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등잔 밑이 어두운 법
* * *
“요한쓰, 운전 부탁하마.”
“네, 전무님. 이젠 익숙해져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요한은 오늘따라 진우가 기분이 좋아 보여,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었다.
“새끼, 믿음직스럽기는.”
진 회장이 가지고 있던 영상까지 회수해 파기했으니 이제 세상에 진우의 약점이 증거 형태로 남은 건 없었다.
요한은 모든 것이 끝난 지금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가볍게 현재를 즐기는 진우의 옆에 선 사람을 보았다.
저도 가끔 보았던 진우의 개인 변호사, 하정훈.
‘하 변호사님은 언제나 과묵하시다니깐.’
저와 비슷한 또래인 것 같지만 동갑인지 형인지 동생인지 알 수 없는, 진우의 최측근.
보통, 사람들은 재민과 저를 진우의 오른팔과 왼팔이라 칭하는데 말이다. 정훈은 과연 진우에게 있어 어떤 포지션인지 궁금했지만, 그 누구도 답을 쉬이 못 할 거라 생각했다. 그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아는 이는 아마 몇 안 될 테니깐.
마카오라, 오른쪽에 앉아서 운전하고 있던 요한이 뒷좌석에 앉은 정훈을 슬쩍 보고는 입을 다물며 지금 집중해야 할 일에 몰두했다.
재민에게 며칠 서울을 부탁하고 마카오로 날아온 진우는 어디론가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태블릿으로 자료를 보며 정훈에게 말했다.
“한예나한테 넘긴 건, 추적 불가능이지?”
“네, 전무님. 여러 번 돌린 자금이라 그리 쉽게 찾을 순 없을 겁니다.”
정훈의 차분한 대답에 마음이 놓인다는 듯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깐 그 여자한테 붙여 놓은 애들한테 잘 감시하라고 전해 줘.”
“네.”
“연호는 어제 미주 집으로 갔다면서?”
“네, 부회장님은 오늘 아침에… 출근하셨습니다.”
정훈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을 알아챈 진우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잘됐어. 미주도 그만하면 고집부릴 만큼 부렸어. 으이구, 우리 모개는 그냥 예쁜 미니 모과나 빨리 낳아 줬으면.”
주책스러운 오빠의 입장으로 중얼거리는 진우의 말에 정훈은 조용히 소리 없이 웃었다.
요한도 진우가 아침부터 왜 기분이 좋았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아 슬며시 두 사람을 따라 미소 지으며 말했다.
“왜 전무님이 낳으실 생각은 안 하고 괜한 미주 씨한테 낳아 달라고 하세요?”
“이요한, 이게 진짜. 내가 예뻐해 주니깐 기어올라, 어?”
진우가 장난스럽게 눈을 부라리지만, 요한은 전혀 겁내지 않는 듯했다. 심지어 이런 농담에는 잘 끼어들지도 않는 정훈마저 괜히 한마디 거들었으니깐.
“이 차장님 말씀 틀린 거 하나도 없습니다.”
“야, 하정훈 너까지 이러지 마라. 앞으로 할 일이 산더민데 무슨. 애 만들 시간도 없다.”
“정말 없을까요?”
“…이것들이 진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진우를 보면서 정훈이 살짝 피식거리더니 브리프 케이스에서 파일을 하나 꺼내 건넸다.
“이건 비행기에서 보여 드리려고 했는데, 아까 보시던 게 조금 길어지다 보니 지금 드리네요.”
“음, 줘 봐.”
정훈에게 받은 서류를 넘겨 보던 진우가 살짝 인상을 쓰면서 입을 열었다.
“진수오 그 새끼가 죽으면서 가지고 있던 차현 지분 중에서 차연희 몫은 법대로 상속된 거지?”
“네. 덕분에 차현 그룹 지주회사인 차현 건설의 그룹 지배력이 더 강화됐습니다. 차연희, 차연호 남매의 지분과 더불어 둘을 지지하는 쪽까지 더해지면 사실상 다시 차씨들한테 그룹이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 새끼가 만약을 대비해 미리 준비해 뒀을 유언장에 별 내용이 없어서 다행이었네.”
