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29. 심판의 밤 - 2 (31/53)

4권

29. 심판의 밤 - 2

* * *

“개갈보 년 같은 게 감히 날 건드리려고 하다니.”

진 회장은 예나를 만나러 간 게 아니었다.

미주가 눈을 꼭 감으며 계획이 실패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 조심하고 또 치밀하게 하나하나 열두 번도 더 경우의 수를 헤아려 가며 준비했건만.

이제는 모든 걸 눈치챈 늙은 여우가 지금 예나의 집으로 향하고 있을 두 남자에게 무슨 덫을 놓았는지 몰라 아득해지고 있었다.

“좆 같은 년. 꽤 준비했던데, 넌 나한테 안 돼. 저 개잡년에 창녀 애미를 둔 동생까지. 싸그리 다 이제 좆 될 각오 하는 게 좋을 거야.”

미주는 터질 것 같은 심장 때문에 점차 호흡이 가빠 왔다. 제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진 회장을 곁눈질로 보면서 생각했다.

‘진우 오빠. 오빠가 개입된 건 모르는 걸까?’

놈의 입에서 진우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음을 캐치했을 때, 악마가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일어나. 죽기 전에 떡 한번 쳐야지. 건드려 달라고 계속 날 자극했으니 씹질 정도는 해 줘야 인지상정 아닐까?”

연희가 안 된다는 듯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였다. 하지만 미주는 괜찮다는 듯 그녀의 손을 한 번 꽉 잡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떡, 쳐 줄 테니 119부터 불러요.”

미주가 몸을 옆으로 돌려 이제는 얼굴 앞에 총구를 들이밀고 있는 진수오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119라. 저년, 살려 줄 거면 힘들게 반쯤 죽여 놓을 필요가 없었잖아?”

히죽이며 가죽 장갑을 낀 채 총을 겨누고 있는 진 회장을 보면서 미주의 다리가 덜덜덜 떨려 왔다.

지금 이 순간이 어찌 겁나고 두렵지 않겠는가? 제아무리 간이 크고 담대하다 한들 말이다.

총기가 불법인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총을 들고 저와 아내를 죽이겠다 말하는 늙은 사내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날을 생각해. 그 새까만 밤… 나는 살았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어도 살았어. 정신 차려, 윤미주. 방법이 있을 거야.’

미주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최대한 머리를 굴리며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떠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죽일 거면 당신이 들고 있는 그 총으로 쐈으면 됐지, 굳이 머리를 내리칠 필요가 있었을까?”

형형한 눈빛을 내며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두렵지 않다는 듯 당돌하게 묻는 모습에 진 회장은 맞혀 보라는 듯 되려 물었다.

“그럼 이유가 뭘까? 너 이 쌍년, 꽤 똑똑하다고 잘난 척했으니 맞혀 봐.”

미주는 알 만하다는 듯 일부러 반말로 코웃음을 치면서 대답했다.

“사실 그 총이 진짜 총이 아니라든가, 총알이 없거나, 진짜 총이라 해도 쏘는 순간 총소리가 나겠지. 여기 재벌 회장님들이 드글드글 사는 동네에 경호원 하나 없는 집이 어딨어? 누가 신고해도 백 번 더 신고했겠지.”

추리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진 회장은 여전히 미주를 겨눈 채 피식거리며 대꾸했다.

“아니, 내 마누라는 산 채로 발정 난 개한테 던져 주려고. 너무 쉬우면 재미없잖아? 그래서 저년 죽기 전에 개들이랑 즐기는 걸 이 눈으로 보려고.”

“이… 금수만도…….”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말에 미주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이를 갈고 있을 때였다.

쨍그랑-!

제 얼굴을 겨누고 있던 총이 갑자기 옆으로 움직이더니, 연희가 아끼던 백자를 향해 발사된 게 아닌가!

미주가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총알이 발사되는 공포를 직접 느끼고 있을 때였다. 즐겁다는 듯 진 회장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이래서 여자들도 군대를 가야 해. 불알 달린 새끼였으면 내가 손에 쥔 게 뭔지 바로 알고는 총알이 있니 없니 그딴 개소리 안 지껄였을 건데.”

미주는 당연히 총기에 대한 지식이 전무 했다. 그래서 지금 진 회장이 지껄이는 말 자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그가 한숨을 쉬면서 나긋하게 말했다.

“소음기. 한 번쯤 영화에서 봤을 텐데?”

그래서 ‘탕-’이 아니라 ‘퍽-’과 ‘픽-’에 가까운 소리가 났던 걸까? 다시 제 얼굴을 겨누고 있는 총구를 보며 이제는 턱까지 덜덜 떨렸다.

