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완전 범죄
* * *
마침내 오늘의 주역이 모두 모였지만, 장소는 저들이 계획했던 곳이 아니었다.
완전히 비틀어지고 엉망이 된, 살인으로 끝난 복수의 현장을 보면서 진우와 연호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완전 범죄를 한번 꿈꿔 보자는 듯이 말이다.
“진짜 죽었는지부터 확인해 봐야겠어. 미주야, 일단 넌 다른 곳에 가서 안정을 좀 취하……”
연호의 옆에 서 있는 미주의 얼굴과 점점 시퍼렇게 변하고 있는 목에 난 손자국이 알려 주는, 불과 30분 전 이곳에서 일어났을 일.
누가 봐도 남자 양복 상의를 걸치고 있는 미주가 안에 속옷밖에 입지 않음을 간파한 진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입술을 잘근 깨문 진우가 미주의 몸에 남은 상흔을 보며 애써 욕지거리를 삼킬 때였다. 미주가 진우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안 가. 나도 확인할 거야. 진수오 이 개새끼가 진짜 죽은 게 맞는지. 그리고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 아니면 두 사람 모두 제대로 알기 힘들잖아?”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네. 다만 서 전무와 내가 걱정되는 건 너도 많이 놀란 상태일 건데 굳이 현장을 다시 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거야.”
미주는 제 앞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남자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오래전, 진우와 연호가 더는 반목하지 않고 함께 있을 수 있길 바랐던 순간들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두 사람이 살인 앞에서 연대하다니.
이 믿기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서로 판이한 성격이라 오히려 그 끝이 같을 수 있을 두 남자에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여자라고, 두 사람보다 내가 어리다고 이 일에서 제삼자 취급하지 말아 줘. 부탁할게요.”
“그래, 최초로 이 판을 설계한 사람은 미주 너니깐 우리 모개 시키는 대로 해야지. 아, 부회장님도 잘 알겠지만 쟤 한번 하겠다고 하면 끝까지 물고 안 놓으니깐, 우리가 져 줍시다.”
“물고 안 놓는 건 서 전무 동생이라서 그렇지. 그 핏줄이 어디 가겠어요?”
미주는 마치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는 듯 눈을 조금 동그랗게 뜨고는 남자들을 보았다. 항상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진우와 연호가 서로 존대하면서 서 전무니, 부회장님이라 칭하다니.
진우가 먼저 연호를 존중해 주는 듯한 액션을 취하자 연호 역시 그의 의도를 알아챈 것 같았다. 거기에 연호가 처음으로 저를 진우의 동생이라 인정해 주는 것 같았다.
조금 울컥한 미주가 괜히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우리 지금 시체 옆에다 두고 너무 말이 길어지는 것 같지 않나요, 신사분들?”
실핏줄이 다 터져 눈동자의 흰자가 붉은색으로 변한 미주를 보면서 진우가 알겠다는 듯 먼저 나섰다.
“다들 잘 알겠지만, 솔직히 말해 이런 장면은 내가 제일 많이 봤을 거야. 부회장님께서도 직접 이런 광경을 보는 건 처음일 테니 내가 시체를 확인하는 거에 대한 이견은 없으면 해.”
제 손에 배어 있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적셨던 죄에 대한 진우의 간접적인 고해 아닌 고해를 들으며 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 바닥에 피가 흥건하니 조심해. 그리고 총이야.”
뒤통수에 들리는 미주의 걱정스러운 말에 진우는 익숙하다는 듯 뒤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흔들었다.
피가 흐르다 못해 넘쳐나고 있는, 눈을 부릅뜬 채 죽은 진수오의 육신을 보았다.
‘숨은 확실히 끊어졌어. 좀비가 아닌 이상 안심해도 되겠고.’
죽은 진 회장의 몸에 나 있는 총알구멍에서 계속 배어 나오는 피를 보다가 말이다. 진우는 조금 떨어진 곳에 고여 있는 작은 핏자국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미주야, 큰 타월 같은 거 있으면 좀 가져다줘.”
“내가 갈게. 당신은 여기 소파에 앉아 있어.”
연호는 연희가 누워 있을 안방으로 들어가 진우가 왔음을 알렸다.
“이거 누나 옷이지만 입고 있어. 앞섶을 계속 쥐고 있으려면 불편하니깐.”
미주에게 조금 박시한 티를 먼저 하나 건넸다. 그리고 연호가 커다란 비치 타월을 진우에게 건네면서 죽은 진 회장을 보았다.
“매형 될 사람이라고 처음 우리 집에 왔던 날이 아직도 생생한데…….”
담담한 말투로 죽은 자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지만 끝맺음이 쉽지 않을 연호의 그 복잡한 심경을 알 것 같았다.
진우는 그의 어깨를 한 번 꽉 쥐었다. 그러고는 마치 신호를 보내듯 진수오의 차갑게 식고 있는 몸뚱이 옆에 서서 연호에게 눈짓했다.
