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돌이킬 수 없는
* * *
“미주가 요새 엄청 바쁜 거 같더라고요. 얼굴 한번 보자고 해도 자꾸 ‘다음에’라고 말하질 않나.”
“반년 동안은 병원에 감금되어 있다가, 반년은 집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1년 만에 겨우 다 털어 냈는데 오죽 안 바쁘겠어?”
“뭐, 스스로 감금한 거 아니었나요?”
재민이 진우를 요새 자주 다니는 와인 바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요사이 진우 역시 굉장히 바쁘다는 걸 알고 있는 재민은 그의 잔을 채워 본다.
“근데 어째 미주가 바쁜 형이랑은 자주 보는 것 같던데 말이죠.”
진우는 최대한 태연하게 재민이 예리하게 묻는 말을 적절히 농담처럼 받아넘겼다.
“5년 동안 안 보고 살다가 죽자고 앵겨 붙어서 떠들어 대니 나도 귀찮아 죽겠어. 다 크다 못해 말만 한 애가, 나 일도 못 하게. 아으, 시끄러워 죽겠어.”
“미주가 저리 밖으로 도는데 차연호가 가만 내버려 두는 게 신기하긴 하네요. 예전에는 금이야, 옥이야 손에서 쥐고 안 놓더니.”
“부부라는 게 다 그렇지, 뭐. 매일 신혼 같을 수 있겠어?”
“어째 미혼인 형님이 기혼자의 심정을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재민은 잔에 담긴 검붉은 색 와인을 호로록- 소리 내며 삼키고 혀를 굴리면서 맛을 음미했다.
사산한 뒤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아 일절 면회 사절이라던 미주가 말이다. 언제 마음이 아팠냐는 듯한 얼굴로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진우가 미주의 꿍꿍이를 알고 있는 걸 넘어서 두 사람이 작심해 손을 잡고는 어떤 일들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오늘 진우의 태도를 보면서 재민은 읽어 낼 수 있었다.
마치 일부러 저를 배제하는 듯한 둘을 보면서 어쩐지 썩 기분이 좋지 못했다. 셋이 아니라, 둘과 하나. 늘 그랬듯 우리가 아니라 두 사람과 저였는데 이번에는 그걸 꽤 노골적으로 드러내다니.
둘이 꾸미고 있는 계략이 어떤 그림인지 짐작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합심한 정황이 주는 불안감이 바로 제 ‘원죄’ 때문이기도 해, 재민은 뜻하지 않게 ‘비밀’이 수면 위로 떠오를까 봐 조금 초조하기도 했다.
지난날 진우를 자극하고 미주의 등을 떠밀면서 연호까지 얽히게 했던 비틀린 질투심과 부산에서 있었던 일.
다행히 그들 모르게 판을 짰던 게임은 진짜 흑막이 등장하며 사람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만난 가족이 꽤 위험한 승부를 준비 중인 것 같았다.
“몸조심하세요.”
“갑자기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얘기냐?”
“글쎄요, 그냥 갑자기 형님이랑 미주 둘 다 무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진우는 재민이 방금 채워 줬던 잔에 담긴 와인을 소리 없이 한 모금 마시고는 드라이하게 툭- 말을 던졌다.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모르는 척해. 이번 일은 미주랑 내 문제야. 너까지 휘말리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네,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만 역시 미주는 형님을 가장 의지한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고 할까요? 지난 5년간 옆에서 힘이 되어 준 건 저인데… 여전히, 두 사람은 여전한 것 같아서 말이죠.”
“너랑 내가 같냐? 나는 미주한테 가족일 뿐이야.”
재민이 무엇 때문에 심사가 비틀렸는지 알 것 같았기에 진우가 애써 그의 기분을 풀어 주려 하지만 말이다. 오래된 친구이자 동생은 진우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게요. 형님은 미주한테 가족이죠. 그럼 저는 대체 뭘까 하고 그냥 한번 생각해 봤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재민의 안경 너머 보이는 냉정함이 유독 시리게 느껴진 건 착각이었을까? 진우는 재민이 농담처럼 흘리는 말을 앞에서 같이 농으로 받아쳤지만 어쩐지 뭔가 마음에 자꾸 께름칙한 게 걸렸다.
그렇게 두 남자가 와인을 마시며 마음을 숨긴 채 20년에 가까운 우정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양복 상의 안에서 가느다랗게 떨리는 진동에 진우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피식-거리면서 못 말린다는 듯 웃더니 재민을 보면서 조금 음흉하게 말했다.
“아, 얘가 또. 재민이 너도 알지? 내가 요새 만나고 있는 애. 어찌나 밤만 되면 날 찾는지 몸이 그냥 남아나질 않는다.”
