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 복수는 나의 것 (29/53)

27. 복수는 나의 것

* * *

“나무아미타불.”

주지 스님을 따라 중년의 부부가 조용히 불경을 외우며 기도를 올렸다.

연희는 눈을 꼭 감은 채 스님의 독경 소리를 듣고 있는 남편의 옆모습을 흘깃 쳐다봤다. 제가 곁눈질을 한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진 회장은 깊은 상념에 빠진 듯했다.

연희는 남편이 왜 오늘 절에 오자고 했는지 이유를 알기에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당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죽은 날이 이 근처쯤이었지?’

그게 아니라면 그 여자가 낳은 죽은 아들을 기리고 있을지도.

진 회장이 진짜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딱히 묻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든 제게 털어놓을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처사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스님, 잘 지내셨죠?”

진 회장은 오랜만에 방문한 사찰을 아내와 함께 산책 삼아 천천히 걸으며 절 안에 상주하는 보살들과 거사들, 스님들께 인사를 하고 다녔다.

절에 가장 시주를 크게 하는 사람이었기에 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 차현 그룹 회장 내외가 다닌다는 이유로 줄을 대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부인회라는 이름으로 연희를 따르고 있었으니깐.

물론 실제로 종교 활동 및 대내외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건 사실이었다. 밝을 현 갤러리 관장인 연희가 갤러리에서 행사를 진행할 때마다 부인회가 동원되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아무튼, 그러한 연유로 진 회장 부부가 플로리스트인 한예나와 그날 만날 수 있었던 건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어머, 자기 오늘 웬일이야?”

연희가 먼저 차현 전자 최 사장의 아내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 회장님, 그리고 관장님까지. 평일에 어쩌다가 오셨어요?”

“아아, 그냥 이이가 한번 나들이 삼아 조용히 나오자 해서 나왔지.”

연희의 살가운 인사에 진 회장도 최 사장 아내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묵례를 했다.

“오늘 오시는 줄 알았으면 보살님들이랑……”

“아이고, 됐어. 그냥 조용히 왔다 가는 건데 뭔 또 일을 크게 벌이려고.”

여자들끼리 하하 호호 하며 가볍게 떠는 수다의 끝에 연희는 최 사장 아내 옆에 있는 어느 젊은 아가씨에게 관심을 표했다.

“자기야, 여기 이 보살님은 누구셔? 미안해요, 이제 봤네. 나이가 들어서 말이지. 요새 좀 그래, 내가.”

연희가 특유의 해맑음으로 처음 보는 아가씨에게 아는 체하자 최 사장의 아내가 옆에서 거들었다.

“아, 이번에 관장님께서 자선 바자회 열기로 했잖아요? 거기를 꾸며 줄 플로리스트세요.”

“난 또, 여기 절에 다니는 보살님인 줄 알았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젊은 아가씨는 정중하게 차현 그룹 회장 내외에게 인사를 하면서 수줍은 듯 웃었다.

“예나 씨, 먼저 차에 가 있어요. 나는 잠깐 관장님이랑 5분만 이야기하고 갈게, 응?”

예나를 먼저 보낸 최 사장의 아내는 연희에게 다가와 스스럼없이 말을 건넸다.

“아무리 자선 바자회라고 해도 우리 차현 그룹과 갤러리 이름 걸고 하는데 제가 그냥 있을 수 있나요? 요즘 트렌드에 맞게 장소를 좀 꾸밀까 하고…”

연희에게 잘 보이려고 굳이 과잉 충성을 눈으로 보여 주려 하는 최 사장의 아내가 어떻게 바자회 장소를 꾸밀지 말했다.

“근데 저 아가씨, 실력은 있는 거야?”

“아, 걱정하지 마세요. 나름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왔다는데 요새 그 뭐지? 젊은 사람이 하는 그… SN 뭐시기에서 꽤 유명한 꽃 만지는 사람이에요.”

진 회장은 아내의 옆에서 풍경을 구경하는 척하며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방금 마주친 젊은 아가씨는 제가 아는 여자가 분명한데 몇 년 만에 나타나서는 뜬금없이 플로리스트라니.

짐짓 여유롭게 대웅전 앞마당을 거닐면서 짧게 떠들고 있는 제 아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예전에 연예인 생활 아주 잠깐 했었대요. 그거 그만두고 적당히 할 일 찾아보다가 꽃을 배웠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연예계에 발을 담근 적 있으니깐 사진 같은 거 올리니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나 봐요. 잡지에도 실리고…….”

“그래, 어쩐지. 인물이 너무 좋다고 했어. 여자는 너무 예뻐도 팔자가 사나운 법인데, 그래도 꽃으로 잘 풀려서 다행이네.”

연희는 잠시 시간을 체크해 보더니, 양해를 구하는 듯 진 회장 쪽을 보면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아내의 메시지.

볼일을 끝낸 연희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진 회장은 조금 전의 우연한 만남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 * *

“그래, 일은 성사된 거지?”

미주와 연희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백화점을 돌면서 쇼핑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너무나도 사이가 좋다고 생각할 시누이와 올케는 큰언니와 막냇동생이 백화점에 함께 나온 것처럼 자연스럽고 친밀해 보였다.

“네, 바자회에서 진수오가 접근했다 하더라고요.”

그녀들이 걸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움직이고 있을 때는 둘을 지켜보는 이들이 가까이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그랬기에 나름대로 감시자를 피해 생각해 낸 대화법으로 미주와 연희는 차분하게 대화 중이었다.

“일러 주신 대로 회장님이 좋아하실 만한 취향들을 미리 잘 알려 뒀어요. 물론 뭐, 이미 예전에 한번 같이 잔 적이 있으니 더 잘 아는 듯했지만요.”

“그래, 이제 당분간은 그치한테 푹 빠질 거야. 근데 의심 많은 양반이 생각보다 쉽게 넘어왔네? 어떻게 한 거야?”

연희는 놀랍다는 얼굴로 미주를 보면서 물었다.

“아시다시피 원래 구면이잖아요. 그동안 힘들게 산 거 적당히 사연 팔이 하고, 눈물 좀 흘리고.”

