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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37/53)

35.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 * *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여. 나 때문에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면회 온 미주를 보면서 연호의 표정이 착잡해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상황에 나 혼자 잘 먹고 잘 잘 순 없으니 요새 조금 힘들긴 해요.”

처음 면회 왔을 때만 해도 민망할 정도로 미주가 너무 울어서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했는데. 조금 충혈된 눈으로 미주가 최대한 얼굴에 드리운 그늘을 걷어 내면서 억지로 밝게 대답했다.

“난 당신이 더 걱정이에요.”

“걱정하지 마. 살면서 한 번쯤 이런 순간을 겪을 수 있다 생각한 적 있어서 그리 나쁘지는 않아.”

“돌아가신 전 회장님, 아니지. 이제는 전전 회장님이신 아버님께서 예전에 고초를 겪으셨다고.”

“정치 자금 건넨 것 때문에 고생하셨지. 뭐, 우리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억울한 거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불법적으로 로비를 한 거니, 아버지가 잘못한 거겠지?”

세상에선 모두 경영권 승계를 위해 주가 조작과 분식 회계를 지시한 연호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간 미디어에 노출되었던 연호는 소탈하고 검소하며 겸손한 젊은 재벌 후계자로 알려져 있었다.

거기에 잘생긴 재벌 3세가 평범한 평사원과 사내 연애로 결혼했다는, 신데렐라 속 왕자님 스토리에 대중은 열광하며 부러워했으니깐.

물론 신데렐라가 된 평범한 여자가 재벌가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부부 사이가 소원해져 별거하고 있다는 소문이 왕국 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지만 말이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왕자님이 왕관을 쓰기 위해 뒤에서 범죄를 지시한 나쁜 놈이 되었으니 말이다. 대중의 실망도 그만큼 매우 커서 연일 미디어에서 보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주는 그가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질렀든 상관없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콧대 높았던 남자가, 세상에, 하루아침에 구치소에 수감돼 자유를 뺏긴 모습으로 앞에 앉아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구구절절한 부부간의 사정이겠지만, 대중의 욕을 먹는다 한들 미주는 남편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아내였다.

“진우 오빠가 지금 애쓰고 있는 것 같아요. 내게 말은 안 하지만… 여기저기 사람들도 많이 만나는 것 같고.”

“알아, 서 전무가 내 쪽 사람들이랑 자기 사람들 모두 합쳐서 지금 날 빼낼 작전 들어간 거.”

그들에겐 비극인 이 사태에 웃는 연호의 얼굴이 그리 나쁘지 않아 미주도 웃으면서 대꾸했다.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오빠한테 톡톡하게 갚아요. 우리 오빠가 셈에 빠른데,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갈 거야.”

“시끄러, 이런 말 할 거면 자주 오지 마. 어째 안에 있는 나보다 밖에 있는 서 전무 고생하는 거만 종알종알 떠들어 대는지.”

“참 나, 나중에 와 달라고 울지나 마요.”

눈을 흘기는 미주가 오히려 다행이라 연호는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제가 없는 곳에서 걱정하고 있을 미주가 염려되지만, 그녀 특유의 강한 면도 잘 알았다.

“내가 매일매일 당신 생각만 하는 건 아니에요. 자만하지 마요.”

“그래, 오히려 그게 낫다는 걸 이젠 알아. 예전에는 늘 언제나 나만 생각해 주길 바랐거든.”

연호의 눈빛에서 이제는 편안함이 느껴져 미주도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그를 보았다.

아픔을 함께 겪기도 했고, 너무나도 작은 오해로 서로에게 해선 안 될 말을 주고받았던 적도 있었다. 같이 있기 싫을 정도로 그가 미웠던 시간도, 모든 비극이 연호 때문이다 원망만 하면서 저만 가련한 척하며 미칠 것 같았던 세월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죄를 짓게 된 순간에서야 느껴진 진심 앞에서 켜켜이 쌓아 온 증오도 미움도 모두 녹아내리고 말았다.

지난 일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하지만 같은 과오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다 마음먹는 순간 다시 벌어진 위기의 상황에서 연호와 미주는 서로에게 상냥해지고 있었다.

“근데 또 서운하기는 해. 그래도 가끔은 내 생각 좀 해 줘, 미주야.”

“알았어요. 가끔은 생각해 줄 테니 건강 잘 챙겨요. 벌써 면회 시간 끝났어.”

짧은 해후의 순간을 뒤로할 때 연호가 이름을 불렀다.

“미주야.”

“응?”

“기억해. 내부의 적이 가장 무서운 거야. 나도 방심했고.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 뜻이 이렇게 와닿았던 적이 없어.”

“…….”

“또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네가 싫어하는 거 알지만…….”

미주는 웃으면서 연호의 뜻이 뭔지 안다는 듯 대답했다.

“걱정 마요. 어차피 요새 재민 오빠 너무 바빠서 연락도 잘 안 되는데, 뭘.”

아직 진우가 미주에게 털어놓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재민을 질투한다는 표정으로 저를 놀리듯 보는 미주의 얼굴이 잔잔해 보였다. 차라리 그녀는 진실을 몰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연호는 작별을 고했다.

* * *

“그래, 잘 먹어야지. 지금 상황이 어수선하다고 막 굶고 고민하고 잠 안 자고 그런다 한들 당장 연호가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진우의 말에 미주는 눈을 살짝 흘기면서 앞에 놓인 접시에 담긴 음식을 집어 먹었다. 아침에 진우가 간만에 둘이서 조용히 밥이나 먹자는 연락에 지금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오빠, 근데 왜 재민 오빠는 안 불렀어? 보통 작정하고 만날 때는 셋이 항상 봤었는데.”

