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 살아남는 놈이 이기는 것 (43/53)

41. 살아남는 놈이 이기는 것

* * *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진우의 죽음을 하늘도 슬퍼하는 건지, 아니면 미주의 비통한 심정이 하늘에 닿은 건지. 비가 이리 내릴 계절도 아닌데 주르륵, 주르륵 흠뻑 쏟아지고 있었다.

살아생전 법적으로는 고아와 다름없었던 남자는 다행히도 마지막 가는 길이 외롭지 않아 보였다. 차현 의료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생각 외로 많은 사람이 찾아와 갑작스러운 비보에 침통한 표정으로 애도하고 있었다.

“작은 사모님,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고…….”

“미주 씨,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사모님, 돌아가신 전무님은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 어쩌다가…….”

“바쁘신 와중에 이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빠도 고맙게 생각할 거예요.”

상주임을 나타내는 두 줄 완장을 찬, 여자. 검은색 한복을 입은 미주가 의연한 표정으로 조문객을 하나하나 맞이하고 있었다.

진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 상주도 함께 변을 당할 뻔했다는 게 아는 사람들 눈에는 보였다.

외모만큼은 대단하다는 평을 듣던 차현 그룹 부회장의 평범한 아내. 그 외모 덕에 평사원이었던 그녀가 차연호의 눈에 들었다는 소문들.

떠들기 좋아하는 혹자들은 죽은 진우가 일부러 차연호 근처에 출중한 외모의 여자를 붙여 놓았다는, 요즘 시대에도 미인계가 먹혔다는 가십을 씹어 대기도 했었다. 심지어 미주가 진우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을 알기에 더 살을 붙이고 말을 만들어서 수군대기도 했었고.

하지만 지금 다 터진 입술과 시퍼렇게 피멍이 든 눈에 양손은 다쳤는지 붕대로 칭칭 감은 채 깨진 이마를 간단히 봉합만 하고 검은 한복을 입고 서 있는 여자가 있었다.

어디에도 미녀는 없었고, 미인도 없었다.

그저 오빠를 잃는 비극을 겪은 동생만 남아 있어 사람들은 동정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 여기 이곳에 서 있는 것도 대단하다 여기는 측은한 시선 속에서 미주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내가 상주가 아니면 누가 상주겠어요? 설마 남자만 가능하다, 이딴 개소리 할 거면 모두 다 꺼져요.”

진우의 측근들에게 제가 꼭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말하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상주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미주 씨, 좀 쉬시는 게…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손이랑 등의 상처가 너무 깊은데.”

미주의 옆에 서 있던 요한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휴식을 권해 보지만.

“괜찮아요. 난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도균 씨가 난 더 걱정인데…….”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그들 옆에 서 있지도 못하는 도균이 퉁퉁 부은 얼굴로 빈소 구석에 앉아 있는 걸 미주가 걱정스럽게 보았다.

“도균이 저 새끼, 자기가 자리를 비웠을 때 전무님이 변을 당했다고 너무 자책을… 도균이도 저처럼 전무님 덕분에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됐으니… 지금 얼마나 힘들지…….”

도균만큼이나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한 요한이 저를 걱정하는 게 마음 아팠다. 미주는 요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도, 우리 모두. 오빠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거니깐. 오빠한테서 구원받은 인생 절대 헛되게 하지 않을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는 요한의 눈에 제가 비쳤다. 진우의 최측근 중 하나였던 요한이니, 누가 지금의 슬픔을 만들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서로를 위로하는 마음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복수라는 이름.

미주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진우의 영정 사진을 보면서 말했다.

“사진이라도 좀 웃는 거로 찍어 두지. 저게 뭐야.”

“전무님께서 어디 사진 찍는 거 좋아하시는 분이셨습니까? 저 사진도 겨우 쓸 만한 거 찾아낸 거 아시잖아요.”

비통의 한가운데서 애써 웃으며 다음 날을 맞이했다.

‘…어디서 봤는데… 낯이 익어. 근데 어디서 봤더라……?’

빈소가 차려진 지 둘째 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여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저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는 것 같은 화려하게 생긴 여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진우의 영정 앞에 말없이 서 있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조문하러 오셨으면 먼저…….”

딱 봤을 때 불청객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그녀를 진우의 밑에서 일했던 자들이 다가가며 제지하려 할 때였다. 미주가 팔을 뻗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덩치 좋은 사내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혹시 예전에 부산에 사셨나요……?”

