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40. 인생을 그녀에게 - 2 (42/53)

5권

40. 인생을 그녀에게 - 2

* * *

“오빠! 뒤에!”

울부짖는 미주의 목소리에 진우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를 향해 뛰어온 미주가 바로 코앞까지 왔을 때였다.

뒤를 보라는 미주의 말에 몸을 돌렸다. 제가 잘 아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표정으로 하늘 끝까지 올린 오른팔을 내리꽂고 있었다.

“…윽…! 씨발… 김 기사……?”

옆구리에 이어 어깨를 찔린 진우가 비틀거리면서 저를 습격한 이를 보았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서슬 퍼렇게 날이 선 칼에 뚝뚝- 떨어지고 있는 피까지.

순간 눈앞이 하얘질 때 미주가 앞을 막아섰다.

“도망가, 빨리! 아아악……!”

진우가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을 때였다. 미주가 죽을힘을 다해 김 기사의 칼을 손으로 잡으면서 달려온 힘 그대로 그를 들이받았다.

“개새끼, 죽어!”

진우의 피가 묻은 칼이 제 손을 난도질하고 있었지만, 미주는 지금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빠, 빨리!”

예상치 못한 난입에 김 기사와 미주가 한데 엉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진우가 정신을 가다듬어 보지만 통증이 극심해 좀처럼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빨리, 으으! 오빠! 빨리.”

“씨발년이! 작은 사모, 이거 안 놔?”

“안 놔, 이 씨발 새끼야!”

미주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어떻게든 김 기사를 붙잡아 두려고 애쓰고 있었다. 타고난 신체적 우위에 있는 남자를 완전히 제압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찰나라도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면 진우가 여길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괜찮아! 오빠, …빨리!”

미주가 김 기사의 목을 조르기도 하고 팔을 잡아 뜯어 보면서 그가 진우에게 가지 못하게 해 보지만.

“자꾸 이러면 작은 사모, 너까지 죽여 버릴 테니깐!”

“…아악!”

김 기사가 저를 붙들어 매는 거머리 같은 미주에게 칼을 휘둘렀다.

“씨발 새끼, 감히… 감히, 미주를 건드려?”

반쯤 허물어진 채 쏟아지는 피를 손으로 막으며 쓰러져 있던 진우가 미주의 등이 베이는 걸 보았다. 붉은 피가 미주의 찢긴 옷 사이에서 스며 나오고 있었다.

저를 지켜 주기 위해 이미 엉망인 두 손으로 고통을 참으며 계속 ‘도망가라’ 소리치는 미주를 두고 당연히 진우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옆구리가… 너무 깊게… 하아…, 몇 번이나 찔렸지?’

출혈이 심해지는지 자꾸만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어질거리고 흔들렸지만, 진우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죽더라도 미주를… 미주라도 살려야…….’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 같았다. 진우는 미주를 거의 떼어 낸 김 기사에게 몸을 날렸다.

“씨발 새끼, 감히 미주 몸에 손을 대?”

김 기사와 몸싸움하던 중에 머리를 바닥에 찍었는지 이마가 깨어진 것 같은 미주가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른쪽을 찔려 진우의 주먹이 제대로 쥐어지진 않았지만, 예전의 불도저는 어디 가지 않았다.

“미주야! 경찰에 신고해! …빨리! 펜스가 쳐져서 밖에서는 여길 못 봐…….”

“…어어, 알았어…!”

“아니면 빨리 호텔 안으로… 사람을 불러서…….”

그래도 제 말을 들었는지 미주가 고개를 한 번 까딱거리더니 피투성이 손을 품에 넣어 더듬거렸다.

진우에게 얼굴을 맞은 김 기사가 휘청였지만 말이다. 끝까지 칼을 놓지 않고 결계를 치듯 칼을 사방으로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서 전무! 약속이 틀리잖아!”

대체 뭔 소린지. 진우가 피를 한 번 왈칵 토해내며 받아쳤다.

“씨발, 뭐가……!”

분노로 몸을 덜덜 떠는 김 기사가 눈물을 흘리면서 진우에게 일갈했다.

“네가 날 속였어! 분명히 다 덮어 두겠다고 했으면서… 연호 도련님 나올 때쯤 내가 관장님 도와 회장님 시체 처리하는 걸 도와줬던 거로… 날 공범으로… 도련님 일을 묻으려 했으면서…….”