입안에 든 음식을 오물거리면서 미주가 무심히 묻는 말에 진우는 태연한 듯 되려 물었다.

“네가 연락해도 되잖아? 난 알다시피 요새 워낙 정신이 없다만, 너는 나보다는 좀 나은 편이면서.”

“그러게. 나는 왜 먼저 연락할 생각을 못 했을까? 완전 바보 다 됐어.”

차마 진우에게 연호가 자꾸만 재민을 만나지 말라는 말을 한다 말할 수 없었다. 이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연호가 여전히 여쭙잖은 질투를 한다고 진우가 느낄 수 있다 여겼다.

한편으로는 자꾸만 재민을 경계하는 연호의 태도에서 뭔가 수상쩍음을 느껴 솔직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 일상처럼 안부를 묻는 것도 왠지 할 수 없었다. 그저 진우의 물음에 자학하면서 웃음으로 넘겼다.

“다행히 그 일이 드러날 것 같진 않아. 다만 지금 받는 혐의에 대해서 어떻게든 무혐의로 빼내려고 하다 보니 조금 쉽지 않네.”

“그래. 사실은 있잖아. 내가 가만히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 말이야.”

계속 말하라는 듯 진우가 잔을 채웠다. 미주는 한 모금 입가심하듯 와인을 마시고는 말을 이어 갔다.

“오빠 말대로 아직 형이 확정된 것도 아니고, 구치소에서 뭔 일이 생길 리도 없고.”

“그래서?”

진우도 잔을 들어 와인을 소리 내 마시면서 미주의 말을 경청했다.

“또 오빠가 빨리 나올 수 있게 도와줄 건데 혼자서 땅굴 파고 들어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이제 좀 재벌 사모님 같은 면모가 보이는 것 같네.”

싱긋이 웃는 진우를 보며 미주가 말도 말라는 듯 인상을 쓰면서 포크로 음식을 퍽- 하고 세게 찍고는 입으로 넣었다.

“사모는 무슨. 팔자에도 없는 옥바라지 하게 생겼어. 황당한 건 그렇게 싸움질하고 다녔던 희주 오빠는 유치장은 갔어도 막상 구치소는 들어간 적 없는데, 세상 고상한 척 다하는 차연호가 들어가다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치?”

미주가 음식을 씹으면서 남 일 말하듯 이야기하자 진우가 피식거리면서 잔을 테이블에 두며 말했다.

“모개야, 너 어쩐지 이 부분에서 힘줘서 얘기했어. ‘오빠가 빨리 나올 수 있게 도와줄 건데’라고, 엉?”

“맞잖아. 안 도와줄 거야? 응? 진짜? 매젠데?”

눈을 크게 뜨고 째려보는 미주가 그저 우스워 진우가 장난스레 통탄하고 있었다.

“매제는 무슨. 차연호 하는 꼬라지 봐서는 딱 모르는 척하고 싶은데… 윤모개 체면 봐서 돕는 거야, 어?”

“네, 네, 체면 고오맙습니다아.”

“말하는 꼬라지하고는. 나잇값 좀 해라, 똥개야.”

“알았어, 이 은혜는 평생 안 잊고 꼭 갚겠사옵니다, 서진우 전무님.”

“네 몫까지 연호가 갚으라고 해.”

미주가 웃으면서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진우가 잠시 손을 움직여 음식을 입에 넣고는 조용히 씹다가 삼키면서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우리 중에서 배신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 바이오 건은 어찌 되든 해결될 거야. 아무리 굴비 엮듯이 차연호를 잡아넣겠다고 죄목을 붙여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연호야. 그리 쉽게 못 건드려.”

“왕년에 내가 아직 하수보다 못했던 시절 차연희를 따라다니면서 풍월을 읊은 건 있어. 검찰에도 경찰에도 차현 장학금 안 받은 사람, 거의 없다고 하더라.”

이럴 때는 또 냉정한 얼굴을 하는 미주가 저를 빤히 보자 진우도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리면서 대꾸했다.

“아까 내가 말했잖아? 우리 모개, 이제 재벌 사모님 태가 난다고.”

“지금 우리가 하는 이야기, 남들이 들었으면 돈과 권력으로 죄를 짓고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고 비난을, 아니 비난 정도가 아니라 하늘 부끄러운 줄 모른다 손가락질하겠지?”

조금 착잡해 보이는 미주에게 진우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미주야. 난 사실 네가 회사 일 좀 더 해 봤으면 했어. 8년 전인가, 7년 전인가? 그때 네가 유산하고 공식적으로는 휴직하고 칩거한다는 걸 알았을 때, 너에 대한 미움을 떠나서 조금 아쉽기도 했거든.”

“왜? 내가 복사를 잘해서 칭찬이 자자했어?”

“비슷해. 전략실에서 네가 일했던 1년 동안 큰 프로젝트를 해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꼼꼼하게 일 처리하고 의의로 대범한 면이 있다는 평가가 사내에 돌았었거든.”

이젠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있는 커리어 우먼을 꿈꿨던 지난 시간이 미주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소문이라. 나도 알아. 혼인신고 했다는 기사 떴을 때 아침에 출근하니깐 전략실 선배들이 벙찐 표정으로 날 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어제까지 혼나기도 했던 일개 사원이 하루아침에 재벌가 며느리라니. 시트콤도 그런 시트콤이 없었을 거야.”

