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눈에는 눈, 이에는 이 (40/53)

38.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 *

“실장님, 이거… 서 전무님이 보내셨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일단 여기 올려 두세요.”

저를 따르는 비서실 직원이 상기된 표정의 재민을 보면서 걱정스럽게 택배 박스 같은 걸 건넸다.

“설마 전무님께서 우리한테 폭탄을 보냈을까? 걱정하지 말고 줘.”

재민은 쿨하게 반응하며 진우가 보냈다는 상자를 들고는 사무실로 들어와 대충 아무렇게 상자를 던지면서 일갈했다.

“씨발,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대한민국이 들썩이다 못해 완전히 뒤집힌 이유 때문에 이미 골치가 아팠는데 말이다. 구치소를 다녀온 재민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책상을 쾅- 하고 쳤다.

일주일 전, 모두를 경악하게 할 만한 뉴스가 터졌다.

[차현 그룹 고故 진수오 회장, 심장마비가 아니라 아내에게 살해당해]

[차연희 밝을 현 갤러리 관장 자수, 생명의 위협 상황 속 우발적인 살인이었다 진술]

[차 관장, 오랫동안 가정 폭력에 시달려, 진 회장의 위협에 정당방위였다 주장]

[죽은 진 회장의 미스터리, 그는 어디서 총기를 밀반입했나?]

온갖 자극적인 헤드라인들이 신문과 뉴스, 인터넷까지 모든 미디어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미 한번 떠들썩했던 차현 그룹 비리에 오너 일가의 살인극이라니.

남편을 죽인 차연희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자수한 다음 날, 차현 그룹 관련주가 모두 폭락하며 순식간에 몇백억이 증발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재민은 뜻하지 않은 그들의 반격에 조금씩 흔들렸다.

“설마 살인 건을 직접 터뜨리다니.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했어.”

판을 흔들어 버리기 전에 그들이 판을 뒤집어 버렸다.

최후의 보루처럼 그들을 압박하기 위해 쓰려 했던 카드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면서 제 주변도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바지로 내세우려고 했던 차현 전자 최 사장이, 불안감을 느꼈는지 발을 빼려 하고 있었다.

“최 사장님, 걱정 마세요. 오히려 오너 일가 리스크가 주주 및 이사진에게 어필될 겁니다. 이 상황에서 누가 지금 구치소에 있는 차연호를 밀겠으며, 살인범인 차연희를 회장으로 추대하겠습니까?”

제 말이 일리 있다고 여겼나 보다. 다행히 최 사장은 차현 그룹 회장이라는 왕관을 놓치지 않으려 마음먹은 듯 앞으로 충실한 아바타가 되어 주겠다 약속했다.

하지만 재민은 느끼고 있었다. 차연희를 자수시킨다는 고육책을 낸 진우와 연호가 천천히 제 목을 전방위로 죄어 오고 있음을.

그래서 차선책으로 연호를 흔들려고 했었다. 진우와 연호의 연합이 생각보다 견고하지 못할 거라는 믿음 속에서 어쩌면 가장 추잡한 짓을 했다.

오늘 아침, 연호가 구속된 이래 처음으로 그를 직접 만나러 갔다. 연호 역시 저를 이렇게 만든 제 면상을 보고 싶었는지 면회 신청을 받아 주었다. 재민은 면회실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가만히 건너편에서 저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활활 타는 눈빛의 연호를 지그시 훑었다.

‘부회장님 처음 뵀을 때가 전략실 과장으로 회사로 들어오셨을 때였어요.’

재민은 추억이라도 회상한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멋있었어요. 미국 유학을 끝낸 재벌 3세가 아주 멋진 슈트를 입고 로비에서 내 옆을 지나가는데,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생각할 만큼 끝내주는 첫인상이었습니다.’

‘…내가, 하찮은 네놈 따위의 첫인상을 기억할 리 없다는 거 잘 알지?’

이젠 슈트가 아니라 초라한 수형복을 입은 연호가 여전히 오만하고 잘난 얼굴로 저를 말로 깔아뭉개고 있어, 재민은 기분 좋다는 듯 대꾸했다.

‘여기 이러고 있어도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봐요.’

‘누나까지 결국 건드렸으니, 내가 나가면 넌 죽을 줄 알아.’

연호는 이글이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재민을 보면서 한 음절마다 분노를 담아 경고했다. 하지만 그런 연호가 우습다는 듯 재민은 안경을 살짝 치켜올리면서 대답했다.

‘죽을 땐 죽더라도 부회장님께 알려야 할 일이 생겨서 이렇게 한걸음에 제가 직접 왔습니다.’