“훗, 그래. 연기는 꽤 잘하는 것 같더라, 우리 배우님. 근데 있지. 남편이 뒷조사 다 끝내 놓고 접근했을 건데 미주 씨, 꽤 수완 좋은 것 같던데?”

미주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갑자기 회개한 어린양이 되면 백 프로 의심할 테니 적당히 그럴듯하게 꾸몄죠. 몸 팔다가 스폰 하나 잘 물어서 신분 세탁하고 고상한 취미로 외국까지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유명세를 탔다.”

“2년간 공을 들이더니 역시 보통이 아니네.”

“꼼꼼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천년 묵은 구렁이를 이길 수 없으니까요.”

미주가 눈웃음을 치면서 담담하게 말하자 그녀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최 사장네랑 엮을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요즘 서 전무가 좀 바쁜 것 같던데?”

두 사람은 대화하며 자연스럽게 백화점 라운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곳이라면 감시자들로부터 몸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선택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프라이빗 라운지에서 잠시 커피 한 잔 마시며 쉬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깐 말이다.

“모르는 척하시기는. 관장님께서 슬쩍 운을 떼셨으면서.”

미주가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연희도 의미심장한 웃음을 속에 살짝 윙크하며 커피를 홀짝 소리 내며 마셨다.

“이제 난 할 만큼 했어. 그러니 연호는 무조건 여기서 빼 주기.”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곧 차현 그룹 부회장님이 회장이 될 차례인데, 이 흙탕물이 튀면 안 되잖아요.”

미주는 눈을 휘어 웃으며 연희에게 단단히 의사를 밝혔다.

같은 결말을 원하는 두 여자는 서로가 바라는 것을 위해 손을 잡아 협력하는 중이었다.

2년 전.

예나를 포주로부터 빼낸 후, 천천히 시간을 들여 진 회장에게 접근시키기 위해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해 여기까지 왔다.

진우와 제가 개입된 걸 숨기기 위해 가상의 홍콩인 금융가 스폰서를 만들어 예나를 서포트해 주고 있는 거로 이야기를 꾸몄다.

홍콩인 금융가는 매력적인 연예인 출신 한국인 콜걸에게 빠져 빚을 해결해 주고 서울에 고급 오피스텔을 마련해 준 후 가끔 서울을 찾을 때마다 그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콜걸은 스폰서의 돈으로 과거를 지우고 먼 프랑스까지 날아가 제2의 인생을 살게 해 줄 기술도 배워 왔다. 마지막에 홍콩인 금융가는 SNS에서 유명세를 타는 셀럽이 된 애인의 행복을 빌어 주면서 그녀를 보내 줬다는 스토리.

치밀하게 준비한 진우와 미주의 계략에 연희라는 지원군까지 더해지니 진수오의 눈을 다행히도 가릴 수 있었다. 예나가 알려 온 말에 의하면 진 회장이 그 홍콩인과 관계를 끊으라고 말했다고 하니 말이다.

거기에 차현 전자 최 사장이 진수오의 또 다른 비자금을 담당하는 자라는 걸 연희가 알아내면서 예나를 최 사장 와이프 쪽으로 은근슬쩍 붙일 수가 있었고. 물론 최 사장이 진우에게 이미 회유를 당해 저들 편에 붙었음을 진 회장은 여색에 빠져 모르는 듯했다.

“연호가 검찰에 지금까지 모은 남편 비리 자료를 넘긴 것 같아.”

연희의 입에서 남편의 이름이 언급되자 미주는 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좀 말려 주지 그랬어요? 구속되면 내가 지금까지 공들인 게 다 물거품이 될 텐데.”

“그 전에 제 선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듯해. 아무리 말려도 내 말 안 들어.”

“그럼 이제 곧 검찰 수사가 시작될 수도 있겠네요.”

“아니, 시기는 검사랑 거래한 것 같아. 우리 일이 실패하면 바로 검찰을 움직일 생각인 듯해.”

빈 잔을 내려놓은 연희가 얼굴에서 표정을 지운 채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잖아? 연호가 왜 그러는지.”

“알면, 그냥 가만히 좀 있어 달라고 해 주세요.”

미주는 살짝 복잡한 얼굴로 곤란하다는 듯 애써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꾸미는 일, 연호가 모를 리 없지. 걔가 이러는 이유는 단 하나야. 미주 씨를 대신해서 복수해 주려고 그러는 거잖아.”

“…이젠 그 누구도 날 막지 못해요.”

“그래, 하지만 그게 연호의 사랑이야. 아내의 손이 더럽혀지기 전에 제 손을 더럽히겠다는 거. 걘 널 어떻게든 이 무시무시한 일에서 빼내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연희의 말에 미주는 조금 쓸쓸히 웃으며 대꾸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 일에서 그 사람만은 배제시킨 건…….”

어쩐지 흐려지는 미주의 말끝이 잔뜩 물을 머금은 것 같았다.

“벌써 2년이야, 떨어져 산 지.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희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씁쓸한 표정으로 잠시 커피 잔을 내려다보던 미주가 남은 커피를 괜히 티스푼으로 휘휘 휘저었다. 말이 없던 미주는 복잡한 감정을 떨치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관장님이 보시기엔 연호 씨가 넘긴 자료로 진 회장 혐의 입증이 가능할 것 같으세요?”

“어느 정도는. 걔가 어디까지 정보를 가졌는지 나한테도 다 오픈하지 않아서 정확히는 몰라도, 자신이 있으니 덤비는 게 아닐까 싶어.”

“저는 걱정이… 만에 하나 연호 씨 일이 어그러져서 진수오가 무혐의나 증거 불충분으로 나오게 되면 그가 남편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 같아서…….”

연희도 어느 정도 동의를 한다는 듯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어 미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만 해요. 그가 다치는 걸 볼 수 없으니깐.”

“연호는 네가 다치는 걸 볼 수 없다던데.”

말 없는 미주를 보던 연희가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래서 이제 우리 배우님이 어떻게 연기를 할 건지 내가 물어봐도 될까?”

연희의 물음에 미주는 묘한 미소를 짓더니 눈빛에 힘을 주면서 대답했다.

