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여자가 한을 품으면 (27/53)

25. 여자가 한을 품으면

* * *

미주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육체의 상처는 금방 나을지 몰라도 마음의 상처는 쉽게 낫지 않는 법.

아이를 잃은 가엾은 어미에게 보내지는 동정의 시선 속에서 말이다. 조용히 병실 침대에 앉아 창밖의 계절이 바뀌는 걸 보고 있었다.

대내외적으로 차연호 상무의 아내는 아이를 사산한 충격으로 우울증이 와 병원에 장기 입원 해 마음까지 치료 중인 거로 알려져 있었다. 물론 매일 저녁 퇴근하고 아내가 입원 중인 병실을 찾아 극진히 간호하는 남편을 뭇 사람은 애처가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 미주가 있는 병실에서 두 사람은 꼭 필요한 대화 말고는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미주는 마음을 닫았고, 연호는 온종일 책만 읽고 있는 그녀에게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부가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면서 멀어져 버린 틈이 좁혀지지 않고 있을 때였다.

매일 찾아오지는 않지만, 그가 왔을 때는 연호조차 병실로 들어설 수 없게 만드는 남자가 찾아왔다.

“이거 다 봤어. 또 보고 싶은 건 요한 씨한테 메시지로 보냈으니 오빠가 나중에 가지고 와 줘.”

“야, 이 모개야. 요한이 이 새끼 내가 부려 먹어야 하는데, 요새 도서관 문턱 닳도록 들락거리는 바람에 내가 일을 못 시켜.”

“묵인하고 있는 거 다 알거든? 책 셔틀 역할이나 잘하셔, 서진우 씨.”

일주일 만에 병실로 온 진우를 보면서 미주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어릴 때 우리 때문에 무협지 보더니, 커서도 무협 소설이니?”

“재밌잖아. 나도 아미산으로 가서 검법을 연마해 보고 싶고, 강호를 누비며 살아 보고 싶기도 하니깐.”

피식- 웃은 진우가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으면서 엉뚱한 소리처럼 묻지 않은 말에 대답했다.

“네가 말해 준 거, 부산에서 넙치 찾아내 알아냈다.”

“남편이 물증을 가지고 있는 게 확실했던 거구나.”

“어, 야구 배트. 그게 연호의 손에 있었어. 거기에 내 지문이랑 놈들 피가 있을 테니.”

하늘이 불타던 밤에 저와 재민은 진 회장의 김 기사와 함께 배를 타고 나가 바다에 죄를 숨겼기에 몰랐다.

그 피범벅이던 창고에 흔적을 지우고자 불 지를 것을 지시했던, 믿었던 넙치가 제가 휘둘렀던 야구 배트를 빼돌려 숨겼을 줄은.

“연호가 움직이는 놈이 하나 있어. 백호라고, 전직 경찰인데 죽은 네 시아버지 대부터 그 집안에 충성하는 놈이더라. 그놈이 넙치를 찾아내서 회유했더라고.”

미주는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물었다.

“넙치 오빠가 이제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할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마. 영원히 입을 봉했으니.”

영원히 입을 봉했다는 뜻이 무엇인지 알지만, 미주는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그 누구든 제 앞을 막으려 한다면 절대로 살려 두지 않겠다 골수에 새겼으니까.

“나는 그동안 네가 책 속에서 뭘 봤을지 궁금해지는걸?”

진우를 빤히 보던 미주가 웃음기가 싹 가진 얼굴로 입술을 움직였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

고요한 얼굴에 서린 뜻을 읽은 진우도 싸늘하게 웃었다. 전하고자 했던 말뜻을 진우 역시 알아들은 듯했다. 미주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오빠도 나한테 지은 죄가 있으니 속죄할 기회를 줄게.”

“말해 봐. 네가 원한다면 난 그 무엇이라도 해 줄 수 있어.”

낮게 울리는 진우의 목소리에 미주는 살짝 미소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젠 그 누구의 손도 안 빌려. 내가 직접 해.”

“좋아, 하지만 내 도움이 필요할 거야. 그 부분에 대해선 너도 아마 내 말뜻이 뭔지 알 거고.”

고개를 끄덕인 미주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더는 그 누구도 날 물건 취급 하지 못하게 할 거야. 오빠도, 재민 오빠도, 남편과 그 누나까지 모두 다.”

“그래, 나 역시 차연호를 견제하려고 너를 이용한 면이 없잖아 있기는 했어. 그래서 속죄할 테니 꼭 끼워 줘. 네 원대한 계획에 말이야.”

진우가 손을 뻗어 미주의 손등을 괜찮다는 듯 몇 번 톡톡- 쳤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면서 저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나도 완벽하게 결백하다고는 말 못 한다는 거 잘 알아. 남편이 오빠 일을 가지고 협박했을 때, 나도 남편을 이용하려고 마음먹었으니깐. 하지만 내 변명은 이거야. 나는 그래도 오빠랑 재민 오빠를 지키고 싶었어.”

“알아, 뭔 말인지. 그런데 있잖아, 미주야. 연호도 네 마음 알 테니 더는 네 잘못에 대해서 생각하지 마.”

따로 화해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진우가 저를 찾아온 순간, 5년간의 공백이 무색해진 두 사람이었다. 그래서 먼저 떠나보낸 아이에 대해서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을 때, 진우에게 그간 말하지 못했던 진실들을 알렸다.

지금 결혼이 사실은 연호와의 계약이라는 것과 희주의 출생 비밀까지. 더는 숨길 것도 없었고, 숨기고 싶지도 않았던 미주가 어느 날씨가 화창했던 날에 담담히 꺼내 놓은 말에 진우 역시 많이 놀라긴 했었다.

* * *

“솔직히 너랑 연호 사이에 뭐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었어. 차연호가 내 죄를 모르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가지고 너한테 협박할 줄은 몰랐다. 나는 연호가 내 죄를 알면 당연히 나를 압박하리라 여겼거든.”

“그때 선택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덕분에 나는 먼저 별이 된 아이랑도, 우리 초록이랑도 만날 수 있었으니깐.”

폭우가 내린 미주의 마음은 그 무엇보다 단단하게 다져지고 있었다. 이제 더는 잃을 것도 없었고, 더 바닥으로 내려갈 곳도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 모든 일의 흑막이자 원흉을 절대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하여 희주의 비밀까지 털어놓으면서 지금 제가 반쯤 미친 모습으로 링거를 꽂은 채 침대에 있는 이유를 진우에게 말했다.

