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울게 하소서
* * *
진우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썼다. 눈을 감고 도균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차현 그룹 본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핸들을 잡은 도균과 그 옆 조수석에 앉아 있는 요한까지,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재민의 배신을 알아 버렸다.
진우가 입을 다물고 있는 탓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 속에서 요한이 힘겹게 진우에게 8년 전에 있었던 일을 전했다.
“전무님,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알면 말 걸지 마.”
“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말씀드릴 수 있을까 해서요.”
그간 요한의 됨됨이를 알았기에 그가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다면 듣는 편이 좋다는 것도 잘 알았다. 눈을 뜬 진우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말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오래된 일입니다, 전무님. 예전에 저만 서울에 남겨 두시고 정 실장님과 함께 홍콩을 거쳐서 뉴욕에 가셨던 일, 기억하십니까?”
머리가 아픈 듯 진우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때 차연호, 아니 부회장님과 미주 씨가 만나는 증거를 모아서 정 실장님께 메일로 보내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정 실장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뭐라고?”
“전무님께는 본인이 직접 보고드린다고, 자료는 계속 본인에게만 보낼 것을 지시하셨는데……”
요한이 침을 한 번 삼키며 살짝 고개를 돌려 뒷좌석에 앉은 진우를 보면서 물었다.
“그때 정 실장님께 보고받으셨습니까? 전무님께서는 하 변호사님을 통해 알게 됐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요한이 알려 온 재민의 변심이 최근이 아니라 어쩌면 오래된 계획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진우의 마음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 댔다.
“…씨발, 정말 몰랐어. 정말…….”
한탄이 묻어 나오는 진우의 혼잣말에 요한도, 도균도 그 어떤 대답도 해 줄 수 없었다. 저들 역시 재민의 배신을 설마설마하다가 진우를 통해 오늘 온몸으로 직접 느꼈다.
두 사람도 믿고 따랐던 이의 태세 전환에 처음에는 놀랍다가 점점 그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도균이 진우를 룸미러로 흘낏 보았다. 두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은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눈을 뜨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박도균, 이 새끼. 운전이나 똑바로 해.”
“네, 전무님.”
“내 눈은 이마에도 달린 거 몰랐냐?”
“…아, 네.”
너무 심각해진 분위기를 진우가 괜히 도균을 타박하며 풀면서 요한에게 자연스럽게 지시했다.
“하 변, 지금 당장 본사로 들어오라고 해. 하던 거 다 집어던지고.”
“네, 알겠습……”
“그리고, 아니다. 이건 내가 직접 말해야.”
눈을 뜬 진우가 핸드폰을 꺼내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정훈아, 본사로 들어와. 지금 바로. 그리고 그거 가지고 오도록. 전에 내가 작성해 놓은 거 수정해야 할 것 같다.]
며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정훈이 화면에 뜬 진우의 메시지를 보면서 피곤한 듯 고개를 두어 번 돌렸다. 두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뻐근하다 못해 굳어 버린 목을 겨우 풀면서 함께 있는 이들에게 잠긴 목소리를 내었다.
“전무님 호출이 있어서, 저는 이만 본사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검찰이랑 최종 조율은…….”
저와 비슷한 포지션인 연호의 개인 변호사들과 현재 그를 무혐의 처리로 만들기 위해 꾸며진 법무팀들이 제 사무실에 모여 작전 회의를 하던 중이었다.
“아마 전무님께서 절 부른 이유가 있으신 거 같으니, 다녀와서 다시 의논하기로 하고… 다들 좀 쉬셔야겠어요. 요 앞 사우나라도 가셔서…….”
저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 않은 몰골들이 제 말에 반색을 표하며 기지개를 켜거나 어깨를 두드리는 꼴이 정훈은 그저 웃겼다.
현재 대한민국 가장 톱뉴스 중의 하나인 차현 바이오 분식 회계 건을 해결하기 위해 초라한 변호사 사무실에 덩치 큰 남자 여럿이 옹기종기 모여 작전을 꾸미고 있다니.
“아, 나중에 부장검사님이 오시기로 했으니 혹시 저보다 먼저 오시면 잠시 기다려 달라 꼭 전해 주세요.”
지금 그들과 팽팽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자들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일 처리가 진행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는 걸, 정훈은 알았다.
‘어차피 차연호는 무조건 나오게 되어 있어. 그게 언제가 되든 말이야.’
정훈이 사무실 한쪽 구석에 위치한 문을 열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이 낡은 사무실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최신식의 번쩍거리는 금고. 보안 장치를 해제하고 그 안에서 A4 크기의 서류를 하나 꺼냈다.
“그럼, 조금 있다 뵙겠습니다.”
“네, 하 변도 고생하시고. 저희도 밥이나 먹고 좀 씻고 쉬어야겠어요.”
남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온 정훈은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올라타고는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도착한 차현 그룹 본사 전무실에서 정훈은 저를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진우를 보며 머쓱해하고 있었다.
“꼴이… 이게 뭐냐? 에휴… 하긴, 일 시켜 널 이 꼴로 만든 게 바로 난데.”
혼자 화내고 혼자 대답하는 인간미 넘치는 진우를 보면서 정훈은 소파 테이블에 앉아 가지고 온 것을 꺼냈다.
“가지고 오라 하신 거, 여기.”
“어, 고맙다. 내가 변덕이 죽 끓는 듯해서 널 자꾸 오라 가라 하네.”
“아시면 자꾸 부르지 마세요. 요새 바빠 죽겠으니깐.”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정훈을 보며 진우는 애써 웃으면서 쓸데없는 소리를 먼저 꺼내 본다.
“커피라도 마셔. 며칠 못 잔 꼴이라 내가 다 미안해.”
“이왕 주실 거 믹스 커피 말고 스타벅스로 부탁드릴게요. 콜드브루 샷 추가로.”
뻔뻔한 정훈의 대답에 진우는 기도 안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짓다가 밖에 앉아 있을 이에게 소리쳤다.