재민이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사진을 하나 꺼냈다. 보란 듯이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플라스틱 분리대 앞에 그 사진을 보여 주면 혀를 끌끌 찼다.

‘집안 단속 제대로 하셔야겠습니다. 부회장님은 계속 절 의심하셨지만, 아시잖아요? 제가 아니라 진짜가 따로 있는 거.’

재민이 보여 주는 사진에 연호의 시선이 옮겨 갔다. 익숙한 배경을 뒤로 둔 채 제가 잘 아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

미주와 진우.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집 앞 대문에서 미주는 진우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 사진을 본 순간, 1초 정도는 머릿속 퓨즈가 탁- 하고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저는 예전의 차연호가 아니었다. 치기 어린 질투심에 두 번이나 미주를 잃었기에 너무나도 잘 알았다. 미주는 저를 배신할 리 없었다. 그리고 진우는 신의가 있는 남자였고.

‘정 실장, 내 아내는 부정한 여자가 아니야. 그리고 남매가 서로 끌어안을 수도 있지,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그러네요. 근데 왜 집 앞에서 이러고들 있을까, 애틋하게.’

침착한 표정의 연호에게 재민은 자꾸만 그를 흔들기 위한 미끼를 던졌다.

‘아, 남매요? 부회장님, 두 사람 친남매도 아닌 거 아시면서.’

‘그래서?’

‘아슬아슬한 그 감정, 어쩌면 미주도 즐겼을지 몰라요. 걔가 그리 착하고 순진한 애가 아닌 거 아시잖아요…….’

‘개소리 지껄일 거면 빨리 왈왈거려.’

연호의 도발에 재민은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리면서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한 번쯤 이런 생각 해 본 적 없으세요? 윤미주라는 여자…, 서진우가 내게 붙인 자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

‘사실은 이 모든 게 서진우가 짠 계략이었고, 정재민을 악역으로 내세워 나를 속인 다음 미주를 홀랑 먹어 치우고 회사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도 말입니다.’

재민이 세 치 혀를 놀리면서 연호 마음속에 불신의 씨앗을 뿌리려고 했다.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던 연호는 깔깔- 소리 내 웃으면서 재민을 조롱했다.

‘정재민, 그동안 네 뱀 같은 간계에 사람들이 속았을지 모르겠지만.’

살짝 삐딱하게 자세를 고쳐 앉은 연호는 눈앞에 앉아 있는 인간의 탈을 쓴 금수를 보았다.

‘정 실장, 솔직히 말해 줘?’

‘뭐, 마음대로.’

재민이 해 보라는 듯 목을 까딱거리자 연호는 피식 웃으면서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주가 서진우랑 같이 잤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거든, 왜냐면 말이야.’

‘…….’

‘미주는 너처럼 이기적인 이유로 사람을 배신하지 않아. 그러니 만에 하나 진우와 뒹굴었다 해도 분명 이유가 있었겠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줄 거야, 나는.’

‘이야, 대단한 사랑이네.’

‘더 솔직히 말하면, 몇 놈이랑 붙어먹었어도 이제는 정말 상관없어. 내 옆에만 있으면 돼. 어때? 진짜 미친 사랑이지? 응?’

그건 진짜 사랑을 하지 못한 재민은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사랑도 슬픔도 미움과 증오까지 연호는 모두 느껴 보았다. 그녀와 함께 아파하며 절망했고 기뻤던 동시에 서로를 용서하지 못해 괴롭혔었다. 결국, 끝까지 가서야 지독할 정도로 끈질긴 운명의 상대는 그녀임을 알았다.

그러니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서로에게 맹세할 수 있는 게 있었다. 무슨 일이 있든 상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잃지 않는 것. 그녀와 겪었던 수없이 많은 감정의 가시밭길을 거쳐 연호는 미주를 완전히 믿게 되었다.

‘허, 차연호 부회장님께서 취향이 이리 독특하실 줄은 몰랐네요.’

‘네 거짓말이 사실이래도 설령 미주가 그리했다면 그리한 거겠지. 나는 모든 걸 다 눈감아 줄 수 있고, 이해하고 포용하는 법을 배웠으니깐 괜찮아. 차라리 딴 놈도 아니고 서진우라면 오히려 환영이지.’

미친 건지, 제정신이 아닌 건지. 재민은 아내가 육체의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 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말하는 남편을 보면서 기도 안 찬다는 듯 웃었다.

‘재밌네요. 부회장님이 이리 도량이 넓은 분이신 줄 몰랐습니다.’