“차연희 저 씨발년. 내 돈, 아니 내 아버지 돈으로 망해 가던 차현 그룹, 아니지. 그땐 그룹도 아니었어. 차현 건설 살려 놔 줬더니 평생 더러운 돈 받은 양 저년 애비도, 저년도 그리고 저년 동생까지 모두 다 날 경멸했지.”

진 회장은 미주에게 계속 총을 겨눈 채 자연스럽게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며 승리자가 된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나 때문에 차현이 여기까지 온 거면서 저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귀족인 것처럼 구는 게 어찌나 좆 같은지.”

“그래서 전 회장을 죽이고 희주 오빠를 당신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군요.”

미주는 최대한 제 안의 공포를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표정만큼은 덤덤하게 진수오에게 그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미끼를 던졌다.

“그래, 차씨들한테 뺏길 수 없었어. 나 역시 차현을 이만큼 키운 공이 있었으니깐.”

희주 이야기를 꺼내서일까? 진 회장은 바닥에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연희를 발로 한 번 차고는 식탁에 앉았다.

그러고는 총을 만지작거리더니 식탁에 내려놓고 미주를 음흉하게 보면서 계속 지껄였다. 물론 총구는 여전히 저를 향해 있어, 수틀리면 그가 바로 집어 들고 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내 아들, 배신당해 죽다니. 미희가 알면 얼마나 슬퍼할까?”

“미희? 아, 그렇지. 당신은 항상 내게 말했어. 넌 엄마를 많이 닮았다고.”

진 회장이 사실은 저를 통해 엄마를 보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으면서. 그를 흔들 묘수가 생긴 듯해 차분한 눈동자로 말했다.

“그래, 넌 정말 나이가 들수록 미희랑 많이 닮아 가서 가끔 놀랄 때가 있었어. 특히 이 눈… 내 아들 눈도 미희랑 똑같았는데 너 역시 그 눈을 하고 있어서 얼마나 꼴렸는지 모르지?”

“…거짓말. 너 일반적인 섹스에 안 서는 거, 나 다 알고 있어.”

미주는 마치 스트립쇼를 하듯 입고 있던 옷의 단추를 하나씩 풀면서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우리 엄마 사랑했어?”

“…널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랑했지. 너만 안 낳았어도 지금껏 살아서 내 옆에 다시 돌아왔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날 미워했구나.”

“그래. 생각해 보니 더 좋은 생각이 나더라고. 네 아이를 죽이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고 말이야. 거기에 덤으로 연호까지 괴롭힐 수 있으니, 일석이조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간신히 참아 냈다. 입고 있던 실크 블라우스를 보란 듯 벗어 던졌다. 브래지어 차림으로 그의 앞에 바짝 다가서 말했다.

“떡 치자, 빨리. 엄마랑 딸 먹는 거, 남자들 꿈이라면서?”

조금만 더 다가선다면 총을 집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주는 최대한 야릇한 목소리로 진 회장을 자극하려고 했다.

“근데, 아주버님. 내가 이렇게 벗어도 좆이 안 서잖아? 근데 어떻게 떡 치려고? 나도 죽기 전에 섹스 정도는 하고 죽고 싶은데.”

그의 눈빛에 분노와 함께 욕정이 서리는 찰나였다. 미주는 죽을 용기로 손을 뻗었다.

“씨발 새끼, 넌 내가 죽여.”

태어나서 손에 쥐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던 권총을 미주가 거머쥐었다.

“어디 한번 쏴 봐. 네년한테 그럴 용기가 과연 있을까?”

“닥치고 죽어, 개새끼야!”

그 순간만큼은 정말 진심이었다.

원래 진우와 연희, 연호와 의논된 건 진수오의 더러운 변태적인 사생활을 증거로 남겨 그를 제 발로 회장직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따르지 않으면 이 상상을 초월한 도착적 행각을 차씨들의 외가인 언론사를 통해 대대적으로 뿌리겠다는, 어쩌면 비열한 협박 말이다.

연호가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는 진수오의 비리 자료와, 진우가 미주에게 완전히 오픈하지 않았던 최후의 보루인 김 기사를 통한 그의 살인 청부 및 교사에 대한 증언을 터트리려고 했다.

물론 진우가 연호가 가진 것 말고 따로 쥔 진 회장의 비리들도 있었다. 진우가 다른 건 다 차치하고 분식 회계만으로도 그는 끝났다 말했으니깐.

