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적과의 동침
* * *
“이 차장이 운전하고 너흰 다른 차 타고 회사로 들어와.”
구치소를 나온 진우가 평소에 제 차를 운전하는 기사가 아닌, 요한을 콕 짚어 기사 노릇을 요구했다. 그러자 알겠다는 듯 그를 따라온 몇몇 전무실 직원이 진우의 지시에 따랐다.
“…….”
요한은 아무 말 없이 뒷좌석에 앉은 진우를 흘깃 보았다. 옆에 오래 있다 보니 눈치껏 알게 되는 그의 기분을 파악하고 조용히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면회하고 나왔는데 어딘가 모르게 심기가 불편해 보이니 쓸데없이 입을 열어 그를 노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나한테 운전시킨 거 보면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때가 되면 알려 주실 테니 나는 내 일만 열심히 하자.’
요한이 앞만 보면서 차현 그룹 본사로 향하고 있던 무렵, 빨간색 신호등에 차가 멈춰 섰다.
“요한아, 재민이 지금 어디에 있냐?”
처음으로 입을 연 진우가 재민의 행방을 물어 당연한 듯이 요한이 대답했다.
“실장님은 회사로 출근하신 거로 압니다.”
“음.”
어제저녁, 제가 긴급하게 귀국한다는 걸 알렸음에도 지금까지 재민에게서 어떤 연락도 없었다.
진우가 잠시 눈을 감고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때, 어느새 차는 차현 그룹 본사 주차장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요한, 재민이한테 나 왔다고 알리고 지금 주차장에서 올라간다고 해.”
“네, 전무님.”
“내 방으로 오라고, 아니다. 내가 간다고 전해.”
“네, 알겠습니다.”
진우는 엘리베이터에 비친 얼굴에서 최대한 상기된 감정을 빼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저만큼이나 차분한 얼굴의 재민이 반겼다.
“형님, 오전에 부회장님 면회 다녀오셨다면서요? 어제 갑자기 사건 터지는 바람에 저도 정신이 하나 없네요. 오죽했으면 형님한테 직접 연락할 시간이 없었겠습니까?”
변호사답게 저를 변호하는 데 탁월한 재민을 보면서 말이다. 진우 역시 묻고 싶은 말을 삼키며 골치가 아프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마카오에 가자마자 터져서 네가 고생했지. 연호 만나고 왔으니 대충 그림은 나왔고. 내가 수습할 테니 재민이 넌 곧 있을 이사회 준비 계속하고 있어.”
“네, 전 언제나 형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법한 재민의 스쳐 지나가는 말도 이젠 하나하나 범상치 않은 뜻으로 진우의 귀에 박히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게 편하잖아. 문제가 생기면 내가 다 책임지는 거니깐 넌 책임감에서 해방되는 거고.”
“그래도 가끔은 제가 나서서 뭔가를 해 보고 싶다, 생각될 때가 있어요. 언제까지 동생으로 살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형님 임원으로 올라가시고 저 혼자 비서실 꾸려 가면서 나름 인정받기 시작할 때 회장님이 돌아가셔서.”
재민의 말에 담긴, 진 회장 죽음의 비밀을 안다는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진우는 재민에게 다가가 어깨를 도닥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미주가 예전에 너랑 비슷한 소리를 했어. 언제까지 내 동생으로만 살 수 없다고.”
“이번엔 저와 헤어지실 건가요?”
웃는 얼굴로 이젠 자신과 대등하게 서려고 하는 재민을 보면서 진우가 다 안다는 듯 말했다.
“아니, 미주 때 실수해 봐서 내 옆에 계속 둘 거야. 널 친동생처럼 생각하는 건 알지? 그러니 동생이 나쁜 길로 빠지기 전에 어떻게든 달래서 삐뚤어지지 않게 해 볼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역시, 연호에게 한 방 먹인 걸 진우가 알고 있었다. 재민은 안경을 고쳐 쓰면서 아무렇지 않게 남 일에 대해 말하듯 대꾸했다.
“동생이 가는 길이 나쁜 길인지 누가 정의 내렸는지 모르겠지만 그 판단이 옳은 것인지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요.”
“그래서, 계속 한번 해 보겠다?”
진우가 던진 직구를 재민이 그대로 받아쳤다. 처음으로 누구의 동생도, 누구의 오빠도 아닌 인간 정재민으로 대답했다.
