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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심판의 밤 - 1 (30/53)

28. 심판의 밤 - 1

* * *

“어머, 어제 관장님도 보셨어요, 그 영화?”

미주가 놀랍다는 듯 한 톤 올라간 목소리를 내자 같은 식탁에 앉아 있던 연희가 사람 뭐로 보냐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왜? 나 원래 줄리엣 비노쉬 팬이야! 퐁네프의 다리 보고 완전 팬 됐는데.”

“저는 세 가지 색 블루라는 옛날 영화를 어릴 때 비디오로 빌려 보고 줄리엣 비노쉬, 우와, 되게 우아하게 생겼다고 이랬는데 말이죠.”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연호가 누나를 흘깃 보면서 여자들의 수다에 끼어들었다.

“누나, 퐁네프의 연인들. 다리가 아니라.”

“얘는. 꼭 사람들 앞에서 지적한다니깐. 어휴, 진짜 동생만 아니면.”

연희가 맞은편에 앉은 연호를 보면서 대놓고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그러자 남매의 싸움을 중재하는 중후한 목소리가 어쩔 수 없이 참여했다.

“당신이 틀린 거 처남이 지적해 줘야 어디 가서 실수 안 하지. 다른 사람들은 당신한테 뭐라 못 하니깐 계속 틀린 거로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매형 말이 제 말인데 누나는.”

“어머, 당신까지 내 편 안 들고 연호 편든다, 이거죠? 나 진짜 빈정 상해서…….”

“아이고, 제가 차연희 관장님 편입니다. 남편의 삐뚤어진 누나 사랑을 이제 좀 알아주시며, 여기 한 잔 받으세요.”

누가 봤으면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 저녁 식사 시간에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진수오 차현 그룹 회장이 무혐의로 구치소에서 나온 일주일 후, 연호와 미주는 그간 노고가 많았던 그를 위로해 준다는 핑계로 진 회장의 자택에 와 있었다.

원수와 겸상하고 있다 해도 상대를 향한 날카로운 분노를 감추지 못할 만큼 넷은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으레 그렇듯 ‘너무 고생하셨다’로 시작된 레퍼토리는 자연스럽게 조금 쓸데없는 잡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밥상머리에서 검찰에 저를 찌른 놈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말이나, 그룹 회장이 구치소에 들어간 바람에 폭락한 주식 이야기나, 여자들이 한을 품은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었으니깐.

미주는 진수오가 풀려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연희를 통해서 영화를 전문으로 틀어 주는 방송사에 한 가지 부탁을 했었다.

심판의 밤 전야제 날 제가 특정한 영화를 꼭 방영해 달라는, VIP가 가진 권력으로 편성표를 조금 바꾸는 행위. 그리고 연희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 TV를 틀어 놓고 그 영화가 진수오의 시선에 들어가게 해 달라 부탁했다.

그 결과, 오늘의 즐거운 재벌 집 가정식 만찬에서는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왜냐면 늘 그렇듯 분위기를 주도하는 해맑은 재벌 사모님께서 어제 오랜만에 본 추억의 영화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냈으니깐.

“그런데 전 있죠, 사실 제레미 아이언스가 너무 멋있어서 줄리엣 비노쉬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돼요.”

이젠 30대 중반이 된 미주가 마치 소녀 팬의 얼굴을 하고 제 눈에 멋진 남자 배우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던 연호가 아내의 말을 거들었다.

“난 반대로 줄리엣 비노쉬한테 왜 약혼자의 아버지, 우리나라식으로 말하면 예비 시아버지잖아? 암튼 왜 끌렸는지 이해가 되는데.”

“뭐야, 둘이 같이 사이좋게 영화 본 거야?”

거기에 눈치 없는 척 연희가 끼어들면서 처음부터 셋이서 짜 놓은 각본대로 연기하고 있었다.

“아니. 각자 그냥 본 거야. 누나, 너무 앞서가지 마. 와이프 건강이 괜찮아지면 다시 합칠 거니깐.”

불화 때문에 별거하고 있다 해도 말이다. 사람들 앞에서는 아내의 건강 문제 때문에 잠시 떨어져 있다 늘 이야기해 왔기에 오늘도 모두가 알면서도 속아 주고 있는 거짓말을 능숙하게 할 때였다.

연호의 말에 미소를 살짝 짓고 있던 미주가 일부러 진 회장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며 말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니. 정말 배덕한 관계인데, 영화니깐 배우들을 보면 그냥 납득된달까.”

진 회장은 저를 보는 미주를 향해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결말은 좀 충격적이었어. 처남댁은 어땠는지 궁금하네.”

“어머, 회장님도 관장님이랑 같이 보셨나 봐요. 음… 저라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딱 철판 깔고 그냥 살았을 것 같기도 하고.”

“매형, 와이프 은근히 얼마나 뻔뻔한데요? 그러고도 남을 위인일 거예요.”

“얘는 이젠 자기 와이프까지 막 까고 있어. 진짜 연호 넌…….”

함정 같은 말을 가리기 위한 연호의 지원 사격에 더해진 연희의 보태는 말 덕분에 말이다. 대화의 주제는 더는 영화가 아니라 ‘차연호의 인간성’에 대해서 바뀌고 있었다.