“…허,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인데. 형이 진 회장의 친자라니.”

“그런데 있지, 오빠도 몰랐던 비밀을 차씨 남매들이 알고 있었어.”

진우가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럴 수 있다는 듯 말했다.

“연호가 접근할 수 있는 정보와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비슷해 보여도 조금은 달라. 정보를 얻는 루트도 조금 다르고. 거기에 차연희까지 끼어든다면 아무래도 연호 쪽이 더 우세할 수밖에 없어.”

“그래도 재벌은 재벌이다, 그 말이네.”

“맞아. 그들은 각계각층에 조력자들이 많아서 건재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진 회장과 내가 그토록 차씨를 몰아내려고 해도 지금껏 성공하지 못한 거야.”

드디어 수면 아래에 있던 비밀과 진실, 그리고 계략들이 떠올랐기에 각자가 아는 것들을 맞춰 보기 시작했다.

“식사 자리로 널 부른 건 연호의 눈에 띄게 하기 위한 거였어. 진 회장이 공채 합격시키고 널 비밀리에 전략실로 발령 내고는 그간 돈으로 입막음시키고 있었거든.”

“발령 건은 남편도 모르는 거야?”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차연호, 바보 같으니라고. 그 장단에 놀아나는 걸 몰랐네.”

미주는 웃긴다는 듯 피식-거리면서 말했다.

“내가 임신했을 때 진 회장이 일부러 재민 오빠 이야기를 꺼냈어. 질투하게 만들려고 아주 애를 쓰던데. 나도 결국 그 장단에 놀아난 거나 다름없기는 해.”

젖은 목소리의 미주가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하는 말에 진우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미주야. 아무래도 진 회장이 연호를 노리는 것 같다. 그 영감탱이는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내 목을 날릴 수 있거든. 알다시피 그 일, 진 회장의 손을 빌렸으니 분명 그 영감도 뭔가 손에 쥐고 있을 거야.”

“그럼 오빠 말대로라면 진 회장이 남편을 없애거나,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둘 중에 하나라는 말인 거야?”

“…처음에는 붙어먹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연호를 처리하려고 하는 듯해.”

미주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리는 걸 보면서 진우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전했다.

“진 회장이 뭔가 눈치를 챘어. 네가 사산을 하면서 너, 나 그리고 연호의 관계가 변할 수 있다 느꼈는지 나를 통하지 않고 다른 창구로 지금 연호가 제정신이 아닌 틈을 타 연호 쪽 지분을 야금야금 매수하고 있어.”

“우리가 손잡을까 봐 그러는구나. 그래도 이사회는 다들 남편을 지지하잖아.”

“우리 모개, 그간 풍월 좀 읊었구나. 그래, 맞아. 하지만 요새 분위기가 좀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아서 예의 주시 하는 중이야.”

“…우리 모두 진 회장의 손바닥 위에서 염병 첨병 하고 있었어. 다들 많이 배우고 똑똑하다 자부하지 않았어? 나도 역시 그랬는데 세상에, 이토록 멍청했다니.”

* * *

그래서 몇 달 동안 진짜 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사산이 의사의 말대로 불운한 확률로 생긴 사고라면 연호를 더는 책망할 필요가 없었다.

저 역시 희주의 비밀을 알고 꽤 오래 끙끙 앓았으니 말이다. 그 스트레스 또한 분명 작용하지 않았을까 여겼기에 제게도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 늙은 여우가 저와 연호를 이간질한 건 분명했다. 아니, 처음부터 저를 남자들의 전쟁에 은근슬쩍 밀어 넣은 사람이 바로 진 회장이었다.

‘그놈만 아니었으면.’

미주는 진 회장을 이대로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를 끌어내려야만 가슴속에 얹힌 분노와 원망이 조금이라도 사라지지 않을까 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고민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진우에게 제 뜻을 알렸다.

“그런데 미주야, 재민이는 여기에서 빼야 해. 우리가 잘못되는 수도 생각해야 하니깐. 재민이라도 살리거나 재민이가 우릴 도와줘야 해.”

“…오빠 말 듣고 보니 일리는 있네. 배수진을 치는 것도 좋지만 뒤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진우는 매섭게 번뜩이는 미주의 눈을 보면서 변해 버린 그녀가 걱정되는 듯 물었다.

“연호한테는 말할 거야?”

“아니, 남편은 여기서 제외야.”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니깐?”

제 말에 눈썹을 찌푸리다가 입술을 꾹 다무는 미주가 뭔가 복받친 듯 대답했다.

“글쎄, 모르겠어. 하지만 그 사람은 자격이 없어.”

“그래. 그런데 미주야, 아이 일은… 내가 따로 알아본 대로… 두 사람이 그날 싸우지 않았어도 벌어질 수 있었던 안타까운 사고 비슷한 거라고 다들 입 모아 얘기하니…….”

미주는 눈을 감고 진우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제 담당의는 앵무새처럼 비슷한 말만 되풀이했다.

그저 부부에게 생긴 너무나도 안타까운 불행에 가깝다고 말이다.

미주는 담당의가 연호의 사주를 받아 말한다 생각해 진우를 통해 제 상황을 다른 산부인과 전문의 여럿에게 전해 물어봤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다들 비슷한 답변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걸까? 어차피 그날 아이를 잃을 운명이었는데, 하필이면 일주일 전에 차연호랑 개싸움을 벌인 바람에 남편이 이 결과를 다 뒤집어쓴 거라고?”

“미주야…….”

“그럼 다 뒤집어쓰라고 해. 나는 잘못 없어. 아니, 내가 잘못했다 해도 인정 못 해. 그러니 다, 모두 다 차연호가 책임지게…… 평생 괴롭히고 책망하고 원망하고 미워하며 증오할 거야.”

울먹이는 미주에게 진우가 손을 뻗었다. 진우가 제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커다란 손으로 등을 토닥거리자 겨우 눈물이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 아이 이야긴 그만하자. 아무튼, 남편이 바보도 아니고 뭔가 눈치채겠지.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손을 잡을지 말지 결정하려고.”

“그래, 연호도 네 생각을 알면 기꺼이 도울 거야.”

“그런데 오빠, 차연호는 보류지만 꼭 필요한 사람이 있어. 오빠가 그 사람을 불러 줬으면 좋겠는데.”