분명 안면 있는 사람인데. 기억이 맞다면 그녀는 서울에서 알게 된 이가 아니라 부산에서 알았던 사람 같아 미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재벌 사모님, 희주 오빠 동생 미주 맞지?”

“네, 맞아요.”

진우만 보고 있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슬픔이 가득 찬 눈으로 미주를 보면서 말했다.

“많이 컸네, 윤미주. 너 어릴 때 내가 연습한다고 머리 잘라 준 적 있었는데…….”

“…아.”

“근데 얼굴 꼴이 이게 뭐니? 응? 여자애가 늘 예쁘게 하고 다녀야지.”

“…그러게요…….”

제 앞에 다가온 여자는 마치 친언니라도 된 듯 엉망인 미주의 얼굴을 안쓰럽게 보았다.

“진우가 널 두고 가는 심정이 어떨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만 말이야.”

뭔가 사연이 깊어 보이는 여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창백한 미주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리 보니… 정말 진우 말대로 희주 오빠랑 눈이 똑같이 생겼네.”

“…….”

“있잖아, 재벌 사모님. 내가 중학생일 때, 희주 오빠 짝사랑했었어.”

“우리 오빠가 좀… 잘나가긴 했었죠. 인기도 많고.”

“맞아, 정말 멋졌어, 희주 오빠. 근데… 넌 모르겠지만 잘나가는 희주 오빠 옆의 진우도 꽤 잘나갔었어. 망할 년들이 얼마나 들러붙었는데.”

“…그래도 우리 희주 오빠가 더 잘나갔을 거예요.”

“뭐…, 그건 맞아.”

처음 보는 여자가 얼굴을 쓰다듬어도 미주는 불쾌한 게 아니었다. 그리운 고향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라 그녀의 말에 따뜻하게 대답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겠지만 난 진우한테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친구야. 그러니 날 여기서 내쫓지 마, 재벌 사모님. 그냥… 마지막 가는 길에 인사 정도는 하게 해 줘.”

그리하겠다는 듯 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고맙다는 듯 미주의 어깨를 두어 번 치고는 진우를 물끄러미 보았다.

뒷모습에서 보이는 감정이 미주는 너무나도 잘 느껴져 속으로 눈물을 삼켜 보았다. 아마 긴 세월 진우를 사랑했을 여자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 말고는 그 누구도 진우의 여자랍시고 울며불며 나타나는 사람도 없었다.

‘정말 오빠한테 여자가 많았는지, 아니면 하나도 없었는지 모르겠어. 나 맨날 바람둥이라고 오빠 놀렸는데.’

미주는 시간이 날 때마다 진우의 사진을 보며 마음속으로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덧 빈소가 꾸며진 지 3일째 되던 날 밤이었다. 어쩌면 지금쯤 오리라 예상했던 인물이 나타났다.

“씨발, 저 새끼가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재민을 발견한 도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흡사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며 달려드는 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간신히 말리고 있을 때였다.

“정재민! 너 씨발 새끼! 전무님 죽이고 감히 얼굴 빳빳이 들고 여길 찾아올 생각을 해? 개새끼, 내가 너 죽여 버릴 거야!”

울부짖는 도균의 목소리가 시끄럽다는 듯 재민은 귀를 만지작거리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모두 들으랍시고 입을 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씹새끼! 이거 놔! 놓으라고! 미주 씨! 저 새끼예요! 저 새끼가……!”

피를 토하듯 도균이 눈에 핏발을 세우지만, 미주가 천천히 다가가 괜찮다는 듯 어깨를 도닥였다.

“도균 씨, 말이 너무 심했어요. 재민 오빠가 어디 그럴 사람인가?”

“미주 씨…….”

소름 끼치도록 초연한 말투로 저를 달래는 미주에게서 뭔가를 본 도균이 더는 발광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도균은 사람들이 저를 놔주자 옷을 탁탁- 털면서 씹어 삼킬 듯 재민을 노려보았다.

“진우 오빠가 갑자기 죽어 충격받아서 그래. 너무 화내지 마.”

나긋한 목소리의 미주가 저를 보면서 웃는 게 어쩐지 소름 끼쳤지만 이미 승자인 재민은 거칠 게 전혀 없었다.

“일이 좀 많아서 늦었어. 이제부턴 내가 상주 노릇 해야지.”

하지만 싸늘한 표정의 미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여전히 차분한 톤을 유지한 채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해야지. 오빠도 사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웃고 있어도 미주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의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형이 다 알려 줬나 보네.’