“뭔 소리야, 대체…….”

칼에 찔린 어깨가 제멋대로 통증에 아우성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옆구리 쪽 출혈이 멈추지 않아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며 다리가 휘청하는데.

진우는 김 기사가 내뱉는 말을 그냥 허투루 넘길 수가 없었다. 그가 갑자기 돌변해서, 저를 죽이겠다 오는 이유. 짐작은 되지만 그래도 확인해야만 했다.

“정 실장이 다 말해 줬어! 씨발, 서진우 개새끼. 너…! 내 죄 때문에 너희를 도우면 날 차연호한테서 보호해 주기로 약속했으면서… 날 팔 생각이었다니!”

“아니야, 내 말 들어 봐. 김 기사, 제발……!”

“으아악! 죽어! 이 살인자! 너도 살인자야!”

김 기사가 진우의 멱살을 잡고 그를 쓰러뜨린 후 목을 움켜잡았다.

“진우야, 진우야! 나는 정말 널 믿었어! 하루라도 회장님 죽이고 마음 편한 날 없었다! 그래서 너희를 돕는 거로… 그러면 속죄라도 할 수 있다 믿었는데… 그리고, 그리고…….”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김 기사의 눈물에서 느껴졌다. 지난 세월 사람을 죽인 후 고통받았을 그 마음은 진우 또한 아는 것이었다.

방금 김 기사가 외친 대로 저 역시 사람을 여럿 죽인 적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원혼이 매일 밤 저를 찾아왔었다.

고통스러운 불면의 밤. 하지만 미주를 지키기 위해 지옥보다 못한 삶을 스스로 택했기에 후회 없었다.

“헉… 헉… 여기 지금 살인이… 누가 사람을 죽이려고… 구급차도 제발.”

희미하게 들리는 미주가 경찰에 신고하는 소리를 김 기사도 들었을 것이다. 진우가 안도의 숨을 돌리며, 입가에 피거품이 맺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김 기사… 재민이는 우리를, 날 배신했어… 그 새끼 말 듣지 마. 제발…….”

“왜, 왜 그랬어? 나 준다고 했던 필리핀 리조트 왜 다시 판 거야?”

순간 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김 기사의 말이 맞았으니깐.

차연희의 공범으로 만든 김 기사가 출소하면 그를 없앨 생각이었다. 그는 너무 많은 걸 알았고, 저도, 연호 쪽에도 정보를 팔았다.

그리고 진 회장 살인에 대한 전모를 아는 외부인 중 하나이기에 그를 그대로 살려 둘 순 없었다. 언제고 마음이 바뀌어 제가 쥔 그들의 약점을 터뜨릴 수 있었으니깐.

‘내가 먼저 뒤통수를 친 거지. 맞아. 김 기사 말이 맞아. 내가 개새끼인 거…….’

제가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걸 지키기 위해 말이다. 그들이 아닌 타인에게는 무자비할 정도로 잔혹하고 잔인했던 업보가 이렇게 돌아왔다.

“…정 실장이… 재민이가 말해 줬구나.”

“믿었다, 진우야! 그래도 너는 날 이해할 거로 생각했어… 손에 피를 묻히고 산다는 게… 얼마나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삶인지… 너는 알 거라고…….”

김 기사가 저를 죽이고자 하는 심정은 이해가 됐다. 하지만 여기서 죽을 순 없었다. 아직 저에겐 너무 사랑해서 지켜 주고 싶은 여자가 있었다.

인생을 송두리째 바칠 만큼, 사랑하고 있는 사람.

“그만하자, 제발… 크흑……!”

진우가 마지막 힘을 토해내며 그의 손목을 꺾어 버렸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야말로, 진우야… 그만해.”

김 기사가 양손으로 목을 조르자 더는 버틸 재간이 없다, 진우가 느낄 때였다.

“……!”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미주가 비틀거리며 떨어진 칼을 재빨리 집어 들고는 푹- 하고 김 기사의 몸을 찔렀다.

“오빠 건드리지 마. 죽어……!”

김 기사의 시선이 제 어깨에 꽂힌 칼로 돌아갈 때, 미주는 사람을 찔렀다는 충격에 온몸을 벌벌 떨고 서 있었다.