진우가 누구냐는 듯한 표정을 짓자 미주가 살짝 묘한 얼굴로 대답했다.

“차연희.”

“의외인 것 같으면서도 가장 든든한 아군이 될 것 같은 인물이기도 하네.”

“반대로 가장 위험한 인물이기도 하지. 나도 오빠도 어쩌면 차연호 씨까지 그 여자를 조금 간과했을지 모르니깐.”

고개를 끄덕이는 진우를 향해 계속 말했다.

“내가 직접 연락하지 않고 오빠를 통해서 부르는 이유를 알 거야. 그러니 시누이랑 거래를 좀 하려고.”

“거래라, 그래, 뭘 가지고 차연희를 설득할 셈이지?”

진우가 진지하게 묻자 미주는 냉정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힌 채 대답했다.

“내 편으로 끌어들일 만한 패는 오빠가 알아봐 준 거잖아?”

“아, 그거. 좋아, 그럼 그 패를 가지고 어떻게 설득할 건지 먼저 들어 봐도 될까?”

“좋아. 어차피 오빠 동의도 얻어야 하는 일이니 내가 몇 달 동안 머리 싸매고 꾸민 계략을 말해 줄게.”

“이거 기대되는데?”

진우의 반응을 보면서 미주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운을 뗐다.

“본디 차현은 차연희가 가지는 게 옳다고 난 생각해. 남편은 엄밀히 말해서 밖에서 낳은 자식이니.”

“결혼해 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나 보네.”

“당연하지. 나라도 갑자기 차연호가 어디서 아들을 하나 낳아 와서 내 후계자다, 이러면 그 아이를 절대로 살려 두지 않을 테니깐.”

진우는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본 결과, 차연희는 진짜 진심으로 남편을 회장으로 만들고 싶어 해. 의외로 남매 우애가 깊어. 그래서 이렇게 말해 볼까 하는데 들어 봐.”

“미주야, 뜸 들이지 말고. 오빠 궁금해 미치겠거든?”

진우가 오버액션으로 몸을 흔들면서 대답을 장난스럽게 종용했다. 미주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계열사 분리.”

제 말에 조금 전까지 웃던 진우도 표정을 싹 바꿨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더 말해 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차연희를 임시 회장으로 만들어서 계열사 분리한 후에 오빠는 오빠 몫을 챙겨. 그동안 진수오 밑에서 개처럼 일해 준 대가를 받아야지.”

“우린 먹고 떨어지고 차씨들끼리 새 회장을 뽑아라, 그 말이네.”

“응, 당연히 남편이 차현 회장직에 오를 테고, 꼴 보기 싫은 오빠들 안 봐서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진우가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미주는 조금 더 단단한 목소리를 냈다.

“정확히 어떻게 나눌 건지는 오빠가 내 시누이나 남편과 의논해서 정하는 게 옳을 듯해. 아마 차연희는 차현 건설은 절대로 내주지 않을 테니…….”

“차현 중공업, 나는 차현 중공업만 주면 다 차연호가 가져가도 돼.”

진우가 미주의 말을 끊으면서 원하는 걸 드러냈다.

“차현 중공업이 영감탱이의 핵심이지. 진수오를 끌어내리고 난 후 내가 거길 차지하는 걸 그 늙은 여우가 봤으면 해.”

진수오의 시작점인 영도에 있는 작은 조선소가 어느새 대한민국 빅 5 조선소에 들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래, 우린 부산 사람이니깐 부산에서 오빠가 사장으로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차현 중공업은 내가 이리저리 모아 둔 주식이 꽤 돼. 진수오 차명도 내가 관리 중이니깐, 지분 싸움에서는 승산이 있으니 중공업을 떼 달라고 내가 말할게.”

그런데 진우의 말을 듣고 있던 미주가 조금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오빠, 근데 차씨 남매가 중공업을 그리 순순히 내줄까? 아무리 자기들이 시작한 게 아니었다고 해도 이만큼 몸집이 커졌으니 오빠 주기에는 아까울 텐데.”

“나도 차연희, 차연호 남매가 들었을 때 솔깃한 정보를 하나 가지고 있거든.”

“뭔지 물어봐도 돼?”

“당연히. 오히려 네가 이 비밀을 그 여자한테 가서 말해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미주는 진우가 전하는 충격적이고 추악한 진실에 몸서리쳤다. 인간 진수오가 얼마나 악마 같은 놈인지 한 번 더 확인하며 전율을 느꼈다.

“정말?”

“그래, 그러니 가서 전해. 중공업이면 내게 싸게 값을 치르는 거라고.”

미주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가는 길에 진우는 그녀가 제안한 묘수에 속으로 감탄했다.

‘미주가 생각해 낸 대로 하면 차연호와 손을 잡되, 또 손을 잡은 게 아닌 모양이 되니깐. 그럴듯한 스토리가 만들어질 것 같아.’

진우는 그간 연호를 쓰러뜨릴 계책에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었다. 연호를 재기 불능으로 만들어 아예 차현에 발도 못 붙이게, 지독할 정도로 제 여자를 앗아 간 것에 대한 죄를 물으려고 했는데.

미주의 말대로 차연희를 방패 삼아 그와 전략적으로 연대한다면, 연호도 제안을 완전히 뿌리치지 않을 것 같았다. 저 역시 차연호의 밑에서 일하거나 그에게 충성해야 하는 일은 없게 되니 서로의 마지막 자존심만큼은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손을 잡은 진우와 미주가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책략을 꾸미고 있을 때였다.

드디어 그녀가 미주 앞에 나타났다.

* * *

“먼저 보자고 해 줘서 너무 기쁜 거 있지. 안 그래도 그 일 있고 나서 연호가 나도 미주 씨 못 만나게 해서. 이제야 온 걸 용서해 줘, 응?”

여전히 우아하고 고상한 재벌가 사모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올케에게 그간의 안부를 전했다.

“남편은 제가 걱정돼서 그랬을 거예요. 그러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고, 이제부터라도 자주 만났으면 해요.”

미주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조금 여윈 얼굴로 연희를 바라봤다. 마음 약한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제 손을 잡았다.

“나는 있지, 그때 괜히 내가 우리 집으로 불러서 인테리어 구경시켜 주니 마니 했나 싶어서 마음이 너무 쓰였어. 혹시라도 영향받았을까 봐…….”