꾀가 통하지 않자 저를 조롱하며 비꼬는 재민에게 연호는 가까이 와 보라는 듯 손짓을 하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재민, 잘 들어. 이딴 사진 한 장으로 날 흔들 생각이었다면, 실패했어. 그러니 조용히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어. 이제 곧 내가 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 너도 들었을 테니깐.’

저를 남겨 두고 승리자의 얼굴로 면회실을 떠나는 연호의 뒷모습을 보며 재민은 이를 갈면서 차현 그룹 본사, 제 자리로 돌아왔다.

“좆 같은 새끼. 좋아, 차연호. 분명히 말했어. 네 여자가 딴 놈이랑 뒹굴어도 눈 하나 깜빡 안 한다는 개소리, 진짜인지 두고 보겠어.”

재민은 계속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면서 펄펄 끓는 것 같은 이 화를 폭발시켰다. 거의 반평생을 비밀을 숨기기 위해 감정을 억제하고 저를 억눌러 왔다. 그래서 위기에 빠진 것 같은 직감 속에서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다 왔단 말이야. 눈앞에 고지가 바로 코앞이었는데 두 놈의 반격에 이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순…….”

예전에 연호를 이용해 진우를 움직이려 했듯, 이번에는 진우를 이용해 연호를 움직이려 했다. 어쩌면 미주가 미끼로 적합하지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미주야, 네가 문제야. 대체 차연호를 어떻게 구워삶아 놨고, 진우 형을 어찌 홀렸길래…….”

진정되지 않는 폭풍 같은 마음으로 책상을 내려친다고 애꿎은 주먹만 엉망이 되고 있을 때였다.

“아, 형이 선물을 보냈다고 했지. 씨발, 뭘 보냈을지 아주 기대가 되네.”

재민이 거칠게 박스를 뜯어 보자 안에 또다시 작은 상자가 있었다. 아니, 상자라기보단 아이스크림을 담는 통이라고 할까? 유명 아이스크림 브랜드에서 나오는 케이크를 담아 두는 스티로폼 박스가 핑크색 리본까지 예쁘게 묶인 채 들어 있었다.

“뭐야, 이건. 아이스크림이나 처먹으라 이건가?”

진우가 저를 엿 먹이려는 거로 생각하며 아무 생각 없이 리본 옆에 끼워져 있는 카드를 보았다. 봉투를 열어 안에 든 카드에 적혀 있는 한자를 읽어 보았다.

“구시화…지문……?”

법대를 나온지라 한문에 익숙한 재민의 눈에 들어온 글자.

[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설시…… 참신도.”

진우가 직접 써서 보낸 메시지가 분명한 이 한문의 뜻을 곰곰이 생각하다 떠올렸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재민이 천천히 앙증맞게 묶여 있는 리본을 풀면서 중얼거렸다.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그리고 뚜껑을 여니 흉측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혀.

혀였다.

사람 혀.

그것도 잘린.

“씨발! 개씨발 새끼! 으악! 이 미친 살인마 새끼가!”

재민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잘린 혀를 보면서 기겁하며 소리쳤다.

“진우 형, 너… 이 미친놈이……!”

그가 얼마나 잔인한 인간인지, 옆에서 지켜봤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우에게 전면전을 선포했을 때 이 정도 일을 겪을 수 있다 각오했지만 말이다. 그의 잔혹함을 바로 눈앞에서, 심지어 대낮의 회사에서 보게 되니 두려움에 점점 몸이 떨려 왔다.

바로 계단 몇 개만 올라가면 닿는 곳에 있는 진우가 예상 범위를 넘어선 채 저를 독 안의 쥐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너무나도 경악스러워 터질 것 같은 심장에 숨을 헉헉-대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박스 안을 보았다.

“우욱!”

토악질이 올라왔다. 다시 보아도 그건 사람의 혀였다. 대체 진우는 누구의 혀를 잘라 보낸 것일까? 아니, 혀만 잘라 보내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걸까?

만에 하나 이 안에 든 게 혀가 아니라 손이나 발, 그것도 아니라 사람 머리였다면.

아니, 이 싸움에 패배해 제 혀가 잘려 이렇게 박스에 넣어진 채 누군가를 경고하는 수단으로 사용될지도 몰랐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더 참을 수 없어진 재민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을 열고 나와 화장실로 급히 찾아 들어갔다.

“우욱… 우…….”

누가 들어오지 못하게 화장실 출입문을 잠갔다. 안경을 벗고 세면대에 물을 틀어 놓고는 머리를 박았다. 쏴아- 하고 끝없이 쏟아지는 물줄기에 재민은 모든 걸 흘려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구역질 때문에 역해진 입을 헹궈 내고 겁에 질려 상기된 얼굴을 씻어 내도 자꾸 눈앞에 피가 엉겨 있던 잘린 혀의 단면이 떠올랐다.