“다음 달에 열리는 이사회에서 차연희가 회장직에 오를 수 있도록 그쪽 라인들과 접촉해서 지금 함께 물밑 작업 중입니다. 그리고, 이거 한번 봐 주십시오.”
정훈이 건네는 태블릿에 들어 있는 자료.
진 회장의 금고에서 나온 모두의 비밀이 담긴 파일을 연호와 신사적으로 공유하기로 했었다.
이 파일의 존재에 대해서는 둘만의 비밀로 하기로 했지만, 진우는 정훈에게만큼은 오픈했다. 미주와 재민을 제외하고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남자가 바로 정훈이었으니까.
그리고 진 회장의 금고에서 나온 재민의 파일을 본인에게 줄 때, 미묘하던 눈빛에 그만 거짓말을 했었다.
‘이거 어디서 났습니까?’
‘어디겠어? 이거, 너, 나 둘밖에 모른다.’
재민이 정말 제 말을 믿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비밀에 대해서 아는 이가 많은 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어떤 직감 속에서 재민에게 함구하고 있었다.
손에 들어온 앞으로 엄청난 무기가 될 이 방대한 자료를 정훈에게 넘겼고, 꼼꼼하다 못해 깐깐한 그가 이중 삼중으로 백업과 동시에 자료를 분석해 주고 있었다.
“진수오가 차명으로 가지고 있던 차현 물산 주식은 내가 돌려 돌려서 차연희에게 줘야겠어. 어쨌든 곧 회장님이 되실 테니 선물 겸 해서.”
제가 그린 대로, 연호가 깔아 놓은 판대로 다행히 그룹 회장직 승계는 문제없이 술술 진행 중이었다.
미주 덕분에 손을 잡게 된 연호가 다행히 뒤통수를 칠 정도로 더티한 인간은 아니었다. 진우는 의리가 무엇이고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차연호, 처음부터 적대적인 관계로 만나지 않았으면 지금쯤 그놈이랑 내가 좋은 쪽으로 뭔 일을 내도 냈을 것 같네.”
중얼거리는 진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정훈이 특유의 잔잔한 말투로 말했다.
“부회장님도 보통 수완가가 아니시니까요. 차가워 보여도 은근히 자기 사람들은 끝까지 챙기는 걸 보면 전무님이랑 결은 비슷해요. 방향성이 좀 달라서 그렇지.”
“왜, 차연호랑 한번 일해 보고 싶어서 그래?”
입술을 호선으로 그리면서 진우가 정훈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됐습니다. 전무님만으로도 벅차요. 솔직히 중공업 그대로 두시고 함께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었습니다. 이제 미주 씨랑도 다행히 관계가 나아진 것 같으니 크게 보면 가족이시잖아요?”
“그래, 가족이지. 여동생 남편이면 가까운 가족이지. 근데 연호 그 새끼가 날 그렇게 생각하겠어? 내가 손윈데 얼마 전까지는 맨날 반말 찍찍 하더니, 이제 좀 대접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연호 새끼도 내가 봤을 땐 멀었어.”
시내로 진입하는 한국인들을 태운 세단은 나름대로 화기애애했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 섞인 말 중에는 꽤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것도 있었다.
하지만 여유가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이젠 더 반목할 반대 세력도 없고, 약속한 대로 각자의 몫을 가지고 싸움을 끝내면 되었다.
그렇기에 유연하게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며 마카오에 있는 그들의 조력자들과 다음 프로젝트를 함께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는데 말이다.
죽은 진 회장 때문에 거의 두 달 가까이 미뤄 뒀던, 저와 손잡은 마카오 카지노업계의 신흥 세력과 점심 식사를 끝냈을 무렵이었다.
“진우 형님, lately 정신이 없어?”
“그렇긴 하지. 당분간은 회사 내부적인 문제 때문에 내가 직접 못 올 것 같고, 필요하면 여기 하 변을 보낼게. 아니면 알렉스가 서울에 한 번 와도 되고.”