“아니에요, 그거랑 아무 상관 없대요.”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연희를 지그시 보았다. 지난 시간 동안 알고 지낸 차연희라는 인간은 속된 말로 전형적인 재벌가에서 공주님으로 자란 여자였다. 저를 친동생처럼 예뻐해 줬던 그 마음 자체는 순수하겠지만 순진한 여자는 아니었다.

인생의 풍파 따위는 모를 것 같은 이 지체 높으신 귀부인께서 지금 흘리는 눈물이 악어의 눈물일지도 몰랐지만, 미주는 그간의 정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래도 그간 내가 느꼈을 때는 적어도 악의로 가득 찬 위선을 숨긴 것처럼 보이진 않았어.’

내 적의 적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또 다른 적이 될 수 있겠지만, 미주는 가진 것을 걸고 연희와 승부를 겨뤄 보고자 했다. 일부러 한참을 연희가 병문안 선물로 가지고 온, 평소에 좋아했던 음식을 나눠 먹으며 밀린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미주가 연희와 탐색전을 벌이며 경계를 허물고 있을 때, 예상대로 연희가 먼저 선제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나는 서 전무가 나한테 미주 씨 만나 달라고 얘기할 줄 몰랐어. 연호는 싹- 입을 닫고 모르는 척 절대 면회 불가라고 난린데.”

미주는 옅게 웃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직접 연락할 수 있었지만, 오빠가 말해 주는 게 더 모양이 낫지 않을까 해서요. 남편은 절 못 만나게 하는데 저는 보고 싶다 이러면 또 남편 입장이 좀 그러니깐.”

말도 안 되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들으면서 연희가 무슨 생각을 할지 조금 우습기도 할 때였다. 다행히 그녀는 제 뜻을 알아들은 듯했다.

“서 전무가 불러서 내가 여기 온 거면 미주 씨가 연호한테 한 소리 듣지 않을 테니깐 그런 거지? 그래, 알았어. 자, 이제 쓸데없는 수다는 그만하고 본론을 이야기해 봐.”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낭랑한 목소리를 내는 연희를 보면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날 이렇게 만든 자를 그냥 둘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제 이야기 한번 들어 보실래요?”

“…미주 씨가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르겠는데 이날이 오길 꽤 오랫동안 기다렸어.”

에두른 연희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을 캐치하고는 미주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물었다.

“희주 오빠가 회장님 친자인 거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알게 된 루트랑 좀 다른 방법으로 알아낸 것 같은데, 우선 이거부터 대답을 들어야겠어요.”

연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주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었지만 말이다. 눈으로는 연호처럼 차가운 온도를 내뿜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부부라는 게 그래. 자기도 결혼을 해 봐서 내 말이 뭔 말인지 알 거야. 꼭 사랑이 없더라도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이게 되면 나는 그 사람의 아내가 되는 거고, 그 사람은 내게 남편이 되는 거니깐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봐.”

어쩌면 그동안 사람 좋은 얼굴로 진심을 오랫동안 숨기고 있었을 암컷 맹수가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었다.

“길게 말해, 짧게 말해? 할 이야기가 꽤 되거든.”

“적당히 끊어 주시면 좋고요. 저도 할 이야기가 꽤 돼서 이러다가는 2박 3일 걸릴지도 몰라요.”

유연한 농이 섞인 말들 속에서 두 여자는 처음으로 하나의 뜻을 위해 각자 가진 것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알았어. 그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적당히 해 볼게. 보자, 그게 있지. 어느 날이었어. 남편이 술을 진탕 마셨는데 자는 내 몸 위에 올라타더니 섹스를 하려고 하더라고. 나는 그때 아이가 너무 갖고 싶었기에 남편이 그런 짓을 해도 적당히 받아 주고 있을 때였거든.”

“…힘든 시기를 보내고 계셨을 때였군요.”

“응, 알다시피 내 쪽에 문제가 있는 거니깐 아무래도 내가 더 안달 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는데… 그날 내 팬티만 벗기고는 그냥 삽입하던 남편이 이렇게 말했어.”

조금은 적나라한 말을 하던 연희가 뭔가 결심을 한 듯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면서 말했다.

“‘미희야’, 라고 내 몸 위에서 네 엄마의 이름을 불렀어.”

“…….”

“다음 날이 됐는데 이 인간은 뭔 짓을 했는지 기억을 하나도 못 하더라고. 그래서 좀 알아봤어. 처음에는 남편이 바람피운다 생각했기에 그 ‘미희’라는 년을 찾아내서 머리를 다 쥐어뜯어 놓을까 했는데 말이야.”

“알고 보니 죽은 여자라 아쉽게도 기회를 놓치셨네요.”

“그래, 알고 보니 이름을 불렀던 날이 네 엄마가 죽은 날이었어. 부산에서 날아온 비보에 그렇게 진창이 되도록 마시고 실수한 거지.”

진 회장은 그 전에도 후에도 단 한 번도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연희는 ‘미희’라는 여자가 그에게 꽤 중요한 인물이지 않을까 해서 비밀리에 알아보다가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미희라는 여자가 남편의 진짜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수소문했었어. 그리고 알아냈지. 네 엄마가 나한테는 시아버지인, 남편의 아버지가 부산에서 운영하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걸.”

“…….”

“고향에 두고 온 여자. 그러니깐 뭔가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기분이었어.”

“그런데 그녀는 남편의 친구와 결혼했고, 아들과 딸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죽었다. 여기까지 알아내셨던 거군요.”

“맞아. 그런데 좀 이상한 여자의 직감, 또는 육감이 딱 느껴졌어. 미희라는 여자의 아들, 혼인신고 날짜와 출생신고 날짜가 뭔가 안 맞더라고.”

엄마가 진 회장의 아이를 임신한 채 아빠와 결혼했다 암시하는 연희의 말에 미주는 입술을 깨물고는 물었다.

“그래서 오빠를 의심했군요. 그런데 어떻게 친아들이라는 걸 알아냈던 건지…….”

“네 엄마가 죽은 뒤에 네 아빠가 폐인이 된 이유, 그 뒤에 남편이 있었어. 잘 생각해 봐. 너희는 부산에서 그리 여유롭게 살지 못했는데 네 아빠는 어디서 마약 살 돈을 구했을까?”

그건 미주도 생각지 못했다. 이젠 기억에서도 희미해진 아빠의 죽음 뒤에 진 회장이 연루되어 있다는 충격 속에서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아빠한테 소리치던 게 기억이 나요. 돈이 계속 어디서 나서 자꾸 나쁜 짓 하냐고…….”

