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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인생을 그녀에게 - 1 (41/53)

39. 인생을 그녀에게 - 1

* * *

“아침 해는 정말 너무 폭력적인 것 같아요. 그러니 내가 일찍 안 일어나고 못 일어나는 거지.”

진우에게서 아마 다음 달쯤이면 연호가 무혐의로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귀띔을 듣고 그간 재민 때문에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 진정되기 시작했다.

“어제는 누나 면회 갔었다면서?”

“네, 정말 힘드실 건데… 그래도 오히려 저를 위로해 주세요. 정말 나는…….”

그래서 오늘도 최대한 평소와 다름없이 연호를 면회 와 늘 그렇듯 종알종알 시끄럽게 잡담을 하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재민이 했던 끔찍한 말 때문에 괴로운 마음을 그가 몰랐으면 해, 밝은 얼굴로 남편을 보러 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진우 오빠가 나 회사로 나와서 다시 일해 보래요. 물론 당신이랑 충분히 상의하고 솔직히 한번 나가 볼까 하는데…….”

하지만 플라스틱 가림 벽 너머로 조잘조잘 떠드는 미주의 말이 연호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재민이 며칠 전 저를 찾아온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백호를 구치소로 불러 바깥일을 좀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아무 일이 없어 오히려 마음이 자꾸만 불안해질 때였다.

“…어요? 응? 내 말 듣고 있냐고?”

“…아, 어. 듣고 있었어.”

“안 듣고 있었네.”

어금니를 꽉 문 미주가 저를 죽일 듯 위아래로 눈동자를 굴리는 게 재밌어, 연호는 웃었다.

“미안해, 딴생각 조금 했어. 다시 천천히 말해 줘, 응?”

연호가 상체를 앞쪽으로 숙이며 이제라도 경청하겠다 제스처를 취해 보지만 이미 미주는 뾰로통해져 있었다.

“아, 정말. 했던 이야기 또 하게 만드네.”

“쏘리 쏘리, 서 전무가 회사로 나오라고 했다고?”

“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당신만 괜찮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미주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연호는 애써 불안감을 지우며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미주는 대화에 집중할 때 제스처가 좀 큰 편이었다. 한참을 무언가를 집중하면서 말할 때 손도 많이 쓰고 표정도 풍부해지곤 했다.

“전략실로 돌아가도 좋을 것 같긴 한데… 거긴 또 너무 열심히 일해야 하는 곳이라서 부담스럽기도 하고…….”

본인은 안 쓴다고 생각하지만 기분 좋게 흥분하면 배어 나오는 부산 사투리 특유의 억양을 들으면서 연호는 미주를 살폈다. 특유의 말괄량이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본인이 왜 회사로 복귀해야 하는지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연호가 알겠다는 듯 대답했다.

“알았어. 무슨 말인지 이해했으니깐. 내 일이 정리되면 차차 하나씩 시작해 보자. 회사에 네 자리, 어디가 좋을지 생각해 두고 있어.”

“그래요. 나도 당신 여기 있는데 출근하려면 좀 부담스럽긴 해요. 진우 오빠가 있다고 해도 휴직한 지가 몇 년인데.”

제 말을 들어 주는 연호의 표정이 어딘가 좋지 않음을 이제야 느낀 미주가 그에게 괜찮냐는 듯 물었다.

“몸이 어디 안 좋아요? 안색이 별로야.”

“괜찮아. 아픈 곳은 없어. 오히려 적응될 만하니 나가는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저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미주에게 연호는 아무래도 말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근데, 미주야. 당분간 나 만나러 오지 마.”

“왜요? 나 귀찮아졌어?”

미주가 뭔 소리냐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저를 보자 연호는 침착하게 제 뜻을 알려 줬다.

“그냥… 나도 확신할 순 없지만.”

한 템포 숨을 고른 연호가 가까이 오라는 듯 몸짓을 취하자 미주는 최대한 연호 쪽으로 몸을 숙였다.