이번에 마카오에 새로 생긴 호텔 라운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진우는 한국어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차현 그룹 내에서 완벽하게 제 위치를 진 회장에게 보장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마카오 카지노업계의 신흥 실력자, 알렉스 창은 한국계 혼혈이었다. 어머니가 한국인이기에 어눌하지만 떠듬떠듬 한국어로 대화할 수 있었던 알렉스는 생각 외로 호탕했고, 대범했으며, 또 진우와 지향점이 비슷했다.
처음에는 그저 카지노 사업에 대한 비즈니스 파트너에 불과했던 그와 몇 년간 교류하며 사적인 친분도 깊이 쌓아 올렸다. 그리하여 바다 건너 존재하는 저를 지지하게 된 위험한 세력들 덕분에 말이다.
진수오 입장에서는 아무리 제가 키운 호랑이 새끼를 죽이고 싶었어도 말이다. 카지노 사업을 제휴하고 있는 마카오, 즉 범홍콩 쪽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매형이 자기 자료를 다른 사람 손을 여러 번 타게 해서 넘겼어. 내가 공격하면 서 전무를 희생양 삼아 재기 불능으로 만들 생각인 것 같아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러길 잘한 것 같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좋은 기회를 놓쳐서 어쩌냐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매제.’
‘매제는 무슨. 그냥 하던 대로 불러요.’
‘그러는 매제는 어째 여전히 말이 좀 짧은 것 같기도 하고.’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 처음으로 마주 앉아 맞담배를 피우면서 연호와 나눴던 대화들을 마카오에서 떠올려 볼 때였다.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 지금 이걸 당장 보셔야…….”
옆에 앉아 있던 정훈이 급하게 내미는 노트북에 수신된, 긴급이라고 적힌 메일 제목.
진우가 눈동자를 움직이면서 내용을 단숨에 읽어 내리고는 격양된 목소리로 요한에게 외쳤다.
“이 차장, 빨리 차연희 연결해. 당장 모든 루트 동원해서 언론부터 틀어막으라고!”
하지만 상기된 표정의 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늦었다는 듯 진우를 향해 태블릿 화면을 보여 주면서 말했다.
“전무님, 벌써 포털에 기사가 뜨기 시작했습니다.”
“씨발, 대체 누구야? 경찰 쪽에서 왜 내게 아무 말 없었지?”
얼굴이 벌게진 채 눈을 부릅뜬 진우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정훈에게 일렀다.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고작 반나절 자리 비웠는데… 내가 없는 거 알고 움직인 거네.”
“…아무래도 검찰이 비밀리에 준비한 것 같습니다. 저쪽이 손도 못 쓰고 당한 거 보면…….”
정훈의 말에 골치가 아프다는 듯 진우가 마른세수하며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미주한테는 내가 직접 알려야겠어. 미주가 알면… 하아, 씨발, 대체 누가!”
진우가 욕설을 지껄이면서 초조하게 전화를 걸지만 돌아오는 건 신호음뿐.
“가시나, 모개는 또 왜 전화를 안 받고! 아직 모르나?”
진우가 짜증 섞인 말투로 오늘따라 전화를 받지 않는 미주를 원망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응, 오빠. 마카오에는 잘 갔어? 깜빡했는데 돌아올 때 면세점에서……’
“미주야, 너 지금 어디야?”
‘집. 늦잠 잤어. 왜? 뭔 일 있어?’
이제 일어나기라도 한 건지 꽉 막한 텁텁한 목소리를 내는 미주가 대뜸 면세점 소리를 지껄이자 진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놀라지 마, 미주야. 그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알려야만 했다. 진우는 어금니를 한 번 꽉 깨물고는 천천히 지금 제가 없는 서울에서 벌어진 일을 말했다.
“차연호. 지금 검찰에서 체포 영장이 발부됐어.”
“…뭐? 무슨……?”
순간 미주의 눈앞이 노랗게 변할 때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는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차현 바이오 분식 회계 혐의래. 이미 증거 인멸을 시도한 정황이 있고, 해외 도피 우려가 있어서 구속해서 수사할 거라는데…….’