“적당히 해요. 그러다가 뼈 삭습니다.”
“아, 이 몸은 또 열심히 물 빼 주러 가야겠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상스러운 말을 하는 진우에게 재민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인사 대신 그가 바 위에 올려 둔 빈 잔에 잔을 부딪쳤다.
진우가 떠난 뒤 혼자가 된 재민은 잔에 담긴 와인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여자는 무슨. 미주한테 연락받고 일어난 거면서, 핑계는.’
차갑게 식은 표정을 짓는 재민을 뒤로한 채 진우는 차에 탄 뒤 미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해온 호텔, 3003호에 세팅됐어. VIP 라운지에 도착하면 내 개인 변호사가 카드 키를 건네줄 거야. 그거 받아서 먼저 들어가.]
미주는 메시지를 확인한 뒤 해가 진 어둠 속에서 혼자 운전대를 잡고 네온사인 속을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진우가 말한 곳에 도착해 칵테일을 시켰을 때. 처음 보는 말쑥한 남자가 옆으로 오더니 친절히 말을 걸었다.
“제가 한 잔 사고 싶은데요.”
“……아, 전 유부녀라서. 호의는 감사합니다.”
제 옆에 앉은 낯선 남자가 슬쩍 무언가를 건넸다. 미주는 태연하게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바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칵테일을 둔 채 팁을 건네고 계산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30’이라고 적힌 버튼을 눌렀다.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라 문을 열고 초호화 호텔의 스위트룸에 들어섰다. 그런데 먼저 와 있던 사람이 놀랍다는 듯 저를 보고 있었다.
“…어. …음. 그러니깐 그게… 지금… 절 불러 주신 게 그쪽…이 아니라 아가씨…? 아니, 사모님……? 어, 음…, 이신 건가요?”
“네, 맞아요. 제가 오늘 밤과 내일까지 당신 몸값을 지불했어요.”
미주는 문을 닫고 저를 당황스럽게 보고 있는 연예인 뺨칠 만큼 아주 예쁜 여자를 보면서 그 여자만큼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먼저 와 있던 예쁜 여자는 곤란하다는 듯 눈동자를 마구 굴리면서 뭔가를 생각하더니 고민하는 빛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저… 저는 아직 한 번도 여자랑은 안 해 봐서 그런데…….”
“아, 나도 그래요. 여자랑 해 본 적은 없어요.”
여자는 오늘 저를 지명한 상대가 호텔 스위트룸에서 다음 날까지 함께 있는 거로 화대를 지불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연락받은 대로 로비 라운지에서 처음 보는 남자에게 카드 키를 건네받고 여기에 와 있었는데 말이다. 세상에, 상대가 여자라니.
잠깐 흐르는 정적 속에서 여자는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미주를 보며 고민을 하다가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웃으면서 말했다.
“일단 옷부터 벗을게요. 레즈비언 플레이는 처음이니깐 살살 다뤄 주세요.”
어차피 몇 겹 껴입지도 않은 옷이라 슥슥- 팔다리만 빼내 여자는 하늘거리는 시폰 원피스를 벗었다.
“어때요, 제 몸매? 꽤 괜찮죠?”
“아, 네. 정말 예쁘시네요.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아름다우세요.”
속옷만 입고 있는 저를 보는 미주의 시선이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건조하다 느낄 때였다. 또 누군가가 이 고급 스위트룸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야, 이거. 미주 너, 나 오기 전에 벌써 재미 봤다 이거지?”
“그러게. 재미 좀 보려 했는데 오빠가 딱 눈치 없이 들어와서 흥이 깨졌어.”
새로이 등장한 키가 크고 남자답게 잘생긴 남자를 보자 여자는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인가 싶었다.
“저기… 혹시… 세 명…이서?”
다인 플레이를 해 본 적은 있지만, 보통은 남자 두셋에 저였고 미리 협의된 상태로 콜을 받았는데. 섹스와 관련된 웬만한 일은 다 경험해 봤지만 그래도 여자는 미주에게 물었다.
“아, 난 쓰리썸은 관심 없으니깐 여기 이 신사분이 예나 씨 마음에 들면 나중에 둘이서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오빠는 어때?”
“너무 미인이라 솔직히 싫진 않은데 말이지.”
“남자들이란. 미녀 앞에서 이렇게 약해지다니.”
“예나 씨만 받아 준다면, 뭐. 뜨거운 밤을 보내도 괜찮고.”
미주와 진우가 상당히 수위가 높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피식거렸다.
여자가, 아니 예나가 제 본명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였다. 미주가 객실 안쪽에서 가운을 가져와 건넸다.