“진우 형, 지금이 기회예요. 차연호를 쓰러뜨릴 절호의 찬스인데 왜 그걸 날려 버리려고 합니까? 네?”
“이 병신 같은 새끼! 왜 일을 키우는 거야? 씨발, 재민아, 그냥 우린… 차현 중공업 먹고 떨어지면 돼.”
“그거 하나로 배부르겠습니까? 회장님 죽여 가면서 겨우 형이 승기를 잡았는데. 이제 와서 차연호가 다 털어먹는 거 그냥 내버려 두자고요?”
“새끼야, 차현, 원래 차연호 거야. 우리가 굴러온 돌이면서 박힌 돌을 빼내려고 한 거고. 우릴 서울로 불러들인 놈이 사실은 우리를 이용한 거 너도 나도 알고 있잖아? 그렇다면 차라리 욕심 조금 버리고 확실한 걸 취하는 게 더 이득인 걸 왜 몰라!”
진우가 호통을 치듯 재민을 나무라지만 말이다. 이미 판은 벌어졌고, 게임의 설계자는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였다.
“웃기지 마세요. 형이 이러는 이유, 미주 때문인 거 다 알아요. 형이 완전히 차연호를 제거해 버리면 미주가 형을 절대 용서치 않을 거라는 걸 알고 물러선 거잖아요? 형이 사는 이유가 미준데 그 애한테 버림받을까 봐 늘 벌벌 떨면서.”
“정재민!”
“왜요? 제가 정곡을 찔렀나요? 그토록 사랑하는데 사랑한다 말도 못 하는 병신이면서 저한테 병신이라고 하지 마세요. 제일 병신 새끼는 바로 서진우 너니깐!”
그건 진우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늘 언제나 다정하고 침착했으며 사람들에게 사려 깊다는 소리를 듣던 재민이 아니었다. 진우가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삭이면서 노여운 목소리를 꾹꾹 눌러 담아 조용히 말했다.
“차연호 일, 다시 제자리로 다 돌려놔. 그럼 지금 나한테 한 말 다 못 들은 거로 해 줄게.”
“싫습니다.”
“재민아…….”
“싫어요, 형. 전에 형이 그랬잖아요? 능력 되면 미주 뺏어 와 보라고.”
진우가 한숨을 쉬면서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재민의 어깨에 손을 올려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그는 제 손을 뿌리치면서 소리쳤다.
“알아요, 이런다고 미주가 내게 올 리 없다는 걸.”
“알면 그만해라. 연호한테 내 체면을 봐서 이 일 다 덮으라고 부탁할 테니 너도 승산 없는 싸움에 괜히 인생을 허비하지 마.”
“승산이 있고 없고는 제가 정해요.”
“재민아, 제발.”
“형님, 전 이제 시작입니다. 미주는 핑계고…… 한번 올라가 보고 싶어요. 권력이 대체 뭔지, 힘을 가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졌거든요.”
재민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걸 진우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재민이 가슴 안에 이토록 무서울 정도로 야망을 품고 있을 줄 몰랐다.
그를 과소평가한 건 아니었다. 진우가 기억하는 재민은 작은 것에도 늘 감사할 줄 아는 가장 친한 동네 동생이었다. 그런 재민을 욕망의 화신으로 만든 데 제가 일조했음을 알지만, 어떻게든 그를 제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 버린 것일까? 미주와 함께 잠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고 내부에 있는 적을 알지 못하다니.
“재민아, 그건 나한테서도 등을 돌리겠다는 말과 같아. 왜 혼자가 되려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
“처음부터 전 혼자였어요. 형은 늘 미주와 함께였지만 두 사람은 나를 언제나 타인으로 만들었다는 거, 모르죠?”
“그런 적 없어.”
“아니요, 우린 언제나 셋이 아니라 둘과 하나였어요. 심지어 회장님 처리할 때도 나만 빼놨잖아요?”
“설마 이 정도로 네가 치졸하게 속이 좁을 줄… 너까지 엮여서 모두 줄초상이라도 나길 바랐던 거야? 일이 잘못되면, 셋 다 그냥 흔적도 없이 사라지길 바랐던 거야?”
피곤하다는 듯 재민이 안경을 책상에 올려 두고는 눈을 꾹 누르면서 대답했다.
“처음부터 전 이런 놈이었어요. 다만 안 그런 척했을 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진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재민아, 연호가 다 눈치챘어. 안 그래도 너한테 감정이 안 좋은데 어쩌자고.”