저도 조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지난 몇 년간 연호가 굉장히 공들여 키운 차현 바이오의 주가 조작 의혹 때문에 최근 몇 달간 시끄러운 상태였었다.
연호는 자신은 차현 바이오의 사장이 아니라 차현 그룹 부회장이니 계열사에서 있었던 일은 저와는 관계없다 선을 그었지만 말이다.
진 회장이 죽기 전 세간에서는 다음 회장이라 일컬어지는 연호가 제 후계 체계를 견고히 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떠들어 댔었다. 물론 연호의 외가인 언론사에서 열심히 연호를 변호하며 보호해 주기 바빴고.
별거하고 있었던 당시, 미주는 복수에만 전념했지만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아예 모르진 않았다.
‘걱정하지 마. 진 회장이 벌인 판이지만 결국 꼬리 자르기로 끝날 테니깐. 누가 감히 차연호를 잡아넣겠어?’
언젠가 진우에게 물었을 때 괜찮다는 식으로 대답해 줘 그 일에 대해선 더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진 회장이 죽어 이제 더는 차현 바이오 건으로 연호를 공격할 수 없을 건데 체포 영장이라니.
“어떻게…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무엇을 묻는지 아는 진우가 조금 모호하게 대답했다.
‘지금 인맥을 동원해서 최대한 알아내는 중이야. 차연희 쪽이랑도 의논 중이고, 연호와도 지금 접촉하려고 시도 중이니…….’
연호에게 죄를 묻는다면 살인을 방조한 죄와 살인에 간접적으로 가담한 죄일 것이다. 분식 회계 정도야 그가 진짜 유죄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빠져나올 수 있겠지만, 살인이라면 말이 달랐다.
미주는 심장이 터질 듯이 불안했지만, 최대한 차분하게 제 생각을 알렸다.
“알았어, 오빠.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알려 줘.”
‘일단 지금 바로 귀국편 알아보고 있으니깐 만나서 이야기하자.’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전화를 끊은 미주가 연호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재빨리 거실 TV를 틀어 뉴스 전문 채널을 보았다.
[차현 그룹 차연호 부회장, 차현 바이오 주가 조작 및 분식 회계 지시 및 증거 인멸 혐의로 체포 영장 발부]
이미 뉴스에서는 대문짝만한 헤드라인을 달고 남편의 잘못에 대해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리고 미주는 그저 오전에 연호가 보낸 메시지만 들여다보면서 걱정을 먹구름처럼 껴안았다.
[오늘 저녁은 집에서 맛있는 거 해 먹자. 일찍 들어갈게. 기다리고 있어.]
돌고 돌아 이젠 나쁜 일은 모두 다 잊고 함께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었는데.
하루였다. 겨우 하룻밤. 행복해질 수 있었던 시간은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뜰 때까지의 짧았던 밤뿐이었다.
사람을 죽인 죄인인 저를 하늘은 역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히 네가 죄를 묻고 뻔뻔히 살아가려고 하냐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미주는 듣기 싫다는 듯 귀를 틀어막으면서 마음을 다잡아 보았다.
“만약에 진 회장 죽인 게 세상에 드러나면 내가 다 책임질 거야. 처음부터 그러기로 마음먹었으니 절대, 연호 씨를 다치게 두지 않을 거야.”
물 한 모금 마시며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 핸드폰이 또 울렸다.
[지금 첵랍콕으로 출발해. 여기보다는 홍콩이 훨씬 노선이 많으니까. 직항이 저녁 6시쯤 있어서 그거 타면 대충 4시간이니까 한국 시간으로 11시쯤 인천에 도착할 것 같아.]
[알았어, 입국장에서 기다릴 테니까 거기서 봐.]
밤 11시라. 뭐라도 좀 먹고, 씻고 진우를 마중 나갈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비밀이 들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겨우겨우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 연락이 왔다. 연호의 법률 대리인이 걱정하지 말라 전화로 알려 온 현재 상황과 그의 전언에 눈물이 났다.
“울면 안 돼. 앞이 안 보이면 운전을 못 하니깐.”
미주가 억지로 웃으면서 마음을 고요한 바다처럼 다스려 보지만,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다시 진우로부터 소식이 전해졌다.