“농담이니깐 신경 쓰지 마세요, 하하. 그리고 죄송해요. 벗는다는 거 말렸어야 되는데 솔직히 예나 씨가 어느 정도인지 조금 궁금하긴 했거든요.”
예나는 미주가 건넨 가운을 입으며 속옷만 입고 있던 몸을 가린 후 입술을 깨물고는 조용히 물었다.
“혹시 경찰이신가요? 방송국 취재? 불법 성매매 단속하러 오신 거라면 정말 죄송합니다. 돈이 없어서 그만 이런 쉬운 길로…….”
“그런 거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시고. 일단 앉아서 우리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예나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미주가 진우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어색하게 스위트룸 거실에 놓인 소파에 마주 앉았을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마워요. 나중에 또 필요하면 부르도록 하죠.”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부러 호텔 직원이 객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끔 문 앞에서 미리 시킨 것을 받아 들고는 친절하게 두둑이 팁까지 건넸다. 아이스 버킷에 몸을 뉘고 있는 양주를 꺼낸 후 잔에 얼음을 채울 때 미주가 말했다.
“오빠, 나는 차 가지고 와서 술은 안 되고. 예나 씨는 어때요? 한잔하실래요?”
지금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순 없었지만 말이다. 예나는 친절하게 구는 미주의 호의를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오늘 밤과 내일 밤까지의 화대를 이미 세 배 이상 지불한 미주에게 예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안 그래도 목이 말랐는데 한 잔만 주세요.”
진우가 두 여자에게 각자의 상황에 맞는 잔을 건넨 후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미주가 그를 보면서 고개를 짧게 끄덕이더니 예나를 향해 오늘 밤의 이 괴상한 만남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빙빙 안 돌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예나 씨가 예전에 안 팔리던 연예인 시절에 접대했던 차현 그룹 진수오 회장, 기억하나요?”
“…네.”
“그럼 그때 진 회장이 예나 씨 마음에 들어 해서 몇 번 더 불렀는데 소속사 선에서 잘라 낸 거 알고 있었나요?”
“…나중에 들었어요. 그때 저한테 다른 스폰서가 있어서 그분이 제가 접대 나가는 거 싫어해 소속사 사장한테 딴 애 보내라 했다고…….”
예나가 옛 기억을 더듬어 미주의 물음에 답을 주고 있을 때였다. 진우가 손에 들린 양주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한예나 씨, 연기력은 꽤 괜찮았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제안을 하나 할까 합니다. 어때요? 한번 들어 볼 생각 있습니까?”
왼쪽 눈 밑에 점이 있는 잘생긴 남자와 청순해 보이는 여자가 저를 동시에 보고 있었다. 예나는 숨 막힐 것 같은 공기를 느꼈다. 그래서 괜히 입고 있는 샤워 가운의 앞섶을 여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뭔지 궁금은 하네요.”
예나의 대답에 진우가 살짝 웃으면서 잔을 소파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끔 내려놓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진수오 회장과 플레이를 하면 됩니다.”
진우의 말에 큰 눈을 굴리면서 뭔가를 생각하던 예나는 좀 의외라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돈만 주시면 얼마든지요. 그런데 그분은 제가 섹스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어렵지 않은 걸 부탁한다고 생각했는지 예나가 크게 놀라지 않은 듯해, 이번에는 미주가 끼어들었다.
“저희가 자연스럽게 만남을 주선해 드릴 거예요. 저는 조금 복잡하게 말하려고 하는데 어때요? 들어 보실래요?”
“이제 와서 안 듣겠다고 해도 어차피 저는 휘말린 것 같은데, 네, 그냥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아가씨.”
“진수오 회장에게 어떤 생각을 좀 심어 주시면 돼요. 아, 말 편하게 하세요.”
“아, 네. 일단 그럼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해요.”
예나가 알겠다는 듯 눈을 몇 번 빠르게 깜빡이더니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 생각을 심는다는 게 뭔지…….”
“그냥 예나 씨가 옆에서 좀 부추겨 주면 됩니다. 살살 꼬드긴다고 생각해 주시면 돼요.”
진우가 미주 대신 대답하자 예나가 여전히 조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미주가 한마디 거들었다.
“진수오 회장이 탐해서는 안 되는 걸 탐하도록 해 주시면 돼요.”
“그래서 우리는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가 필요한데, 한예나 씨, 어때요? 우리가 만드는 위험한 영화에 출연해 보시겠습니까?”
어딘지 모르게 비장해 보이는 두 남녀의 눈빛이 무섭다고 느꼈지만, 예나는 호기심이 피어나고 있었다. 대체 두 사람은 누구길래 저를 차현 그룹 회장을 유혹하는 살로메로 만들려고 하는 걸까?