“도균아, 하 변이 스타벅스 커피가 마시고 싶으시단다. 콜드브루 샷 추가로 빨리 가서 사 와.”
됐냐는 듯 양손을 올린 진우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정훈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진우의 기분이 어떤지 알고도 남는 도균이 눈치 빠르게 번개보다 더 빨리 하 변이 원하는 걸 눈앞에 가져다 놓았다. 물론, 진우가 평소에 좋아하던 커피까지 함께 사 오는 센스를 발휘하면서 말이다.
“원하시는 대로 커피 대령해 드렸으니 귀찮게 좀 하자.”
“네, 알겠습니다. 일단 수정하시고 싶은 게 뭔지 알려 주시면 문구 추가해서 다시 공증받아 놓겠습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도균이 사 온 커피를 마시던 진우가 조금 전 호들갑은 어디 갔냐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재민이 몫으로 주려고 했던 거, 모두 삭제하고 전부 미주한테 줘.”
“…네, 그럼 어디서 어디까지…….”
진우가 흔들림 없는 단호한 말투로 바라는 걸 정훈에게 일러 줬다.
“내 모든 것.”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꼭 공개적으로 공표하도록.”
“네.”
진우는 만약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유언장을 다시 고치는 작업을 정훈에게 시키고 있었다.
“아, 비공개 유언장은 변동 사항 없이 그대로 진행하면 돼. 정훈이 네가 알아서 집행해 주면 되니깐.”
아무리 진우가 미주밖에 없었던 삶이라 해도 주변에 아예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다. 챙겨 줘야 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준비해 두었는데, 거기엔 오래전부터 저와 지독할 정도로 얽혀 있는 민희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여러 번 유언장을 검토하고 다시 수정하는 작업을 할 때, 진우는 넌지시 정훈에게 물었다.
“그런데 하 변, 넌 안 궁금하니? 내가 왜 재민이 몫을 전부 미주에게 주는지.”
노트북을 켜 놓고 수정된 유언장에 법리적 문제가 없는지 검토하던 정훈은 말 같지도 않다는 듯 오히려 되물었다.
“정 실장님이 더는 전무님 사람이 아니라는 거, 제가 이쯤 됐는데도 모른다 생각하셨어요?”
“하긴. 연호 쪽에서도 정보가 흘러나왔을 테니.”
정훈에게 묻기에는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을 했음을 진우가 순순히 인정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정훈이 눈으로는 노트북을 보면서 진우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제가 모르는 게 더 있지 않나 싶었는데 오늘 이렇게 유언장 수정하시는 거 보며 확신했습니다. 두 분 사이에 바이오 건이 아니더라도 뭔가가 더 있을 것 같다고.”
진우는 묘하게 정훈을 보면서 대충 벗어 던져 놓은 양복 상의 안에서 담배를 꺼내 들고는 불을 붙였다.
“창문은 열고 피우세요. 간접흡연, 싫습니다.”
“꼭 미주가 말하듯이 말하네.”
진우는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창문을 조금 열어 두고는 다시 앉았다.
“이거 극비다. 아는 사람 차연호랑 나, 둘밖에 없어. 아, 당사자도 알 테니 셋만 아는 일이네.”
한 템포 숨을 삼킨 진우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면서 매서운 얼굴로 변했다.
“희주 형, 그냥 사고가 아니었어. 잔나비 애들이 작업한 건데 재민이가 정보를 팔았다.”
노트북을 보고 있던 정훈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진우를 바라보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진우가 굉장히 격양된 상태임을 이미 사무실에 들어설 때부터 잘 알았다.
뭔가에 화나다 못해 치를 떨고 있는 진우가 되려 차분히 노기를 갈무리하며 냉철하게 이성을 가다듬고 있다고 여겼는데. 정훈은 진우의 불타는 눈동자에 비친 분노의 이유를 알고는 탁- 소리를 내며 노트북을 닫았다.
“역시 희주 선배는, 저와 전무님이 의심한 대로 그냥 사고가 아니었군요.”
“선배는 무슨. 같은 학교 나온 것도 아니면서.”
“호칭이 좀 애매해서요. 형이라 부르기에는 만난 적도 없고, 누구 씨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딱딱하고.”
“아, 몰라, 네 좆대로 해라.”
한숨을 쉰 진우가 고개를 저으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재민이가 아버지 노름빚 때문에 형을 팔고는 지난 15년 동안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우리 옆에 있었다니, 그게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어, 나는.”
진우가 담배만 피워 대면서 더는 입을 열지 않자, 정훈은 노트북을 열고 조용히 할 일을 했다. 타닥-거리는 키보드 치는 소리가 경쾌하다기보다, 한 음, 한 음, 고통스럽게 마음에 울렸다.
한참을 말없이 담배만 피우던 진우는 옆에서 가만히 시킨 일을 하는 정훈을 보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길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차연희와 거래했어. 자기가 총대 메고 들어간단다. 단, 조건은 무조건 동생을 빼낼 것, 그리고 언론 플레이를 해서 바이오 문제를 완전히 덮을 것.”
“…사무실로 돌아가서 판을 다시 뒤엎어야겠네요. 부회장님 쪽 법무팀, 능력치가 범상치 않은데도 이번 싸움은 힘들었는데 오히려 호재가 되겠습니다.”
“차씨들 외가에는 차연희가 직접 부탁할 것 같아. 작년에 종합 편성 채널도 만들었으니 대놓고 24시간 살인 사건을 떠들어 주겠지.”
진우가 새롭게 친 배수진은 위험부담이 컸지만 그만큼 좋은 이슈도 없었다. 세상에, 재벌가에서 살인이라니. 그것도 아내가 남편을 죽였다. 이 정도면 웬만한 연예계 스캔들만큼이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 것이다. 나쁘지 않은 묘수에 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정 실장은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진우는 쉽게 답을 주지 않고 반문했다.
“너라면 어떻게 처리하겠어? 네 가족을 죽인 원수를 이제야 알게 됐는데 알고 보니 그놈이 바로 나라면? 20년 넘게 알아 온 가장 친한 친구이자 형인 내가 범인이라면, 너는 어쩌겠어?”