“개새끼, 지옥에서 기다려.”
연호가 자세를 낮춰 짐승보다 못한 놈의 부릅뜬 눈을 감겨 줬다. 진우는 그 위로 타월을 덮어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주었다.
“서 전무, 기다렸어.”
미주와 연호, 진우가 거실 소파에 앉아 무슨 말을 어떻게 서로 꺼내야 할지 모를 때였다. 안방 문이 열리고 머리가 피범벅이 된 연희가 밖으로 비틀거리며 나왔다.
“관장님, 병원부터…….”
진우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다는 듯 연희는 진우의 손을 한 번 꽉 쥐고는 인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 스스로 똑똑하다 자부하는 사람 셋이 모였으니, 빨리 어떻게 이걸 수습해 보도록 하죠.”
어쩌면 지금 살인을 저질렀기에 가장 두렵고 공포를 느끼고 있을 연희가 먼저 분위기를 풀고자 던지는 농담에 셋이 알겠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한 번씩 볼 때였다.
“어떻게 죽었는지, 그것부터 설명해 봐.”
진우가 미주를 바라보면서 묻자 마른침을 삼키던 미주가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아는 것부터 말하자면, 연호 씨 차 출발하는 거 보고 집 안으로 들어왔는데 뭔가 느낌이 싸했어. 그래서 관장님을 부르면서 주방으로 향했는데 이미 진수오한테 습격당해 바닥에 쓰려져 계셨어…….”
“오늘 일부러 집안일 돕는 사람들 내보냈으니 어쨌든 저녁 먹은 그릇을 쌓아 둘 순 없어서 설거지하려고 싱크대 앞에 섰을 때 그 인간이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어. 그래서 너무 놀라 뒤돌아볼 때 딱 머리를 맞았어.”
미주가 모르는 내용을 연희가 채워 주자 진우가 거기에 살짝 제가 본 것을 얹었다.
“아까 시체 확인할 때 보니 바닥에 도자기 같은 게 깨져 있었어요. 그럼 관장님을 습격한 흉기는 이곳에 있는 비싼 청자인 거고.”
“진짜 총이라는 걸 확인시킨다고 그 새끼가 백자도 쐈어.”
“하아…… 그게 얼마짜린데…… 쏴 죽이길 잘했어.”
아는 걸 하나씩 짜 맞추기 시작하니 서로가 몰랐던 지점들이 해소되고 있었다.
“연호야, 어떻게 네가 먼저 알고 온 거야?”
“오늘 비가 오는 바람에 그 여자 오피스텔까지 살짝 차가 밀리는 듯할 때, 서 전무한테 전화가 왔어. 일이 틀어졌으니 바로 집으로 가 확인 좀 해 달라고 말이야.”
자연스럽게 연호의 말을 받으며 진우가 자신만 알고 있는 오피스텔 쪽 상황을 설명해 줬다.
“혹시나 해서 한 가지 더 알리바이를 만들어 놨어요. 오늘 마닐라행 비행기를 놓친 내가 여자를 찾아가 거기서 하룻밤 잔다는 건데, 그걸 진 회장이 물었습니다, 관장님.”
“남편이 서 전무는 여자랑 논다고 발이 묶여 있을 거로 생각했네. 그래서 연호가 집을 나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내가 혼자 있으니 나부터 처리하려 한 거고.”
연희가 안도하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피스텔에 먼저 들어가서 어떻게 현장을 찍을 건지, 어찌하면 더 자극적인 포르노틱한 사진을 건질 수 있을지 한예나랑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놈들이 왔어요. 진 회장 쪽 수족들.”
“그래서?”
“부회장님이 오는 동안 한예나가 짧은 순간 혼자 있을 거로 생각하고 온 것 같았어요. 그런데 설마하니 제가 혼자서 그곳에 갔을 리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제일 믿는 놈들 데리고 있었고. 그다음은 말 안 해도 아시겠죠.”
“재민 오빠는 우리 보험이니깐 요한 씨랑 도균 씨는 확실히 거기에 있었겠네.”
맞다는 듯 윙크를 날리는 진우를 보며 미주가 조금 떨리지만 최대한 담담히 제가 겪은 일을 알렸다.
“총을 가지고 있을 줄 정말 상상도 못 했어. 그래서 무력하게 그가 나를 농락하는 것에 당할 수밖에 없었어.”
제 입에서 나온 ‘농락’, ‘당했다’라는 단어 때문에 말이다. 진우와 연호 모두 설마 하는 마음으로 눈에서 번개가 튀었다.
하지만 뒤이어진 설명에 다행이라는 듯 두 남자가 눈을 맞췄다.
“일부러 도발하려고 했어. 알다시피 한예나를 나로 생각하도록 2년을 투자했는데… 그 새낀 내가 자길 유혹하거나 자극하는 꼴을 보면서 즐기고 있었던 거야.”
미주는 진수오가 연희를 개들에게 던져 주겠다 한 건 일부러 전하지 않고 다음으로 계속 이어 갔다.