마주 보는 미소 속에서 진우는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을 꺼내 보였다.

“지금이 기회일 것 같아. 네가 다시 회사로 복귀하는 거.”

“…….”

미주는 눈을 깜빡이면서 뜻밖의 제안에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진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렇다고 연호 공석에 네가 들어가라는 건 아니야. 어디 적절하게 사외 이사 같은 명함 하나 대충 파도 되고, 원래 네 자리였던 전략실로 복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거든.”

“…내가 본사에 나타나는 순간 집중될 이목을 솔직히 감당할 자신 없어.”

“당장 나오라는 말은 아니야. 네가 언제까지고 차연호 뒤에서 살지 말았으면 해서 한 말이었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빈 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때, 좀 더 확고한 말투로 진우가 말했다.

“배워, 회사 일. 그리고 위로 올라가. 가족들끼리 다 해 먹는 거 차현만 유난인 것도 아니야. 재벌들, 다들 그렇게 해.”

“…하지만, 오빠. 그 가족인 사람들은 보통 재벌의 아들딸이거나, 똑같은 재벌가에서 온 며느리나 사위야. 못해도 대대로 의사 집안, 교수 집안, 그런 사람인데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닐 듯싶은데…….”

“그러니깐 지금부터 치열하게 고민해 봐.”

“응, 알았어. 고마워, 오빠.”

연호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고 잃었던 시간 동안 저는 윤미주라는 인간이 아니라 차연호의 아내로 살았었다. 그리고 복수를 이루고 지금 진우 앞에 앉아 있는 현재의 저는 인간성을 버린 죄인이자 범죄자였고 살인자라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미주는 이상하게 마음이 말캉거려 눈물이 아른거렸다. 진우도 제 마음을 느꼈는지 손을 뻗어 손등을 토닥거리며 더없이 믿음직스럽게 말해 주었다.

“미주야, 네가 지키고 싶은 거, 모두 다 내가 지켜 줄게.”

“…나도 마찬가지야.”

“이제 세상에서 내가 믿는 건 너 하나뿐이니깐.”

대답 대신 몸을 숙이며 손을 뻗었다. 제 작은 손이 진우의 투박하고 큰 손을 다정하게 꼭 쥐었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들. 잠시 말없이 서로를 다독이던 두 사람의 따뜻한 침묵을 진우가 먼저 깼다.

“밥 다 먹었으니 커피나 한잔 마시고 헤어지자.”

“아, 술이 더 좋은데.”

“아서라, 이젠 다 알어. 너 술 마시지 마.”

“흥, 됐어.”

미주가 눈을 흘기고 잡고 있던 진우의 손을 찰싹- 때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자는 듯 밖을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가 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는데 거기로 가자, 오빠.”

웬일로 미주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온 진우가 높은 천장과 아름다운 조명등으로 인테리어된 도심 한복판의 한적한 카페 테라스에 조용히 앉았다.

“와인은 재민 오빠지만 커피는 윤미준 거 알지? 내가 알아서 시켜 줄 테니 얌전히 딱 있어.”

“그래, 그냥 아무거나…….”

제 의사는 깡그리 무시하면서 미주가 주문해 온 뭔가 달콤한 커피.

“연유 커피라고 요새 유행하는 거야.”

“너무 단데?”

“우리 인생이 쓰니깐 이렇게라도 희석시키면서 좀 살자, 오빠.”

진우가 피식거리자 미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그럼 이제 말해 봐, 오늘 나 보자고 한 이유.”

잠시 멈칫한 진우가 무슨 말이냐는 듯 잔을 들었지만, 미주는 다 안다는 듯 말했다.

“그냥 밥 먹자고 불러낸 거 아닌 거 다 알아. 그리고 남편 일 이야기하려고 불러낸 것도 아닌 거 알고. 다시 직장 생활 해 보라 잔소리하려는 것도 아닌 거 다 알아.”

“…맞잖아, 내 말. 너 무서운 재벌 사모님 다 됐다고.”

소리 없는 웃음 속에서 진우가 다리를 꼬며 미주를 지그시 보면서 대꾸했다.

“오늘 오빠 처음 딱 보는데 이미 얼굴에 다 쓰여 있더라. 할 말 있다고. 근데 계속 망설이는 것 같아 나도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예전엔 술 없이 대화가 안 됐던 적이 있었는데 이젠 커피 한잔하면서 말하는 법을 배웠어.”

“차연호가 좋은 거 가르쳐 줬네.”

“그래, 좋은 면도 많아, 그 사람. 물론 베이스는 나쁜 놈이지만.”

저를 따라 웃는 미주를 보면서 진우가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허락을 구했다.

“담배 한 대 피워도 되지?”

“그럴까 봐 일부러 테라스로 자리 잡았잖아.”

“모개 너, 눈치가 어마어마해졌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 후 입에 문 담배를 깊게 빨던 진우가 쉽사리 말을 하지 못했다. 한 대를 다 태우고 두 번째 개비를 입에 물고서야 겨우 말을 꺼냈다.

“미주야, 놀라지 마.”

“아직도 놀랄 게 남아 있어?”

기도 안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은 미주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진우가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희주 형, 사고 아니었어.”

“…….”

“충무동의 잔나비가 형을 죽였어.”