“몸조심해. 뭔지 알아내려고 하는데… 쉽지 않아. 그런데 뭔가가 분명히 있어.”

연호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분명히 말 못 할 이유가 있음을 알기에 미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진우 오빠 말고는 아무도 안 만날 테니까. 집 안에만 있을게요.”

“그렇게 해. 아, 오늘 서 전무 만난다고 했지?”

진우와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다, 미주에게 들었기에 연호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서 전무한테도 내 말, 일러둬. 아니, 서 전무도… 뭔가 낌새를 눈치챘겠지만.”

끝말을 삼킨 연호가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둘 다 조심해. 알겠지?”

“알았어요. 근데 나 진짜 면회 오지 마요?”

제 말이 농이 아니라는 듯 눈을 한 번 길게 깜빡이는 연호를 보며 미주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만간에 집에서 봐요.”

미주가 너무 걱정할까 봐 연호는 일부러 윙크를 날리며 음흉한 남편의 욕구불만을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그러자 미주도 알겠다는 듯, 대답 대신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저한테 윙크하며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구치소를 빠져나온 미주는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태양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뜨거운 열기와 푸른 하늘. 오늘따라 너무나도 이질적인 이 쾌청한 날씨.

어질어질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기분 속에서 진우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핸들을 움직였다.

“윤모개.”

진우가 얼마 전에 재민을 불렀던 아직 공사 중인 차현 호텔로 미주를 불렀다.

“나 그냥 개명할까 봐, 윤모과로. 하도 모개 모개 하니깐 내 이름 진짜 윤모개 같거든.”

미주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긴, 요새 루프탑 바가 유행이래. 난 SNS 하진 않지만 들어가서 구경은 해 보니깐. 사진 찍기 예쁜 곳이 핫하긴 하더라.”

“나중에 인테리어 공사 끝나면 호텔 내부도 보여 줄게. 네가 잘 알아 두면 좋으니까.”

“……응? 왜?”

진우는 아직 공사가 덜 끝나 어수선한 호텔 내부를 훑어보고 있는 미주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 지하에 카지노 들어와, 외국인 전용으로.”

“그래? 아… 오빠가 몇 년간 계속 마카오를 들락거렸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미주에게 진우는 담담한 톤으로 입을 열었다.

“카지노 오픈하고 영업이 본궤도로 올라갔을 때 재민이한테 넘기려고 했어. 이 스텔라를.”

“스텔라?”

“응, 카지노 이름이 스텔라야.”

저를 빤히 보는 진우의 표정에서 미주는 알고 있다는 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더는 재민 오빠랑 우리가 엮일 일은 없어진 거네.”

“앞으로 볼 일 없을, 우리를 배신한 원수라고 해 두면 좋겠어.”

재민과의 끝을 고하는 진우가 괴로워 보여, 미주는 더는 그의 어깨에 짐을 올려 두고 싶지 않았다.

‘말하지 말자. 내 입으로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저와 잠자리를 하면 그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말을 굳이 전하고 싶지 않았다. 진우가 이미 알고도 재민에게 그런 말을 들었냐고 묻지 않을 수 있다 생각했으니깐.

진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 첫사랑이 희주를 죽였다는 끔찍한 진실을 미주가 알고 절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 곧 심판의 시간이 도래할 테니 시간이 지나면 재민에 대한 실망감도 희미해지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진우가 애써 웃으면서 미주를 여기로 부른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공들인 걸 생판 남에게 맡기기도 그렇고. 있잖아, 미주 너 여기에 와서 한번 일해 볼래?”

“……응?”

놀란 얼굴을 한 미주에게 진우는 차분하게 계획을 말했다.

“내가 차현 중공업만 가지고 나가는 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관장님까지 저리되는 바람에 내가 어부지리로 잠깐 차현 회장 자리를 지켜 주기로 했거든.”