아무튼, 이 세 가지면 진 회장을 완전히 추락시켜 나락으로 떨어지게 잘근잘근 밟아 다시는 재기할 수 없게 할 수 있다, 넷은 그리고 미주는 믿었다.

그를 죽이는 옵션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살인은 솔직히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수 있음에 어느 정도 배제해 놓았다.

모든 걸 잃은 진수오가 세상 사람에게 잊혔을 때쯤 미주는 제가 한고조의 여후가 되려고 했었다. 어차피 죽이는 건 너무 쉬웠다.

하지만 연희는 빈사 상태가 되고 어쩌면 예나와 제가 사랑하는 남자가 진 회장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단 하나, 제발 진우 오빠만이라도 이 칼날을 피해 지금 우릴 도울 수 있는 상황이기를.’

진수오가 방금 인정했듯이 배 속의 아이는 저 악마 때문에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미주는 피가 끓는 분노 속에서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 스스로 살인자가 되기로 결심해 방아쇠를 당겼다.

“……?”

하지만 철컥, 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미주가 놀란 마음에 순간 다음 방아쇠를 당길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할 때였다.

악마는 집이 떠나갈 듯 웃으면서 미주의 뺨을 후려치며 일갈했다.

“방금 식탁에 앉을 때 일부러 안전장치를 걸어 놨지. 따먹기 전에 장난 좀 쳐 볼까 하고.”

당연히 단 한 번도 총기류를 만져 본 적도, 그걸 어떻게 다루는지 알 필요도 없는 삶이었기에 미주는 그저 당기면 되는 줄 알았다.

‘한 번 더 손가락을 움직여야……!’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고 할 때였다.

“씨발년!”

놈이 뺨을 힘껏 때리자 미주의 몸이 휘청이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끝까지 손에서 총을 놓치지 않고는 그를 향해 다시 한번 총구를 겨눠 보지만 이미 상황은 역전되고 말았다.

“푸하하하! 개썅년이…, 이게 무서운 줄 모르고.”

제 꾐에 빠진 미주가 우습다는 듯 진 회장이 발길질하며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렇지만 미주 역시 지지 않고 있는 힘껏 물리력을 행사하면서 저항하기 시작했다.

“내가 죽인다고 했지!”

권총의 안전장치도 어딨는지 모르고 지금 린치를 당하고 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오른손에 쥔 권총을 쏘지 못한다 해도, 솜털 같은 주먹으로 그를 때리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타격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씨발! 죽어!”

미주가 사자후 같은 목소리로 죽을힘을 다해 권총의 아랫부분을 놈의 얼굴에 휘둘렀다. 여기서 죽더라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라도 하고 죽고 싶었다.

그런데 조금 빗맞긴 했지만 제가 휘두른 것이 놈의 코뼈에 맞은 듯했다.

“개호로 잡년이, 감히!”

묵직한 통증을 느꼈는지 검지로 코밑을 닦던 진 회장이 묻어 나오는 피를 보고 더는 봐주지 않겠다는 듯 노성을 질렀다. 그러곤 뒷걸음질 치며 도망치는 미주의 목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을 때였다.

미주는 저를 짓누르는 반동에 그만 권총을 떨어뜨리며 놓치고 말았다.

“씨발년아! 이제 알겠지? 내가 사람 죽일 때 제일 좆이 잘 선다는 거?”

진 회장이 미주의 몸에 올라타 양손으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으… 으…….”

“목이 졸리니깐 흥분되지? 응? 보지가 막 벌렁벌렁하지? 이 개갈보 창녀야!”

눈의 핏줄이 다 터지는 기분이었다.

“…어…… 으으…… 흐으…….”

목뼈가 부러질 것 같은 압박에 손을 휘저으며 마지막 발악을 해 보지만 말이다. 점차 눈앞이 노래지면서 손에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개좆 같은 년. 이걸 찍어 놓고 두고두고 봐야 하는데.”

‘아… 이대로… 죽을 순…….’

“죽여 놓고 실컷 박아 줄 테니 기대해. 빨리 뒈져, 개썅……!”

커컥-거리는 숨 막히는 소리 속에서 의식이 가물거린다, 느꼈을 때였다.

“개좆 같은 새끼. 날 먼저 죽였어야지.”

익숙한 우아한 목소리가 미주의 귓가에 마치 대포처럼 크게 들렸다.

진수오가 놀란 듯 목을 조르던 손에 힘을 빼면서 뒤돌아보며 일어났다. 미주의 반쯤 열린 동공 사이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설마……?’