희주도 늘 말했었다. 이 집이라도 약쟁이들 손에 넘어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할머니가 아빠로부터 지켜 주신 덕분에 우리 남매가 길거리를 헤매지 않고 살 수 있었다고.

할머니의 강인함 덕분에 오빠와 제가 험한 꼴을 당하지 않고 그나마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지붕 있는 집에서 살고 있다 여겼는데 말이다. 사실은 아빠에게 약을 공급해 주는 이가 있어, 할머니가 평생에 걸쳐 이룩한 걸 그렇게 많이 축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니.

“남편이 네 오빠를 자기 쪽으로 데려오고 싶어 했어. 당연히 네 아버지는 반대했고. 그러니 그 악마가 생각할 만한 게 뭐가 있겠어?”

“엄마도 죽었겠다, 아빠를 마약으로 말려 죽인 거네요.”

“그래, 네 아빠의 죽음에 직접 손을 쓴 건 아니지만 남편이 방조하고 간접적으로 죽인 건 맞아.”

“내 아이도 그놈 때문에 죽은 거나 다름없는데, 내 아버지도 그놈이 죽인 거라니.”

미주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제 가족들과 진수오의 악연에 몸서리를 치고 있을 때였다.

“나도 네 오빠가 그 사람의 친자인 걸 알게 된 후에, 남편의 이상했던 행동에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된 거야. 그 당시에는 왜 저렇게 친구 아들에게 집착하는지 의심만 할 뿐 물증이 없었으니깐.”

“그럼 대체 언제 우리 오빠가 친아들이라는 걸 알게 된 건가요? 뭔가 검사라도 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었을 텐데요.”

“나는 그저 이를 갈면서 때를 기다렸어. 남편은 네 오빠를 당장이라도 옆에 두고 싶어 했지만, 알다시피 네 오빠가 부산에서 생각보다 거물이 되어 버렸거든. 아직 남편은 차현 그룹 사위에 불과했을 때였고.”

젖은 눈을 한 미주가 연희 말을 곰곰이 듣다가 뭔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남편한테 물었던 적이 있었어요. 우리 오빠를 알길래 어디서 만난 적 있냐고… 자기가 미국에서 잠깐 서울에 나왔을 때 본 적이, 만난 적이 있었다고 했는데… 설마, 그때…….”

“맞아. 숨죽이고 조용히 기다리니 남편이 알아서 내 앞에 데려왔어. 감히 간도 크게 말이야. 내 앞에서 친구 아들이라고 말하는 남편이 어찌나 기뻐하는 얼굴이던지. 그래서 내가 가진 걸 좀 이용했어. 네 오빠가 차현 호텔에서 묵었거든.”

“거기서 머리카락이나 오빠의 유전자가 묻어 있을 법한 걸 찾아내서 비교한 거네요.”

이 순간만큼은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가는 미주가 기특하다는 듯 연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맞아. 심지어 99% 이상의 확률로 부자지간이라길래, 결과를 보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마 그 누구도 그때 내 심경을 알지 못할 거야.”

“그래서 차연호가 확인했군요. 나도 진수오 딸인지 궁금해서.”

연희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주에게 입을 열었다.

“아니야, 연호는 그런 짓 안 했어. 그건 전부 내가 한 짓이야. 연호는 더는 뭐가 상관있냐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말했지만 난 진실을 알고 싶었어.”

연호가 그런 짓을 안 했다니, 그가 거짓말을 한 걸까? 미주는 애써 동요되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연희에게 대꾸했다.

“어쩐지, 자주 집에 놀러 오라고 하시더니.”

“자기가 긴 머리라서 다행이었지. 인내심으로 바닥에 떨어진 걸 모아 데이터 분석할 정도의 양이 됐을 때 넘겼어. 한 여사에게 미주 씨 쓰던 칫솔 같은 걸 챙겨 달라고 말하려니 집안의 치부를 알리는 꼴이라 쪽팔렸거든.”

현재 제집의 살림을 맡아 주는 한 여사는 본디 차씨 집안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나름대로 책잡힐 짓을 안 하고 살았다 여겼는데.

치밀했다. 연희가 속내를 이토록 오래 숨긴 채 제 옆에서 사람 좋은 척 웃고 있었다니.

“있지, 연호한테 이랬어. 윤미주라는 계집애가 만에 하나 남편 딸이라는 결과가 나오면 때가 됐을 때 남편 보란 듯이 죽여 버리자고.”

“악마의 딸이 아니라서 죄송하네요.”

“물론 아쉽기는 해. 하지만 연호가 이용 가치가 없어진 널 그래도 옆에 두길래 나는 그냥 걔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뒀어.”

“동생 좀 말려 주지 그랬어요. 덕분에 제가 죽지 못해 살고 있는데.”

미주가 날카롭게 연희를 책망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가 처음 봤던 그 원형 테이블에는 그 누구도 같은 생각 하는 사람이 없었네요. 나만 신나 있었어. 차현에 합격했다고 들떠 있었는데.”

“난 이미 알고 있었어. 그날 그 자리에서 연호가 너한테 반했다는 걸.”

“…….”

미주는 계속 이상함을 느꼈다. 연호와 핏대를 세우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던 그 밤에 그가 말하던 것과 연희가 하는 말이 달랐다.

“연호 씨는 내게 이랬어요. 내가 진수오 딸이라면 자기 옆에 두고 매형을 협박하는 수단으로 삼다가 수틀리면 죽일 생각이었다고.”

“…그래? 연호는 네가 누구든 관계없다고 말했었는데… 그래서 나는 내 동생이 너한테 홀딱 빠졌다고 생각하면서 멍청한 놈이라고, 고작 계집애 하나에게 빠져서 큰일을 그르친다고 욕을 한 적도 있었거든.”

“…….”

“생각해 봐. 재벌 3세의 아내라는 자리, 얼마든지 정략적으로 써먹기 좋은 자린데 세상 잘난 척은 다 하던 연호가 너랑 결혼할 줄 솔직히 몰랐어.”

연희의 말에 정말 거짓이 없다면 말이다. 그날 밤, 차연호가 내뱉었던 끔찍한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다는 걸까?

제가 그랬던 것처럼 연호 역시 사랑해서 그랬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 그저 질투에 눈먼 나약하고 못난 남자라서 그랬던 걸까?