“원하면 안 되는 걸 원하게끔 옆에서 살살 부추기고, 입김을 넣고, 생각을 심으려고 이렇게 공들여서 옆에다가 제 사람을 심은 거 아시면서 묻기는.”

미주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하는 말에 연희 역시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담담히 물었다.

“그래서, 죽일 거야?”

“…그건 너무 쉬워요. 좀 더 지독하고 고통스럽게, 한 고조의 여후가 척부인한테 한 거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요?”

“아, 사지를 잘라서 독에 넣었다는 인간 돼지? 뭐, 그게 그 인간한테 딱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여자들이 이렇게 끔찍한 대화를 나누는 걸 누군가가 들었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연희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살짝 치면서 말했다.

“다음 주에 이사회 열리는 건 알지? 나도 차현 건설 등기 이사에 이름 걸어 놓은 덕분에 가야 하니, 간만에 연호랑 밥이나 먹을까 하고.”

“어째, 바쁘신 부회장님께서 누님을 만나 주신대요?”

미주의 농담 섞인 말에 연희가 눈웃음을 치면서 대꾸했다.

“누나가 부르는데 와야지! 그리고 날 통해서 자기 와이프 소식 듣고 싶어서 그러잖아. 아니, 궁금하면 전화하면 되지….”

어떻게든 저와 연호의 냉랭하고 어색한 사이를 이어 주려 노력하는 연희를 보면서 미주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애매한 기분이었다. 어찌 됐든 그녀의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적당히 말을 받아 주었다.

“나쁜 소식은 전하지 마시고, 좋은 말만 옮겨 주세요.”

“그래도 말하지 말라고는 안 하네. 으이구, 알어. 말 안 해. 나도 2년간 중간에서 둘이 어떻게 좀 해 주려 해도 둘 다 고집이 아주 그냥…….”

혀를 끌끌 차는 연희에게 미주가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한참을 잡담을 나누던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주는 연희와 꽤 오래 같이 쇼핑도 하고 멋진 곳에서 식사도 하면서 보란 듯이 일부러 돈을 마구 썼다. 진 회장의 견제 대상이 되지 못하게 재벌 3세의 멍청한 신데렐라 아내 역할을 충실히 해 보였다.

늦은 시간 연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주는 정지 신호에 브레이크를 밟고 잠시 멍하게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서울의 밤거리는 이렇게나 휘황찬란한데 왜 내 눈에는 모두 흑백처럼 보일까?’

신호등이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익숙한 동작으로 오른발을 액셀로 옮기고는 자동차 핸들을 움직였다. 스물여섯 살이던 저는 장롱 면허라 대중교통이 편했는데 서른네 살 된 지금은 지하철을 언제 타 봤는지 까마득했다.

복잡한 생각들 속에서 미주는 조금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연희, 처음에는 그냥 이용하려고 했는데 이젠 점점 나도 모르겠어. 그 여자, 날 믿고 있는 것 같고 나 역시 지금은 그녀를 믿고 있잖아?’

2년 전, 차연희를 이 일에 끌어들이기 위해 진우와 짜 놓은 판은 이랬다.

여자를 하나 진수오에게 붙이는데, 거기에 두 사람이 드러나지 않도록 일부러 차연희가 그런 것처럼 꾸미려고 했었다. 진수오가 한예나라는 창녀의 뒤를 캘 때 일부러 연희가 이 일에 개입되어 있음을 암시할 만한 거짓 증거를 흘려 놓으려고 했다.

만약 진 회장이 뭔가를 눈치채서 미주와 진우가 꾸민 계략이 실패했을 때, 범인을 연희로 만들려고 했던 계획은 지난 2년간 조금 수정됐다. 왜냐면 예상외로 연희가 협조적이었고, 딴생각이 없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꿍꿍이라고 해 봤자 우리 손을 빌려서 놈을 처리하고 싶다, 이 정도니.”

그리고 8년 동안 연희와 쌓아 온 정에 조금 약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누이였고, 피가 반만 섞였다고 한들 친남매보다 더 우애가 깊었다. 그러니 연호가 제 누나를 총알받이로 쓰려는 걸 안다면 얼마나 분노할지 잘 알았다.

그래서 작전을 조금 바꿔 연희의 도움이 더 필요한 방향으로 서서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올케언니, 미안해요. 언니도 처음에는 날 이용하려고 했잖아요? 서로 한 대씩 때렸으니 잠시 휴전하고 공공의 적을 무찔러 봐요.”

미주는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으로 애써 괜찮은 듯 혼잣말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저 누군가의 동생이었던 시절이 이젠 마치 전생처럼 느껴질 때, 제가 운전하는 차가 집에 다다랐다.

차고에 주차하고 조금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들어섰다. 피곤한 얼굴이긴 하지만 무표정하게 욕실로 들어가 레버를 돌려 물을 틀고는 화장을 지우고 옷을 벗고 액세서리를 빼냈다.

벌써 혼자 산 지도 2년째.

연호가 떠나던 날 고용인들도 모두 내보내서 집에는 저 말고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의 시중을 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온 사람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처럼 다시 혼자로 돌아갔다.

“아, 뭐로 하지?”

욕조 위 선반에 놓인 입욕제 중에서 오늘 구미가 당기는 녀석을 열어 욕조 안에 넣고는 몸을 그 안에 뉘었다.

“여기서 어떻게 했을까? 짐승들이 따로 없었네.”

욕조에 반쯤 누워 문득 이 욕실에서 수없이 많이 벌였던 연호와의 정사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때 차연호가 사랑한 윤미주는 이제 죽고 괴물만 남았다는 걸, 그가 알기나 할까?”

눈에서 천천히 눈물이 흘렀다. 혐오스러운 현재. 끔찍한 과거.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까지.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기를 희망하는 여자에게는 한때 그저 사랑하는 남편에게서 사랑만 받으면서 살고 싶었던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진수오 때문에 진우를 잃을 뻔했으며, 제 아이는 이미 잃었고, 연호마저 잃었다고 이미 판단해 버렸다. 그래서 머릿속을 잠식한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하며 여기까지 왔다.