“…날 윤간했던 놈들이 그랬다, 그 말이지?”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한 미주가 오히려 무서운 진우는 침착한 그녀를 보면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기억하고 싶지 않겠지만 노랑머리 놈은 행동 대장이었고, 얼굴에 칼 맞은 흉터가 있던 놈이 잔나비파 이인자였어. 그리고… 눈이 커서 지들 사이에서는 왕방울이라고 불렸던 놈이 잔나비 친동생이었거든.”

“…그 잔나비라는 놈은 아직 살아 있어?”

고개를 끄덕이는 진우를 보면서 미주는 격양되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물었다.

“셋 중에 누가 우리 오빠를 차로 친 거지?”

“…운전은 흉터 있던 새끼가 했어.”

“잘 죽였어. 고마워, 오빠. 죽어 마땅한 새끼들이었어.”

눈물을 삼킨 미주가 애써 꾹꾹 눌러 담는 해묵은 분노에 진우는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다가 말을 뱉어냈다.

“그런데, 놈들이 뺑소니로 위장했던 순간 한 사람이 더 있었어.”

“…뭐?”

순간 진우는 망설였다. 미주에게 그곳에 재민이 있었고, 가장 믿었던 가족과 다름없었던 그가 사실은 지독할 정도로 그들을 속인 배신자라는 걸 말해야 할지 말이다.

“…그게, 미주야.”

아직 진우도 재민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마음이 빙글빙글 돌며 어지러웠다.

“노랑머리도 거기 있었구나. 그치?”

고요하게 가라앉은 표정의 미주에게 아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이해해. 그놈들을 입에 올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가 괴로울 거라 오빠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그 마음, 충분히 고마워.”

“그래. 이해해 줘서 고맙다.”

애써 웃어 보려는 미주에게 여전히 드리워진 어둠에 삼켜졌던 그날의 악몽.

아이를 잃어 반쯤 미친 적 있던 그녀에게 또다시 충격을 줘야만 하는 걸까? 진 회장을 뜻하지 않게 죽이면서 매일 죄의식에 괴로워하는 미주에게 굳이 밝혀야만 하는 일일까?

희주를 간접적으로 죽인 범인을 지금 알린다면 미주가 버텨 낼 수 없을 것 같아, 진우는 애써 비밀을 삼켰다. 차라리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면 미주에게는 영원히 알리지 않은 채 더는 나쁜 기억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데려다줄게. 커피 마저 마시고 일어나자. 네 말대로 차연호 빼낼 계략을 꾸미려면 잠이라도 좀 자야 하지 않겠어?”

미주의 집으로 돌아가는 진우의 차는 그들과 가장 가까운 요한이 운전했다. 피곤했는지 미주도 진우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 있는 침묵 속에서 각자 뭔가 생각에 잠겨 보일 때였다.

“오빠, 근데 아까 했던 말…….”

“…응?”

한 템포 박자를 쉬면서 눈동자를 굴리던 미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진짜 도와줘야 해. 차연호 부회장님 빼내 줘.”

“야, 몇 번째 같은 말이냐? 어? 귀딱지 앉겠다.”

진우가 더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질색하지만, 미주는 집요하게 같은 말을 반복하며 그를 괴롭혔다.

“남편 나올 때까지 괴롭힐 거야. 나 때문에 귀딱지 말고 귀에서 피 나올 때까지 계속-”

“아휴, 이 또라이.”

진우가 검지를 관자놀이 옆에 빙빙 돌리며 짜증 내자, 째려보는 미주의 입이 잔뜩 튀어나왔다.

“내가 또라이면 오빠는… 아효! 내가 말을 만다, 어?”

“이게, 쪼끄만 게 계속!”

두 사람은 알까? 나이도 이제 먹을 만큼 먹은 둘이 투닥거리는 걸 지켜보는 요한의 눈에는 둘 다 똑같이 철없이 보인다는 걸 말이다.

“아씨, 몰라! 나 간다, 오빠. 연락할게.”

“윤모개, 문 세게 닫지 마! 비싼 차거든!”

미주가 보란 듯이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자 진우의 열 받은 목소리가 자동차를 넘어 들렸다. 그의 노성이 안 들린다는 듯 재빨리 집으로 들어간 미주는 현관문 앞에 서서 조금 전 진우와 싸울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지었다.

사실 차 안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다.

“어째서 오빠도 비슷한 말을 하는 거야?”

이제 세상에서 믿는 건 저 하나뿐이라는 진우와, 가능하면 재민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연호. 두 사람 모두 하나같이 재민을 경계하는 듯이 의미심장한 뜻을 남겼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연호 씨는 그렇다 치더라도 진우 오빠까지 그러다니…….”

제가 모르는 곳에서 남자들의 싸움이라도 벌어진 걸까? 친형제처럼 지냈던 진우와 재민이 뭔가에 사이가 틀어져 조금씩 멀어지는 걸까? 재민에 대한 연호의 질투는 이미 알고 있는 거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찝찝했다. 한여름 땀을 뻘뻘 흘렸지만 샤워를 할 수 없을 때처럼, 끈적하고 습습한 불쾌한 예감.

“하필이면 재민 오빠가 연락이 잘 안 되는 바람에 괜히 나까지 좀 그래지잖아.”

연호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진우를 만나기 위해 공항에서 시간을 보낼 때, 재민이 전화를 받지 않아 메시지를 보냈었는데. 다음 날이 되어서야 회신된 메시지는 너무 사무적이었다.

[네 남편 문제로 나도 바빠. 나중에 정리되면 연락할게.]