“안 돼, 미주야… 찌르면…… 죄는 모두 내가…….”

역습을 당한 김 기사의 손에 힘이 빠질 때였다. 진우가 어디서 힘이 솟아났는지 모를 정도로 괴성을 지르며 놈의 어깨에 미주가 꽂아 놓은 칼을 빼내 손에 쥐었지만.

김 기사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등 뒤에서 날카로운 걸 하나 더 빼 들었다.

“진우야, 미안하다……. 나도 곧 갈 테니 먼저 가 있어.”

설마, 칼을 하나 더 숨기고 있었다니.

“크으… 어… 억…….”

진우를 끌어안은 김 기사가 왼손을 여러 번 밀었다가 당기며 다시 빼냈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진우는 손에 쥔 칼을 휘두를 새도 없이 속수무책이었다. 이미 너무 많이 찔린 상태였고, 순식간에 다시 당했다.

진우가 무너지고 있을 때, 김 기사는 피가 묻은 칼을 들고는 미주를 보면서 후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작은 사모, 정재민 조심해.”

“……?”

“어쩔 수 없었어. 나도 지키고 싶은 게 있었거든. 그 대신 진우 죽인 벌은 받겠다고 연호 도련님한테 전해 줘.”

김 기사는 그 말만 남긴 채 피를 뚝뚝 흘리면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미주는 지금 김 기사를 따라가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진우의 피가 미주 쪽으로 번지고 있어, 그를 살리는 게 먼저였다.

“오빠!”

불과 몇 달 전에도 본 광경이었다. 사람의 몸에서 저토록 많은 피가 나올 수 있는지 확인했던 심판의 날. 진우의 커다란 몸이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안 돼! 오빠!”

미주는 진우를 끌어안고는 끝없이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아 내면서 오열했다.

“안 돼. 죽으면 안 돼, 오빠. 날 두고 가지 마!”

“미주야…….”

제 이름을 부르는 진우의 목소리가 끊어질 듯 희미했다. 미주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진우의 상처를 압박해 보았다. 하지만 숨을 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피가 흘러넘치다 못해 제 몸과 바닥을 적셨다.

“금방 올 거야. 경찰도, 119도… 금방… 그러니 제발, 오빠… 버텨 줘. 제발…….”

이마가 깨진 미주가 흘리는 눈물이 피에 섞여 피눈물이 되어 제 얼굴에 떨어지는 걸 진우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너무… 많이 찔…렸어…….”

손끝이 저릿저릿해지면서 아래부터 서서히 감각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핑그르르 눈앞이 도는 걸 보니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 같았다.

“오빠! 날 봐, 응? 눈 떠서… 나 봐야 해! 정신 차려! 제발……!”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는 가운데 제 뺨을 때리는 미주의 손에서 배어 나오는 피가 진우의 얼굴에 묻었다.

“손… 괜찮아?”

겨우 한마디 했을 뿐인데, 울컥하고 피가 한 움큼 쏟아져 가슴을 적셨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오빠, 난 괜찮아! 오빠만 살면 돼! 제발! …제발!”

미주의 말대로 정신 차려야 하는데 계속 의지와는 다르게 눈이 감겼다. 무거운 눈꺼풀이 한 번 깜빡거리는 순간, 진우의 귀에는 미주의 절규만이 아득히 들렸다.

“…우리 모개… 울지…….”

“알았어, 안 울게! 절대로 안 울 테니깐! 오빠, 아무 말도 하지 마. 이제 곧 사람들이 올 거야!”

안 운다는 녀석이 피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미친 듯이 젓고 있었다. 진우는 속으로 웃으면서 간신히 왼손을 움직였다.

“…괜찮…….”

“오빠, 오빠……!”

상처를 있는 힘껏 누르고 있는 미주의 손등을 두어 번 톡톡-거려 보았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젠 그만해도 된다는 뜻으로 진우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피에 젖은 오른손에 모든 힘을 집중하면서 저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미주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울지 마…….”

하지만 겨우 미주에게 닿은 손은 힘없이 툭- 하고 떨어졌다. 이제 더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물먹은 솜처럼, 아니 그동안 제 손에 묻혔던 피를 머금은 것처럼 말이다. 천근만근 아득하게 아래로 떨어지는 감각 속에서 진우는 저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오빠, 눈 떠! 제발……! 눈 좀 떠! 오빠! 오빠!”