[30분 뒤에 비행기 뜬다. 너무 늦을 것 같은데 집으로 가 있어.]
[아니, 내일 온다고 해도 공항에서 기다릴 테니깐 비행 잘하고.]
제가 고집을 부린다 느꼈는지 더는 집으로 돌아가라 말하지 않았다. 진우를 기다리면서 미주는 그제야 한 사람이 생각났다.
“…아, 전화를 안 받네. 하긴, 재민 오빠도 지금 진우 오빠가 서울에 없는 바람에 정신없을 테니깐.”
미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재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나중에 시간 되면 통화해. 남편 문제 때문에 그래.]
하지만 인천공항으로 운전해서 가는 동안 재민에게선 그 어떤 연락도 없었다. 공항에 도착해 대기실에 있는 대형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면서 연희와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어. 하지만 서 전무가 들어오고 나서 생각하자. 일단 너무 놀라지 말고, 사람 많은 곳에 절대 가지 마. 기자들한테 사진이라도 잘못 찍히면 괜히 더 구설에 오를 수 있어.’
연희와의 통화를 끊으면서 그제야 제 위치가 어디이며 제가 누구인지 떠올라 아차 싶었다.
‘일단 주차장으로 가자. 지금 뉴스에서 화제가 되는 사람의 부인이 공항에서 어슬렁거리는 것만큼 씹기 좋은 가십거리가 있을까?’
연호를 구명하고 진우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는 제 자리를 잠시 잊고 있었다.
미주는 최대한 고개를 숙여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겨 차에 타고는 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국제선 주차장이야. 도착해 핸드폰 켜서 메시지 보는 대로 전화 줘.]
미주가 일부러 더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 자동차 블루투스를 켜 핸드폰에 있는 음악을 듣고 있는데 진동음이 울렸다. 멀리서 익숙한 사람들이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 분명히 안 울려고 했는데, 오빠 얼굴 보니깐 그냥 안심돼서…….”
훌쩍이는 미주를 이해한다는 듯 진우가 등을 토닥이면서 말했다.
“오늘은 늦었어, 미주야. 집으로 데려다줄 테니 내 차 타고 같이 가자. 네 차는 집 앞으로 보내 줄게.”
“아니, 연호 씨한테 가 봐야…….”
“구치소도 면회 시간이라는 게 있어. 내가 내일 아침에 가 볼 테니 그 뒤에 다시 얘기해. 당장 걱정되고 보고 싶은 건 알겠지만 회사 일이 더 중요하다 생각해 줘.”
“맞아, 지금 내가 달려갈 때는 아니지.”
다행히 진우의 뜻을 이해한 미주가 조금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눈물을 훔치며 웃으면서 그의 뒤를 보았다.
“요한 씨,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네요! 근데 옆에 계신 분은 처음 뵙는…? 아!”
저를 기억해 낸 것 같은 미주를 보면서 정훈은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2년 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죠?”
“네, 그때 저한테 작업하는 척하면서 호텔 카드 키 건네주셨던 분 맞으시죠?”
빙그레 웃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하는 진우와 체격이 비슷한, 눈썹이 짙어 남성성이 도드라지는 남자를 보면서 미주도 웃음으로 인사를 했다.
“바쁘다, 이것들아. 빨리 가자. 하 변이 운전 좀 해 주고 요한이 네가 미주 차 가지고 뒤따라와.”
미주가 요한에게 차 키를 건네고는 진우의 차가 주차된 곳까지 같이 걸어갔다. 마침내 세 사람이 한 공간에 같이 있게 되었을 때, 진우가 안심시키듯 말을 꺼냈다.
“걱정하지 마. 연호가, 아니 부회장님이 죽으러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 일이 아니고 차현 바이오 쪽 문제라면 너무 크게 염려 안 해도 돼.”
제 입에서 ‘그 일’이라는 말이 나올 때 미주의 시선이 운전하는 정훈에게 향한 것을 진우가 캐치했다.