그 뒤로 지금까지 재민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몇 번이나 먼저 연락했지만 소위 말하는 읽씹을 당했다 생각해 더는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진우가 수습을 위해 저리 바쁜 걸 보면 재민 역시 바쁠 테니 제가 사사로이 귀찮게 자꾸 연락하는 게 미안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면회 갈 때마다 연호가 꼭 마지막에 남기는 ‘재민을 피하라’는 말을 한 귀로 흘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오늘 진우마저 재민을 배제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으니, 미주도 뭔가 심상치 않게 상황이 돌아감을 직감하고 있었다.

‘설마… 재민 오빠가? 아니야,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지 말자.’

내부의 적.

최근 면회 갔을 때, 연호가 농담처럼 흘렸던 말에 대꾸할 수 없었던 건 말이다. 저까지 바깥일에 휘말리는 걸 연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레짐작했기에 입을 다물었다.

3년 전, 진우와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그를 통해 들은 바로는 말이다. 검찰 내부에 차현을 주시하는 세력들이 있다고 했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걱정돼. 진 회장을 죽인 게 결국 밝혀질까 봐.”

만에 하나 비밀이 밝혀진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었고, 제가 전부 안고 가려고 했던 죄였다.

복수를 끝내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이미 어둠의 씨앗이 제 안에 뿌리를 내려 싹을 틔웠기에 점점 나락으로 빠져 늪 속으로 잠식되어 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깐.

“더는 생각하지 말자. 지금 내가 머리를 싸맨들 남자들이 숨기는 게 있다면 혼자선 이 퍼즐을 맞출 수 없어.”

하지만 머릿속이 비워지지 않았다. 밤새도록 제대로 자지 못해 침대에서 뒤척이면서 계속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눈앞에 둥둥 떠다니는, 진실을 유추해 낼 수 있는 몇 가지 키워드들.

‘……설마.’

새벽녘쯤 돼서야 깜빡 잠이 들어 겨우 눈을 붙였다 떴을 때, 미주는 핸드폰을 쥐고는 요한에게 조심스럽게 연락했다.

[요한 씨, 지금 통화될까요?]

메시지를 보내고 초조하게 거실을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때, 액정에 알림이 떴다.

[네, 가능해요. 제가 전화할까요?]

[혹시 지금 옆에 진우 오빠나 다른 사람이 있으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통화했으면 해요.]

살짝 뜸을 들이고 돌아오는 회신에 미주는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당장은 옆에 전무님이 계셔서 어려울 듯하고, 급한 게 아니라면 점심시간에 제가 핑계 대고 자리 비우고 전화할게요. 아, 우리 지금 연락 주고받는 게 비밀인 거 아니깐 걱정 마요.]

오래 알고 지낸 보람은 있었다. 눈치 빠른 요한 덕분에 당장은 이 일이 진우나 다른 이의 귀에 들어갈 일 없을 것 같아 안심해 보면서.

“점심시간에 연락 준다고 했으니 나도 우선 뭐라도 좀 먹자. 나중에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깐.”

빵을 겨우 몇 입 욱여넣으며 간신히 허기를 채우고 있을 때였다. 기다렸던 벨 소리에 미주가 한걸음에 핸드폰을 쥐고는 수신자를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요한 씨,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뭐든 괜찮으니 편하게 말해요. 전무님께 말 못 할 사정이라 저한테 연락한 거 아니깐, 제가 처리할 수 있는 문제면 도와드릴게요.’

친구처럼 편안하면서도 진우나 재민과는 조금 다른 든든함이 있는 요한의 말에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어떤 사람의 주소지가 궁금해요. 그러니깐 진짜 사는 집요. 서류상으로 올려놓은 거 말고, 실제로 거주하는 곳 말이에요.”

‘아, 그런 건 어렵지 않습니다. 저희가 확보한 자료는 없더라도 경찰 쪽 우리 사람들한테 부탁하면 되니…….’

미주가 부탁하는 이유를 요한은 잘 알았다. 진우가 알면 안 되는 일이거나 알게 된다면 미주를 뜯어말릴 일이거나.

하지만 제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잘 알았다. 그녀 곁의 세 남자 외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저이기에 분명 고민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을 테니 말이다.

‘누군지 알려 주면 최대한 빨리 조회해서 보내 드릴게요.’

잠시 머뭇거리던 미주가 결심한 듯 내뱉은 이름에 요한은 조금 의아함을 가졌지만, 이유가 뭐냐 묻진 않았다.

“재민 오빠, 정재민 비서실장님이요.”

전화를 끊은 미주가 자꾸만 헝클어지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요한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러다 시간도 때울 겸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확인해 본 메시지에 기다린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하나는 재민의 집 주소가 적혀 있는 텍스트였고, 뒤이어 요한이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미주 씨, 서 전무님이나 정 실장님 눈 피해서 움직여야 할 겁니다.]

“하아, 잠깐 깜빡했어. 내 주변에 여전히 감시자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놓치다니.”

너무 대놓고 움직였다간 가는 길에 진우에게 덜미를 잡힐 수 있었다. 그리고 재민에게 간다는 걸 당사자가 알면 안 되는데, 그의 눈에 제가 포착될 수 있었다.

“집중하자, 윤미주. 집중력이 흐트러졌어. 2년 동안 목숨 건 일이 성공했다고 바로 이렇게 허술해지면 안 돼.”

그리하여 요한이 도와준 덕분에 미주는 나름대로 위험한 남자들의 눈을 피해 이곳에 지금 서 있었다.

물론 요한이 미리 약을 쳐 놓은 덕분에 입주자 외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미주가 운전하는 차는 순조롭게 주차장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CCTV는 가능하면 안 찍히게 고개를 숙이거나 모자를 쓰세요.”