재민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대답 대신 안경을 한 번 치켜올렸다. 그러자 미주는 살짝 웃음을 머금은 채 조문객의 도리를 다해 달라 요청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오빠한테 인사라도 하고 가.”

“그래, 그래야지.”

태연하게 예의를 갖춘 모습으로 진우의 영정 앞에서 향을 피우고는 절을 한 뒤, 미주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근데, 미주야. 네가 전에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지?”

“응, 다시는 볼 일 없다고 했는데, 이렇게 또 만나게 돼서 좀 쪽팔리긴 해.”

진우의 죽음으로 각성이라도 한 것 같은 미주가 능숙하게 제 말을 받아넘기는 꼴이 우스워 재민은 피식거렸다.

“미주야, 이걸로 끝나지 않아. 명심해.”

몸을 살짝 숙여 그녀의 귓가에 나른하게 제 뜻을 전하자 돌아오는 대답은 가관이었다.

“응, 오빠도 명심해. 희주 오빠 몫까지 계산할 거니깐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야.”

하룻강아지가 제아무리 범 무서운 줄 모른다 해도 말이다. 강아지는 강아지임을 미주에게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귀엽다는 듯 미주의 뺨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고 옆에 있는 요한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형이 죽었으니 이제 미주를 섬기기로 했나 봐.”

“…실장님을 모시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이 제 눈을 똑바로 보고 적의를 숨기지 않자, 재민은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 기대할게. 두 사람 모두, 그리고…….”

가장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검은 양복을 입고 서 있는 남자.

“하 변호사, 형님이 이럴 때를 대비해서 나한테 남긴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정훈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이젠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가진 재민을 향해서 입을 열었다.

“실장님 말씀대로, 전무님께서 유사시를 대비해 준비해 두신 유언장이 있습니다. 그러니 꼭 실장님도 참석하신 가운데 유언장이 공개되었으면 좋겠다, 제게 일러두셨습니다.”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유언장 집행에 관한 말을 하다니.

진우가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도 제가 나타나지 않으면 말이다. 도균이 소리친 대로 사람들은 진우의 죽음이 저와 연관 있다 여길 게 분명했다.

아직 경찰은 진우를 찌른 놈을 잡지 못했다. 김 기사와 진우가 이미 아는 사이였기에 경찰은 개인의 원한이라 치부한 채 수사를 벌이고 있었다.

왜냐면 현장에 있었던 미주가 무슨 이유에선지 입을 다물고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 김 기사가 왜 진우에게 칼을 휘둘렀는지 전혀 모른다고 경찰에 진술했으니깐.

CCTV에는 소리는 녹음되지 않으니, 그저 칼을 들고 찌르고 찔린 남자들과 여자만 찍혀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제가 살인을 사주했다는 물리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진우를 죽여야겠다 마음먹고 김 기사를 찾아가 제 특기인 세 치 혀를 놀렸다. 그의 마음속에 복수와 배신을 심고는 비밀을 안다, 말했을 뿐이었다.

김 기사가 살인을 불사할 정도로 지키고 싶어 하는 것, 그걸 알고 있었다. 그를 이용해 진우를 죽인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으니까.

‘아마 그때가 오면 너희 모두 망연자실하겠지… 내가 굳이 김 기사를 끌어들인 것… 나중에 땅을 치고 우는 꼴을 즐겁게 감상했으면 해.’

재민은 하 변호사가 저를 진우의 유언장 공개 현장에 끌어들이는 이유가 궁금해서라도 꼭 참석해야겠다 마음먹으며 대답했다.

“그래, 꼭 갈 테니 연락해 줘.”

* * *

그리고 뻔뻔하게도 재민은 여기까지 와 있었다.

부산.

고향이었지만 그저 1년에 한 번씩 진우와 함께 희주의 기일쯤 내려오는 것 말고는 더는 부산을 떠올리고 싶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나밖에 없었던 피붙이인 아버지 때문에 제 인생이 결국 이렇게까지 꼬이지 않았는가.

그때, 서면 오락실 앞에서 돈을 만들어 달라던 도박꾼 아비를 완전히 매정하게 끊어 냈다면 말이다. 잔나비에게 판 정보 때문에 희주가 죽지도 않고, 미주에게 끔찍한 일도 없었을 텐데.

사실상 제 손으로 죽인 것과 다름없는 진우도 살아, 지금 제 옆에 서 있었을지도.