저를 빗대어 묻는 말에 정훈은 고민 끝에 답을 내어놓았다.
“만약 전무님이 제 가족을 죽인 후 정 실장처럼 행동하고 비밀을 숨긴 채 심지어 배신까지 했다면 전 아마 전무님을 살려 두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보통은 그렇게 하겠지?”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해 온 반쪽을 잃은 진우가 정훈의 눈에 허망해 보였다. 복수를 해야 함을 알지만,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함도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간의 정이 깊었고 우정 또한 진했다.
제 사람이라 믿으면 마음까지 주는 진우인 걸 알았기에 정훈은 그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 잘 알았다. 고통스러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 정훈은 조용히 예전에 있었던 일을 꺼내 보았다.
“기억나시죠? 저랑 처음 만났던 날요.”
“…그래. 기억 안 하고 싶은데 너무 강렬해서 잊을 수도 없네, 씨발.”
* * *
부산, 초량 텍사스 거리.
지금이야 그곳을 차이나타운으로 부르지만, 한복집 할매는 그곳을 청관 거리라고 불렀다.
폭력에 물들어 있었던 어린 시절 저와 희주가 서서히 영역을 확장하면서 드나들기 시작한 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들이 태어났던 매축지가 있었던 범일동을 넘어서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며 좌천동도, 수정동도 접수하고는 초량까지 진출했을 때, 알게 된 꼬맹이.
진짜 어려서 꼬맹이는 아니었고, 그 당시에 2차 성징이 오지 않아 키가 작아서 진우가 그렇게 불렀었다.
텍사스라는 미국 지명을 가진 거리가 이제 러시아인들로 가득 차 있는 아이러니 속에서 그 시절 그곳은 이방인들을 밀어내지 않는 곳이었다.
일본인이 한국인 애인에게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왜놈이 본국으로 돌아가 버리는 바람에 말이다. 생계가 막막해져 웃음과 몸을 팔게 된 가난한 여자는 어린 아들과 함께 고관 입구 근처 슬레이트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죽고 홀로 남은 중학생 정훈이 더는 삶의 의미가 없어 죽으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노끈을 하나 구해 가방에 넣고 늦은 밤, 버스 막차를 타고 용두산 공원으로 향했는데.
‘야, 너 목매 죽으려고?’
‘…남의 일에 신경 꺼요.’
‘그렇게 해선 안 죽어, 인마. 매듭을 그렇게 묶으면 안 되거든.’
‘…….’
‘이렇게 매듭을 지어야… 목이 꽉 졸려서 죽을 수 있어.’
죽겠다고 고른 나무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고등학생 진우의 눈에 띄는 바람에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어쩐지 어렸을 때도 위압적이었던 진우가 새파랗게 어린 놈이 왜 자살을 생각하냐며 저를 족쳤을 때 홧김에 내뱉은 말.
‘엄마도 죽었고, 아빠는 우릴 버리고 일본으로 돌아갔고, 돈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요?’
‘……나도 그런데 아직 안 죽고 살아 있어.’
진우는 뭔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을까? 죽으려는 정훈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여러모로 비슷한 사연을 가졌기에 정훈이 잘 지내는지 가끔 들여다보고 챙겨 주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희한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우리 같은 놈들은 주먹 아니면 공부니, 너 같은 샌님은 일단 공부나 열심히 하고 있어.’
‘…깡패 주제에.’
‘공부라도 안 하면 나같이 된다.’
‘난 그냥 군대 가서 말뚝 박을 거예요.’
조금 건방진 그 꼬맹이가 다행히 더는 죽으려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어찌어찌 혼자지만 끊어지지 않는 질긴 삶을 이어 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깡패가 의대라니, 좀 웃기지 않아요?’
‘야, 사람이 생각이 바뀔 수 있지, 내가 의사 되는 게 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입대했다. 언제고 휴가를 나왔을 때 돌연 손을 털고 의사가 되겠다는 진우를 보며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는데.
세상에, 깡패 새끼가 진짜 의대를 가다니. 그때만 해도 내신은 엉망이라도 수능만 잘 보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특차’라는 제도가 있었으니 말이다.
정훈은 마음먹은 걸 해내는 진우를 보면서 느낀 바 있었다. 제 인생을 이대로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일단 직업 군인보다는 대학을 가 보기로 했다. 그래서 제대한 후 틈틈이 수능 공부를 하며 학비를 모으기 위해 공사판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의대를 포기하고 서울에 갔다던 진우가 찾아왔다.
‘나 이제 돈 좀 만지니깐 너 학비랑 생활비 대 줄 수 있어. 그러니 어때? 나랑 같이 서울에서 가오 잡고 한번 살아 볼래?’
그다음부턴 꽤 뻔하게 스토리가 전개됐다. 인생의 두 번째 기회를 준 이에게 인생을 걸어보겠다 다짐한 사내가 말이다. 불굴의 의지로 변호사가 되어 음지에서 그를 보필하고 있다는, 남자들이 많이 볼 법한 만화 같은 이야기.
그리고 정훈이 주인공인 그 만화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 * *
“살려 줬으니 끝까지 저 책임지세요, 진우 형.”
“하아… 책임져야 할 목숨이 너무 많으니 넌 좀 이제 알아서 살길 찾아, 새끼야.”
저를 보며 질린다는 듯 기겁하는 진우를 보며 정훈은 피식 웃어 보았다.
“미주, 나 몰래 재민이 만나고 왔다는데… 얜 또 무슨 생각인지. 아아, 머리가 아프다 못해 터질 것 같다, 정훈아.”
가끔 속마음을 털어놓는 남자가 가족 같은 이들에 대해 말하곤 해, 저 역시 친숙한 이름들.
정훈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류를 브리프 케이스에 넣고 일부러 심드렁하게 말했다.
“앞으로 50년은 지나야 이 유언장이 공개될 테니, 중간중간 또 마음 바뀌시면 얼마든지 수정하세요.”