눈 밑에 점이 있는 남자가 제안하는 현실 속 드라마가 위험하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래서 예나가 조금 주저하고 있을 때였다.
“예나 씨 빚, 우리가 지금 당장이라도 다 해결해 드릴 수 있어요. 소속사 때문에 꽤 힘드셨는데 심지어 계약 해지하려니 위약금까지 엄청나서 어쩔 수 없이 이 일에 뛰어들었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역시 예상대로 이들은 저를 알고 있었다.
‘뭔가 돈도 많고 권력도 가진 사람들인 것 같은데… 나 같은 콜걸 하나 과거 터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
길거리 캐스팅.
고등학교 2학년일 때 우연히 친구들과 시내에 놀러 나가서 명함을 받았다. 연예인 할 생각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을 달라는, TV에서 종종 보았던 톱스타들의 데뷔 일화들.
제가 살았던 동네에서는 이미 제일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어 봤기에 솔직히 외모에 자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딱히 아이돌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연습생이라는 걸 해 보면서 성인이 되었을 때였다.
춤에도 노래에도 재능이 없고, 심지어 끼마저 없어 아이돌은 아닌 것 같아 연습실을 박차고 나왔지만 말이다. 소위 말하는 연예인병, 이쪽 세계의 화려한 맛을 조금이라도 엿봐 버린 저는 완전히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이름 없는 소속사에서 연기자의 꿈을 키우며 매일매일 볼펜을 물고 발성 발음 연습을 하고 있을 때, 어둠의 손길들이 뻗어 왔다.
‘스폰서가 있으면 뜰 수 있다고 해서 딱 그냥 눈 감고 뭐가 닳겠냐는 심정으로 살았는데 말이지.’
돌아오는 건 어느 작은 드라마나 영화의 벗는 단역들뿐이었다. 결국 사치와 허영심, 물질만 남은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는, 어느 연예인 지망생의 몸도 마음도 버린 흔한 이야기.
심지어 거액의 빚까지 지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미모를 이용해 몸을 팔아 돈을 번다는 뻔한 화류계 창녀의 자기변명을 해 보면서.
그래도 예나는 스스로 자부심이 있다고 여기며 지금껏 이 진창에서 견뎌 오고 있었다. 제 손님들은 대부분 상류층이라 저는 그저 그런 몸 파는 여자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오늘도 들뜬 마음으로 이 호텔로 왔는데.
‘쉽게 살기 위해 함부로 몸을 굴린 벌을 이제 받는 거겠지. 이 사람들, 내가 안 하겠다 하면 날 죽일지도 모르니깐.’
그런데 빚을 갚아 주겠다는 여자가 솔직히 혹할 만한 제안을 해 왔다.
“빚은 물론, 예나 씨 포주한테서 빼내 드릴게요. 그리고 우리 일은 급하지 않으니 느긋하게 신분을 세탁할 기회도 줄 거예요. 뭐라도 좀 배우시면서 가게를 하나 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건 천천히 저랑 상의해 보도록 하고…….”
미주가 온화한 표정으로 예나를 회유하고 있을 때, 진우가 좀 더 확실한 미끼를 던졌다.
“일이 성사되면 현금으로 100만 달러. 단, 조건은 한국을 떠나 필리핀에 도착한 뒤 제가 지정한 곳에서 수령하는 걸로. 우리는 예나 씨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편히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닐라에는 예나 씨 신변을 보호해 줄 사람들이 있어서 어떤 위협도 받지 않고 안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일이 끝난 후 돈을 받고 한국을 떠나라.
제 소원이었다. 지긋지긋한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 저를 모르는 새로운 곳에서 새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마다 로또를 사면서 일확천금의 기회가 생기길 간절히 바랐는데 말이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 로또임을 예나는 직감했다.
‘어차피 내 인생은 망했어. 이리 죽으나 저리 몸 팔다가 죽으나 똑같아. 그러니 한번 마지막으로 내 모든 걸 걸고 올인해 보는 거야.’
그래서 이 잘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가 제안하는 위험한 게임에 참가해 볼까 했다.
“…필리핀어 공부를 지금부터 해야겠네요.”
“필리핀은 영어도 같이 쓰니, 영어 공부를 하는 게 나을 겁니다.”
돌려서 승낙하는 예나의 대답에 흡족했나 보다. 미주가 웃더니 꽤 무서운 얼굴을 하며 물었다.
“알다시피 우리는 나쁜 놈들이에요. 그리고 예나 씨에게 나쁜 짓을 시킬 거고.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저도 사실 나쁜 년인데. 이 바닥에서 나쁜 짓이란 나쁜 짓 다 해 봐서요.”