“어쩐지, 식탁에 총을 내려놓기 전에 만지작거렸어. 나는 총은 모르니깐… 그가 방심했다 여겨서 내가 총을 집어 들었는데… 안전장치가 걸려 있을 줄은….”
허탈하기도 했고 어쩌면 무능한 제가 한탄스러웠다. 미주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마지막을 향해 달렸다.
“격투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방적으로 내가 당한 거야. 총 밑부분으로 그놈 얼굴을 때렸더니 그때부터 몸에 올라타고는 죽이겠다 목을 조르는데…….”
그때 불현듯 머릿속에 악마가 지껄였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상해… 연호 씨, 오빠, 관장님. 이상해요. 그놈이, 진수오가 눈이 뒤집힌 채 목을 조르면서 이렇게 말했어. ‘이걸 찍어 놓고 두고두고 봤어야 했다.’라고.”
그녀의 말에 진우와 연호가 같은 걸 생각했다는 듯 놀란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단순히 변태인 걸 넘어선 위험 수위의 성도착자가 돈과 권력까지 가지고 있다면.
저를 끌어내리려고 했던 여자를 죽이기 위해 이성을 잃은 순간, 진수오가 실수로 내뱉은 말.
질린 얼굴로 미주 외의 사람에게는 그리 감정을 노출하지 않던 연호가 놀랍다는 듯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그 새끼가 그동안 스너프라도 찍은 건 아니겠지?”
동생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단어에 연희의 얼굴이 하얗게 변할 때였다. 진우가 마른 입술을 적시면서 입을 뗐다.
“말이 돼. 나도 뭔가 짚이는 게 있어.”
모두의 시선이 제게 향하자 진우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미주의 옆으로 다가가 곁에 앉았다. 제 손을 꽉 잡는 진우의 손길에서 안심하라는 것 같은 느낌을 미주가 받을 때였다.
진우는 더는 숨기지 않겠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부산에서 내가 널 위해 한 짓, 그걸 진수오가 찍어 놨어. 김 기사를 통해서.”
다시금 소환되는 과거의 일에 미주의 붉은 눈이 마치 핏물이 고인 듯 빨개지고 있을 때, 진우가 힘겹게 다음을 말했다.
“나는 그게 필요했어. 김 기사도 원본이 어디 있는지는 모른대. 진 회장이 가지고 있는 건 확실한데 자기도 모른다고. 그런데 놈이 죽었으니…….”
진우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미주가 이번엔 반대로 진우를 안심시켰다. 그의 손을 꽉 잡고는 알 만하다는 듯 차분히 말했다.
“2층 서재, 거기에 있을 것 같아. 내가 엄마 편지를 발견한 곳도 거기니깐.”
“서재? 엄마 편지라니?”
연호가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주는 이젠 슬픔을 극복했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3년 전, 2층 서재에서 엄마 편지를 우연히 발견했어요.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부산 집에 있던 책 다음 권이 눈에 띄어서 꺼냈는데. 거기에 희주 오빠가 친오빠가 아니라는 비밀이 숨겨져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사산하고 연희와 거래하면서 오픈했던 일에 대해서 진우에게는 직접 모든 걸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연호에게는 단 한 번도 그때 어떻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는지 말한 적 없었다.
그래서 미주는 그간 ‘어떻게, 어디서’ 비밀을 알았는가를 연희가 연호에게 말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 남편을 보니, 시누이가 생각 외로 입이 무거웠음에 그녀와 손을 잡길 잘했다 생각하며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때 관장님이 저한테 그랬잖아요. 2층 서재에 있는 책상이나 책장은 귀한 나무로 만들어서 인테리어를 손봐도 절대로 안 건드리고, 못 건드린다고.”
“맞아, 그랬지. 그럼… 밑져 봐야 본전이고, 바로 위층이니 한번 찾아볼 만해.”
연희가 동조해 주자 미주는 고맙다는 듯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우습게도 불과 한 시간 전에 살해당할 뻔했던 미주의 처참한 몰골 속에서 피어난 미소에 연호는 뭔가 마음이 몽글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다니.
미주에게 미쳐도 단단히 미쳤음에 속으로 웃어 보면서. 연호는 이제 증거를 없애고 알리바이를 만들 계획을 시작했다.
“내 생각에 매형은 심장마비로 자다가 죽었다 세상에 공표하고 경찰이 뭔 냄새를 맡기 전에 시체는 화장해서 결정적인 증거부터 없애는 게 맞을 것 같아.”
“갑자기 심장마비라니, 그걸 사람들이 믿어 줄까?”
연희가 어렵지 않겠냐는 듯 어두운 얼굴로 동생을 보자 연호는 걱정 말라는 듯 대답했다.
“공식적으로는 이번 검찰 조사 때문에 심적인 압박을 많이 받았다, 이런 식으로 언론 플레이를 하되, 뒤로 추잡한 스캔들을 살짝 흘리는 거지.”