진우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대꾸했다.
“앞으로 50년이나 더 오래오래 살아 해 먹자고? 야, 힘들다, 나.”
“나중에 은퇴 못 한다고 울지 마시고 체력이나 잘 비축해 두세요. 그럼 전 갑니다.”
돌아서는 정훈에게 귀찮다는 듯 손을 턴 진우가 해가 지고 있는 창문 너머 세상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 자리, 형이 살았으면 형이 앉아 있을 곳이겠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스물아홉 살인 남자. 제가 원했던 대로 살았다면 지금쯤 평범한 삶을 살았을 40대 중반의 희주를 상상해 보지만.
“그냥 뒀으면 알아서 손 털고 조용히 죽은 듯이 세상의 먼지처럼 살았을 건데, 왜…? 재민아. 도대체 왜… 아저씨 도박 빚이 그리 많았으면 우리한테 한번 말이라도 하지…….”
안개 속 같았던 재민에 대한 마음이 점점 또렷이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가 지칭한 대로, 저는 불도저지 않은가?
“결국 우리가 이렇게 된 건 모두 재민이 네 탓이야. 그러니 이젠 너도 책임을 져야 해.”
마음을 굳힌 진우가 결심한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푸른빛 안광을 띠며 요한을 불렀다.
“정재민 자료 전부 정리해서 밤까지 올려 줘.”
그리고 거의 밤을 새운 진우가 아침 댓바람부터 서울 구치소로 향해, 연호를 만났다.
“누나한테 대충 설명은 들었지……?”
“어, 그리고 미주도 눈치챘어. 재민이가 널 이렇게 만든 놈이라는 걸.”
“하아… 어떻게 보면 다행이네. 더는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되니…….”
말끝을 흐린 연호가 수감 생활이 조금 힘들었는지 까칠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그런 누나를 뒀다는 게 나는 참 부러워. 역시 혈연이 주는 힘은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드네.”
무슨 말이냐는 듯 연호가 대꾸했다.
“서 전무도 동생 있잖아?”
“아, 그렇지. 그렇네.”
막다른 길에 와서야 서로를 인정하기 시작한 두 남자는 이제는 정말 편안한 모습으로 각자의 속내를 꺼내 놓았다.
“알아. 누나한테는 자기 자신보다 회사가 더 중요하다는 거. 아버지가 힘겹게 여기까지 올려놓은 걸 20년 가까이 다른 이에게 뺏겼다가 극단적인 방법으로 겨우 되찾았는데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놈한테 다 박살 나 버릴 수 있으니 진짜 큰 결단을 내리신 거, 정말 대단해.”
“부탁할게. 누나 일도 최대한 고생을 덜 할 수 있게…….”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는 진우를 보며 안심한 연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럼 이제, 그 개새끼 어떻게 할 거야?”
한껏 매서워진 눈빛으로 연호가 지그시 진우를 보며 물었다.
“보여 줘야지. 우릴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좋아. 그럴 줄 알고 백호한테 부탁한 게 있었어.”
연호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원숭이 잡았어. 내 선물이야.”
“뭐? 이야, 부회장님… 역시.”
잔나비를 찾아냈다는 말에 놀란 진우가 기쁜 듯이 소리 내 웃었다. 연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보시다시피 내 신세는 이렇게 처량하니까, 원숭이 처분은 서 전무한테 맡길 테니 알아서 잘 요리해 봐.”
“부회장님 덕분에 재민이한테 좋은 선물 보내게 생겼네요.”
진우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을 간파한 연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오히려 그를 말려 본다.
“그래도 정재민 그 새끼 너무 놀라게 하진 마세요, 전무님.”
“이 정도 가지고 놀란다면 내가 실망할 것 같은데.”
서로 웃으며 오고 가는 대화 안에서 재민을 가지고 노는 두 사람은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미주, 자주 온다고 하던데?”
“아, 요즘엔 조금 뜸해져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이제는 지금 이 난리 통이 적응된 건지 날 봐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수다 떨러 온다니까?”
“걔가 좀 그런 면이 있어. 익숙해지면 어떤 상황이든 약간 소 닭 보듯 하는 특유의 버릇이 있어서….”
“알아, 뭔지. 좋게 포장하면 시크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무심한 성격.”
연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주를 떠올리며 진우에게 하소연을 했다.
“장난으로 막 때리면 맞아 줘야 되는데 은근히 손이 맵다니깐? 남자 자존심에 아프다 할 수도 없고.”
“말도 마, 우리 어릴 때 미주가 내 머리를 다 쥐어뜯은 적 있어서 진짜! 아오, 남자애였으면 진짜! 줘팼을 수 있는데 여자애라서 참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데.”
진우가 안다는 듯 질겁하며 신나게 미주 욕을 했다.
“못된 가시나. 지밖에 몰라서 그 시끄러운 수다를 다 받아 줘야 되고, 안 듣고 있으면 안 듣고 있다 지랄. 대답 안 하면 대답 안 한다고 지랄. 성질머리가 그 모양이라 시집이나 갈까 했더만….”
저를 장난스럽게 위아래로 훑는 진우에게 연호도 역시 농담처럼 한숨을 푹 쉬면서 대답했다.
“사실은 말이야, 되게 여성스러울 줄 알았는데 알맹이는 그냥 남자더라고. 사내대장부야, 와이프.”
“근데 차연호 부회장님, 미주가 알면 지금 우리 둘 다 죽는 거 알지?”
진우의 말마따나 미주가 알았다면 두 사람 모두 등짝을 후려 맞을 짓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차연호와 서진우가 사이좋게 앉아 미주 뒷담화를 하는 날이 다 오다니.
물론 장소가 구치소 면회실이라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예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그녀로 인해 둘은 이제 가족이었으니 편한 게 당연했다.
“그럼 또 올게, 매제.”
“잘 가요, 형님.”
이젠 저를 손윗사람으로 대해 주는 연호를 보고 진우는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당부했다.