서로를 보며 웃는 두 미인을 보던 진우가 결과가 흡족하다는 듯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그럼 이제 나쁜 놈들이 어떻게 나쁜 짓을 꾸밀지 제가 브리핑해야겠네요.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서진우라고 합니다.”
제게 뻗어 오는 진우의 오른손을 잡은 예나는 어쩐지 부끄러웠지만, 악수하며 대답했다.
“네, 잘 부탁드릴게요, 감독님.”
“아, 내가 감독인 거 알다니 우리 배우님이 눈치가 빠르시네. 그럼 이쪽은 시나리오를 쓴 작가님이시고.”
장난스럽게 예나에게 저를 소개하는 진우의 말에 미주 역시 악수를 청하면서 말했다.
“반가워요. 윤미주라고 해요.”
* * *
그 시각, 미주가 진우와 함께 한예나라는 고급 콜걸을 만나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 때 무렵이었다.
연호는 집에서 아내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끓어오르는 복잡한 생각을 삭이기 위해 고용인들을 모두 내보낸 후 홀로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픈 상처를 입은 육체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의료진이 붙으니 당연히 빨리 회복되었지만, 그녀의 마음에 남은 상처는 그리 쉽게 나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미주가 충분히 마음까지 아물 수 있게, 예전처럼 심리적 치료까지 받을 수 있게 연호는 당대 최고의 정신과 의사까지 모셔 왔다.
그리하여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는 동안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었지만, 언제나 불안했다. 진우가 미주의 앞에 다시 나타난 순간 그녀가 저를 버리고 돌아갈 줄 알았으니까.
‘내 집은 당신이랑 같이 사는 집이에요. 내가 가긴 어딜 가요?’
미주에게 버림받을까 봐 정말 노심초사, 전전긍긍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를 선택해 주었다고 굳게 믿었다. 미주의 가족은 더는 진우가 아니라 남편인 저임을 확인받았다 여겼다.
그래서 미주가 반년에 걸친 입원 끝에 퇴원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의 일상은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제 아내는 필요한 말을 할 때 이외에는 입을 다물었고, 진심으로 웃어 주지 않았다. 언제나 차갑게 굳은 눈동자로 싸늘하게 식은 감정을 보여 주는 미주만 있었다. 물론 겉보기에 두 사람은 여전히 아픔을 이겨 낸 사이좋은 부부처럼 보였지만, 연호는 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미주의 선택은 스스로 벌을 주기 위해서 고통 속으로 발을 내디딘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제 옆에 있는 그녀는 제가 알던 미주가 아니라는 걸 이미 느끼고 있었다.
변했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저로 인해 그녀는 변해 버렸다.
모든 게 제 탓임을 알았기에 연호는 밤마다 피 토하는 심정으로 우는 미주를 차마 달랠 수도 없었다. 세상이 잠든 깊은 밤이 되면 옆에 누워 있던 미주는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을 빠져나갔다.
“…흑…….”
저 멀리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핑크색으로 꾸며진 주인 잃은 방에서 미주는 아기용품들을 끌어안은 채 매일 밤 숨죽여 흐느꼈다.
처음에는 그런 미주를 밤새 달래도 보고, 말없이 안아 주기도 해 보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녀의 가슴에 맺힌 것을 풀어 주지 못했다. 연호 역시 매일 밤 다시 미주가 침대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었다.
언제까지 죽은 아이만을 생각하고 살 수는 없다고 마음을 먹었다. 독하게 결심을 한 연호가 눈물을 머금고 제 손으로 직접 초록이, 아니 유주의 흔적을 지웠던 날.
넋이 나간 표정의 미주는 망부석처럼 그날 밤 밤새도록 우두커니 그 방에 서 있더니, 더는 그 어떤 원망의 말도 하지 않았다.
“미주야, 벌써 1년이야. 1년이나 지났어. 그만 보내 주자.”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제 말에 미주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계속 느리지만 빠르게 흘러가고 있을 때, 마침내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연호는 상관없었다. 미주가 뭔가에 의지를 가지고 다시 삶에 대한 열의를 불태울 수 있다면 무엇이든 관계없었다. 미주마저 잃고는 살 수가 없으니 그녀가 뭔 짓을 하든 지켜 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근래의 미주가 예전과 다르게 바깥출입이 잦은 것도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감아 주고 있었는데 말이다.
“서진우랑 호텔에서 만났다, 라…….”
자정이 넘어서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미주를 기다리며 서서히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한 건 말이다. 그녀가 밤늦도록 어디서 무언가를 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지난 1년간 나름대로는 속죄하고픈 마음으로 저를 내려놓아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서진우라는 남자.