그 순간, 진 회장이 직접 알려 준 대로 소음기가 달린 총이라 탕-이 아니라 퍽- 에 가까운 소리가 났다.

“차연희, 너 이……!”

비틀거리는 진 회장을 향해 머리를 맞아 피를 반쯤 뒤집어쓴 연희가 무서울 정도로 안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글록, 나도 좋아해, 여보. 손에 착- 감기는 이 기분, 얼마나 짜릿한데?”

“이 썅……!”

어깨를 맞은 듯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움켜쥔 진수오가 연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연희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게, 마치 슬로 모션처럼 미주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퍽퍽-거리며 계속 이어지는 총성.

대체 권총에 총알이 몇 개나 들어 있는 걸까?

소음기가 붙어 있기도 했지만 쏟아지는 폭우와 천둥 번개 속에서 총성은 묻히고 있었다. 그리고 연희가 격발한 총알은 단 한 발도 빗나가지 않았다.

처음 쐈던 어깨. 그리고 아랫배, 가슴.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부터 사격을 취미 삼아 했던 게 이런 결말을 맺게 될 줄 연희도 몰랐을 것이다.

“으으아아아……!”

차라리 즉사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온몸이 총알로 난도질 된 채 고통에 몸부림치다 과다 출혈과 장기 파열로 죽을 예정이었으니깐.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제가 가지고 태어난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얻으면서 위로 올라갔던 한 남자가 서서히 아래로 쓰러지고 있었다.

그것도 단 한 순간도 사랑한 적 없이 처음부터 이용만 하려 접근한 아내에게 당하다니.

연희는 권총이 격발되면서 제 몸에 전해지는 반동을 오롯이 견뎌 냈다. 그리고 굳은 것처럼 서서 남편이 허물어지는 걸 보았다.

“아… 관장님…….”

미주가 숨을 헐떡이면서 겨우 몸을 일으킬 때, 악마라고 믿었던 남자가 실은 인간이었음을 보여 주는 붉은 피가 점점 주방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

미주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캑캑대면서 아직 완전히 숨이 끊어지진 않았는지 움찔거리는 진수오의 몸뚱이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연희 역시 못 박힌 듯 서서 이제는 모든 총알을 써 버린 빈 권총을 여전히 양손으로 쥐고는 한때 살을 맞대고 살았던 남편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푸드덕거리기도 하고 감전이라도 된 듯 사지를 뒤틀던 차현 그룹 회장은 눈도 감지 못한 채 마지막을 맞이하는 듯했다.

비참하게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제가 얕잡아 본 여자들에게 보여 주면서 죽는 수치가 진수오에게 내려진 천형天刑이겠지.

미주는 끝까지 눈을 떼지 않고 그의 목숨이 사라지는 순간을 보았다. 그러다 종국에 모든 움직임이 멈추자 그가 목을 조르는 바람에 실핏줄이 다 터져 붉어진 눈으로 겨우 일어났다.

“지옥에 먼저 가서 기다려. 내가 곧 따라갈 테니.”

터져 나오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미주의 얼굴에 흘러내리고 있을 때였다. 그제야 권총을 바닥에 내던진 연희가 다가와 손을 붙잡았다.

“끝났어. 이제 다 끝났어.”

“네, 관장님… 진짜 다 끝났어요.”

두 여자가 부둥켜안고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서로 위로하듯 등을 다독이면서 이 끔찍한 비극 한가운데서 흐느꼈다.

미주와 연희가 주방 가장 구석 싱크대 아래에 등을 붙인 채, 바닥에 이미 홍수처럼 넘치고 있는 붉은 피를 보며 무엇을 해야 할지 허망해하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두 여자 앞에 연호가 상기된 얼굴로 나타났다.

“미주야! 누나! 무사한 거지?”

“괜찮아요. 나는 괜찮은데, 관장님이 머리를 맞아서…….”

연호는 피의 홍수 속에 누워 있는 진 회장을 보고는 놀란 듯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특유의 냉철한 이성으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미주에게 말했다.

“미주야, 일단 여기에 더는 있지 말고 저쪽으로 가자. 침실로… 지금 서진우가 여기로 오고 있으니…….”

진우가 오고 있다는 말에 미주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의 부축을 받으며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범죄의 현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누나, 우선 누워. 아니, 누우면 안 되나? 머리를 맞았다니. 지금 119 부를 테니깐…….”

조금 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연호가 미주의 말대로 심하게 다친 연희부터 병원으로 보내려고 하자 누나는 동생을 말렸다.