“조금만 더 참아. 네가 직접 복수할 수 있게 나는 그저 그놈 목을 죄어 놓고 있을게.”
진우가 회사로 돌아와 로비를 지나칠 때, 같은 건물에 있지만 이제는 친구도 형제도 아닌 재민이 차현 전자 최 사장과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없는 사람인 듯 유령 취급하며 사무실로 돌아온 진우를 기다리던 남자가 있었다.
“직접 뵙는 건 처음입니다, 전무님.”
아버지뻘인, 이젠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백호가 덩치에 걸맞게 진중한 말투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부회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편하게 대해 주세요, 계장님.”
“아닙니다. 전무님이야말로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깍듯이 저를 대하는 백호가 자리에 앉으면서 굳이 시간 낭비하지 않으려는 듯 여기 온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부회장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진우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백호에게 건네주면서, 담뱃불까지 친히 붙여 주었다.
“네, 아침에 말씀해 주셨는데 이렇게 바로 계장님을 보내 주시다니. 일 처리가 시원시원하시네요.”
제 말에 수긍하며 길게 담배 연기를 뿜는 백호에게 진우도 뜸 들일 것 없이 물었다.
“그래서, 원숭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대림동, 지금쯤 밥을 먹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우는 비릿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퇴근하고 가 볼까 싶습니다. 계장님께서 앞장서 주세요.”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무렵, 업무를 마친 진우는 백호의 안내를 따라갔다.
한국말보다 중국말이 더 많이 들리는 대림동 이곳, ‘양자강’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중국 음식점으로 들어섰다.
식당을 지나쳐 주방 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곳에 위치한 숨겨진 방. 백호가 문을 열자 생각보다 널찍한 공간에 험악한 인상의 사내 여럿이 있었고, 방 중앙에는 의자에 묶인 채 피 칠갑을 한 어떤 남자가 있었다.
진우는 반갑다는 듯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어이, 잔나비. 오랜만이다.”
“이야, 서진우 살아 있네! 씨발, 몇 년 만이냐?”
“15년. 원숭이 너 이 새끼, 많이 늙었구나.”
“야, 너는 신수가 훤하네. 서울 물은 다르긴 다른가 보네.”
앞니 몇 개가 부러진 건지, 아니면 방 안에 있던 사내들에게 뽑힌 것인지. 바람 새는 발음으로 상체가 피범벅인 잔나비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로 진우에게 반가움을 표했다.
“자식, 소문 들었다. 범일동 촌놈이 이렇게 출세하다니. 지나가다 그냥 봤으면 넌 줄 절대 몰랐을 거야.”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대단하다는 듯 입을 놀리는 잔나비가 우스웠다. 진우는 적대 세력이긴 했지만 한때는 같이 어울리기도 했던 옛 친구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쳐 주었다.
어차피 곧 있으면 다시 못 볼 사이가 될 텐데 오랜만에 부산에서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기면서 말이다.
“결혼은 했니?”
“아니, 근데 애는 둘이나 있네. 멍청한 년들이 애를 안 지우는 바람에.”
잔나비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꾸하는 말에 진우는 쓰레기 같은 놈을 보며 혀를 찼다.
“그래도 싸지른 놈은 너잖아?”
“귀찮게 됐지. 맨날 돈 달라고 연락 오는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돈이 어딨냐? 어?”
“네가 아는 거 부는 대가로 진수오가 챙겨 준 게 꽤 있잖아?”
“야, 다 털어먹은 지가 언젠데.”
웃기다는 듯 히죽이던 잔나비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맞아, 너 아직도 민희랑 엮여 있다면서? 민희 미용실 친구 중 하나가 첫애 엄마거든… 그래서 뭐 좀 건너 건너 네가 어찌 사는지 듣기는 했지.”
“나도 그래. 민희가 가끔 네 얘기 해줘서 건너 건너 소식 들었어.”
“이야, 역시. 민희 년, 남자 하난 제대로 물었네. 네가 민희 년한테 아직도 의리 지킬 줄 몰랐다. 우리 어릴 때 너 좋다는 년 하나씩 먹어 치울 땐 언제고. 그래도 첫정이 무섭다, 이거지?”
“근데 기석아, 있잖아. 민희한테 들으니 동생이랑 부하들 내 손에 다 죽고 죽은 듯이 사는 것 같아 넌 그냥 냅뒀는데 말이야.”
“…….”
“윤희주 귀신이 밤마다 네 꿈에 나오지 않냐? 난 매일 밤 죽은 네 동생이랑 나머지 떨거지들이 꿈에 나오는데.”
진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죽음의 냄새. 잔나비는 조금씩 몸을 떨면서 새는 발음으로 묻지 않은 말을 술술 불었다.
“진우야… 그 공붓벌레 새끼가 먼저 찾아왔어! 자기 애비 좀 살려 달라고, 돈이 필요하다 했어! 그래서… 그래서!”
“…….”
“믿어 줘, 진우야! 처음에는 진짜 죽일 생각은 없었어! 어디 끌고 가서 반병신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태섭이가, 네가 칼로 얼굴을 그었던 그놈이 차로 치자고 해서…….”
“진수오 회장한테도 그렇게 얘기했어?”
“어, 내가 아는 것까진 말했어. 목숨은 살려 준다고 하니 말할 수밖에 없었어.”
무서운 맹수 앞에서 한 마리 원숭이는 애타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너한테도 다 불게! 다 말할게! 안경잡이 그놈, 태연했어.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고 있는데도… 노란 머리야 워낙 오래전부터 윤희주를 죽이고 싶어 했으니 둘째 치고, 정재민 그 새끼, 진짜 위험한 놈이야! 그러니 제발, 진우야, 옛정을 생각해서 제발…….”
“옛정?”
악귀의 눈을 한 진우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잔나비에게 물었다.
“사고를 우연히 봤다고 준식이 형 아줌마까지 죽였으면서 정을 운운해?”
“아니야! 내가 아니야! 전부 노란 머리 놈이 했어! 진짜야, 제발…….”