제 아내의 오빠라고 자처하는 그 새끼는 사생활이 그리 깨끗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난잡한 편도 아니었다. 제가 아는 한 진우는 단 한 번도 창녀를 불러서 즐긴 적 없는, 나름의 선은 지키는 남자였는데 말이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돈을 주고 여자를 산 게 수상쩍다 여겼다. 그런데 거기에 미주가 떡하니 먼저 나타나더니 곧이어 진우까지 나타나 호텔 방으로 사라졌다고 두 사람에게 붙여 놓은 제 눈들이 알려 왔다.
미주가 저를 육체적으로 배신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머릿속에 달라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이미 마음이 잠식되고 있었다.
“미주야,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늘 생각했던 게 있었어… 나는 네 몸을 가졌지만, 정재민 그 새끼는 네 마음을 가진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혼자라는 고독 속에서 연호는 술잔을 기울이며 아무도 듣지 못할 쓰린 사랑의 독백을 해 보았다.
“그래서 네 첫사랑일 정재민 그 새끼를 질투하고 시기했어. 내가 가질 수 없는 걸 가진 그놈이 미웠고, 죽이고 싶었어. 그런데 있지… 그날, 서진우가 병실에 나타난 순간 딱 알게 된 거야.”
소울메이트.
미주의 영혼은 진우의 것이었다. 에로스도 플라토닉도 아닌, 그보다 더 위대한 아가페적인 사랑.
남녀 간의 관계를 초월한 영혼과 영혼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절대로 진우를 이길 수 없다는 열패감을 맛봤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오늘 미주와 진우가 단둘이 호텔 방에 있다고 한들 저 같은 속물적인 인간이 생각하는 더러운 일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심지어 그곳에는 둘 말고 하나가 더 있었으니 짐작대로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최대한 일렁이는 마음을 진정시켜 보려 술잔을 채워 보지만 말이다. 미주의 앞에서는 도무지 냉철해질 수 없는 지독한 사랑에 빠진 나약한 사내였다.
그렇게 술잔이 쌓여 갈 때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오늘 늦었네. 기다리다가 한잔했어.”
“그래 보이네요. 늦었으니 들어가서 빨리 자요.”
미주는 약간 취기가 오른 것 같은 연호를 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그를 달랬다.
“알았어. 들어가 잘게.”
“그래요. 나도 금방 따라 들어갈게요.”
소파에서 일어난 연호가 침실로 가지 않고 미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근데, 미주야. 이러니깐 너무 좋은 거 있지.”
연호가 은근슬쩍 스킨십을 시도해 보지만, 미주는 그를 밀어내면서 곤란해했다.
“…아, 늦었어요. 나 이제 들어와서 씻어야 하기도 하니깐…….”
“…그래, 뭐… 나도 오늘 피곤해. 빨리 같이 자자.”
저를 밀어내는 미주를 보자 더는 그럴 마음이 식었나 보다. 연호는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고는 침실로 발을 움직였다.
“하아…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데?”
연호는 익숙한 침대에 누워 머리를 손으로 쓸면서 마른세수를 했다.
미주가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 은근슬쩍 손을 뻗어 섹스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미주가 느끼는 척 연기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눈을 피하거나 어쩌다 스치듯 마주쳐도 복잡한 물음이 가득 담긴 눈빛에는 욕구도 욕망도 없었다.
천하의 님포매니악이라고 해도 그런 눈의 미주에게 연호 역시 더는 색욕도 피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손길을 거부하는 게 낫지, 영혼이 없는 몸뚱어리를 안는 건 시체와 섹스를 하는 것과도 같으니까.
그래서 연호는 한동안 미주를 안지 않았고, 그녀 역시 저를 원하지 않았다.
‘너랑 있는 게 이토록 괴로운 건 그만큼 내가 널 사랑해서 그런 거겠지?’
차갑고 냉랭하게 얼어 버린 미주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을까? 지난 반년간 스칼렛 오하라처럼 내일의 태양이 뜨면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길 간절히 바라 보았다.
하지만 마음을 닫은 미주는 사랑을 지키는 게 무엇인지 몰랐던 제게 티끌만큼의 자리도 내어 주지 않았다. 다가갈 수 없는 연호에게 미주 또한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을 때 점점 두 사람의 마음의 골은 깊어져 가고 있었다.
연호가 자는 척하며 불빛 하나 없는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젖은 물 냄새가 나는 미주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털끝도 닿기 싫다는 듯 침대의 가장 끄트머리에서 저를 등지고 있는 여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연호가 물었다.
“오늘 누구 만났어?”
“내가 말 안 해도 이미 다 알고 있잖아요?”
미주의 비아냥거리는 대답에 연호는 뭔가 속이 들끓는 듯해 조금 격양된 목소리를 냈다.