어쩌면 그들 모두 서울에는 갈 일도 없이 평안하고 평범하게 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무슨 과를 지망했을지는 몰라도 지금쯤 어디선가 병원을 개원해 원장님 소리 듣고 살았을 진우. 어둠에서 손을 털고 어떻게든 먹고살 길은 마련해 제 앞가림은 하고 있을 희주까지.

가끔 상상했던 대로,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 된 미주가 제 아내가 되어 토끼 같은 자식들을 낳고 살았을지도 몰랐다. 정말 판검사가 되었을지 지금처럼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저 역시 어찌어찌 밥 먹고 살 정도는 되게 살았을 테니깐.

‘아버지, 아버지를 끝까지 버리지 못한 대가가 이렇게나 크다는 걸 아셨다면 그때 제게 돈을 달라는 말, 하지 않았겠지요?’

나약한 마음 때문에 천륜의 정을 자르지 못해 요양원에서 아비가 죽을 때까지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딱 한 번, 모질게 눈 감고 아버지를 외면했다면, 지금 제 인생은 얼마나 많이 바뀌어 있을까?

아니, 저 말고 그들 모두의 인생이 저로 인해 변해 버렸다. 하지만 과거를 후회한들 현재가 바뀔 수 없음을 이젠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5년간 죄책감을 가슴에 안고 산 결과 형제와 다름없는 이를 또다시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말이다.

애증의 고향에서 다시 한번 더 제가 죽인 자가 먼 곳으로 떠나는 걸 말없이 보면서.

진우의 바람대로 희주가 잠들어 있는 곳 옆에 그가 외롭지 않게 함께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예상이라도 한 건지, 진우는 오래전 희주 옆자리에 제 자리를 준비해 두었다.

“…….”

재민은 흘깃 옆을 바라보았다.

화장한 진우를 희주 옆에서 쉬게 하는 걸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미주. 그녀는 진우의 죽음 이후로 감정이라는 걸 잃어버리기라도 한 건지 무표정에 가까운 초탈한 표정을 계속 짓고 있었다.

‘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뭐.’

미주의 마음이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어쩌면 그녀의 남편인 연호보다 제가 더 잘 안다고 볼 수 있었다. 파국을 맞았다 한들 세 사람이 함께했던 시간이 모두 없던 일이 될 순 없으니깐.

제 앞에서 어지간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미주 때문에 요한도, 도균도 재민에게 더는 건방지게 굴지 않았다. 심지어 언제나 눈엣가시였던 정훈마저도 고분고분 굴고 있었다.

그래서 재민은 감히 철면피처럼 서서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들 말고 다른 이들이 봤을 때 진우의 친동생이나 다름없던 제가 그의 마지막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생각할지, 타인의 시선을 아예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었다.

“범일동 집에 들러서 쉬었다가 서울에 갈 거야. 그러니 오빠는 먼저 조심히 올라가.”

태연하게 말을 거는 미주에게 굳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각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제가 원하는 건 모두 손에 거머쥐게 될 테니까.

재민은 가증스러운 표정의 미주를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토닥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서울에서 보자.”

“응, 내일 저녁에 진우 오빠 사무실에 모여서 유언장 공개하기로 했으니, 꼭 참석해 줘.”

“그래, 내가 빠질 수 없지.”

저를 환멸이 가득한 눈으로 보며 웃고 있는 미주를 오늘만큼은 봐주기로 마음먹었다. 재민이 김해공항으로 떠나는 걸 보면서 미주도 차에 올라탔다.

“내일 하 변호사님께서 남편 좀 만나 주세요. 가셔서 오빠 유언장 내용 전달해 주시고 앞으로 정재민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의견을 나눠야 할 것 같거든요.”

옆자리에 앉은 정훈에게 미주가 부탁했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이사회 건은…….”

“현재로서는 차현 전자 최 사장이 회장이 되는 걸 막을 방법이 없어요. 그럼 차라리 우리가 한발 뒤로 물러나는 척하며 남편을 빨리 빼내고 부회장 직위에 복귀시키는 방법이 제 생각에는 가장 최선이라 생각되는데…….”

머리가 아팠다. 진우가 죽은 날 이후로 한숨도 자지 못했다. 미주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인상을 쓰자 조수석에 앉은 요한이 입을 열었다.

“부회장님께서 빨리 등판하셔야 복수도 할 수 있으니, 최대한 저도 도울 수 있는 대로 도울게요.”