“…음, 뭔지 알겠어. 남편 나오고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란 말이잖아.”

눈동자를 굴리며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된다는 듯 미주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여기 카지노에 내가 적당한 직함 던져 줄 테니까, 옆에서 일 배워.”

“안 그래도 아침에 남편 면회 다녀왔는데 내가 다시 일하는 거 어떤지 떠보니깐 그리 반대하진 않았어.”

“그래. 처음부터 네가 바로 본사에 높은 자리로 들어가 버리는 것보다, 여기 밖에서 어느 정도 트레이닝해 놓고 입성하는 게 훨씬 나을 거야.”

미주가 긴장된다는 듯 괜히 양손을 마주 잡고는 흔들며 농담을 했다.

“카지노? 오빠, 나 카지노 하나도 몰라.”

“배우면 돼. 그리고 네가 게임을 직접 할 것도 아니잖아?”

“왜? 누가 알아? 내가 잭팟이라도 터트릴지.”

단호한 목소리의 진우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 지은 채 말했다.

“나중에, 모든 게 끝나면, 정훈이, 저번에 봤던 하 변호사 알지? 그놈을 붙여 줄 테니깐 배우면서 네 능력을 한번 보여 줘 봐. 하정훈이, 꽤 쓸 만하거든.”

“그래… 근데 나, 잘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 괜히 걱정되기도 하고. 카지노…? 갑자기 카지노라니.”

자리에서 일어난 진우가 미주의 어깨를 토닥이며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걱정은 나중에 사서 하고, 배고파, 밥이나 먹자. 레스토랑 지금 직원 교육 중이라 내려가서 뭐라도 만들어 달라고 하면 돼.”

아직은 어수선해서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는 호텔 1층의 레스토랑으로 내려온 미주는 활짝 웃으면서 진우에게 말했다.

“음식들 맛이 어떤지 내가 평가해 줄게. 나 같은 입맛이 무덤덤한 사람의 체크도 꽤 중요하니깐, 잘 참고해 놔.”

“그래, 아주 평론가 납시었다.”

잠시 수다를 떨며 바깥의 힘든 일은 잊고 있을 때, 수석 셰프에게 알아서 적당히 먹을 것을 좀 만들러 달라는 진우의 부탁으로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세팅되었다.

미주와 진우가 적당히 이건 어떠냐, 이 플레이팅은 나쁘지 않다, 라면서 대화를 이어 가고 있을 때였다.

“방금 내가 아침에 면회 다녀왔다고 말했지?”

진우가 음식을 씹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미주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말하듯 툭- 하고 연호에게서 들은 말을 전했다.

“대충 나도 돌아가는 상황은 아니깐, 다음 달쯤, 그렇다는 거 얘기 들었어.”

“그래도 어디 가서 말하진 말고. 최대한 관장님 건으로 시선을 돌려놓으면서 조용히 무혐의 처리 되도록 힘쓰고 있어.”

“내가 말할 곳이 어딨어? 생각해 보니 서울에서 15년 가까이 살았지만, 친구 하나 없는데.”

싱긋 웃는 미주에게서 외로움이 보여 진우의 마음이 이상하게 아려 오고 있을 때였다.

“연호 씨가 나 당분간 면회 오지 말래.”

“이젠 귀찮다고 하지?”

“어, 비슷해. 그리고 오늘 점심때 오빠 만난다고 하니 전해 달라던 말이 있는데 말이야.”

“아 쫌, 뜸 들이지 말고.”

진우가 괜히 성질을 부리며 빨리 말하라는 듯 포크로 접시를 두어 번 탁탁- 쳤다. 그러자 미주가 걱정되는 마음을 완전히 감추지 못한 채 불안한 듯 말했다.

“뭔가 좀 이상하다고… 몸조심하라고. 나도, 오빠도.”

양손에 쥔 커트러리를 움직이지도 않은 채 염려가 가득한 표정으로 미주가 저를 보고 있어, 진우는 괜찮다는 듯 웃었다.