사람들 말이 틀린 게 하나 없었다. 죽을 때가 되면 지난 삶이 마치 영화처럼 파노라마로 펼쳐진다더니.

‘아줌마 배 속의 아기, 여자애였으면 좋겠어요.’

지금 미주 나이 정도였을, 그녀와 비슷한 얼굴의 여자에게 어린 진우가 말했다. 그리고 언제나 슬퍼 보였던 그녀가 죽고 소원대로 생긴 여동생을 품에 안고 뜻도 몰랐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제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딸을 위해 엄마가 아들과 진우에게 가르쳐 줬던 그 노래.

‘야, 서진우. 길에서 만나도 아는 척하지 마! 쪽팔리거든?’

제대하고 나니 중학생이 된 미주가 사춘기가 왔는지 저를 부끄럽다고 여기는 것 같아 결심했었다. 한 번 사는 인생, 이렇게 밑바닥에서 싸움질이나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희주가 어둠의 세계 왕이 되길 바라기도 해, 저는 조용히 손을 털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고.

아마 미주는 까마득히 모를, 제가 팔자에도 없는 의사가 되겠다 마음먹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오빠, 우리 아빠 이제 곧 죽는대. 할머니가 그랬어. 못 고치는 병이라고… 그래도 있잖아. 취하지 않았을 때는 날 얼마나 예뻐해 줬는데… 누가 제발… 우리 아빠 안 죽게 고쳐 줬으면 좋겠어…….’

한복집 할매 집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어느 날, 작은 미주가 몸이 썩은 것 같은 냄새가 진동하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담벼락에 무릎을 세우고 쭈그리고 앉아 제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늘 언제나 동생이었던 말괄량이 꼬맹이가 어느 순간 여자 얼굴을 할 때쯤, 한복집 할매 손자마저 죽었다. 제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희주 형.

그가 죽고 등대 잃은 배인 양 폭풍이 치는 바다 위를 헤집고 다닐 때였다.

‘반창고만 하나 붙이고 끝내자.’

상처에 밴드를 붙여 주던 그 손길의 체온이 아직도 생생했다. 무심한 듯 언제나 저를 걱정하는 작은 껌딱지가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온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져 있어 마음이 아팠다.

‘그래, 그랬지… 내 인생은 언제나 너와 함께였어…….’

진우는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저를 흔들며 통곡하는 미주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오빠? 오빠! 정신 차려야 해! 오빠마저 날 두고 가지 마…! 오빠마저 가 버리면… 나도 죽을 거야! 그러니 제발!”

이건 나쁜 꿈이 분명했다. 마치 사방에 자욱하게 깔린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기분이었다. 진우는 빨리 이 꿈을 깨고 싶었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힘이, 아예 힘이 안 들어가.’

제 몸이 바람 빠진 풍선같이 여겨졌다. 더는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머릿속이 지워지고 있을 때였다.

‘안 돼… 아직은…….’

이렇게 죽을 순 없었다. 아직 그녀에게 못다 한 말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았다.

“으으… 윽!”

현실을 인지하자 갑자기 온몸에 통증이 몰려오면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이런 통증조차 제가 죽고 난 뒤 홀로 남을 미주를 생각하면 전혀 아프지 않았다.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진우가 눈을 뜨고는 저를 안고 오열하는 미주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프지?”

“아니, 하나도 안 아파. 이깟 칼 따윈 백 번도 더 맞을 수 있으니 제발… 죽지 마, 오빠. 제발….”

피눈물에 젖은 얼굴로 반쯤 넋이 나간 미주가 진우의 눈에 또렷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팔을 한번 움직였다고 다시 순식간에 썰물처럼 의식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다면.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미주를 혼자 둬야 한다면.

이기적인 욕심 한 번 정도는 부려도 되지 않을까 싶어 진우는 편안한 얼굴로 미주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네게 전할 수 있다면…….’

옅은 미소를 지은 진우가 파리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주야.”

“응, 오빠. 나 여기 있어.”

저를 잃고 싶지 않다는 듯 미주의 눈 속에 가득한 슬픔에 진우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여 보았다.

“…미주야, 사… 사…….”