“지금 운전하고 있는 하 변, 하정훈 변호사. 내가 너희 말고 유일하게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마음 놓고 아무 이야기나 해도 괜찮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저를 믿으라는 진우의 눈을 보면서 미주도 조금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남편이 차현 바이오 문제에 유죄든 무죄든 관계없어. 무조건 빼내 줘, 오빠.”
“오늘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모개야. 그건 내가 손 안 써도 연호가 가진 힘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깐 너무 심각하게 생각 안 해도 돼. 다만…….”
“다만?”
한 템포 박자를 쉰 진우가 표정을 조금 딱딱하게 굳히면서 말을 이었다.
“하필이면 진수오 그 새끼 사십구재가 끝난 다음 날, 그리고 내가 서울을 떠난 오늘 딱 맞춰서 검찰이 움직였다는 거지.”
진우의 말에 눈동자를 굴리던 미주 역시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물었다.
“누군가 일부러 그랬다?”
“그래, 아직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꽤 치밀하게 준비한 것 같아. 여기에 만에 하나 진 회장의 죽음에 대한 의문까지 생겨 버리면 연호는 완전히 사면초가가 되니깐.”
“…누굴까? 진 회장의 망령이 끝까지 우리를 응징하겠다는 것 같아.”
“너를 믿어, 미주야. 그리고 우리를 믿고. 우리가 분열되길 그쪽이 바랄 테니.”
“그래, 나를 좀 더 믿고, 오빠도, 남편도 믿을 거야.”
진우를 보는 미주의 눈빛에서 불안감은 어느새 사라졌다. 저를 신뢰한다는 미주의 단단한 시선에 진우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을 강하게 꼭 잡아 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손을 꽉 잡고 아무 말 없던 진우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천천히 웃으면서 물었다.
“연호랑 화해한 거지?”
“아니, 내가 봐준 거지.”
미주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다행이라는 듯 진우는 웃으며 잡은 그녀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빨리 너 닮은 예쁜 모과부터 얼른 만들어. 외삼촌 소리는 듣고 죽게.”
“예쁜 모과…? 아, …왜? 아들은 싫어?”
진우가 질겁을 하면서 오버액션을 취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연호 닮은 아들은 상상도 하기 싫다. 차연호 판박이면 내가 아무래도 사랑해 주지 못할 것 같아… 아빠랑 똑같이 싸가지없게 굴기라도 하면, 아으, 생각도 하기 싫어.”
“아, 아들 꼭 낳아야지. 그것도 남편이 혼자 낳았냐는 말 들을 정도로 닮은 애를.”
진우가 말은 저렇게 해도 제가 만약 또다시 아이를 가지는 행복을 누리면 얼마나 예뻐해 줄지 잘 알았다. 괜히 딸 타령하며 툴툴대는 진우의 마음이 위기의 상황에서도 따스하게 전해져 겨우 웃을 수 있게 됐을 때였다. 깊은 밤이 돼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날 밝는 대로 바로 연호한테 갈 거야. 다녀와서 연락할게.”
“응, 남편한테 잘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줘. 씩씩하게 있을 테니 자기 몸이나 잘 챙기라고.”
미주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온 진우가 밤새도록 모든 루트를 총동원해 현재 돌아가는 판을 파악했다.
그리고 조금 충혈된 눈으로 차 안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나니 연호가 있는 구치소에 다다라 있었다. 진우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옷매무새를 다듬고 면회실 문을 열었다.
“…….”
플라스틱 벽을 중간에 두고 마주 앉은 두 남자는 말이 없었다. 어떤 식으로, 무엇에 대해 말을 꺼내야 할지 두 사람 모두 고민하는 듯했다. 짧은 침묵 속에서 뭔가 계속 생각하던 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회장님, 제가 어제 하루 동안 알아낸 건 검찰에서 이미 회장님 돌아가시기 전부터 준비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타이밍을 맞춰서 이렇게 판을 벌였고요.”
“누군가 일부러 날 엿 먹이려고 한 건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서 전무도 이미 짐작하고 있잖아요?”