“노려보면서 지랄하길래 먼저 친 거뿐이에요. 씨발, 그 잘난 척하던 고고한 놈이 체포라니. 세상에서 제일 쪽팔린 순간을 눈으로 확인했어야 했는데.”
붉어진 재민의 눈을 보면서 진우가 어깨를 꽉 잡으며 당부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마지막까지 널 믿는다. 맞아, 인정할게. 재민이 네가 가끔 했던 말. 나도 질투 때문에 눈앞이 흐려져 잘못된 판단을 한 적이 있었어. 너도 오랜 시간 미주를 사랑했을 건데.”
이번엔 제 손을 뿌리치지 않는 재민을 보면서 진우가 최대한 간곡히 부탁했다.
“재민아, 아직은 돌아갈 수 있어. 네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똑똑한 녀석인지는 세상 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아. 연호한테 가서 이렇게 말해. 다 내가 시킨 짓이라고. 널 뒤에서 조종한 게 나라고, 나한테 다 뒤집어씌워.”
“…….”
“제발 부탁한다. 더는 일을 키우지 말자. 원하면 차현 중공업, 네가 가져가. 솔직히 나도 뒤로 빼돌린 재산 꽤 많아서 죽을 때까지 편히 살 수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
대답이 없는 재민의 안경을 쓰지 않은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탐욕이 진우의 눈에 들어왔다.
“정재민, 너한테 실망하지 않도록 그간 정을 생각해서 마음을 돌려.”
“진우 형, 미안해요. 언제까지 형 뒤에서 등만 바라보고 싶지 않습니다.”
진우가 알겠다는 듯 잡고 있던 재민의 어깨를 놓았다. 그리고는 몇 번 툭툭- 치고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럼 나도 어쩔 수 없어. 네가 선택한 거고, 나도 내가 선택한 거야.”
“결과에는 승복할 테니 저도 형님들의 싸움에 끼워 주세요.”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의 진우가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거리면서 대꾸했다.
“넌 나한테도 차연호한테도 안 돼. 네가 얼마나 조무래기인지 이제 곧 알게 될 테니, 지금을 잘 즐겨 둬.”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정 실장, 나는 이만 가 볼게.”
“네, 전무님. 멀리 안 나갑니다.”
진우는 가소롭다는 듯 더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더없이 냉정한 얼굴로 재민의 곁에 다가가 목을 빼고는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까불지 마. 넌 내가 죽여. 이유는 잘 알고 있지? 뻔뻔하게도 감히 우리를 속이다니.”
“……?”
“차연호가 알려 주더라. 근데 있잖아, 네가 내 말 듣고 마음 고쳐먹으면 묻어 두려고 했어. 그간의 정을 봐서… 아니, 너도 분명 숨긴다고 힘들었을 것 같아서 모르는 척, 해 주려 했거든.”
재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면서 진우는 느긋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한 번 더 속삭였다.
“방금 내가 준 기회를 차 버렸으니, 나도 ‘그 일’ 절대 묻어 두지 않겠어.”
“…마음대로 하시지요.”
“그래, 근데 재민아. ‘그 일’을 알면 네가 사랑하는 미주가 과연 널 용서할까?”
새파랗게 변한 재민의 얼굴이 재밌다는 듯 진우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그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차현 그룹 본사, 재민의 사무실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전무실 안에서 진우의 눈빛이 번뜩였다. 햇살이 쏟아지는 한낮의 오후에 지옥 같은 마음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호가 알려 준 충격적인 진실에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았는데 말이다. 재민에게서 뺨까지 맞고 온 기분이었다.
“씨발, 생각도 못 했어. 설마… 설마… 정재민 네가…….”
몸이 떨릴 정도로 분노가 차올랐다. 15년 가까이 재민이 저와 미주에게 숨겼던 비밀을 알고는 도저히 맨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술이라도 마시고 싶지만 이 상황에서 취해 버리면 안 된다는 게 너무 좆 같아서 좆 같아.”
천천히 의자에 앉은 진우가 책상 귀퉁이에 있는 재떨이를 제 쪽으로 가져와 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금고에서 파일 뭉치들 찾았을 때 사실은 정재민 파일에 USB가 있었어.’
길게 내뿜는 연기 속에서 아침에 연호가 말해 준 추악한 진실을 곱씹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과 끝.