“다 끝나고 나면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복수.

제가 생각한 복수를 끝내고 나면 행복이 다시 찾아올까? 이미 연호는 떠났고 죽은 아이는 다시 살릴 수 없는데, 앙갚음을 마치고 행복해진들 그게 진정한 행복일지 알 수 없어 괴로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살아 있는 지옥의 고통을 진수오 너도 알아야 해.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행해졌는데.”

상기된 표정의 미주가 욕조에서 빠져나왔다. 가운을 입은 채 드레스 룸으로 들어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친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을 뚫어져라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 새끼가 예나 씨를 보고 날 떠올려야 될 텐데.”

진우와 머리를 맞대고 진 회장을 끌어내릴 방법을 생각하면서 새로운 인물을 끌어들이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들이 찾는 조건이 있었다.

가능하면 부모 형제가 없거나 친인척이 적은 여자. 진수오와 어떤 식으로든 한 번이라도 연이 닿았던 여자.

정말 고맙게도 진 회장이 차현 그룹 회장이 된 후로 화류계든 뭐든 계집질을 매일같이 해 댔기에 두 사람이 찾고자 하는 이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꽤 넓은 편이었다. 거기에 이왕이면 물질에 약한, 돈이 필요한 여자를 찾았는데 마지막 옵션이 있었다.

‘나를 닮아야 해, 오빠.’

‘필요하면 성형이라도 시켜서……’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이미지가 비슷하면 돼. 이목구비가 닮지는 않아도 뭔가 풍기는 인상이 나와 비슷하면 좋겠어.’

그렇게 해서 정말 신중하게 찾아낸 ‘한예나’라는 여자의 신분을 지난 2년간 세탁하며 그녀에게 한 가지 부탁한 게 있었다.

‘머리카락만 자르지 마세요. 나도 긴 생머리를 일부러 계속 유지할 테니 머리를 저처럼 길러 주세요.’

부탁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으니, 오늘 밤도 예나는 검은색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진수오와 플레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굳은 표정으로 거울을 보고 있던 미주는 예나에게 단단히 일러둔 것을 한 번 더 떠올렸다.

‘요새도 계속 회장님이 예나 씨한테 자길 때려 달라 부탁하고 있죠?’

‘네. 팔자에도 없는 여왕님 놀이라니, SM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예전에 연희에게 들었던 인간 진수오의 놀라운 이중생활. 가볍게 즐기는 내연녀들과는 평범한 섹스를 즐기지만, 마음에 든 일명 ‘애인’과는 꽤 특별한 즐거움을 추구한다. 심지어 더 놀라운 건, 그가 S도 아니고 M이라는 것.

그래서 미주는 지난 2년간 예나에게 그의 성향에 대해 알려 줬고, 그녀는 진수오와 내연 관계를 시작한 얼마 전부터 착실히 어설픈 도미넌트로서 그를 즐겁게 해 주고 있었다.

‘진수오가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는 게 언제나 조금 버겁다는 듯이 연기를 해 주세요. 그걸 좋아한다니깐.’

‘네, 걱정하지 마세요. 항상 ‘어휴, 이걸 어떻게 해요?’ 이러면서 울상을 짓곤 있는데… 확실히 너무 능숙한 주인님보단 자기가 시킨 대로 해 주는 걸 더 즐기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걸 예나에게 신신당부하곤 했었다.

‘절대로 삽입 섹스는 하면 안 되고, 약도 절대 같이 하면 안 돼요.’

‘네, 다행히 DS를 시작할 때 일부러 일러 주신 대로 썼어요. 절대 섹스 금지, 내 몸에 그 무엇도 삽입할 수 없다고 조항으로 달아 놨어요.’

‘내가 알아본 바로 그 새끼는 플레이는 플레이, 섹스는 섹스, 따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아마 예나 씨랑 플레이하고 또…… 섹스는 다른 여자와 즐기니 아마 계약 위반을 하진 않을 거예요.’

두 여자가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서로를 보면서 웃을 때 미주가 나직하게 말했다.

‘같이 있을 때, 이런 암시를 계속 걸어 주세요. 탐해서는 안 되는 걸 탐하는 마음을 지녀라.’

‘…음, 그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건지. 너무 추상적이면 제가 이해가 좀.’

미주는 살짝 웃으면서 쉽게 풀어서 설명했다.

‘슬쩍 물어보세요. 예나 씨가 누굴 닮았는지. 그리고 최대한 대답을 유도하세요. 날 닮았다는 소리가 나오게끔. 지난달 잡지에서 부회장님 부부 사진 봤는데 어째 이 여자, 나랑 비슷하지 않냐는 식으로 말이죠.’

‘아, 그래서 혹시 결혼하고 처음으로 잡지사 인터뷰 응하셨던 거예요?’

‘부부 동반이고, 때마침 남편 외가 언론사에서 몇 달 전에 주부 잡지를 새로 론칭해서 겸사겸사.’

‘그럼 회장님 입에서 언니 닮았다는 소리가 나오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다렸다는 듯 미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플레이할 때 이렇게 말해요. 그 여자가 때린다고 상상하면서 견디라고. 아주버님, 맞으니까 흥분되죠? 난 지금 아주버님을 묶어 놓고 때리며 괴롭히니까 너무 흥분되는데, 이런 식으로 계속 나인 것처럼 플레이해 주세요.’

‘그런 롤플레잉은 어렵지 않은데 왜 언니를…….’

제 말을 들은 예나가 놀랍다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미주는 동업자에게 어쩔 수 없이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날 원하게 만들어야 해요. 나도 계속 주변을 맴돌고 있을 테니. 그래야만 예나 씨한테 쉽게 질리지 않고 옆에 있을 수 있어요. 삐뚤어진 욕망을 당신을 통해서 채울 테니깐.’

저를 찾아내 왜 플로리스트라는 직업까지 만들어 주면서 진 회장에게 심으려고 했는지 알 것 같은 예나가 물었다.

‘그 변태가 언니를 진짜 원하기 시작하면 언니가 위험해질 수 있는데 괜찮으세요?’