차갑게 번뜩이는 연호의 눈빛에서 진우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한 번 젓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차연호, 난 아니다. 내가 일을 거칠게 하긴 해도 더티하게는 안 해. 그리고 너랑 더럽게 굴 필요가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하지만 내가 알아본 바로는 서진우 네 쪽에서 나온 정보야.”
인정한다는 듯 진우가 입술을 한 번 굳게 다물었다가 움직였다.
“나도 몰랐어, 재민이가 이럴 줄은. 알았다면 말렸지. 널 이렇게 몰아세워 봤자 이득일 게 하나도 없는 걸 아는데 왜 재민이 손을 빌려서 널 치겠냐고.”
“솔직히 말해서 정재민을 방패로 세우고 네가 뒤통수치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맞아. 나도 알고 있어. 내가 너라도 굳이 이 상황에서 날 구속할 이유는 없다는 걸.”
“그러니까 대체 재민이가 왜 널….”
이미 두 사람이 취하게 될 이익에 관해선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다. 곧 있을 이사회를 통해 차연희가 임시 회장이 되어 진우를 차현 중공업 사장으로 앉힌 다음, 계열사 분리를 하는 것.
연호 입장에서는 이미 반 이상이나 진행된 이 중요한 일에 진우가 재를 뿌릴 이유를 찾자면 많았다. 그가 욕심을 부리기 시작해 통째로 차현을 먹어 삼키려 할 수도 있었고, 중공업 말고 다른 걸 내놓으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제가 알고 겪은 서진우는 신의는 지키는 남자였다. 진 회장의 밑에서 일할 때는 무서울 정도로 잔인하기도 했지만 최소한의 예의와 의리가 있다는 평가가 돌아 돌아 제 귀에도 들어왔으니깐.
그러니 더 갖고 싶고 필요한 게 있으면 원한다 분명히 뜻을 밝히면 밝혔지 이 정도로 치졸하게 뒷공작을 펼칠 리 없다, 연호는 판단했다. 그렇다면, 저를 이렇게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는 순간,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정재민.
이미 검찰 내 반反 차현 세력과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증거 없는 정보가 심심치 않게 흘러들어 왔지만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를 조금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진 회장의 서재에서 발견된 그의 비밀을 혼자 거머쥐고 진우에게 빨리 알리지 않은 것도 사실 오만한 만용이었다.
그래서 치욕스러운 체포 순간을 견디고 구치소에 들어와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저를 이렇게 만든 이가 누구인지 확신했을 때였다.
“서 전무도 잘 알잖아? 정재민 그 새끼 아직도 여전히 미주한테 마음 있는 거.”
질투심. 제가 잘 아는 거였다.
사람을 완전히 돌게 만들고 미치게 만드는, 가장 위험하게 인간을 나쁜 길로 빠지게 만드는 원동력 중의 하나.
저 역시 재민에 대한 질투 때문에 미주에게 해선 안 될 말과 행동을 해서 제 자식을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았는가.
“…설마. 그 부분에 대해선 나도 최근 몇 년간 재민이랑 얘기해 본 적도 없고… 지금 만나는 여자도 있는데 이제 와서 미주한테 무슨 미련이 남아…….”
“그러는 서 전무는? 서 전무도 만나는 여자들은 많지만, 미주에 대해서는 다른 감정이잖아?”
“야, 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진우가 중얼거리는 말을 연호가 딱 자르며 말했다.
“너한테 따지자는 거 아니야. 내가 제일 잘 알아. 나라도 정재민 그냥 안 둘 테니. 매형이 예전에 나한테 그랬어. 미주 시집보내야겠다고 떠볼 때 서 전무가 극구 말렸다지?”
“…둘이 서로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그게 제일 최선이라 생각했으니깐.”
“그런데 내가 나타나서 미주를 뺏어 갔다, 원래 걔는 내 것인데 뺏겼다, 왜 뺏겼을까? 아, 내가 힘이 없어서 억울하게 뺏겼다, 나라면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 거야.”
“그렇다고 여자 하나 때문에 계란으로 바위를 치겠냐는 게 내 생각이야.”
가만히 진우의 말을 듣고 있던 연호가 살짝 웃으면서 몸을 앞쪽으로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서 전무도 여자 하나 때문에 의사 되는 거 포기했잖아?”