“왜? 쓰리썸이라도 해 보니깐 나 따위는 이제 시시해진 거야?”
“…술에 취한 것 같으니 방금 한 말 못 들은 거로 할게요. 그만 자요.”
미주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꽉 막힌 목소리로 제 뜻을 전하고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 남편은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은 듯했다.
“날 미워한다고 했지?”
“…….”
“날 증오한다고도 했어.”
“…….”
“하지만 잘 들어 둬. 절대로 내 옆에서 벗어날 수 없어. 알잖아? 작년에 공소시효 폐지돼서 영원히 넌 내게 종속될 수밖에 없음을.”
미주는 감았던 눈을 떴다.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을 열어 분노를 꾹 눌러 담아 대꾸했다.
“마음대로 해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증거, 내일이라도 경찰에 넘겨요.”
“왜, 이제 더는 서진우를 보호해 줄 생각이 없는 거야? 아니면 서진우고 나발이고 내 옆에 있는 게 더 지옥 같아서 그러는 거야?”
“…솔직히 말해요? 내가 죽여 달라고 한 적 없어. 오빠가 죽인 거지.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그러니 더는 내 죄도 아닌 거로 날 협박하지 마, 차연호.”
“세게 나오네. 그럼 내가 겁먹을 줄 알았어? 아니면 벌써 둘이 붙어먹어서 이미 새로운 판을 짠 건가?”
“오빠 명예를 위해 더는 말을 아낄게요.”
“명예? 윤미주, 절대로 잊지 마. 넌 내 거야. 내가 널 버리기 전까지 넌 날 떠날 수 없어.”
비웃는 연호의 말에 미주는 다시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사랑하는 남자는 늘 언제나 저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았다. 마음에 든 장난감을 예뻐하는 것처럼, 물건처럼 취급하면서 차연호의 소유임을 강조했었다.
저 역시 미련한 사랑을 했기에, 그 독점과 소유욕이 깊은 사랑이라고 제멋대로 판단해 버렸을 때는 이런 말을 들어도 그저 행복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수없이 많은 실수와 잘못들이 가시밭길이 되어 지금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서로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미주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이미 침대에 반쯤 기댄 자세로 저를 뜨겁게 보고 있는 연호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방금 물었죠? 맞아요, 당신을 증오해. 매일같이 차연호 너를 미워하고 있어. 그런데 나는 모르겠어요. 내가 진짜 당신을 미워하는지, 이토록 증오하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여전히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미주의 말 속에 묻은 흐느낌이 어둠 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나도 네가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미워. 그렇지만… 하, 나도 모르겠다… 이젠.”
연호는 머리를 감싸 쥐며 감정을 토해 내지만 말이다. 어둠 속에서도 느낄 수 있는 저를 노려보는 미주의 노여운 눈빛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냥 우리 더는 서로를 괴롭히지 말았으면 해요.”
“…그럼, 뭘 어떻게 하고 싶은데?”
“헤어져요.”
술 때문에 조금 지끈거리던 머리에서 일순간 통증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연호는 지금 이별을 논하는 미주를 활활 불타오르는 눈으로 지그시 분노를 담아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말이네. 방금 말했잖아? 넌 감히 날 먼저 못 떠나.”
“이혼해요.”
하지만 미주 역시 차갑게 굳은 얼굴로 그를 향한 복잡하고 날 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말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더는 하지 마.”
“…….”
“대답해. 왜? 이젠 나 같은 거랑 말도 섞기 싫어서 그래?”
대답 없이 저를 경멸의 눈으로 보는 미주를 보며 연호가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소리쳤다.
“이혼? 웃기지 말라고 해. 절대로 못 하고 안 해.”
“이거 놔요.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
완력으로 저를 붙들어 매고 있는 연호에게 어깨를 틀면서 반항해 보지만, 남자를 힘으로 이길 수 없었다.
“잘 들어, 윤미주. 내가 몇 번 농담처럼 이야기했는데, 진담이야. 넌 내가 죽으면 살아 있는 채로 내 관에 같이 넣으라고 유언장에 써 놓을 거거든.”
“미친 새끼! 놔, 이거. 미친놈! 난 네 소유물이 아니야! 죽으려면 혼자 죽어!”
이혼하자는 말이 연호의 뇌관을 건드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저를 순장시키겠다는 미친 것 같은 연호의 집착에 미주도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그때였다. 연호가 처음으로 물리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널 얼마나 배려해 줬는지 알기나 할까?”
“놔! 차연호! 이거 놔!”
“빨리 아이를 만들어서 낳아야겠어. 그러면 더는 네가 이런 생각도 못 할 테지.”