‘어쩌면 나한테 손대길 바라고 지금까지 온 거예요. 그러니 예나 씨는 이런 짓을 시키는 나를 절대 용서하지 마세요.’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은 자신이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부산에서 촐랑거리며 살았던 소녀도, 술에 취해 20대의 반을 날려 먹었던 우울한 여자도, 누군가의 아내였던 여자도 여기에 없었다. 불타는 복수심만 남은 악귀의 모습을 가진 여자만 거울에 비치고 있어 미주는 슬픈 듯이 웃었다.

* * *

잠을 잘 수 없었다.

오늘 이토록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 건 거실 창 넘어 몰아치는 비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번쩍이면서 어두운 밤이 한 번 밝아지고는 쿠르릉-거리는 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지금쯤 잠이라도 잘 자고 있을까……?”

연호는 불 꺼진 거실 소파에 홀로 앉아 있었다. 위스키를 벗 삼아 손에 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지만, 쉽사리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별거 중인 아내는 어린아이처럼 이렇게 폭우와 함께 나타나는 천둥 번개를 너무나도 무서워했었다.

‘뭔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길래 벼락 맞을까 봐 벌벌 떨어?’

‘…그러게요. 그래도 당신보다는 아마 적게 죄를 짓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죠.’

품에 파고든 미주를 꼭 안고 놀리면 토끼 눈을 하고는 겁에 질린 얼굴로 대꾸하곤 했었다. 그래서 오늘처럼 번개의 신이라도 강림하는 날이면 말이다. 잠은 제대로 자고 있는지, 혼자서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 너무나도 걱정이 됐다.

“무섭겠지? 혼자 있어서 얼마나 무서울까?”

연호는 벌써 다 마신 위스키 잔을 테이블에 올려 뒀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2년 전, 함께 있으면 서로를 다치게 할 것 같아,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면서 함께 살았던 집을 떠나 다시 이 한남동 본가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1년 전, 진 회장이 뭔가 돌아가는 낌새가 이상하다 여겼는지 저를 차현 그룹 부회장 자리에 앉혔다. 사람들은 왕좌가 이제 곧 진짜 주인에게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다 여겼지만 연호는 늙은 여우의 계략을 눈치챘다.

이젠 제가 적이 아니라 자신이 키운 똥개가 적임을 간파한 진 회장이 연호의 손을 빌려 서진우를 쳐 내려고 했다.

제 살 도려내기식으로 진 회장 자신의 비리들을 은근히 흘렸다. 머리를 지키기 위해 꼬리인 진우를 잘라 내려는 진 회장의 계략. 하지만 연호는 그간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진수오를 차현 그룹 회장으로서 쓰러뜨려야만 하지, 인간 진수오로 넘어지게 해선 안 돼.’

회장직에 눈멀어 진 회장이 내미는 손을 무심결에 잡았다가 그가 재기할 기회를 줄 수 있다 생각했다.

손에 쥐어진 진수오의 화이트칼라 비리들. 하지만 누나의 남편을 쓰러뜨릴 결정적인 한 방은 꼭 제 손으로 찾아내고 싶었다.

묘수 또는 악수.

불현듯 제가 가지고 있는 서진우라는 남자의 죄의 증거를 곱씹다가 생각해 냈다.

‘매형도 분명 사람 한둘 정도는 죽였을 텐데. 분명히 김 기사가 알고 있는 게 있을 거야.’

그래서 오랜 시간 백호를 통해 김 기사를 회유하고 포섭한 결과 그의 자백을 받아 내는 데 성공했었다. 물론 진 회장이 지시한 살인 교사는 이미 오래전에 모두 공소시효가 끝난 일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건네준 비리 혐의와, 과거에 이토록 악인이었던 정황이 합쳐지면 진수오가 완벽히 몰락할 수 있다 여겼다. 거기에 백호의 말에 따르면 김 기사가 제 쪽으로 다리를 하나 걸쳐 놓은 이유 중 하나가 진우 앞에서 말실수한 것 때문이라고 했다.

‘계장님, 그래서 김 기사는 서진우와도 거래했고, 저랑도 거래한다 이거지요?’

‘네, 두 분 모두에게 도움을 드리는 대신 목숨은 살려 달라, 그리고 때가 됐을 때 더는 죄를 묻지 않고 그저 모든 걸 묻어 달라, 이렇게 조건을 걸었습니다.’

‘일단 알겠다고 전해 주세요. 다만 우리 아버지 일은 나중에 다시 계산했으면 좋겠다고 꼭 전해 주시고요.’

연호는 소파 테이블 위에 뒀던 담배를 하나 집어 들고는 입에 물고 빨갛게 불을 붙였다.

아버지.

태산 같았던 아버지는 늘 언제나 엄격하셨다. 그리고 아무리 저를 낳아 준 여자에 관해 물어도 단 한 마디도 말해 준 적 없었다. 물론 아버지의 조강지처이자 저를 키워 준 어머니가 얼마나 저를 사랑해 주셨는지는 잘 알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사실은 진 회장에게 살해당했음을 알았을 때, 놈을 향한 분노의 마지막에는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해 준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한 자락 있었다.

그래서일까? 며칠 전 이사회 때문에 만난 누나와 오랜만에 식탁에 마주 앉았다.

‘연호야, 최 여사가 잘 챙겨 주고 있지? 혼자 살아도, 바빠도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녀야지.’

‘최 여사가 안 챙겨 줘도 알아서 잘 먹으니까 걱정하지 마.’

벌써 나이가 쉰이 넘은 누나가 여전히 동생이 염려되는지 걱정하고 있어 연호는 피식 웃었다.

‘엄마가 살아 계셨으면 지금 누나랑 똑같은 소리 하고 있었겠지.’

‘엄마가 살아 계셨으면 지금쯤 당장 네 처한테 돌아가라고 호통을 치셨을 거야.’

연희의 말에 연호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응수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엄마가 지금 누나 나이쯤이었지?’

‘…그래. 중학교 3학년 때 학교 마치고 미술 학원 갔다가 집에 왔는데 엄마가 웬 갓난쟁이를 안고 있어서 얼마나 놀랐던지.’