“하아… 미친놈… 대체…….”

재민은 틀어 놓은 물을 잠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오른 손등을 보았다. 이젠 다 아물긴 했지만 조금 일그러진 원형으로 붉은빛 새살이 돋아 있었다. 재떨이라도 되는 양, 일말의 망설임도 없던 진우의 행동.

“늘 그랬어. 아니라고는 말했지만 형은 항상 날 자기 아래로 깔아 보고 있었다는 거, 모르지?”

덜덜 떨리는 왼손을 뻗어 상처 부위를 쓰다듬자, 다시금 진우가 담배로 지지던 그 느낌이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뜨겁다 못해 살이 녹아내리는 그 끔찍한 감각.

“진짜로 날 죽일 셈이야…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고, 나를 몰락시키겠다는 것도 아니고 진짜 죽여 땅속에 날 묻을 생각이구나, 진우 형.”

협박도 아니고 저처럼 센 척하는 것도 아니었다. 진우는 정말 저를 죽이기로 결심한 게 분명했다.

불도저를 적으로 돌린다 해도 손에 쥔 진수오 회장 살인 건으로 그들 모두 굴비처럼 엮어 버리면 승리할 수 있다, 자신했다.

그래서 진우가 저를 마지막으로 회유하기 위해 먼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모든 걸 덮어 두고 연호에게서도 보호해 줄 테니 이제 그만하라 말하는 진우의 뇌관까지 일부러 건드리면서 그를 농락했는데.

“미주까지 건드렸으니… 이건 시작에 불과하겠지.”

세 치 혀로 미주를 진우 앞에서 겁간하다니. 자만했다. 너무나도 오만하게 벌써 이겼다, 승리에 취해 버려 일을 그르쳤다.

도도한 연호를 구치소로 보내 버리고, 형제였던 진우가 최대한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 두기 위해 머리를 조아리는 순간을 너무 즐겼다.

자수라는 고육책으로 3대째 이어 온 회사의 주식을 휴짓조각에 가깝게 만드는 행위를 하는 그들에게 역습당할 줄 몰랐다. 눈앞의 돈보다 윗대에서부터 내려온 차현이라는 이름이 그토록 중요했다니.

아마 차현 그룹을 조각조각 잘게 찢어 버려 흔적도 없이 공중분해 시키려 했던 제 계략을 알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반격을 시작한 것 같았다.

“겨우 석 달밖에 맛보지 못한 달콤함인데,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아. 절대로!”

보름 뒤면 이사회가 열린다. 제가 알기론 현재로서는 차현 그룹 총수 일가의 스캔들이 너무 컸다. 그렇기에 재민이 설득하고 부탁, 회유하지 않더라도 이미 차현 전자 최 사장이 주인 잃은 배의 새로운 선장이 될 수밖에 없는 흐름이었다.

“형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임원진들은 최 사장을 선출할 수밖에 없어. 다른 대안도 없고… 차연희까지 살인범이 됐는데 누가 대체…….”

설마.

“말도 안 돼. 설마, 형이 직접 전면에 나오려고……?”

차연희, 그 여자가 보통이 아닌 건 진우를 통해 넌지시 들었었다.

아니다. 차연호가 세운 계략일까? 아니면 진우의 머리에서 나온 술수일까? 설마 미주가?

저들에게는 머리가 너무 많았다. 하나같이 저만큼이나 지혜를 짜내고 용의주도한 계략을 꾸미며, 심지어 그것을 실행시킬 능력도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저는 혼자였다.

그들과 전면전을 벌이겠다 자신 있게 말한 건 진 회장을 살해한 저들의 죄를 손에 쥐고 칼자루를 잡았다고 여겼기에 가능했다. 이제 베는 일만 남았는데, 그들이 팔다리를 일부러 잘라 내 목을 지키려 하다니.

“최 사장을 바지로 세운 내게 차현을 뺏길 바에, 차라리 진우 형에게 잠시 맡기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거구나.”

진우도 분명 계산기를 두드리고 거래에 응했을 것이다.

“그러면 말이 돼. 나를 이 정도까지 압박할 수 있는 배짱이… 원래도 거침없지만, 맞아, 자기가 회장이 될 거니깐… 정말 진우 형이 힘의 정점에 드디어 앉게 된다면.”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생생히 재민의 눈앞에 그려졌다.

차기 회장 후보로 최 사장과 진우가 붙는다면? 이사회에서 연호를 지지하는 세력은 과반수가 넘기에 진우에게 그 표를 행사한다면 게임은 이미 끝이었다.