“말이 되는 소릴. 네가 노란 머리 지시를 따랐다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살길 찾고자 하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자세를 낮춘 진우가 잔나비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잔나비가 왜 잔나비겠어? 원숭이같이 교활하고 음흉해서 다들 널 잔나비라고 불렀잖아?”
“…….”
“진 회장은 어찌 속여 넘겼는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야. 네 거짓말에 안 속아.”
제 말에 잔나비가 표정이 변하더니, 깔깔깔 웃으며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래, 씨발, 내가 다 시켰다. 됐냐? 그리고 그년! 윤희주 동생 년! 그년 구멍 아작 낼 때…! 어? 흐어! 아아아악!”
진우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백호에게 정중한 말투로 지시를 내렸다.
“저놈 더러운 혀는 뽑아 주시고, 뒷일은 늘 처리하시던 대로 해 주시면 됩니다.”
등 뒤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진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왼쪽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러고는 뒤늦게 백호에게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깜빡했네요. 선물을 좀 보내야겠으니 잘 좀 챙겨 주세요.”
무엇을 챙겨 달라는지 안다는 듯 백호가 어렵지 않은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양자강’이라는 간판이 걸린 중국집의 문을 열었다.
대림동 차이나타운 거리 위에 이질적으로 서 있는 남자의 머리 위로 새까만 하늘에서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희주가 죽던 날처럼, 스산한 바람에 빗방울이 날려 제 몸을 천천히 적셨다.
진우가 조금 멍하게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고개를 들어 달도 별도 없는 하늘을 보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기다리던 요한이 걱정스럽다는 듯 제 머리에 우산을 씌우면서 말했다.
“전무님, 감기 걸려요.”
“이 새끼, 눈치 없는 거로는 세계 1등일 거다.”
진우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팔꿈치로 요한의 복부를 때리며 괜히 화풀이했다.
“가자. 운전이나 해, 인마.”
운전대를 잡은 요한이 진우를 룸미러로 흘깃 보았다. 두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에 가득한 깊은 수심. 시동을 걸고 차를 움직이기 시작한 요한이 묵묵히 할 일을 하고 있을 때, 진우가 입을 열었다.
“미주는 지금 집에 있는 거지?”
“네, 며칠 동안 두문불출이시네요.”
눈을 뜬 진우가 룸미러로 요한을 빤히 보면서 풋- 하고 웃으며 물었다.
“너지? 미주한테 재민이 집 알려 준 거.”
“…….”
“심지어 같이 가 준 놈도 너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요한의 뒷모습에서 이미 답을 얻었다 여긴 진우가 한숨을 푹- 쉬면서 중얼거렸다.
“이젠 너도 알겠지만 절대로 미주, 재민이 만나게 해선 안 돼. 하마터면…….”
차마 재민이 미주를 탐한다는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진우는 말끝을 삼키며 한마디 덧붙인다.
“미주가 너 많이 좋아하고 의지하는 거 안다. 그러니 앞으로도 걔가 나한테 말 못 하는 부분, 좀 귀찮아도 알아서 잘 들어줘.”
여전히 대꾸 없는 요한이었지만 진우는 대답을 들은 것 같아 피곤한 듯 다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집으로 가자.”
요한은 진우의 마음을 다 헤아렸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한남동으로 갈까요?”
제가 생각했던 곳과 같은 장소라, 진우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본다. 재민은 떠났지만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아직 남아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져 예상치 못한 기상에 도로는 막히고 있었다.
요한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눈동자를 오른쪽 위로 슬쩍 움직였다. 룸미러에 비친 눈을 감고 있는 서진우라는 남자. 아마 그는 잠을 자는 게 아니라, 너무나도 지친 마음을 침묵 속에서 달래고 있을 것이다.
목적지까지 향하는 차 안에서 요한은 진우에게 자신만의 위로를 건네 본다. 오래전, 저 역시 그에게 구원받았으니, 누군가 그를 구원해 주길 바라면서.
손을 뻗어 버튼을 몇 번 꾹꾹- 누르니 다행히 제가 좋아하는 라디오 채널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목은 몰라도 도입부만 들으면 누구나 ‘아, 이거 들어 봤는데.’ 할 만한, 사람들이 살면서 한 번쯤 들어 봤을 그 노래.
헨델의 ‘울게 하소서’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전무님, 도착했습니다.”
“아, 그래.”
진우가 차에서 내리자, 요한도 따라 내리며 트렁크에서 우산을 꺼내 건넸다.
“자.”
우산을 받아 든 진우가 비를 피하면서 요한에게 담배를 건넸다. 덩치 커다란 남자 두 명이 우산을 쓰고는 어느 고급 주택단지 초입에 서서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담배를 피웠다.
멀리 불이 켜진 걸 보니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 어느 집을 멀찌감치 서서 보았다. 진우는 그러다 시선을 요한에게 돌려, 그동안 묻지 않았던 일을 처음으로 입에 올렸다.
“너, 그때 미주한테 무슨 생각으로 액자 갖다줬어?”
요한은 별일 아니었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가끔 이런 생각 했었어요. 나한테도 부모님이랑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요.”
“그래, 아무리 사랑하는 남자 옆에 있다 한들 외로운 마음이야 들 수 있겠지.”
“전 이제 엄마, 아버지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나요. 가족이었는데 어떻게 이토록 기억이 희미해질 수 있는지.”
“그래서 미주가 불쌍했어?”
“네, 여동생같이 늘 생각했는데 안 좋은 소식에 마음이 안타까웠어요. 신데렐라가 된다 한들 높은 성 위에서 추억할 가족 하나 없다는 게 너무…….”
자기만의 방식으로 미주를 아껴 주는 요한의 마음이 느껴져 진우는 너무 늦은 인사를 전했다.
“이요한, 고맙다. 정말 고마워. 아마 미주한테 큰 힘이 되었을 거야.”
부끄럽다는 듯 피식- 웃으며 괜히 고개를 돌리는 요한이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야말로 감사해요. 두 번째 인생을 살 기회를 주셔서 말입니다.”
