고 싶어 여기까지 와 버렸다.

하지만 사랑하는 그녀는 환멸의 눈으로 배신자인 저를 보고 있었고, 사랑했던 진우 형은 제 손으로 죽여 버리고 말았다.

“형, 너무 늦었어요. 이젠 다 늦었어… 내가 잘못 선택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겨야 해요… 내가 이기는 방법으로… 미주가 이겼다고 생각할 방법으로…….”

눈물을 흘리던 재민이 품에서 라이터를 꺼내 진우의 편지 귀퉁이에 불을 붙였다.

“잘 가요, 형. 다음 생에서는 절대로 만나지 맙시다.”

마치 지방紙榜을 태우듯 진우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 * *

“기발해. 미주 네가 회장이라니. 왜 나는 그 생각을 못 했지?”

“오빠가 죽을 줄, 그 누구도 몰랐으니까요.”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깐.”

연호는 차분한 목소리로 가엾은 미주에게 말했다.

진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 처음 저를 면회 온 미주는 수척하다 못해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히 빛나고 있어 그녀 역시 지금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고 있음에 마음이 아렸다.

“그럼 내 쪽 사람들한테 널 뽑아 달라고 얘기해 놓을게.”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회장 아니고 그냥 후보로 나서 보겠다, 이거예요. 될 생각도 없고, 그냥 정재민이 신나는 꼴 못 보겠으니… 뭐라도 발악해 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래, 뭔 말인지 알아. 아, 그리고 스텔라 건은 하 변호사한테 전해 들었어. 그건 정말 괜찮은 생각이니깐 빼지 말고 꼭 자리 지켜서 거기서부터 시작해 봐.”

“회장은 안 되고 사장은 된다? 웃겨, 다들.”

“안 된다는 소리 한 적 없어. 오히려 환영이야. 부부끼리 다 해 먹는 거 좋지 않아?”

농담을 주고받지만, 미주와 연호는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연호는 오랜 라이벌이자 어쩌면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새로운 가족을 잃었다. 그리고 미주는 가족이었던 오빠를 두 번째로 잃는 슬픔을 겪었으니 말이다. 그 침통한 심정을 차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찢기는 마음일 것이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미주의 머리에 꽂힌 자그마한 흰색 리본이 달린 머리핀. 불과 열흘 전에 벌어진 이 끔찍한 살육을 어찌하면 갚을 수 있을지 저는 잘 알았다.

아버지를 죽이고, 처남을 죽인 자.

‘처음부터 봐주는 게 아니었어… 아버질 해친 걸 알았을 때 생매장해 버렸어야 했는데.’

경찰이 쫓고 있을 김 기사를 먼저 찾아내야만 했다. 백호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불법, 탈법, 위법, 모두 상관없이 할 수 있는 모든 루트를 동원해 그를 경찰보다 먼저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제가 듣기로는 재민과 손을 잡을 검착 쪽에서 입김을 불어 넣었는지 말이다. 경찰들이 백주 대낮에 있었던 살인 사건을 그리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는다 들었다.

그나마 다행히 재민도 더는 차현 주가가 떨어지는 게 싫었는지 언론을 틀어막아 최대한 진우의 일을 외부로 유출시키지 않고 있었다.

‘너도 눈앞에서 돈이 날아가는 걸 더는 볼 수 없었나 보지?’

거기에 연호의 외가 언론사에서도 있는 힘껏 새로운 살인 사건보다 누나가 죄인인 살인 사건을 계속 더 크게 보도하고 있어, 진우의 일은 조용히 묻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 몰라도 나는 안 돼요. 아무리 가족끼리 다 해 먹는다고 해도 물경력이 회장이라니, 무슨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뭐, 나중에 한 60대쯤 돼서 회장 한번 시켜 주든지.”

“막장 드라마, 지금 우리가 찍고 있잖아. 몇 년 지나 봐. 우리 이야기, 적당히 각색돼서 재벌가를 다루는 드라마에 나올걸?”

피식- 웃는 미주가 억지로 슬픔을 삭이려는 모습에 연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널 안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북받치는 마음일 미주가 입술을 꽉 물고서는 그저 모든 걸 삼키고만 있었다. 아이를 잃었을 때 보았던 모습이었다. 아마 미주는 희주가 죽었을 때도, 제게 지옥 같은 일이 생겼을 때도 지금처럼 입술만 씹어 대며 감정을 안으로만 갈무리했을 것이다.

그녀를 향한 사랑이 집착과 소유욕을 떠나 이젠 윤미주라는 한 인간에 대한 포용으로 바뀌고 있던 연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이런 말 해서 조금 그렇긴 한데.”

“괜찮아요, 편히 말해요.”

고개를 살짝 끄덕인 미주가 담담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어 연호는 옅은 미소로 말했다.

“혼자 삭이지 마. 다 토해 내. 어떤 식으로든 뱉어야 해. 욕하고 소리 지르고 울고… 너무 혼자 안고 가면 결국 널 망치게 될 거야.”

“…….”

“만약 지금 혼자 있어서 힘들다면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곧 나가니깐…….”

어째 저보다 더 슬픈 표정의 연호가 곧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았다. 미주는 오히려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아니야, 차연호 씨. 지금 혼자 있어서, 이렇게 힘든 곳에 있어서 힘든 거 다 알아요. 그러니깐 조금만 기다려. 내가 꼭 안아 줄게.”

미주는 저보다 더 큰 마음을 지닌 게 분명했다. 세상 풍파 험한 일을 겪으면서 점점 성장해 어느새 더는 제게 의지하는 나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무소의 뿔처럼 곧은 심지로 삶을 나아가려는 이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그리고 아내라서 연호는 다행인 것 같았다.

“그래, 제발 좀 안아 줘. 나도 많이 힘들어.”

어느새 미주와 같은 미소로 웃고 있는 연호는 그 순간 결심했다.

앞으로 삶이 끝날 때까지 제 인생은 미주만을 위해서 살겠노라고. 그 어떤 일이 두 사람 앞에 놓여 있더라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그녀가 죽으면 저도 죽을 것이니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