구치소에 갇혀 있다 한들 차연호는 외부로 제 뜻을 전하지 못할 만큼 잔챙이가 아니었으니 벌써 제 사람들에게 일러뒀을 것이다. 제가 나올 때까지 진우를 회장으로 추대해 지금의 혼란을 수습해 달라는, 차현 그룹의 정당한 후계자 말에 그의 신하들은 머리를 조아렸을 것이고.

심지어 누나가 오만 가지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동생의 일을 덮어 버린 덕에 지금 대중의 시선은 섹스 동영상에 집중되고 있었으니까.

진수오가 찍지도 않은 출처 불명의 영상들을 이때다 싶은 성인 사이트들이 불법 링크를 걸어 메신저를 통해 우후죽순으로 퍼뜨리고 있었지만, 더 결정적인 게 있었다.

한예나라는 전직 무명 연예인이었던 SNS 셀럽이 진수오가 죽고 한동안 사라졌다 갑자기 언론에 나타나 모든 걸 털어놓았다.

‘맞아요. 찌라시 내용 중에 일부는 맞습니다. 저는… 부끄럽지만 돌아가신 회장님과 스폰 관계였어요. 그는… 저를 성적으로 학대하고… 폭력을 행사했으며 영상을 촬영하여……’

어제 차연호 외삼촌이 사주인 언론사의 종합 편성 채널 뉴스 생방송에 나온 그녀의 눈물 인터뷰.

‘…들켰습니다. 저는 차 관장님 입장에서 간통녀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분은 저를 용서해 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잘못을 깨닫고 필리핀으로 떠났고, 새로운 삶을 살다가 뉴스를 봤습니다. 그래서 저를 용서해 주신 관장님께 힘이 되고자…….’

비난받을 각오를 하고 용기 내어 잘못에 대해 속죄하고 싶었다는 한예나는 차연희를 옹호했다. 그 덕에 하루 만에 죽은 자가 죽을 만했다는 여론 속에서 살인범 차연희에 대한 동정론이 퍼졌다.

물론 한예나를 극적으로 지금 등장시킨 게 진우라는 걸 잘 알았다. 신변 보호라는 명분으로 필리핀으로 그녀를 보내 놓고 죽을 때까지 감시하려 했을 건데.

의외로 예나와 미주 그리고 진우까지 서로 원하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졌기에 위기 상황에서 예나가 발 벗고 먼저 나섰다는 것까진 재민은 몰랐다. 그랬기에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기 위해 아침부터 연호를 찾아서 비열한 방법으로 그를 흔들려고 했는데.

포옹하고 있는 미주와 진우에게 배신감을 느껴 연호가 진우와 잡은 손을 놓길 바라는 마음으로 거기까지 갔다. 하지만 그마저 실패하고 말았고, 진우는 연호에게 다녀온 걸 알기라도 한 듯 훼손된 사람의 신체를 보내왔다.

그게 잔나비의 혀라는 것도 모른 채 재민은 점점 늪에 빠지는 절망감에 점차 허우적대고 있었다.

“구시화지문, 설시참신도… 구시화지문, 설시참신도…….”

재민은 진우가 보낸 메시지를 염불처럼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렇게 개죽음당할 순 없어! 절대로 네 손에 죽지 않아!”

진우가 직접 죽인 사람은 부산의 그놈들뿐만 아니었다. 재벌 회장의 사냥개는 때론 먹잇감을 찢어발긴 채 주인에게 가져다줄 때도 있었으니깐. 재민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면서 소리쳤다.

“형? 듣고 있어요? 네? 진우 형! 형이 결국… 나를 이렇게까지 만든 거야… 그러니 전부 네 탓이야… 서진우.”

진우가 저를 죽이겠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알려 왔으니 저 역시 그에 걸맞은 대답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판세가 기울어 이미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궁지에 몰려 절벽 끝에 다다르니 머릿속에서 무서울 정도로 정리되는 생각들이 있었다.

“어디 한번 네놈들이 사용한 수, 그대로 한번 당해 봐.”

그들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이라면 제가 져 줄까 했다. 하지만 그냥 질 순 없었다.

“너희는 아무것도 없는 승리를 가져가게 될 거야. 그리고 나는 모든 걸 가지고 이룬, 패자가 될 테고.”

자리에서 일어난 재민이 세면대에 아무렇게나 벗어 둔 안경을 집어 들고는 제대로 썼다.

“이제 잘 보이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또렷하게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래, 함무라비 법전.”

이제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시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음에 절망하면서.

“네놈들 손에 나는 꼭 죽고 말 거야. 그러니 제발 나를 죽여줘.”

저도, 진우도 그들 모두 이젠 영원히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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