미주는 남편을 흉보지 않고 조용히 시누이가 제 동생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걸 재밌다는 듯 듣고만 있었고. 그 와중에 간간이 저와 시선을 마주치는 진수오에게 미주는 지난 2년간 그랬듯 묘한 눈길을 주고 있었다.

미주가 연호와 결혼한 지도 벌써 햇수로 8년째였다.

처음 5년간 차현 그룹 회장 자택을 얼마나 수없이 드나들었는지, 진 회장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지난 2년간 자주 왕래하는 미주에게 어떤 특이점이 있다 여기지 않았을 것이고.

하지만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한 미주는 예나의 신분을 세탁하는 동안 저 역시 천천히 늙은 여우에게 제가 ‘여자’임을 계속 어필하고 있었다.

그간 종종 회장 부부와 술을 마시기도 한 미주는 연호와 사이가 안 좋은 점을 이용해 일부러 연희가 안주를 가지러 간다며 자리를 비울 때를 틈타, 진 회장 앞에서 술에 취한 척 남자가 그립다는 식으로 말을 흘릴 때도 있었다.

‘남편이랑 사이가 좋아질 수 있게 회장님이 좀 도와주세요. 도와주시면 뭐든 원하시는 대로 이 은혜를 갚을게요.’

때로는 말속에 은유를 넣어 넌지시 그를 흔들기도 하면서, 점차 저를 보는 진 회장의 눈빛이 충분히 익기만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연호가 방패를 자처해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손을 잡았을 때부터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런. 오늘 차현 전자 최 사장이랑 한잔하기로 했는데 슬슬 난 나가 봐야겠어.”

“여보, 태풍이라도 치는지 밖에 비가 오고 난린데.”

“누나, 그만해. 매형, 너무 취하지 마시고 일찍 들어오세요. 최 사장은 매형 쉬지도 못하게…….”

연호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진 회장은 염려 말라는 듯 부드럽게 대답했다.

“내가 먼저 보자 했어. 구치소에서 나오던 날,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통화했거든.”

어쨌든 집안의 어른이고 한 기업의 수장이니 볼일 있다 나가는 일에 모두 일어나 웃으면서 배웅해 줬다.

연희는 진 회장이 앉아 있던 테이블의 상석을 보면서 피식거리며 웃었다.

“최 사장이 서 전무 편이 된 거, 진짜 모르고 거짓말로 핑계 대는 건지.”

“내가 알기론 모르는 것 같았어. 알아도 뭐, 어쩔 순 없지만. 아무튼 매형도 대단해. 나온 지 며칠 됐다고 계집질이나 하러 갈 생각인지.”

연호가 혀를 끌끌 차면서 인상을 구기자 미주가 대꾸했다.

“남자들은 다 똑같지 않나? 머릿속에 섹스 생각밖에 없는 거.”

“네가 몸이 달아오르게끔 한 건 아니고? 당신이 이런 수완가인지 내가 미처 못 알아보다니.”

연호가 농담처럼 두 사람의 경직된 분위기를 조금 유연하게 풀었다. 미주도 더는 가시를 돋우지 않으며 오랜만에 편안하게 대화한 것 같았다.

연호 역시 오늘 같은 날은 차갑게 굴지 않으려는 미주의 마음을 안다는 듯 조용히 미소 지으며 참았던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을 때, 대리석 식탁에 둘러앉은 세 명 사이에는 어쩐지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똑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일반화시키진 말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연호가 옆에 앉아 있던 차분한 얼굴의 아내에게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그래요,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면 안 되지.”

“너네도 참, 부부 싸움은 나 없는 자리에서 해. 몇 달 만에 얼굴 봐 놓고는 또, 또, 또 이런다.”

질렸다는 듯한 연희의 말에 미주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저희 이런 거 하루 이틀도 아닌 거 아시면서.”

어쩐지 싱긋이 웃는 듯한 연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주도 따라 일어나면서 말했다.

“가 봐야 해. 알다시피 시간 차를 둬야 하니.”

“아… 연호 씨, 할 얘기가 좀 있는데.”

머뭇거리는 미주를 본 연희가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빠져 주고 있었다.

“그럼 나는 여기 먹은 거 대충 치우고 있을게. 미주 씨는 연호 따라 차고까지 갔다가 나랑 커피 한 잔 마시고 뒤따라가자.”

오늘 저들 부부와 진 회장 내외의 가족 모임이라 연희가 미리 일러둔 덕분에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은 모두 오후에 퇴근한 상태였다.

그들에게 구치소에서 고생한 남편이 하루 정도는 편히 쉬고 싶어 한다고 말해도 어떤 의심도 받지 않을 수 있는 건, 연희가 그간 종종 이런 식으로 고용인들을 쉬게 해 준 적이 꽤 있기 때문이었다. 차현의 큰 사모님은 인자한 성품을 가졌다,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알려져 있었으니깐.