“네, 여기까지 같이 와 줘서 고마워요.”

“나중에 전무님한테 들키면 꼭, 도와주셔야 합니다. 몸이 좀 안 좋다고 야근도 안 하고 퇴근했는데 여기서 미주 씨랑 있는 거 전무님이 알면 저 죽일지도 몰라요.”

연호의 당부대로 가능하면 재민을 만나지 않아야 했지만, 도무지 연락조차 되지 않으니 한 번은 그를 만나야 할 듯했다.

여기에 오는 건 진우에게도 비밀로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불안해서 요한에게 일종의 보디가드를 부탁했다.

조수석에 앉은 요한과 함께 기다리던 중에 그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퇴근했는데, 방향을 보니 집으로 오는 것 같다 합니다.”

“중간에 딴 곳으로 새진 않겠죠?”

“글쎄요. 저도 정 실장님 동선을 모두 꿰고 있는 건 아니라.”

조금 더 기다리니 요한의 핸드폰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수신됐다.

“자택이 확실합니다. 아마 10분 내로 도착하실 것 같은데…….”

요한의 말을 들은 미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 문을 열었다. 오늘 재민과 할 이야기는 요한이 있는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기에 혼자 그를 만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오빠 집 앞으로 올라가 볼게요. 길어 봤자 30분이니 혹시 제가 30분 내로 내려오지 않거나 연락 두절되면 그때는 꼭 진우 오빠한테 얘기해 주세요.”

“미주 씨, 저도 같이……”

“죄송해요. 이건 오빠랑 저 두 사람 사이의 문제라… 같이 가기가 좀 그래요.”

사적인 일임을 말하자 이해한다는 듯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미주는 차에서 내려 요한이 알아봐 준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요한이 구해 준 마스터 카드를 대어 공용 현관의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깊게 숙인 후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짧은 순간 재민이 사는 곳이 그와 닮았다, 생각해 보면서.

‘오빠는 하늘에 닿기 위해 지금 여기 가장 높은 곳에 사는 거겠지?’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소위 말하는 펜트하우스 앞에 당도했다.

[방금 차가 들어왔습니다. 아마 바로 올라가실 겁니다.]

요한이 재민이 왔음을 알려 주자 긴장감에 점점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놀랍다는 듯 저를 보고 있었다.

“미주야, 여긴 어쩐 일이니?”

“연락이 잘 안 돼서 그냥 무작정 찾아와 봤어. 오빠 사는 곳이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재민에게 꾸며 낸 밝은 목소리를 냈다.

“네 남편 문제로 바쁘다고 했잖아.”

“알아.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싶은데, 오빠 말대로 오빠가 남편 문제로 바쁘니깐 내가 인사할 시간도 주지 않아서 말이지.”

브리프 케이스를 탁- 소리가 나게 바닥에 내려놓은 재민이 안경을 추켜올리면서 미주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런데 미주야, 내가 사는 곳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그냥, 뭐…….”

“내가 여기 사는 거, 아는 사람 정말 몇 없는데.”

“…….”

“심지어 여긴 아무나 못 들어와. 너처럼 여기 살지 않는 사람은 더더욱.”

재민이 생각했던 것과 느낌이 전혀 달랐다. 미주는 긴장 속에서 미리 준비한 멘트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여기에 아는 사람이 살아서 와 봤다는 거짓말은 당연히 안 믿겠지?”

“당연하지. 그건 너무… 일차원적이라 되려 기분 나빠. 거짓말도 좀 정성을 들여 줬으면 하거든.”

재민은 미주의 생각을 다 간파했다는 듯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좋아. 일단 아는 사람이 산다는 거짓말은 그냥 넘어갈게.”

“그래, 좋아.”

한 발자국 더 다가온 재민 덕분에 조금 머쓱해진 미주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난날, 저가 진우에게 버림받았을 때 어쩐지 묘한 느낌을 내던 눈빛과 지금이 닮아 있었다. 연호도 진우도 저런 재민의 또 다른 얼굴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말을 했던 걸까?

“네가 하찮은 거짓말까지 해 볼까 하면서 직접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용건이 대체 뭘까?”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내는 재민 앞에서 미주는 어쩔 수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무겁게 운을 뗐다.

“오빠가 차연호를 검찰에 넘겼어?”

빙빙 돌려서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설마 재민이 모르진 않겠지.

지난 20년 가까이 알아 온 남자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색깔로 입꼬리를 올렸다.

“맞아, 내가 그랬어.”

“왜?”

“처음부터 그 새끼가 눈에 거슬렸거든.”

차라리 부정해 주길 바랐다. 절대 아니라고, 어디서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냐고, 저를 믿어 달라고. 거짓이라도 좋으니 재민에게서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같이 자라 온 깊은 정과 마음을 한순간에 잃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고 여기로 왔으니깐.

아직은 연호와 진우가 느슨하게라도 연대해 확실히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생각했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연호가 재민이 저를 검찰에 팔아넘긴 것에 대해 진우에게 그 죄를 따져 묻는다면 말이다. 겨우 숨기고 봉합해 놓은 비밀과 밀약들이 전부 깨어질 것만 같았다.

지그시 어금니를 깨문 미주가 최대한 간곡하게 저를 낮추면서 재민에게 부탁했다.

“오빠, 부탁이야. 도와줘, 제발… 맞아. 알아, 나도. 차연호가 바이오 건에 대해 완전히 결백하지 못하다는 거 정도는. 하지만 이제 겨우 우리가 모두 웃을 수 있게 됐는데… 정의를 실현하는 것도 좋지만, 날 봐서라도.”