‘……누나는 뭐 좀 아는 거 있어? 아버지가 끝까지 나한테는 말씀 안 해 주셨거든.’

연희는 동생의 얼굴에 스친 슬픔과 분노를 엿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앞에 놓인 밥공기로 수저를 움직이면서 대답했다.

‘정말 몰라. 아무도 몰라. 심지어 엄마도 몰랐대. 엄마가 아버지한테 그래도 연호 친어미한테 애 잘 크고 있다고 얼굴이라도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해도 아버지는 끝까지 함구하셨다고….’

어쩌면 아버지의 선택이 옳았는지도 몰랐다. 재벌의 사생아를 낳은 여자가 앞으로 그 아들을 무기 삼아 저들을 압박하고 협박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냉정하다 못해 냉혹할 정도로 자식을 낳아 준 여자를 끊어 낸 아버지가 무서울 정도로 자신과 닮았음에 연호는 마른 웃음을 지으며 연희를 바라보았다.

‘누나, 김 기사 그냥 둘 거야?’

잠시 멈칫하던 연희의 손이 동생이 좋아하는 반찬 그릇을 살짝 앞으로 밀면서 대꾸했다.

‘마음 같아서는 똑같이 죽이고 싶지만, 아직은 안 돼. 그러니 너도 조금만 더 참아.’

‘그럼 김 기사를 사주한 놈은 그냥 이대로 둘 거야?’

연희는 조금 매서운 표정으로 동생을 보면서 대답했다.

‘연호야, 아버지를 죽인 놈, 대신 처리해 주겠다는 사람들이 있으니깐 우린 굳이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어.’

‘그래. 그렇지만 누나, 미주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빼내 주기로 한 거, 약속 잊지 마.’

방금 누나가 그랬던 것처럼 연호 역시 연희가 좋아하는 반찬 그릇을 앞으로 밀면서 단호한 눈빛을 내었다.

‘미주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빼 달라고 하더니… 걱정하지 마, 연호야. 넌 그냥 지금처럼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돼. 일이 잘못되면 서 전무랑 내가 다 책임지기로 이미 협의를 했으니.’

‘그 정도 가지곤 안 돼. 절대로 위험한 짓 못 하게 해 줘, 제발.’

차분함 속에 섞인 연호의 간절한 부탁에 연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누구도 못 말려. 서 전무도 네 와이프 못 말리고 있어. 그러니 너도 안 돼.’

‘…….’

잠시 아무 말도 없는 남매의 식탁 위 침묵을 연호가 먼저 입을 열면서 깼다.

‘그럼 내가 도울게. 차라리 내 등 뒤에 숨어서 나쁜 짓 하라고 해.’

‘…뭔 말인지 누나가 알아듣게 말해 봐, 연호야.’

그리고 이어진 연호의 제안에 연희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매형, 아니 진수오 그 씨발 새끼 시선을 돌리자고.’

‘어떻게?’

‘솔직히 누나, 진수오가 누나랑 미주가 지금 꾸미는 짓에 완벽하게 속고 있다고 여기는 건 아니지?’

수긍한다는 듯 연희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자 연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내가 결정적인 건 빼고 애매한 자료들만 검찰에 넘길게. 매형도 검찰에 끈이 있으니 자기가 힘 좀 쓰면 무혐의나 증거 불충분으로 나올 수 있을 만한 그런 것들 위주로.’

‘…그럼 자기를 검찰에 일러바친 게 너라는 걸 알고 남편이 분노하고 있을 때 우리가 뒤에서 쳐라, 이 말인 거지?’

‘만에 하나 누나랑 서진우가 실패하면, 내가 가진 결정적인 걸로 진수오를 구속해 그놈이 미주를 해코지하려는 걸 막을 수 있으니깐.’

연호는 이게 암묵적인 협동 작전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놓고 미주와 손을 잡지 않아도 할 수 있는 한 그녀를 보호해 주려는 제 사랑이기도 했다.

폭주하는 그녀를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원하는 걸 이루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게 살인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미주가 죄를 짓는다면 제가 대신 그 벌을 받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으니깐.

‘네 말도 일리는 있어. 일이 그렇게 진행되면 미주를 보호하는 게 더 쉬울지 몰라. 반대로 너를 보호하기도 좋고. 미주랑 연호 너, 별거 중인 거 아는 사람은 다 아니깐.’

‘별거 중인 부부라 서로 뭔 짓을 하고 다녔는지 관심도 없고 몰랐다는 알리바이를 그리 쉽게 믿어 줄까?’

떨어져 산 지 이미 2년이라 더는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감정의 냉각기가 말이다. 오히려 둘을 도울 수 있는 호재일지도 모른다는 아이러니에 연호는 기도 안 찬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동안 검찰에 얼마나 돈을 많이 먹여 놨니? 차현 장학금이라 하면서 뿌린 돈이 얼만데.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도 우린 다른 사람들보단 가볍게 처벌될 거야.’

연호가 무전유죄, 유전무죄에 대해 말하는 누나를 보면서 쓴웃음을 지을 때, 연희가 한마디 덧붙였다.

‘네가 미주한테 직접 말해. 돕겠다고.’

‘됐어. 더는 어색해지고 싶지 않아.’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감정의 골은 더는 깊어지지 않았지만, 연호는 알고 있었다.

이제 두 사람에게는 미움도 증오도 아닌 너무 사랑했기에 다 타 버린 감정의 재들만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 속에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서먹해져 버린 어색함 속에서 어쩌다 만날 일이 있을 땐 데면데면하게 굴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비가 오는 밤에 너무나도 사랑하는 한 여자만을 생각하며 차마 보낼 수 없는 메시지만 쓰고 있었다.

[미주야, 천둥 치는데 괜찮아? 무서우면 지금 내가 갈까?]

조명 하나 켜지 않아 어두운 거실 소파에 앉은 남자의 손에서 액정 화면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연호는 입력한 텍스트를 물끄러미 보다가 괴로움에 두 손으로 머리를 흩트리고는 화면에서 글씨를 지워 냈다. 통화 버튼을 누를까, 수천 번도 고민하다가 결국 핸드폰 전원을 꺼 버리고 절망하고 있었다.