연호가 힘으로 밀어뜨린 탓에 등에 닿는 익숙한 매트리스의 감촉이 무섭다고 느낄 때였다. 이미 다 잊었다고 생각한 그 감각이 등줄기를 스쳤다. 차갑고 축축했던 그 콘크리트의 냉기. 그리고 제 몸 위를 올라타던 악마들의 얼굴이 연호의 얼굴로 바뀌고 있었다.
“악! 하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마!”
미주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옷을 벗기는 연호를 완강히 거부해 보지만 이미 남편은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힘으로 이길 수가 없는 절망감 속에서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눈물이 흘렀다.
“…살려 주세요….”
“……!”
“살려… 주세요……!”
반쯤 착란상태에 빠진 미주가 중얼거린 말이 금수가 된 연호에게 닿았던 걸까? 반쯤 벗겨진 나이트가운 위로 색욕의 안광을 번뜩이던 짐승이 악마가 아닌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세상에… 내가 뭔 짓을… 미주야……, 난…….”
그제야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했는지 깨우친 것 같은 표정의 연호가 무너지고 있었다.
“괜찮아요. 난 괜찮으니까…….”
“너한테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미주는 몸을 일으켜 자괴감에 빠진 얼굴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연호의 커다란 등을 꼭 안으면서 속삭였다.
“전에 말했죠? 나도 틀리고 당신도 틀렸다고.”
“…….”
“연호 씨, 지금 우리는 같이 있으면 안 돼요. 이러다가 결국 서로를 해치고 말 거야.”
늘 언제나 냉정한 카리스마를 내뿜던 남자가 사랑 때문에 망가지는 걸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미주는 손을 뻗어 지금 이 순간에도 지독하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연호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눈물을 흘렸다.
“미주야, 날 용서하지 마… 우리 서로 머리를 좀 식힐 필요가 있어. 아니…… 네 말대로 헤어져야 해. 서로를 위해서…….”
사랑하기에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흔한 유행가처럼 더는 사랑하는 미주와 함께할 수 없음을 연호는 깨달았다.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 * *
가끔 늦은 밤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향수 냄새와 술 냄새, 담배 냄새가 뒤섞여 어쩌면 굉장히 지독하게 느껴지는 향이 현관을 뒤덮었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상태로 현관에 거의 쓰러져 있는 연호를 미주는 꼭 끌어안고 늘 이렇게 말했다.
“연호 씨, 나도 사랑해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언제든지 돌아와요.”
하지만 제 말이 연호에게 닿지는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침이면 술 취해서 찾아가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남겨 놓은 연호는 도망치듯 사라졌으니까.
* * *
이제 혼자 남은 미주는 어느 고요한 새벽, 아침 해가 떠오를 때 겨우 용기 내 이곳으로 왔다.
“1년 만이네, 우리 초록이. 엄마가 너무 늦게 왔지? 미안해.”
너무 작고 동그란, 할아버지 할머니 곁에서 편히 쉬고 있을 아이의 무덤 주변에는 제가 직접 고르고 골랐던 인형들이 있었다.
“아빠가 예쁜 이름을 지어 줬더라. 차유주래. 그래서 초록아, 이제부턴 유주라고 부를게.”
비에라도 젖을까, 바람에 닳기라도 할까. 플라스틱 통 안에 넣어져 있는 작고 귀여운 인형들 덕분에 아이는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건 엄마가 좋아하는 꽃인데, 우리 유주도 좋아하겠지?”
품에 꼭 안고 왔던 작은 꽃다발을 매일매일 예쁜 꽃으로 장식되는 작은 무덤 옆에 놓으면서 중얼거렸다.
“아빠가 우리 유주 예쁜 거 많이 보라고 매일 꽃을 보내 준다고, 유주 고모가 엄마한테 말해 줬어.”
재벌가의 선산이니 관리해 주는 사람이 있어, 연안 차씨의 한 일족은 여기 풍수 좋은 곳에 모여 편히 쉬고 있었다.
미주는 해가 질 때까지 연호가 직접 묘비명을 썼다는 자그마한 비석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차연호와 윤미주의 사랑하는 딸 차유주를 영원히 기억하며.]
차가운 대리석을 지문이 닳도록 쓰다듬으면 조금이라도 유주에게 엄마의 온기가 전해질 수 있을까?
미주는 붉게 물드는 석양을 바라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주야, 엄마 다시 올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줘. 응? 금방 올 테니깐 오래 안 기다려도 돼. 혼자 두지 않을 테니깐… 조금만…….”
해는 이미 저물고 어둠이 스산하게 짙어지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돌이킬 수 없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제가 먼저 시작하지 않았지만 꼭 제 손으로 끝내야만 하는 일.
이제는 미주가 악마가 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