연호의 구명을 위해 애타는 목소리를 내는 미주가 재민은 못마땅했다.

“왜? 너도 사실은 차연호가 가진 힘이 필요해서 놈을 이용하려고 했잖아? 진우 형이 널 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맞아. 부정하지 않겠어.”

“혹시 진짜 진심으로 차연호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런 거 너무 뻔해서 재미없어, 미주야.”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입속에 가득 찬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는 미주에게 재민은 계속 혀를 놀렸다.

“나는 네가 이해가 안 돼. 바보같이 사랑 타령이라니.”

“나는 오빠가 이해가 안 돼.”

“미주야, 지금은 정의 따위를 운운할 때가 아니라 차연호를 물리칠 기회야. 왜 하나같이 그걸 몰라? 상대가 쓰러졌을 때 자근자근 밟아 그 싹까지 죽여야 다시는 나를 위협하지 못한다는 걸.”

“대체 남편이 뭘 얼마나 오빠를 위협했다고 그래?”

되려 반문하는 미주가 정말 모른다는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재민은 재밌다는 듯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진우 형한테는 이렇게 말했어. 나도 권력을 탐해 보고 싶다고.”

“…….”

“난 차연호 그 씹새끼가 널 뺏어 가서 정말 화가 났었어. 나도 사실은 널 사랑하거든. 아니, 사랑했다고 과거형으로 말해야 하나?”

“뭐?”

“아, 아까 했던 말 정정. 나도 사랑 타령하는 병신 새끼니까.”

파르르 떨리는 미주의 눈동자가 갑작스러운 고백 비슷한 말에 당황한 듯 흔들리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근데 있잖아, 미주야. 진우 형도 비슷하게 묻길래 이렇게 대답을 해 줬더니 화를 많이 내더라고. 그래서 며칠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어.”

한 걸음 더 다가온 재민의 숨결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미주는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도 위협적이거나 무섭다고 느껴 본 적 없었던 남자가 처음으로 겁이 났다. 미주는 조금씩 떨리는 무릎을 간신히 진정시켜 보았다.

“널 되찾겠다는 것도, 권력을 갖고 싶다는 것도, 심지어 사랑까지 다 핑계더라고.”

“…….”

“난 차연호가 되고 싶었던 거야. 나는 태어나 보니 시궁창이었는데 걔는 태어나 보니, 뭐랄까? 귀족처럼 태어난 거잖아? 사생아 새끼라 할지라도 귀족의 자식이니까, 아, 요즘 말로 금수저 물고 태어난 거지.”

“오빠, 지금 대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놀랍다는 표정의 미주에게 재민은 처음으로 제가 가진 열등감을 토해 냈다.

“너무 불공평해, 미주야. 세상은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불공정해. 부모 잘 만난 놈과 못 만난 놈은 시작부터 다르다고. 나 같은 놈은 이렇게 죽어라 남의 똥이나 닦아 줘야 겨우 이 정도 집 한 채 마련하고 살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싫었어.”

“…….”

“생각해 봐. 네가 힘 있는 권력자의 딸이었다면 깡패 오빠를 두지도 않았을 테니 윤간당할 일도 없었을 테고.”

윤간이라. 재민이 이렇게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단어를 입에 올려 과거를 상기시켜 주니 미주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차연호를 끌어내리면 오빠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긴 거야? 말도 안 될 소리.”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그건.”

“있잖아, 난 천천히 준비 중이었는데 너희가 너무 빨랐어. 진 회장이 지금 죽으면 안 됐는데, 더 살아 있어야 했는데 왜 쓸데없이 죽이기까지 한 거야?”

“…그 새낀 천벌을 받아 죽은 거야.”

저를 올려다보던 미주가 눈꼬리가 올라가며 냉정한 톤으로 낮게 읊조렸다.

“하늘을 대신해 너희가 벌을 내렸다?”

“그래, 죽어 마땅한 놈이었어.”

“웃기네. 그건 너희 입장이고. 하늘이 정말 진수오가 벌을 받아 마땅한 놈이라 생각할까?”

움찔거리는 미주를 보며 재민은 느긋한 표정으로 슬쩍 미끼를 던졌다.

“물론 너도 나도 하늘이 두렵긴 매한가지겠지.”

“그래, 두려워. 그런데 한편으로는 하나도 두렵지 않아. 천벌, 백번이라도 받을 테니 다시 또 선택하라고 해도 진수오를, 날 윤간한 놈들까지 모두 다 죽여 버릴 거야.”

“멋지다, 우리 미주. 이러니 내가 널 사랑하지.”

더는 재민이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니라는 걸 미주가 판단 내렸을 때였다.8년 전부터 가끔 생각한 의문의 답이 보이는 듯했다.

늘 언제나 감정의 중간 지점에서 이성적인 모습만 보여 주던 그가 ‘차연호의 마음을 사로잡아 보라’며 머리를 굴리던 때 보였던 그 싸늘한 눈빛.

“…이제 알겠어. 하하, 내가 바보였네. 정재민이란 사람이 이토록 간사할 줄 알았다면 오늘 오빠를 찾아오지 않았을 텐데.”

“아니, 잘 찾아왔어. 아까 내가 말했잖아? 널 사랑한다고. 그러니 이왕 여기까지 간 크게 온 거, 기회를 줄까 싶어졌는데.”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재민의 시선이 처음으로 낯 뜨겁게 느껴졌다. 미주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뒀다.