두 번 다시 이 손으로 그녀를 안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이젠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 버린 저와 미주 사이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에 오늘도 피 토하는 심정으로 괴로워하면서.

연호는 빈 잔에 다시 위스키를 채우며 저 역시 이젠 쉬이 잠들지 못하는 천둥이 치는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와 똑같이.

* * *

[검찰은 차현 그룹 진수오 회장에게 일괄 무혐의 처리를 내렸습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미주는 리모컨으로 TV를 꺼 버렸다.

진 회장의 무혐의 소식은 언론을 타기 전 이미 알고 있었다. 잠시 구속되었던 진 회장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진짜 전쟁이 시작될 예정이었으니까.

‘남편이 검찰에 진수오를 잠시 넘겨 시간을 끌어 준 덕분에 좀 더 치밀하게 덫을 놓을 수 있었지만… 연호 씨가 조금 걱정되는걸.’

연희가 전해 준 계획대로 연호를 방패 삼아 전략적 연대를 맺었다. 그 결과, 모두 다 예상한 대로 진수오는 이를 갈면서 지금 연호를 어떻게 죽일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미주는 고개를 돌려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보면서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낙장불입, 또는 진퇴양난. 어쩌면 사면초가일지도.

일이 여기까지 왔으니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진 회장을 제대로 제거하지 못하면 저, 진우, 연호 그리고 어쩌면 이 일에 연루된 모두가 늙은 여우의 서슬 퍼런 칼날에 사라질 수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전 신이 있다고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정말로 계신다면, 이번만큼은 저를 도와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미주는 소파에서 내려와,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빈집에 홀로 앉아 눈을 감고 목소리를 내면서 감히 기도하며 빌었다.

“그리고 내 아버지를 비참한 죽음으로 내몰고 내 아이를 죽게 만든 원인을 제공하고 내 인생이 내가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한 그 악마를 죽일 힘을 제게 주신다면…”

눈을 뜬 미주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지금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 절대자에게 말했다.

“죄는 모두 다 제가 받겠습니다. 그러니 지옥에 제 자리 하나 꼭 만들어 주세요. 그 대신 제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용서해 주시고요.”

혼자만의 모노드라마를 찍는 듯 미주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으면서 간절하게 빌고 또 빌었다. 무릎을 꿇고 있어 다리가 저릴 때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해 간단히 샤워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시동을 걸고는 어디론가 운전해서 도착한 곳이 있었다. 국제선 출국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을 때, 그가 나타났다.

“내가 오지 말랬잖아.”

미주는 이젠 연륜이 쌓인 노련한 얼굴을 한 눈 밑에 점이 있는 남자를 보면서 반갑게 웃었다.

“그냥, 심심해서 와 봤어. 이렇게 와 줄 때를 고맙게 생각해.”

“잘났다, 이 못생긴 게.”

“그리고 어제 전화로 이야기했잖아? 나 생각해 보고 오빠 보러 인천공항에 갈까 한다고. 벌써 치매라도 온 거야?”

여전히 어린아이 놀리듯 진우가 볼을 꼬집으면서 하는 말에 미주는 짜증 난다는 듯 툴툴댔다.

“야, 윤모개. 아직 이 오빠 장가도 못 갔다. 무슨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미주의 놀림에 진우 역시 말도 섞기 싫다는 듯 학을 떼면서 대답했다.

“됐고, 커피 한 잔 마실 시간 정도는 있어?”

진우는 왼쪽 손목시계를 힐끔 보면서 고개를 살짝 저었다.

“필리핀 애들 만나기로 했거든.”

미주는 살짝 목소리를 내리깔면서 물었다.

“일이 끝나면 마닐라에 예나 씨 거처 마련해 주실 분들?”

진우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미주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특약을 걸어. 만에 하나 한예나가 우릴 배신하려고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거기까진 신경 쓰지 마.”

미주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말이 쏟아졌지만 말이다. 진우가 싹둑- 자르면서 저를 믿으라는 듯 어깨를 두어 번 톡톡- 두드렸다.

“오케이. 일단 시나리오대로 가는 거야.”

“그래, 나는 오늘 마닐라행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에 갔다가 모레 아침 비행기로 돌아오는 일정, 하지만 출국하지 않을 예정이고.”

“나는 풀려난 진 회장을 위로차 그의 집에서 식구들끼리 밥을 먹을 예정이고.”

진우는 먹구름이 가득한 얼굴로 미주를 내려다보면서 마지막이란 듯 물었다.

“정말 재민이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재민 오빠는 보험이야. 우리 둘 다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재민이가 이 말 들었으면 조금 섭섭할지도 모르겠네.”

“그러게.”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빤히 보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이 공식적으로 각자 얼굴을 보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몰랐다. 오늘 밤에 있을 일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지 못하면 최악의 수로 두 사람에게 내일은 없을지 몰랐다. 그래서 미주는 진우를 만나기 위해 한걸음에 인천공항까지 달려오고 말았다.

진우가 살짝 양팔을 벌리자 미주가 오빠의 품에 안기면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밤, 거기서 봐.”

“그래.”

그러고는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안심하라는 듯 미주가 더 진우를 위로했다.

“오빠, 우리 걱정하지 말자. 다 잘될 거야.”

진우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미주를 품에서 떼어 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미주에게 상황을 모두 말할 필요는 없었기에 그간 숨기는 것도 없잖아 있었다.

미주가 아이를 사산한 뒤 조금씩 목을 죄어 오던 진 회장을 이젠 정말 처리해야 할 때가 되었으니깐.

그를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죄를 짓는 걸 기꺼이 할 때부터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 진우도 몰랐다.

‘진수오 그 씨발 새끼가 급하긴 급했나 본데. 오히려 나랑 차연호가 손을 잡으라고 등 떠민 거밖에 안 되다니.’

입국 심사를 끝낸 진우가 다시 한번 더 손목시계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제 10분 남았네. 출국장에서 필리핀 애들 보기로 했지.’