눈앞에 펼쳐진 슬픔과 고통은 원인과 결과 속에서 얽히고설켰지만 모두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 전무, 혹시 정재민 파일 열람하고 그놈한테 넘겼나?’
‘아니, 맹세코 안 봤어. 미주가 내 거랑 재민이 거를 줄 때 난 정말 볼 생각도 안 하고 재민이한테 그냥 줬어.’
‘병신 새끼, 그걸 봤으면 내가 이 꼴로 여기 앉아 있지 않을 텐데.’
한숨을 쉬던 연호가 촉박한 시간 속에서 빠르게 혼자만 알고 있던 사실을 알려 왔었다.
‘매형이 정재민 파일에 직접 적어 놓은 메모가 [잔나비한테 확인함]이었어. 처음에 난 잔나비가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서 전무는 알고 있지?’
‘잔나비’라는 단어는 제가 태어나고 자란 부산에서는 보통 원숭이를 뜻하는 말이었다. 젊은 사람은 잘 쓰지 않는, 나이 드신 할머니들이나 쓰는 그 말. 하지만 ‘잔나비’라는 이름이 연호에게서 언급되는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원숭이 닮은 놈이 하나 있었어. 그놈이 우두머리라 다들 잔나비파라고 불렀지.’
제 말에 눈을 한 번 깜빡이던 연호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그 잔나비파 애들이 윤희주 때문에 복수하겠다고 미주를 욕보였던 놈들이 맞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시하는 진우에게 연호가 어금니를 꽉 깨물다 말했다.
‘USB에… 서진우 네가 그때 안 죽였던 잔나비파의 일인자, 그러니깐 원숭이 닮은 놈이겠지. 그놈의 증언이 담겨 있었어. 윤희주가 죽기 전에 정보 하나를 비싼 값으로 샀다고 해.’
연호와의 대화를 회상하면서 다 타 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는 진우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비싼 값이라니?’
‘도박 빚, 정재민 아버지가 지고 있던 도박 빚을 잔나비가 갚아 주는 대신 윤희주 정보를 정재민이 팔았다고.’
‘뭐?’
‘정재민이 윤희주가 매형 따라 서울에 안 가기로 했다는 거랑 이젠 손 털겠다고 결심한 걸 잔나비한테 팔았어.’
누군가 아킬레스건을 칼로 도려내 피를 모두 뽑아내는 기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해지는 이 설명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에 진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잔나비라는 놈, 윤희주가 아주 눈엣가시였나 봐. 그래서 죽여 버리려고 작전 짜면서 거기에 정재민을 끌어들였어. 교통사고, 그거 뺑소니 아니었어.’
‘…그래, 지금까지 솔직히 누군가가 형을 제꼈다고 느꼈지만 증거가 없으니 나 혼자 생각하고 있었던 건데….’
‘윤희주 친구 중에 횟집 하던 놈이 있다고 했어. 너도 잘 아는 놈이래. 일명 사시미라고, 이름이…’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연호의 말을 가로채면서 분노로 붉어지고 있었다.
‘준식이 형.’
‘아무튼, 그놈이 봤대. 그날 비가 오기 시작해 장사가 텄다고 생각해서 잠깐 자기 가게에 들른다는 윤희주가 온다기에… 비도 왔고, 길 건너편이라 확실하지 않아서 계속 긴가민가했지만……’
희주 형의 친구였던 준식은 저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한때 같이 어울리면서 친하게 지냈던, 범죄에 가까운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녔던 희주 패거리 중 하나였으니 진우가 절대 모를 리 없는 인물이었다.
희주보다 훨씬 빨리 정신 차리고 제가 속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착실히 돌아갔던 준식이 형이 대체 뭘 본 것일까?
‘정재민이 거기에 있었다고. 정재민이 뒤에서 자길 부르니 윤희주가 뒤돌아보다가… 그리고 사고 후에 노란 머리라는 놈이 나타났다고.’
쾅- 소리를 내며 진우가 주먹을 책상에 내리쳤다.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연호가 알려 준 그날의 충격적인 진실은 가히 상상한 적도 없었고, 감히 상상하려 하지도 않았던 끔찍한 일이었으니깐.
“씨발, 내가 병신이었어. 희주 형 사고 났을 때 어째서 가족인 미주가 아니고 재민이가 제일 먼저 소식을 알게 된 건지, 이게 이제야 눈에 들어오다니.”