“필요 없어. 역적보다 간신이 나는 더 싫으니까. 이게 진짜 오빠 모습이었구나. 놀랍기 이전에 정말 비열해.”

미주는 화가 잔뜩 난 걸 숨기지 않은 채 격양된 톤으로 재민을 힐난했다. 하지만 그런 제가 그저 귀엽다는 듯 코웃음을 친 재민은 뱀 같은 혀를 놀렸다.

“진우 형이 그러더라, 나한테 병신 새끼라고.”

“틀린 말 하나 없네.”

“근데 병신 새끼한테 진짜 병신이라고 하면 솔직히 빡치거든. 병신인 거 확인 사살 당하는 기분이라.”

재민이 혀로 입술을 쓸면서 하는 말에 미주는 차분히 동요되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서 그 병신 새끼는 지금 진 회장 살인죄를 누구한테 씌울지 요새 고민 중이야. 이미 들어가 있는 연호한테 추가시킬지, 이미 사람 여럿을 죽인 진우 형한테 책임을 지울지, 아니면….”

“…해 봐. 나한테 씌워 봐, 한번. 하나도 겁 안 나.”

뚫어져라 재민을 노려보면서 더 크게 코웃음 쳤다. 그러나 재민은 그게 미주의 블러핑이라는 걸 간파하고 있어, 그녀가 물러선 만큼 다가서면서 다정하게 뇌까렸다.

“그런데 방금 딱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네가 보이니깐 좀 기분이 이상하더라고. 어쩐지 계속 여러 번 말하게 되는데 말이야. 날 찾아온 이상 나는 기회를 주고 싶어졌어.”

“오빠가 칼자루를 쥔 것처럼 말하는 게 얼마나 오만하게 들리는지 알아?”

미주가 지금 돌아가는 판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사이 겁을 상실해 사나워진 건지. 재민은 아쉽다는 듯 손을 뻗어 미주의 뺨을 손등으로 쓸면서 말했다.

“간단해. 내가 지금 이 문을 열 테니 너는 따라 들어오면 돼.”

“이……!”

“예전에 우리, 한번 그럴 뻔했잖아? 그때 못 한 거 계속해 볼까 하는데, 어때?”

말속에 숨겨진 희롱에 미주는 재민의 손을 더럽다는 듯 쳐 내며 분노했다.

“너 같은 놈이랑 잘 바엔 차라리 지금 거리로 나가서 몸을 팔겠어.”

“미주야, 기회를 줄 때 잘 잡아. 나중엔 차연호 살려 달라고 내 앞에서 다리를 벌리는 정도가 아니라 더 끔찍한 짓을 당할 수 있어.”

“남편 건드리면 나도 가만 안 있어. 진우 오빠한테도 마찬가지고.”

부들부들 몸을 떠는 미주를 보며 오래된 갈증 같은 욕구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재민은 갑갑하다는 듯 넥타이를 잡아 느슨하게 풀었다.

“얼마나 많이, 오래 생각했는지 넌 모를 거야. 네가 귀엽게 내 밑에서 울어 줬으면 했는데, 차연호는 많이 봤겠지?”

“닥쳐.”

“그 새끼랑 어디까지 해 봤어? 어떤 거까지 경험해 봤을지 너무 궁금해서 죽을 것 같아, 미주야.”

이제는 오빠가 아니라 욕정에 번들거리는 남자의 눈으로 저를 더럽게 보고 있는 재민을 피해야 함을 직감했다.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버튼을 누를 때였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걱정하지 마. 지금 여기서 널 어떻게 하진 않을 테니.”

“내 핸드백 안에 칼이 있었으면 넌 지금 찔려 죽었어.”

“그래서, 총으로 쏴 죽였니?”

“그래. 너도 죽기 싫으면 더러운 입, 닥쳐.”

저를 보지도 않은 채 죽이겠다 말하는 미주의 손끝이 바르르 떨리는 걸 보니 말이다. 여전히 그녀는 그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우리 미주, 센 척해도 사실은 여린 거 다 알고 있는데.”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탄 미주가 문 앞에서 저를 지그시 보는 재민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앞으로 너 같은 놈 다시 만날 일 없을 거야.”

“그래, 뭐 일단 그렇다고 해 두자.”

서로 노려보는 가운데 서서히 문이 닫혔다. 마음을 놓는 순간, 재민이 손을 뻗어 엘리베이터 문을 잡는 바람에 다시 문이 열렸다. 미주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겨우 속으로 삼켰다.

“근데 진우 형이 너한테 다른 말은 안 했나 보네.”

“……?”

“아, 형은 정말 너한텐 너무 물러. 그리고 정이 너무 많아.”

비릿하게 웃는 재민이 잡고 있던 문을 놓자,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닫혔다. 미주는 수수께끼 같은 재민의 말을 되씹으면서 겨우 지상으로 닿았다.

“하아… 하아…….”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주차장으로 내려와 주차된 차로 걸어갈 때였다. 걱정됐는지 요한이 차에서 내려 목을 길게 빼고는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주 씨, 괜찮아요?”

딱 봐도 뭔가 표정이 심상치 않아 요한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재민과 나눈 대화를 말할 순 없었다.

“네, 괜찮아요. 다만……”

“오늘 일, 그 누구한테도 말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 믿죠?”

“네…… 믿어요.”

원래도 믿음직스러웠던 요한이 오늘따라 태산처럼 굳건해 보였다. 미주는 눈물을 삼키고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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