“안 돼, 연호야. 지금은 안 돼. 이대로 갔다가는 여기 일, 제대로 수습 못 할 수 있어. 서 전무가 온다니 그가 오고 나서 의논하고 움직여도 충분해.”

“안 돼요, 연호 씨. 빨리 병원부터…….”

저를 다른 의미로 말리는 두 여자 사이에서 연호가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였다. 연희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죽였어, 저 새끼. 그러니 증거를 없애 놓고 핑계를 만들어서 가야 해.”

“……누나.”

“올케, 나 괜찮아. 총으로 사람 쏴 죽일 만큼 정신머리는 있어. 그러니 서 전무 오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 응?”

연희가 당장 병원에 갈 수 없는 이유가 이해된 연호는 알겠다는 듯 대답했다.

“그 대신 몸이 너무 이상해지면 절대로 참지 말고 말하고. 서진우 아마 30분 내로 오니, 잠시 아무 생각 말고 누나는 진정하고 있어.”

걱정과 단호함이 섞인 동생의 말에 연희는 대답 대신 침대에 기댔다. 연호와 미주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안방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미주야, 괜찮아. 살았으면 됐어.”

연희의 상태가 더 안 좋은 듯해 차마 먼저 물을 수 없었던 게 있었다. 목을 졸린 손자국이 그대로 나 있는 미주가 브래지어 차림으로 제 앞에 서 있었다.

연호가 눈물을 삼키며 미주를 끌어안자 미주 역시 그를 안으며 무너졌다.

“무서웠어요. 너무 무서웠어. 갑자기 그놈이 튀어나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해서…….”

“내가 왔어. 이젠 아무 걱정 하지 마.”

미주를 잠시 떼어 낸 연호가 양복 상의를 벗었다. 반쯤 헐벗고 있는 그녀의 어깨에 둘러 준 뒤 다시 등을 토닥였다.

“오피스텔로 가고 있는데 당신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어. 너무 급한 목소리로 빨리 다시 돌아가라고. 매형이, 아니 진수오 그 새끼가 함정을 팠다고. 여기서 출발한 지 겨우 15분 됐는데, 돌아오는 15분이 얼마나 길었는지 너는 모를 거야.”

“…30분이라고요? 그 짧은 시간에 우리가 그 인간을 죽이다니.”

제게는 천 년과도 같았던 시간이라, 미주는 놀랍다는 듯 고개를 불안정하게 저으며 울먹였다.

“서진우가 오늘 진짜 필리핀에 갔다고 매형이 생각한 것 같아. 어떻게 속였는지는 나중에 당사자한테 직접 들으면 될 것 같고. 미주야, 일단 내가 있으니깐 진정하고, 안심해.”

미주가 격양된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들어 연호를 보면서 물었다.

“한예나는요? 그녀는 무사한 거죠?”

“그런 것 같아. 나도 자세히 들을 시간은 없었지만, 통화했을 때 뉘앙스를 보면 그 여자는 괜찮은 것 같았어.”

“다행이에요. 나 때문에 이 일에 뛰어들었는데, 혹시라도 잘못됐으면 나는… 나는…….”

그간 예나를 이런 더러운 일에 끌어들였다는 죄책감에 짓눌려 있었다.

스스로가 악녀가 되기로 자처했다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나름의 협상을 통해 거래했으니 죄의식을 가질 필요 없다, 자기최면을 걸곤 했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죄를 짓고 있음을 잘 알았다. 이젠 저도 사악하고 못된 영악한 계집이 되어 사람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터져 나오는 죄책감 속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연호도 미주의 마음을 다 알고 이해한다는 듯 그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슴을 빌려주었다.

미주가 한참을 그간 억눌린 여러 가지 감정들을 폭발시키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연호는 슬쩍 목을 빼곤 모니터에 비친 차를 보았다. 제 것과 비슷한 검은색 세단을 모는 남자.

“왔어, 미주야. 혹시 모르니깐 내가 나가서 직접 문 열어 줄게.”

처음으로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 두 남자가 같은 마음으로 현관에 들어서자 미주는 진짜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윤모개, 우니깐 더 못생겼네.”

일부러 저를 더 놀리는 진우의 말 속에 걱정과 안도가 가득이라 미주는 울다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지는. 지도 못생겼으면서.”

“사투리 나오는 거 보니 확실히 열 받았네, 윤모개.”

미주의 약을 살살 올리는 진우가 저를 보고 웃자, 연호도 피식 웃었다. 미주는 웬만하면 사투리를 거의 쓰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듣는 특유의 억양이 반가웠다.

“서 전무, 들어와서 얘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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