“야, 이거 무슨 분위기냐. 낯간지럽네, 씨발.”
어떤 의미로는 재민보다 훨씬 저를 깊게 이해하고 있는 듯한 요한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괜히 그의 명치를 치면서 진우는 쑥스러움을 감추며 말했다.
“앞으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 모개, 부탁할게.”
진우의 염려와는 다르게 걱정도 태산이라는 듯 요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누굽니까?”
“그래,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니 고맙네.”
빨갛게 익어 가는 담배 연기에 지금쯤 아마 죽었을 잔나비의 기억을 태우던 진우의 눈에 멀리 누군가가 우산을 쓰고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아무리 가늘게 눈을 뜨고 봐도, 눈을 부라리면서 본다 해도, 저 멀리 점처럼 보인다 한들 한눈에 알아볼 사람. 우산을 쓴 미주가 놀란 얼굴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 *
재민의 실체를 알고 난 뒤로, 미주는 불면의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아이를 사산했던 날 이후로 하루라도 편히 잠든 적 없었지만, 상상도 하지 못한 이의 배신에 또 다른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빈집을 지키는 건 이미 미주에게 익숙한 일이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다른 날과 사뭇 느낌이 달랐다.
“연호 씨가 이런 날 봤으면… 실망했겠지.”
또다시 시작된, 음주벽. 최근 몇 년간 일련의 사건 사고와 연호의 구속에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재민의 변심을 알고는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실체를 안 후로 집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던 미주는 초저녁에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게 뉴스를 보다가 깜빡 졸았다.
“미친년, 이 술병 좀 봐.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이러면 안 돼. 또 이런 식으로 살면….”
거실 소파에 기댄 채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눈에 들어오는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는 엉망인 집. 정신 차리고 보니 10년 전 마음을 잡지 못하던 저를 보는 것 같아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지난날의 과오가 반복된다면 저는 여기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단단히 마음먹은 미주가 이를 악물고 악습을 떨쳐 내기 위한, 한 발부터 내디뎠다. 뒹굴고 있는 술병들을 말끔히 치워 내고 그간 엉망이었던 집을 최대한 깨끗이 정리했다.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 길에… 좀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너무 집 안에만 틀어박히면 또다시 생각에 먹히고 말 거야.”
고용인 없이 혼자 살았기에 익숙한 동작으로 두 손 가득 무겁게 채운 봉투를 들고 대문을 나섰다.
“비가 꽤 오네. 좋다. 비 냄새도, 소리도.”
목과 어깨 사이에 우산을 끼우다시피 해 낑낑대며 쓰레기를 버린 후, 이제야 오른손으로 우산을 제대로 잡았다. 어둠 속에서 우산에 맞아 튕기는 후두둑-거리는 빗소리가 경쾌하게 들려 기분이 좋았다.
미주가 익숙한 걸음으로 벌써 8년째 사는 집과 동네를 어슬렁거리듯 돌아다녀 보았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이 골목과 길목을 걸어서 거의 다니지 않으니, 여기 이 땅값 비싼 곳에서 주제넘게 살았어도 이웃 사람 하나 본 적 없네.”
공권력이 암묵적으로 다른 곳보다 훨씬 철저하게 보호해 주는 이 빌리지에서는 늦은 시간 여자 하나가 우산을 쓰고 돌아다녀도 위험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성벽처럼 높게 드리워진 어디의 회장님, 톱스타의 집들을 보며 어린 시절 매축지 그 좁은 골목 사이사이를 뛰어놀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빌리지 초입까지 내려왔을 때, 빗방울은 점점 더 거세졌다.
“조금 더 내려가면 편의점이 있으니깐 오랜만에 군것질거리나 잔뜩 사서 돌아가자.”
겉모습은 아무리 사모님 소리를 듣는 여자가 되었다고 한들, 알맹이는 여전히 부산 범일동 한복집 할매 손녀였다.
“수고하세요.”
좀 더 시내 쪽으로 내려간 미주는 편의점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봉지를 손에 들고는 다시 올라가야 할 오르막길 앞에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비 오면 거긴 많이 습할 건데… 아무리 구치소 안에서 황제 대접을 받는다 한들 밖보다 나을 리 없으니깐.’
연호를 생각하니 미주는 가슴이 아렸다. 재민의 배신을 알았다 해도 저는 여기 이 큰 집에서 팔자 좋게 술이나 퍼마시다가 또 이렇게 자유롭게 거리를 걷고 있지 않은가.
‘나는 지금 집 안에 처박혀서 그저 누군가가, 진우 오빠가 그를 도와주길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잖아.’
천천히 한 걸음씩 걸으며 미주는 재민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진짜 같이 자면 연호 씨를 풀어 줄 수 있는 걸까? 아니야, 그건 그저 날 놀리기 위해서 한 말이겠지….’
재민이 심은 위험한 거래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우려고 하지만, 점점 더 그것은 뿌리를 내리고 미주의 무의식을 잠식하고 있었다.
지금 연호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면회를 가 그가 잘 있는지 얼굴만 보고 오는 것 말고는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오빠가 회사 일을 배우라고 한 걸까? 다음에도 또 서로한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데, 내가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누군가와 거래하고 협상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 된다면…….”
뱅뱅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속에서 스스로 답을 내어놓지 못해 답답했다. 차라리 더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결국 끊었다고 여겼던 술에 손대고 말았는데.
“그렇다고 진우 오빠한테 정재민이 같이 자면 없던 일로 만들어 준다고 한 걸 말할 수도 없고…….”
고민은 깊고, 근심은 어두웠다. 수심 어린 얼굴로 미주가 고개를 숙인 채 우산을 꼭 쥐고 걷고 있을 때 익숙한 그림자가 빌리지 초입 근처에 있었다.
“어? 오빠? 여긴 웬일이야?”
“그러는 너는? 집에 있는 거 아니었어? 너 왜 막 걸어 다녀?”