“관장님이 날 찾아왔을 때, 그건 차연호의 정부情婦로서 인정한다는 뜻이었군요.”

“…맞아. 살림까지 차렸길래 연호한테 얘는 좀 다르구나 싶었지. 혼인신고부터 몰래 했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뒀어. 연호가 금방 식어 버리면 어차피 서 전무한테 팽당한 너니깐 적당히 위자료 쥐여 주고 내쫓으려고 했었는데.”

“눈치 없이 버텨서 죄송하네요.”

미주의 말에 연희가 웃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됐어, 이젠 나도 자기 좋아해. 아무튼 차연호를 위한 변명을 누나인 내가 하자면 내 동생, 너한테 반해서, 널 갖고 싶어서 이 모든 일을 시작했을 거야. 그러니 용서해 줘, 미련한 놈을.”

미주는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연호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의 크기만큼 증오하기도 했다. 시작도 애증이었는데 그 끝도 애증이 될지 모르는 뫼비우스 띠.

이제는 그를 미워하는지 좋아하는지도 불명확한 경계 속에서 말이다. 미주는 연호에 대한 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애끓는 감정에 매일 밤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날 밤에 서로의 가장 추한 민낯을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연희 말에 입을 다물었다.

연희는 대답 없이 복잡한 표정을 짓는 미주를 보면서 그만 화제를 돌려야 될 것 같다 여겼다. 그래서 저를 여기로 부른 이유에 관해 물었다.

“자 그럼, 질문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한 것 같고. 이젠 내가 물어봐야 할 시간인 것 같아.”

“잠깐 물 한 잔 마시고 답을 해도 괜찮을까요?”

무거워진 분위기를 미주가 환기하려고 들자, 연희도 장단에 맞춰 줬다.

“당연하지. 나도 사실 목이 탔어. 자기가 어지간히 심문했어야지.”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며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건네주는 연희를 보면서 미주는 마른 목을 축였다. 이제 연희의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자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나를 보자고 여기로 부른 진짜 이유가 뭐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당신 남편, 나 그냥 둘 수 없어. 심지어 방금 우리 아빠의 죽음에 연루된 걸 알았으니 더더욱 그를 그냥 이렇게 내버려 둘 수 없어요.”

“그래서 어쩌고 싶은데?”

미주는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한 얼굴로 연희에게 진우가 알려 준 비밀을 들려줄까 했다.

“회장님의 죽음에 회장님이 있어요.”

늘 언제나 우아하던 연희의 얼굴이 제 말을 듣자 파르르 떨리면서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진우 오빠가 그동안 진 회장의 개가 되어서 여기저기 물어뜯고 다녔지만, 알다시피 진우 오빠는 그냥 똥개가 아니에요.”

“그래, 잘 알지. 서 전무의 가슴 안에 있는 그 야망을.”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진수오 옆에서 10년이 넘었으니 뭔가 알아낸 것도 있지 않을까요?”

“말해 봐, 회장이 회장을 어떻게 죽였는지.”

분노로 가득 찬 것 같은 연희가 조곤조곤 대답을 종용했다. 미주는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는 하나씩 비밀을 풀어놓았다.

“시작은 김 기사라고 했어요. 그동안 오빠는 김 기사와 관계가 꽤 돈독했는데 우연히 술을 마시다가 만취한 그가 말실수했다고 해요.”

“그 새끼였구나, 아버지 죽인 게.”

연희의 태도를 보자니 그녀 역시 아버지의 죽음이 뭔가 석연치 않음을 그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말하기 쉬워질 듯해, 더는 뜸을 들이지 않고 단숨에 진우에게 들은 것을 전했다.

“회장이 회장을 처리했다, 그게 김 기사가 한 말인데 뭔가 이상하다고 여겨서… 이 부분은 사실 오빠가 불법을 저지른 건데 김 기사 집을 몰래 뒤졌대요.”

“뭔가 나왔구나.”

미주는 다 밝힐 수 없는 비밀 하나는 그대로 둔 채 잠시 한 템포 쉬는 척하며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걸 가지고 넌지시 김 기사를 회유했대요. 대체 선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렇게 둘이 빅 딜을 한 거죠.”

미주는 천천히 진우에게 들은 진 회장의 패륜적인 원죄에 대해 연희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기로 했다.

“제가 연호 씨에게 듣기로 불행히도 제 시아버지께서는 어느 날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말 끊지 말고 빨리 말해 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연희가 재촉하자 미주는 조금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자는 회장님 방에 몰래 들어가 그가 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고…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지금은 제가 사는 집을 돌봐 주시는 한 여사님이 회장님이 돌아가신 걸 발견하신 거죠.”

연희는 눈물을 흘리며 제 아버지가 죽었던 날을 회상이라도 하는 듯 담담하게 말해 주었다.

“내가 아는 건 김 기사, 남편 친구 동생이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잘 봐줘서 옆에 두고 거뒀어. 원래 우리 아버지 운전기사였거든.”

“은혜를 원수로 갚았네요.”

“아버지가 죽은 걸 알고 남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절규했었지. 그런데 아버지 죽음이 석연치 않다고 여긴 외삼촌이 부검하자고 하니 감히 고인을 모독한다고 지랄발광을 해서 외삼촌이랑 그때 척을 지게 된 거야.”

분노하는 연희의 마음을 이해하며 그녀의 외가에 대해 슬쩍 물었다.

“예전에 들은 게 있어요. 저한텐 시외삼촌 되시는 사장님께서 원래는 연호 씨를 탐탁지 않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지지해 주고 계신다고.”

“그게 그때부터였어. 외삼촌은 사실 연호가 우리 어머니가 낳은 자식이 아니니 자기 조카로 인정할 수 없다, 늘 그랬는데 진수오랑 적이 되면서 자기도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한 거야. 연호를 차현 회장으로 만들면 자기한테도 콩고물 떨어지는 게 분명히 있을 테니깐.”

“정말, 뭐랄까? 재벌가는 어쩜 다들 그렇게 하나같이 계산이 빠른 걸까요?”

미주의 물음에 연희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슬픔을 지워 내면서 알려 줬다.

“다들 그렇게 보고 배우면서 자라서 그래. 만약에 연호랑 미주 씨 사이에 다시 기쁜 일이 생긴다면 자긴 안 그렇게 키울 것 같지? 안 그래…… 결국, 차현에서 태어난 아이는 차씨니깐 어쩔 수 없이 미래에는 우리가 되어 있을 거야.”