사실은 말이다. 필리핀 애들은 오늘 마닐라에 가서 만나는 게 아니라, 여기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마닐라행 비행기를 타러 가는 척했지만 사실 오늘 필리핀으로 출국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미주야, 사실 차씨들과 거래한 게 있어.’

아마도 미주는 모르고 있을 연희와의 거래는 사실상 연호와의 거래이기도 했다.

너 역시 미주를 사랑하는 걸 알고 있으니, 사랑하는 아내가 죄를 짓고 위험한 상황이 되면 대신 죄를 뒤집어써 달라는 연호의 부탁이 있었다.

거래 조건은 저와 차연희가 가지고 있는 차현 중공업 지분 일체 양도. 그리고 계열사 분리 후 차현 중공업의 사장으로 저를 인정해 주겠다는 것.

하이 리스크가 있지만, 진우는 사실상 저와 미주 그리고 차씨들과의 이 연대가 승리할 거라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미주야, 내 진짜 보험은 사실 재민이가 아니고 김 기사거든.’

차연호와 거래한 것처럼 김 기사와도 거래했다. 김 기사가 알고 있는 진수오의 모든 치부를 넘길 것.

제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필리핀에 있는 작은 리조트를 하나 사서 넘겨 그가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 주기로 했다. 일이 끝나고 진 회장의 몰락을 확인한 다음 한국을 떠나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낚시나 하면서 죽고 싶다는 김 기사의 바람.

아, 제게 넘긴 정보를 연호에게 넘긴 것도 알았다. 김 기사가 양다리를 걸쳤다 한들, 진우는 최악의 수만 생각했다.

일이 끝난 후 만에 하나 내려질 수 있는 연호의 철퇴를 김 기사가 피할 수 있게 힘써 주기로 약속했다. 물론, 진짜로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죄인을 영원히 보호해 줄 순 없을 테니깐.

진 회장의 밑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제 죄를 알고 있는 김 기사와 일부러 돈독하게 지내면서 그의 생각을 엿봤다.

진우는 김 기사가 물질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판단했다. 그래서 정말 인내심을 가지고 마음을 얻으면서 제 편으로 끌어들일 방법을 궁리했었다.

‘김 기사님, 형님께서 지금 상황이 좋지 못하다 들었습니다. 사실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재민이 아버지도 도박에 빠지신 적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우리 미주 아버지, 민철이 아저씨도 뭐, 좀 안 좋게 돌아가셨고. 그래서 제가 잘 압니다. 정 팀장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셨던 요양원, 꽤 괜찮은 곳이니 제가 살펴 드리도록 할게요.’

진우는 김 기사의 가족사에 스며들어서 그를 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를 종처럼 생각했던 진 회장이 외면하고 있던 김 기사의 도박꾼 형은 사실 진수오와 친구였고 희주와 미주 남매의 아버지와도 친구였다.

그래서 희주에게 들었던 윤씨 남매 아버지의 이야기를 일부러 종종 하면서 서서히 그와 친분을 쌓다가 말실수한 그를 결정적인 한 방으로 제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알게 된 추악한 인간 진수오의 민낯. 그는 저를 돕는 척하면서 처음부터 저를 옭아매려 했었다. 그날, 하늘이 불타던 날 제 범죄 장면을 김 기사를 통해 초소형 카메라로 몰래 찍어 놓다니.

미주의 복수를 말리지 못하고 저 역시 이 촘촘하게 설계한 연극에 참여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 그 문제의 영상. 진 회장이 가지고 있을 원본을 찾아내 영원히 파괴해야만 했다.

물론 이런 사실을 모두 미주에게 털어놓진 않았다. 김 기사에 대해서도 어느 선까지는 하얀 거짓말을 했고, 차씨들과의 거래도 알리지 않았다.

그게 아직도 여전히 미주를 위한 최선이라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더 미주와 차씨 남매 몰래 설정한 오늘의 일정을 곱씹었다.

출국장 면세점에서 쓸데없이 쇼핑한다고 정신을 놓은 저는 오늘 마닐라행 비행기를 놓칠 예정이었다. 열 받은 마음에 공항을 빠져나와 섹스 파트너의 집으로 가 밤새도록 즐긴다는 시나리오.

물론 이 2차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포섭해 둔, 꽤 오랜 시간 동안 부산에서부터 저와 관계가 있는 여자가 있었다. 오래된 섹스 파트너는 제게 가족인 윤씨 남매를 잘 알고 있는 여자였다.

그 시절 부산에서 미용 보조 일을 하던 민희를 스리슬쩍 서울로 불러 번듯한 헤어 샵을 내줬다는 걸 미주에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언제부턴가 더는 몸을 섞진 않지만, 그 누구보다 저를 잘 알고 있는 민희는 좋은 친구이자 대화 상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렇게 부탁했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딱 하룻밤 내가 여기서 잔 거로 좀 해 줄 수 있어?’

‘…좋아, 해 줄게.’

‘근데 잘못되면 너도 휘말릴 수 있어.’

‘괜찮아, 진우야. 지금 나, 서울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거 다 네가 도와준 덕분인데 은혜 갚아야지.’

돌이켜 보면 고등학생 시절부터 저와 지독하게 얽혀 있었던 민희가 밝게 웃으면서 대답하기에 진우는 미안함에 그저 담배만 피웠다.

‘근데 난 네가 여기서 하룻밤 진짜 자고 가도 괜찮아. 뭣 하면 한번 해 줄 수도 있고.’

그녀가 제 옆에 어떤 마음으로 있는지 모르진 않았다. 그랬기에 진우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 민희가 농담인 듯 진담인 듯 던진 말이 아팠다.

‘그때처럼 네가 딴 년 안 찾고 나한테 부탁해 줘서 솔직히 기분 좋아.’

‘내가 그래서 딴 여자한테 안 가는 거 알지?’

‘근데 있잖아, 네 거 안 빤 지 오래돼서 이젠 못 빨 것 같은데.’

‘아, 조금 기대했는데, 아쉽네.’

민희가 이제는 힘들다는 듯 푸념처럼 하는 말에 결국 사이좋은 고향 친구인 둘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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