서로가 놀란 얼굴로 어리둥절하게 묻고 있었다.
“왜? 걸으면 안 돼? 그냥… 비도 오고 해서 요 밑의 편의점 갔다 왔는데?”
이상한 질문을 한다는 듯 미주가 갸웃거리면서 대답하자 진우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투덜거렸다.
“야, 무슨 재벌 사모가 편의점이야? 차 타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뭔 소리야. 재벌은 사람이 아닌가? 그리고 난 뭐, 그냥 얼떨결에 이렇게 된 거지 내가 이런 위치라고 해야 하나? 이런 걸 바란 적도 없는데…….”
미주는 도무지 진우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요한을 보면서 눈짓했다. 이 인간 뜬금없이 왜 여기 있냐는 미주의 눈 속에 담긴 말이 느껴져 요한은 피식- 웃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쩌다 그냥, 미주 씨 집 근처로 오게 돼서 집에 있나 싶어서 여기서 그냥 뭐,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었어요.”
요한의 거짓말을 완전히 믿지 않는 얼굴로 미주는 진우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올 거면 전화를 하든지. 빗속에서 청승 떨고 계셨네.”
“야 인마, 너는. 말할 때 술 냄새 나거든? 술 깨려고 온 동네 휘젓고 다녔으면서, 쯧쯧.”
“아… 저는 이만 차에서 전무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미주 씨, 다음에 봐요.”
진우와 미주가 늘 그렇듯 또 티격태격하기 시작하자 자리를 지키는 게 눈치 없어 보일 것 같아 요한은 미주에게 인사했다.
“그래요, 다음에 봐요.”
“요한쓰, 미주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갈게. 시동 걸어 놔.”
“아, 됐어. 무슨.”
미주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진우를 향해 빨리 가라고 손짓했지만, 그는 웃으면서 미주를 괴롭혔다.
“집에서 혼자 고만 마셔라. 연호 나와서 너 다시 술 마시는 거 알면 개지랄할 건데.”
“이제 안 마셔! 고자질하기만 해 봐! 겨우 화해했는데.”
미주가 진우를 째려보다가 휙-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올라가는 미주의 뒤를 진우가 따라갔다.
아무도 없는 골목을 나란히 걷고 있는 우산 두 개. 평생을 그래 왔듯이 미주의 뒤를 진우가 지켜 주면서, 아무런 대화도 없이 두 사람은 묵묵히 걸었다.
“여기야, 우리 집. 아니, 엄밀히 말하면 차연호 집에 내가 얹혀사는 거라 할 수 있겠지만.”
조금 민망한 얼굴을 한 미주가 저를 깎아내리는 듯 말하자 진우는 그런 게 어딨냐는 듯 되려 혼냈다.
“연호가 너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 알면 슬퍼할 거야. 어깨 펴고 당당하게, 응?”
어깨를 툭툭 치는 진우의 응원에 미주가 못 말린다는 듯 웃다가 어느 한 점에서 시선이 멈췄다.
밤이기도 했고, 비가 내리는 탓에 우산을 쓰고 있어 가로등 불빛이 그리 환히 둘을 비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미주는 진우의 소맷단 끝자락에 튀어 있는 핏방울을 보았다.
“오빠, 아직도 싸우고 다녀?”
미주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와이셔츠 소매 끝에 묻은 잔나비의 혈흔이 보였다.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들킨 것 같아 진우가 순간 표정이 일그러질 때, 미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핏방울을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나이 좀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기는 싸움이라면 실컷 해. 상대를 박살 내 죽여버려.”
조용하지만 묵직하고 잔인한 미주의 말이 진우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우리가 쌈박질하고 다니는 거 너, 싫어했잖아?”
“맞아, 그렇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오빠가 진짜 센 사람이라서, 아무도 못 건드리는 남자라서 자랑스럽긴 했어.”
“역시 깡패 동생답다. 너도 알맹이는 완전히 깡패, 양아치에 마피아인 거 알지?”
“왜, 야쿠자는 안 나와?”
진우는 웃으면서 미주의 등을 툭- 쳤다.
“들어가라. 쉬어. 나도 가 볼게.”
“그래, 조심해서 가.”
손을 흔든 미주가 우산을 접으면서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이-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지만 어쩐지 들어가지 않고 몸을 돌려 진우를 보았다.
“오빠, 오늘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오랜만에 보는 화장기 하나 없는 말간 미주에게서 그 시절 품에서 잠들던 꼬맹이가 보였다. 진우는 장난스럽게 미주의 볼을 톡- 하니 쳤다. 그녀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겠다는 듯 등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몇 걸음 걸었을까? 뒤에서 미주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재민 오빠가…….”
차마 그 뒷말을 하지 못하는 마음을 알기에 입술을 깨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래, 괜찮아. 내가 있잖아.”
애써 눈물을 삼키는 붉은 눈의 미주를 진우는 팔을 뻗어 조용히 안아 주었다.
“나빴어. 너무 나빴어. 재민 오빠가 연호 씨한테 그럴 줄…….”
품에서 재민을 향한 분노를 쏟아 내는 미주를 보며 진우는 그저 토닥토닥 달래 본다.
“나만 믿어. 그리고 네 남편을 믿고.”
“오빠도 나 믿어. 난 절대 배신 안 해.”
웃고 있지만, 진우 역시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처음엔 넷이다가 하나를 잃고 셋이 되어 삼각형으로 서로를 지탱해 주고 있다, 믿었는데.
“그래, 제발 좀 그렇게 해 줘. 너까지 그러면 나도 못 견뎌.”
“알았어, 오빠는 내가 지켜 줄게. 나만 딱 믿어.”
어쩌면 진우도 처음 본 것 같았다. 저만큼이나 굴곡진 삶 속에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시련을 견딘 미주는 더는 제가 알던 꼬맹이가 아니었다.
풍파 속에서 더욱 저를 담금질해 다이아몬드보다 더 단단한 마음을 지닌 미주.
이제는 누군가가 지켜 줘야 할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소나무처럼 의연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진우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