고맙다는 듯 미주가 요한을 향해 살짝 웃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도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하게 해 주세요. 정재민, 내가 죽이게 해 주세요.”

복수심에 활활 몸을 태우고 있는 도균에게 아직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주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도닥이면서 달래 본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그냥 죽여선 안 돼요. 오빠가 그랬듯 복수는 처절하게, 두 배로 갚아 줘야 해요.”

“미주 씨…….”

“있죠. 내가 진 회장 없애 버리기로 마음먹었을 때 가슴에 새긴 구절이 있었어요.”

숨을 깊게 들이쉰 미주가 또박또박 제 뜻을 도균에게, 그리고 요한과 정훈에게 전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

“그리고 오빠가 죽기 전에 내게 맹세시켰어요.”

차 안에 함께 타고 있는 남자들의 신경이 집중될 때였다. 미주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느리게 뜨면서 말했다.

“살아남는 놈이 이긴다고, 무슨 짓을 당해도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했어요. 그러니 나는, 살아남을 거야.”

“…….”

“진창에서 뒹굴어도, 끔찍한 일을 당해도 이젠 하나도 무섭고 두렵지 않아요. 나는 절대 죽지 않고 살아남을 거니깐, 그 누구도 날 어찌할 수 없어. 난 무조건 이길 거예요.”

“전무님 말, 하나도 틀린 것 없네요.”

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하자 입꼬리를 호선으로 만든 미주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이제 내 앞에 걸리적거리는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없애 버릴 거예요. 죽여 버리든 어디 땅에 파묻든 절대로 그냥 두지 않아. 그래도 좋다면 나와 함께하고, 못 하겠으면 서울로 돌아가 짐 싸서 차현에서 방 빼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단호함을 넘어 단단하다 못해 견고한 미주에게서 하얗게 날 선 칼날이 보였다.

누구든 제 앞을 막는 자는 모두 베어 버리겠다는, 새초롬한 얼굴 뒤에 숨겨진 잔악한 본성이 소중한 사람을 잃고 이제야 나오는 걸까?

진 회장이 어떻게 죽었고 그 판을 짠 사람이 누군지 모를 리 없는 세 남자는 소름이 살짝 돋는 듯했다. 진수오를 무너뜨리기 위해 스스로 악녀이길 자처했던 그녀가 진우의 죽음으로 일말의 죄책감마저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목숨 걸었어. 그러니 다들 그 정도 각오가 없으면 여기서 끝내요.”

세 남자는 진우의 냉혹한 면을 미주 역시 빼다 박았다고 생각하면서 각자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알잖아요? 나, 예전에 간도 크게 전무님께 항명하다시피 하면서 미주 씨 만나러 갔었던 거.”

요한의 말에 질세라 도균도 덧붙였다.

“놈이 죽으면 내가 그때 자리를 비운 거, 조금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뭐야, 하나같이 내 편이라서 정말 든든한데?”

미주가 못 말린다는 듯 웃을 때, 정훈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무님이 준비 중이던 카지노, 이름이 스텔라라고 하는데… 거기에 사모님 자리 만들어 놨습니다. 정리되는 대로 출근하세요.”

저와 진우가 나눴던 대화를 다 알고 있는 거 보면 하 변호사도 분명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머리를 한 번 쓸고는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피식 웃어 보았다.

그리고 제가 태어난 곳에 도착했을 때, 미주는 세 사람에게 근처에서 쉬고 있으라 부탁하고는 집으로 들어섰다.

그리운 것들이 가득한 부산 집. 눈에 담기는 물건 하나하나에 모두 추억이 가득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있잖아, 오빠가 내 옆에 있는 거 알아. 그래서 괜찮아. 진우 오빠도, 희주 오빠도 계속 함께하는 거니깐… 더는 징징 짜면서 나약해지지 않을 거야.”

15년 전 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미주는 낡다 못해 가죽이 벗겨지고 있는 소파에 앉아 생각해 보았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소녀는 이제 닳고 닳은 어른이 되어 그 시절을 추억하고 있었다.

이젠 돌아갈 수 없는 행복했던 시간 속에서 저를 지켜 주고 사랑해 주었던 두 남자.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기에 미주는 기쁜 듯이 웃었다. 앞으로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가 생겼으니 절대 죽지 않겠다 다짐을 하면서.

주먹으로 제 가슴을 피멍이 들 때까지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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