“추잡하다니, 궁금한데요?”
미주가 빨리 말하라는 듯 연호를 재촉했다.
“찌라시. 그걸 돌리는 거야. 사실 진수오 회장은 심장마비가 아니라 복상사를 했다, 이런 식으로. 거기에 꽤 그럴듯하게 한예나 이야기도 살짝 끼워 맞춰 놓고.”
연호가 생각해 낸 이야기는 메신저를 통해서 불특정 다수에게 유포하기 쉬웠다. 대중은 언제나 알려진 것 말고 숨겨진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적당히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단어를 써서 시선을 다른 곳에 잡아 두고자 했다.
“요즘 SNS 셀럽 중 하나인 전직 연예인 한예나의 스폰이 진수오였다, 둘은 차현 갤러리 자선 바자회에서 만나 불륜 관계가 됐는데 검찰 수사 기간 동안 몸을 사린 진수오가 불법 약물로 성관계를 하다가 그만 심장에 무리가 와서 죽어 버렸고 남은 가족들은 그걸 쉬쉬하고 숨기려고 한예나에게 거액을 주고 입막음을 시켰다.”
가만히 연호의 말을 듣고 있던 진우가 마치 졌다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한 번 보고는 기분 좋은 패자의 얼굴로 말을 이어받았다.
“부회장님 아닌 척하더니 다 알고 계셨네요. 근데 그 말인즉슨, 부회장한테 정보를 파는 애가 있다는 뜻인데.”
“우리 계산은 나중에 둘이서 따로 이야기하고, 자, 여기서 서 전무가 가지고 있는 걸 하나 슬쩍 출처 불명으로 인터넷에 올려 주면 됩니다.”
연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했다는 듯 진우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바자회 때 둘이 만난 사진, 그걸 풀라. 그러면 찌라시 내용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게 되니, 사람들은 진수오의 죽음보다 한예나의 스폰 의혹에 더 집중하게 되겠네요.”
“그리고 누나 다친 건 그간 그 개새끼가 가정 폭력범이었으니 그리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어. 두 사람 쇼윈도인 거 솔직히 세상이 다 아니. 이제 어느 정도 수습에 대한 윤곽이 나왔으니 누나는 병원으로 가서 치료받으면 될 것 같아.”
“괜찮겠어? 혹시라도 내 몸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흔적이 나오면.”
진우가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듯 연희를 안심시켰다.
“관장님, 외국이라면 손에 남은 잔류 총기 화약 감식이라도 하겠지만 여긴 한국이에요.”
“그리고, 누나. 그 개새끼가 예전에 종종 누나한테 손대서 차현 의료원에 증거 남겨 놓은 게 있잖아? 나중에 이혼이라도 하면 그때 쓰려고 누나가 20년 가까이 모아 둔 거.”
연희는 눈물을 살짝 비치면서 모두에게 말했다.
“박 집사는 괜찮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그 사람 불러서 병원으로 갈게.”
“집 안으로는 부르지 말고, 대문 앞으로 불러서 가. 박 집사까지 연루시킬 필욘 없어. 그리고 꼭 MRI 찍고. 뇌출혈이라도 있을 것 같아 걱정이니깐, 누나.”
저와 진우의 우애와 비슷하면서도 그 결이 조금 다른, 남매의 우애 또한 그 정이 매우 깊음을 미주는 또 한 번 느꼈다.
‘사람들은 다들 차연호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알아. 그게 저 사람의 생존법임을.’
아마도 따뜻한 심장을 가지고 있을 재벌가의 사생아는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냉철한 카리스마로 자신을 무장시켰을 것이다.
‘부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내게 했던 말,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자기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같이 말했으니깐.’
연호에게 정체를 숨기려 희주가 아니라 오래전에 죽은 아빠 납골당에 왔다고 핑계를 댔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재회했을 땐, 처음 보는 여자애한테도 어설픈 위로를 건네던 남자는 없었다. 오직 위험한 목적을 위해 저를 원하는 남자만 있었다.
연호와 함께했던 시간 동안 저는 그에게 치유받아 겨우 평범한 여자가 되었는데 말이다.
아이를 잃고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어찌할 수 없이 애간장이 다 녹아내린 애증 어린 마음에 여전히 아팠다.
결국, 막다른 절벽 끝에 서서야 연호를 절대 놓지 못하는 마음을 인정하면서. 미주는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눈빛으로 이젠 초연하게 제가 시작한 이 복수의 끝을 정리하려 했다.
“연호 씨, 심장마비라는 거짓을 만들려고 해도 진수오 몸에 남은 총상이 있는데, 과연 급사한 거로 꾸밀 수 있을까요?”
“걱정하지 마. 나한테 ‘소각팀’이 있으니 1층에서 벌어진 일은 다 증거 안 남기고 수습 가능해.”
미주의 질문에 날카로운 눈빛을 내는 진우에게서 답이 나왔다. 연호는 진우에게 맡긴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이디어는 사망 진단서 위조였는데. 아마 이건 서 전무가 더 전문일 테니 맡기는 게 나을 거야.”