연희의 뼈 있는 말에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온화하게 미소만 짓고 있던 미주는 손에 든 생수로 갈증을 짧게 해소했다. 그리고 원래 그녀를 여기로 부르려고 했던 목적을 꺼내 들었다.

“제 시아버지 일은 오빠가 알려 줘서 저도 알게 됐지만 사실, 관장님을 뵙자고 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어요.”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고 있던 연희가 손수건을 손에 쥐면서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미주는 보았다. 차연희는 권력을 탐하는 여자가 아니라 저와 같은 복수를 꿈꾸는 여자라는 걸 말이다.

연호와 똑같은 흑요석 눈동자 속에서 읽히는 그녀의 오래된 분노. 남편의 오랜 외도와 혼외자의 존재, 그리고 아버지의 석연치 않은 죽음 속에서 그녀는 진수오를 파멸시킬 날을 숨죽이며 기다렸던 게 분명했다.

“저 이제 알 것 같아요. 관장님이 조금 전에 하신 말.”

“하도 말을 많이 해서 무슨 말을 했을까?”

“이날이 오길 꽤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말씀하신 거요.”

연희가 연호를 차현 회장으로 앉히려고 계획하는 것은 분명 100% 순수하게 동생이라서 연호를 지지하기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진수오를 끌어내리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권력을 탐하라고, 본디 네 것인 왕좌를 뺏으라고 옆에서 연호를 현혹했는지도 모르지.

미주는 머리를 한 번 털면서 진우가 은밀히 알아내 알려 준, 차연희를 제 쪽으로 끌어들일 패를 꺼내 보였다.

“그날은 원래 회장님 내외분과 저희 부부가 함께 식사하기로 했던 날이었는데, 관장님께서는 그 자리에 오지 못하셨죠.”

“…설마.”

“네, 맞아요. 그 사고, 관장님이랑 같이 사격 동호회 하시는 분이 실수로 총알을 발사해서…….”

총에 대해서 정말 하나도 모르는 미주가 말하는 걸 듣던 연희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 친구가 총알을 장전해 놨는데, 실수로 총을 떨어뜨렸거든. 근데 하필이면 총구가 내 쪽이라 격발된 총알에 스치듯 살짝 맞았지.”

“……아, 전문 용어는 전혀 몰라서. 이제 아시겠지만 그게 실수가 아니었어요.”

“진수오 이 새끼, 내가 슬쩍 찰과상만 입어서 얼마나 아쉬웠을까?”

연희의 마음을 안다는 듯 미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속 거침없이 말을 이어 갔다.

“알고 보니 연호 씨도 내게 거짓말을 했더라고요. 교통사고로 가볍게 다쳤다고, 입원한 김에 종합 검진까지 받는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큰 사고여서 저도 놀랐어요.”

“큰 사고는 아니었어. 진짜 스쳤을 뿐이야. 그리고 임산부한테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어. 그 부분에 있어선 나도, 연호도 어떤 숨겨진 계략이 있어서 숨긴 건 아니야.”

이해한다는 듯 미주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건 제 추측이지만 만약 그날 변고가 생겼다면 내가 충격받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나랑 미주 씨랑 한 큐에 보내 버리고 싶었나 보네.”

“진수오는… 내가 연호 씨 아이를 낳는 게 어쩌면 싫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말끝을 흐리는 말투에 물기가 배어 나왔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연희에게 말했다.

“일부러 남편 있는 앞에서 저와 재민 오빠 사이에 뭔가 있었다는 식으로 흘려서… 이건 그저 제 생각이지만 남편이 그 악마의 말에 조금 흔들렸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요.”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절대로 실수가 아니고 다 계획해서 말실수한 척한 걸 거야. 근데 설마… 그 일이 뭔가 불씨가 돼서 연호와 트러블이 생겼고 여기까지… 내 조카를 잃는 일이 된 건 아니지?”

연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미주는 조금 초연하게 대답했다.

“의사는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했지만, 알아요. 시작은 저였거든요. 그날 관장님이 2층 인테리어 보여 주겠다고 해서 서재에 올라갔을 때, 오빠와 진 회장의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리고 계속 고민하고 힘들어했고…….”

“세상에, 서재에 대체 뭐가 있었길래?”

“그냥 오래된 책이었어요. 편지가 있었고, 나는 알 수 있었어요. 그게 우리 엄마가 쓴 거라는 걸.”

“미주 씨! 아니, 미주야! 난 정말 몰랐어! 내가 알았다면 널 거기로, 서재로 데리고 가지 않았을 거야. 믿어 줘. 설마… 조카를 잃은 게 내가 널 2층으로 데려가서라고 말하지 말아 줘.”

저를 붙잡고 조카를 잃은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고모는 진심인 듯했다. 정이 깊어 제 잘못인 양 절규하는 연희의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져 미주 역시 마음이 아팠다.

“처음에는 나 빼고 모두를 탓하고 싶었어요. 맞아요, 다 남 탓으로 돌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남편을, 차연호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는데 사실은 다 내 잘못이라는 걸 이젠 알아요.”

“아니야.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하지만 이 모든 비극을 시작한 사람이 있는 건 미주 너도 그리고 나도 이젠 알지.”

눈물을 흘리는 연희에게서 제가 보였다. 각기 다른 이유로 한 남자를 향한 복수심만 남은 두 여자.

“그래서 관장님, 한국 사람이면 다 아는 말이 있잖아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서리 말고, 이왕이면 우박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미주는 흐릿하게 웃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제 개인적인 복수예요. 그러니 남편은 이 일에서 제외할 거고. 이유는 더 잘 아실 테니깐.”

“…좋아, 나도 연호는 빼 달라고 말할 참이었어. 일이 잘못됐을 때를 생각해야지.”

어쩌면 한 남자를 조금 다른 결로 사랑하고 있는 두 여자가 마음을 모았다. 그래서 미주는 손을 잡은 연희에게 일이 성사되었을 때 각자가 가지게 될 것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럼, 제안부터 드리죠. 우선 제가 생각한 건 관장님이 차현 그룹 임시 회장이 되셔서……”

진우에게 말한 대로 연희에게 계획을 천천히 알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녀는 놀라는 표정을 여러 번 지으면서 제안에 동의했다.

“좋아, 중공업은 서 전무가 가져가. 하지만 건설은 안 돼.”