사랑해.

사랑해, 미주야.

이 세상 무엇보다 널 사랑하고 있다는 그 한마디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 사랑했기에, 미주는 인생 그 자체였기에 사랑한다, 그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앞으로 저 없이 살아야 할 미주의 긴긴 인생에 괴로운 마음의 짐을 굳이 얹어 줄 필요가 있을까?

뭔가 결심한 듯 진우가 눈을 반짝이면서 미주의 손을 꽉 쥐고 말했다.

“미주야, 사…라…….”

“오빠.”

제 간절한 소망을 하늘이 들어준 걸까? 신이 있다면 지금 마지막 힘을 준 것 같았다.

“미주야, …살아남아! 살아남는 놈이 이기는 거야!”

진우는 미주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삼킨 채,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전하고 싶었던 말을 건넸다.

“응, 알았어! 오빠, 약속할……”

“맹세, 맹세해! 지금 내 앞에서… 맹세해 줘… 어떤 일이 생겨도,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살아남아. 무조건 살아야 해. 살아야지만… 복수도… 원한도 모두… 갚을 수 있어…….”

“알았어, 맹세할게, 살아남을게! 오빠 말대로 꼭 살아서 오빠 이렇게 만든 놈… 내가 꼭!”

결연한 미주의 눈동자에 진우는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헐떡이는 숨이 정말 끝이라는 듯 점점 가빠졌다. 진우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우리 모개, 혼자 둬서… 오빠가 미안해…….”

“아니야, 아니야! 오빠, 아니야!”

“……차연호… 믿어. 그놈은 널 진심으로… 사랑…….”

진우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미주가 비명을 질러 댔다. 울컥하고 피를 토해내는 진우가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미주는 부서져라 꼭 그를 안으면서 절규했다.

“안 돼! 죽지 마! 안 돼! 오빠! 제발…….”

눈을 감은 진우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를 보면서 미주가 피 울음을 토하며 말했다.

“오빠, 사랑해. 정말 사랑해. 나한텐 늘 오빠뿐이었어. 내 가족이자 오빠였고, 날 지켜 줬던 거 다 알고 있었어! 고맙다는 말, 하지도 못했는데…….”

미주가 말하는 사랑과 제 사랑은 조금 결이 달랐지만, 진우는 괜찮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미주의 마음과 함께라면 조금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깐.

그리고 그녀 옆에는 저만큼이나 미주를 사랑해 주고 아껴 줄, 이제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안심할 수 있었다.

아직 못다 한 말이 남았음에 진우는 눈을 뜨려 했지만, 더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홀로 있음을 느끼면서.

진우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재민이… 희주 형 사고… 재민이가 희주 형을 죽였어… 너무 늦게 말해 줘서… 미안하다…….”

제 말에 놀란 듯 커지는 눈동자에 이내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미주는 정말로 마지막일 인사를 진우에게 하고 있었다.

“알려 줘서 고마워, 오빠. 내가 꼭 복수해 줄게. 나 믿지?”

“응.”

“약속한 대로, 맹세한 대로 살아남을게. 끝까지 살아남아… 정재민의 최후를 보겠어.”

이제는 제 손을 꽉 잡은 미주가 제법 믿음직스러워 진우는 싱긋 웃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우리 모…… 미주야… 살아남아… 끝까지…… 살아남는 게 이기는…….”

“약속할게. 그러니 이제는 편안히… 오빠…….”

“…이겨…… 그리고…… 행…복해…야…… 꼭… 행복…하게…….”

진우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을 때, 천천히 그가 숨을 쉬었다.

한 번.

또 한 번.

그리고 한 번.

세 번 숨을 들이쉰 진우의 숨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

미주는 여전히 따뜻한 진우의 몸을 끌어안고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차분하게 말했다.

“오빠. 진우 오빠. 사랑해. 이젠 편히 쉬어…… 정말… 사랑해…….”

진우의 얼굴 위로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그런데 오빠, 마지막 부탁이 있어. 응? 있지, 한 번만 더 불러 줘. 못생긴 모과라고, 모개라고, 제발… 눈 뜨고 한 번만 더 내 이름 불러 줘… 그럴 수만 있다면…….”

미주의 슬픈 혼잣말은 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 사이렌 소리에 점점 묻히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