“…오빠는 대체 차현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
미주가 흐린 얼굴로 진우가 절대로 답을 내어 주지 않을 물음을 할 때였다. 눈치 빠른 연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움직여야 해. 나는 병원으로 갈 테니 주방은 서 전무가 정리해 주시고, 미주 씨랑 연호가 2층 서재를 뒤져 봐.”
감상에 젖을 시간도, 이제 알게 된 몇몇 진실을 수긍할 생각도 잠시 미뤄 두는 게 맞았다.
다들 깜빡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시체가 있었고, 살인자가 있었고, 방조자와 동조자, 그리고 찾아야 할 증거들이 있었다.
해가 뜨기 전 악몽 같았던 밤을 지워 내야만 했다. 연희는 현재 연호가 혼자 사는 본가의 박 집사를 불러 차현 의료원으로 향했다.
“이 차장, 급한 일이니 오피스텔은 애들한테 맡기고 비밀리에 소각팀이랑 지금 회장님 댁으로 와. 올 때 CCTV 조심하고.”
진우는 재민 다음으로 가장 신뢰하는 요한에게 연락해 자신의 팀을 불러 피 칠갑이 된 이곳을 지워 내기 시작했다.
그 시각, 미주와 연호는 2층으로 올라가 진수오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서재를 미친 듯이 뒤지고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찾아야 하지?”
“일단 책상의 노트북부터 봐요.”
“아니, 생각해 봐, 미주야. 설마하니 노트북에 비밀을 숨겼겠어?”
양팔을 걷어붙인 연호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한쪽 벽면에 빼곡히 채워진 흑단목 책장을 보면서 난감해하고 있을 때였다.
“하긴…… 나라도 그런 걸 노트북에 저장하진 않을 거니까… 그럼, 무식하게 그냥 뒤져 봐요, 우리.”
“나 그런 거 질색하는 거 알지? 근데 씨발, 지금은 도리가 없으니 일단 그냥 눈에 들어오는 대로 찾아보자.”
아무래도 키가 크고 팔이 긴 연호가 좀 더 넓은 시야각을 가지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가 주요한 지점을 찾을 때 미주는 그의 시야 밖에 벗어난 구석 쪽을 살피면서 추리가 맞길 기도했다.
30분 정도 쓸데없이 책들만 바닥에 쌓여 가고 있을 때였다. 더는 이런 식으로는 찾을 수 없다는 듯 미주가 미안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 짚었나 봐요. 서재가 아니거나, 진수오의 비밀 금고가 따로 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스너프가 있을 거라는 게 틀린 생각일지도.”
“…최소한 매형이 찍어 놨다는 서 전무 약점은 있을 거야.”
“시간 낭비하는 걸까 봐…….”
연호는 괜찮다는 듯 미주를 토닥였다. 그러고는 이제는 시퍼렇게 변한 그녀의 목 졸린 흔적을 보며 고통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널 이렇게 만든 놈이 핵폐기물만도 못한 놈이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해.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미주야, 만에 하나 또 이런 식으로 일이 틀어지면 그 스너프 필름을 찾아 공표해서 진수오는 죽을 만한, 금수만도 못한 놈이었다는 여론을 만들어야 해.”
“그게 있다면 말이죠.”
애써 웃음 짓는 미주를 보며 연호는 살짝 팔을 뻗었다.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작게 들릴락 말락 말했다.
“만약에 네가 죽였어도, 난 악마한테 영혼을 팔아서라도 널 지켜 줄 거야.”
어쩌면 소름 돋는 무서운 말이지만 말이다. 미주는 그게 연호의 사랑임을 알기에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슬쩍 껴안지 말아요.”
“미안, 이런 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그만.”
미주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샐쭉하게 말했다.
“알면 됐어요.”
겨우 다시 마음이 서로 닿으려고 할 때였다. 미주가 눈을 점점 크게 뜨더니 연호를 빤히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연호 씨, 방금 악마라고 했죠?”
뭔가를 떠올린 것 같은 미주에게 계속 말해 보라는 듯이 연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 맞아, 영혼을 팔았어. 파우스트는 악마한테 영혼을 팔았어요.”
“그렇지…? 오래전에 읽어서 내용이 잘 기억나진 않……”
미주는 급한 듯 연호의 말을 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까 1층에서 말한 엄마 편지가 파우스트에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 엄마랑 그 인간 서로 샤롯데니 뭐니 자기들 딴에는 애절했고.”
“괴테……?”
미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괴테…… 맞아요, 괴테. 아니, 베르테르, 베르테르부터 찾아봐요.”
연호가 급히 눈으로 꽂혀 있는 책 제목을 찾을 때였다. 미주도 따끔거리는 눈을 계속 부릅뜨며 찾기 시작했다.
“있어, 베르테르.”
연호가 손에 들린 누렇게 변한 오래된 책을 펼치자 놀라운 것이 들어 있었다.