정곡을 찌르는 말에 진우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 연호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물론 나도 그래. 여자 하나 때문에 믿음이 생겨서 내 오래된 적과 손을 잡았으니깐.”
아직 저와의 연합을 깨고 싶지 않다는 연호의 뜻을 알아들은 진우도 몸을 앞쪽으로 숙이며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면회 끝나는 대로 바로 재민이 만나서 빨리 해결하라고 할게. 그리고 네 쪽 라인들이랑 합심해서 총알받이 하나 만들어서 빨리 꺼내 줄게. 너무 염려하지 마, 매제.”
“매제라. 그렇지. 우린 가족이지. 미주 때문에 우린 가족이 된 거야.”
피식거리는 연호에게서 진심을 조금 엿본 진우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보통 가족이 필요한 경우가 힘든 일을 같이 겪을 때라고 하니깐, 그저 생각이 짧은 재민이가 우릴 이어 주려고 그런다 싶은 마음으로 최대한 노여움을 가라앉혀 봐.”
“서 전무, 아니 처남이라고 불러야 하나? 우릴 이어 준다니, 누가 들으면 우리 둘이 뭔 사인 줄 알겠네. 아, 끔찍하다 못해 상상도 하기 싫어서 몸서리가 쳐진다.”
“미주가 알면 기뻐서 춤이라도 출 텐데?”
최악의 상황이지만 억지로 오고 가는 웃음 속에서 10년이 넘은 해묵은 반목은 이제 사라진 듯했다.
“아무튼, 재민이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네가 나서지는 마. 이것만 부탁할게. 아무리 그래도 재민이는 내 사람이야. 살리든 죽이든 내가 할 테니깐 화나도 미주 체면을 생각해서 조금만 참아 줘.”
“좋아,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 정재민 나한테 면회 보내. 내가 직접 할 얘기도 있으니. 한 번은 날 이렇게 만든 놈 면상 구경할 시간은 줘야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진우가 시계를 힐끔 보더니 아쉬운 듯 말했다.
“면회 시간 끝나 가. 다음번엔 꼼수를 부려야겠어. 그러면 너랑 더 길게 얘기할 수 있고, 작전을 짤 수도 있으니깐.”
자리에서 일어나던 진우가 이제 생각났다는 듯 몸을 앞으로 숙여 연호에게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차, 미주가 씩씩하게 잘 있을 테니깐 너 건강이나 잘 챙기래. 면회 와도 될 때를 알려 주면 그때 오겠다고. 걱정하지 말라네.”
“걱정하지 말고 잘 있으라고 전해 줘.”
“그런 건 만나서 얘기해라. 아무튼, 시간 됐으니 난 간다.”
미주의 전언을 들은 연호가 살짝 미소 짓더니 이제 나가야 하는 진우를 불렀다.
“서 전무님.”
저를 부른 연호가 마른 입술을 한 번 꾹 다물더니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 부회장님. 더 할 말이……?”
어딘지 모르게 결연해 보이는 연호가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 수갑을 찬 손목을 들어 손을 까닥거렸다. 연호의 얼굴에 넘쳐흐르는 이상한 긴장감에 진우가 가까이할 수 있는 한 두 사람을 가로막은 플라스틱 벽 앞에 다가갔을 때였다.
“……!”
연호가 알려 주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비밀에, 진우의 표정이 도무지 관리되지 않았다. 화가 나기도 하면서 의문도 가득한 얼굴이 이미 분노로 벌겋게 익고 있어 연호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진작 알려야 했는데, 일이 이 지경이 됐을 때 말해서 미안하게 생각해.”
연호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진우가 무어라 답을 하지 못할 때, 그가 재차 말을 이어 갔다.
“미주한테는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알면 너무 충격받을 것 같아서… 내가 나가고 나서 우리 둘이 같이 얘기하는 게 좋을 듯하니, 우선 서 전무만 알고 있어.”
고개를 끄덕인 진우가 연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면회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나서는 진우의 뒷모습을 보며 연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가 나간 방향만 조용히 보고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