“뭔 말인지 알겠어. 연호가 말하는 거, 난 뭔 뜻인지 대충 알고 있어. 하지만 너한테 다 오픈할 수 없는 것도 분명히 있거든. 굳이 너까지 알 필요가 없는 일들…….”

이해한다는 듯 그제야 미주가 다시 손을 움직이면서 음식을 잘게 잘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남자들 일이다, 이거지? 알았어. 재민 오빠와 관련해 남편이 말하는 게 뭔지 오빠가 이미 알고 있다니 다행이야.”

“면회 오지 말라고 말했다면 이유가 있을 테니 다음 달까진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이 보고 싶어도 좀 참아 봐.”

“그래, 그래 보려고. 근데 정말 귀찮아서 오지 말라는 거였으면 어쩌지?”

“부부 일은 알아서 해. 난 결혼을 안 해 봐서 잘 모르겠다, 야.”

양손을 가슴까지 올리며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는 진우를 미주는 웃으면서 슬쩍 흘겨보았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오픈하지도 않은 레스토랑에서 커피까지 부탁해 마시는 염치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미주는 앞으로 저에게 어떻게 회사 일을 가르치고 트레이닝시킬 건지 떠들어 대는 진우의 말을 들으며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현실에서 새롭게 시작될 제 모습을 그려 보고 있었다.

“오빠, 내가 경영학과 나오긴 했지만… 졸업한 지가 벌써 10년도 넘었고, 학교에서 배운 거랑 실제 일은 다르다는 걸 이미 1년간의 회사 생활로 잘 알고 있는걸.”

“그때 너랑 지금 너랑 사회적 신분과 위치가 달라졌으니 또 느낌이 다를 거야. 그러니 내 동생이자 차연호 아내라는 이름 먹칠하지 말고 열심히 잘해 봐.”

“스텔라에서?”

“어, 스텔라에서.”

“알았어, 아… 모르겠다, 그냥 열심히 해 볼게. 참, 오후에 약속 있다면서?”

“그래, 시간 아슬아슬하게 맞겠다. 슬슬 움직이자.”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주는 집으로, 진우는 본사로 돌아가기 위해 지상 주차장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공사가 마무리 단계라 조금 어수선함이 남은 넓은 호텔 지상 주차장으로 걸어 나가며 미주는 기도 안 찬다는 듯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서도 담배야? 오빠 진짜, 제발 좀.”

“아, 식후땡인데 이해 좀 해 주라, 모개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진우를 보면서 미주가 투덜거리며 계속 시비를 걸었다.

“오빠는 운전 혼자 못 해? 맨날 요한 씨나 도균 씨 기사로 부리면 안 미안해?”

“야, 걔네가 누구 덕에 밥 벌어먹고 사는데? 도균이 곧 온다니 먼저 갈 거면 가.”

“알았어. 나 간다. 꾸물거리다가 차 밀릴 수 있으니 그만 갈게.”

저를 향해 손을 터는 미주를 보면서 빨리 가라는 듯 진우는 휘휘- 손을 저었다.

“당분간 연호 말대로 집에서 방콕……!”

“오빠!”

차 문을 반쯤 열고 손을 흔들던 미주의 얼굴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진우의 뒤에 소리 없이 나타난 남자는 저도 아는 사람이었다.

“오빠, 뒤! 도망쳐!”

미주가 비명을 지르는 게 마치 슬로 모션처럼 진우의 눈에 들어왔다. 몇 걸음 떨어지지도 않은 제 쪽으로 미주가 달려오고 있을 때, 오른손에 들고 있던 담배가 툭- 하고 떨어졌다.

‘어……?’

진우의 눈에 갑자기 온 세상이 느리게 움직였다. 뭔가 뜨거운 것이 쏟아지는 느낌에 고개를 오른쪽 아래로 내려다보니 말이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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