“편지.”
미주는 그가 책 안에서 꺼낸, 제가 발견했던 편지처럼 조각나 바스러질 것 같은 편지지를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짜 뭔가가 있었어. 세상에.”
“미주야, 괴테가 또 뭘 썼지? 이 씨발 새끼가 책을 보관함처럼 쓸 줄 누가 알았겠어.”
미주가 인상을 쓰면서 입고 있는 옷을 더듬거리다가 지금 제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렸다.
“연호 씨, 핸드폰 가지고 있어요?”
“여기. 미주야, 검색해서 유명한 거부터 불러 줘.”
“…그래요. 잠시만요… 아, 에그몬트.”
하지만 더는 괴테를 뒤져도 편지가 나오지 않았다. 숨겨진 베르테르의 슬픔은 그저 그런 엄마와 진수오의 연서에 불과했다.
“괴테는 다 뒤졌어. 미주야, 더는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이제 비디오나 뭔가 영상을 녹화해 둔 메모리 장치를 찾아야 할 것 같아.”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진우가 주인공일 영상은 꼭 찾아서 회수해야만 했다. 미주는 고개를 들어 천장까지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빈틈없는 책들을 보았다.
“재벌 회장이 있어 보이려고 어지간히 꾸며 놨네요. 솔직히 누가 이런 고전들을 찾아서 보겠어요?”
“매형이 학벌 콤플렉스가 있었어. 못 배운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었지.”
연호의 말을 듣고 있던 미주의 시야에 뭔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아니, 무슨 꼬투리라도 잡고 싶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제 시선에 들어온 책이 수상쩍게 느껴져 말했다.
“연호 씨, 이 브리태니커 사전. 가만히 보니 이 책장의 중심에 있어요. 이렇게 뒤로 물러서서 보면 상하로도 중앙이고, 좌우로도 중앙이야.”
미주의 말을 듣고 연호도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봤다. 정말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백과사전이 가장 중심에 있었다.
연호는 꽂혀 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오른손으로 훑다가 의아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1권, 2권, 그래, 백과사전이니 당연히 이런 식으로 넘버링이 된 거지만…….”
뜸을 살짝 들인 연호가 ‘브리태니커’라고 세로로 쓰인 1권을 꺼내 책장을 넘기다가 놀라움을 넘어 경악했다.
“세상에, 이것 봐, 미주야.”
연호의 손에 들린, 이제는 추억 속 물건 중 하나가 된 CD.
책 속에 끼워진 것도 아니고 네모나게 책을 파내듯 홈을 만들어 그 안에 동그란 CD를 숨겨 놓은 진 회장의 치밀함이란.
미주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연호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알 것 같아. 이 서재… 진수오가 제 범죄의 전리품을 보란 듯이 모아 둔 거였어. 그 누구도 여기에 뭔가가 숨겨져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을 테니깐.”
“…….”
“맞아, 그랬어… 매형은 늘 이 집에 처음 오는 사람이 있으면 여기를 보여 준다고 누나가…….”
연호가 뭔가를 생각하는 듯 말끝을 흐리면서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 안에 뭐가 있는지 너는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충격받을까 봐?”
연호는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는 CD의 뒷면을 보여 줬다. 미주의 눈에 들어온,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중년이 되었을 오래전 자살한 어느 여자 연예인의 이름. 이 악마 새끼는 하나하나 이름까지 적어 두고는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CD에 단순히 섹스하는 것만 찍어 놨을지 뭐가 있을지 몰라서 그래. 만에 하나 정말로 스너프라면…….”
그가 말을 끝까지 맺지 못하는 이유를 알기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범죄의 피해자였던 적이 있기에 어떤 배척이 아닌 배려의 뜻으로 연호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대답했다.
“알겠어요. 나는 혹시 모르니 저기 노트북이랑 책상 서랍이나 뒤지고 있을게요. 생각해 보니 CD가 사라진 지가 언젠데, 파일 형태로 외장 하드 같은 곳에도 이중으로 백업해 놨을 것 같거든요.”
“그러네. 여기에 넣어 둔 건 범죄 행위를 수집하면서도 진열하고 싶은 마음에 그랬겠지.”
연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미주는 서재 안에 있는 책상에 앉아 죽은 자의 노트북을 열었다.
“일단 눈에 보이는 거부터 먼저. 아, 부팅은 됐는데 역시 비밀번호가…….”
해커도 아니고, 당연히 컴퓨터를 다루는 능력이 보통에 가까운 미주는 잠겨 있는 노트북을 풀 수 없었다.
“단순하게 비밀번호를 조합해 볼 수밖에 없는데, 그걸 어떻게….”
미주가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옆에 다가온 연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가지고 가서 나한테도 있는 ‘팀’에게 넘겨주고 풀라 해야 하는데 여기 안에 어떤 내용이 있을지 몰라서 그게 걱정이야.”