“당연하죠. 차현 그룹 모태이자 지주회사가 차현 건설인데, 중공업만 오빠한테 주세요.”

“뭐야, 제일 알짜 가져가면서 생색은.”

“요새 차현 바이오가 제일 핵심인 거 아시면서. 연호 씨가 얼마나 공들이고 있는지 아시잖아요?”

두 여자는 승리했을 때를 생각하며 계열사 분리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자, 그러면 어떻게 첫 단추를 끼울 셈이지?”

연희가 이 위대한 계획의 시작에 관해 묻자 미주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조용히 운을 뗐다.

“저한테 회장님 여성 편력에 대해서 여러 번 스치듯 말씀하신 게 생각나서요.”

연희는 알 만하다는 듯 피식거리면서 대꾸했다.

“그 사람 눈을 속이려면 꽤 신중히 초이스해야 할 텐데.”

“그래서 적절한 사람을 찾아내면 직접 만나 볼까 해요. 여자 대 여자로 이야기를 해 보든가, 아니면 같이 자서라도 꼬셔 볼까 하는데. 문제는 우리가 찾는 조건에 맞는 여자가 여자랑 섹스하는 취향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죠.”

농담 속에 담긴 계략에 두 여자가 웃으면서 계속 꽤 상스러운 말을 해 댔다.

“미주 씨가 여자랑 잔다고? 연호 질투심 엄청날 건데. 남자 여자 안 가릴걸?”

“뭐, 뭣 하면 끼워 줘도 되고요. 여자 둘에 남자 하나. 보통 남자들의 판타지 아닌가?”

“글쎄, 연호 취향은 나도 몰라서. 부부끼리 알아서 하든가.”

복수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겠다는 뜻에 연희가 손사래를 치면서 질겁하자 미주는 웃었다.

“저도 농담이에요. 여자도, 쓰리썸도 제 취향은 아니라. 솔직히 차연호라는 남자 하나만으로도 벅차요, 저는.”

마지막에 미주는 연희에게 부탁하듯 말했다.

“아무튼, 남편은 관장님이 잘 설득해 주셨으면 해요.”

“그래, 연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서 전무랑 손잡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야.”

“그럼 세팅하는 건 진우 오빠, 아니 서 전무님과 상의해서 잘 준비해 놓을게요. 당분간은 일부러 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을 테니, 관장님은 누가 물어도 계속 제가 반쯤 미친 상태로 중증 우울증으로 힘들어한다고 얘기해 주시면 돼요.”

고개를 끄덕이던 연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뭔가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주저하다가 미주에게 입을 열었다.

“나는 있지, 미주 씨가 모든 게 끝나고 나서도 계속 내 동생 와이프였으면 좋겠어.”

미주는 씁쓸한 얼굴로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괜찮아, 다 이해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마음. 하지만 사랑하잖아? 더는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았으면 해.”

“…….”

“그리고… 아마 연호가… 이건… 말 안 했을 건데…….”

뜸을 들이는 연희가 너무나도 슬픈 표정을 짓더니 눈물을 흘리며 힘겹게 말했다.

“자기가 의식 없이 누워 있는 동안, 하아… 연호가…….”

“괜찮아요, 편하게 말하세요. 더는 놀랄 것도 없으니깐.”

아마 죽은 아이 이야기를 연희가 꺼내려는 것 같았다. 미주는 담담한 얼굴로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 손으로 직접… 그 작고 어린 걸… 보내 줬어. 햇빛 좋은 날에, 우리 선산 가장 양지바른 곳에… 잘… 묻었어. 아빠를 용서해 달라면서…….”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연희가 전하는 사실에 미주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눈물을 훔치며 잠시 뜸을 들이던 연희도 조심스럽게 숨겨진 슬픔을 전했다.

“이름을… 지어 줬어. 유주라고, 차유주라고 묘비에…….”

“…….”

“자기한테는 나중에 알리려고 했대. 지금은 아마 받아들이기 힘들 거라고…….”

“예쁜 이름이네요, 유주. 잘 지었다. 차유주. 정말 잘 지었어요.”

주황색으로 물들고 있는 해 질 녘에 미주는 병실 창문을 고요하게 보며 연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계속 되새김질했다.

‘미안해. 미안해, 초록아. 널 만나러 가야 하는데 엄마는 아직 너한테 갈 수가 없어.’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은 일이 있어서 너한테는 조금 있다가 갈게.

벽에 걸린 시계가 7시를 가리키기 전에 연호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무슨 일이 있었고 세상은 어찌 돌아가는지 말할 것이고 저는 심드렁한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제 자식을 직접 땅에 묻은 아비의 심정 또한, 품었던 아이를 잃은 어미 못지않겠지.

남편은 억지로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아내는 그런 남편이 미웠고, 그를 증오하며 절대 용서하지 못할 마음으로 저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미주도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연호 역시 아이를 잃은 아버지라는 걸. 그의 비통함 또한 저 못지않을 테지만 그저 모든 걸 연호 탓으로 돌려 원망하고 싶었다.

‘사랑하지 말 걸 그랬어. 처음 다짐대로 그저 그가 날 이용하듯 나도 그를 이용했어야 했는데.’

처음부터 두 사람의 이야기가 클리셰를 벗어난 재벌 남자와 신데렐라의 쿨한 로맨스 소설이길 그토록 바랐건만. 예상과 한 치의 벗어남 없이 너무 흔하디흔해 이젠 지겨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미련한 제 이야기는 너무 뻔해서 팔리지도 않는 글이었다.

차라리 놓을 수 있다면, 이 들끓는 애증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하늘로 사라질 수만 있다면 그가 이토록 밉지 않았을 텐데.

‘차연호 네가 날 정상에 가깝게 고쳐 놔서 그래. 약도 안 먹고, 술도 안 마시고, 칼로 몸도 이젠 안 긋잖아? 네가 아픈 나를 고쳐 줘서 감히 망가질 수도 없으니 네가 다 책임져야 해.’

이미 한번 바닥 끝까지 내려가 본 적 있기에 미주는 두 번은 저를 망가뜨릴 수 없었다. 연호에게 구원받았으니 차라리 그가 날 망가뜨려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누나 왔다 갔다 들었어. 어때, 기분은 좀 괜찮아?”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와 용서를 구하는 얼굴로 저를 보는 연호를 보면서. 미주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처음으로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럭저럭, 나쁘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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