비가 흩뿌려지던 그날. 의사를 꿈꿨던 아득한 그 시절에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고 있다가 재민의 연락을 받았었다.
진실을 알게 된 지금에야 돌이켜 보니 이상했다. 이런 걸 순위로 매긴다는 게 우습기는 해도, 응급 상황에서 어떻게 저와 미주가 아닌 재민이 가장 먼저 연락을 받을 수 있었을까?
“현장에서 다 보고 있었으니깐. 119가 와서 형을 싣고 가는 걸 보고 따라 병원으로 가서 보호자를 자처하다니. 재민아, 넌… 어떻게…….”
지금 진우의 눈앞에는 15년 전 사고 현장이 그려지고 있었다.
아마도 재민은 노란 머리의 사주를 받아 희주를 기다렸을지도 몰랐다. 아니다, 잔나비의 사주를 받았으려나?
재민이 말해 주지 않으면 진우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그날 희주와 재민 사이에 있었을 접촉.
그 횡단보도 앞에서 희주의 이름을 불렀던 그 순간, 대체 재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재민… 재민아, 넌 정말 어떻게… 나중에 죽어서 희주 형 얼굴 어떻게 보려고…….”
진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계속 책상을 내려치고 있었다. 단단한 나무에 부딪히는 주먹이 아프다 한들 미주가 당했을 고통보다, 사지가 부러져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느꼈을 희주보다 어찌 더 아플 수 있겠는가.
연호가 사적으로 부리는, 좋게 말해 탐정 같은 존재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연호가 백호를 통해 따로 알아낸 준식이 그 시절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이유는 너무 뻔했다.
‘매형 죽고 이걸 알고는 백호를 부산으로 한 번 더 보내서 수소문했는데. 사고가 있고 얼마 후에 그 준식이라는 놈 어머니가 갑자기 급사했다고 해. 대충 그림이 그려지지?’
희주가 죽고 마음을 잡지 못해 방황했기에 목격자의 입을 막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잔나비의 잔악함을 몰랐다. 거기에 희주가 죽은 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고 있었으면서 침묵하고 방관했으며 숨겼던 사람이 있었다니.
정재민.
가족 같은 형을 죽음으로 몰아 놓고 동생 같은 여자애가 능욕당하게 만들어 저를 악귀로 만든, 모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린 끔찍한 배신자였다.
긴 시간 비밀을 숨긴 얼굴로 제 옆에, 미주의 옆에 있었다는 것 자체로 이미 재민은 사람일 수 없었다.
분노하다 못해 점점 더 고요하게 침전되는 기분 속에서 진우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고는 연호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매형이 이 사실을 언제 알았는지는 몰라. 그런데… 알고도 정재민을 그냥 둔 게 좀 이상해. 자기 아들을 죽인 것과 다름없는데 그 새끼를 그냥 뒀다는 게…….’
‘진수오는 생각보다 냉철해. 아들을 간접적으로 죽인 살인마라고 한들 이성을 잃기보단 아마 곁에 두고 계속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걸 약점으로 잡아 재민이를 흔들 생각이었을 것 같아.’
어쩌면 그 부분만큼은 진우가 진 회장을 본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진수오가 언제 재민의 비밀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겨우 반나절도 못 참고 재민을 죽여 버리고 싶은 복수심에 불타는 저는 진 회장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다.
재떨이에 수북하게 담배꽁초가 쌓이는 동안 고뇌를 거듭하던 진우가 뭔가를 결심하고는 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녁에 집으로 와. 전에 재미 삼아 준비해 둔 걸 제대로 해 놔야 할 것 같으니 가지고 오고.]
발신하게 무섭게 수신되는 정훈으로부터의 전화를 받았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걸 수정해야 할 것 같아. 이젠 장난이 아니고 진짜 실전이 될 것 같으니 법률적인 문제를 다 해결해 놔야 할 듯싶어.”
잠시 뜸을 들이던 정훈이 알겠다는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럼 공증 준비까지 해 놓겠습니다.’
“그래, 조금 있다가 보자.”
전화를 끊은 진우가 의자를 돌려 창밖을 내려다봤다.
해가 지고 어느덧 짙푸른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저와 잘 어울리는, 피 냄새를 감출 수 있는 어둠 속에서 싸늘하게 웃었다. 같은 결을 가졌을 줄 몰랐던 남자가 걸어오는 진짜 싸움에 응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