“그 말도 일리는 있어요. 참, CD는 몇 장이나 나왔어요?”
“…열다섯 개. 웃긴 건 열여섯부터는 CD가 아니라 메모리 카드가 나왔어.”
“허… 그럼 최근까지 계속…….”
충격적인 진실에 미주가 허탈한 듯 허허-거리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자 연호도 고통스럽게 말했다.
“여기, 꽤 알 만한 이름들이 있어서 정말 끔찍해.”
“…그냥 당신도, 그 누구도 보지 말고 부숴 폐기했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편이 우리가 2차 가해를 저지르지 않는 거겠지. 아, 차라리 여기에서 서진우 이름이 나왔다면 좋았을 텐데.”
다행히 연호가 제 뜻에 따르겠다 말해 주자 미주는 살짝 미소 지은 채 고민에 빠졌다.
노트북은 인간 진수오의 비밀과 회장 진수오의 기밀이 담겨 있을지 모르기에 함부로 타인에게 줄 수 없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듯해 말없이 서로만 보고 있을 때였다. 아래층에서 사람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진우가 말한 ‘소각팀’이 온 걸까? 걱정스러운 미주의 얼굴을 보던 연호가 괜찮다는 듯 말을 건넸다.
“걱정하지 마. 뭔 문제가 생겼다면 서 전무가 벌써 2층으로 올라오고도 남았을 테니. 무소식이 희소식인 거 잊지 말고, 우린 우리 일에 집중해 보자.”
“그럼 눈에 안 보였던 거부터 해 봐요. 여기 책상 서랍 아래 칸이 금고 같아요.”
미주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버튼을 누르는 방식의 금고가 서랍과 일체형인 양 있었다. 연호가 몸을 숙여 빤히 그것을 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너무 대놓고 나 금고요, 하고 있어서 오히려 페이크 같아.”
몸을 일으킨 연호가 최대한 숨을 가다듬으면서 서재를 훑어보았다.
“보통 영화 같은 걸 보면 그림 뒤에 금고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하지만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다 뒤집어 봐도 금고 따위는 없었다.
“아, 역시 우리는 너무 영화를 많이 봤나 봐요.”
“그러게. 어디 비밀의 방으로 연결되는 통로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이 집에 그런 게 있겠냐마는…….”
허탈한 듯 연호가 의자에 앉아 마른세수를 하며 책장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브리태니커 사전을 몽땅 들어낸 바람에 비어 있는 책장 뒤쪽 벽에 뭔가가 보였다.
“씨발, 이 망할 브리태니커! 미주야, 여긴 거 같아!”
연호가 손을 깊게 넣으니 차가운 금속의 냉기가 손끝에 닿았다.
“이 칸에 있는 책 모두 빼내요! 다 쏟아 내!”
미주와 연호가 미친 듯이 책을 바닥에 집어 던지자 진정한 판도라의 상자가 드러났다.
“이 책장…… 20년 넘은 이게… 사실은 모든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니…….”
“근데, 연호 씨. 금고, 너무 최신식으로 생긴 것 같아요… 20년 전에 놈이 설치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연호가 금고를 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3년 전에 인테리어 공사할 때 여기 샹들리에를 바꿨다 들었는데… 그때 몰래 설치라도 한 걸까? 그간 절대로 손대지 않던 서재에서 뜬금없이 등을 바꾼 이유가 어쩌면 이거겠어.”
불행히도 판도라의 상자는 나름 최첨단의 방법으로 비밀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지문 인식이네… 음, 그럼…….”
슬슬 마음이 급해진 미주가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때, 연호가 어쩔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주야, 잠깐 내려갔다 올 테니 일단 넌 여기에 있어.”
“…혹시.”
“맞아, 그리고 내가 올라오면 아무것도 보지 마. 등 돌리고 서 있어.”
연호가 뭔 짓을 하려는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그가 1층으로 내려가고 미주가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하나 꺼내 들고는 금고를 등에 진 채 책을 펼칠 때였다.
“……!”
1층에서 쾅-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귀를 막았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연호가 올라오더니 몇 번의 실패 끝에 삐- 소리가 들리며 잠금이 해제된 듯한 소리가 들렸다.
“돌아봐도 괜찮으니까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연호가 금고를 열게 한 진 회장의 지문이 있는 신체 일부를 잘 감추고는 미주를 불렀다.
“외장 하드…… 그리고 파일이 잔뜩 쌓여 있네요.”
가로로 누워서 층층이 쌓여 있는 투명한 폴더들을 보면서 미주가 중얼거렸다.
연호는 손을 뻗어 그 안에 있는 것을 전부 꺼냈다. 문 쪽에 있는 것들은 인명이 들어 있는 파일들이었고,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것들은 뭔가 회계장부나 공책 같은 것들이었다.
연호는 책상 위에 마치 카드 게임을 하듯 부채꼴 모양으로 파일을 주르륵- 펼쳤다.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여기에 다 있어.”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 브리태니커 사전이 진수오의 사생활이었다면 말이다.