일부러 집 안에 저들 말고는 외부인을 두지 않은 덕에 남은 셋은 오늘 있을 ‘일’에 대해서 누가 들을까 걱정할 것 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덕분에 태어날 때부터 공주님이었던 연희가 정말 오랜만에 직접 손에 물을 묻혀야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지만.

미주는 알겠다는 듯 연희에게 살짝 눈인사를 건네고는 연호와 잠시 몇 발자국도 안 되는 저택의 주차장까지 같이 걸었다.

“내가 수완가라고요? 당신 옆에서 다 보고 배웠다 비난하고 싶지만… 사실은 내가 원래 못되고 나쁜 년이라는 거 알면서.”

“하긴, 처음부터 Bitch인 걸 숨기지 않았잖아? 그런데 있지, 착한 척하고 있는 윤미주가 사실은 나쁜 년이라는 게 꽤 매력적이거든.”

일부러 Bitch라는 단어를 굉장히 미국인스럽게 발음하자 미주는 피식 웃었다. 연호가 늘 타고 다니는 검은색 세단 앞에 섰을 때, 뭔가 결심한 듯 그가 몸을 돌려 많은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보았다.

미주는 조금 담담하게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에 대해 입을 열었다.

“할 얘기는 고맙다는 거예요. 내가 뭔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면서도 날 도와주려 했으니…….”

말끝을 흐리는 미주에게 연호는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미주야, 네가 하고 싶은 일, 하고자 하는 거 다 해. 그게 무엇이든 난 끝까지 널 지켜 줄 거야.”

“…….”

“그리고 매형, 우리 아버지도 죽였어. 그러니 어찌 됐든 그 사실을 안 이상 나 역시 그냥 둘 순 없었어.”

제 말에 슬픈 듯한 표정을 짓는 미주를 보면서 연호는 작은 조각 같은 진심을 꺼내 보였다.

“미주야, 오늘 천둥 번개 치는데 괜찮겠어?”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어요.”

“그렇지.”

“하지만 내 옆에는 남편이 있으니, 오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든든할 것 같네요.”

빈말이라도 좋으니 저를 여전히 남편으로 생각해 준다면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듯 환하게 웃으면서 연호는 운전석 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조심히… 나도 곧 거기로 갈 테니…….”

미주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차현 그룹 회장 자택을 빠져나가는 연호의 차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제 곧 벌어질 심판의 시간.

진 회장이 제게 마수를 뻗기를 기다렸지만, 역시 그리 쉽게 넘어오지 않음에 미주는 미끼가 되길 포기하고 그를 잡기로 했다.

오늘도 사실 배덕이니 뭐니 하면서 그를 일부러 도발한 건, 저 때문에 흥분한 놈이 변태적인 욕구를 푸는 것에 집중하길 바라서였다.

진우와 연호가 먼저 가 있을 곳은 강남에 있는 한예나의 오피스텔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플레이 파트너를 만나러 가면서 계열사 사장과 약속 있다, 능숙한 거짓말을 한 진 회장은 지금쯤 한창 흥이 오르지 않을까 싶었다.

피학적인 플레이를 할 때 늘 마약을 사용하는 그는 벌거벗은 채 라텍스 마스크를 쓰고 있을 것이다. 진수오는 질식할 것 같은 그 마스크를 써야지만 발기가 된다고 예나가 알려 줬었다.

오늘도 늘 그렇듯 그 변태적인 마스크를 쓰고 그녀가 밧줄로 양손을 등 뒤로 결박시킬 때 비로소 흥분하기 시작하겠지. 그런데 그 마스크는 콧구멍만 뚫려 있는, 눈도 입도 막혀 있는 것이라 문 열리는 소리가 나도 누가 들어오는지 그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저를 지배하는 도미넌트가 아니라 진우와 연호가 눈앞에 서 있다는 걸, 익숙한 두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알게 될 것이고.

그 순간 진수오는 알게 될 것이다. 저는 이제 끝났음을.

미주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진 회장의 치욕의 순간을 이제 곧 눈으로 보는 즐거움을 만끽해 볼까 했다.

“여후가 척부인한테 했듯, 우리도 널 그렇게 만들어 줄게.”

더는 차고에서 꾸물거릴 수 없으니 미주는 연희가 기다리고 있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관장님?”

연희가 식탁을 치운다 했으니 주방 쪽에 있을 거로 생각하고 발을 옮기며 주방 쪽 코너를 돌 때였다.

“헉!”

미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뭔가 단단한 물체로 머리를 맞았는지 바닥에 피를 흘리며 깨어진 잔해들과 함께 쓰러진 연희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대체.”

몸을 숙여 급히 연희의 몸을 돌려 얼굴이 천장을 향하게끔 했다.

“제 목소리 들리세요? 빨리 119를…….”

제 말에 눈을 살짝 뜨며 입술을 달싹이는 연희에게 미주가 귀를 가까이 대자 그녀의 신음 소리 같은 말이 드문드문 들렸다.

“…도망… 빨리…….”

연희의 말을 듣는 순간, 뒤에서 소리 없이 나타난 인영이 미주의 관자놀이에 차가운 금속을 대면서 말했다.

“개갈보 년 같은 게 감히 날 건드리려고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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