이건 진 회장이 거머쥐고 있는 차현과 범차현 계열과 심지어 정계까지 포함된 모든 것의 무시무시한 약점이 담긴 자료들이었다.
연호는 제 사진이 붙어 있는 폴더를 집어 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용물을 꺼내 뭔가가 빼곡히 쓰인 A4 용지를 보았다. 그리고 안에 있는 카드를 꺼내니, 그건 카드가 아니고 카드 형태의 납작한 USB였다.
“저기에 우리 비밀, 약점, 숨기고 싶은 거, 사생활, 기타 등등이 다 들어가 있겠네요.”
“근데 손으로 훑어보니 USB가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어.”
연호가 미주 자신의 사진이 붙은 파일을 건네기에 그 안에 든 것을 확인해 보지만 저는 카드가 없었다.
“왠지 차별받았는데?”
“USB가 있는 게 더 안 좋은 거지. 출력해서 보관하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자료가 있다는 뜻일 테니.”
그저 어깨를 으쓱이는 미주를 보면서 연호는 재차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만약에 나 혼자 이걸 열었다면 지금 로또 맞은 기분일 건데, 아쉽게도 각자 주인에게 돌아가야 할 듯해.”
연호가 웃으면서 건네는 진우의 폴더를 미주가 받아 들었다.
“오빠 거 보고 싶지 않아요?”
“당연히 보고 싶지. 근데 이제부터는 서진우랑 페어플레이할까 하고. 아마 서진우도, 아니 서 전무도 지금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열람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참고 있는 거야.”
“페어플레이, 웃기긴 하지만 아무튼 신사적이고 좋네요.”
미주가 진우의 사진이 붙어 있는 폴더 안에서 연호가 보여 준 것과 같은 USB 카드를 꺼내서 물끄러미 봤다.
“내 생각엔 그 안에 있지 않을까 싶어. 밑에 서 전무 쪽 애들 있으니 이거 열어서 확인하라 하고, 아니면 다시 찾아보는 거야.”
“…이 안에 날 윤간했던 놈들이 있다니. 그놈들 죽는 거 눈으로 보고 싶으면서도 그 얼굴들이 멀리서라도 희미하게 찍혀 있는 걸 본다면… 모르겠어요, 난. 벌써 15년 전인데도… 그냥 오빠한테 건네주고 쿨하게 돌아서 올게요.”
복잡한 표정의 미주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연호도 굳이 위로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게 선택을 존중해 주려는 듯 대답했다.
“내려가기 전에 내려가도 되는지 물어보고 내려가.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깐.”
연호가 뭔 뜻으로 하는 말인지 눈치챘다. 미주가 손에 든 진우의 파일을 들고 2층 계단 입구 앞에서 큰 소리를 냈다.
“오빠, 내려가도 돼?”
대답은 진우가 아니라 요한이 대신하고 있었다.
“미주 씨, 5분만 있다가 내려오세요.”
갔다 오겠다며 미주가 눈으로 말하고는 총총히 1층으로 사라졌다.
연호는 책상 위에 놓인 진수오가 수집해 놓은 비밀들 속에서 어느 한 곳에 시선이 멈췄다. 진우보다 더 싫어했던 인물. 재민의 사진이 붙은 파일을 꺼내 자료를 보다가 멈칫했다.
‘이건… 매형 글씬데?’
컴퓨터로 작성된 문서 위에 진 회장이 붉은색 펜으로 직접 적어 놓은 듯한 내용이 있었다.
[잔나비에게 확인함]
“잔나비? 잔나비…가 뭐지?”
대체 무슨 뜻인지 연호가 고개를 갸우뚱할 때,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었다.
‘차장님, 윤희주가 살아 있을 때부터 충돌했던 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명 잔나비파인데, 걔네들이 상당히 윤희주한테 원한이 깊었다고…….’
8년 전 미주의 비밀이 궁금해 백호를 부산으로 보내 알게 된 과거에서 나왔던 이름이었다.
윤희주의 교통사고, 잔나비파, 미주의 고통, 그리고 진우의 살인. 이 모든 인과관계는 서로 어느 정도 유기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믿고 있었는데.
“혹시 내가 놓친 게 있는 건 아닐까?”
이상한 예감. 그 누구의 파일에도 죽은 진 회장이 직접 무언가 적어 남긴 게 없는데, 왜 정재민의 파일에만 무언가 써 놓은 것일까?
“잔나비… 맞아. 그 조직의 이인자부터 시작해서 서진우가 다 쓸어 버린 바람에 사실상 와해되었다고 백호가 말해 줬는데…….”
잔나비라 불리는 놈이 일인자라서 잔나비파라 불렸다고 했다. 그런데, 잔나비에게 확인했다니.
‘그놈은 살아 있는 건가…? 뭐지, 대체…….’
연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폴더 안에 있는 USB를 꺼내 유심히 보고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생각했다. 미주한테 재민은 파일만 있었다 말해야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